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22대 황제
마크리누스 MACRINV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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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 (Marcus Opellius Macrinus) |
출생 | 165년 |
로마 제국 마우레타니아 | |
사망 | 218년 6월 (향년 53세) |
로마 제국 카파도키아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217년 4월 11일 ~ 218년 6월 8일 (1년 58일) | |
전임자 | 카라칼라 |
후임자 | 엘라가발루스 |
배우자 | 노니아 켈사 |
자녀 | 디아두메니아누스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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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크리누스는 카이사레아 출신의 무어인으로 아주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따라서 그를 정신력으로 궁정까지 올라간 나귀에 비유하는 것은 아주 적절해 보인다. 특히 그는 무어인들의 관습에 따라 한쪽 귀를 뚫었다. 출신 등에서 오는 이러한 약점은 그의 강직한 성품에 가려졌다. 그러나 법과 판례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면 법조문 등을 충실하게 따르기는 했지만 이에 대한 지식은 정확하지 않았다.
디오 카시우스 79. 11
디오 카시우스 79. 11
제22-1대 로마 황제. 세베루스 왕조의 카라칼라 황제를 시해하고 제위를 차지한 최초의 현직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 황제로 잘 알려져 있다. 로마 역사상 최초의 순수 기사계급 출신으로 제위에 오른, 비(非) 원로원 계급 출신의 황제로, 재위 내내 로마에 방문하지 않은 최초의 로마 황제, 로마 제국 동부에서만 머문 황제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무어인 황제로 유명했고 조각상이 흑인처럼 묘사되어 흑인 내지 흑백혼혈이라는 주장도 있었던 로마 황제였다. 하지만 현대 이후에는 베르베르 혈통의 푸닉 지역 출신 로마인으로 밝혀지면서, 흑인이나 흑백혼혈 로마인이라는 주장은 크게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
2. 생애
2.1. 출신과 제위 전까지의 생애
164년에 마우레타니아 해안의 항구 도시 카이사레아(현 알제리의 셰르셸)에서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마크리누스는 대개의 베르베르 혈통 무어인답게 귀 한쪽에 귀걸이를 뚫었던 것으로 유명했다.당대 디오 카시우스로 대표되는 고대 역사가들은 마크리누스가 비천한 태생의 마우레타니아 현지 로마인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고대의 역사가들이 제시하듯이 그렇게 비천한 집안 출신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근현대 이후 학자들은 마크리누스가 즉위 당시 원로원 의석도 가지지 않은 마우레타니아 태생의 로마인이었던 만큼, 그 누구보다 귀족적이었던 세습 원로원 의원 디오의 눈에는 매우 비천했다고 까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1]
마크리누스의 부모는 노동 빈민이 아니라 중산층에 속하는 에퀴테스(기사 계급)였고, 마크리누스는 어린 시절부터 수년간 변호사 수업을 받아 능력있는 변호사로 이름을 일찍이 날렸다. 그가 변호사로 두각을 나타낸 분야는 많은 교육과 전문적 훈련이 있어야 성공이 가능한 회계와 재산 분쟁 분야였다. 따라서 그가 미천한 출신이었다거나, 좋은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런 그가 처음 출세의 기회를 잡은 것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래에서 근위대장을 지낸 막강한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의 재산 관리인이 되었을 때였다. 그는 재산 관리인을 넘어, 수년에 걸쳐 그는 숙련된 변호사로 명성을 얻었고, 법 지식과 실무 해석 능력이 탁월해, 법학자들의 시대로 불린 세베루스 왕조 등장 속에서 곧 두각을 나타냈다. 그를 고용한 플라우티아누스는 외사촌형 세베루스 황제에게 그를 추천했고, 세베루스 황제는 곧 마크리누스를 주목했다.
플라우티아누스 밑에서 당시 로마 지도층과 인연을 맺게 되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게 추천받은 일은 마크리누스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됐다. 세베루스 황제는 마크리누스의 능력을 인정해, 그에게 법률과 회계 업무가 동반된 관료 직책을 시작으로, 황제의 행정 업무를 담당한 관료 자리를 내렸다. 이렇게 마크리누스는 출세가도를 달렸는데, 이때 마크리누스를 신뢰해 그를 이끌어준 이는 참 얄궂게도, 플라우티아누스와 견원지간이었던 공동황제 카라칼라였다. 카라칼라는 장인과 처가 식구 쪽과 관련된 인사라면 이를 갈고, 그들을 배척했는데, 이상할 만큼 마크리누스를 신뢰하고 좋아했다. 카라칼라는 아버지 밑으로 간 마크리누스에게 손을 내밀었고, 마크리누스는 플라우티아누스 쪽에 있다가 스카우트 되는 방법으로 공동 황제 카라칼라 파벌에 합류했다.
