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17대 황제
콤모두스 Commod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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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안토니누스 (Lucius Aurelius Commodus Antoninus)[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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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1년 8월 31일 | ||
로마 제국 라누비움 | |||
사망 | 192년 12월 31일 (향년 31세) | ||
로마 제국 로마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
180년
3월 18일 ~
192년
12월 31일 (12년 29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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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 제호 |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Aurelius Commodus Antoninus August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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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 ||
종교 | 로마 다신교 | ||
부모 |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어머니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 소 파우스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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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외조부
안토니누스 피우스 삼촌 루키우스 베루스 첫째누나 루킬라 둘째누나 파딜라외 11명의 형제자매 첫째매형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둘째매형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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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 브루티아 크리스피나(178 결혼) | ||
자녀 | 없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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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콤모두스의 치세는 한마디로 로마 제국의 재앙이었다.
지금 우리의 역사는 당시의 로마인들과 마찬가지로, 금의 왕국에서 철과 녹의 왕국으로 전락하고 있다.
디오 카시우스 (155년 ~ 235년)[2]
로마 제국의 제17대 황제.지금 우리의 역사는 당시의 로마인들과 마찬가지로, 금의 왕국에서 철과 녹의 왕국으로 전락하고 있다.
디오 카시우스 (155년 ~ 235년)[2]
콤모두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외손자이자, 루키우스 베루스의 조카였으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친아들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다. 풀네임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안토니누스였다.[3] 로마인들의 표현대로 서술하면 제국에 재앙을 안긴 암군이자 폭군이었다.
2. 상세
당대 로마인들과 후대의 대중들은 무능하고 악랄한 황제의 스테레오타입으로 네로와 카라칼라를 거론했지만, 콤모두스에 비하면 양반이라고 말했다.[4] 콤모두스가 이렇게 욕을 먹은 이유는 재위 2년을 제외하곤, 완전히 정사를 내팽겨치고, 제국을 방치하면서, 간신들이 다섯 황제의 해를 수습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등장 전까지 사실상 무정부 상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5]다만, 콤모두스는 초기에는 위험성이 드러나지 않았고 무난한 황제였고, 어떤 면에서는 첫 2년은 평균 정도의 모습 속에서도 나름 아버지처럼 성실하다고 평가받았다. 하지만, 누나와 고종사촌, 조카가 함께 벌인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으로 인해 1년도 안 되어 한 인간의 삶 자체가 완전히 망가져 버린다. 따라서 현대 이후부터는 이런 점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어, 네로와 카라칼라보다 잔인하지 않던 인물로 그나마 동정표를 받고 있다. 또 그는 불운한 폭군이자 암군으로 불린다.
황실에서 현직 황제와 황후의 적통으로 태어난 뒤 정상적인 제왕교육을 받고 즉위한, 최초의 로마 황제였다.[6] 하지만 완벽한 정통성을 갖추고 제왕교육까지 멀쩡히 받은 황제임에도 호부견자의 대표 사례로 항상 거론되는 황제로 당대와 후대 모두에서 역사적으로 공인된, 로마 제국의 암흑기를 연 폭군이자 암군으로 꼽히고 있다. 실제로 콤모두스는 여러 번의 암살 경험 후 얻은 후유증으로 첫 2년을 제외하곤, 과대망상증 환자가 틀림없는 괴물 같은 폭군이자 심각한 정신분열증 및 편집증, 우울증에 시달리며 살았고, 누나인 루킬라에게 죽을 뻔한 이후부터는 심각한 대인기피증과 알코올 의존증 증세까지 시달리는 등 문자 그대로 폐인이 되었다. 이후 황제 부적격자로 흑화되었고, 폭군이자 암군이 되면서 제국을 내팽겨치는 등 피바람과 황음으로 로마 제국을 첫 번째 쇠퇴기로 몰아넣었다.
동시대 콤모두스를 접견한 디오로 대표되는 이들의 기록을 보면, 콤모두스는 엄청난 완력과 큰 키, 떡 벌어진 건장한 체격과 별개로 천성이 착하고 유순한 사람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그가 즉위 전이나 직후 2년 동안 결점도 없었고 암살 직전까지도 그 위험성이 심각한 괴물까진 아니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렇지만 별 이유없이 재위 2년만에 친누나인 루킬라에게 암살될 뻔한 사건을 경험한 이후부터, 정신적인 충격으로 정치에 의욕을 잃고 완전히 망가져 버렸고 이후 등장한 측근들 역시 거진 문제투성이인 터라 잔혹하고 악랄한 구석이 없는 편인 암군임에도 로마 제국 77명의 역대 황제 중 역사상 최악의 황제 중 한 명으로 늘 거론된다.
