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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45대 황제
콘스탄티누스 2세 CONSTANTINVS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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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콘스탄티누스 (Flavius Claudius Constantinus) |
출생 | 316년 2월 |
로마 제국 빈 | |
사망 | 340년 (향년 24세) |
로마 제국 아퀼레이아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337년 5월 22일 ~ 340년 (3년) | |
전임자 | 콘스탄티누스 1세 |
후임자 |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
부모 |
아버지 :
콘스탄티누스 1세 어머니 :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 |
형제자매 |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플라비아 발레리아 콘스탄티나, 헬레나 |
종교 | 아리우스파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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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제45대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차남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 두 동생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와 함께 제국을 삼분할했다. 그러나 340년 자신에게 아프리카 속주를 넘기지 않는 동생 콘스탄스를 응징하고자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가 피살된 뒤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2. 생애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에 따르면, 그는 316년 2월에 아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이 기록을 따라 콘스탄티누스 2세의 생년을 316년으로 정했지만, 일부 학자들은 314년 또는 317년 2월 생이라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1세와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의 첫 아들이라는 정설과는 달리 콘스탄티누스 1세가 아를에 잠시 들렀을 때 그곳 유지의 딸과 관계를 맺으면서 생긴 사생아라는 설을 제시하는 학자들도 있다. 조시무스가 이런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 아들이 콘스탄티우스 2세라고 밝혔는데, 이는 콘스탄티누스 2세를 혼동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기록말살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그가 정말로 파우스타 황후가 낳은 첫 아들인지 사생아인지는 불분명하다.317년 3월 1일 이복형 크리스푸스와 사촌인 리키니우스 2세와 함께 시르미움에서 카이사르로 선포되었다. 이후 320년, 321년, 324년, 329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첫번째와 네 번째 집정관 때는 아버지와 함께 했고, 두 번째와 세 번째로 집정관을 맡을 때는 크리스푸스와 함게 했다. 동방의 정제 리키니우스는 자기 아들이 집정관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콘스탄티누스의 아들이 집정관에 연이어 선임된 것에 불만을 품고 321년에 동방에서 리키니우스 2세를 집정관으로 선언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간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이어진 내전 끝에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승리하면서 로마 제국 전역의 주인이 되었다.
326년 크리스푸스가 계모 파우스타와 간통한 혐의로 긴급 체포된 뒤 별다른 재판도 받지 못하고 처형된 후,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를 갈리아 방면군 사령관으로 선임했다. 물론 당시 그의 나이가 10살에 불과했기에, 이는 명목상의 지위일 뿐이었다. 331년에 알라마니쿠스라는 명예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고트족의 발칸 침략을 응징하기 위한 원정군 사령관으로 발탁되었다. 물론 당시 15살이었고 전쟁 경험이 부족한 그가 총사령관 역할을 제대로 하긴 힘들었을 테고, 실질적인 지휘는 경험많은 장군들이 맡았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1세 본인은 마르키아노폴리스에 머물면서 상황을 주시했다.
332년 3월 또는 4월 초, 콘스탄티누스 2세를 위시한 대규모 야전 기동대가 다뉴브 강에 새로 건설된 석조 다리를 건너 고트족의 영역으로 쳐들어갔다.( 콘스탄티누스의 고트족과 사르마티아 원정) 원정군은 고트족 마을들을 불태우고 가축들을 포획했으며, 고트족이 쌓아뒀던 식량을 모조리 빼앗았다. 고트족은 급히 일찍이 복속시켜뒀던 사르마티아인들의 영역인 크림 일대로 도피했지만, 로마군이 거기까지 쫓아온데다 4월 날씨가 비정상적으로 추워서 상당수가 얼어죽자 어쩔 수 없이 로마군과 정면 승부를 벌였다. 4월 20일, 양군은 오늘날 불가리아 바르나 인근에서 격돌했는데, 전투 결과는 로마군의 완승이었다. 오리고 콘스탄티니 칙령에 따르면 10만에 달하는 고트족이 기아와 추위로 죽었고 다수가 전사하거나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고 한다.
결국 고트족은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로마 황제에게 평화를 청했고, 콘스탄티누스 1세는 고트족 왕 아리아리크의 아들인 아오리크를 포함한 고급 인질을 받고 제국에 매년 공물을 바쳐야 하며, 40,000명의 병력을 로마군에 공급해 제국 국경 방비에 협조하게 하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이리하여 고트족은 제국의 봉신이 되었고, 콘스탄티누스 1세는 원로원으로부터 고티쿠스 막시무스 칭호를 두 번째로 받았으며, "Debellatori gentium barbararum(야만인 근절자)"라는 새로운 칭호를 추가로 받았다.
333년, 콘스탄티누스 2세는 갈리아 속주의 수도인 트리어로 보내져서 라인 전선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335년 재위 30주년 기념 행사 때, 콘스탄티누스 1세는 후계 계획을 대중 앞에서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2세는 갈리아, 히스파니아, 브리타니아 속주를 담당하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를 담당하며, 콘스탄스는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담당한다. 여기에 콘스탄티누스 1세의 두 조카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는 각각 트라키아와 폰토스의 왕으로 선임되었고,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았다. 콘스탄티누스 1세 본인은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군림하면서 아들들을 감독하기로 했다.
