로마 제국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 Tiberi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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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TIBERIVS CAESAR AVGVSTVS[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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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기원전 42년 11월 16일 | ||
로마 공화국 로마 시 | |||
사망 | 37년 3월 16일 (향년 77세)[2][3] | ||
로마 제국 미세눔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
14년
9월 18일 ~
37년
3월 16일 (22년 5개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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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 | 아우구스투스 | ||
후임자 | 가이우스(칼리굴라)[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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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ecd21> 존호 |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디비 아우구스티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TIBERIVS CAESARㆍDIVI AVGVSTI FILIVSㆍAVGVSTV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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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TIBERIVS CLAVDIVS NERO[5]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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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BERIVS IVLIVS CAESAR AVGVSTVS[6]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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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빕사니아 아그리피나 (기원전 19년 결혼 / 기원전 11년 이혼) | ||
대 율리아 (기원전 11년 결혼 / 기원전 2년 이혼) | |||
자녀 |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티베릴루스[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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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니쿠스(입양) 네로 카이사르(후원, 입양), 드루수스 카이사르(후원, 입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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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친부) 아우구스투스(양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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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 리비아 드루실라 | ||
형제 |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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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 경력 |
칸타브리아
트리부누스 밀리툼(기원전 25년) 재무관(기원전 24년) 법무관(기원전 16년) 갈리아 총독(기원전 16년) 집정관 I(기원전 13년) 집정관 II(7년) 집정관 III(18년)[9] 집정관 IV(21년)[10] 집정관 V(31년)[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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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여 권한 |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기원전 6년 6월 26일 ~ 기원전 1년 6월 25일)[12]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서기 4년 6월 26일 ~ 37년 3월 16일)[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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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페라토르 | VIII(기원전 9년, 기원전 8년, 서기 6년, 8년, 9년, 11년, 13년, 16년) | ||
개선식 | 정규 개선식 I(12년 10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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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제2대 황제.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자 상속자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이자 황후인 리비아 드루실라가 아우구스투스와 재혼하기 전에 전(前) 남편 사이에서 낳은 친아들이다.
2. 상세
"
원로원 의원 여러분, 나는 인간의 일을 수행하는 한 인간이며 저의 큰 소망은
프린켑스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리고 후세들이 이러한 내 뜻을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내가 조상들에게 가치 있는 사람이고, 여러분의 권익을 위해 신중하며, 위험한 상황에서 흔들림이 없고, 국가를 위한 일이라면
인기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과 후세들은 내 명성에 넘칠 만큼 충분히 공헌하는 겁니다."
타키투스, <연대기>, 티베리우스 4-38, 티베리우스의 원로원 연설 중 일부[14]
타키투스, <연대기>, 티베리우스 4-38, 티베리우스의 원로원 연설 중 일부[14]
선대 황제이자 양부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서 로마 역대 황제 중 최초의 부자세습 방식[15], 최초의 공동황제 즉위[16] 후 단독 세습 방식[17]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고대 로마가 능력 본위 사회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평가처럼 부자세습으로 즉위했어도 능력 면에서는 누구나 알아주는 먼치킨답게 본인의 역량을 확실히 보여줬다. 세습 직후, 선황의 유언장 공개로 징검다리 황제로 이미지가 구겨지고, 안팎에서 벌어진 항명과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처형 사건 배후 의심 등으로 큰 위기를 겪음에도, 이를 모두 해결했다. 이어 아우구스투스의 실정과 오판으로 벌어진[18] 마우레타니아 왕국 내전과 타크파리나스 반란을 진압해 군인황제시대까지 북아프리카 해안 일대의 치안을 확립하는 등 초기 원수정의 필요성을 로마군, 원로원에게 증명했다. 행정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제대로 이어받아, 이를 매뉴얼화하여 관료제 기반을 제시해 황제의 원격 통치만으로도 광대한 제국의 계서제를 정착시켜, 로마 제국을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고 평가받았다. 또 오랜 기간동안 제 수명을 다한 국방, 행정, 세금 정책을 마련해 이후 원수정 황제들에게도 많은 부분에서 참고사항이 됐다. 덕분에 당대의 평가는 최악이었을지라도 후세에 이르러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기틀을 잡았고, 티베리우스는 그것을 정착시켰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런 평가와 별개로 당대 사람들에게 살아생전 폭군, 위선자 등의 온갖 소리를 다 들었고, 폐쇄적인 성격과 카프리 섬 은둔 통치로 인해 역대 로마 황제 중 종손자 칼리굴라와 함께 가장 많은 헛소문에 시달렸다.[19] 그리고 이런 소문은 계속 퍼져나가 죽은 이후에도 업적에 비해 과소평가되거나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근대 이후 그가 재평가를 받으면서 현재는 역대 로마 황제 중 명군과 폭군 모두의 모습을 지닌 입체적 황제로 불린다.
하지만 티베리우스의 제위 계승은 선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희망이 아니었고,[20][21] 본인도 그 책임이 막중해 망설이는 상황에서 황제가 되기 전부터 원로원에게 주는 것 없이 대놓고 미움을 받은 탓에 여론도 최악이었다. 그 결과,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생전 공동황제가 되어 원활하게 그 직위를 이어받았음에도 즉위 시작과 동시에 군대 반란을 비롯해 수많은 음모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다가 후계자들인 조카 게르마니쿠스와 친아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연이어 사망했는데, 친아들 사망 이후부터는 나폴리에 머물다가 아예 세상과 연을 끊고 섬에 틀어박혀 원격조정 방식의 통치으로 로마를 통치했다. 따라서 그의 재위 후반은 로마 역사상 비열함과 악랄함을 모두 갖춘 간신 세야누스의 음모와 활개 아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 아우구스투스 일가가 여자 황족들을 빼고 거의 전멸하다시피하고 만다. 여기에 더해 티베리우스가 근위대를 앞세운 공안통치를 하면서 근위대장 세야누스의 음모에 장단을 맞추는 일까지 벌어져 후반기부터는 연이은 친족 숙청, 원로원과 황제의 대립 등으로 상당히 긴장감이 높아졌다. 그래서 당대 사람들과 타키투스로 대표되는 제정 시대 로마인들에게 이 부분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고, 현대에 이르러 로마사 연구자들에게 재평가를 받음에도 그의 재위 후반기 통치 스타일은 이후 로마 제정에 나쁜 선례를 만들었다고 비난받고 있다.
이런 국정 운영 스타일처럼 개인적 삶 역시 상당히 모순되고 골치아픈 세월의 연속이었다. 친부모와 양부를 통틀어 가계만 보면[22] 당대 로마 최고의 명문 귀족 가문 자제로 로마 최고 부촌에서 태어났지만, 단 한명 때문에 가족사가 완전히 꼬여서 일생의 대부분을 괴로움에 시달리며 살아야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보면 확실한 결점이 있었다고 해도 많은 부분에서 상당히 건전한 사람이었다. 티베리우스는 젊은 시절 수려한 외모, 뛰어난 지력과 교양, 높은 도덕심과 검소한 생활을 한 탓에 미움을 받아도 전형적인 공화정-초기 원수정 시대의 엘리트 귀족으로 평가받았다. 아울러 10대 후반부터 상당한 수준의 행정실무처리능력과 군사적 능력을 선보였고, 사생활에 있어서도 굉장히 깨끗했다. 그리고 로마 귀족들의 주요 덕목으로 여겨진 건전한 심성과 책임감 역시 상당히 뛰어났고, 주변 측근들의 기록[23]이나 원로원의 비문 등에서 드러나듯 양부에 대한 효심과 율리우스 가, 클라우디우스 가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했다.
역대 로마 황제 중 특이하게도 직전의 두 선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나 훗날 그를 많이 참조한 사람과 달리 자신의 권위를 집요하게 거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티베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 이전의 로마 황제 중 유일하게 자신의 신격화를 거부했다.[24][25] 그 밖에도 티베리우스는 등극 후에도 황제로 보이지 않기 위해 극도로 조심했으며, 나중에 그의 인내심이 바닥나 버리는 치세 후기에 이르기 전까지 원로원의 제1시민을 자처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역사가들의 악평이 집중되었는데, 당시 식자층이었던 원로원 의원들에게 평이 아주 좋지 않았던 데다, 평소 검소한 정책을 이어가다 보니 오락거리를 원하던 시민들로부터의 평가도 최악이었기 때문이다.[26][27] 이런 악평 덕분에 당대에부터 역대 로마 황제 중 가장 많은 루머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근대에 들어 티베리우스의 명령서나 속주에서의 행적[28]이 재발견되면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아직도 그의 행적에 대한 논란은 많지만, 그가 역사상 손에 꼽힐 정도로 유능한 행정가였다는 사실에 대한 이견은 이제 없다.
3. 생애
- 자세한 것은 티베리우스/생애 문서로.
4. 성격
"가장 우울한 사람"
대 플리니우스, XXVIII.5.23
대 플리니우스, XXVIII.5.23
- 티베리우스의 최측근 출신인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를 비롯한 당대 로마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젊었던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놀라울 정도로 성실하고 부지런했다고 한다. 또 즉위 전부터 죽을 때까지 공공도덕과 예의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어릴 때부터 과묵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따라서 주변 사람들에게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냉정하고 비정한 사람으로 여겨졌는데, 이런 성격은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고 한다. 그러나 때에 따라 굽히기도 하고 적당한 인사치레와 가식에 능했던 양부와 달리 시종일관 좋고 싫고가 명확했다. 또한 양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사랑과 정을 자신의 명예, 가문의 명예 못지 않게 중요시하였고 그에 따른 책임감이 대단했다고 한다. 공공에 대한 책임감도 상당했던 만큼 티베리우스는 황제가 되기 전까지는 여러 번의 승전으로 얻은 전리품 등을 아우구스투스 포룸에 있는 카스토르 신전 재건 비용으로 기부할 정도로 인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즉위 후에는 건물 건축, 경기와 행사 주최 등 돈 들어가는 일에는 인색하다고 까일 정도로 아꼈고, 말년에는 다른 사람들이 경기나 행사를 개최하는 일도 못마땅해 했다.
- 티베리우스는 확실히 폐쇄적이고 낯을 많이 가렸다. 그런데 이런 성격은 갑자기 생긴게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유아기 때부터 아우구스투스 밑에서 자랐고 친어머니가 리비아 드루실라임에도 본래부터 사교적이지도 않았고, 사교 모임 등에 참석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이런 혼자 있기 좋아했던 성격은 재위 말년에는 극에 달하게 됐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이런 폐쇄적이고 낯을 가리는 성격은 그가 원로원과 민중 모두에게 비정하고 냉혹한 이미지가 굳어지는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됐다. 추가로 그는 아우구스투스 부부를 비롯한 자신의 가족들, 네르바 황제의 할아버지 같은 극소수의 오랜 친구, 파테르쿨루스 등 극소수의 최측근 외의 사람들과는 교류가 적었다.
- 도통 마음을 쉽게 여는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친동생 드루수스 부부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다정다감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20대, 30대 시절 아우구스투스 부부, 동생 드루수스 부부와 그의 첫 아내 빕사니아와 사적 시간을 보낸게 대부분이었고, 제수씨 소 안토니아가 사별 이후에도 홀로 조카들을 키우는 것을 굉장히 존경했다고 한다. 또 사생활적으로도 주변 측근들과 정적들도 놀랄 정도로 단점이 없어서 결혼 전까지 게르마니아 전쟁 와중에 병사들에게까지 “베스타 여사제 같다”고 반놀림을 당할 정도였다고 한다.
- 어린 시절부터 과묵했지만 라틴어와 그리스어 실력이 뛰어났고, 그리스-로마 문학을 좋아한 '문학 소년' 이었다고 한다. 이런 티베리우스의 문학소년적 기질은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고 하며, 젊은 시절부터 독서와 시짓기, 작문 등은 티베리우스의 취미 중 하나였는데 이는 그가 교양이 상당한 사람으로 평가받은 이유였다. 특히 웬만한 교양인들도 쉽게 하지 못하던 ‘좋아하는 그리스 시인들의 문체로 시문 짓기’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지었는데, 이 솜씨는 단순히 따라하기 수준이 아닌 그의 문학적 기질과 실력을 발휘할 정도였다.
- 어릴 적부터 로마인이 좋아하는 유흥 문화에 흥미가 거의 없기로 유명했다. 일평생 검투사 경기는 질색해 경기장 근처도 가지 않았고, 가문 홍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검투사 경기 후원을 할 때에도 피를 흘리는 살육이 동반된 격렬한 경기나 맹수쇼는 열어주지 않고, 얼굴도 비추지 않았다. 이런 점은 양부 아우구스투스,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 친동생 대 드루수스와 상당히 비슷했기 때문에, 개인 취향상 검투사 경기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평가받는다. 그런데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일가 사람들이 좋아한 전차 경기, 무언극 관람, 서커스 경기 관람 역시 관심이 크게 없어, 의무로 강제출석을 해야 할 경우 외에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아우구스투스 후계자가 된 서기 4년 이후에도 비슷해, 서커스 경기 때에 등장할 때에도 그냥 인사 정도만 하고 곧바로 퇴장했고, 황제가 된 뒤에는 얼굴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황궁 안에서 집무를 보면서 결과만 보고 받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를 싫어한 정적이나 그를 잘 모른 대중들은 티베리우스를 재미없고 비정하고 짠돌이 같은 증거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 남들보다 5년 이상 빨리 공직에 취임할 수 있는 특권에 따라 명예로운 경력을 일찍 시작할 때부터 얻은 별명이 "애늙은이"일 정도로 진지하고, 농담을 거의 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 젊을 적부터 부하를 대할 때, 출신 가문, 추천인, 보유 직책 등이 아닌 그 사람의 성실함 하나로 부하를 대우해, 이런 점에서 백인대장, 병사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다만, 파테르쿨루스가 평했듯이, 이런 점에서 판박이였던 동생 대 드루수스와 달리 전반적으로는 따뜻한 느낌은 없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보통의 파트리키, 노빌레스 출신 로마 귀족이나 부유한 기사계급 출신 원로원 의원들과 달리 이 점에서 큰 존경을 불러 일으켰고, 이런 점 때문에 그가 서기 4년 게르마니아 전선에 다시 나타났을 때 이를 기억한 베테랑 장병들과 퇴역병 가족들은 눈물까지 보였다.
