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Exercitus Romanorum
로마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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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군의 상징인 아퀼라 벡실룸.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활동기간 | BC 753년 ~ 1453년 | ||||
소속 | 로마 왕국 기원전 753년~기원전 509년 | ||||
로마 공화국 기원전 509년~기원전 27년 | |||||
로마 제국 기원전 27년~1453년 서로마 제국 기원전 27년 ~ 476년 동로마 제국 기원전 27년 ~145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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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수권자 | 로마 왕 기원전 753년~기원전 509년 | ||||
집정관 기원전 509년~기원전 27년 | |||||
로마 황제 기원전 27년~145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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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에서부터 동로마 제국까지의 로마의 군대.2. 역사
2.1. 왕정 시기
초기 로마군은 부족 단위로 구성된 집단을 왕이 이끄는 식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이 징병제로 제도를 개혁하여 이것이 정착된다.
기원전 500년 이전까진 대략 9천 명 정도를 징병했는데 6천 명 남짓은 중보병이었고 2400명은 경보병, 그리고 600명은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왕이 두 명의 집정관으로 바뀌면서 9천 명을 두 집정관이 나눠서 4500명씩 지휘하게 되었다.
소규모 국가답게 당시 잘 나가던 북쪽 에트루리아와 바다 건너 그리스를 적극적으로 모방했으며 에트루리아에게 패배한 이후에는 밀집대형 전법을 익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의 팔랑크스와는 달리 로마는 백인대를 구성했는데 이는 소규모 부대로 주변 도시들을 약탈할 필요가 원인이었던 걸로 추정된다.
군인 대부분은 농경기엔 농사를 지었다. 덕택에 원정에선 약한 모습을 종종 보였는데, 큰 문제가 안 되었던 것이 당시 '로마'는 현재의 로마시보다 작았기에 방어적 전투 혹은 로마 주변에서 전쟁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사용하던 장비는 에트루리아군이나 그리스군과 큰 차이가 없었으리라 추정된다.
자세히 알기 힘든 것이 로마군의 아무리 예전 모습을 추정하더라도 공화정 시기 정도이기 때문에 왕정 시기의 로마군에 대해선 제대로 알기 힘들다. 일단 남아 있는 자료가 거의 없고, 그나마 남아 있는 사료 등도 믿기 힘든 게 많아 제대로 조사하기 힘들다. 병력 구성이 어떤 식이고, 어떤 장비를 착용했고, 어떤 무기를 사용했는지 자세히 안 남아 있고, 단편적으로 있어서 거의 상상의 영역으로 메꾸는 식이다. 사료가 적으면 유물이 이를 보완해주면 되는데, 유물도 적어서 연구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2.2. 공화정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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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비우스 군제 개혁[1] 이후 로마군의 모습. 좌로부터 하스타티, 벨리테스, 트리아리, 프린키페스이다. |
물론 아무나 입대시킨 건 아니었고, 17세 때 징병검사를 실시했는데 지적장애, 신체 결손, 중증 질환 등을 앓고 있는 사람은 제외되었으며 나머지에게 현역 판정을 때렸다. 그리고 집정관이 군을 소집할 때 이렇게 현역 판정을 받은 17세부터 시작해 45세까지의 남성이 광장에 소집되어 지명된 사람이 차출되는데, 이들이 1년간 병역을 수행하게 된다. 어떻게 차출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때 재산도 신고했는데 어디서 임무 수행을 해야 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재산별로 나뉜 병사들은 백인대장이 이끄는 백인대에 소속되었다. 이들은 각각 작은 정사각형들을 구성하면서 하나의 커다란 직사각형을 이루었다. 또한 무장의 질과 나이에 따라 벨리테스,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 에퀴테스로 나뉘었는데, 벨리테스는 투창병, 하스타티는 경보병, 프린키페스는 중보병, 트리아리는 중창병 그리고 에퀴테스는 기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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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테스
매우 가볍게 무장하였다. 많은 수의 투창을 들고 다니며 전투 개시 시 최전방에서 투창을 던지는 임무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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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스타티
젊은 병사들로 이루어진 경보병으로 전선의 맨 앞줄에 위치하여 적의 체력을 소모하는 역할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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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키페스
로마군의 핵심이자 주력을 이루는 병력으로 이들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30대에서 40대 초반의 시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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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아리
나이가 많은 고참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최후방에 위치하며 여러 가지 전술적 움직임에 동원되거나 불리한 전선에 투입되는 등의 보조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시스템을 마니풀라(manipular) 시스템이라고 하는데, 삼니움 전쟁 때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로마 고유의 독특한 구성은 로마군으로 하여금 다른 세력에게는 볼 수 없는 상당히 유기적인 움직임을 가능케 하였으며 따라서 로마군은 다양한 전술적인 움직임을 실행할 수 있었다. 개별 시민들의 전투력 자체에는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고 유기적인 집단전 수행을 중시했다.
또한 로마군은 그들과 같은 라틴족 도시들로 이루어진 라틴 동맹의 동맹시 또는 속국들에게서 보조병을 징집하여 동원했다. 보통 로마 군단병의 좌우 측면에 배치되어 날개(Alae)라고 불린 이 동맹시 보조병의 개념 역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로마만의 독창적인 것으로, 이는 로마 군단과 비슷한, 종종 더 많은 규모의 병력을 동맹시로부터 제공받아 로마군과 함께 싸우는 것이었다. 특히 동맹시 기병대 규모는 로마 시민 기병대의 3배에 달했고, 전투력도 로마 시민 기병에 비해 우수하여 한니발 바르카는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 기병대를 집중 공략하고 동맹시 기병대는 누미디아 기병으로 견제하기도 했다. 동맹시 보병의 1/5, 기병의 1/3은 정예 부대(Extraordinarii)로 따로 편성되어 선봉이나 집정관의 호위 등 중책을 맡기도 했다. 로마는 보조병을 제공받는 대가로 동맹시에게는 외교권을 제외한 완전한 정치적 자치를 부여하였으며, 세금 역시 강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로마는 그들에게 군사적인 보호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보조병의 존재는 로마의 군비를 크게 절감시켰고, 군사력 또한 크게 상승하게 했다. 그 결과 아테네나 테베와 같은 그리스의 대도시에 비해 로마가 해마다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양은 상당하였다. 따라서 로마는 대규모의 총력전이 가능하였으며 포에니 전쟁 때는 해마다 10만이 넘는 병력을 편성할 수 있었다.[3] 때문에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1세는 로마를 머리를 잘라도 잘라도 다시 자라나는 히드라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한니발이 이탈리아에 침입함으로써 발발한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로마인들은 한니발로부터 기병 운용의 중요성을 터득했다. 한니발은 우세한 기병 전력을 바탕으로 이들의 빠른 기동력으로 보병 배후로 기동한 뒤 돌진하여 충격을 주는 전술을 즐겨 사용했고 이는 로마군이 초기에 연전연패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러한 전술에 연패하고 또 칸나이 전투에서 사상 최악의 패배를 경험한 로마인들은 기병 전력의 확보에 열을 올리게 되었으나 기존의 귀족으로부터 기병 전력을 조달하는 방식으로는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다. 또한 이탈리아의 지형은 대부분이 산지라서 말을 키울 목초지가 부족해 말을 많이 키울 여건이 안 되었다. 때문에 로마인들은 기병부대를 대거 운용하는 이민족 부대 전체를 고용하는 방식으로 기병 전력을 조달하고, 더이상 귀족으로부터 기병을 조달하지 않는다. 그 결과 에퀴테스는 더이상 기병 자체가 아닌 기사계급을 뜻하는 명칭으로 굳어지게 되었으며, 라틴 동맹시 기병대의 중요성 또한 서서히 감소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기병 조달은 훗날 제국 후기에 보이는 로마군 이민족화의 불씨가 되었다는 게 일반적인 통설이다. 단, 이 말은 더 깊이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제국 후기에 접어들어 기병의 중요성은 점점 높아지지만 적어도 3세기까진 말만 기병이지 상당수는 하마 보병이었으며, 4세기 때는 이런 서술이 확실히 들어맞는 시기이긴 하나 여전히 제국은 보병을 기병보다 훨씬 더 많이 운용했고, 야만족 부족 단위 계약 용병들인 포이데라티들은 여전히 제국 정규병들의 존재 탓에 행동을 제약당했다.[4]
또한 아드리아노플 전투 이전까지 포이데라티들은 개인별 혹은 소규모 그룹 단위로 로마군에 입대했으며, 대규모 이민족 집단이 로마로 귀순해오면 제국 전역으로 분산시켜 이들이 힘을 결집하는 것을 막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향인 다뉴브 강 연안에서 멀고도 먼 하드리아누스 성벽 인근에 배치된 사르마티아족 기병들이다. 흔히들 생각하는 로마군 최악의 암흑기는 5세기의 이미지인데 대부분의 책들은 2~5세기에서 이어지는 경과들을 단 몇 줄로 축약하는 탓에 이런 오해가 생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전히 주의는 필요하다.
또 로마인들은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이 밀집 상태에 빠져 전멸한 것을 교훈으로 삼아 기존의 마니풀라 방식의 전투를 개혁하였다. 로마인들은 백인대들을 따로 모아 정사각형을 이루게 한 뒤 이를 한 명의 지휘관이 지휘하도록 하였으며 이는 훗날 마리우스가 코호르스[5]라 명명함으로써 공식화되었다.
이 코호르스의 편성으로 인해 칸나이 전투와 같이 밀집되는 상황이 되면 대대장이 독자적인 판단으로 배후로 방향을 틀거나 전열에서 이탈하여 협공에 대비하는 식의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게 하여 밀집 포위에 대한 저항력을 높이게 되었다.
이처럼 시대에 맞는 개혁과 기병의 운용으로 인해 로마군은 더 강해졌으나 전장이 확대되면서 자영농인 시민들에게 군복무는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장기간의 해외원정으로 농장이 황폐화되고, 전쟁의 결과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시민이 많아졌던 것이다. 기원전 4세기 경부터 원로원은 장기간 병역 종사로 농사를 비롯한 생계활동을 할 수 없게 되는 경우 병사들에게 봉급을 주고 장비를 공제하는 형태로 대처했지만 2차 포에니 전쟁을 기점으로 십만에 가까운 병력들을 동원하는 대규모 전쟁을 장기간 치르면서 이 시스템이 한계에 달한 것이다. 동맹시 병사들은 봉급은 커녕 식량만 지급받았으며 시민병들 조차 봉급에서 무구, 갑옷, 침구, 식량 등을 공제하고 나면 남는게 없었으니 전쟁에 차출된 시민들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군대에 투입되는 인적 자원도 고갈되어 갔다. 때문에 점차 징병을 위한 최소 자산 수준을 낮추는 조치가 취해졌다. 그런데 이 조치는 무산자를 소집하는 것으로서, 로마 역사상 최대의 위기였다고 할 수 있을 한니발 바르카와의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에서도 끝내 기피되던 것이었다.
기원전 122년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에서 군복과 무기를 지급하고 이를 봉급의 공제 품목에서 제거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법을 통과시켰지만 1년 후 원로원 최종권고로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의 지지자들이 몰살 당한 만큼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로마는 이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당장 자산이 낮은 로마 시민들의 군대는 무장 수준이 떨어졌고, 무산자들은 체력적인 면에서도 빈약한 데다가 무장도 제대로 못 갖추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로마군의 전체적인 질적 저하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보조병을 담당했던 로마의 동맹시들도 점점 상황이 안 좋아졌다. 원래 초창기에는 로마가 동맹시들에게 위에 언급한 것처럼 외교권을 로마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고는 완전한 정치적 자치를 보장하고, 군사적인 보호를 제공했지만 가면 갈수록 동맹시의 자치를 인정하지 않으며 세금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또한 동맹시의 자치권이 보장된다 해도 동맹시 시민들은 준로마 시민이지 정식 로마 시민이 아니라서 여전히 차별했다. 동맹시의 불만이 날이 갈수록 증가하자 로마 내에서도 개혁의 목소리가 나왔다.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라틴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해주고 나머지 이탈리아 주민들에게 라틴인의 권리를 부여하는 법안을 제출했지만 원로원은 물론이오 시민권이 주는 특혜를 공유하고 싶지 않았던 민회에서조차 부결되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죽음 이후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다시 한번 개혁을 시도했다. 드루수스의 개혁안은 비교적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안과 비슷했는데 원로원의 기분을 달래주기 위해 토지위원회를 원로원 의원으로만 구성되게 하는 등 원로원의 심기를 건들이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하여 통과시켰다. 이후 기원전 21년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제출했던 동맹시 시민들에 대한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다시 제출했다. 모든 이탈리아 내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자는 이 법안은 반대파 원로원 의원들은 원로원 1인자 마르쿠스 아밀리우스 스카우루스를 비롯해 원로원 의원 중 적지 않은 수가 드루수스를 지지하자 그를 암살하는 방법으로 이를 무산시켰다.[6] 이쯤 되자 동맹시들은 호민관을 통한 법안 제출과 통과라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더 이상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 받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즉각 전쟁의 깃발을 들어올린다. 이것이 바로 기원전 91년부터 88년 까지 벌어진 동맹시 전쟁이다. 초반에 고전을 면치 못했던 로마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활약으로 동맹시 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동맹시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시민권을 부여해주기로 하였다.
따라서 공화정 말기 때 로마군은 총체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벌어진 누만시아 전투에서 로마군은 대패하였고,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의 남하를 저지하려고 보낸 두 명의 집정관은 목숨을 잃었으며, 아라우시오 전투에서는 로마군 8만 명이 전멸당했다.( 킴브리 전쟁)[7][8] 또한 유구르타 전쟁에서는 계속 고전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등장한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또 다시 시대에 맞는 개혁을 함으로써 로마 공화국을 위기에서 구했다.[9]
2.2.1.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그리고 내전기
마리우스의 집권 이전, 시민군의 의무를 지는 자영농을 바탕으로 하던 로마군은 라티푼디움의 확산과 자영농의 몰락으로 인해 인적 자원이 고갈되며 전투력이 저하되는 심각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마리우스가 군제 개편을 하기 전 로마군은 게르만족의 대대적인 침공에 처참하게 무너지기까지 했다(킴브리 전쟁). 지중해 패권국의 군대가 붕괴되는 것은 패권의 연쇄적인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로마에게는 희대의 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집정관에 선출된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제 개혁을 실시하였는데 그는 재산에 따라 징집하던 관례를 없애고, 무산 계급에게도 군복무를 할 수 있게 하였다.[10] 또한 그 유명한 아퀼라( 검독수리)를 로마군의 상징으로 정한 것도 그였다. 거기다 로마사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마리우스가 지휘하기까지 하는 재편된 로마군은 거짓말처럼 게르만족을 완벽하게 격파했다.[11]이 개혁으로 인적 자원 고갈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이 군단은 국가가 세금을 모아 병사들에게 급여를 주는 근현대적인 상비군이라기보다는 유력자가 사적으로 고용해 일종의 계약직으로 운영된 것이 이 시기 로마군의 한계였다고 할 수 있다.
