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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5 18:49:14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

Vibia Aurelia Sabina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
<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전체 이름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
Vibia Aurelia Sabina
출생 170년, 로마 제국 판노니아 속주 시르미움
사망 217년(47세)
직위 로마 황녀
가족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아버지)
소 파우스티나(어머니)
루킬라(여자형제)
안니아 갈레리아 아우렐리아 파우스티나(여자형제)
파딜라(여자형제)
코르니피키아(여자형제)
콤모두스(남자형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남자형제)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부루스(첫번째 남편)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아가클리투스(두번째 남편)

1. 개요2. 생애3. 귀천상혼을 한 황녀4. 헤로데스 아티쿠스의 유죄를 이끌어낸 황녀 비비아 사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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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황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소 파우스티나 황후 사이에 태어난 14명의 자녀들 중 유년기 이후까지 생존한 6명의 남매 중 막내이자 늦둥이 딸이었다. 9살 위의 오빠가 로마 제국 역사상 최악의 암군이자 폭군으로 유명한 콤모두스 황제였다. 혈연상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와 대 파우스티나 황후의 외손녀로, 부모 양쪽 모두를 통해 트라야누스 황제의 후손이었던 황녀였다.

2. 생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소 파우스티나 황후의 14명의 자녀들 중 막내로, 판노니아 속주의 시르미움에 위치한 로마군 병영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랐다.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아우렐리아 사비나(Aurelia Sabina)는, 마르쿠스 황제 부부가 그들의 할머니(외할머니)인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언니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황후였던 비비아 사비나 황후에게서 따온 이름이었다.

늦둥이 딸로, 전쟁 준비와 로마군의 사기 진작 차원에서 부모가 시르미움에 머문 까닭에, 오빠 콤모두스 외에는 6남매 중 가장 오랫동안 병영 생활과 속주 생활을 하며 자랐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부모, 그리고 오빠 콤모두스와 함께 제국 전역을 모두 여행했는데, 5살 혹은 6살 무렵에 어머니 소 파우스티나 황후가 죽었다. 그리고 서기 180년에 아버지마저 붕어해, 10살의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고 맏언니인 루킬라, 둘째 언니인 파딜라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부황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기 얼마 전, 자신의 건강이 위독해지자 10살의 어린 나이에 푸닉(북아프리카) 출신의 부유한 원로원 의원이었던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부루스와 약혼했다. 이 결혼은 아버지가 죽고, 오빠 콤모두스가 제위에 등극한 뒤에 진행되었는데, 그럼에도 그녀의 나이는 고작 11살 정도였다. 당연한 말인데, 남편과는 나이 차이도 많이 났고, 남편의 후처로 들어갔다.

결혼을 빨리 했던 이유 중 하나가 나이가 너무 어려 보호자가 필요했던 까닭도 있어, 약혼 직후부터 남편의 본거지인 티빌리스 시[1]로 건너가서 살았다. 이런 배경으로, 오빠 콤모두스는 여동생과 갓 결혼한 안티스티우스 부루스를 181년 집정관에 직접 추천해 취임하게 하는 등의 호의를 베풀었다. 그렇지만 야심가였던 안티스티우스 부루스는 루킬라가 주도해 벌인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 이후, 또 다른 음모를 꾸며 콤모두스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이 사건은 188년에 벌어졌는데, 실제 결행 전에 발각되었다. 그래서 콤모두스는 이를 주도한 안티스티우스 부루스를 체포해 처형하고 그 재산을 압류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는 오빠 콤모두스로부터 남편을 막지 않은 괘씸죄에 걸려 한동안 로마와 이탈리아에 오지 못하는 벌을 받았다. 다행히 콤모두스는 이후 여동생이 무관하다는 이유로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이 사건 이후 그녀는 181년경 결혼하면서 정착하게 된 티빌리스에서 주로 거주했다. 그러다가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는 부황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해방노예 출신 그리스인 아가클리투스의 아들로 세금징수원, 근위대 장교를 거쳐 원로원 의원까지 오르게 될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아가클리투스와 결혼했다.

서기 217년 경, 티빌리스에서 사망했고, 적잖은 돈을 오랫동안 거주한 티빌리스에 후원했다. 그래서 이곳 마을 주민들에게
"오랫동안 로마의 아프리카 땅에 거주한 저명한 이탈리아인"
으로 불리며 큰 사랑을 받았음이 티빌리스 비문을 통해 확인된다.