- 양부 아우구스투스와 마찬가지로 재위 내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그리스어를 비롯한 외국어에서 차용된 단어 사용을 공문서와 공식 칙령 표기에 넣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티베리우스의 모국어 사랑은 아우구스투스와 달리 재위 초기 원로원으로부터 ‘지나치게 재미없고, 과도한 매너리즘과 현학적 표현’이 가득하다고 비난받았다. 그런데 정작 티베리우스는 외국어인 그리스어에 굉장히 능통했고, 모국어였던 라틴어 실력 역시 상당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대 로마인들은 그의 이런 모국어 애용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오늘날 학자들에게도 티베리우스의 이런 라틴어 공문서 사용은 긍정적인 측면이 많았다고 평가받는다.
- 티베리우스는 상당한 미남이었고, 타고난 파트리키였음에도 사치와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후임자 칼리굴라[29]나 그를 롤모델로 삼은 도미티아누스[30]와 달리 젊은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평범한 재질로 만들어진 투박한 토가 차림을 항상 유지했고, 일상생활에서도 투박한 토가 차림이나 평범한 복장들을 굉장히 선호했다고 한다. 아울러 요란하거나 이국적인 악세사리에 관심도 없었고, 비단 재질로 만든 의상이나 고급 재질로 만든 토가에도 흥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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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젊은 시절부터 아첨꾼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원로원 의원들이 인사를 하기 위해서든 공무 때문이든 간에 자신이 탄 가마에 접근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원로원과 상류층 뿐만 아니라 로마 시민 대부분에게 행동거지가 문제있는 사람으로 여겨졌고, 죽을 때까지 인기가 진짜 없었다. 또한 "주인님(도미누스)"이라는 칭호를 누군가가 아첨하며 자신에게 부르자 화를 내며 "도미누스는 우리 집 노예들이 나를 부를 때나 쓰는 말이다! 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반면 그는 자신에 대한 욕, 비방, 조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쿨하게 넘기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말하고 생각하는 자유가 국가의 척도"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은둔 이후에는 고발장에 대해서만은 예전과 달리 민감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 상당히 이성적이었던 사람이라서 신이나 종교적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소홀히 여겼다. 그러나 점성술만은 신봉했고 젊은 시절부터 점성술을 공부하면서 토론을 즐겼다. 따라서 이때 얻게 된 멸칭 중 하나가 '이단자'였다고. 젊은 시절 티베리우스는 공직 다 내려놓고 로도스 섬에 가서 틀어박혀 지낼 때도 점성술 책인 호로스코프를 끼고 살았다고 하며, 카프레아이 섬 은둔 이후에는 점성술을 가지고 전문가들과 학자들을 불러놓고 토론까지 나눌 정도였다. 따라서 풍자작가 유베날리스(Iuvenalis)는 티베리우스를 두고 "카프리 섬에서 점성술사들에 둘러싸인 늙은 지배자"라고 비웃기도 했다. 아울러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세계가 완전히 운명에 의해 지배된다고 믿었고 천둥에 기겁하곤 했다고 한다. 또 그는 하늘이 갑자기 어둠침침해지면 번개를 막아준다고 여겨지던 월계관을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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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후대 로마인에게 어둡고 은둔적이며 침울한 통치자의 대명사로 불렸지만, 동시에 가정사 문제 등으로 사후 동정도 받았다. 이유는 티베리우스가 운명적으로 황제가 됐지만, 황제가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지 않았고 인기를 누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으로 기억됐기 때문이다. 실제 삶 역시 이 표현이 적합했다. 티베리우스의 성격은 내성적이고, 무척 조용했지만, 재위 중기 이후부터 모두 우울하고 침울했다.
대 플리니우스는 티베리우스를 여러 가지 이유로 가장 우울한 사람이었다고 평했던 것도 이런 이유였다.
- 21세기 들어서는 상당부분 과장되긴 했지만 그의 단점으로 거론되는 우울증, 과도한 음주, 과도한 성행위, 분노 조절 장애 등을 감안할 때 티베리우스가 장기간의 참전 경험과 강제 이혼으로 인한 PTSD를 앓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몇몇 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
5. 외모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외모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31]
먼저 티베리우스는 크고 건장한 체격을 가졌으며, 어깨와 가슴은 넒고 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균형잡혀 있었다. 왼손잡이인지 몰라도 오른손보다는 왼손을 더 잘썼는데, 손가락으로 새로 딴 싱싱한 사과를 뚫을 정도로 힘이 세고 손가락을 튕기면 소년이나 청년 머리통을 부술 수 있었다고 한다.
얼굴은 잘생기긴 했지만 피부가 희였고 때때로 뾰루지가 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뒷머리를 목덜미 아래로 길게 길렀는데 이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남자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는 눈이 상당히 컸고, 잠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밤의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또렷이 볼 수 있었던 신비한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32]
티베리우스의 걸음걸이는 목을 쑥 내밀고 큰 키로 성큼성큼 걸어 다녔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늘 무뚝뚝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함께 걷고 있던 사람들과 대화할 때면 매우 천천히 이야기했고, 손가락을 많이 움직였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의 이런 특징을 싫어했고, 이 행동의 원인이 오만함 때문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수에토니우스는 동시에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이나 민회에서 티베리우스의 태도가 원래 그런 것이고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대신 용서를 구했다고 기록했다는 점에서 볼 때 어느 부분이 맞는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티베리우스는 하늘색(caesii)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강철체력을 자랑할 정도로 강건했고 죽음을 맞은 마지막 날까지 건강했다. 그래서 30세가 지나서는 의사의 조언이나 도움없이 스스로 판단에 따라 건강을 관리했다고 한다. 그는 죽기 직전 병에 걸렸을 때조차 의사가 치료를 권유할 때, 자신은 이제 죽을 때가 됐다면서 치료를 거부하고 노환으로 사망했다.
6. 평가
티베리우스라는 한 인간의 삶에 대한 평가를 하자면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성공적이었을 삶으로 보인다.하지만 그 내부를 뜯어보면 친모, 양부와 권력속에서 얽힌 관계와 좋은 관계를 맺었던 친동생 대 드루수스와 친아들 소 드루수스의 죽음에 더불어 양부의 권력 관계의 희생양으로서 파탄난 가정생활과 아끼던 조카 게르마니쿠스의 죽음과 그에 따른 소문과 오해, 아그리피나와의 대립등의 일이 이어지면서 내면적으로 이미 정신적인 한계에 몰려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즉위 초기부터 계속된 원로원의 행태에 환멸을 느껴 제 풀에 지친 나머지 본인 스스로 은둔을 택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양부 아우구스투스와 맞먹을 만한 통치력으로 로마 제국의 기틀을 완벽하게 다졌다. 그는 아우구스투스보다 외교, 군사적으로 화려한 업적은 없어도, 양부 아우구스투스가 도입한 제국의 행정, 군사, 외교, 사회, 문화 정책과 제도를 수세기동안 유지될 수 있도록 보장하면서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뀐 로마를 로마 황제 아래의 강력한 제국으로 탈바꿈시켰다. 따라서 티베리우스가 만일 그가 서기 23년 이전에 사망했다면 모범적인 로마 황제의 교과서가 됐을 것이라고 평가받는다. 사망 후 거의 30억 세스테르티우스를 국고에 남겼다는 점도 대단했지만, 아우구스투스 시대 동안 비용이 많이 든 정복 전쟁을 무리해 추진하지 않고, 로마군 추가 기지 건설과 외교 전략으로 제국의 위협을 줄이고, 원로원과 나름 타협점을 찾고자 부지런히 움직인 점 등에서 보인 모습은 현군의 전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서기 23년 아들 소 드루수스 사망과 티베리우스의 카프리 섬 은둔으로 시작된, 세야누스의 공안통치 이후부터 티베리우스의 평가는 현재도 좋지 않다. 당대에는 "로마의 세야누스, 카프레아이의 늙은 티베리우스"라고 불리면서, 서기 23년까지 쌓아 놓은 그나마의 호의적 여론마저 바닥까지 떨어졌을 정도였다. 이와 함께 본인 일가 숙청과 견제, 계속되는 공안통치, 제도화된 델라토르들 아래에서 펼쳐진 공포 분위기 등 좋지 않은 선례들을 남겨놓았다. 즉, 그의 정치 행적이 인격적이라고는 볼 수 없어 현제라고 볼 수는 없지만 로마 역사상 양부인 아우구스투스와 오현제[33], 콘스탄티누스 대제 등과 함께 정점에 선 통치력을 보여준 유능한 군주라 평할만하다.
반대파에 대한 잔인한 처벌과 카프리섬 은둔 중에 떠돌던 음란한 생활에 관한 소문이[34] 그를 '악명 높은 황제'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그러나 프리츠 하이켈하임이 티베리우스의 통치와 사생활을 길고 지루한 청교도적 시대였다고 표현했듯이, 티베리우스는 성격이나, 통치술의 방식에서 문제가 있다고 해도 사치와 향락을 멀리함으로서 국고를 탄탄히 하고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로마 제국 전반의 소프트웨어/하드웨어 인프라를 안정화했던 유능한 황제였다. 또 그는 원로원의 평가와 달리 그의 행적 등이 밝혀지면서 실상이 드러난 결과 민주적으로 자신에 대한 비난 연설을 받아들였던 일 등이 재평가되었다. 현재의 역사학자들은 그를 로마 제국의 초석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 사람으로 재평가하고 있다.
먼저 티베리우스의 행정능력은 거의 신의 경지에 오른 수준으로, 카프리 섬에 은둔해 있으면서도 제국 전체의 돌아가는 사정을 손금 꿰듯이 읽고 있었고 필요한 일들을 정확하고 신속하게 처리했다. 그가 제국 전체에서 안 돌아다닌 지방이 없을 정도[35]라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선대의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가 정보수집체계를 완비한 덕분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우편제도와 도로를 완비하고 치안을 잡아준 덕분에 황제가 카프리 섬에 은둔해도 이상이 없었던 것이다. 서기 30년경 동방의 군대와 행정의 최고 책임자인 시리아 속주 총독(이름은 분명하지 않다.)과 유대 속주의 장관이었던 폰티우스 필라투스[36]를 즉각 해임조치하는데 그때 당시에 로마 제국의 속주였던 이스라엘 땅에서 시리아 속주의 산하에 있던 유대장관인 빌라도가 행정능력이 너무 무능력했다는 점을 보고 내린 조치다. 그리고 일을 제대로 하는지 감시하고 항상 보고를 할 책임이 있던 시리아 총독도 행정능력이 떨어진다고 보고 해임조치를 하게 된다.
지출, 팽창을 적당한 선에서 억제한 것 역시 티베리우스의 공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를 정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이 때문에 바루스의 3개 군단이 궤멸한 토이토부르크 전투와 같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로마군의 역량을 생각해 보았을 때 게르마니아는 언젠가는 정복되었겠지만, 그러기 위해 로마는 값비싼 물적, 인적 희생을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37] 게르마니아의 물산이 변변찮았다는 것을 감안하면[38] 세금 수입에 비해 속주를 유지하는 비용 역시 만만찮았을 것이다.[39]
사실 앞서 언급했던 재정 문제만이 아니라, 원로원 귀족들을 견제하는 것, 고리대 처벌 및 에퀴테스 제어는 원수정 유지에 꼭 필요한 임무였다. 티베리우스는 재위 후반기에 반역죄로 기소된 귀족들, 마구잡이로 법적 이자를 초과한 고리대 사업으로 문제를 일으킨 에퀴테스들을 무관용으로 기소해 남녀노소 불문하고 전부 처형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국고에 넣었다. 이는 냉혹하다는 평을 받았는데, 종국적으로는 안정적으로 원수정 체제를 정착시키는 것에 도움을 줬고, 이후 황제들에게 통치, 감찰, 민생 정책의 교과서가 됐다. 특히 공화정 시대부터 귀족부터 자유민까지 불만을 품게 한 에퀴테스들의 고리대 문제가 티베리우스 개입으로 억제된 일은 로마 제국의 부의 집중을 해소하는 효과도 있었다. 부유층과 권력층을 억제하는 것은 인기는 없었을지 몰라도 제국에 꼭 필요한 임무였다.