당대 사람들에게 암살 직후 도미티아누스,[7] 네로를 합친 것보다 최악인 사람이라고 욕을 먹었고, 사후 후대 로마인들에게 카라칼라와 함께 무능함, 악랄함의 대명사로 평가받았으며 부자 세습과 혈통주의 폐단의 상징으로 공인되었다. 다른 로마 황제들은 그나마 업적이 인정되는 사례도 있으나 콤모두스는 해당 사례도 없다.[8][9] 그렇다고 해서 본인이 열정을 보인 취미 활동인 검투사 분야에서 업적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이것도 전혀 없다. 그래서 구경 거리만 제공했을 뿐이지, 트렌드를 주도하지 못 했다고 계속 비난받고 있다.[10]
사실 군인 황제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은 콤모두스가 암살당하고 40여년 가까이 지난 시기인 세베루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암살 이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즉위한 235년이고, 로마 황제들 중 스스로를 군인 황제로 칭하면서 선군정치를 표방하고 로마군과 근위대의 권위를 빌린 인물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콤모두스는 대부분의 연구가들에게 로마 제국 최고의 혼란기인 3세기의 위기 또는 군인 황제 시대의 막을 연 황제로 평가받고 있다. 왜냐하면 콤모두스 시대 때 그가 나라를 방치하면서 측근들에게 정사를 맡기고, 근위대의 정치 개입 등을 크게 키워주거나 사실상 방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드워드 기번의 표현에 의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끝으로 인류 역사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인 오현제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에드워드 기번은 자신의 책《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1,000년에 걸친 로마 제국이 본격적으로 내리막길로 치닫게 되는 시점을 콤모두스의 즉위 연도로 보고 있고, 실제로 콤모두스가 즉위한 뒤 다른 황제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본격적으로 개판이 되었고 이번에는 극복하지 못했다.
3. 생애
자세한 내용은 콤모두스/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4. 평가
자세한 내용은 콤모두스/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5. 대중매체
자세한 내용은 콤모두스/대중매체 문서 참고하십시오.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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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철인황제(哲人皇帝)라는 이미지 탓에
미남이 아닌 것 같아도, 잘생긴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따라서
부전자전답게 젊은 시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복사판으로 닮아 외모가 어릴 때부터 상당했다. 실제 콤모두스는 선입견 탓인지 묘하게 흐리멍텅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대에는 꽤 괜찮은 미남으로 인기가 좋았고, 정신적인 큰 충격을 받아 망가지기 전까지는 쾌활하고 절제력이 상당한 후계자이자 황제였다. 여기에 더해 외조부이자 양할아버지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키가 매우 컸고, 부모 모두 키가 중간 이상의 키를 가진 만큼 타고난 키가 크고 남자다운 체구와 균형 잡힌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콤모두스는 균형 잡힌 몸매에 남자답고 잘생긴, 눈에 띄는 외모의 소유자였으며, 눈은 이글거렸고, 머리는 날 때부터 금발에 곱슬로 햇빛을 받으면 하도 반짝거려서 마치 금가루를 뿌린 듯 여겨질 정도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이를 불가사의하게 여겨 하늘의 후광이 그의 머리를 비추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헤로디아누스, 1.7
-
젊은 시절 그의 폭정과 광기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디오 카시우스는 오히려 그에 대해 약간은 안타까워하는 평가를 남기고 있다.
이 콤모두스라는 사내는 천성적으로 사악한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정반대로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천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단순함과 나약함이 그를 주변인들의 노예로 만들었다. 일단 그들 때문에 보다 나은 삶에서 일탈해 타락하고 잔인한 버릇이 들기 시작하자 그것이 점차 그의 천성이 되어 갔다.
그가 고릴라나 괴물 같은 폭군이라는 사람들의 일반적 평가와 달리 콤모두스에게는 좋은 자질이나 덕이 몹시 많았지만 단순하고 유약한 성품과 주변의 악한 인물들 때문에 악덕에 빠졌다는 것이 디오 카시우스의 설명인데, 누나의 배신으로 멘탈이 무너져서 그렇게 된 것을 생각하면 우람한 외견이나 무용과는 별개로 충분히 납득이 갈 만한 증언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묘사된 콤모두스의 불안정한 캐릭터는 제법 고증에 잘 맞는 편.