세베루스 치세 후기, 마크리누스는 카라칼라의 신임 아래 승승장구했다.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와 대립할 때부터 마크리누스를 자신의 최측근 세력으로 분류했고, 212년 단독 황제로 모든 권력을 쥔 직후 파피니아누스를 숙청한 뒤, 마크리누스를 근위대장에 임명했다. 그는 카라칼라의 모든 순행를 따라 다녔고, 동부에서는 군사원정과 여행을 병행하던 카라칼라를 직접 모셨다.
2.2. 카라칼라 암살 사건
카라칼라는 솔직하고 마초적인 매력과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병사들의 사랑과 지지를 몸소 받았지만, 잔인하고 충동적이었다. 또 그는 독불장군이었고 부하들에게 관용과 자비를 베풀지도 않았다. 이런 가운데 카라칼라는 아나톨리아, 레반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연이어 잔혹한 행동을 벌이고, 파르티아와 전쟁하는 중에 잦은 실책을 저질러 병사들로부터 불만을 샀다. 그는 측근과 친구들에게도 점점 위험인물로 분류됐다.로마에 머물 때 카라칼라는 늦은 밤에 사람을 보내 원로원을 소집하고, 회의가 열릴 쿠리아 율리아 입구를 폐쇄하며, 원로원 의원들이 반나절 이상 잠을 못 자고 대기하도록 했다. 그 외에도 친구들과 어머니 율리아 돔나가 주재한 재판장에 방청객으로 참가해 훼방을 놓는 등 기행을 벌였다. 또 그는 스스로 전차기수가 되어 청색당 유니폼을 입고 전차를 몰고, 횡설수설하는 등 종잡을 수 없는 행동으로 모두의 걱정을 샀다. 따라서 발비누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무나티우스 술라 우르바누스 등 카라칼라의 오랜 친구 집단 출신 원로원 의원들은 점점 카라칼라와 거리를 두면서, 율리아 돔나의 업무 처리를 돕는 형태로 정치적 행보를 다르게 걸었다.
그러나 마크리누스는 확실히 카라칼라의 신임을 받았던 만큼, 동부 순행 중인 카라칼라가 군사행동을 할 때마다 요직을 배정받았고 217년 파르티아 원정 계획 당시에도 경호 외의 다른 임무를 배정받았다.
기번으로 대표되는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무렵 카라칼라가 폐위되고 마크리누스가 제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예언이 나돌았다고 한다. 이는 카라칼라의 신임을 받는 마크리누스를 크게 동요케 했고,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그래서 마크리누스는 자신의 목숨과 안위를 위해 예언만으로도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해 잔인하게 죽일 카라칼라를 살해하기로 결심했다. 이 계획은 은밀하게 진행됐고, 계획대로 217년 카라칼라는 루나 신전 침배 중 암살됐다. 이때 마크리누스는 당시 행군 중인 로마군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2]
217년 4월 8일 카라칼라가 살해되었을 때 제국에는 제위를 계승할 만한 명백한 후계자가 없었다. 카라칼라에게는 자식이 없었던 데다 공개적으로 후계자를 지목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암살의 주역들에게는 자신들이 선택한 사람을 제위에 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사실 카라칼라를 살해한 목적 자체가 이미 마크리누스를 황제로 올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계승 문제는 이미 결정된 것이었지만, 암살 공모자들은 아주 신중하게 굴었다. 마크리누스는 사흘을 기다린 후 217년 4월 11일에 휘하 군대로부터 황제로 추대되었다. 마크리누스가 속주 출신, 그것도 여타 다른 북아프리카 일대 속주들과 달리 로마 식민시 출신이 아닌 사람 중 처음 황제가 된 사례였다. 아울러 그는 이전의 여타 다른 기사계급 출신 로마황제들과 달리 제위 등극 당시부터 원로원 의원이 아니면서 제위에 오른 최초의 황제였다.
2.3. 동방에서의 실책
제위에 오른 마크리누스는 꼭 필요한 몇몇 사람만을 처형하는 것으로 치세를 시작했고[3] 몇몇 속주 총독을 자신의 출신 계층 측근과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로 바꿨다. 이때 마크리누스에게 처형된 사람은 카라칼라 비호 아래에서 아나톨리아 지방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시리아 안티오키아에서 주민들의 재산을 강탈하고, 온갖 악행으로 물의를 빚은 관료와 프라이토리아니 장교들이었다.그는 이렇게 카라칼라 아래에서 악행을 벌인 인사들을 숙청했고, 곧 속주 총독 중 일부를 물갈이했다. 이렇게 속주 총독 자리에 임명된 원로원 의원 중 한명에는 디오 카시우스도 있었다. 단, 마크리누스 몰락 이후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와 관계가 나쁘지 않았고 디오가 계속 승승장구했으므로, 디오 카시우스가 마크리누스 쪽 인사라서 속주 총독으로 벼락출세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마크리누스의 최대 실수는 그가 카라칼라의 모후 율리아 돔나와 사이가 틀어진 탓에 몰락했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조치가 실책이 아님에도 끝내 마크리누스 정부가 어이없이 붕괴하는 이유가 됐다.