다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티베리우스가 유능한 황제인 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무작정 현제로 평가하는 것은 왜곡된 평가에 가깝다. 그래서 서양학자 중 크리스 스카레와 같은 이들은 그를 두 얼굴의 신 야누스와 같은 황제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따지고보면 티베리우스는 심리적으로는 황제가 되기에 부적합한 인물이었다. 양부 아우구스투스가 창시한 복잡미묘한 제정-원수정의 시대적 필요성을 머리로는 완벽하게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 최고의 명문 귀족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수장으로서 가슴으로는 개인주의적 영웅주의를 배격하는 정통 원로원 엘리트 귀족의 자부심과 왕정을 배격하는 자유시민의 로마 공화정의 이상을 품고있었다. 원래 아우구스투스와 혈연도 없었고 제위계승자도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상관 없었겠지만 덜컥 대타로 황제가 될 수밖에 없었고, 자신이 아무리 평범하고 겸손한 제1시민으로 처세하며 원로원 공화정을 되살려보려 해도, 해도 이미 카이사르 암살 이후로 반세기동안 아우구스투스에게 조교를 당한 엘리트 원로원 귀족들의 능력과 의욕이 떨어지는 현실은 치세 내내 그를 괴롭혔다.[40]
게다가 가식과 체면치레를 지나치게 싫어한 나머지 정치인에게 필수적인 여론 관리 능력과 포용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 치명타로 작용했다. 간단히 말해서, 정치력과 행정력이 정점에 달한 양부와 달리, 행정에 관한 능력은 그처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능하지만 체질적으로는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성질과는 아예 담을 쌓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무리 반박의 의도가 좋아도 언행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직설적이어서, 툭하면 후대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처럼 원로원을 상대로 대놓고 이런 면박을 주곤 했다.
"원로원 여러분은 그저 노예가 되기에 적합한 사람들일 뿐이오!"
"이런 태도는 곧 겸손이 아니라 위선의 징조인거요."
위의 발언 외에도 티베리우스는 본인 이름을 내건 티베리우스의 달 건이나 도미누스 호칭 건에서도 원로원과 사이가 나빠질 일화를 계속 남겼다. 율리우스 (7월) 달과 아우구스투스 (8월) 달에 이어 9월을 티베리우스로 부르자고 제안한 사람에게는 '그럼 역대 제일인자가 열두명을 넘어가면 그땐 어쩔거냐?'라고 따졌고, 자신을 도미누스라고 부른 사람에게는 '나는 같은 공화국 시민인데 왜 노예처럼 비굴하게 도미누스라고 부르느냐?'고 화를 냈다.[41] 따라서 이런 티베리우스 모습에 대해 그의 밑에서 8년 동안 트리부누스 밀리툼, 레가투스를 역임한 파테르쿨루스는 티베리우스의 능력이 출중하고, 매우 공정하다고 하더라도, 그 포용력과 적절한 가식을 통한 정치력에서는 자신이 함께 경험했던 아우구스투스, 대 드루수스보다 부족했다고 평했다. 이런 평가는 고위 장교, 원로원 의원 출신 인사들 외의 로마군 사병들의 평가도 같았다.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장인이며 스승인 아그리파, 동생 대 드루수스처럼 능력이 뛰어나고, 부하들에게 정직하고, 공정한 장군이며 희생정신이 대단해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상관으로 존경은 받았지만, 아그리파와 드루수스처럼 인간적이고 따뜻하다는 평은 일절 듣지 못했다.[42]
최측근 출신인 파테르쿨루스, 티베리우스 휘하 로마군 장병들조차 이렇게 평했으니, 이런 태도는 티베리우스가 원로원에게 분명 좋은 의도로 말을 하고도, 뒤에서는 오히려 원로원이나 일반 로마시민들에게는 욕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티베리우스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모두 능통하고, 오랫동안 로도스 섬에서 살았고, 제국에서 안 가본 지역은 이집트와 마우레타니아(오늘날의 튀니지) 정도일 정도로 제국 각지 사정에 통달했음에도, 원로원 의원이나 총독 입장에선 속되게 말해, 싸가지 없는 냉혈한 상사의 전형이었다. 그는 양부 아우구스투스처럼 모국어 라틴어 사용을 공적으로 의무화하면서, 모든 연설과 서한에 그리스어 단어를 배제했고, 그리스어에 능숙한 원로원 의원이나 총독, 지역유지들 앞에서도 그리스어 실력이 아주 뛰어났음에도 모두 라틴어로 말하면서 이를 통역하게 할 정도로, 자신이 내린 명령을 지킬 정도로 본인에게 엄격했다. 동시에 본인과 타인에 대한 잣대를 똑같이 들이대고, 공적 업무의 책임을 강조해, 원로원 의원이나 총독이 문제를 일으키면 가차없이 법대로 징계하고 벌을 줬다. 일반 관료, 하위장교, 병사, 해방노예의 실수는 넘겨주면서도, 지위가 높으면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로마 엘리트 정신 그대로 행동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티베리우스가 위선적인 폭군이라고 씹히고 끝내 원로원과 관계가 파탄으로 치닫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는 아무리 통치능력이 출중해도 결국은 그의 생전 인기를 지나치게 깎아먹은 가장 큰 원인이 됐다.
특히 그가 젊은 시절부터 보인 성격적 결함 중 내향적이고 과묵한 성격과 아부 등의 뻘소리에 대해 결벽증 수준으로 혐오스러워 한 행동, 그리스어 실력이 모국어 화자 정도로 뛰어나 취미가 그리스어로 좋아하는 작가 작품 짓기 등 상당한 실력을 갖춘 모습에도 본인 원칙대로 처리한 모습과 엄격함은 그가 미움을 받거나, 젊을 적부터 애늙은이라고 욕을 먹는 이유가 됐다. 또 이런 일련의 모습은 젊은 시절부터 원로원 동료들이 티베리우스를 공평하고 정직한 천재로 평가하면서도 그를 지나칠 정도로 이성적인 냉혈한으로 인식된 증거가 됐다. 이에 양부 아우구스투스는 살아생전 여러 번에 걸쳐 원로원 회의 중 티베리우스의 본심을 이해해달라고 편을 들면서 변호해줬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 역시 이런 양자의 성격적 결함을 의식해 결국, 아내 리비아가 첫 결혼에서 얻어 함께 키운 두 아들 중 결국 제위계승 우선권은 티베리우스보다 3살 어린 드루수스에게 내줬다.
이런 개인의 성격 문제 외에도 티베리우스는 업무 스타일 문제 때문에 평가가 좋지 못했다. 그는 친아들 소 드루수스가 아버지에게 들이박은 당시 일화처럼, 원로원 의견을 존중하되 배려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로마 역사상 최초로 제국 통치에 원로원이 필요없다는 것을 대놓고 드러낸 황제라고 평가받고 있다.
당대 티베리우스와 많이 비교된 전임 황제 아우구스투스, 친아들 소 드루수스는 원로원의 반대에 부딪치면 일을 이렇게 처리했다.
법안 제안 → 원로원의 반대 → 먼저 솔선수범하면서 원로원의 권위를 세워주고 설득한다 → 결국 통과
예를 들어 아우구스투스는 군단병의 퇴직금 제도를 위해 상속세를 도입할 때, 자신 역시 막대한 돈을 기부하여 재원으로 삼았다. 한마디로 해서 원로원이 반대하기 어려운 상황을 최대한 조성한 다음에 합의에 의해 처리했다. 게다가 비록 아우구스투스가 교묘히 원로원의 권력을 약화시키기는 했지만, 당대에 이미 공화정 출신 귀족들이 슬금슬금 무능함을 보이며 기피하기 시작했던 변방 군무와 행정은 혼자 다 떠맡고(즉 힘든 일은 혼자서 다 하고)[43] 때때로 원로원이 짖궃게 자신을 조롱해도[44] 꾹 참고 '당해주는 척'[45]했으며 적어도 원로원의 체면은 세워주고 나서 국정을 자기 뜻대로 처리한 것이었다. 이는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에게 10대 초반부터 정치, 행정 교육을 직접 배운 티베리우스의 친아들 소 드루수스도 같았다. 그는 티베리우스의 형상이 죄인을 보호하는데 사용된 형상으로 이용되면서 원로원이 골치 아파했던 문제를 처리할 때, 불만을 토로한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반역죄로 처벌받을 수 있는 꼬투리를 잡히지 않게 하려고 그에게 발언권을 부여하기 앞서 함께 오랜 대화를 나눈 뒤, 갈루스에게 질문을 하는 형태로 그의 정치적 부담을 줄여 주고, 원로원 동료들과 함께 토론을 통해 결론을 내는 형태로 이런 민감한 문제나 사안을 슬기롭게 해결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법안을 제안할 때는 설명이나 반대 없이 그냥 통과되었다. 또 무슨 문제로 이를 해결해야 할 때마다 본인이 결론을 내놓고, 통과할 수 있게 통보하는 식으로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했다. 시인 클루토리우스 프리스쿠스가 세야누스와 부하들에게 모함받아 반역죄로 기소되자마자 살해된 일에서 티베리우스가 보인 태도와 후속 조치가 대표적이었다. 이 사건은 세야누스가 주동해 소 드루수스와 카이사르 가문을 축원한 프리스쿠스가 살해된 일로 원로원 뿐만 아니라 소 드루수스까지 격분시켰다. 그런데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가 불법으로 벌인 일이 잘못되었다고 원로원과 아들에게 인정함에도 그 후속대응과 예방책은 전부 티베리우스가 일방적으로 결정해 통과시키는 식으로 해결했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황제에게 반드시 추방이나 처형은 기소 직후 보고되어야 하며, 만일 처형이 결정된다면 원로원이 자신의 결정을 먼저 알 수 있도록 10일 전에 이를 통보하는 내용을 담은 법안을 도입했는데, 모든 과정은 없었고, 이 모든 것은 당시 호민관 특권을 보유한 공동황제 자격의 친아들까지 무시한 채 그냥 통보하는 식으로 전부 해결해, 아들과 원로원 모두에게 큰 불만을 야기했다. 따라서 이 문제로 소 드루수스는 아버지에게 본인 지위와 권한을 생각하고, 자존심 강하고 매우 이성적인 아버지 티베리우스 성격을 배려해 공손하게 항의했는데, 티베리우스는 이마저도 "이미 끝난 일이다."라고 엄포를 놓으면서 더는 따지지 말라고 혼을 냈다.
그러니 원로원이나 황족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런 티베리우스의 방법이 설령 깔끔하고 명쾌하다고 인정하더라도,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원로원의 입장을 세야누스, 마크로가 이끈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실시간 보고를 받는 티베리우스는 당연히 원로원이 무기력하고 비협조적이면서 온갖 책임을 자신에게 모두 돌리고 대놓고 미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말하면 황제 본인 입장에서 보면 전임자처럼 하려고 해도 파트너인 원로원의 수동적인 행동과 책임 회피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고 오해하고, 원로원은 이런 황제의 오해와 까칠한 태도에 질린 나머지 황제를 뒤에 대고 씹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양 세력 중 조금 더 인내력이 강했던 쪽은 확실히 티베리우스였다.
일단 티베리우스는 즉위 초부터 양부 아우구스투스처럼 행동하려고 하면서 원로원을 제국 통치의 의미있는 파트너로 규정하고 원로원 의원 중 곤궁해진 사람들에게 돈을 흔쾌히 지급하고 여러 문제까지 해결해줬다. 또 그는 먼저 손을 내밀면서 원로원에게 협력을 구했고, 늘 원로원을 존중한다고 말하고 공화정 시대때 원로원 위상을 생각해 그들의 책임과 권한도 보장하고 이관시켜줬다. 아울러 티베리우스는 자제력과 인내심이 떨어진 카프리 섬 시절에도 수동적인 그들에게 가이드라인까지 잡아줬다. 그러나 이때마다 원로원은 제 일이 아닌 것처럼 느긋하게 일처리를 하거나 황제 눈치만 봤다. 오죽했으면 티베리우스는 분통이 터져서 원로원에게 "노예가 될 준비가 된 사람들"이라고 일갈을 날리고, 자기 눈치를 보지 말라면서 연설과 토론의 자유까지 계속 보장해주고 세야누스파가 숙청되기 전까지는 그래도 이런 이유로 보통은 보복도 안했다.
하지만 원로원의 입장을 대변한 타키투스나 디오 카시우스, 수에토니우스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 입장에서는 티베리우스가 "자유롭게 말하고 투표도 하고 내가 한 잘못도 말해라"라고 한 것은 오히려 부담스럽고 진짜 위선적이었다. 먼저 원로원 입장에서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원수정 체제는 역설적으로 티베리우스가 말한 옛날처럼 책임감있게 하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이래 반역죄와 간통죄 같은 것이 만들어진 상태에서 세야누스, 마크로로 대표되는 친위대장과 친위대에게 지속적으로 감시받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티베리우스는 이런 상황을 해결해주지 않으면서, "과거처럼 자유롭게 토론해주고, 내 의견 중 잘못된 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티베리우스가 독대의 기회를 주겠다고 하고, 자신의 투표나 선택을 밝히지 않고 순서대로 원로원 회의에 참석해 전통을 지키는 것 역시 똑같았다. 원로원 입장에서는 티베리우스 눈치를 보면서 처신해야 본인, 가문의 명줄이 붙어 있게 되는데,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원로원 입장을 대변한 고대 사가들은 당연히 티베리우스를 위선적이라고 씹어댔고, 그를 폭군으로 규정했다.
원로원의 더 큰 불만은 티베리우스 말이 모순됐다는 점이다. 티베리우스가 입버릇처럼 말한, "할 말 다하고 자유롭게 정책입안도 하면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프린켑스정의 현실상 초기라고 해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즉, 원로원으로서는 본래부터 냉혹하고 군대의 힘을 배경으로 둔 절대 군주 티베리우스에게 반대할 수 없었다. 아우구스투스 이래, 반대란 곧 처형, 추방, 고발이 없더라도 반드시 보복으로 되돌아온 모습은 원로원에게 철저한 학습효과로 확인된 상태였다.