- 누나 루킬라가 벌인 사건 이후, 과거와 달리 전문 검투사들을 직접 죽이거나 직접 죽이라고 명하지만 않았을 뿐 자신이 관전을 하는 경기에서 검투사들이 소극적으로 싸울 때에는 서로 죽을 때까지 싸우라고 명한 사실도 있을 정도로 검투사 경기에 몰두했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철인 황제[11]라고까지 불렸던 아버지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 오죽하면 친아들이 아니라는 설도 생겨났다. 이때 돌던 소문에 따르면, 황후 파우스티나가 검투사를 애인으로 삼아 해안 휴양지에서 즐기며 얻은 아들이라고 하는데 이를 채용한 픽션까지 나오면서 대중들에게 부모까지 비난받게 만들었다.[12]
- 어린 시절부터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꾸준히 군사 교육을 받았고, 활동적인데다 체육이나 검술 훈련을 선호했다. 이는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 이후 콤모두스가 검투사 경기에 중독됐다가 대놓고 검투사 훈련을 한 시절에도 꾸준히 무술 훈련 덕에 실제 검투사로서도 그 능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 하루는 원형 경기장에서 콤모두스가 큰 타조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원로원 의원들에게 와서 피 묻은 칼을 내밀고 휘두르며 위협했다. 그 황제답지 못한 꼬락서니에 원로원 의원들은 역으로 실소를 터뜨렸는데, 같은 자리에 있던 디오 카시우스는 "폭군인 콤모두스가 의원들의 입가에 떠오른 웃음을 보고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재빨리 주변 의원들에게 월계관에서 잎을 떼어 씹으라고 했다. 그런 뒤 콤모두스에게는 웃은 게 아니라 잎을 씹고 질겅거리는 표정 때문에 웃는 것처럼 보인 것뿐이라고 변명했다.
-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선 수백 명의 미소년과 미소녀들을 모은
하렘이 있었다는데, 그 숫자가 각각 330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하며 매일매일 술판을 벌이고 난잡한 성생활을 하는 등 타락의 극치를 달렸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진짜라는 주장도 있고, 가짜라는 주장도 있다.
"신빙성이 높지 않다."는 쪽에서는 물론 콤모두스에게는 여러 명의 후실 황비가 있었으며 정실 황후는 귀찮다는 이유로 폐서인하고, 살해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콤모두스의 후실 황비와 자녀들에 대한 정보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콤모두스가 하렘 같은 것을 운영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진짜로 이런 하렘이 있었다."는 측에서는 여러 기록들을 보면 콤모두스가 자신의 첩들이나 자신의 아들들까지 모조리 제거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콤모두스가 즐겼다는 하렘이 있었으며, 자식이나 첩들이 없던 이유는 콤모두스가 그들을 모두 죽였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만 슬하에 자녀가 얼마나 있었는지 의문이며 여러 명을 얻었는지 몰라도 콤모두스가 암살된 이후 원로원과 근위대에게 참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설령 콤모두스의 자녀들이 잠시 동안의 내란기에서도 무사히 생존했다고 해도 후에 황위에 등극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며, 비록 그가 콤모두스의 기록말살형을 철회했다고 해도 냉정한 세베루스 황제가 콤모두스의 후궁과 자녀들을 살려둘 리 없다.
- 이 황제의 재위 기간은 중국의 삼국지 초반에 해당하는 시기와 겹친다. 그 유명한 황건적의 난과 십상시의 난 그리고 동탁 토벌전이 그의 재위할 때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황제가 누구였는지 생각하면 평가가 여러모로 비슷하면서 다른 느낌이다.
[1]
아이러니하게도 'Commodus'는 모두의 법이 되는 자라는 뜻이다.
[2]
카시우스는 콤모두스의 치세에 20대~30대를 보낸 인물이다. 게다가 서기 180년부터
원로원 의원이었던 아버지의 자리를 계승해, 실제로 콤모두스를 알현한 인물이었다.
[3]
가끔 "코모두스"로 표기하는 책도 있다.
[4]
네로는
원로원,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
군대 모두에게
탄핵된 다음
국가의 적으로 몰락하긴 했지만, 적어도 일반 서민들에게는 인기가 좀 있었으며 정치적으로 무능해서 그렇지 나름대로 노력이라는 건 했었다.
카라칼라는 잔인하고 분노 조절을 못 한다고 까였고, 그가 후일 신격화되었을 때엔 민중들의 시위와 자발적인
기록말살형까지 주화를 대상으로 벌어질 정도로 민심이 최악이었다. 즉, 카라칼라는 암살당한 뒤
기록말살형 언급이 될 정도로 악평에선 콤모두스를 능가했고, 진짜 폭군으로 불렸다. 다만, 당시 길거리에 돈 소문 속에서도 그의 암살에 관여했다는 이야기가 돈
마크리누스가 원로원과 로마 민중들을 만류하면서,
신격화됐다.
