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rus Proculus 세베루스 프로쿨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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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전체 이름 |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 Tiberius Claudius Severus Proculus |
출생 | 163년, 로마 제국 갈라티아 폼페이오폴리스 |
사망 | 218년 |
직위 | 원로원 의원, 집정관, 황족 |
가족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외할아버지) 소 파우스티나(외할머니)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아라비아누스(할아버지)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167년 집정관)(아버지) 안니아 갈레리아 아우렐리아 파우스티나(어머니)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 안니아누스 베루스(이복형제) 안니아 코르니피키아 파우스티나(아내) 안니아 파우스티나(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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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방계황족, 원로원 의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소 파우스티나 황후의 외손자로, 안니아 갈레리아 아우렐리아 파우스티나의 아들이다. 딸은 세베루스 왕조의 엘라가발루스 황제가 맞이한 아내 중 세번째 아내였던, 부유한 상속녀 안니아 파우스티나이다. 보통은 세베루스 프로쿨루스라고 많이 부른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의 외손자임에도, 외삼촌 콤모두스 황제를 비롯해 이모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등 안토니누스 황실 식구 전체가 대놓고 무능하다고 무시할 만큼 무능해,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부단히 노력함에도 집정관에도 오르지 못했다. 그러다가 세베루스 왕조를 세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지극히 정치적 상징 차원에서 그를 배려해 200년 집정관에 추천해준 까닭에, 집정관에 취임했다.
2. 생애
서기 163년 로마 제국의 갈라티아 지방(옛 폰투스 왕국 일대)에 있는 그리스 도시 폼페이오폴리스에서,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167년 집정관)와 그의 후처 안니아 갈레리아 아우렐리아 파우스티나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소 파우스티나 황후의 둘째 딸로, 그를 낳을 당시 12살이었다. 12살에 그를 낳은 어머니는 163~165년인 대략 12~14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세베루스 프로쿨루스는 갈라티아 지방과 폼페이오폴리스 일대에서, 부유하고 저명한 그리스 귀족 가문 출신이다. 본인과 후손들이 "가장 부유하고 저명한 가문의 고귀한 혈통"이라고 자부할 만큼, 그의 할아버지와 조부는 서기 2세기 권력가였다.
할아버지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아라비아누스는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 때 로마시민권을 받은 그리스 귀족의 후손으로, 로마 귀족이었다. 그는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부터 대표적인 폰투스 일대 그리스 귀족의 대명사였고, 스토아 철학자이자 소요학파 철학자로 명망이 자자했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의 할아버지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스승,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카이사르 시절 동안 그의 정치 교사를 맡았고, 트라야누스 황제 때 집정관을 지냈다. 그리고 파르티아 전쟁 당시에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속주 초대 총독을 지내, 존칭으로 "아라비아누스"를 받았다.
이런 조부의 권력, 지위, 명망처럼 세베루스 프로쿨루스의 아버지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역시 당대 최고의 스토아 철학자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스토아 철학에 심취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철학을 주제로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매우 부유했다. 따라서 마르쿠스 황제는 그에게서 큰 영감을 얻어 사위를 넘어 친구라고 일평생 불렀다.