더군다나 재위 후반에 행여나 반대파로 지목된 의원이 있다면, 그는 공개적으로 비난받고 이후에는 곧 숙청당하거나 반역죄로 고발당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 집권 후기의 원로원은 거수기에 불과했고, 욕을 먹으면서 무능하다고 잠시 혼나는 것이 본인과 가문의 존속을 위해서는 최선책이었다. 즉, 원로원에게는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유일하게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니, 황제가 카프리 섬으로 은둔해버린 다음에는 황제가 보낸 편지를 읽고 법안을 통과시켜주는 것이 원로원의 유일한 역할이 됐다. 의원들은 황제에게 대항할 힘이 없다보니 자괴감을 곱씹어야 했고, 속으로 반감을 키워갔다.[46]
아울러 그가 원로원에게 비난받은 또 다른 이유는 누가 보더라도 프린켑스의 힘은 커지고 강력한 견제무기들이 늘어가는 상황에서 위선적으로 행동한 것이었다. 상술한 내용의 연장일 수도 있는데, 티베리우스는 즉위 초부터 늘 회의장 안팎에서 "나와 원로원 여러분은 동등한 관계이고 저에게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털어놓도록 합시다"고 말했음에도, 보통은 독대를 허락하지 않았고, 허락하더라도 매우 제한적으로만 해줬다. 동시에 티베리우스는 유능했고 예의바른 모습으로 유명했지만, 일처리 방식이 하향식으로 명령하고 집행을 성실히 하도록 하여, 이 점에서 원로원의 불만을 샀다. 그들이 경험한 아우구스투스는 적어도 본인 생각대로 일을 했어도, 원로원에게 숟가락을 올리게 해주면서 원로원이 형식상 국정 동반자라는 인식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그렇지 않았다. 더해 그는 자신과 성격, 외모 등이 많이 닮았다고 평가받은 트라야누스처럼 솔직하고, 권위적이고, 하향식 명령을 중시하고, 집행의 성실성을 강조함에도, 후대의 트라야누스와 달리 원로원에게 예의만 있을 뿐 언제나 친절하지 않았다. 트라야누스는 직설적으로 말했지만, 원로원에게 쓴소리를 함에도 언제나 상대를 납득시키고 친절히 의견 교환을 했다. 그런데 티베리우스는 트라야누스 같은 따뜻함이 전혀 없이 그냥 직설적이고 차가우면서도 예의를 갖춰 원로원을 대했다. 그래서 회의 중 그나이우스 피소의 경우에는 티베리우스를 폐하라고 표현하면서 "폐하께 여쭙겠습니다. 몇 번째로 투표하시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티베리우스의 뜻을 먼저 파악하려고 했고, 원로원 의원들은 황제가 말을 하거나 서한장을 보내면 반역죄로 숙청하기 전에 덫을 놓는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재위기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해졌다. 하지만 원로원 의원들은 그럼에도 불만을 쏟아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는 분명히 그들 입장에서 보더라도 유능하고 행정, 군사, 외교적으로 훌륭한 프린켑스였다고 하지만, 세야누스, 마크로로 대표된 근위대장들이 끝없이 감시했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가 욕을 먹은 또 다른 이유는 원로원을 최고법원으로 만들고 이를 대놓고 활용하면서 벌인 조치였다. 티베리우스는 매우 공정했고, 엄격했지만, 원로원 입장에서는 전통처럼 해준다고 했음에도 상황은 눈 뜨고 코 베인 꼴과 같았다. 델라토르들의 고발을 제도화하여, 고소장이 접수되면, 원로원에 통보되는데, 원로원은 이때 아버지, 장인, 삼촌, 외삼촌, 동생, 아들, 조카, 친구 등이 고발되는 것을 수없이 경험했다. 더해 티베리우스의 조치로 당사자 입장에선 치욕스럽게도 본인 손으로 가족, 친구들을 반역, 횡령, 협박, 뇌물과 같은 일에 연루되면 직접 판결을 내려 처벌해야만 했다. 또 티베리우스는 업무 스타일상 만약 법에 어긋난 판결을 할 때, 그 판결을 내린 사람의 의견을 반드시 들어, 본인 기준에 어긋나면, 호되게 처벌할 정도로 엄했다. 그러니 원로원으로서는 당연히 티베리우스를 미워했고, 치세 후기의 공포통치가 되면 숨을 죽이면서 얼른 티베리우스가 죽기만을 바랬다.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의 숙원을 들어줬지만, 자신들에게 민회가 가지고 있던 오래된 선출권을 넘겨줬다고 해도, 책임은 자기들이 지고 처벌을 본인들이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계속 벌어지게 만들었다. 티베리우스는 말로는 "아우구스투스처럼 하고, 여러분은 동료이므로 존중하겠다"고 말했지만 그들의 눈 앞에서 벌어진 실상은 원로원 의원이나 속주총독, 장관들의 뇌물, 횡령, 독직과 반역죄 재판을 원로원에 설치하고 꾸준히 유죄판결을 내려지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47] 즉, 눈 앞에서 동료들이 반역죄 같은 혐의로 기소돼 처벌받는 상황에서 숙청되는 것을 보는 원로원 입장에서 티베리우스가 "계급장 떼고 할 말 다 해봐라"라고 말하는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설상가상 원로원은 세야누스 숙청 이후 벌어진 재위 후반부터는 티베리우스가 보낸 서한이 발표된 이후 "침묵하지 말고 여러분의 생각을 말해달라"고 한 뒤 진짜 솔직히 말하면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는 거진 황제나 법무관에게 반역죄 같은 것으로 고발받고 처벌받았다. 그래서 원로원 의원들은 대개 침묵하거나 조심스럽게 "당신 말이 맞습니다" 등으로 의견을 개진했는데, 이렇게 말하거나 행동하면 티베리우스는 이런 그들에게 "수동적이다", "스스로 노예가 되려고 준비된 인간들이다" 같은 욕을 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재위 후반부터는 일상화되게 되자 당하는 원로원 입장에서는 티베리우스를 위선자라고 욕하고 관계가 파탄날 수밖에 없었다.
대중들에게 잘 다가갔던 아우구스투스와 달리 그는 원로원, 일반민중 모두에게 재치있게 표현하거나 애둘러 말하는 재주가 매우 서툰 황제였다. 그래서 그와 원로원과의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파탄났고, 민중들은 전임자와 달리 여러 수혜를 베풀지 않고 설명조차 안하는 그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때 티베리우스는 문제 해결 역시 본인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해 해결했고,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판단해 행동했다. 또 재위 중반 이후에는 세야누스나 마크로로 대표되는 근위대장과 근위대를 정치에 개입시켜 이를 통해 해결하는 첫 선례를 만들었고, 말년에 카프리 섬에 은둔하면서 제국을 원격조종하면서, 반역죄를 통해 정적들을 로마법의 합법적 처벌 절차대로 제거하고 이런 방법을 후계자 가이우스(칼리굴라)에게 전수하면서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 있던 로마 내 황제 대 원로원 구도를 바꾸지 않고 일방적으로 끌고 갔다. 그러면서 그는 칼리굴라를 카프리 섬으로 불러 그곳에서 제왕교육을 시키면서 자신이 어떻게 원로원을 대하고 반대파에게는 어떤 방식을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교육시켰다[48].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로마 황제'의 좋은 규범만큼이나 나쁜 규범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를 종합해 평가하면, 티베리우스의 불행은 고위공무원에게 필요한 모든 자질을 완벽하게 타고났으나 대중정치가로서의 자질만은 약에 쓰려고 해도 찾을 수 없는 사람이 피치못하게 로마 제국이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행되는 복잡미묘하고 애매한 시기에 제국 최고의 거물정치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데 있을 것이다.
이런 황제로서의 평가 외에 티베리우스는 그의 삶 전반이 전반적으로 대단히 불우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래서 이런 영향의 결과, 모든 것에 지칠대로 지쳐버린 그가 결국 택한 것이 ‘은둔’이었다는 분석도 있고,[49] 위 '성격' 문단에 언급된 PTSD 가설도 나오고 있다.
6.1. 프라이토리아니 활용
티베리우스는 황제의 근위대인 프라이토리아니가 정치와 황실에 개입하는 것의 선례를 만든 첫 번째 황제였다. 티베리우스는 수도 로마와 이탈리아 전역에 흩어져 주둔하고 있던 근위대를 한데 모아 수도 로마를 억압하는 강대한 군대로 재편성했다.전임자인 아우구스투스는 근위대를 수도 로마에 은근한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카드로만 활용했을 뿐이지만, 티베리우스는 실제로 근위대를 이용한 정치를 했다.[50] 이는 근위대를 이용해 반대파를 탄압하고 쉽게 정국을 장악할 수 있다는 유혹에 굴복한 것으로,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과 마찬가지였다.[51] 근위대장인 세야누스는 반대파 숙청과 황실의 위험분자 숙청[52]을 주도했으며, 심지어는 근위대를 이용한 쿠데타까지 기도하기도 했다.[53]
물론 티베리우스는 지극히 유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근위대를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었다. 그는 지극히 노련하게 세야누스의 반란을 사전에 뿌리뽑았고, 근위대가 제국의 일상적인 통치에까지 손을 대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다른 모두가 티베리우스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티베리우스 본인이 잘 해낸것과 별개로 후대 황제들에게 여러 가지로 나쁜 선례를 남긴 것이다.[54]
티베리우스가 근위대를 정치제도 안에 끌어들인 대가는 군인 황제 시대라는 커다란 재앙으로써 혹독하게 치르게 된다. 3세기, 로마제국이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끊임없이 정국 불안을 초래하던 프라이토리아니는 결국 4세기에 들어서야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해체된다.
6.2. 델라토르 제도 관행 허용
로마사 전체로 볼 경우, 티베리우스가 비난받은 이유는 프라이토리아니를 로마 황실과 중앙정치에 활용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와 같은 후세 로마인들에게 크게 비난받은 이유는, 그긴치세 내내 자신의 손에 들린 반역법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활용할 때, 델라토르들을 상시적으로 허용한 점이다. 하여 타키투스, 디오는 티베리우스가 델라토르 제도를 양지로 관행화했다고 비난했다. 이는 로마사 연구자들의 의견도 비슷하다. 학자들은 반역법을 무기삼아 마구잡이로 기소한 아우구스투스보다 티베리우스의 델라토르 제도 활용이 종국적으로 그의 업적이 가려지게 됐다고 평한다.델라토르는 일반 변호사와 달리 아예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중대범죄의 사설수사와 형사 기소를 전문으로 하여 유죄입증에 성공하면 몰수된 피고의 재산 중 일부를 포상으로 수여받는 일종의 현상금 사냥꾼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젊을 때 잠깐 "델라토르 쪽에 발만 담굴까?" 했을 만큼, 정치활동을 하면서도 고수익을 담보한 직업이었다. 그렇지만 공권력도 없이 뒷조사를 해대고, 남의 약점을 잡아 협박하거나 죽여서 먹고사는 델라토르는 당연히 사회적 인식이 최악이었다. 그런데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와 마크로에게 델라토르들이 폭주하는 환경을 양지화하게 허락하고, 황제의 묵인 하에 이를 관행화했다. 설상가상 그는 세야누스 제거 후, 서기 33년 종손이자 후계자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지하감옥에서 석방 직전 아사하고, 그 일기장을 보자마자, 가문과 후계자의 복수를 위해, 대놓고 델라토르들에게 폭주의 장을 열어준다. 심지어 황제까지 혈육의 억울한 죽음을 되갚아주겠다며, 스스로 델라토르가 됐다. 이렇게 되니, 치세 후기인 서기 31~33년부터 델라토르들이 날뛰며 공포분위기가 조성되고, 그 여파와 책임은 후계자 칼리굴라 대에 폭발해 황제 암살 미수가 계속 벌어지게 된다.
로마 역사에서 반역법(마이에스타스)는 공화정 초기부터 내려온 법률로, 이 법률이 국가 최고 원수들의 무기로 정례화된 것은 마리우스와 술라가 아닌,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서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 국가의 존엄을 위협하는 모든 범죄로 포괄돼 "로마의 적국과 내통하거나, 정무관에게 신체적인 해를 입히는 등 국가 안전을 침해하는 모든 범죄는 반역법에 따라 다룬다"고 명시됐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개정해 통과시킨 이 법의 문구 중 "~등"에, 자신과 그 일가 남녀황족에 대한 대역죄와 오만, 신성모독, 관직 남용행위를 통한 재산취득, 간통, 불륜, 강간, 살인에 이르는 중범죄까지 모두 반역법에 포함시켜 이를 판결과 조상들부터 내려온 관습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정착시켰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이래, 반역법은 카이사르의 의도와 달리 황제 본인이 마음대로 정적들을 제거하는데 유용하게 쓰였다.