원래는 평시에도 일정한 숫자의 병역대상자들이 해마다 번갈아가면서 징병되어 집정관의 지휘를 받으며 복무를 했지만, 공화정 후기 들어서 싸움 잘하고 밥 잘먹이고 돈 많이 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집정관처럼 군대를 거느릴 수있게 되었다. 따라서 병사들이 전리품을 배분해 주거나 돈을 더 많이 주는 군 사령관에게 충성하는 사병이나 용병처럼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여기서 소위 마리우스의 개혁이 실존했는가 - 그리고 그것이 사병화를 불러왔는지는 현대에 들어서 점차 폐기되어가는 학설이다. 2020년을 전후로 학계는 마리우스 개혁의 실체와 사병화에 대해 의혹을 품고, 그보다는 동맹시 전쟁과 내전기가 사병화를 불러왔다고 보는 쪽이 늘어가고 있다. 위에 적힌 서술처럼 마리우스가 모든 개혁을 한 것도 아니었으며 '개혁' 이후로 적극적인 사병화가 이루어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12] 무산자가 개혁 이후로 모두 군대에 갔다는 것 역시 증거가 없다.
공화정 후기, 군사령관들은 휘하 퇴역병들의 복지를 보장해 줌으로써 지원병의 자질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일단 상당한 경제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피비린내나는 격전에서 함께 싸우면서 지휘관과 병사들 사이에서는 '전우'라는 인간적인 유대감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례는 《내전기》의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이는 마리우스 개혁과 꽤 시간적 차이가 나므로 마리우스의 '개혁'이 곧바로 이런 유대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일례로 로마 최초의 황제나 마찬가지인 술라나 폼페이우스 모두 병사들을 선동하거나 혹은 아예 자비로 군사를 꾸려서 커리어를 쌓아나갔는데, 이는 소위 말하는 '개혁'과는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병력 근간이 된 갈리아 속주 병사들 역시 카이사르가 자체적으로 모은 것이지 계급과 큰 연관이 없으며,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내전기에 모은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아예 경매하듯이 연봉을 높이 부르면서 병사들을 끌어 모을 정도였다.
원로원 의원으로서 정계 영향력 확대를 노리는 군사령관들은 잠재적으로 자신의 열렬한 지지자가 될 수 있는 퇴역병들의 생계를 보장해서 지속적인 지지 세력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물론 루쿨루스처럼 그냥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여 적은 봉급만 주었을 뿐 병사들에게 전리품을 나눠주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루쿨루스는 그 때문에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직전까지 간 상태에서 병사들의 반항과 파업으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전공을 빼앗기고, 차후의 정치적 입지도 불안해지는 등의 대가를 치렀으므로 야심있는 군사령관치고 자신의 부하들을 어느 정도 챙겨주지 않은 사람은 없다시피 했다.
따라서 군사 지휘관 - 특히 폼페이우스는 퇴역한 병사들의 생계 대책을 위해 정착지와 식민지를 달라고 요구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원로원은 이러한 요구에는 대체로 무감각하거나, 뭉그적거리며 제대로 처리해주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원로원 입장에선 무산자들이 우습게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단 전쟁 영웅인 폼페이우스를 견제하기 위해서인 탓이 컸다.[13] 당시 전공을 세우고 돌아온 병사들에게 식민시의 땅을 나눠주는 건 오래되고 합법적인 관행이었다. 로마 공화정과 원로원은 이미 그 옛날 베이이 시를 점령하고 식민시를 세울 때부터 병사들에게 땅을 나눠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는 폼페이우스가 술라 시즌 2가 될까 우려한 원로원의 견제라고 봐야 한다.[14] 결국 당시 원로원의 이 같은 견제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 그리고 그와 사이가 매우 안좋았던 크라수스와 손을 잡고 1차 삼두 정치를 실시하였으며 집정관에 당선된 카이사르가 제일 먼저 처리한 토지 개혁법은 자신의 퇴역병을 동원해 선거와 원로원 압박에 도움을 준 폼페이우스의 퇴역 병사들에게 땅을 나눠주는 내용이었다.[15]
여기까지 읽으면 알겠지만 퇴역병의 땅 분배 문제는 징병 재산 조건 하한과는 큰 관련없는 이야기다.
오히려 퇴역병 중에는 오랜 군생활로 인해 농사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기껏 받은 토지가 쓸모없다거나 돈을 마련하기 위해 처분하고 다시 상경하는 경우[16]도 빈번했다. 메리 비어드의 책을 참조하면 술라의 퇴역병 중엔 스파르타쿠스 전쟁에 끼어들거나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땅을 포기한 그들은 결국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의 사병 노릇을 하게 된다.
아무튼, 명장들 휘하에서 빈털터리였다가 타국을 약탈하거나 상여금을 받아 인생을 바꾸는 재미를 알게 된 병사들의 눈앞에는 훨씬 먹음직스러운 먹이가 들어왔다. 바로 지중해의 모든 재물이 모여든 조국 로마였다. 야심많은 군사령관들은 이런 보상 심리를 이용하여 로마군이 조국을 향해 칼을 휘두르도록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외세의 힘을 빌리는 매국행위도 아니고 어차피 내부 정치 다툼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군단 병사들은 야심 많고 능력도 좋은 군단 사령관들의 의중에 쉽게 동조하였다.
이후, 군사력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는 쿠데타가 연속으로 벌어졌으며, 이 시발점은 술라의 로마 진군이다.[17] 술라 이후에도 많은 장군들이 쿠데타를 시도하였고[18] 그들 중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장군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등이었고 이들은 서로 내전을 벌이는 형태로 권력 다툼을 벌였다. 결국 이러한 내전이 지속되다 옥타비아누스가 정국 불안정을 없애기 위한 목적으로 공화정 체제를 무너뜨리는 대신 자신이 직접 통치에 나섬으로써 공화정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고 제정, 즉 원수정이 시작되었다.
2.3. 제정 시기
2.3.1. 아우구스투스의 재편
혼란을 종식시킨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는 항복한 병력까지 합쳐 60개 군단, 50만 명에 가까운 대병력을 보유한 명실상부한 최고 사령관이었으나 그 병력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는 군대가 본질적으로 경제력을 소모하는 비생산적 집단이며, 당시 로마의 경제력을 생각하면 적절한 수준을 크게 초과하는 병력 규모였기 때문이다.[19] 그래서 늘어난 병력을 28개 군단 17만 명까지 감축했다가 너무 부족하다 싶자 보조병을 포함해 30만 명 정도로 늘렸다. 아욱실리아(Auxilia)[20]라는 보조병을 군단병과 마찬가지로 정규병으로 편입한 것이 아우구스투스였다. 공화정 후기부터 기용되었던 누미디아 기병, 갈리아 부족병, 시리아 궁병 등이 그대로 보조병으로 편입되었고, 일리리아 등지에서 새로운 보조병 충원도 계속되어 보조병이 군단병과 비슷한 규모로 정착되었다. 또한 이때부터 복무기간을 비롯해 여러 가지가 규정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군단에 복무하는 병사는 20년. 보조병은 25년을 의무 복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는 군단병들의 퇴직금 제도를 도입하여 공화정시 전역병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는 관례를 바꾸었다.[21]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3개 군단이 전멸하면서 25개 군단으로 줄어들었는데 방어선이 그럭저럭 갖춰지면서 굳이 보충할 필요가 없다 싶었는지 그대로 내버려두었고, 이후 클라우디우스 1세 시절부터 브리타니아 원정을 개시하면서 군단이 다시 증원되어 오현제 시대 직전 28개 군단, 오현제 시대에 30개 군단,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때 33개 군단으로 증원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명목상 공화정 복귀를 선언하는 동시에 자신에게 몇가지 특권을 허용해 달라고 원로원에 요청했는데 그 중 하나가 임페라토르 즉 군 최고 사령관 칭호 유지였다. 또한 각 군단이 배치되어 있는 전방 속주 총독 임명 권한도 프린켑스의 권한으로 따내었다. 이러한 처신은 크게 수익률도 안나고 로마화가 덜 되어있어 위험한 속주들을 마치 제 1시민인 자신이 책임지고 원로원 의원들에게 수익성 좋고 편안한 속주를 보장하여 원로원 의원들을 배려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속뜻은 달랐는데 전방 속주의 총독은 유사시 해당 속주에 배치되어 있는 군단들의 사령관이 되는데 이 속주 총독 인사권을 프린캡스의 권한으로 가져감으로써 군대 인사권을 황제의 관할로 넣은 것이다. 무엇보다 사령관의 개인적인 군단 모집과 사령관이 병사들에게 사적으로 포상하는 것을 금지하여 군벌화를 막았다. 심지어 사령관이 휘하 병사들을 부르는 호칭마저 변화시켰다. 본래 사령관은 휘하 병사를 전우라는 의미를 가진 '콤밀리테스'라고 불렀는데[22], 이를 단순한 휘하의 병사라는 의미인 '밀리테스'로 부르도록 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 본인이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족은 계속 '콤밀리테스'를 자주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아우구스투스의 노력은 네로 황제가 죽은 69년 내전으로 물거품으로 변한다. 라인강 군단병들은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하였고 로마의 근위대는 갈바를 죽여버리고 도나우강 군단병들과 함께 오토를 황제로 옹립하였다. 1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라인강 군단이 승리하며 비텔리우스가 황제가 되었지만 복수심에 불타는 도나우 강 군단병들은 시리아 총독이었던 무키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무키아누스는 자기 대신 제 1차 유대 전쟁 지휘관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라 제안했고 도나우 강 군단병들이 받아들이면서 베스파시아누스를 따르던 유프라테스강 군단과 이집트 속주 군단들까지 끌어들이는데 성공한다. 그 결과 2차 베드리아쿰 전투와 로마 시가전을 통해 베스파시아누스가 승리하면서 로마군은 원로원을 견제하는 강력한 권력집단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전에 티베리우스나 클라우디우스가 근위대를 동원해 원로원을 때려잡는 일이 있긴 했었지만 군단병들이 직접 황제를 옹립하는 일은 전례가 없었다. 도미티아누스 암살 이후에는 전선의 군단병들과 근위대는 새 황제가 된 네르바가 암살자 처벌에 미지근하고 자신들의 처우를 개선해준 도미티아누스를 기록 말살형으로 단죄하자 황제였던 네르바를 황궁에 감금시켜버리고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기도 했다. 결국 네르바는 자신을 감금시킨 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도미티아누스의 총애를 받았으며 군단병들에게도 인망이 높았던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입적했다. 물론 트라야누스는 오현제 중 1명으로 거론될 정도로 명군이었지만 군단병들의 정치 개입이라는 안좋은 선례를 남겼고 이는 결국 3세기 군인황제 시기가 오는데 영향을 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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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카 세그멘타타를 착용한 로마군 |
트라야누스 원기둥에 묘사된 전투에서 승리하여 다키아 군인들을 포로로 잡은 군단병들. 오른쪽에 군단기와 독수리기 그리고 대대기를 들고 있는 기수를 볼 수 있으며 로리카 무스쿨타를 정비하고 있는 장교들과 로리카 세그멘타타를 착용한 군단병으로 그리며 우리가 아는 로마 군단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일반적인 대중의 이미지와 다르게 전성기에도 로리카 세그멘타타가 전 군단병의 통일된 복장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레기온과 보조병 둘 다 로리카 세그멘타타를 전혀 착용하지 않은 기념물(루마니아의 아담클리시 트라야누스 기념비, #)이 발견되었기에 그 주장에 힘이 더해지는 중.
아담클리시 트라야누스 기념비에 묘사된 팔크스를 든 다키아 병사와 교전하는 군단병. 앞서 살펴본 트라야누스 포룸에 위치한 원기둥과 달리 군단병이 로리카 하마타를 장비하고 있다.
사실 갑옷이라는게 워낙에 비싼 물건인데다 군대라는 조직은 항상 물자와 장비가 부족해서 고생하는 집단인 만큼 이미 있는 물건을 알뜰살뜰 잘 아껴가며 쓰다보니 최종적으로는 다양한 무장을 사용하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당장 현대 한국군만 해도 제식소총은 K2 이지만 아직까지도 M16이 여기저기서 사용 중이며(예비군 제식 무기로도 쓰인다.) 심지어 특수부대에서는 HK416 이나 MP5 도 사용되고 있고 예비군 같은 경우 2014년까지도 M16보다도 과거의 무기인 M1 카빈을 굴려왔다. 이렇다고 해서 한국군에 제식무기가 없고 손에 잡히는대로 쓴다고는 할 수 없듯이, 당대 로마군도 최신형 무장 혹은 대다수가 착용하는 제식 무장 느낌은 있을지언정 도태된 구형 장비도 수리가 가능하다면 계속 사용했다고 보는 쪽이 맞다. 현대의 정밀병기와는 달리 갑옷이나 무기, 방패는 수리가 쉬운 편인만큼 "빈티지룩" 을 입고다니는 병사들은 로마 시대 내내 언제든 꽤나 많았을 것이다.
로리카 세그멘타타가 도퇴되기 시작되었다고 추정되는 2세기 말기 제작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기둥에 묘사된 황제의 연설을 듣는 군단병들. 로리카 하마타와 로리카 세그멘타타를 착용한 병사들이 섞여있으며 방패도 사각 방패인 스쿠툼에서 케트라투스로 바뀌어있으며 투구에 깃털 깃을 착용한 것을 주목하라. 이처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기둥에서 군단병에 대한 조각을 살펴보면 세그멘타타와 하마타를 장비한 병사들이 섞여 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가 철저하게 방어에만 전념한 것은 아니었으며, 재위 중반기에는 양자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형제를 등용하여 라인 강 너머 엘베 강까지의 제패를 통해 게르마니아를 제국의 영역 내에 확보하겠다는 야망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에게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가 이끄는 3개 군단이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전멸당하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멈추게 되었고[24], 제위를 물려받은 티베리우스는 제국의 방어선을 라인 강으로 한정하며 게르마니아 제패를 포기했다. 토이토부르크에서의 참패 이후 게르마니쿠스가 아르미니우스를 추격하여 엘베강 서안을 누볐지만 직접 게르마니아 원정을 나서보았던 티베리우스는 제국의 경제력으로는 게르만족의 로마화가 얼마나 어려운지 간파하고 게르마니쿠스를 로마로 소환하여 개선식을 시키고 아나톨리아 속주로 전출시켜버렸다. 현대 학계에서도 이러한 티베리우스의 판단을 제국의 경제력을 고려하였을 때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당시에 이러한 판단은 게르마니아 정복을 원했던 원로원과 시민들의 반감을 샀고 일명 게르마니쿠스 신화가 정착되게 되는 요인으로 작동하게 된다.