3. 귀천상혼을 한 황녀

비비아 사비나는 로마 황녀들 중 귀천상혼을 하면서, 두 번째 남편으로 부황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옛 해방노예 아들을 직접 선정한 다음 맞이해 이 부분에서
"부모의 명성과 가문의 지위에 먹칠을 한다."
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는 그녀의 시아버지가 되는 아가클리투스와 시어머니 푼디니아의 결혼 스토리, 그리고 남편이 된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아가클리투스의 출생 배경이 상당한 몫이 된 듯 하다.

비비아 황녀의 시아버지가 되는 아가클리투스의 결혼은 로마 사회에서 매우 희귀한 젊고 잘생긴 해방노예와, 남편과 사별한 귀부인의 결혼, 그것도 현역 황제 형제의 친구이자 능력있는 젊은 그리스인 해방노예가 방계 황족이었던 안니우스 리보의 미망인이었던 푼디니아의 새 남편으로 결혼한 케이스라서,
"부모와 가문에게 먹칠을 했다."
고 손가락질을 받은 것은 당시 기준으로 비난 사유가 충분했다고 평가받는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아가클리투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와 친구였고, 그들의 삶과 제위 등극에 좋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푼디니아와의 결혼은 환영받지 못했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그의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는 아가클리투스가 자신들의 젊고 유능한 그리스인 해방노예이며 안토니누스 가문의 믿을 만한 가신이었다고 해도, 로마 역사상 거의 없었던 결혼에 비참함을 느끼고, 이 결혼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따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예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두 황제와 황실의 우려대로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 온갖 구린 소문이 끊임없이 터져나와 황실을 곤욕스럽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 나온 소문의 수준은 현대 기준으로도 진짜 심각했다. 왜냐하면 단순히
"주인집 젊은 마님과 젊은 해방노예의 결혼이 안니우스 리보가 죽기 전부터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는 수준이 아니라,
"마르쿠스 황제의 황후인 소 파우스티나가 뚜쟁이 역할을 했다."
"소 파우스티나가 자신의 젊은 애인을 미망인이 된 사촌 처제에게 보냈다."
"두 황제가 홀로 된 사촌처제에게 자기 해방노예를 소개했다."
는 둥의 막장스토리 완결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런 류의 길거리 소문에 침묵을 유지하던 마르쿠스 황제 형제와 소 파우스티나 황후가 손가락질을 받는 상황까지 연출되었고, 결국 세 사람의 스트레스가 극심해졌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는 이런 소문이 떠돌자, 이례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이런 거짓말은 그만해라"
라고 강력하게 맞대응했다.

이런 과거의 일로 인해, 비비아 사비나 황녀의 귀천상혼은 이후에도 회자되었다. 하지만 황녀의 남편이 된 아우렐리우스 아가클리투스는 어머니 푼디니아를 통해 원로원 귀족 가문의 후손이었으며, 실제 계급도 로마 시민권자+ 상류층 기사계급 자제라서 엄밀히 말하면 귀천상혼까지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아우렐리우스 아가클리투스는 이런 결혼 스토리 외에는 큰 비난거리가 없는 인물이었으며, 비비아 황녀의 첫 번째 남편이 188년에 콤모두스 황제를 죽이려고 하다가 처형된 까닭에, 의외로 그 후폭풍은 없었다. 아울러 아가클리투스는 구린 구석이 없는 멀쩡한 사람이었고, 권력욕도 없어 더 이상 나쁜 소문은 없었다. 따라서 이들 부부의 결혼 생활이나 후손들의 삶도 평탄했다고 한다.

4. 헤로데스 아티쿠스의 유죄를 이끌어낸 황녀 비비아 사비나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는 동시대 최고의 웅변가이자 궤변론자였으며 정치가였던 헤로데스 아티쿠스의 몰락에 관여한 황녀로도 유명하다.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비비아의 부황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삼촌인 루키우스 베루스의 가정교사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민주정 시절부터 내려온 아테네 귀족의 후손이자 당대 그리스계 귀족의 거두였다. 아티쿠스는 전형적인 소피스트로 폭발적인 웅변술, 그리고 쇼맨쉽으로 제국 동부에서 엄청난 팬을 거느렸고, 대중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하지만 아티쿠스는 뛰어난 웅변가이자 학자임에도 인간 말종이었다. 그는 자신의 노예나 해방노예들을 짐승처럼 취급하고, 욕설을 퍼붓거나 폭행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정신지체 장애를 앓고 있는 친아들이 잘못하면 혼내는 것을 넘어 잔혹하게 처벌했고, 대중들 앞에서 친아들의 장애를 조롱했다. 또한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비슷했다. 아티쿠스는 상상 이상의 거액을 교육비로 요구했고, 이렇게 교육비를 낸 제자들에게 늘 혹독했다. 그는 제자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트집을 잡아 폭력을 당연시했다. 어느 정도로 심각했는지 아티쿠스는 제자의 목에 면도칼을 대고 죽이겠다며 위협까지 했다. 따라서 그를 좋아하는 대중들이 많고, 그와 파벌을 이룬 그리스, 아나톨리아, 푸닉 출신의 인사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내를 싫어하는 사람은 혐오할 만큼 미워했다.