그러던 337년 5월 22일,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산 왕조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 사망했다. 당시 갈리아에 있던 그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고, 오직 동방에 있던 콘스탄티우스 2세만이 아버지의 유해를 수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겼다. 황제가 붕어했다는 소식을 접한 황족들이 급히 수도로 달려와서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그해 여름,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를 포함한 황족들과 그들의 지지자들이 대거 피살당했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족 학살 사건) 이 학살이 세 형제가 사전에 짜맞춘 것인지, 콘스탄티우스 2세가 결행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각에서는 세 형제가 학살이 벌어진 직후 동시에 콘스탄티누스 1세와 달마티우스의 화폐 주조를 중단한 것을 볼 때 사전에 짜맞췄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다만 콘스탄티누스 2세는 친족 학살을 내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37년 5월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망한 직후에 발행된 동전들 중 트리어,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특별 주화가 발행되었다. 이 특별주화의 앞면에는 "FL MAX THEODORAE AVG"라는 문구와 함께 플라비아 막시미아나 테오도라의 초상화가 실려있고, 뒷면에는 모성을 상징하는 신 피에타스가 오른쪽에 서서 오른손으로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이 실렸다. 여기에 콘스탄티누스의 세 아들의 할머니인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를 위한 기념 주화도 발행되었다. 이 동전은 트리어에서 대량 주조되었지만, 로마와 안티오키아에서는 상대적으로 적게 생산되었다.
이전에는 테오도라라는 이름으로 발행된 동전은 없었으며, 헬레나 역시 10여 년전에 사망한 후로 그녀의 동전이 주조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이 특별주화에 돌연 등장한 것은 337년 여름에 벌어진 학살과 깊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테오도라를 모성의 여신 피에타스로 묘사한 것은 그녀의 아들과 손자가 절멸해버린 것에 대한 사죄의 의미가 담겨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헬레나의 주화에 'PAX(평화)'라는 문구가 새겨진 것 역시 콘스탄티누스 왕실 내의 유혈극이 종식되기를 바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동전들이 유독 트리어에서 대량으로 주조된 것을 볼 때 콘스탄티누스 2세가 테오도라와 헬레나에게 사죄하기 위한 이같은 사업을 주도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콘스탄티우스 2세와 콘스탄스는 형의 뜻에 마지못해 따르면서도 성의의 표시로 약간만 주조하는데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337년 8월,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형제는 시르미움에 모여서 향후 계획을 논의했다. 그 후 9월 9일에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아우구스투스를 칭했으며, 제국을 정식으로 삼분할했다. 그러나 초기부터 다양한 문제를 놓고 형제들 사이에 분쟁이 벌어졌다. 그는 콘스탄티우스 2세로부터 추방형을 선고받은 뒤 트리어로 피신한 알렉산드리아 주교 아타나시오가 자신의 교구로 돌아갈 수 있는 허가증을 내렸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조치는 제국 전체에 권력을 행사하려는 욕망이 담긴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2세는 형의 허가증을 대놓고 무시하고 아타나시오의 복귀를 불허했다.
그 외에도 여러 사안을 놓고 분쟁이 오간 끝에, 세 형제는 338년 8월 3일에 모에시아 속주의 수도인 비미나시움에서 다시 모였다. 추방된 주교들이 자기 교구로 돌아가게 하는 사안은 쉽게 정해졌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관할권과 달마티우스에게 속했던 아카이아, 마케도니아, 트라키아의 관할권이 누구에게 속해야 하는지 여부는 쉽사리 결정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분쟁 지역을 막내인 콘스탄스에게 넘김으로써, 제국을 공평하게 3개로 분할해 평화를 확실히 보장하기로 결의했다.
고대 사료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합의가 맺어진 뒤에도 당시 15~18세였던 콘스탄스의 양육권을 행사하려 했다고 한다. 그는 막내 동생의 영역에 법령을 반포하고 고위 관리를 임명했다. 콘스탄스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트라키아를 넘기고 동맹을 맺으려 했다. 콘스탄스가 순순히 따라주지 않자, 그는 힘으로 영역을 확장하기로 했다. 조시무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스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고 한다.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2세는 영토 재분배를 요구했으나 콘스탄스에게 거절당하자 전쟁을 단행했다고 한다.
340년 초, 콘스탄티누스 2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그는 동생이 이 당시 발칸 반도의 니사에 머물고 있어서 이탈리아에서 당장 방어할 수 없을 테고, 그의 형제의 영역에 근무하는 군대와 관리들은 선임 황제인 자신에게 넘어갈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동생이 일리리아에서 급히 파견한 군대와의 첫번째 교전에서, 콘스탄티누스 2세는 전사했다.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전투에 무모하게 뛰어들었다가 죽었다고 한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그가 "위험을 경멸하면서 부주의하게 싸우다 죽었다"고 기술했다.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콘스탄스가 파견한 군대의 사령관은 거짓으로 패퇴하면서 매복한 지점으로 적을 유인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를 의심하지 않고 추격하다가 매복에 걸렸고, 병사들이 궤멸될 때 자신 역시 낙마하여 많은 상처를 입고 죽었다고 한다.
콘스탄스는 형의 유해를 알사 강에 던지게 한 뒤 형의 영역을 모조리 자기 것으로 삼은 후 기록말살형에 처해 그의 이름이 적힌 모든 기록과 비문을 파괴하게 했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335년 이전에 결혼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기록말살형으로 인해 남아있는 자료가 희박해서 결혼 상대와 후손은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