결국 로마군은 아우구스투스가 게르마니아 제패를 포기한 이래 사실상 국경 방어군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전성기 로마의 국경선은 1만 킬로미터에 달했기 때문에 국경을 방어하는 것 자체가 절대로 만만한 임무가 아니었다. 실제로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황제들이 새로 속주로 삼은 곳은 기껏해야 브리타니아와 다키아에 불과했다.[25] 물론 그렇다고 해서 로마군이 철저하게 요새화된 국경선에 틀어박혀 수비만 한 것은 아니었다. 로마군은 맞기 전에 먼저 때린다는 교리에 충실했으며,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야만족을 먼저 타격해 쓸어버리는 작업을 통해 국경을 방어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 이어지던 제국의 전성기 시기동안 로마군은 하드리아누스 방벽과 안토니우스 방벽를 건설하고 그 너머로 원정하거나 라인강을 수비하기 위해 건설된 게르마니아 방벽과 도나우 강을 건너 게르만족의 남하를 저지해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계속되는 게르만족의 남하 시도로 도나우 강 방면 속주가 위험해지자 티베리우스 황제의 게르만족 정복 포기 방침을 어기고 마르코만니 전쟁을 통해 오늘날 오스트리아 일대를 정복하여 도나우강 남쪽 속주를 보호하기 위한 완충지대를 확보하려 하였지만 콤모두스에 의해 무산되었다.[26] 이후 세베루스가 안토니우스 방벽을 넘어 칼레도니아 정복을 시도하였지만 많은 병력을 잃고 포기한다.[27]
물론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이 버티고 있었던 동방 국경에서는 이런 방식을 시행하지 않았다. 파르티아가 강력한 적인 동시에 중요한 무역 상대였기에 그대로 국경 방어에만 전념했다. 기본적으로 열린 국경 시스템에, 전쟁이 나면 국경을 닫는 방식이었다. 즉,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민족주의적이고, 중앙집권화된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출현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문제는 이 씨앗을 로마가 뿌렸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니시비스 전투 문서로.[28]
제정 시대 로마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국경은 레누스( 라인 강)와 다누비우스( 도나우 강)로 대표되는 서방, 그리고 동방의 유프라테스 강이었다.(물론 유프라테스 '강 자체'가 국경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지만) 로마 제국은 이 세 국경선에 군사력의 핵심인 다수의 군단을 배치했다. 이를 기반으로 주요 국경지대에 대규모 방어시설이 자리잡았는데 도미티아누스 시대에는 라인강을 따라 게르마니아 속주를 보호하기 위한 대규모 방어선인 게르마니쿠스 방어벽을 설치하였고 클라우디우스 시기 정복을 하지 못한 칼레도니아로 부터 속주를 보호하기 위해 하드리아누스 방벽과 안토니누스 방벽을 설치하였다. 다키아와 게르만족의 위험이 있던 도나우 강의 경우 소규모 보루를 다수 설치하였고 유프라테스 강에도 요새를 건설하여 파르티아에서 견제하였다. 그리고 군단병과 함께 그 수가 비슷하거나 많은 수의 보조병이 1차 방어선을 맡은 핵심 전력을 차지하였다. 보조병들은 주로 현지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일반적인 전투 상황일 때는 보조병 선에서 대부분의 처리를 했고, 대신 전면전은 군단이 수행했다. 그리고 제대할 경우 세습 가능한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그래서 보조병 전역자의 아들이나 손자가 군단병으로 입대하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29]
다수의 병력을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는 로마식 가도망과 곳곳에 들어선 초소와 요새가 결합된 유기적인 시스템은 제정 건설 이후 2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제국에 팍스 로마나를 제공했다.
2.3.2. 고대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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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50년경 무렵의 로마군. 아무런 갑옷 없이 천옷만 입고 있어 매우 부실해 보이지만 천옷안에 갑옷을 입고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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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행진하는 로마군[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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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로마군은 길어진 검과 원뿔형, 원통형 투구를 쓰고 찰갑과 사슬갑을 입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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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로마군 기병과 보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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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향해 돌격하는 후기 로마 기병대[31] |
3세기에 이르러서는 게르만족들은 로마군의 진법과 훈련을 모방해서 강해진데다 갑옷 착용 비용이 대폭 올라갔고 부족에서 왕국으로 발전하는 단계를 거치고 있었으며, 사산조 페르시아는 파르티아를 타도하면서 어설픈 봉건 제도를 타파하고 옛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을 되찾을 것을 국시로 분명히 하면서 중앙 집권제를 확립하였다. 즉 게르만족들은 카이사르가 각잡고 두들겨 대던 그 게르만족들이 아니었으며 사산조 페르시아의 경우는 간혹 로마가 방심하면 어처구니 없이 지기도 하던 파르티아보다 동원 병력 규모가 훨씬 늘어나 더욱 강해진 상태였다. 이에 따라 로마의 기존 방어 전략을 어긋났고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리게 된다.
이전까지의 게르만족의 침공의 경우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하는 부족 단위 이동이거나 소규모 부족의 약탈이었기 때문에 기동력이 떨어졌고 따라서 미리 때려잡거나 보병 회전으로 물리치는게 가능했다. 하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를 기점으로 게르만족은 종전의 전략과 달리 기병대를 위주로 기동력을 상승시켜 로마군의 방어기지를 빠르게 우회하여 속주 깊숙히 침투, 약탈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이렇게 기동성이 강조된 새로운 전략에 로마의 기존 전략으로 조기에 대응하기는 무리였고 대신 약탈을 하고 돌아가는 게르만족을 때려잡는 시스템이 도입되었다.[32] 또한 훈족의 서진으로 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족이 대규모 남하를 시작하며 안그래도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로마군의 대응력은 더더숙 낮아졌다. 과거 로마 공화국 시기에도 게르만족의 대규모 남하에 맞서 발발한 킴브리 전쟁에서도 로마는 8만이 넘는 병력을 상실하며 위기를 맞이했지만 군제 개혁과 풍부한 생산력을 가지고 있던 서아시아 정복 전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3세기 로마는 황제를 군단병들이 추대하는 군인황제 시대가 도래하여 내전의 혼란에 빠져있었던 탓에 군단들이 풀파워를 낼 수 없었다. 결국 내전과 게르만족의 남하로 인해 전장이 된 속주의 황폐화가 촉진되어 속주 전반의 경제력이 악화되며 안그래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기점으로 악화되고 있던 제정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내우외환. 즉 적들은 인력이 늘어나고 지휘 체계, 진법, 군제까지 일신해서 동원력과 단위 전투력이 상승했다. 더군다나 훈족의 압박으로 민족 대이동이 시작된 후에는 죽기 살기로 싸웠기에 고트족 난민의 경우에는 무기를 들 수 있는 남성 전부가 전투병력이었다. 이걸 막아내야 하는 로마 제국은 하필 재정 악화와 병력 자원 감소로 경제적 부양 상태가 갈수록 나빠져 단위 전투력과 동원력이 떨어져버리는 시기였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일단 재정 악화야 로마의 경제제도 자체의 문제점에서 시작된 것이고, 병력 자원의 감소는 로마 시민들이 입대를 기피하게 되면서 모집이 힘들어진 데다, 귀족들도 소작제를 하면서 자신들의 소작농들이 입대하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손해라는 걸 잘 알기에 소작농들의 입대를 적극적으로 막았다. 또한 군인들도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군대에 더는 있기 싫어해 탈영이 증가했다. 국가에서 탈영자를 엄하게 처벌하고 입대 시 낙인을 찍었지만 그래도 탈영이 계속될 수준으로 심각했다. 그래서 모병제에서 다시 징집제로 회귀한 이후로는 병역을 회피하기 위한 자해도 만연하였다. 주로 손가락을 절단하는 자해[33]가 주를 이루었고, 여러 황제들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병역 회피를 위해 자해를 한 자들을 일종의 공익으로 배치하였고,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자해를 하면 화형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리고 테오도시우스 1세는 자해를 한 사람도 그냥 징병하였다. 또한 계속된 전쟁과 내전, 그리고 전염병[34]으로 인한 인구 감소도 병력 자원의 악화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상황에서 바깥의 적이 강해지니 내우외환의 상태가 된 것이다.
유튜브나 국내의 예능 등지에서 '로마가 망한 이유' 같은 자극적인 제목을 걸어놓고 올라온 영상들을 보면 로마 당국이 사치와 나태에 빠져 향락에 쩔은 나머지 문제를 몰랐고 수정도 하지 않아서 멸망했다는 수박 겉 핥기식 설명을 하는데 이는 로마 사회의 아주 일편적인 부분만을 본 것으로, 사실이 아니다. 종전의 방어 전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고, 기존의 전술이 국토를 방어하는 분야에서는 효율이 떨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로마는 변해가는 국제 정세속에서 계속해서 군제 개혁을 단행하였다. 본격적인 군제 개편과 전술 혁신을 추구했던 황제들은 제국에서 수없이 많았고, 또한 뛰어난 게릴라전과 공성전, 그리고 대규모 전투를 모두 잘하는 명장인 장군 황제도 많이 배출되었다.
다시 언급하자면, 과거의 로마군이었다면 라인/도나우 방어선에서 야만족의 선제공격 이전에 병력을 집결시켜 야만족의 본거지를 공격, 로마군이 강점을 보이는 평원에서의 회전을 벌이는 식으로 전투를 전개시켰겠지만 어느 시기부터는 더이상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이는 인력이 부족한 이유도 있었고, 야만족들도 평원에서의 회전에서 이전과는 달리 일방적으로 로마군에게 휘둘리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다.
기존 로마군 방어 체계의 패러다임이던 선방어가 더이상 유용하지 못한 상황이 온 것이다. 보병 중심의 선방어는 유효한 방어수단이라고 할 수 없었고, 로마군은 결국 군사 교리의 전환을 선택한다. 수많은 게르만 부족들이 여러 전선에서 습격할 때 방어선에 배치된 방위군(Limitanei, 리미타네이)들이 버티는 동안 중앙의 기동 부대(Comitatenses, 코미타텐세스)가 지원하러 가는 식이었다. 다만 이런 변화 역시 단기간이 아니라 2~4세기 동안에 점진적으로 일어났다는 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35] 병력을 늘렸다지만 오랜 훈련과 많은 비용이 드는 기병을 그렇게 단시일 내에 늘릴 수는 없었으며 결국 보병의 기병으로의 전환은 보병을 하마 기병으로 만드는 것부터 우선되어야만 했다.
말타고 싸우는 진정한 의미의 기병 확충은 콘스탄티누스 1세 시절까지도 제대로 완비되지 못했고, 이는 콘스탄티우스 2세와 율리아누스 그리고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시기에 와서야 겨우 이뤄진다.[36] 스틸리코와 아에티우스의 로마 이미지만 기억한다면 이런 조치를 어떻게 할 수 있었겠나 이해가 어렵겠지만, 이런 이미지의 로마 제국은 4세기 후반 부터의 서로마 제국에 한정되는 데다 흔히들 기억하는 막장 로마 제국은 동서 로마 제국 중 서로마 지역에 한정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때 이뤄지는 기병 확충 및 제대로 된 기병 수급 체제는 이후 제국 역사가 지속되는 한 계속되었다.
유명한 원수정 로마군을 상징하는 무구들, 즉 필룸, 글라디우스, 스쿠툼은 한순간에 사라진 건 아니었다. 가장 먼저, 그리고 제일 눈에 띄게 변화가 시작된 것은 진형의 변경이었다. 스쿠툼과 글라디우스는 밀집 진형 위주의 과거 군단병 체제에는 적합했지만, 게르만족에 의한 게릴라전과 기습, 추격이 난무했던 후기 로마군에게는 적합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점차 병사들의 질이 떨어지는 관계로 훈련도 좀처럼 체계적으로 받지 못했기에 종전의 글라디우스보다 긴 검인 스파타를 쓰게 되었고, 방패도 테스투도진형을 짤 수 없는 원형 방패로 바뀌게 되었다. 다만 이런 변화도 일부 특정 황제들이 이제부터 로마군은 스파타와 원형 방패만 쓰라고 해서 한순간에 바뀐 건 아니며, 역시 점진적으로 이뤄졌다. 글라디우스는 한꺼번에 스파타로 대체된 게 아니라 천천히 검신이 길어지는 과정을 거쳤으며, 스파타로 불리는 검도 꽤 오랫동안 계속 글라디우스로 불렸다. 또한 직사각형 방패 스쿠툼은 적어도 3세기 후반까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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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카 스쿠아마타를 재현한 리인액트먼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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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서로마의 투구와 갑옷을 재현한 리인액트먼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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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로마군의 대표적인 투구인 베르카소보(Berkasovo) 투구 |
후기 로마군의 공식적인 제식갑옷은 라멜라 방식(찰갑) 로리카 스쿠아마타였다는 정도는 알려진다. 갑옷은 판금갑옷 계열인 로리타 세그멘타타에서 찰갑과 사슬 갑옷으로 돈이 되는 한에서 교체되어 나갔고, 투구도 고대 로마군의 투구에서 점점 단순한 원뿔형 투구로 바뀌어 나간다. 그래도 초기에는 고대 로마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나, 로마군 특유의 양식에 맞춘 장식들이 제작단가를 꽤 올려먹는 탓에 점점 단순한 모양으로 바뀌어나가게 된다. 4 ~ 5세기 로마군 장병 가운데는 이 문서 위에 나온 것처럼 갑옷을 아예 안 입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은 비용 문제 때문이었다. 그 대신 과거 로마군과 달리 긴팔 상의와 바지를 입고 전투화도 샌들에서 변화해 발 전체를 감싸는 형태의 신발로 신었다. 다만, 로리카 스쿠아마타의 공식 제식 설계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찰갑의 특성상 온전한 모양으로 발굴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3세기 이후부터는 온갖 설계의 사슬갑, 찰갑 갑옷과 투구가 난립하여, 실질적으론 그냥 만드는 대로 썼다고 추정된다.