이중 후자를 대표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바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와 대 파우스티나 황후의 딸이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황후이고,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 황녀의 모후였던 소 파우스티나였다. 그녀는 10살 무렵, 부황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아시아 속주 총독으로 있었을 때 헤로데스 아티쿠스의 악행과 폭력성을 직접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이때 그녀는 어느날 미래의 남편이 될 사촌오빠인 마르쿠스가 큰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혼이 나며, 모두의 앞에서 어떤 이유도 없이 뺨을 맞고, 짐승이 맞듯이 쓰러질 때까지 폭행당하는 것을 보고 '인간 쓰레기' 아티쿠스를 증오하게 되었다. 더욱이 비비아 황녀의 어머니인 소 파우스티나 황후는 아티쿠스가 그 폭력성을 당연시하고, 이를 가정 내에서도 똑같이 행하는 것을 경멸했다.

서기 160년 경, 아티쿠스는 임신 중인 아내 안니아 레길리아를 죽였다. 가정 폭력으로 벌어진 일이었는데, 여러 증거가 드러나 체포된 후 존속살해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임신 8개월이던 아내가 자신에게 말대꾸를 했다는 트집을 잡고,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를 들어 하인에게 명령을 내려, 강압적인 분위기속에서 하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모신 아내를 마구 때려 죽이도록 했다. 그래서 이를 본 노예들이 그 참혹한 사건을 폭로했다. 헌데 아티쿠스는 자신의 훌륭한 명성과 막대한 재물을 총동원하고 로마 각계에 깔린 친구들을 이용해 무죄를 주장하며 억울하다고 호소해, 본인과 명령을 받은 하인 모두 교묘하게 무죄로 방면되게 했다. 반면 법정에서 목숨을 걸고, 사건의 진실을 증언한 노예들은 모두 추방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이 벌어진 뒤, 14년이 지난 서기 174년, 아티쿠스는 세 사람과 공모해 아테네에서 음모를 꾸몄다는 고발을 받고 다시 기소되었다. 이때 그는 또 다시 무죄로 풀려날 것이라며 거만하게 행동했는데, 자신이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지도한 사람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인 만큼, 아테네가 아닌 시르미움에서 재판을 받겠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총독과 판사들의 의견을 깡끄리 무시했다. 이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가 담당하는 재판을 옛 스승이 받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황후인 소 파우스티나와 막내딸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 황녀 때문에 완전히 어그러졌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으로 인해 재판 당시 소 파우스티나 황후는 아들인 콤모두스, 막내딸인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와 함께 시르미움에 있었다. 그녀는 비비아 사비나와 함께 법정에서 이 사내의 변론을 들었는데, 10살 무렵부터 아티쿠스의 난폭함과 잔혹함, 그리고 파렴치한 이중성을 알고 있었던 터라 그가 거짓말을 한다며 유죄로 엄하게 처벌하라고 주장했다. 이에 참다 못한 아티쿠스가
"이 노인은 두럽지 않다."
며 화를 냈고, 어린 소녀 시절부터 그를 벌레보듯이 한 소 파우스티나 황후 역시 지지않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다며 반박했다. 이에 아티쿠스는 불쌍한 척을 했는데, 이때 모후와 부황 옆에 있었던 비비아 황녀가 아티쿠스가 무섭고 거짓말을 한다며 펑펑 울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아티쿠스는 더 이상 연기를 하지 못하고 주장했던 변론 역시 꼬이면서 스스로 유죄를 인정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다시 정신을 똑바로 차린 아티쿠스가 스스로 재판 변론을 포기한채 나가 버렸다.