아우구스투스는 40년이 넘는 긴 치세 기간동안 엿가락처럼 늘리고 줄일 수 있게 설계한 반역법을, 자신이 만든 <율리우스 간통법>과 함께 정적 숙청도구로 적극 사용했다. 이런 부분에서 본다면 티베리우스가 없던 방법을 개발해 악행을 저지른 것으로 마냥 비난하긴 어렵다. 되려 후대의 디오 카시우스의 평처럼, 후대 황제들의 반역법 사용과 애매모호한 유죄 선고는 평화와 내전의 종식을 가져다줬다는 명분 아래 원로원과 민회를 좌지우지한 아우구스투스가 벌인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후대 로마인들에게 티베리우스가 비난받은 진짜 이유는, 그가 이 법률을 무기삼아 휘두르면서 델라토르 제도를 관행화해주고, 이를 또 다른 무기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는 반역죄 재판에서 기소된 이들이 유죄판결을 받을 시, 고발자들이 피고의 재산 중 4분의 1을 받도록 허용하고 이를 조상들부터 이어진 관행, 즉 로마 공화정 수립 전부터 있던 자국의 불문 헌법으로 인정했다. 따라서 반대파는 이런 티베리우스에게 악감정을 품었는데, 이때 그는 특유의 정치술과 자신의 벗 네르바 같은 최고 법률가까지 활용해 법적 시비까지 틀어 막았다. 당연한 말인데, 고발인은 세야누스, 마크로 등과 같은 프라이토리아니 지휘관 및 부대원들이 많았고, 기소 접수는 황제가 추천해 꽃은 법무관들이 전담했다. 이렇게 되니, 유죄판결을 받은 이들의 재산 대부분은 당연히 티베리우스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렇게 원로원 의원들이 명백히 압력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티베리우스는 '동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내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원로원 의원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위선적이고 음험할 수 밖에. 따라서 이는 그가 악랄하다고 비난받고, 제정이 공화주의자들에게 비판받는 근본적 이유가 됐다.
티베리우스 시대의 반역죄 기소는 세야누스가 숙청되기 전까지는 세야누스가, 이후에는 황제와 법무관, 후임 근위대장 마크로가 고발자들을 이용해 진행됐기 때문에,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와 달리 악랄해보이는 면이 상당히 많았다. 또 티베리우스가 허용한 "유죄판결자에 대한 재산 일부를 고발자에게 상속시킨다"는 관행 허용은, 나쁜 마음을 먹은 이들이 정적이나 부자들의 재산을 노리고 허위 고소를 수없이 발생시켜, 섹스투스 마리우스 사건처럼 부자가 누명을 뒤집어 쓴 다음 유죄로 판결받고 처형되거나 추방된 사례도 존재했다.
물론 티베리우스의 20년이 넘는 긴 치세 기간동안 106명의 사람이 반역법 혐의로 기소됐으며 36명이 최종 처벌받았던 점을 본다면, 또 대부분 유죄판결자들이 치세 후기부터 벌어진 세야누스와 그 일파 숙청 내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같은 문제 있는 인사들, 불법 고리대 등에 손을 댄 부자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을 살펴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는 선대인 아우구스투스 시대와 티베리우스 시대가 다른 부분인데, 그럼에도 로마인들은 티베리우스를 증오했다. 그 이유는 세야누스, 마크로가 무차별적으로 툭하면 기소해 법정에 세우고, 이 사건을 티베리우스 이름으로 집행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재판들은, 기소 대비 유죄판결 비율은 현저히 낮았고, 진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은 대 아그리피나와 네로 카이사르 반역죄 외에는 증거가 명확한 반역죄들이 대부분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진짜 빼도 박도 못 하는 증거가 있거나 티베리우스가 가만히 안 두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 실제 집행까지는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티베리우스는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델라토르들이 거짓밀고를 한다면 그대로 기소 내용을 파기해주고 역으로 거짓고발자들을 파멸수준으로 처형 또는 영구추방시킬 정도로 거짓밀고자에 대한 처벌도 엄격히 가져간 황제였다. 여기에 더해 드루수스 카이사르 사건처럼 재조사 후 피고가 무죄로 밝혀지면 거짓밀고자를 끝까지 추적해 그 죄까지 혹독히 처벌할 정도로, 그는 상당히 엄격하게 델라토르 제도를 활용했다. 따라서 마냥 티베리우스가 공포시대를 조장했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즉, 티베리우스는 치세 내내, 의도적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장한 황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황제들이 티베리우스처럼 반역죄와 델라토르 제도를 활용할 리 만무했고, 티베리우스가 많은 선례를 만든 탓에 후임황제들에게 좋은(?) 교본으로 참고됐다.
티베리우스에게 카프레아이 별궁에서 제왕교육을 받았던 가이우스(칼리굴라)는 마크로가 기어오르고, 원로원에서 그를 암살하려고 매년마다 음모를 꾸며 제거하려고 하자, 티베리우스가 남긴 매뉴얼 그대로 모두 제거했다. 그리고 이때 그는 반역죄와 명령불복종에 관한 대역죄를 활용했다. 이는 온화하기로 유명했던, 티베리우스의 조카 클라우디우스도 비슷했고, 후대의 현군들도 비슷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가 무기로 활용한 두 가지 제도는 원수정 존속 내내 그 폐단이 심각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티베리우스가 남긴 방법은 칼리굴라나 도미티아누스처럼 대놓고 본인이 욕을 먹어가며 이를 활용한 경우가 아니라면, 실제로 훌륭한(?) 선례가 됐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는 황제가 세야누스 같은 인사들을 앞세워 황제가 반대파 황족들이 여럿 누명을 쓰고 숙청하고도 황제가 온전히 책임을 지지 않는 방식을 몸소 보여주고, 이를 로마 황제와 원로원에게 그 교과서로 전수해줬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대 황제들은 이를 선례삼아 어느 정도 눈치를 보면서 책임을 피하려는 경우, 티베리우스가 했던 방법에 따라 해당 사건에서 유용하게 활용했다. 하드리아누스가 대표적인데, 그는 제위를 이을 당시 전직집정관들을 반역죄로 기소하면서 티베리우스와 비슷한 방법을 이용했다. 또 말년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를 양자로 입양하면서 매부와 누나의 손자를 숙청할 당시에도 티베리우스가 이용한 방법과 비슷하게 친족들을 제거했다.
물론 이런 방식은 앞세운 측근이 티겔리누스처럼 완전히 함량미달이거나, 네로처럼 황제의 정치력이 떨어질 경우, 또는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처럼 본인이 앞장서 손수 보여줄 경우 다함께 욕먹는 양날의 칼과 같았다. 가령, 네로는 아예 법까지 어겨가며 심증을 이유로 여러 황족과 유명명사, 원로원 의원들을 숙청했다. 이전의 칼리굴라는 황궁 내 해방노예, 일부 근위대 비리를 보고받고 움직임을 가져가려다가 되려 암살되고 그가 취한 방법은 정적 세네카 등에게 왜곡, 묘사돼 폭군으로 찍히게 됐다. 이는 도미티아누스도 비슷했다. 그는 티베리우스, 칼리굴라보다 노골적으로 델라토르들을 활용했고, 고문까지 동원해 티베리우스, 칼리굴라보다 더 악랄했다고 비난받았다. 이 외에도 하드리아누스는 자신과 아내에게 불경을 저지른 이유를 들어 마음에 안 든 인사들을 파면시키거나 추방했다.
7. 여담
- 알루미늄의 생산을 금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로마의 역사학자인 플리니우스의 저서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한 여행자가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잔을 티베리우스에게 주었지만, 티베리우스는 이 금속이 금, 은의 가치를 떨어뜨릴까 두려워 알루미늄의 개발을 금지시켰다(덤으로 알루미늄을 바친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사실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데, 19세기 전기분해법[55]이 개발되기 전까진 순수한 알루미늄을 제련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워서 금, 은보다 더 귀하게 여겨졌다.[56] 구두쇠인 티베리우스가 생산을 금지하게 한 것도 이해가 갈 것이다.[57] 하지만 또 다른 기록에는 그 여행자가 가져온 것은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고 찌그러지기만 하는 유리잔'이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 기록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그 여행자가 사용한 것은 알루미늄이 아니라 일종의 투명 수지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 후대 황제중 티베리우스와 많이 비교되는 도미티아누스는[58] 티베리우스가 남긴 기록들을 그 무엇보다 열심히 읽었었는데, 이 사례에서도 보이듯이 티베리우스는 지나치게 엄격한 통치로 동시대인들의 불만을 샀지만 통치방식 면에서는 후대 황제들의 모범이 되었다. 이렇듯 티베리우스를 따라한 도미티아누스는 게르마니아 방벽과 칼레도니아 원정, 다키아와의 평화 협정[59] 등을 통해 제국의 국경을 안정화하고 동방 속주와 서방 속주의 경제적 차이가 심화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 제정의 시스템을 안정화 시키며 훗날 트라야누스의 정복 전쟁의 기반이 되는 건실한 제국의 제정과 군대를 만들어 주었다.
- 오현제 중 한명인 네르바와도 인연이 있는 황제이기도 하다. 네르바 가문은 증조부때부터 대대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깊은 협력 관계를 맺고 있던 귀족 가문이었는데, 당대 최고의 법률가 중 한명인 네르바의 할아버지는 티베리우스의 조력자이자 몇 안 되는 진정한 친구로 유명했다. 또한 네르바의 외숙모는 티베리우스의 손녀 율리아가 입양한 딸이었으며, 네르바의 아버지 역시 티베리우스 시절 원로원 의원이 된 뒤, 칼리굴라 시대에 집정관이 되었다.
- 훗날 동로마에 '티베리우스'란 이름의 황제가 둘( 티베리우스 2세 티베리오스 3세) 더 등장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는 '티베리우스 1세'로 불리어야 하지만, 고대 로마와 동로마의 연속성을 부정하는 뿌리깊은 편견 때문인지 오늘날까지도 '티베리우스 1세'라 부르는 경우는 해외에서도 거의 없다. 당장 클라우디우스부터 훗날 클라우디우스 2세[60]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세'라고 불리는 경우가 드문 것을 보면, 이는 초기 로마 황제들의 압도적인 인지도와 3세기 이후의 로마사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현상인 것으로 보인다.
- 현대 이탈리아에서는 그를 티베리오(Tiberio)라고 부르는데, 그가 13년 동안 살았던 카프리 섬에는 황제의 이름이 상호명에 들어간 레스토랑, 디저트 가게, 카페, 숙박업소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 이혼당한 빕사니아는 이후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갈루스와 재혼했다.
- 운동능력이 아주 뛰어났는데, 그 정신력 역시 대단했다. 젊을 적 하루에 300km를 달렸고, 오래 달리기 등으로 건강을 관리해, 군복무 시절 종종 이렇게 운동하면서 본국 이탈리아와 게르마니아 일대를 돌기도 했다고 한다. 따라서 후대의 플리니우스는 이런 티베리우스 황제의 신체능력과 정신력에 혀를 내둘렀다.
- 총 12개의 별장을 보유했다고 하며, 이중 가장 유명하고 오랫동안 기거한 별장은 카프리 섬 동쪽 산 절벽에 위치한 빌라 요비스(Villa Jovis)이다. 이 빌라는 별도의 개인 부두를 통해 입항하는 구조로[63] 티베리우스의 선황인 양부 아우구스투스가 사람이 거의 없고, 한적한 장소를 찾아낸 뒤에 와인 저장소를 겸한 시골집으로 건설해, 티베리우스에게 일찌감치 선물로 준 곳이었다. 티베리우스는 물려받은 이 시골집을 로도스 섬 생활을 하며 떠올린 기억 속에서 그리스인 건축가들에게 맡겨 27년 완공했다. 티베리우스는 친아들 소 드루수스가 급사한 뒤 나폴리로 갔다가, 이 빌라로 들어갔다. 이때 그가 이 빌라를 좋아한 이유는 쾌적하고, 지나칠 정도로 조용하고, 나폴리 만 풍광과 베수비오 산의 환상적인 전망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점이었다.
- 황제 치세 내내 인기가 없어, 미세눔에서 77세의 나이에 서거한 직후, 이탈리아 안의 로마인들에게 범죄자처럼 시신을 전시하라는 요구를 받고, 관련 시위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후계자로 3대 황제에 오른 칼리굴라는 공개적으로 이를 거부했고, 티베리우스와 사이가 최악이었던 원로원 역시 지나친 요구라며 거절했다.
- 법적 손자이자, 혈연상 종손인 칼리굴라와는 애증관계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칼리굴라는 즉위 이후 법적 할아버지이자 혈연상 큰할아버지인 티베리우스를 모욕하기 보다는 티베리우스가 생전에 기사계급들의 고리대금 문제 등을 엄하게 처벌한 일 등을 "이 정책은 범죄와 싸우고 부도덕한 행동을 억제한 것이었다."며, 티베리우스를 모욕하지 않았다. 이는 티베리우스의 마지막 근위대장 마크로가 티베리우스 사후 민간과 원로원 안에서 사실처럼 떠 돈 뜬소문을 의도적으로 방치한 것과는 대조된 모습이었다.