투구의 경우 고전 로마 스타일 장비가 꾸준히 발견되는 것을 보아, 고전 로마 갑옷/투구의 약점을 보완하면서도 고전 로마 스타일을 준수하는 로리카/개량된 임페리얼 투구를 썼다고 보인다. 3세기에 들어가기 전부터 로마군은 기존 고전 로마 투구 설계의 허점 때문에 그레이트 헬름과 같은 원뿔형 투구를 많이 사용하게 되는데, 이 와중에도 고전, 임페리얼 스타일을 살리려는 시도는 돈과 능력이 되는 한 계속되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주변 야만족과 구분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 영 찝찝했는지 적당히 타협하여 납작한 원기둥형으로 개량한 것을 제식으로 삼게 된다. 그러나, 이것도 영 좋지 않았기 때문에 삽질을 반복하다가 원뿔형 디자인에 로마 투구 특유의 각진 느낌을 장식으로 넣은 최종 설계가 등장하여 프라이토리아니 같은 최정예 병사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허나 이것도 오지게 비싸서 결국 제식 설계는 고전 로마와 고전 그리스 투구를 짬뽕한 염가형 투구로 교체된다. 하지만, 그딴거 알 게 뭐냐는 식으로 쿨하게 고전 로마 제식 장비에서 갑옷만 스쿠아마타로 바꿔놓은 병사들도 있던 모양.
대체적으로는 후기 로마군의 투구는 위에서 보이는 베르카소보(Berkasovo) 또는 헤비 리지(Heavy Ridge)라고 불리며 3세기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 투구들은 일반적으로 켈트나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기존 로마 투구 형태보다 원통형 투구의 모습을 보이고 현존하는 투구는 고전 로마 투구보다 훨씬 더 화려한 장식을 가지고 있어 기병이나 고위 관리들을 위해 고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일반 병사들은 장식없는 일반 투구를 썼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런게 로마 투구 답지 않다고 멋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오히려 방호력이나 실용성은 더 좋았다. 또 보석등으로 장식된 고위직, 기병들의 베르카소보 투구는 고전 로마 투구와는 또 다른 색 다른 맛이 있다.
어쩌면 방패와 칼, 갑옷보다 훨씬 중요한 변화일지도 모르는 변화는 바로 투창에 있었다. 투창은 로마 극초기부터 로마 말기에 이르기까지 위력적인 무기 취급을 받았지만, 비싸다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고대 로마군의 막강한 견제력의 주축을 자치했던 그 유명한 필룸은 분명 손에 꼽을 만큼 막강한 투창이었지만 필룸의 특성상 한 번 쓰고 버려야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용 부담은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더럽게 무겁기까지 했기 때문에 예산 문제와 기동성 문제가 동시에 결합되어 버린 꼴이었고, 결국 버틸 수가 없게 되어 도태되어 버린다. 그래도 투창은 뛰어난 무기였기에 더 싼 것으로 바꾸는 한이 있어도 유지되었으나, 결국 이조차도 정신나간 유지비와 무겁다는 병사들의 불만이 겹쳐져 아예 베르툼이라 불리는 다트로 교체되었다. 이 베르툼의 경우 표준 규격이 없었고 각자 취향대로 만들었는지 무게와 크기가 천차만별이라 무거운 축의 경우 180~200g 정도이고 말이 다트지 정확하게 말하면 대형화살을 손으로 날리는 것과 크게 차이가 안 났다. 다트라고 분류할 때는 중다트라고 말해야 할 정도였다. 어지간한 현대의 DMR소총이나 경기관총급의 무게인 필룸 2~3개를 들고 다니는 것보다는 가벼웠으므로 5~6개 씩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투척이 가능했다. 단, 필룸이 가지는 장점인 비상시 1회용 대기병용 창의 역할을 더이상 바랄 수 없게 된 것은 큰 단점이 되었다. 이 부분은 아예 전투용 창 자체[37]도 갖고 다니며, 제정 시절 파르티아 등과 붙으면서 보강한 각종 궁병 같은 원거리 전력과 제정 말기의 기병 전력이 커버하는 걸로 해결했다.
이렇게 로마군이 점점 철벽같이 틀어막은 후 상대를 나가 떨어지게 만드는 레기온 방식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당장 중대한 적성국인 사산조 페르시아의 기병대 발전과도 연관되어 있었다. 로마 후기에 이르면 이미 중세 기사에 가까운 형태로 발전한 랜스가 등장해 있던 시점이기에 기병 돌격이 이전보다 한층 강화되어 있었다.[38]
특히 이 시기 사산조 페르시아에서는 고대에서 한참 뒤에 나오는 카우치드 랜스에 가까운 랜스 파지법이 등장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거의 카우치드 랜스 차지에 가까운 돌격을 행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물론, 로마군은 투창을 애용하였으므로 중세 서유럽처럼 랜스 차징에 일방적으로 손실을 입지 않고 투창을 집어던져 돌격을 방해할 수 있었으나, 위에 이미 서술했듯, 그 로마조차도 감당 못할 끔찍한 가격 때문에 투창을 어쩔 수 없이 점점 포기해가면서 기병 돌격에 더욱 취약해져갔고, 때문에 로마군은 아예 창을 상비하는 쪽으로 방식을 바꾸었다. 또한 파르티아나 사산조 페르시아와 싸울 때는 타지역보다 원거리 투사 병력을 더 강화해서 싸웠고, 이제 로마군 쪽에서도 중장기병이 등장해서 맞돌격을 걸어버리기 시작했다.
이런 로마군의 변화는 당장 최정예인 프라이토리아니의 무장 변화에서 극적으로 드러났다. 방패가 로마 초기의 타원형 방패로 회귀하였고, 갑옷은 찰갑으로, 투구는 원뿔형으로 바뀌었으며, 글라디우스는 1.5배쯤 길어지고, 투창은 필룸 대신 랜스에 가까운 모양을 가진 작고 가벼운 투창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이 창 또한 꽤 오랫동안 필룸으로 불렸다.
이건 로마군의 편제가 카라칼라 이후로 보조군 아욱실리움과 정규군 레기온의 지원 자격 구분이 없어져 버린 이후, 인력 부족에 따른 전술 및 교리 개편에 이전 보조군인 아욱실리움의 무장이 더 적합했던 이유도 있었다. 다만 여기서 오해가 있는데, 이 3세기에 일어난 변화는 거의 준징병제로 바꾸다시피한 디오클레티누스 이전에 이뤄졌기에 탈영과 인력 부족으로 허덕이던 4세기와 5세기의 양상과는 별로 관련이 없고, 보조군과 정규군의 통합 및 속주민에 대한 로마 시민권 부여로 보조군 전체가 그냥 정규군이 되었다. 이것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 1세가 또 다시 쪼개서 리미타네이가 이전 보조군이 하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지만 이는 4세기 동안 진행되는 개편이지 3세기에까지 소급해서 볼 순 없다.
때문에 로마군은 갈수록 창을 많이 쓰게 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로마군 병사들도 이미 창을 많이 들고 있는 게 확인된다. 다만 게르만족이 대거 군대로 들어와서 게르만족들의 장비로 바뀌었고, 이 때문에 '야만화되었다'는 주장도 간혹 보이는데, 많은 오해와는 달리 2~4세기에 로마군에 입대한 게르만족은 용병이 아니라, 로마 시민권이 있고 로마인 장교 밑에서 훈련받고 싸우는 정규 상비군이었다.
이에 대해 다른 잘못된 생각은 게르만족이 자기네 장비를 그대로 갖고 로마군에 들어와서 로마군의 전술이 '게르만화'되었다는 오해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이 시기에 입대하는 게르만족은 부족 단위가 아니라 기존 로마군 부대에 개별적으로 입대해서 해당 부대에서 장비를 지급받고 로마식으로 훈련했으며, 애초에 게르만족 또한 로마군의 전술과 장비를 꾸준히 자기네 식으로 모방하려고 했다.
필룸은 상당 부분 이후 시기에서도 쓰였으며, 율리아누스 시대에도 썼던 것 같으나, 중량도 더 적고 휴대는 간편하며 개수는 많은 플룸바타리( 다트)와 베르툼(벨리테스 등이 사용했던 투창), 그리고 필룸과 유사한 중투창인 스피쿨룸이 필룸을 점차 대체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필룸이 무겁고 비싸서 자비로 무장을 해야 하는 로마 병사들에게 부담을 많이 줬기 때문에 서서히 도태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역시도 스파타와 마찬가지로 플룸바타리도 정작 그 시대엔 그냥 필룸이라고들 많이 불렸다.
궁병 상당수를 시리아 등지에서 온 보조병으로 충당했던 원수정 시기와는 달리, 자체 궁병 양성에도 꽤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개편된 로마군의 기병은 사르마티아계 록솔라니족, 알란족, 고트족 등 유목민들과 게르만족 기병들에게서 아이디어를 많이 차용하고, 그들 자체를 용병으로 고용했다. 마찬가지의 논리로 사산조 페르시아의 중장 기병에게서도 많은 영감을 받았다. 훈족 쇼크를 겪은 5세기 이래로는 훈족 기병들과 궁병들의 전술도 상당 부분 차용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개편된 로마군은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주변국의 군대에서 장점을 따와서 기존의 로마군 체제를 서서히 변화시켰으며, 이는 중세 동로마 제국 군대의 뼈대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는 제국의 자금력이 부족한 때문이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기동성을 높이고 유연한 전략을 추구하던 혁신의 결과물이다. 이 시기 로마군(서로마군)도 서로 내전을 하지 않은 상황에선 대부분 이민족 군대 상대로 꽤 높은 승률을 가져갔다.
2.3.3. 중세 시기
자세한 내용은 동로마군 문서 참고하십시오.3. 조직
3.1. 공화정 중기
3.1.1. 레기온
Legio한국과 일본에서는 '군단'으로 자주 불린다. 로마 시민들로 구성된 로마군 전력의 핵심 조직이었다. 그러나 공화정 시기의 군단과 제정 시기의 군단은 편제가 꽤 다르다.
공화정 시기 로마 군단은 고대 로마의 명장 카밀루스에 의해 체계가 갖추어졌고, 이후 주무기가 창에서 글라디우스로 바뀌는 변화를 겪었다. 제정 시기보다 규모면에서 비교적 작아 1개 군단이 보병 4200명으로 구성되었다. 군단의 주력은 3개로 나뉘어진 중장보병 부대였다. 중장보병들은 군사 경력이 짧지만 젊은 축에 속하는 하스타티와 경험을 갖춘 실질적인 주력 부대 프린키페스, 나이가 비교적 많은 고참으로 구성된 예비대 트리아리로 나뉘어 편성되었다. 여기에 소수의 기병(에퀴테스)과 경장보병(벨리테스)가 주요 병과였다. 로마는 2개 군단을 집정관 군단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전략 단위의 병력으로 취급했다.[39] 전략 단위로서의 군단은 거의 항상 로마 시민병과 더불어 비슷한 수의 동맹시 병력을 대동했다.
3.1.2. 동맹시 보조군 (Alae Sociorum)
공화정 중기, 로마 시민이 아닌 이탈리아 반도 각지의 동맹국 병력으로 구성된 보조군이었다. 날개(Alae)라는 이름처럼 주로 군단병의 양 측면에 나누어 배치되었다. 병력 규모는 보통 로마 시민병보다 다소 많았고, 특히 기병은 로마 시민 기병대의 3배로 당시 로마군 기병의 주력이었다. 전통적인 로마군 대형에서 동맹시 기병대는 좌익을, 로마 기병대는 우익을 맡았는데 이 불균형을 한니발이 찌르기도 했다. 보병의 경우 로마 시민병과 무장이나 전투 방식에서 큰 차이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동맹시 병력 중 보병의 1/5, 기병의 1/3은 동맹시 정예병(Extraordinarii)으로 따로 편성되어 로마 집정관 직속으로 배정되었고, 숙영지에서도 집정관의 막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잡았지만 전투시에는 부대 구분 없이 동료 동맹시 병사들과 함께 싸운 것으로 추정된다.제정 시기의 로마 보조군(Auxilia)과 비슷한 역할이었고, 실제로 영향을 주었다고 하나 완전히 같은 개념은 아니었다.
3.2. 공화정 말기에서 원수정 시기
3.2.1. 레기온
공화정 후기에서 제정 중기까지의 군단은 기본적으로 마리우스에 의해 짜여진 편제를 기본으로 했다. 공화정 중기의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가 프린키페스와 유사한 하나의 중보병 병과로 통일되었다. 각 100여명의 정원으로 이루어진 6개의 켄투리아(가장 비슷한 현대 군 편제는 중대 정도)로 구성된 총 10개의 코호르스(현대의 강화된 대대 정도?)가 6000명 정원의 1개 군단, 즉 레기오를 형성했다. 주력은 여전히 시민으로 구성된 중장보병이었지만, 규모의 확대 및 보조병의 충원을 통해 유기적인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한편 경보병 벨리테스와 로마 시민 기병대 에퀴테스, 이탈리아 동맹시 기병대 등은 기원전 1세기부터는 군단 편제에서 사라졌으며, 소규모 별도 군단 기병대가 편성되었다.3.2.2. 보조군
Auxilia.[40] 로마 시민권이 없는 속주민, 제국 외부의 '야만인' 등으로 구성된 보조군으로, 포에니 전쟁 시기를 기점으로 로마군의 중요 전력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기병이 부족하다는 점은 항상 로마군의 아킬레스 건이었다. 기병을 제공하던 최상위 계층의 수는 적었고, 당시에는 등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병을 육성하는 것은 로마에게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또한 군마 부족도 정말 심각했다. 로마군에서 군마를 탈 수 있는 게 고위장교, 연락병뿐이었다. 이러다보니 로마군은 항상 보병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공화정 중기에는 주로 이탈리아 동맹국에서 기병을 동원했고, 이후에는 로마가 점령한 여러 속주나 동맹국, 동맹 부족들로부터 기병을 충원받았는데, 사실상 충원이 아니라 비싼 돈주고 용병처럼 고용하는 것에 가까웠다. 대표적인 예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명한 갈리아/게르만 기병,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동맹자였던 누미디아 기병을 들 수 있다.
