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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6 10:53:36

안니아 갈레리아 아우렐리아 파우스티나

안니아 갈레리아 아우렐리아 파우스티나
<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전체 이름 안니아 갈레리아 아우렐리아 파우스티나
Annia Galeria Aurelia Faustina
출생 151년,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사망 165년(14세)
직위 로마 황녀
가족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아버지)
소 파우스티나(어머니)
루킬라(여자형제)
파딜라(여자형제)
코르니피키아(여자형제)
콤모두스(남자형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남자형제)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여자형제)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남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아들)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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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황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소 파우스티나 황후의 14명의 자녀 중 유년기 이후까지 생존한 6명의 남매 중 둘째였다. 바로 위의 언니가 로마 제국의 악녀 중 한 명인 루킬라였고, 남동생이 로마 제국 역사상 최악의 암군이자 폭군으로 유명한 콤모두스 황제였다. 혈연상 안토니누스 피우스황제와 대 파우스티나 황후의 외손녀로, 부모 양쪽 모두를 통해 트라야누스 황제의 후손이었던 황녀였다.

남편은 서기 2세기 경 스토아파 철학자로 유명했던 서기 167년도 집정관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로, 그의 후처였다. 둘 사이에는 아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가 있었는데, 182년 이후 정사에서 손을 완전히 놓아버린 콤모두스 황제가 대놓고
"욕심만 많고 무능력한 얼간이"
라고 무시할 만큼, 무능하나 권력욕이 심하고, 욕심이 많기로 유명했다.

2. 생애

자매들인 루킬라, 파딜라, 코르니피키아,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와 남매인 콤모두스 그리고 어릴 때 요절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와 달리 거의 존재감이 없고, 10대 중반에 요절해 바로 아래의 여동생인 파딜라를 둘째 딸로 보는 경우가 훨씬 많다.

로마 제국의 본국인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처조카이자 양자이며 사위였던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그의 아내로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대 파우스티나의 막내딸이었던 소 파우스티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주 어릴 때, 당시의 권세가로 스토아파 철학자이자 원로원 의원이었던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아라비아누스의 아들인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와 약혼했다.[1] 이때 약혼한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의 아버지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아라비아누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스승이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카이사르 시절 동안 그의 정치 교사를 맡았던 사람으로, 트라야누스 대제 때 집정관을 지내고, 파르티아 전쟁 당시에는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속주의 초대 총독을 지낸 거물 정치인이었다.

남편인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역시 스토아파 철학자로, 폰토스의 그리스계 이주민들이 많이 거주한 폼페이오폴리스 출신이었다. 그는 스토아파 철학에 심취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철학을 주제로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황제는 그에게서 큰 영감을 얻어 사위를 넘어서서 친구라고 일평생 불렀다. 하지만 세베루스는 황녀를 아내로 맞이하기에는 약점이 뚜렷했다. 첫 번째 결혼으로 맞이한 이름 미상의 아내와 사별했고, 그 사이에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움미디우스 쿼드라투스 안니아누스 베루스로 불릴 갓난아이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약혼과 동시에, 자녀가 없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조카인 마르쿠스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 안니아누스가 이 아이를 양자로 입양했고, 이후 결혼이 진행되었다.

159년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와 6살의 나이에 결혼한 후, 폰토스 지방의 폼페이오폴리스로 떠나 정착했다. 그녀는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의 후처였는데, 12살이던 163년 아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를 낳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들을 낳고 건강이 악화되어 2년 뒤인 165년 경에 요절했다.

그녀가 죽은 뒤, 남편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는 더 이상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장인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장모인 소 파우스티나 황후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167년과 173년 두 번이나 집정관에 추천받아 취임했다. 이와 함께 그는 장인과 장모의 후원 아래 고향인 폼페이아폴리스에 거액을 기부해 그 동상이 세워지는 명성도 얻었다. 이 외에도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생전부터 다른 사위들과 달리, 황제 대리인이자 친구라는 지위와 특권도 선사받았고, 황제 가족이 동부 순행을 할 때 이를 따라 다니면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따라서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직후부터는, 어린 콤모두스를 보필할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콤모두스를 전혀 돕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특권은 모두 받고 적극적으로 행사하면서도 무책임했고, 장인이 붕어한 뒤에는 대놓고 무책임하게 모든 유언을 어겼다. 그래서 콤모두스의 생전부터
"사람이 비겁하고 비열하다."
"장인 도움으로 두 번이나 집정관을 하고도, 유언은 하나도 지키지 않는다."
는 조롱을 받았고, 그와 그의 아들은 원로원 동료들로부터 황족의 대우조차 받지 못하게 되었다.


[1]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제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 1세때 로마 시민권과 함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라는 개인 이름 및 성씨를 받은 그리스인의 후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