8. 대중문화에서
미디어에는 카메오로 많이 나오는 편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시절 황제이기 때문에 그것과 관련된 영화에서 로마 황제가 나온다면 십중팔구 그라고 보면 된다. 영화 벤허에서 개선식 때 등장하는 황제가 바로 티베리우스, 영화 성의에서의 로마 황제도 티베리우스. 이 두 영화에서는 잠깐 등장하지만 1950년대 당시의 인식으로는 의외일 정도로 현명한 황제로 나온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는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라 독살과 방탕에 빠져서 몰락하는 인간으로 그렸다.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에게 동생 대 드루수스가 공화정 복귀를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를 흘렸다가 대 드루수스가 리비아에게 독살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를 증오하게 되고, 후일 자신을 황제에 올린 후 수렴청정하려는 어머니 리비아를 철저하게 소외시킨다. 리비아 또한 너를 제위에 올리기 위해 방해되는 인간 모두를 제거했는데 돌아오는 것이 이것이냐며 너 또한 쥐도새도 모르게 내 손에 죽을 것이라고 저주하고, 그 후 티베리우스는 누가 리비아의 끄나풀로 자신을 죽일지 몰라 불안해하며 의심병에 가득찬 편집증 환자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파리잡듯 죽이는 폭정을 저지른다. 말년에는 애완동물이 벌레에게 먹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살아나서 음식을 달라고 요구하다 칼리굴라에게 살해당한다. BBC의 드라마판의 1화에선 원하지 않는 권력싸움에 어머니의 등쌀에 고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생인 드루수스에게 자신이 사랑한 사람은 오직 셋뿐이라고 얘기하는데,[64] 아버지는 사망, 빕사니아는 주변 인물의 강요로 이혼했기에 드루수스에게 제발 조심하라고 얘기하는 나름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후에도 빕사니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빕사니아의 재혼 소식을 듣고 그녀에게 따지러 왔다가 이혼을 후회하며 차라리 같이 죽자고 얘기할 정도로 절망한다.[65] 그리고 이후에는 권력에 의해 더더욱 차가운 인물로 변한다. 작가가 스탈린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BBC 드라마판에서는 조지 베이커가 맡았다.
- 모 종교집단 지도자는 황제의 이름을 따서 타이베리움을 타이베리움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광물이 지구상에 나타나기도 전에, 등장을 예견하면서.[66] 하필 타이베리움이 처음 지구에 나타난 곳이 테베레 강이어서 그 이름이 무난히 받아들여진다.
8.1. 칼리굴라
틴토 브라스 감독의 1979년작 영화인 칼리굴라에서는 칼리굴라가 황제에 오르기 전 초반부에 등장, 피터 오툴[67][68]이 티베리우스 역을 연기했다. 하지만 애초에 영화의 기획의도가 포르노였던지라, 딱히 고증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69][70] 다만 칼리굴라야 본인의 삶 자체가 포르노에 가까웠던 만큼(...) 이 부분에 있어서는 고증도 맞고 오히려 이 덕분에 작품성이 살아났다고 보기도 하지만, 티베리우스에 관한 부분의 고증은 거의 허구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위 문서에서도 부분부분 상술한 티베리우스에 대한 나쁜 소문들은 전부 모아서 길지도 않은 영화 초반부에 몰아서 보여준다.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에서 어린 소년, 소녀들을 모아서 성관계를 즐긴다는 부분은 아예 더 과장해서 영화에 옮겨놓았고,[71] 티베리우스의 죽음도 위에서 소개한 가설 중 하나인 칼리굴라와 결탁한 마크로가 베개로 눌러서 질식시키는 이야기를 채택했다. 특히 티베리우스가 지나가다가 술에 취해 졸고 있는 경비병을 발견하자, 아예 배가 풍선처럼 부풀 때까지 술고문을 한 다음 손수 그 배를 갈라버리는 장면이
그리고 실제로도 절친한 친구였던 네르바[72]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뒤를 이을 칼리굴라가 손자인 게멜루스를 죽이고 로마를 쑥대밭으로 만들것임을 뻔히 다 알면서도[73] 자신은 늙어서 지쳤다면서 딱히 막지도 않는 등[74], 고증과 동떨어진 행적과는 별개로 말년에 마음이 마모되고 피폐해진 모습은 제법 그럴듯하게 묘사했다.[75] 거기다 황태자이자 이미 성년이 다 된 칼리굴라에게 예전 칼리굴라라는 별명을 얻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에게 재롱을 떨던 춤을 춰보이라며 갈궈대는 모습은 꼬장꼬장한 꼰대 그 자체.[76] 또 몇몇 의원들의 처형을 요청하는 문서들을 가져다주자, 그것들을 읽지도 않고 도장을 쿵쿵 찍어서 넘기는 모습에서는 말년의 공포정치의 모습도 보여준다.[77] 거기다 먼 카프리 섬에 은둔하면서도 칼리굴라가 여동생인 드루실라와 검열삭제를 하거나 마크로의 아내와도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등의 로마의 세세한 사정을 손에 훤히 꿰고 있다. 그리고 이걸 칼리굴라와 마크로에게 농담처럼 툭툭 던져서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등, 평소에는 나태하면서도 수틀리면 절대자인 로마 황제답게 차갑게 상대를 쪼개버릴 것 같은 날선 송곳 같은 모습을 제대로 열연해냈다.
참고로 저 네르바는 실제 역사에서는 티베리우스 치하에서 집정관까지 지낸 뒤,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에 은둔하자 자발적으로 따라올 정도로 몇 안 되는 친우이자 충신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티베리우스 면전에다가 대고 위대한 카이사르는 둘 뿐(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이라면서 황제 취급도 안 하면서 모욕하고, 다음 황제가 될 칼리굴라에게도 이딴 게 황제를 제대로 할 수나 있겠냐라는 투로 대놓고 무시하는 까칠한 모습으로 나온다. 그러자 티베리우스가 자기가 죽으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하자, 자신에게도 다 방법이 있다고 하고는 티베리우스가 죽기 전에 자기가 먼저 선수쳐서 자살해 칼리굴라로부터의 화를 피한다.[78]
이렇게 당시 로마에서 떠돌던 소문들을 짜집기해 사실과는 전혀 다른 티베리우스의 모습을 그려놓은 영화지만, 얄궂게도 그 점 덕분에 당시 로마 사람들이 가진 티베리우스의 이미지가 얼마나 시궁창에 막장이었는지를 아주 적나라하게 엿볼 수 있다는 의의가 있다. 아닌게 아니라 작중 다른 등장인물들이 티베리우스를 바라보는 눈빛이 그야말로 하나같이 이 더러운 늙은이 왜 이렇게 안 죽어 딱 이것이다.
8.2. 벤허
1959년작 영화 벤허의 배경이 티베리우스 황제가 다스리던 로마 제국이라서 간간이 언급된다. 영화 첫 장면에서 벤허가 친구 메살라와 우정이 금이 가게 한 말싸움을 할 때, 메살라가 밥상에서 야훼 하느님께 기도드리고 빵을 떼어먹을 정도로 믿음이 깊은 유대교 신자인 벤허 앞에서 티베리우스를 '진짜 신'이라며 찬양하는 말을 한다. 그 외에 로마인들 사이에서 유일신처럼 언급되며 절대적인 존재처럼 묘사되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후에 로마 집정관 아리우스가 해적과의 전투에서 이기고 로마에 돌아오는 개선식 장면에서 모습을 드러낸다.[79] 아리우스의 탄원에 대해 벤허의 위험성을 언급하면서도, 티베리우스는 아리우스 집정관의 요청을 들어 벤허를 사면하였다.[80]다만 영화에서의 티베리우스의 모습이나 주변 상황은 실제 고증과는 몇 가지 차이와 오류가 보인다. 우선 영화 내에 년도가 정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대략적인 시기는 극중 등장하는 예수를 통해 알 수가 있는데,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하기 때문에 이때를 대략 서기 30년으로 본다면, 벤허가 갤리선의 노예로 활동한 것이 3년에 그 이후로 전차대회에서 몇번이나 우승하다 2년 뒤 자유를 얻었다고 나오니 이 기간을 합치면 대략 4~5년이다. 결국 이 영화는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기 직전 쯤에 시작해 서기 30년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벤허가 노예로 끌려가다 아직 목수 일을 하고 있던 예수에게서 물을 받아 먹는 장면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면 오류가 생기는 것이, 벤허가 개선식에서 사면을 받고 전차경기에서 우승했다고 나올 때는 실제 역사에서는 서기 30년보다 바로 앞의 1~2년 동안의 일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때가 티베리우스는 한창 섬에 틀어박혀 있을 때고, 로마는 세야누스의 전횡에 시름하고 있을 때다. 그래서 개선식에서 티베리우스가 나오는 장면은 실제 상황과는 잘 맞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티베리우스는 재위 기간 내내 로마 시민들에게도 근검절약을 강요하고 큰 행사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기 벤허가 1~2년의 짧은 시간에 로마의 전차대회에서 5번이나 우승했다는 것도 고증과 맞지 않는다.
또한 개선식 자체가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수립한 후부터는 황제나 황실 일가만이 할 수 있도록 정했기 때문에 황족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아리우스가 개선식을 여는 것 자체가 고증 오류다.
또 위에도 나와 있듯이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신격화를 내내 거부했기 때문에 영화에서 메살라가 티베리우스를 신이라고 찬양하는 장면도 다소 부자연스럽고, 티베리우스는 로마 시민들에게서 인기가 정말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다들 티베리우스를 찬양하며 떠받드는 모습도 다소 어색하다고 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는데 이건 좀 억지다. 설령 인기가 없다쳐도 죽고싶지 않으면 그럼 대놓고 황제 욕을 할까? 게다가 말년의 티베리우스가 얼마나 무서운 양반이었는데?
8.3. 서브컬쳐에서
8.3.1. 데몬베인
참마대성 데몬베인에 등장하는 악의 세력 블랙롯지의 간부, 안티 크로스 중 한 명. 왠지 얼굴이 킹 크림슨 닮았다.성우는 ZZ건담의 주인공, 쥬도 아시타와 초수기신 단쿠가의 주인공인 시노부로 유명한 야오 카즈키. 저 야성넘치는 목소리로 끈적끈적한 단어선정 센스와 완전한 여성어 말투를 선보이는지라 기분나쁘다. 매우(...).
키워드는 광대와 촉수.
마도서 벌레의 신비에 그의 육체는 이미 썩어 문드러진 시체이며 네크로맨시에도 일가견이 있는데다 뭣보다도 능욕과 살해를 사랑하는 미치광이. 페니스라고 쓰고 육창이라 읽는 걸로 여성을 꿰뚫어 죽이는 게 취미다.
이미 죽어있기 때문에 그를 죽일 수 없다. 또한 벌레의 신비가 부여하는 불사의 권능으로 그의 몸은 무한히 무한히 재생한다. 설사 육편 하나 남지 않았다고 해도...재생의 방식을 보면 재생 당시에는 살아있는 인간의 몸으로 복원되지만 복원의 마지막에 순식간에 부패해버리는 듯. 주로 장비하고 있는 긴 강철손톱으로 육탄전을 벌이며 이 강철손톱은 마술처리되어 있어 강도와 예리함이 뛰어나며 공격을 피할 이유가 없기에 무조건 공격 일변도.
또한 벌레의 신비의 권능으로 인해 육체 자체가 무기화된다. 몸 안의 내장은 촉수화해서 적에게 덤벼들며 뼈는 총알의 속도로 적에서 쏘아진다.
약점이란 게 거의 없다. 그를 죽이려면 그의 육체를 완전히 소멸시킬 때 잠깐 보이는 벌레의 신비. 마도서 본체를 완전히 소멸시켜버리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 성격 때문에 데몬베인과 여러 차례 맞붙었으며, 그때마다 강력한 공격과 무시무시한 재생 능력을 통해 데몬베인을 압도했다. 하도 재벌 총공격의 때에도 좀비나 촉수 ...를 통해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가장 골칫덩이였던 적. 하도우 저택 습격사건 당시 하도 루리를 거의 겁탈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고, 심지어 같은 안티 크로스였던 클라우디우스의 시체마저도 좀비로 부활시켜 써먹기까지 했다.
게다가 라이카 루트에선 레거시 오브 골드의 지구황제포에 의해 파괴되었던 데몬베인을 몰래 회수, 고쳐서 다시 써먹기까지 했다(!) 티베리우스가 기동하는 데몬베인은 레무리아 임팩트를 사용할 수는 없지만, 대신 티베리우스 고유의 원령주법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 결국 산달폰의 지원에 힘입은 쿠로에게 빼앗기긴 하지만.
그러나 결국 알 아지프 루트에서 부활한 알 아지프가 모든 단편을 되찾으면서 결국 완전해진 데몬베인-쿠로-알 삼위일체가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를 다룰 수 있는 위계에 올라서게 되고 처음 다루는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의 첫 희생양이 된다. 그곳에만은 끌려가기 싫다고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그에게 쿠로가 타인을 짓밟고 얻은 불사의 몸이라면 끝까지 책임지는 게 도리다.라고 대꾸하는 대목은 절품.
하도우 루리 루트에선 에셀드레다가, 라이카 루트에선 산달폰이 레무리아 임팩트에 맞아 승멸된 후 남은 벌레의 신비를 태워버려서 사망. 코믹스에선 뒷치기하려다가 티투스에게 벌레의 신비가 찔려서 사망.
소유 마도서는 벌레의 신비 De Vermis Misteriis, 소환하는 데우스 마키나는 벨제뷰트.
슈퍼로봇대전 UX에서도 가장 먼저 만나는 안티 크로스로 나오며, 첫 등장 시 발사하려는 크투가가 조조 건담에게 막힌다.
여담이지만 니트로 플러스 직원들의 낙서장에 원화가 니시씨가 그린 생전의 모습(?).
8.3.2. 테일즈 오브 데스티니
테일즈 오브 데스티니에 등장하는 아쿠아베일의 대왕.토우케이 령의 영주였으나 그레밤의 아첨에 넘어가서 아쿠아베일의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이전에 죠니와 페이트의 소꿉친구인 엘레노아를 강제로 데려와서 그녀가 자살하는 계기를 제공한적이 있다.