물론 기병은 돈이 워낙 많이 드는 관계로[41] 이들조차 기병이 강한 사산조 페르시아나 아르사케스조 파르티아에 비하면 높은 비율은 아니었고, 3세기 동안에는 진정한 기병이 아닌, 야만족들을 빠르게 따라잡기 위한 하마 보병들이 주를 이뤘다. 즉 보병 → 하마 보병으로 전환이 이뤄졌고, 이 하마 보병에 대해 다시 기병화가 3~4세기 동안 꾸준히 이뤄졌다.
기병 외에도 누미디아 투창병, 발레아레스 제도의 투석병, 크레타 섬의 궁병 등 경보병 보조군이 군단병의 약점 보완을 위해 활용되기 시작했다. 공화정 후기의 보조군은 상대적으로 용병에 가까운 개념으로 필요할 때 충원하고, 전쟁이 끝나면 해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존에 활용되던 여러 보조병을 로마 정규군 편제로 편입시키고, 군단병과 비슷한 수로 확대하였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기부터 보조병의 복무기간이 25년으로 규정되었다. 봉급도 지급되었는데 만기 전역시 받는 로마 시민권이라는 메리트를 감안해 군단병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적정 수준의 대우를 해줬을 것으로 보인다. 정당한 급료는 물론, 보조군으로 일정한 기한을 복무하면 로마 시민권을 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기 때문에, 로마군의 보조병들은 일반적인 용병들과 달리 높은 충성도를 보이며 정규군과 함께 끝까지 싸운 경우가 많았다는 점도 특이하다. 이후 제정 내내 그 수가 증가하여 군단병보다 그 수가 많아졌다.
아버지가 보조군으로 장기복무해서 시민권을 따고, 아들이 그 시민권으로 군단병으로 입대해 복무한 사례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버지가 복무한 보조군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군단병을 시민병, 보조군을 비시민병으로 생각하는 통념과 달리 로마 시민 또한 보조군으로 입대가 가능했다.
아우구스투스가 방랑자, 범죄자 등 가장 자질이 낮은 로마 시민들로 구성된 보조군 코호르스(Civium Romanorum, 키비움 로마노룸)를 편성하는 등 보조병이 완전히 비시민만으로 구성되지는 않았다. 이들 부대들도 창설 이후에는 비시민병의 지원을 받고 주로 비시민병으로 구성되었지만 부대의 c.R. 타이틀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로마 시민권을 가진 보조군 전역자들의 아들들이 아버지와 같은 부대에 입대하거나 군단병이 보조군의 더 높은 직책으로 이동하는 등 로마 시민이 보조군에 입대하는 비율이 점점 높아지게 되었고, 군단병과 보조병의 무기 전술이 비슷하게 변하게 된다.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으로 시민과 속주민의 구별이 철폐된 후 보조병은 다수의 로마 시민과 일부 국경 바깥의 비제국민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보조병 제도가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일단 로마군에게 고용된 보조병 대부분은 속주민이었지만 아직 속주민이 아닌, 즉 게르만족처럼 로마군의 적인 경우도 있었는데[42], 이런 경우에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왜냐면 게르만인들이 로마의 용병으로 고용되어 보조병으로 복무하면서 로마의 전술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서 로마군이 게르만인들을 상대하기가 더 힘들어지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로마군의 차별과 멸시가 심했기에 보조군들의 반란도 자주 일어났다. 특히 급료가 군단병들보다 적은 데다 그 급료마저 제때 못 받는 일이 생겨서 이에 가장 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도 많았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최악의 패배이자 로마의 세력이 라인강 동안부터 엘베강 서안까지 확대되는 것을 저지했다고 평가받는 토이토부르크 전투의 게르만족 측 지휘관이었던 아르미니우스가 바로 그 예이다. 대 드루수스의 게르마니아 전쟁 당시 인질로써 로마에 보내진 아르미니우스는 로마식 교육과 로마군에 복무하며 로마군의 전술을 익히고 무려 로마 시민권까지 얻어 기사계급에 도달한 자였다. 아르미니우스는 게르만족의 왕이 되고 싶다는 야심이 있었는데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신임하던 바루스는 끝내 그에게 치안관 이상의 요직을 주지 않으며 차별하자 로마와 함께 복속된 게르만족의 왕이 되겠다는 야심에서 로마에 대항하는 게르만 연합 부족의 왕이 되겠다고 그 뜻을 바꾸었다. 이렇게 로마군을 배신한 아르미니우스는 토이토부르크의 숲속으로 바루스와 속주화 작업을 위해 파견된 3개의 군단을 유인하여 이들을 완전히 궤멸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 인해 로마는 아우구스투스가 계획하였던 라인강에서 엘베강 사이의 영토 1/2 그것도 대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의 활약으로 평정이 되어 속주 정착화만 남았던 엄청난 양의 영토를 잃었고 여기서 전멸한 17,18,19 군단은 다시는 편성되지 않으며 로마 역사상 칸나에 전투에 맞먹는 수치로 남았다.[43] 보조군 반란에 무려 9개 군단, 6만 명이 투입된 적도 있었다. 네 황제의 해의 혼란을 틈타 발생한 바타비족 보조군 반란 이후 보조군 체계가 대대적으로 개편되어 보조군 부대들이 부족 단위를 유지하지 않도록 개편되었고, 많은 부대들이 주둔지를 원래 근거지에서 먼 곳으로 이동하기도 했다.[44]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에는 로마 시민으로 지원자격이 제한되는 레기온의 신병 모집 문제 및 질적 저하, 입대자들의 보조병 선호 현상이 일어났으며, 세베루스 왕조 이후 레기온, 보조병 구분 없이 기지로부터 차출된 기동부대(vexillatio, 벡실라티오) 편성이 상설화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변화가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로 체계화되면서 레기온과 보조군의 구분은 의미를 잃었다. 각각의 보조군 부대 편제들은 없어지지 않고 작은 단위로 나뉘거나 이름이 바뀌기도 했으며, 기존 레기온 부대들과 섞여 팔라티니, 코미타텐세스, 리미타네이 등 후기 로마군 편제를 구성하였다.
3.2.3. 프라이토리아니
Praetoriani일명 근위대. 매체에서 흔히 '프레토리언 가드'라고 부르는, 이탈리아에 주둔 한 유일무이한 본국 이탈리아 주둔 군단이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황제 직속 친위대로, 보통은 근위대장 2명이 대략 9개 대대를 밑에 두고 운용했다. 정규 군단의 편제와는 달랐기에 '군단'이라는 표현과는 거리가 좀 있다.
정규 로마군이 10개의 코호르스(대략 80명으로 구성된 켄투리오 6개로 구성) 총 6000여 명으로 구성된 반면, 근위대는 총 9개 코호르스 900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비텔리우스는 한때 9000명 규모 근위대를 2배 가까이 증설했지만 베스파시아누스가 바로 원상복귀시켰다. 이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근위대의 규모를 크게 보강하고(《로마 제국 쇠망사》에는 거의 3배~4배 규모라고 쓰여 있다) 권한을 강화하면서 권력투쟁의 온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원로원 등 공화정 세력들의 반발을 우려해서였는지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 분산시켜 특별한 주둔지가 없었으나, 티베리우스 시절 세야누스의 건의에 따라 수도 로마 외곽에 근위대 병영을 짓고 전체를 로마에 주둔하게 됐다. 제국 후기에는 근위대 병영이 아우렐리아누스가 건설한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의 일부에 포함되어 수도 로마의 방어 시스템 일부를 이루게 되었다. 이탈리아에 주둔하는 사실상 유일한 군사력이었으나, 이러한 역사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재위 당시 도나우 강 방어선이 돌파당하면서 맞은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편성한 이탈리아 주둔군에 의해 끝나게 되었다.
할리우드 로마시대 배경물, 서양 사극에서 보이는 프라이토리아니는 일반 군단병과 달리 굉장히 화려하고 멋진 군장을 하고 있지만, 실제 모습은 그 반대였다. 아우구스투스가 처음 창설할 당시,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들은 거의 누더기에 가까운 조촐한 토가를 입고 대거 한 자루만 차고 다녔고, 전투에 투입되거나 행진을 하는 경우에만 무장을 하였다. 이유는 당연하지만, 원로원을 안심 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나중에는 아예 원로원 의원들처럼 토가를 입고 있다가 비상시에는 군장을 하는 복장으로 바뀐다.
황제 직속의 부대이니만큼 정예부대로 알려져 있고 대우도 좋았다. 근위병의 급료는 675데나리우스로 군단병의 3배였고, 의무 복무기간은 16년으로 군단병의 20년보다 적었으며, 퇴직금도 5000데나리우스로 60% 더 받았다. 이런 기본급 외에도 아우구스투스 ~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칼리굴라) 시절에는 황제에게 충성보너스가 명절상여금처럼 수시로 지급되고, 클라우디우스부터는 황제가 제위에 오를 경우 일시급으로 충성보너스가 두둑히 호주머니에 들어왔다. 이런 경제적 이유에 더해, 근위병이 됐다고 하면 황제가 직접 전선에 나가는 일이 없는 이상 직접 전선에 나가 싸우는 일이 드물었다. 제정 초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래에서 직접 전투를 치른 것은 서기 39~40년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칼리굴라)의 갈리아, 저지 게르마니아 원정과 서기 43년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원정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평화기였던 네로 아래에서는 이탈리아 출신 청년(특히 북이탈리아 출신)의 게르마니아, 갈리아, 판노니아 군단 지원은 감소하고, 프라이토리아니 지원현상이 심화돼 네로 치세 중반부터는 사회 문제 중 하나가 됐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평화기인 까닭에, 전투에 나갈 일이 거의 없고, 봉급은 배로 받는 좋은 일자리인데다 백인대장 정도로만 진급해도 기사계급으로 신분상승을 꿈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플라비우스 왕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존속한 원수정(프린키파투스) 중•후반기에도 계속 됐다. 따라서 팍스 로마나 중반 이후인 하드리아누스 시대부터 군단병의 메리트가 떨어지던 시절에는 본국 이탈리아의 시민권자들의 지원서가 몰려들어 속주 출신 시민들은 지원조차 못했을 정도가 됐다. 다만 진짜 중요한 전쟁이 벌어지면 직접 최전선에 나가서 싸웠다. 실제로 도미티아누스 시절에는 근위대 절반이 다키아와 싸우다가 궤멸당했던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들의 임무는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수도인 로마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경찰에 가까웠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수도 경찰이 존재하는 로마의 시스템을 생각할 때, 치안 유지보다는 정보 수집과 원로원에 대한 일종의 위협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제정 중기까지도 황제와 원로원은 서로 으르렁거릴 수 있는 관계였다. 이런 원로원을 제압하는 황제의 두 가지 무기가 바로 근위대와 국가반역죄였다. 상술했듯 근위대에는 두 명의 근위대장이 있었고, 이들은 보통 원로원 계급이 아닌 기사계급 출신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근위대의 역할에 원로원 견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로 칼리굴라가 암살된 직후에 근위대는 원로원이 '공화정 복귀'를 선언하기 위해 실제 움직임을 취하고, 아우구스투스 일족 전체를 기록말살형으로 단죄하고자 하자, 재빨리 클라우디우스를 황제로 앉혀 대응했다.
여러모로 '로마 제국 시스템의 대표적인 폐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였다. 수도 로마에 주둔하는 유일한 군사력이었던 탓에, 황제의 견제가 없을 경우, 근위대장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제국 후반으로 가면 근위대가 차츰차츰 정부의 다른 부서들을 흡수해, 근위대장이 재상 비슷한 위치까지 격상되게 되었다. 황제조차도 근위대를 무시할 수가 없어서, 근위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주 상여금을 내려주었다. 특히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인해 기반이 약한 황제는 더더욱 근위대에 매달렸다. 4황제의 시대 때는 비텔리우스가 오토를 물리친 후 네로-갈바-오토로 이어지던 근위대를 전원 해고하고 자신을 옹립한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을 근위대로 앉혔고 이에 분노한 전직 근위대원들이 베스파시아누스 편에 들어 로마 시가전 당시 자신들이 머물던 주둔지를 공격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한편 원수정기 야전의 군단병들 또한 근위대에 비해 떨어지는 대우에 불만이 많았다. 아우구스투스 사망 직후 티베리우스가 즉위하자 게르마니아와 판노니아 군단들이 단체로 충성 맹세를 거부하며 파업에 돌입하였는데 판노니아 군단의 파업을 주도한 페르켄니우스가 들은 파업 사유 중 하나가 근위대에 비해 처참한 야전 군단병들에 대한 대우였다. 공화정 말기부터 원수정기 로마군의 주둔지가 정착화 되면서 군단 자체에서 무기를 제조하고 보급하는 형태가 이루어졌는데 이 과정은 시오노 나나미의 무상 제공이라는 환상과 달리 군단병들의 봉급에서 무기, 침구, 식량, 군단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축제, 갑옷 등 각종 비용을 공제하는 형태였다. 아우구스투스 당시 야전 군단병의 봉급은 225 데나리우스였으니 잦은 게르마니아 원정으로 무기 소모가 잦았던 야전의 군단병들 입장에서는 남아나는 돈도 없고 백인대장들의 횡포와 노역에 고생하는데 저 뒤 수도에서 편하게 근무하면서 자신들의 3배나 되는 봉급을 받는 근위대가 결코 곱게 보일 수 없었다. 결국 야전 군단과 근위대 간의 갈등은 네 황제의 시대와 군인 황제 시대라는 로마의 혼란을 일으키는 주 원인이 되었다.
로마 역사에서 황실 내부의 권력투쟁은 흔했으며, 근위대는 보통 그 중심에 있었다. 근위대가 부각되면 로마가 혼란스러워졌고, 근위대가 조용하면 로마는 안정되었다. 실제로 오현제 시대에는 근위대에게 인기가 높았던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하고 네르바가 제위에 앉자, 불만을 품은 근위대원들이 네르바를 유폐시키고 후계자를 빨리 선정하도록 윽박지르는 사건이 일어난 초기를 제외하면 근위대가 문제를 일으킨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오현제 시대가 끝나자마자 근위대는 다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제정 초기 티베리우스의 오른팔이었던 근위대장 세야누스는 황제가 로마에 없었을 때 대리인 역할을 맡아 티베리우스를 대신해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했지만 황제에게 숙청당했다. 다만, 세야누스가 숙청당할 당시에는 그가 반역을 꾀했고 실제 국가 전복을 시도해 원로원까지 적극 협력해 세야누스파 제거에 황제 대수로는 3대째 매달렸다.