율리아 돔나는 아들 카라칼라가 암살된 이후, 안티오키아에서 평온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군사들과 공모하는 유혹을 버텨내지는 못했다. 유방암이 진전된 돔나는 마크리누스가 안티오키아를 떠나라고 하자 스스로 굶어 죽는 길을 선택했다. 돔나가 이런 극단적 선택한 진짜 이유는 마크리누스가 황제가 된 뒤, 그녀와 에메사 왕가가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누린 합법적, 편법적인 특권과 영예가 박탈되고 축적해놓은 재물이 모두 국고로 귀속조치된 것이 컸다. 따라서 율리아 돔나는 자신이 모든 것을 잃고 온갖 치부가 드러난 채 몰락함을 슬퍼했고, 그렇게 죽었다.
이때 마크리누스는 율리아 돔나와 함께 시리아에 와 있던 율리아 마이사와 그녀의 두 딸 일가를 붙잡아 로마로 돌아오지 못하게 했다. 돔나의 여동생 마이사와 조카 소아이미아스, 마마이아 일가의 모든 재산은 동결됐다. 당연한 말인데, 마크리누스의 요청에 따라 시리아 에메사 여인들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아래에서 받은 영예와 특권도 박탈됐다. 즉, 마크리누스는 편법적으로 누린 시리아 에메사 여인과 그 가족들의 황족 지위를 무효화했다. 이때의 이야기에 관해 디오 카시우스는, 마이사의 차녀 마마이아 남편으로 시리아 총독을 지낸 율리우스 게시우스 마르키아누스[4]와 그가 첫 결혼에서 얻은 딸 내외가 마크리누스의 명령으로 에메사로 추방됐다가 모조리 살해됐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진짜 위험 인물인 율리아 마이사를 죽이지 못한 것이 결국 그를 몰락시킨 최대의 실수가 되었다.
이렇게 마크리누스는 세베루스 왕조의 재건 가능성을 차단했다고 안심했다. 헌데 실질적인 관건은 파르티아인들이었다. 그들은 1년 전 카라칼라의 뒤통수 공격에는 대비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217년 가을까지 강력한 군대를 규합한 뒤 많은 병력을 이끌고 로마의 기지로 진군해왔다. 이는 과거 트라야누스 황제가 개전 초기 뛰어난 전공을 세우고 승기를 잡다가, 파르티아의 반격으로 무너진 모습과 묘하게 겹쳤다. 이때 두 진영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니시비스에서 충돌해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 사건이 바로 니시비스 전투인데, 어느 쪽도 우세를 차지하지 못했고 마크리누스는 여기에서 인생 최악의 실수를 범한다. 제위를 차지한 지 얼마 안 된 터라, 그는 파르티아 왕중왕 아르타바노스 4세에게 카라칼라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며 2억 세스테르티우스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점령한 영토들을 포기하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이 강화 협정은 비등비등한 졸전 속에서 완전히 패배하지 않은 로마군을 자극시켰고, 제국 동부 여론을 크게 악화시켰다. 마크리누스가 맺은 굴욕적인 강화 협상 내용까지 알려지자 원로원 내 귀족들과 제국 전역의 시민들은 반발하였고 그의 인기는 추락했다. 당연한 말인데 군인들은 겁쟁이 같은 행동을 벌인 마크리누스를 혐오했고, 군대 안에서의 인기는 급락했다. 게다가 카라칼라가 군에 부여한 특권들을 일부 없애기 시작하면서 군인들의 반발을 더 사고 말았고 스스로 인기를 더욱 떨어뜨렸다. 그렇게 마크리누스는 자신의 제위를 확실히 다지기 위하여 파르티아와 굴욕적인 강화 교섭[5]을 맺고는 전쟁을 끝내버림으로써 오히려 병사들의 눈 밖에 나고 그들이 다시 카라칼라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일을 저질렀다.[6]
2.4. 반란, 그리고 죽음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가짜 안토니누스가 나타났다. 그는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Juila Maesa)의 외손자인, 엘라가발루스로 더 잘 알려진 14살의 바리우스 아비투스였다. 마크리누스의 철저한 대비에도 율리아 마이사는 20년 세월 동안 쌓아둔 로마 제국 전역의 인맥을 동원해 연락을 취했고, 친정이 있는 에메사 왕가의 남은 재산을 올인해 재기의 도박을 벌였다. 때마침 언니 돔나가 자살 전, 카라칼라 측근 및 충성스러운 병사들과 공모하면서 판이 어느 정도 마련됐다는 점, 이 문제로 마크리누스가 로마로 가지 못하고 강제로 안티오키아에 머물게 된 점도 율리아 마이사 입장에선 기회였다. 더욱이 로마에 동결된 세베루스 왕조의 모든 재산을 되찾을 생각이라면, 마이사와 두 딸에게 토착 왕가로 에메사 일대에서 오래 부를 쌓아 둔 시리아 일대의 재산은 아깝지 않았다.마이사의 큰딸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와 오랜 기간 연인인 간니스의 잔꾀에 따라, 그럴듯한 스토리가 완성되자 마이사 모녀는 동방에 있던 원로원 의원, 총독, 군사령관들과 접촉해 방문일을 정했다.