이후 아티쿠스는 옛 제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그 여자와 조그마한 여자아이 때문에 신세가 망쳤다."
며 황제에게 배은망덕하다고 호통까지 쳤다. 따라서 당황한 마르쿠스 황제는 이 사건으로 인해 도리어 유죄도 내리지 못하고, 평소와 달리 어쩔 줄 몰라했다. 이에 소 파우스티나 황후는 남편의 이런 태도에 역정을 내면서 봐주지 말라고 따졌다. 이는 막내딸 비비아 황녀가 아티쿠스의 거짓말을 보고 울면서, 충격에 빠진 모습 때문이기도 했는데, 이런 이유로 마르쿠스 황제는 주변과 법적인 검토를 한 후 옛 스승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따라서 아티쿠스는 1년 추방형을 받았고, 아티쿠스와 공모했다는 노예 3명은 처형되었다. 이때 판결문을 받은 아티쿠스는 마구 화를 내면서 소 파우스티나 황후와 비비아 황녀 때문이라며 저주를 퍼붓고, 제 발로 1년 추방형을 선택해 아테네에 1년간 돌아가지 않았다. 물론, 이 사건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스승을 달래기 위해 그가 스스로 택한 추방형을 높게 평가하더니 손수 편지까지 보내 잘못을 청하고, 황궁으로 오면 융숭히 대접해드리겠다며 싹싹 빌었다.

이 사건 이후, 소 파우스티나 황후는 아티쿠스의 친구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다. 로마 각계의 그리스어와 웅변술 교육은 아티쿠스와 그 제자들이 꽉 잡고 있었으니 그들이 마음 먹고 씹어댄 소 파우스티나 황후의 이미지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황후이자 티베리우스의 모후였던 리비아 드루실라의 재림으로 박히게 되었다. 하지만 당사자는 이를 알기도 전에 오늘날 튀르키예의 할랄라에서 지병으로 죽었고, 애처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역시 그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기도 전에 게르만족들과 싸우다가( 마르코만니 전쟁) 붕어했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에 따르면, 추방 이후 아테네로 복귀한 아티쿠스와 그를 따른 그리스, 아나톨리아, 푸닉(북아프리카) 출신 제자들에 의한 기록과 소문으로 인해 소 파우스티나 황후가 악녀의 대명사로 찍힌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소 파우스티나 황후에 대한 온갖 악소문을 만들어 씹어댔고, 뒤에 콤모두스가 폭군으로 확정되자 이를 2차, 3차로 재가공해 소 파우스티나 황후를 부도덕하고, 음란하며, 비열한 황후로 묘사해 이를 계속 홍보했다. 다행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높게 평가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치세때는 악의적인 소문이 걸릴 경우 크게 처벌을 받은 터라 이 소문은 음지에 잠들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디오 카시우스 등의 당대 의원들은 아티쿠스 및 그 제자들과 친구이거나 제자였던 까닭에 소 파우스티나 황후를 자기들끼리 씹어대고 또 씹었다.

이는 카라칼라의 치세가 되면서 바뀌게 되는데, 어떻게 보면 카라칼라 시대가 도래하면서 소 파우스티나는 사후에 메살리나 수준의 악녀로 이미지가 더 나빠지게 되었다. 카라칼라는 아티쿠스의 직계 제자의 직계 제자에게 어릴적부터 배워, 소 파우스티나를 무척 미워했다. 애초에 카라칼라라는 인물이 난폭하고 잔혹한데다가 아티쿠스 이상으로 노예, 해방노예, 경비병들을 짐승 다루듯이 취급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카라칼라는 소 파우스티나를 없어져야 할 존재로 여겨 계속 욕보였고, 그 행동은 로마인들의 기준으로도 지나쳤다.

이때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를 제 손으로 죽이고 단독황제가 되자, 진실을 확인하지 않은채 소 파우스티나가 불쌍한 아티쿠스를 탄압했다고 욕하며, 그녀를 기린 카파도키아 신전을 더럽히고 조롱했다. 당연한 말인데, 소 파우스티나는 살아 생전 소년과 소녀들을 위해 많이 노력했기 때문에, 카라칼라의 박해를 보고 환호한 사람은 적었고 많은 이들이 카라칼라의 무식함과 잔혹함에 경악했다. 더욱이 그는 소 파우스티나의 혈육들 중 로마에 거주 중이었던 코르니피키아 황녀에게 누명을 씌워 죽였다. 카라칼라가 코르니피키아를 죽인 이유는 게타가 죽은 것을 보고 슬퍼했다는 이유 외에도 아티쿠스에게 고통을 준 딸아이가 그녀일 수 있다는 죄목이었다고 한다.

이때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 황녀와 그녀의 가족들은 티빌리스에서 조용히 살아 피해를 입지 않았다.


[1] 오늘날의 북아프리카 알제리 북동쪽. 로마 시대에는 아프리카 속주와 누미디아 속주에 걸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