칼리굴라는 근위대장 마크로의 도움으로 단독승계했지만, 너무 커져버린 마크로와 그 측근들을 숙청했다. 그는 클레멘스를 통해 근위대를 장악했으나, 또다른 근위대 대대장이었던 카시우스 카이레아의 손에 암살당했다. 이에 클레멘스가 중심이 된 9개 대대는 주도적으로 움직여 클라우디우스를 황궁 안에서 구출하고 그를 황제로 옹립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제정을 보전하고, 조카의 죽음을 복수하겠다고 앞장선 근위대에게 상여금을 내려주었다. 다만 이때까지는 근위대가 집단적으로 '권력'을 차지하려 움직였다는 증거는 없으며, 과거와 달리 칼리굴라 암살은 아우구스투스 이래 누적된 황제와 원로원 간 대립에서 벌어진 체제 변혁을 위한 원로원과 손잡은 일부 근위대의 사적 보복심이 결합된 사건이었다. 그래서 근위대 안에서 칼리굴라 암살에 참여한 이는 주동자 카이레아를 포함해도 20명 남짓이었고, 이들은 클라우디우스가 자리를 잡자마자 국가 원수 암살 및 불경죄로 처형당했다.
네로 시절부터, 근위대가 정치에 개입하는 나쁜 선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클라우디우스 시절 아그리피나는 자기 아들 네로를 황제로 앉히기 위해 심복인 브루스를 근위대장에 앉혔다. 클라우디우스가 급서하자(아그리피나가 독살했으리라는 설이 유력하다) 브루스는 근위대를 움직여 재빨리 클라우디우스의 아들도 아니었던 네로를 황제에 앉혔다. 근위대에 상여금이 내려졌음은 물론이다. 네로가 죽고 갈바가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갈바는 오토에 의해 매수당한 근위대원들에게 살해당했다. 비텔리우스의 반란이 성공해 오토가 자살하자, 비텔리우스는 자기 휘하의 '라인 군단' 병사들을 근위대로 이동시켰다. 물론 오토에 붙었던 전(前) 근위대원들은 모조리 축출당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비텔리우스에 반대해 들고 일어나자, 오토파 전(前) 근위대원들이 재빨리 베스파시아누스 편을 들었고 비텔리우스파 현(現) 근위대원들과 맞서 싸우는 촌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집권하고 나서 아들이자 차기 황제인 티투스를 근위대장에 앉혀 새 왕조를 안정시키려고 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이자 티투스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는 전제적인 정치를 펼치다 황궁 내 음모(근위대장 포함)에 의해 암살당했고, 원로원에 의해 네르바가 황제 자리에 올랐다. 군대 내에서 인기가 높았던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한 데 불만을 품고 근위대가 네르바에 반대해서 들고 일어나 네르바가 유폐되기까지 했고, 결국 반강제로 고지 게르마니아 사령관인 트라야누스를 차기 황제로 선임해 근위대의 반발을 무마할 수밖에 없었다는 시각이 많다.
오현제 시대에는 앞서 말했듯이 초기의 사건을 제외하면 근위대가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뒤를 이은 콤모두스는 궁정 내 음모에 의해 암살당했는데, 근위대장인 레토가 당시 인망있었던 페르티낙스를 황제 자리에 앉혔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것처럼 보였으나, 레토는 페르티낙스가 자신을 이집트 장관에 앉히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고 페르티낙스를 살해해버렸다. 당시 레토는 사실상 페르티낙스를 제위에 앉힌 최고의 공로자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티낙스가 자신에게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만을 가질 이유는 충분했다.[45] 이집트는 고대에는 제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었고, 다른 속주들과는 달리 황제의 사유지였기 때문에 황제만 눈감아 준다면 한 재산 모을 수 있는 곳이었다.[46] 때문에 이집트 장관은 제국의 관료들이 선망하는 자리였다. 로마 제국에는 공식적인 관료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관료 계통은 분명히 존재했다. 원로원 계층에 속하지 않는 ' 기사계급'이 보통 임명되었으며, 황제 재무관, 황제 비서[47] 근위대장, 이집트 장관 등이 황제와 보다 가까운 위치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근위대는 이후 말 그대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이는데, 로마 황제 자리를 경매에 부친 것이었다. 술피키아누스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황제 자리를 놓고 경매를 하게 되었고, 더 높은 값을 써낸 율리아누스가 제위를 '낙찰' 받아 황제 자리에 올랐다. 물론 돈으로 산 황제 자리가 당연히 안전할 리가 없어서, 도나우 군단을 이끌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진군해오자 율리아누스는 황제 자리를 빼앗기고 살해당했다. 세베루스는 이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인 이탈리아 본토 출신 근위대를 해산시키고, 근위대를 전부 자기 병사들, 즉 판노니아, 일리리아, 트라키아 속주 출신 군단병으로 채워넣었다. 그러면서 근위대의 규모를 확충했다. 자신을 지지해준 병사들에 대한 보답과 속주 총독의 반란시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중앙군의 필요성에 의한 결정이었다.
이후로 로마 제국이 북쪽으로는 게르만족, 동쪽으로는 사산 왕조에 압박당했던 시기인 이른바 군인 황제 시대가 닥쳐오자, 이 와중에 황제를 살해하고 '근위대장'들이 그 뒤를 잇는 일들이 생겼다. 카라칼라의 근위대장이었던 마크리누스라든가, 고르디아누스 3세의 뒤를 이은 필리푸스 아라부스 같은 찬탈자들이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근위대가 해체되는 콘스탄티누스 1세 시절까지 52 명의 황제 중 12 명이 근위대에게 시해되었다.
3세기의 위기때의 근위대는 황제를 따라 로마 제국 변방의 전장에서 전투를 했다.[48]
285년 이후 황제가 로마를 떠나게 되면서, 근위대는 버림받고 하는 일 없는 신세가 되었다.[49] 결국 근위대는 각종 음모와 내전에 개입하면서 한 몫을 챙겼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찬탈자 막센티우스를 황제로 옹립했지만 막센티우스가 콘스탄티누스 1세와 벌인 역사적인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패배하고 익사하자 엄청난 사상자를 냈고,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이 부대장 직위였던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Praefectus Praetorio; 영어로는 Praetorian Prefect)는 이후로도 존속했지만, 이름만 계승했지 사라진 프라이토리아니와의 연결고리는 끊어졌고 무관적 성격 또한 완전히 사라졌다. 한편 근위대란 개념 자체가 제대로 된 국가에선 없을수가 없기에 프라이토리아니가 사라지고 나선 근위대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스콜라이 팔라티나이가 가져갔다.
3.3. 전제정 시기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의 로마군 편제 및 병과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당시 로마 제국의 행정 체계에 대한 문서인 노티티아 디그니타툼(Notitia Dignitatum)을 기반으로 한다.3~4세기경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존 레기오 체제론 다양화, 기병화되는 적을 쉽게 제압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그만이 떠올린 천재적 아이디어가 아니라, 이미 백 년 전부터 제기되어오던 문제를 반영한 것이었다. 각 변경 속주를 지키던 군단들은 변경 방어군이라는 뜻의 리미타네이(Limitanei)로 변모했고, 기동 야전군은 야전군이라는 뜻의 코미타텐세스(Comitatenses, '코미타테네시스' 라고도 한다)로 바뀌었다. 이들 군대는 국경을 위협하는 사산 왕조와 게르만 족의 기병과 맞서기 위해 기병 비율을 더해갔고, 말기에 가면 보병과 기병의 비율이 3:1까지 치솟았다. 기본적인 전략은 리미타네이가 이전의 군단병들을 대신하여 각 지역의 변경 요새(Limes)를 지키는 식으로 야만족들의 소규모 침입을 막아내고, 대규모 야만족 무리가 국경선을 넘어와서 지원이 필요하거나 대규모 원정이 시작된 경우에 각 속주의 주요 도시나, 전선 후방에 주둔하는 코미타텐세스 군대가 신속하게 기동하여 망치 역할을 했다. 다만 디오클레티아누스 당시에는 정식 명칭이 엑세르키투스 코미타텐세스였고 이들은 전원 황제와 부제가 이끌었으며, 각 황제와 부제에게는 기존 프라이토리아니 부대들을 빼내어 새로 만든 부대인 요비아니, 헤르쿨리아니 등이 직속으로 배속되어 바로 이 엑세르키투스 코미타텐세스의 핵심을 이루었다. 저 위에서 간단화한 조치들은 콘스탄티누스 시대에나 되어야 정착된 제도다.
4~5세기에 들어서서 제국의 서부에는 구멍이 송송 뚫렸다. 야만족의 침입으로 병력 소모가 가속화되자 부족한 코미타텐세스 부대를 보충하기 위해 리미타네이에서 병력을 끌어오고 부족한 리미타네이 인원은 다시 제국 내 떠돌이 야만인이나 빈민, 노예, 검투사 등을 끌어와서 보충하는 등을 통해 병력의 질이 점점 낮아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이런 상황에서 동분서주하던 스틸리코가 호노리우스 황제에게 암살당하는데, 이런 막장 행각에 반발하여 그의 휘하에 있던 서로마 중앙군은 탈영 후 서고트족에게 붙어버리고, 설상가상 군대를 유지하기위한 주요 세수 수입원이었던 북아프리카 지역 중 핵심인 카르타고 지역이 반달족에게 넘어간다. 또 서로마 정세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흔들리면서 서로마 정규군은 끊임없이 소모되었다. 그럼에도 서로마는 끊임없이 있는 병력, 없는 병력을 짜내서 마지막까지 온힘을 다해 싸웠다. 서로마가 멸망하기 16년전인 마요리아누스 황제 시절까지도 제국은 게르만족들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영토를 탈환할 수 있었고 서로마 최후의 갈리아 속주는 고립된 후에도 20여년을 주변 게르만족을 압도하며 버텼다.
3.3.1. 리미타네이
Limitanei국경 방어군으로 변경 지역 및 요새의 방비를 맡았다. 둑스(Dux)가 지휘를 맡았고 소속된 관구(Dioecesis, 디오이케시스)의 코미타텐세스 사령관 휘하에 있었다. 일부 리미타네이는 가까운 지역의 코미타텐세스 부대로 편입되어 준 코미타텐세스(Pseudocomitatenses, 프세우도코미타텐세스)로 불리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에서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이르는 기간 동안 국경 방어군과 황제 직속의 야전군의 구분이 정식화되어 기존의 군단병-보조군 구분을 대체한 것으로 본다. 보병과 기병, 이전에 군단병이었던 부대들과 보조병이었던 부대들을 모두 포함했다. 후기 로마군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지만 훈련 수준은 낮은 편이었다.
리미타네이는 대개 코미타텐세스보다 경무장한 2선급 부대들로 이루어졌지만 밀비우스 다리 전투 이후 해체된 프라이토리아니 병력 일부가 판노니아 전선에 재배치되는 등 예외적으로 전력이 강한 곳도 있었다. 이들도 코미타텐세스와 마찬가지로 기병 보충이 두드러졌지만 그 수와 질은 코미타텐세스에 비해서 상당히 떨어졌으며 징집은 주둔하는 곳 현지민들에게서 이루어졌다. 전 시대보다 새로운 벡실라티오, 레기오, 아욱실리아 부대들이 창설되었고, 이들의 성격은 어디까지나 지방군이었지만, 전선이 고착화되거나 반격작전이 시작되었을 경우에는 상태가 양호한 몇몇부대가 코미타텐세스와 합류하여 적의 심장부까지 깊숙히 쳐들어갔다는 경우는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코미타텐시스와 마찬가지로 물론 예전 세기 레기오에서 이어진 부대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각 군단의 정원을 줄이고 각 지방의 거점 수비에 배치시킨 이후 대부분 리미타네이로 전환되었고, 그나마 3 ~ 5세기에는 제 역할을 좀 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로마 말기로 갈수록 점점 파트타임 군인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는데 대체적으로 서로마가 멸망하는 5세기 후반부터 로마의 남은 영역에서는 확실히 파트타임 군인 부업과 병행했다고 본다. 6세기에 동로마에서 유스티니아누스의 시대가 되면서 급료가 완전히 없어진 후론 당연히 전투력은 급감했으며 동로마의 리미타네이는 완전히 민병대화되었다.
3.3.2. 코미타텐세스
Comitatenses세베루스 왕조 시기부터 황제 직속의 대규모 유격부대인 코미타투스(Comitatus)가 편성되기 시작했고 점차 상설화되었다. 사두정치 시기에는 각 정제와 부제가 자신의 코미타투스 부대를 거느렸다.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장기간의 내전에서 10만 명에 이르는 코미타투스를 지휘했고, 코미타텐세스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정식으로 리미타네이와 구분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코미타투스는 많은 부분이 기존의 리미타네이 중 정예를 빼낸 것이었기에 기존 국경 방어를 약화시켰다고 당대부터 비판받았다. 대제의 죽음 이후 코미타투스 또한 그의 세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고, 콘스탄티우스 2세가 유일한 황제가 된 이후에는 황제로부터 떨어져 갈리아 등 중요 요충지에 배치되기도 했다. 한편 코미타텐세스 중 지역 방어 임무로 전환되지 않고 끝까지 황제 직속군으로 남은 부대는 프라이센탈레스(comitatus praesentales)로 따로 구분되었다.
리미타네이와 마찬가지로 구 군단병, 구 보조병이 혼합된 보•기병 혼성 편제였다. 무장 수준이나 전투 숙련도가 리미타네이보다 높아 후기 로마군의 주전력이었다. 황제 자신이 직접 지휘하기도 했지만 10여개의 각 관구별로 코메스(Comes)[50], 4개의 각 대관구별로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51] 급의 사령관이 지휘하기도 했다. 한 관구의 휘하에는 여러 둑스 관할 리미타네이 부대가 있었다(군정 체계는 황제 ← 마기스테르(대관구급) ← 코메스(관구급) ← 둑스(속주급)).
궁전(Palatium, 팔라티움)의 호위병에서 유래한 팔라티니(Palatini)라는 명칭과 혼용되기도 했다. 팔라티니는 주로 황제 직속군에 속했고, 일반 코미타텐세스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각 코미타텐세스 부대는 1만~1만 5천여 병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졌다. 중보병을 중심으로 스타블레시아니(Stablesiani), 카타프락토이(Cataphractoi) 등 중기병 병력이 상당 포함되었다. 이들은 옛 레기오 체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새 체제가 아니라 이미 카라칼라 때부터 지속된 흐름이었던, 즉 직속 군단 본부 부대는 약화되던 반면 각 분견대가 갈수록 정예화되고 수도 많아지던 흐름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나 콘스탄티누스가 멀쩡히 기능하던 기존 군단들 중에서 정예부대와 기병부대들을 추려서 코미타텐시스에 배치하고 나머지 병사들은 리미타네이에 배치한 것이 아니고, 이미 군단 자체가 이백 년 가까이 계속되던 각종 편법으로 야전군에 차출된 정예병과 군단 기지 잔존병의 차이가 커진 것을 반영하여 합리적으로 개편한 것이다. 코미타텐세스의 기원인 세베루스 왕조, 군인 황제 시대의 기동부대(vexillationes)나 황제 직속 야전군은 레기온과 보조병 구분 없이 정예부대만을 각 국경 방어 군단에서 차출한 것이었기에 코미타텐세스 또한 구 레기온 부대와 구 아욱실리아 부대를 모두 포함하게 된다.