218년 5월 15일 밤, 소규모의 추종자 무리가 율리아 마이사와 섹스투스 바리우스 아비투스를 에메사 근처의 라파나이아(Raphanaea)에 있는 제3군단 갈리카 병영으로 몰래 데리고 갔다. 다음날 아침 군인들이 그를 황제로 추대하고 공개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아비투스가 정말로 카라칼라의 사생아라는 소문에 특히 열광적이었는데, 왜냐하면 카라칼라는 이전의 콤모두스와 마찬가지로 군대 내에서 인기가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마크리누스는 아홉살 난 아들 디아두메니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 직위에 올림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 그는 이를 기회로 병사들에게 하사금을 나눠주며 그들의 신임을 다시 얻어보려 했지만, 대세는 이미 정해진 상태였고 결국 그는 안티오키아로 달아나야 했다.
218년 6월 8일, 마크리누스는 안티오키아 외곽에서 반란군들에게 패한 후 로마에서 지원군을 규합하겠다는 희망을 갖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는 발각되지 않으려고 수염과 머리를 다 밀었지만, 결국 정체가 탄로났고 보스포루스를 건너려고 기다리던 중에 칼케돈(Chalcedon)[7]에서 체포되었다. 거의 같은 시각에 그의 아들 역시 시리아 국경에 있는 제우그마에서 파르티아로 달아나려다가 체포되었다. 마크리누스는 감시를 받으며 남으로 이송되다가, 카파도키아(Cappadocia)[8]에 있는 아르켈라이스(Archelais)에서 백인대장에게 처형되었다. 그의 나이 53세 때였다. 결국 그는 황제로서 로마는 고사하고 유럽 대륙에 발조차 못들인채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그렇게 세베루스 왕조는 지속되게 된다.
그가 몰락하게 된 이유는 파르티아인들과의 전쟁에서도, 엘라가발루스 지지 세력들과의 싸움에서도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서 그의 입지가 손상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군대의 급료와 특권들을 함부로 다루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닫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3. 기타
글래디에이터 2에서는 흑인 배우인 덴젤 워싱턴이 맡았다. 노예 출신으로 설정이 변경되었다.
[1]
디오 카시우스 항목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디오 카시우스는 당대 귀족들 사이에서도 매우 귀족적인 그리스 혈통의 귀족이었다. 그는 같은 원로원 의원, 귀족이더라도 이탈리아 출신인들 라틴어만 쓰고 말하는 것조차 그리스어를 못한 까닭에 천박하고 보잘것없다고 평할 정도였다. 따라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와 황제의 모후 율리아 마마이아가
울피아누스 암살 사건이 벌어진 직후, 군 경력이 상당하고 능력이 뛰어난 디오를 소방수 개념의 집정관으로 추천했을 때, 격분한
프라이토리아니 전체는 공개적으로 디오 카시우스가 집정관 직을 유지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고, 디오까지 살해되면 끝장날 위기에 처한 세베루스 왕조는 디오를 불러 사실상 사퇴 개념으로 정계은퇴를 명했다.
[2]
하지만 뒤의 내용을 보면 마크리누스는 카라칼라를 능가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3]
이때 그가 황제가 될 수 있도록 카라칼라를 암살한 사람도 사형 크리를 먹었다.
[4]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아버지
[5]
금관을 바치는 것이 포함되었다.
[6]
추가적인 내용은
니시비스 전투 항목을 참고.
[7]
튀르키예 이스탄불 맞은 편 보스포루스 해협 동부 해안에 있던 고대의 해상도시.
칼케돈 공의회가 열린 그곳이다.
[8]
아나톨리아 중동부를 일컫는 고대 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