[5]
사실 콤모두스 입장에선 나름 할 말도 있다. 먼저 본인의 첫 재위 2년 동안은 이미지와 달리 괜찮았고,
페르티낙스가 주장한 것처럼 2년 외의 남은 재위 기간 역시 국고 관리 측면에선 막장이 아니었다. 본국 이탈리아 민생을 챙기고, 전시체제를 평시체제로 전환시켜, 세금 부담을 줄이는 등 성실히 국정을 돌봤고, 완전히 망가진 이후 종종 정사를 돌볼 때에도 국고 관리에는 기가 막히게 평균 이상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정사를 내팽겨친 것은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과 함께 산적들이 로마까지 와서 콤모두스를 이유없이 암살하려고 한 일이 결정적이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문제는 심각했다. 특히, 콤모두스의 친구, 측근, 스승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최후에는 아내 크리스피나를 콤모두스 서명을 적어 추방시킨
페렌니스,
클레안데르,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 에클렉투스로 대표된 간신들이 판을 키운 것은 콤모두스 잘못이 100%라고 할 정도로 심각했다. 괜히 당대의 디오, 후대의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조시무스, 영국의 에드워드 기번 등이 간신들을 없애지 않고 이들을 전적으로 믿고 나라를 방치한 콤모두스의 책임을 물으면서, 최악이라고 평한 것이 아니다.
[6]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 동안 황실 적통 출신으로 태어난 이들이 있긴 했다. 이중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와
브리타니쿠스는 공동 계승권을 유언장으로 보장받았음에도 끝내 제위에 오르지 못 했고,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세야누스에 의해 누명을 뒤집어 쓰고 숙청되었다. 그리고 제3대 황제
가이우스는 즉위하긴 했지만 콤모두스처럼 예정대로 제왕 교육과 훈장 및 명예을 받고, 원로원에서 활동하면서 여러 관직을 경험하고 제위에 오른 케이스가 아니었다.
[7]
오늘날에는 재평가와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네로, 콤모두스, 카라칼라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폭군으로 보지는 않는다. 다만 도미티아누스에 대해
원로원과
부유층은 원한이 엄청났는데,
공포정치가 기본에다가 트집 잘못 잡히면
숙청되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기록말살형에 처해질 정도면 얼마나 원한이 심했는지 알 수 있다.
[8]
카라칼라가 무능하다고 하지만 콤모두스에 비하면 양반인 것이, 오히려
도미티아누스의 마이너 카피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로마 시민권 부여는 의도는 좋았고 결과물도 나쁘다고 단언하기 어려우며, 군사적 재능과 관련해서 만큼은 당대에도 지금도 업적을 인정한다. 그가 정비한 리메스가 260년 제국의 위기 이전까지 방위선을 지탱해 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위기도 리메스 체계 자체가 구식이 돼서 위기가 된 것이 아니라
발레리아누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군의 포로로 잡히고, 동방 방위선이 완전히 붕괴되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직면하여 제국이 방위선을 유지하지 못 하게 된 게 더 컸다.
[9]
네로 같은 경우도 문제는 많긴 했지만 외교면에서는 대(對)
파르티아 관계에서 나름 수완을 발휘해서 동방을 안정시키는 등 업적이 있었고,
로마 제국 자체도 비교적 평온한 편이었다.
[10]
로마 황제들 중 본인의 취미 활동 분야나 정치 스타일에 맞춰 새로운 트렌드를 개발하고 바꾼 인물 중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
하드리아누스가 있다. 세 사람 중에서 긍정적으로 영향을 준 이들로는 칼리굴라와 하드리아누스가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칼리굴라는 즉위 후
전차경주를 주최하면서 자신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홍보 중 펼친 전차경주 룰을 과격하고 박진감 넘치게 바꿔서 이 부분에서 인기를 주도했고, 하드리아누스는
수염과
패션 그리고
그리스 문화를 긍정적으로 도입하는 것에 영향을 끼쳤다. 반면 도미티아누스의 경우, 당대 사람들인
수에토니우스와
타키투스에 따르면 잔혹한
심문 방식과
고문 법을 개발해 후대 로마 황제들의 반역죄 심문 수사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까였다.
[11]
철학자 황제
[12]
하지만 조각상이나 기타 문헌을 보면 생긴 게 완벽하게 닮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