옛 군단을 직속 계승한 게 리미타네이가 아니다. 옛 레기오가 여러 부대로 쪼개졌고 대체로 옛 부대 본부 자리에 있던 부대들이 리미타네이가 더 많이 된 건 사실이지만 인원과 직제 그리고 정예 부대 계승성을 고려해보면 코미타텐시스가 오히려 더욱 계승성은 강하며, 옛 레기오 본부대 명칭을 직접 계승한 코미타텐시스 부대도 꽤 있다. 당시 사가들은 이들을 이루는 하급부대들을 누메로이(Numeri)나 코미타텐세스라고도 불렀지만, 그냥 전에 부르던대로 군단병(Legiones)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던 건 바로 이것이 원인이다. 보병들은 예전과 같이 로리카 사사, 찰갑옷을 입고, 중무장을 갖췄으며 고대 로마군과 똑같이 보조병이나 포에데라티라고 부르는 이민족 징집병들을 두어 경보병 전력을 보강했다. 다만 시대가 가면서 사각 방패는 노후화되어 폐기되는 반면 점점 원형 방패 비중이 높아지고, 필룸은 갈수록 짧아지며 모양이 단순화되는 한편 검은 갈수록 길어지면서 투구 또한 모양이 단순화되면서 알려진 기존 로마군 레기온의 모습과는 꽤 멀어지게 된다.
코미타텐세스 각 부대 명칭과 편제는 항목 참조
3.3.3. 프라이토리아니
프라이토리아니는 이미 기병화가 진행되면서 군제 개혁시기에도 온존했으나, 사두제가 펼쳐지며 황권이 각지로 흩어지게 되자 위상이 크게 하락한다. 물론 기존 프라이토리아니 인원들은 사두정치 황제들의 직속 부대로 많이들 들어가게는 되었으나 정예병력과 정예부대들을 이렇게 빼앗긴 프라이토리아니는 형해화될 수밖에 없었고, 아이러니하게도 막센티우스 밑에서 극적인 부활을 이루지만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패하고 완전 해체된다. 훗날 스콜라이 팔라티나이와 팔라티니 코미타텐세스가 프라이토리아니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으나 이들은 적어도 직제에선 프라이토리아니와 아무 상관이 없고, 스콜라이 팔라티나이와 팔라티니 코미타텐세스에 콘스탄티누스가 판노니아로 보내지 않고 그대로 편입한 인원 일부가 있었을 정황은 분명 있지만 분명한 문헌적 근거는 사실 없는 상태다. 어쨌든 리미타네이로 강제 전출당하지 않고 남은 프라이토리아니의 일부 기간병이 창설에 간여했을 개연성이 높은, 스콜라이 팔라티나이와 팔라티나이 코미타텐세스의 부대 훗날을 보도록 하자. 팔라티니 코미타텐세스는 아드리아노플 전투 이후 궤멸되어 재건되지 않았고 스콜라이 팔라티나이는 중세 시기까지도 전해지다 최소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늦어도 디라키움 전투 이후로는 사라진다.한편 '근위대장(Praefectus Praetorio)'[52]라는 칭호는 여전히 존속했지만, 무관적 성격은 신설한 Magister Peditum(보병)/Equitum(기병)/Miletum(통합 - 대제 테오도시우스 1세 이후)에게 넘어감으로써 완전히 사라져, 지방관의 성격을 일정부분 갖게 되었다.[53] 즉 'Praefectus Praetorio(Praetorian Prefect)'는 같은 용어라도 제정 초기와 후기 때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적어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 확실하게는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로는, '근위대장'으로 번역하거나 이해하면 절대 안 되며, 대강 '최상위 지방장관' 정도로 인식하면 되지만, 중앙직과 지방직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익숙한 현대와는 달리 저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으며, 또한 직위의 유래 자체가 로마 시의 근위대장이라는 중앙직이었기 때문에 순수한 의미의 지방관은 전혀 아니었고, 중앙정계에도 힘을 발휘하는 자리였다.
3.3.4. 스콜라이 팔라티나이
Scholae Palatinae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프라이토리아니를 해체시킨 후, 구 프라이토리아니의 기병 편제를 대체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근위 기병대였다. 근위대장 같은 보직 없이 황제에 의해 직접 지휘되었고, 황제의 개인 경호원을 맡았다. 게르만족 출신들이 주로 채용되었다. 스콜라이 팔라티나이는 정말로 정예 기병대로서 많은 활약을 했으며 제국이 서부 영토를 상실하고나서도 유지되었으나 오랜 수도 배치로 전투력이 감소하여 의장병, 명예직으로 전락하였고, 훗날 재정과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런 유의 낭비를 허락할 수 없었던 콘스탄티노스 5세가, 타그마타 기병 부대의 하나로 부활시켜 1081년 남이탈리아의 노르만족( 시칠리아 왕국의 전신)과의 디라키움 전투 때까지 존속하였다.
3.3.5. 포에데라티
Foederati로마 제국 말기 부족 단위를 유지한 채로 로마 편에서 싸우는 대신 금전적 보상과 함께 제국내에 정착할 권리를 얻은 야만족들이다. 원래는 조약을 맺은 동맹자를 의미했지만 그 뜻이 변화하였다. 프랑크족과 알라리크의 서고트족 등이 유명한 사례이다. 때로는 제국에 충성했지만 대체로 각 부족의 이익을 따라 움직였고, 서로마 제국은 이들에게 군사력을 점점 의존하게 되다가 결국 멸망했다.
4. 군단 일람
211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사망 당시 로마 군단들의 위치. |
4.1. 공화정 후기
단대호 | 상징물 | 군단 주둔지 | 비고 |
제1게르마니카 군단 | |||
제2사비나 군단 | 제2아우구스타 군단으로 명칭 변경 | ||
제3키레나이카 군단 | |||
제3갈리카 군단 | 황소 | ||
제4마케도니카 군단 | |||
제4스키티카 군단 | |||
제5알라우다에 군단 | 코끼리 | 종달새 군단, 카이사르가 속주에서 징집한 사병 | |
제6페라타 군단 | 암 늑대[54] | ||
제7클라우디아 피아 피델리스 군단 | |||
제8아우구스타 군단 | 황소 | 서로마 제국 멸망까지 존속 | |
제9히스파니아 군단 | 황소 | 2세기에 기록에서 사라져 여러가지 추측이 오간다. | |
제10에퀴스트리스 군단 | 카이사르의 최정예 10군단으로 알려진 그 10군단이다. | ||
제11군단 | 넵튠 | ||
제12빅트릭스 군단 | |||
제13게미나 군단 | 사자 | 카이사르와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너 카이사르 내전의 시작을 알린 군단이다. | |
14군단 | 암비오릭스의 난 시기에 파괴됨. | ||
제18리비카 군단 | |||
제30클라시카 군단 |
4.2. 제정시기
단대호 | 상징물 | 군단 주둔지 | 비고 |
제1아디우트릭스 군단 | 염소 | 판노니아 | |
제1게르마니카 군단 | 황소 | 저지 게르마니아 | |
제1이탈리카 군단 | 멧돼지 | 저지 모이시아 | |
제1마크리아나 리베라트릭스 군단 | 아프리카 | ||
제1미네르바 군단 | 미네르바 | 저지 게르마니아 | |
제1파르티카 군단 | 켄타우로스 | 시리아 | |
제2아디우트릭스 군단 | 염소 | 판노니아 | |
제2아우구스타 군단 | 염소 | 브리타니아 | 前제2사비나 군단 |
제2이탈리카 군단 | 암늑대 | 노리쿰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창설. 코미타텐세스 보병 연대로서 아프리카 야전군 및 일리리쿰 야전군에 들어감. |
제2파르티카 군단 | 켄타우로스 | 시리아 |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리미타네이 보병 연대가 되어 메소포타미아 둑스 관할구에 들어감. |
제2트라이아나 포르티스 군단 | 헤라클레스 | 아이귑토스 | |
제3아우구스타 군단 | 페가수스 | 마우레타니아 | 고르디아누스 3세 즉위 직후 강제 해산. |
제3키레나이카 군단 |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 ||
제3갈리카 군단 | 두마리 황소 | 시리아 | |
제3이탈리카 군단 | 황새 | 라이티아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창설.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11개 연대로 분할되어 다섯 연대는 라이티아 변경군에, 여섯 연대는 코미타텐세스로서 일리리쿰 야전군에 배속됨. |
제3파르티카 군단 | 황소 | 시리아 | |
제4플라비아 펠릭스 군단 | 사자 | 고지 모이시아 |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가 지휘하는 펠릭스 군단의 모티브가 된 군단 |
제4마케도니카 군단 | 황소 | 고지 게르마니아 | |
제4스키티카 군단 | 염소 | 시리아 | |
제5알라우다에 군단 | 코끼리 | 저지 게르마니아 | |
제5마케도니카 군단 | 독수리 | 다키아 |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코미타텐세스 보병연대로서 오리엔툼 야전군에 들어감. |
제6페라타 군단 | 암늑대 | 유다이아 | |
제6히스파나 군단 | |||
제6빅트릭스 군단 | 황소 | 브리타니아 | |
제7클라우디아 군단 | 황소 | 고지 모이시아 | |
제7게미나 군단 | 히스파니아 |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코미타텐세스 보병연대로서 오리엔툼 야전군에 들어감. | |
제8아우구스타 군단 | 황소 | 고지 게르마니아 | 서로마 제국 멸망까지 존속 |
제9히스파나 군단 | 황소 | 브리타니아 | 120년 이후 기록 실종[55] |
제10프레텐시스 군단 | 멧돼지 | 유다이아 |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리미타네이 보병 연대로서 팔레스타인 둑스 관할구에 들어감. |
제10게미나 군단 | 황소 | 판노니아 | 레피두스가 창설.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일부는 코미타텐세스 보병 연대로서 오리엔툼 야전군에 들어갔고, 다른 일부는 리미타네이 연대가 되어 판노니아 둑스 관할구에 들어감. |
제11클라우디아 군단 | 넵튠 | 저지 모이시아 | 서기 135년 유대인 지도자 바르 코크바의 반란을 진압하는 베탈(Betar) 요새의 포위전에 참가하여 바르 코크바를 죽게 하고[56] 반란을 진압함. # |
제12풀미나타 군단 | 번개 | 카파도키아 | 유대전쟁 중 군단기 상실 |
제13게미나 군단 | 사자 | 저지 모이시아 |
카이사르가 로마 진군때 지휘.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일부는 리미타네이로서 시리아 변경군에 들어갔고, 다른 일부는 코미타텐세스 보병 연대가 되어 트라키아 야전군에 들어감. |
제14게미나 마르티아 빅트릭스 군단 | 염소 | 판노니아 | 아우구스투스가 창설.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코미타텐세스 보병연대로서 트라키아 야전군에 들어감. |
제15아폴리나리스 군단 | 아폴로 | 카파도키아 | 카이사르가 창설.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리미타네이 보병 연대로서 오스로에네 둑스 관할구에 들어감. |
제15프리미게니아 군단 | 포르투나 | 저지 게르마니아 | |
제16플라비아 피르마 군단 | 사자 | 시리아 | |
제16갈리카 군단 | 사자 | 저지 게르마니아 | |
제17군단 | 저지 게르마니아 |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전멸 | |
제18군단 | 저지 게르마니아 |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전멸 | |
제19군단 | 저지 게르마니아 |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전멸 | |
제20발레리아 빅트릭스 군단 | 멧돼지 | 브리타니아 | 하드리아누스 방벽 건설 |
제21라팍스 군단 | 염소 | 판노니아 | |
제22데이오타리아나 군단 | 아이귑토스 | 서기 132년 유대인 반란군 지도자인 바르 코크바의 반란 때,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던 도중 유대 반란군의 매복에 걸려 부대가 해체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 | |
제22프리미게니아 군단 | 헤라클레스 | 고지 게르마니아 | |
제30울피아 빅트릭스 군단 | 유피테르 | 저지 게르마니아 |
5. 병과
5.1. 공화정 중기
여기 언급된 모든 병과들이 다 동일한 시기에 있던 것은 아니다.-
레베스(Leves)
경보병. 가난한 사람들의 병과로, 투창 몇자루, 방패나 투구 정도의 간단한 방어구로 무장한 투창병이다. 선두에 배치되었으며, 역할은 벨리테스와 똑같다. 기원전 3세기 이후 벨리테스로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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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리(Rorarii), 아켄시(Accensi)
가장 가난한 4~5 계급 사람들로, 레베스보다도 무장이 딸렸다. 고참병인 트리아리 뒤쪽, 즉 대열의 맨 뒤에 배치되어 최후의 예비대 역할을 했다. 로마 토탈워에서 아켄시는 투석병으로 나온다. 기원전 2세기에 레베스와 통합되어 벨리테스로 재편되었고, 위치도 대열 선두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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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테스(Velites)
경보병. 기원전 2세기 경보병들인 레베스, 로라리, 아켄시를 합쳐 만들었다. 돈없는 가난한 시민들이 주로 지원하는 병과였다. 투창병으로 투창 서너 자루, 투구, 방패 정도의 빈약한 무장만 갖췄다. 기동성을 살려 일단 전열에 나서 투창을 다 던진 후 중보병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퇴각하는 게 주로 하는 일이었고, 정찰 임무에 투입되기도 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바뀐 뒤에는 보직 자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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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병
로마군 주축을 이루는 보병대로 어느 정도 돈이 있는 사람들이 지원했던 병과다. 모병제로 바뀐 뒤에는 그냥 보직 자체가 되었다. 붉은 장식술 달린 투구, 중장갑옷( 로리카 하마타 또는 로리카 세그멘타타), 붉은색 대형 스쿠툼 방패, 필룸(대형 투창), 글라디우스, 칼리가에(쓰러진 적 공격용 못박힌 샌달)를 갖춘 흔히 생각하는 그 '로마 보병'의 이미지이다. 투창병이 후퇴한 후 전선에 투입되며 일단 투창을 한 자루씩 던진 후 방패벽을 쌓아 전진하는 팔랑크스 전술의 응용버전을 구사했다. 복무기간에 따라서 하스타티(신병), 프린키페스(12~13년 복무), 트리아리(장기복무 베테랑)로 분류되었다. -
하스타티(Hastati)
로마 근접보병의 1열을 이룬 중무장 보병으로 원래는 소득이 상대적으로 낮은 사람들의 병과였으나 기원전 3세기 이후 나이가 어리고 전투 경험이 부족한 17~29세의 젊은 병사들의 병과로 서서히 전환되었다. 어원은 '창(Hasta)을 든 병사'로 원래는 이름처럼 창을 들었으나 역시 기원전 3세기 이후 글라디우스를 든 검병으로 전환되었다. 기본적인 방어구는 투구와 흉갑, 정강이받이 등이었으며 일부 병사들은 사슬 갑옷까지 장착했다. 소득에 따라 구분되었을 당시에는 무장이 프린키페스에 비하면 가벼운 편이었으나 나이로 구분되기 시작한 후로는 프린키페스와 비슷해졌다. -
프린키페스(Principes)
로마 근접보병의 2열로 보병대의 실질적인 주전력이었다. 이름부터가 ' 프린켑스의 복수형'으로 정예부대임을 짐작케 한다. 원래는 소득이 어느 정도 되는 시민들의 병과였으나 기원전 3세기 이후로는 전투 경험이 풍부하면서도 나이가 많지 않은 30~39세 정도 병사들의 병과가 되었다. 하스타티와 마찬가지로 에트루리아 스타일의 호플리테스 창병에서 기원하여 창이 주무기였으나 서서히 글라디우스로 전환되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개혁 이후로는 세 근접보병 병과가 프린키페스와 유사한 단일 병과로 통합되어 나이는 그냥 섞어버리고 부대 편제로만 나뉘게 되었다. -
트리아리(Triarii)
로마 근접보병의 3열로 다른 두 병과가 검병으로 전환되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호플리테스의 흔적을 간직한 창병부대로 남았다. 병과 이름부터가 '3열'이라는 뜻이었다. 원래는 소득 수준이 기병대 에퀴테스 바로 아래인 부유층 병과였으나 포에니 전쟁 시기 즈음부터 베테랑 병과로 바뀌었는데, 40세부터 현역 끝인 45세까지였다. 예비군이 소집되면 60세까지 가능했다. 로마군의 주전력은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였고, 트리아리들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후방에 서 있다가 전투가 끝나면 조용히 숙영지로 돌아가는 게 보통이었으나, 패주가 시작되면 이들이 엄호를 맡았다. 체력 문제로 어차피 전투에 오래 투입하기는 어려웠고, 또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가 패주할 상황이면 어차피 체력적인 문제로 도주도 어려운 만큼 트리아리가 퇴로를 엄호하고, 대신 죽으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즉 패배로 망하기 직전이 아닌 한 전투에 투입될 일은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 '트리아리까지 왔다' 라는 속담이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당대 로마에서 패배나 망하기 직전 등의 위험한 상황을 비유할 때 썼다고 한다. 역시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개혁 이후, 모병제로 바뀐 뒤에는 그냥 섞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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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퀴테스(Equites)