이런 배경을 둔 아버지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는 첫 결혼으로 맞이한 이름 미상의 아내와 사별했고, 사이에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 안니아누스 베루스로 불릴 갓난아이를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명성과 권력이 대단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자신의 둘째 딸 안니아 갈레리아 아우렐리아 파우스티나가 6살임에도,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와 약혼을 진행시켰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황제는 자신의 딸을 아내로 맞기에 약점이 뚜렷한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를 위해, 자녀가 없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조카 마르쿠스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 안니아누스가 이 아이를 양자로 입양하도록 주선까지 해줬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는 폼페이오폴리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때 그가 할아버지, 아버지에게 직접 철학, 교양을 배웠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그는 후일 외삼촌 콤모두스 황제가 재위 말년에 완전히 망가진 상황에서도, "무능함에도 욕심만 많은 녀석"이라고 대놓고 무시할 만큼, 좋은 혈통과 배경에도 정치적 감각이 매우 떨어지고 그 능력이 무능했다. 더욱이 그의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는 장인, 장모가 집정관에 두 번이나 추천을 해주고, 그들에게 콤모두스 보호자에 걸맞은 지위, 특권을 하사했음에도, 그것을 받아 누릴 뿐 끝까지 무책임한 사람이었다. 이런 모습은 특권은 모두 받고 적극적으로 행사하면서도, 무책임했고, 장인이 죽은 뒤에는 대놓고 무책임하게 모든 유언을 어겼다. 그래서 콤모두스 생전부터 "사람이 비겁하고 비열하다.","장인 도움으로 두번이나 집정관을 하고도, 유언은 하나도 지키지 않는다."고 조롱받았다.
이런 배경으로 세베루스 프로쿨루스는 외삼촌 콤모두스 생전부터 어떻게든 황족, 귀족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온갖 노력을 했음에도, 안토니누스 황실 황족들에게 대우만 형식상 받을 뿐 존재감이 없을 만큼 무시 받았다. 그 결과, 그는 외삼촌 콤모두스가 192년 12월 31일 암살되고 193년 1월에 안토니누스 황실의 남자 황족들에게 제위에 오를 것을 원로원이 발의할 때에도 그 이름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때 그는 30살이었고 원로원 의원으로서 경력이 어느 정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는 외사촌 동생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가 잠재적 황제 후보로 직간접적으로 거론됨을 부러워 했는데, 원로원과 로마인 모두는 그를 완전히 무시했다. 그래서 193년 다섯 황제의 해 내내 그는 존재감이 없었다.
그러다가 서기 200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세베루스 왕조를 창건하고 세습을 굳건히 할 목적으로, 200년에 집정관으로 추천해 재직하게 됐다. 이때 그는 자신의 지위를 내세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여동생의 후손인 안니아 코르니피키아 파우스티나와 결혼했다. 결혼 직후, 가문 근거지인 폼페이오폴리스에서 피시디아에 있는 아내 소유의 술라 옛 영지로 거처를 옮겼고, 201년 외동딸 안니아 파우스티나를 얻었다. 이때 그는 자신과 아내의 혈통을 강조하고자, 딸의 이름에 외가의 성씨 아우렐리우스, 안니우스에서 따온 아우렐리아, 안니아를 붙여주고, 공화정 시대의 1차 삼두정치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부터 내려와서 대 파우스티나와 그 조카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집안 여성들 이름으로 애용한 파우스티나를 붙여줬다.
외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절부터 존재감이 없고, 그 능력도 뛰어나지 않아 이후 기록은 없다. 다만, 207년 아내 소유의 재산을 공동명의로 하고 부부의 소유권을 증명하고 경의를 영지 주민들에게 표하게 한 비문을 만들었음이 21세기에 발굴됐고, 218년 사망했음만 확인된다.
216년 이탈리아의 오래된 노빌레스 가문인 폼포니우스 가문과 정치적 동맹을 맺고자, 딸에게 명의가 넘어간 피시디아 영지를 공동명의로 바꿔주겠다는 조건 아래, 딸을 이 가문의 후계자인 젊은 원로원 의원 폼포니우스 바수스와 결혼시킨 뒤 데릴 사위로 맞이 했다. 이들 부부는 이 사이에서 폼포니우스 바수스, 폼포니아 움미디아를 낳았다. 딸 안니아 파우스티나는 221년 정치적 위기에 몰린 엘라가발루스가 폼포니우스 바수스를 살해하고, 강제로 결혼하게 됐다. 하지만 그녀는 221년 말 엘라가발루스와 율리아 마이사,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사이의 정쟁이 심화될 때, 엘라가발루스에게 이혼당하고 피시디아로 추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