물 속성의 요도를 사용하며 기스 하워드님의 진공 던지기를 연상시키는 천지 던지기( 천지 뒤집기)와 위력이 강한 와봉섬, 갖가지 가드 불능기술로 일행을 괴롭힌다. PS1판에서는 리온 매그너스가 입막음을 위해 살해, PS2판에서는 죠니 시덴과 정정당당하게 1 VS 1 승부를 치르다가 패배해서 사망한다.
8.3.3. Fate/Grand Order
로물루스 스토리에서 불완전 소환된 역대 황제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인게임에서는 그냥 고스트지만.8.3.4. 하드 코어: 업라이징
여기에서는 제국의 황제로 등장. 주변 국가들을 침략하는 원흉이자 최종 보스로 등장한다. 황제 아니랄까 다양한 공격과 함께 일반 탄알은 잡아내기까지 하는 위엄을 선보인다. 나머지는 항목 참조.
[1]
전임자인 양부 아우구스투스와 마찬가지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강조하지 않고, 단순히 카이사르라고 표기해 칭호로 사용했다.
[2]
78번째 생일을 딱 8달 남기고 사망했다.
[3]
77년 120일
[4]
로마
원로원 회의록, 로마 공식 관보를 사료로 기록한
타키투스,
디오 카시우스의 표기에 의거.
[5]
태어날 당시 본명
[6]
아우구스투스의 정식 양자 입적 후의 공식 이름. 따라서 본인 역시 양자 입적 직후부터 모든 공문서, 사문서에 이 이름을 서명했고, 원로원 역시 그를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또는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고 부름.
[7]
기원전 10년생. 고향은 이탈리아 북부 도시인
아퀼레이아로 대 율리아와의 사이에서 얻었다. 전체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로, 통칭인 티베릴루스는 아버지 티베리우스와 조부 아우구스투스에게 불린 통칭이며 애칭이다. 그 뜻은 '작은 티베리우스'를 뜻한다. 출생 이후 아버지 티베리우스에게 큰 기쁨을 줬으나 생후 6개월에 요절했다. 티베릴루스가 죽으면서 티베리우스, 대 율리아 부부의 대립과 리비아 드루실라, 대 율리아의 고부갈등, 아우구스투스와 대 율리아의 대립이 시작됐다고 한다.
[8]
티베리우스의 의붓아들이자 조카로 대 율리아와 아그리파 사이에서 태어난 유복자. 아우구스투스에게 티베리우스가 양자 입적될 당시 같이 입양됐지만 아우구스투스에게 파양되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에서 추방됨.
[9]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재임.
[10]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재임.
[11]
세야누스를 숙청하기 위해 함께 취임한 뒤, 세야누스를 제거하자마자 사임.
[12]
임기 5년 형태로 부여됐다.
[13]
매년 갱신 형태의 종신 부여.
[14]
티베리우스가 자신의 통치철학이자 인생의 가치관을 직접 언급한 말로 원로원 회의록에 실린 내용이라고 한다. 이 부분은 오늘날 티베리우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프린켑스로 있었는지에 대해 가장 잘 드러내는 상징적인 발언으로 평가받는데, 타키투스로 대표되는 이들에게는 위선자, 냉혹한 프린켑스라는 증거의 대표적인 예로 인용되고 있다.
[15]
친(親) 부자 세습으로 제위를 이은 최초의 로마 황제로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있다.
[16]
로마 제정 시대 중 공동황제 개념으로 처음 즉위한 케이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이다.
[17]
부자세습으로 뒤를 잇는 황제들이 많이 사용한 방법이다. 대표적으로는
콤모두스,
카라칼라 등이 있다.
[18]
모든 황제, 국왕이 그렇듯이 아우구스투스 역시 완벽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 역시 같았다. 그가 추진한 북아프리카 일대 식민도시 건설 속에서 소위 로마화로 불린 로마인 정착촌 확대, 농경지 확대 명령 역시 치세 후기에 아우구스투스가 총독에게 하달한 베르베르인 중 반유목 형태 주민에게 내려진 거주이전 제한 명령으로 클리엔테스 속국인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내전을 일으켰다. 물론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지나친 세금 징수는 아우구스투스의 오판이나 실정은 아니다. 하지만 마우레타니아 왕국이 세금 징수마다 아우구스투스를 언급하면서 무자비하게 수탈을 벌인 일을 아우구스투스가 보낸 총독들이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아우구스투스 본인 역시 묵인한 일은 당시 이 문제를 조심히 걱정한 티베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등의 우려처럼 칼리굴라 시대에 이르러 마우레타니아 왕국 강제 경합이라는 조치까지 이어진 길고 긴 마우레타니아 왕국 내전 서막이 됐다. 더해 아우구스투스는 현지 베르베르인들의 불만에도 거주이전제한 칙령을 서기 10년경 내린 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의 지시로 농경지 주변에 울타리를 치고 제3군단 아우구스타가 로마식 가도를 건설했다. 이때 큰 불만을 산 것은 아우구스투스 명 아래 로마군이 여름마다 튀니지 고원으로 양떼를 이동시킨 베르베르인들을 단속한 일이었다. 이 조치는 로마 이주민과 현지 베르베르인 사이 유혈사태 원인이 되어 이 일대의 무술라미, 가에툴리아 부족을 중심으로 14년 봄부터 소규모 봉기로 아프리카 속주 치안을 뒤흔들었다.
[19]
거리 내 근거없는 뜬소문과 도시괴담급 이야기들을 집대성해 만들어진 역사책이 바로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역사가 겸 변호사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이다.
[20]
아우구스투스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혈통을 중요시한 집착의 화신이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황위를 물려주며 티베리우스 사후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인 게르마니쿠스를 티베리우스 후임으로 하는 것까지 조건으로 붙여버렸다. 거기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콤모두스의 관계를 봐도 친자가 있는데 양자에게 제위를 물려주면 내전의 불씨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다른 왕조보다는 능력 본위라는 것이지 로마 또한 혈통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왕조는 아니었다.
[21]
친구이자 사위인 아그리파를 비롯해 직계 남자친족 마르켈루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모두 요절해버렸다. 또 티베리우스의 친동생으로 조카사위이자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의 아버지 대 드루수스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 생전부터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과 측근들에게 자신의 후계자로 진지하게 고려중이라고 했고 여러 정황상 후계자가 되는 것이 진짜 유력했다. 하지만 드루수스는 집정관 선출 후, 게르마니아 전쟁 개선식 거행 직전 낙마사고로 요절해 아우구스투스는 이 사건 당시 하늘에 대고 신을 원망했고 죽은 양자의 동상을 곳곳에 세워 아쉬움을 표시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70이 다 된 고령의 나이에 그나마 남아있는 남자혈육으로는 누나의 외손자인 대 드루수스의 두 아들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 형제 외에는 없는 상태였는데, 이들마저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전까지 갓 20대에 접어들거나 10대였고 제위를 곧바로 물려받는 것은 불가능했다. 즉, 아우구스투스 입장에서는 티베리우스 외에는 뚜렷한 후계자가 없는 상황였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 내용처럼 어쩔 수 없이 제위를 물려받게 된 셈이다.
[22]
친부모가 모두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라서 혈통적으로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그자체로 평가받는다. 부계는 위세가 대단한 네로 가문이며, 클라우디우스 가문 태생인 할머니를 통해 마르켈루스 가문의 피까지 이어받았다. 또 어머니 리비아는 본래 클라우디우스 가문 전체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풀케르 가문 사람이라서 부모 양쪽을 통해 클라우디우스 가문 중 위세가 대단한 세 가문의 피를 모두 이어받았다. 여기에 더해 어머니 리비아의 법적 출신 가문이 대(大)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와 소(小)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를 배출한 평민귀족가문 리비우스 가였기 때문에 외조부 리비우스 클라우디아누스를 통해 소(小) 카토와도 친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23]
대표적으로는 티베리우스 휘하 군단장 등을 역임한 파테르쿨루스 등이 있다.
[24]
7월 율리우스, 8월 아우구스투스에 이어 9월을 티베리우스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황제가 12명을 넘어서면 어쩔 건데?라고 티베리우스가 일갈하자 흐지부지되었다. 10월은
가이우스, 11월은
클라우디우스, 12월은
네로로 한 뒤
네 황제가 서로 1월을 먹으려고 경쟁할 뻔 했다 카더라
베스파시아누스와
5현제까지 넣으면 절묘하게 12달 완성이다
[25]
여담이지만 9월과 10월을 이름 바꾸려고 시도한 황제가 후대에 있긴 했었다.
기록말살형을 받은
도미티아누스다. 그는 자신의 칭호인
게르마니쿠스와 자신의 이름인 도미티아누스를 각각 9월과 10월의 이름으로 바꾸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재위는 15년에 그쳤고 9월, 10월은 도로 원래 이름으로 돌아갔다. 화려한 토가도 그렇고 티베리우스를 그렇게도 참고했으면서 배울 점은 따르지 못했다 사실 그 밖에도 이름을 바꾸려는 황제는 많았다.
[26]
물론 이런 악평들과는 정반대로, 티베리우스의 이런 정책 덕분에 로마는 탄탄하게 기틀을 잡아갔다.
[27]
얼마나 시민들의 악평이 심했는지 티베리우스가 사망하자 로마 시민들은 티베리우스를 티베레 강에 던져버리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고대 로마에서 시신을 티베레 강에 던져버리는 행위는 역적에게나 처해지던 부관참시급 벌이었다.
[28]
보통 통화나 비석 등에 새겨진 금석문들.
[29]
사실 칼리굴라도 사치를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활용했기 때문에 사치를 하긴 할지언정 일정 수준을 넘기는 일이 없었다.
[30]
원로원 입회 때마다 늘 가벼운 흉갑 위에, 화려하고 고급스런 토가를 걸쳐 입던 차림으로 유명했다.
[31]
수에토니우스가 워낙 안티였기 때문에 과장도 많고 뻥도 많다는 평이다.
[32]
수에토니우스는 그러면서도 초능력이 1~2분 뒤에 사라졌다고 기록했다. 그냥 밤눈이 밝았던 거 아닌가
[33]
트라야누스에게 제위를 넘겨주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별다른 행적이 없는 네르바는 제외한다.
[34]
한 일화에 따르면, 자신에게 커다란
게와
숭어를 바치려는 어부를 휴식을 방해했다면서, 숭어를 어부의 배에 문지르게(숭어 비늘은 따갑다고...)한 다음, 게의 집게로 어부를 거세시켰으며 절망한 어부는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한다.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에 나온 이야기이긴 한데, 이 어부가 온 방향이 하필 영 좋지 않았다. 들어가지를 못하게 막으니까 절벽을 타고 올라와서 황제에게 바쳤는데 티베리우스는 이 어부가 휴식을 방해한 것만큼이나 절벽에서 나타난 것에 더 식겁했다고.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XX야 다만 수에토니우스의 신뢰도를 고려하면 이 역시 그냥 뜬소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도 암살 음모에 대한 편집증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티베리우스라면 보였을 법한 반응이긴 하다.
[35]
아우구스투스 시절 이곳저곳 원정을 다녔기 때문이다. 아마 그가 가보지 않은 제국의 중요 지역은 이집트와 아프리카 정도일 것이다.
[36]
이 사람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형 처분에 서명한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 그 사람이다.
[37]
티베리우스의 긴축정책에 대한 정당화는 위의 각주를 참조할 것.
[38]
티베리우스는 20대부터 50대까지 30여년을 게르마니아에서 근무한 인물이고, 선제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프로젝트를 동생, 조카, 아들과 진두지휘했다. 따라서 제국 내 엘리트 계층 중 게르마니아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39]
돈을 통크게 쓰면 인기가 유지되지만 재정에 빨간불이 켜지고, 돈을 아끼면 재정이 건전해지지만 인기가 꽝이 되는 것은 모든 로마 황제들의 딜레마였다. 의외로 로마 황제는 그렇게 돈을 마음껏 쓸 수 있는 부유한 존재는 아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군 개혁으로 60개에 달했던 군단의 수는 28개 군단으로 줄어들면서 그 수가 군단병과 보조병을 합쳐서 30만명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이로 인한 낮은 선방어의 병력 밀도는 훗날 국경선에서의 압력이 가중되고 내부 역량을 뒤떨어지는 시기에 선방어의 한계를 노출시키지만, 이런 적은 수조차도 그리 좋은 대우를 받지 않고 잘 관리되지 못하는 현황이었다. 이렇게 지출이 나갈 부분은 많은데 황제 속주는 이집트를 제외하면 거의 다 개발이 덜 된 변방이라서 세금도 생각보다 별로 걷히지가 않으니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40]
그만큼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력은 굉장했다. 식량 위기가 발생하였을 때 '원로원에서 토의해서 해결하십쇼~'하고 넘겨주었는데 원로원 의원들이 갑론을박만 펼칠 뿐 뾰족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자 지친 시민들이 항의하기 시작했고 이를 활용해 아우구스투스는 사제를 털어 동방에서 곡물을 사서 본국에 공급하고 식량 관리 권한을 황제의 권한으로 가져온다던가 가족 내부에서 간통 사건이 일어나자 가부장권을 활용해 매우 가혹한 형벌을 내리고 창피하다며 가택에 칩거하자 원로원에 심어둔 황제파 원로원 의원들과 토론만 거듭할 뿐 결론을 나지 않는 원로원에서 제발 나오라고 간청하도록 하는 교묘한 방식으로 제정을 확고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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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합리적이고 쓸데없는 허례허식을 경멀하는 쿨하고 (긍정적인 의미에서) 소박하고 겸허해보이는 모습으로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당대의 기준에서 보면 이것은 쿨하고 겸허하다기보다는 위선적이고 무례한 태도로 보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가 로마 제정(원수정)의 황제로써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는데 그 권력을 쥔 당사자가 "왜 날 그렇게 떠받들고 신격화하려 드는 거냐?" 라고 비아냥거리고 따진다 한들 "그럼 앞으로는 당신을 대등한 공화국 시민으로 대하겠소" 라고 반응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관점으로 비유해보자면 직장 상사따위가 "날 어려워 할 필요 없다. 한 가족처럼 편히 대하라"고 한다고 진짜 그렇게 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눈치없는 사람, 사회생활 못하는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인데, 하물며 티베리우스는 고대의 황제(군주)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소리를 어쩌다 한번 인사치레로 한 것도 아니고 계속 해댔으니 원로원 의원들은 당연히 빡쳤을 것이 뻔하다. 티베리우스가 원로원 의원들을 상대로 "이런 태도는 곧 겸손이 아니라 위선의 징조인거요" 라고 말했을 때 내심 "그건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거든!!" 이라고 분통을 터트렸을 의원들이 분명 많았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황제이므로 그런 불만을 밖으로 터트려 지적할수조차 없다. 게다가 직설적이면서도 냉소적인 그의 성격과 태도까지 더해지면, 당연히 주변인들의 평가가 좋을 리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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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대장, 병사들에게 아그리파는 인격자라는 매력 외에도 자신과 같은 출신이라는 점에서 큰 호감을 샀다. 티베리우스의 동생 드루수스는 형 티베리우스처럼 출신, 능력을 따지지 않고, 부하의 성실함만을 기준으로 부하들에게 상을 주는 것으로 유명하면서도, 사람 자체가 자신의 장남 게르마니쿠스처럼 대단히 인격적이고 쾌활하고 다정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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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총독 임명 권한을 가지는 국경 속주들과 아우구스투스가 개인 영지로 삼아버린 이집트 속주를 제외하고 이미 속주 안정화가 완료되어 편안했던 속주들은 원로원에 총독 임명 권한을 넘겨주었다. 어찌보면 국경 방비와 수입도 안나는 국경 속주를 황제가 떠맡은 것 뿐만 아니라 이곳에 밀집되어 있던 군단을 지휘하는 총독을 자신의 수족으로 앉힘으로써 야전 군단을 황제의 통제하에 두는 작용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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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원로원 회의에 참석해 법안을 설명하다 응~ 뭐라고? 원로원 의원도 아닌 찐따라서 안들리는데?~ 라는 말까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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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을 알고 격노한 젊은 시절의 티베리우스를 말리기까지 했다. 흥미로운건 자신의 욕은 참아넘겨도 자신의 친족을 건드는 것은 용서하지 않았는데 만약 혈족을 욕하다가 걸리면 그대로 모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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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렇게 된 건 원로원의 잘못도 크다. 티베리우스도 치세 초기에는 원로원과 협력하려고 상당히 노력했다. 문제는 원로원이 티베리우스에게 어려운 일들을 몽땅 떠넘기고는 "우리는 거수기인데 뭐하러 물어보냐?"는 식으로 책임회피를 해버린 것. 사실상 원로원이 제 기능을 못 하는 상태였다. 특히 원로원은 무능하기 짝이 없어 제국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도 못했다. 그러니
칼리굴라는 참다 못해 원로원에게 "내 애마를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해야 겠다"고 비꼬며, 무능함을 질책했다. 여러 차례 비난과 힐책을 해도 별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티베리우스가 이럴 바에 그냥 나 혼자 통치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만 어차피 원로원은 실권을 가지지 못했고, 유력 원로원 의원은 황제의 견제대상이 되거나 음모에 휘말릴 수도 있었으며, 야심있고 능력있던 원로원 의원들은 제정 전복을 꾸미다 사형당하는 등 아우구스투스 시절부터 원로원의 정치 참여에는 여러 제약이 있었다. 그리고 군단을 거느린 속주 총독직의 경우 어차피 원로원의 유력 귀족들은 임명되지 못하였고 대개 신진 가문이나 비유력 가문 출신들이 임명되었다. 네로 시절까지 고위 귀족 및 황실과 혈연이 있던 귀족들은 종종 음모를 꾸미거나 연루되어 숙청당하는 일이 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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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대표적인 차이점이다. 티베리우스는 재위 초반과 달리 후반부터는 통치만 유효하다면 원로원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접근했다. 여기에는 원로원에게 협력의 손길을 먼저 내민 티베리우스를 원로원에서 삐딱하게 바라본 이유도 있겠지만, 두 황제의 스타일이 달랐던 이유가 컸다. 아우구스투스는 통치체제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중시했고, 티베리우스는 이를 무시한 독선적인 통치를 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로마 황제는 티베리우스 하에서 수도 로마를 비워도 통치할 수 있는 견제받지 않는 절대권력이 되어갔고, 로마는 전제군주제가 된다. 하지만 이 때문에 칼리굴라가 집권해서 벌인 짓에는 티베리우스도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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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상황은 칼리굴라가 4여년 만에 암살당하고 종국적으론 티베리우스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 중 율리우스 가가 먼저 사라지고, 남은 본가까지 완전히 멸문한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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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으로서의 삶 자체가 말 그대로 굴곡의 연속이었다. 죽기 전까지 사이가 험악했던 친어머니와의 관계, 마음의 안식처를 준 친동생의 요절, 행복했던 가정생활도 강제 이혼과 재혼 등으로 파탄, 아끼던 조카이자 양아들 게르마니쿠스의 죽음과 이로 인해 발생한 소문과 오해로 벌어진 대 아그리피나와의 대립, 외아들 드루수스의 의문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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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칼집에 꽂아두고 은근한 협박을 가하는 것과 이것을 실제로 휘두르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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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파시아누스 때 근위대를 해체하고 무력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한번 찾아왔는데, 그 역시 정권 강화를 위해 근위대를 유지해야 한다는 유혹에 굴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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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대
아그리피나와 관련된 일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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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낌새를 눈치챈 티베리우스가 재빨리 세야누스를 숙청해버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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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렇게 된 것은 황제의 지위를 애매모호한 상태로 만든
아우구스투스의 책임도 있다. 아우구스투스 본인이야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하며 굉장히 독특한 상태의 지위에서도 별문제 없이 제국을 통치했지만, 그만한 정치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세계 역사를 모두 뒤져도 흔치 않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정치 형태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티베리우스는 제국 운영에 대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을 택한 것이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그것대로 큰 문제이다. 아우구스투스가 그랬던 것처럼 제국 운영에 전권을 제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오직 티베리우스 그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까딱하면 주위를 다 파괴시킬 폭탄을 만들어 놓은 것과 같고, 제국의 역사가 증명하듯 그처럼 다루기 힘든 정치 폭탄은 제국이 이어지는 내내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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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사실 비용이 만만치 않다.
아이슬란드의 주된 산업 중 하나는 풍부한 자연 에너지를 이용한 알루미늄 제련인데, 2008년에 가동을 시작한 알루미늄 제련소 한 곳을 운영하기 위해 700MW, 아이슬란드 전체 전력량의 1/3에 달하는 수력 발전소를 추가로 건설해야 했다. 다른 예로, 세계 최대의 알루미늄 제련 회사가 노르웨이에 있는데 풍부한 수력발전자원을 이용한다. 산유국인 노르웨이에 전기자동차가 아주 많이 보급된 여러 이유 중 하나. 애플은 이 회사제 알루미늄을 사면서 친환경 소재를 쓴다고 광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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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3세의 황제 즉위 이후 열린 연회에서도 제일 귀한 손님에게 내준 식기가 알루미늄 식기였고 그다음이 금과 은으로된 식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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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가성비가 개판이라 막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티베리우스는 쓸데없는 재정 지출을 싫어하는 타입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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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황제는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행정에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였고, 특히 원로원과 지속적으로 마찰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그렇다.
[59]
물론 원로원과 시민들은 굴욕적이라고 비난하며 다키아의 완전 정복을 주장했지만
[60]
군인 황제 시대때의 황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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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의외로
그리스도교에서는 티베리우스에 대한 악평은 하지 않는다.
신약성경
누가복음의 본문에서 티베리우스는 공생애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때의 일이다"라고 언급되고는 더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간접적으로 언급된 것도, 예수 그리스도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며 유대인들로부터 로마 제국의 권위를 옹호한 사례 정도가 있을 뿐이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황제에게 돌리는 것은, 예수 자신의 사상으로 볼 때도 복음서 저자의 의도로 볼 때도 굉장히 어긋난 생각이다. 실제로 당시 이스라엘 식민지 행정관이던
본디오 빌라도에게 책임이 있는가 없는가도 의견이 분분한 상황에, 거의 대륙 하나만큼 떨어져 있던 티베리우스에게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62]
개역한글판 성경전서의 네 복음서에 등장하는
라틴어 인명 대부분이 그렇다. '
아우구스투스'를 '아구스도'로, '
클라우디우스'를 '글라우디오'로 '
폰티우스 필라투스'를 '본디오 빌라도'로, ''
코르넬리우스'를 '고넬료'로 부르는 등. 전부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알고 있는 라틴어 인명의 '-us'를 '-o'로 바꾸고, 'ㅋ, ㅌ, ㅍ' 등의 격음을 'ㄱ, ㄷ, ㅂ' 등의 평음으로 바꾸면 대충 개역한글판 성경전서에서의 표기가 나온다.
[63]
부두 입항을 빌라 요비스 쪽에서 봉화를 통해 허락해야 될 정도로 경비가 삼엄해, 총독들 역시 입항 보고 전에 따로 이를 우선 보고한 다음 티베리우스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64]
하나는 친아버지, 둘째는 아내였던 빕사니아, 셋째가 드루수스.
[65]
이때 "당신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변할지 두려워"라고 얘기하는데 그의 우려대로 티베리우스는 점차 권력의 괴물이 되어간다.
[66]
http://www.youtube.com/watch?v=15u7gDUo-VE&feature=related 에서 확인 가능. http://games.ea.com/cncmovies/tiberium.html 의 C&C-Nod campaign-Kane provides extensive insight on tierium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67]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주연, 그리고
트로이에서
프리아모스왕을 맡아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68]
또 피터 오툴은 2003년 영화 '아우구스투스'에서는 노년의 아우구스투스도 맡은 경력이 있다.
[69]
영화제작 과정에서도 이 점 때문에 더 자극적으로 만들라는 제작사의 요구로 감독이 두번이나 강판되었다. 그리서 틴토 브라스 외에 감독이 둘이나 더 있고, 아예 틴토 브라스는 자신의 영화라고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까지 했다.
[70]
다만 그저 살색영화라고 폄하하기에는 출연진이 후덜덜한데, 주연인 칼리굴라역의
맬컴 맥도월은 물론이고 티베리우스 역을 맡은 피터 오툴, 거기다 네르바 역을 맡은 것은 당대 영국 셰익스피어극의 1인자였던
존 길구드경이라는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한다.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만들려고 했던 게 고작 포르노라니 싶기도 한데, 포르노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또 배우들 연기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극중 캐릭터 내면묘사, 스토리 라인, 소품도 꽤나 탄탄한지라...
[71]
소년, 소녀뿐 아니라 온갖 이형의 사람들을 모아서 카프리 섬을 무슨
복마전처럼 만들어 놓은 것으로 나온다.
[72]
로마의 12대 황제인
네르바의 할아버지다.
[73]
칼리굴라와 게멜루스와 함께 식사를 하다가, 칼리굴라와 눈을 마주보면서 옆에 게멜루스에게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면 게멜루스를 죽일테니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다.
[74]
다만 카프리 섬에서 게멜루스를 곁에 끼고 칼리굴라에게 포도주를 권했는데 그 안에는 독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영악하게도 칼리굴라는 그 잔을 게멜루스에게 권했고 아무것도 모르던 게멜루스가 그걸 마시려 하자, 티베리우스가 그 잔을 뺏어 들고는 옆에 있던 나체 차림의 여시종에게 마시라고 준다. 당연히 그 여시종은 사망(...).
[75]
겉모습에서도 배우인 피터 오툴은 나이를 먹은 후에도 상당한 미중년이었지만, 여기서는 흡사 마약중독자처럼 퀭하게 분장을 해놨다.
[76]
이때 옆에서는 완전 백치상태로 설정한 클라우디우스가 칼리굴라의 춤을 보고 박수를 치며 좋아한다. 물론 클라우디우스의 치적을 보면 알겠지만, 클라우디우스는 어느 정도 장애는 있었을지언정 이런 완전 백치는 절대로 아니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을 참고.
[77]
네르바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을 동정하며 옆에 있던 칼리굴라에게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라고 안타까워 하지만, 칼리굴라는 태연하게 "
이들이 좋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황제께서 사형을 선고하실 수 있었겠나"라며 응수한다. 그러자 네르바는 이 작은 폭군을 보며 "완벽한 논리군요"라고 체념한다.
[78]
역사 속 네르바는 티베리우스보다 4년 먼저인 서기 33년에 카프리 섬에서 노환으로 죽었다.
[79]
이 장면에서 아리우스와 대화하는 티베리우스를 벤허가 굳은 표정으로 바라본다. 자기 고향과 민족을 탄압하는 장본인이기 때문.
[80]
작중에서도 나이가 많게 나오지만, 당시 티베리우스 배역을 맡은 배우 조지 렐프도 나이가 매우 많았는데 그 다음해인 1960년에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