기병대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로마 시민 기병대만을 가리킨다. 포에니 전쟁 시기 중보병 병과들이 나이에 의한 구분으로 전환되는 도중에도 에퀴테스는 최고의 부유층 병과로 남았는데, 이는 경제적으로 기병을 소화할 수 있는 사회 계층이 최상위층으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흉갑기병으로 주로 전령이나 정찰, 패주하는 적 추격 등의 제한적 임무를 맡았다. 로마군이 이탈리아 동맹시 기병대나 속주, 동맹국 보조 기병대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전력으로서의 의미는 점점 감소하였고, 유구르타 전쟁을 마지막으로 실전에서의 활약은 없어지다시피 했다. 이후 '에퀴테스'라는 용어는 원로원 계급 바로 아래의 차상위 계급인 ' 기사계급'이라는 의미로 더 자주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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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오디나리이(Extraordinarii)
특출한 정예병을 의미하며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시에서 보내온 지원병 중 보병 1/5, 기병 1/3을 선별하여 엑스트라오디나리이로 분류하였다. 동맹시 기병 부대는 로마 시민 기병대의 3배에 달했다고 하니 엑스트라오디나리이 기병대(Equites Extraordinarii)의 규모만 하더라도 일반 에퀴테스와 비슷한 수준에 달했다. 역사가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 집정관의 직속부대로 취급받아 숙영지 등에서 집정관 막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주둔하며 호위를 맡기도 했다. 하지만 실전에서 다른 동맹시 병사들과 다른 역할을 맡은 기록은 없다.
5.2. 공화정 후기, 제정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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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단병(Legionarii, 레기오나리이)
이전의 3대 중보병 병과가 하나로 통합되었고, 레기온은 중보병 단일 병과로 구성되었다. -
군단 기병대
군단 하나당 약 120명 정도의 소규모 기병대가 배속되었다. 이들은 단일 부대를 이루기보다는 각 백인대에 분산배치되어 주로 비전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
포병, 의무병
일반병의 특기 비슷한 개념으로 운용된 것으로 보인다.
-
보조병(Auxiliary, 아욱실라리), (기타
용병)
로마군은 가급적 용병을 고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지만, 특수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고용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로마군이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분야였던 기병 수요가 많아서, 기마에 능한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인, 기마술 + 굉장한 완력을 지닌 갈리아인, 게르만인들을 필요에 따라 보조병으로 유연하게 고용하였다. 또한 스페인 남쪽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고용한 투석병도 보조전력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내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도 《 갈리아 원정기》에서 발레아레스 투석병들의 솜씨를 칭찬했다. 본래 카르타고에서도 활약했었다. 기둥에 빵조각을 매달아놓고 이를 맞히지 못하면 식사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어렸을 때부터 훈련받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공성전 등 모든 전투에 반드시 필요한 궁병도 용병으로 자주 모집했다.[57] 군단병과 유사한 편제의 근접보병 보조병 부대도 제정 시대 이후 많이 창설되었다. 전반적인 무장 수준은 군단병보다는 가벼웠던 것으로 보인다.
- 누미디아 기병
- 누미디아 투창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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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아레스 투석병
포에니 전쟁 시기부터 제정 시기에 이르기까지 보조병의 한 축을 담당했다. 아예 '발레아레스'라는 말 자체가 투석병을 의미하게 될 정도였다. -
크레타 궁병
공화정 시기부터 제정 초기까지 보조군 궁병의 주력이었으나 이후 그 비중이 크게 줄어들었다. -
시리아 궁병
제정 이후 로마군 궁병의 주력으로, 크레타 궁병의 자리를 대체했다. -
바타비아 보조병
바타비아 지역은 라인 강 하류, 현 네덜란드의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58] 바타비족들은 이 일대에 거주하는 게르만계 부족이었다. 인구에 비해 보조병 입대 비율이 엄청났고, 용맹함으로 이름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기 황제의 경호부대를 맡기도 했다. 네로 황제 사후 대규모 보조병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다. -
궁기병(Equites Sagittarii, 에퀴테스 사깃타리이)
전제정 이후 그 중요성이 증가했다.
-
근위대(Praetoriani, 프라이토리아니)
프라이토리아니 편제 문단으로. 보병대와 함께 별도 기병 분과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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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세계에서 최초로 의무병을 만들어냈으며, 숙련된 군의관과 의무병을 배출하여 실질적인 부상자와 병자 처리에 활용했다. 자세한 내용은 군의관 항목의 타국의 의무군 문단으로. 의무 장교가 레기오, 코호르스 단위로 배속되었으며(Medicus legionis 메디쿠스 레기오니스, Medicus cohortis, 메디쿠스 코호르티스), 의무병(Milites medici, 밀리테스 메디키)은 일반 사역에서 면제되었다. 군의관 또한 군단 소속으로 복무하며 최소한 일부는 백인대장에 준하는 대우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기수나 군악병 같은 보직은 있었지만 특별히 병과로 취급된 것이 아니었고 레기온 일반병이면서 그 보직을 겸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보직은 곁보기에는 의장대 같아 보이지만 실제론 회계 업무나 보급 업무 등 백인대장을 보좌하는 일종의 행정병이었기 때문에 해당 능력이 있는 고참병들이 담당했다.
5.3. 전제정 시기
- 리미타네이(Limitanei)
- 준 코미타텐세스(Pseudocomitatenses)
- 코미타텐세스(Comitatenses)
- 팔라티니(Palatini)
- 스콜라레스(Scholares)
정확히 병과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각 단위 부대들의 분류 또는 등급으로 사용되었다. 리미타네이가 가장 낮은, 스콜라레스가 가장 높은 등급 및 대우에 해당한다.
5.3.1. 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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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프락타리이(Cataphractarii)
철갑 중무장 충격기병. 클리바나리(Clibanarii)라는 용어와 혼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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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퀴테스 프로모티(Equites Promoti)
각 레기온에서 차출, 승격(promote)된 기병대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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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퀴테스 달마타이(Equites Dalmatae)
달마티아 지방에서 유래된 기병대로 추정된다. 후기 로마 기병대의 상당수를 차지했으며 제국 전역에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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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퀴테스 스쿠타리(Equites Scutarii)
이름은 대형 사각 방패 스쿠툼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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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퀴테스 스타블레시아니(Equites Stablesiani)
어원은 '마굿간(stable)'으로 추정. 각 속주 총독의 마부 등 측근들로 이루어진 기병대로 추측되나 자세한 역할은 불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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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퀴테스 사깃타리이(Equites Sagittarii)
궁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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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모다리이(Dromodarii)
낙타병
이외에도 게르만 부족 이름을 따거나 황제 이름을 따는 등 여러 기병 부대가 존재했다.
5.3.2. 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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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기오(Legio) / 아욱실리아(Auxilia)
원수정 시대의 군단병, 보조병 구분에서 기원하며 부대 이름으로 붙을 뿐 실질적인 병과 구분으로서의 의미는 거의 없었다. 각 단위 부대가 리미타네이~팔라티니 체계에 나뉘어 편입되었다. -
아욱실리아 팔라티나
팔라티니 등급의 정예병. 황제 직속군의 주력이었고 몇몇 부대는 지방 코미타텐세스 휘하였다. 주로 황제나 민족 이름이 부대명으로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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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스타리이(Ballistarii)
포병 또는 석궁병. 레기온과 같은 상위 편제에 속하지 않고 독립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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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키아리(Lanciarii)
이름으로 보면 창을 들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투창병이나 구 레기온에 가까웠다는 추측도 있다. 심지어 창기병도 란키아리로 불렸다는 말까지 있다.
6. 계급 및 보직
요약정리6.1. 지휘관 및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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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단장(Legatus,
레가투스 / legate)
오늘날의 사단장에 해당하는 보직. 최소 단독작전단위인 군단의 수장이며 휘하 군단병을 사형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원래는 없던 보직으로, 로마에서는 오랫동안 국가원수인 집정관이 다수의 군단들을 직접 통솔했었다. 군단의 수가 늘어나는 비상시에는 법무관까지 군단 통솔에 동원되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작전 지휘권은 현직 집정관(콘술) 내지는 (비상시)집정관 경험자에게만 부여되었다. 다만 마리우스 군제개혁과 내전기의 혼란으로 인해 개인이 사비를 털어 군단을 조직하는 일이 빈발하면서 공직경력과 별개의 군단장 개념이 탄생하였고, 아우구스투스의 국방정책에 따라 1개 군단을 담당하는 정규직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제정 시대에도 군단장은 황제가 베테랑 장교를 원로원에 추천해 의석을 갖게끔 한 뒤 임명했다. 공화정 시기 지휘관 임기는 집정관의 임기와 연동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마리우스 개혁 이후 로마군 사병화의 폐해를 염려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2년으로 규정되었지만, 후임 인선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한다던지 현직 인사가 해당 방면의 적임자라는 등의 이유로 후임 황제에 의해 여러 번 연임하는 사례도 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로마군을 재편한 이후 군단장은 단독 군단장(Legatus Legionis, 레가투스 레기오니스)과 겸직 군단장(Legatus Augusti Pro Praetore, 레가투스 아우구스티 프로 프라이토레) 두 가지로 나뉘었다. 레가투스 아우구스투스 프로 프라이토레는 레가투스 레기오니스와는 별개의 개념으로, 보통 황제 속주라고 불리며 다수의 군단이 주둔하는 속주에 부임하는 속주 총독을 의미했고, 레가투스 레기오니스는 레가투스 아우구스투스 프로 프라이토레의 명령을 따라야 했기 때문에 둘 사이는 명백한 상•하관계가 성립하였다. 레가투스 레기오니스가 현대의 여단장/사단장급인 소장에 비견된다면, 레가투스 아우구스투스 프로 프라이토레는 한 전선을 담당하는 사령관 내지는 야전군 사령관에 해당하는 중장~대장에 비견된다고 볼 수 있다. 갈리에누스 군제 개혁으로 레가투스 레기오니스는 사라지고 프라이펙투스 레기오니스가 이들을 전원 대체하게 되는데, 어차피 군단장으로 그대로 번역해도 큰 무리는 없다. 이 군단장들은 군인 황제 시대에 내내 내란의 주범들이었고, 때문에 이런 사태를 막고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단장 휘하 부대들을 극적으로 줄여 지휘하는 총 인원이 5천~7천 명에서 500~1200명으로까지 떨어졌고, 따라서 이들의 위상은 현대의 연대장/여단장급으로 격하된다. 다만 얼마 안 가 이 군단장들을 지휘하는 부황제들이 내란의 주범 역할을 승계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 건 웃지 못할 일. 공화정~원수정기 이 계급의 윗계급은 집정관이며 현대의 중장에 상응한다. 그러므로 이 계급은 디오클레티아누스 개혁 전에는 소장~중장이고, 디오클레티아누스 개혁 후에는 대령~준장 급으로 격하되었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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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장(Tribunus Militum,
트리부누스 밀리툼 / military tribune)
일반적인 번역은 대대장이지만 실제로는 군단본부에서 각 대대에 파견되어 인정작군 업무를 총괄하는 기행참모에 가까웠다. 오늘날로 치면 군정권은 있는데 군령권은 없는 직사소대장 비슷한 개념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군령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전시에는 직접적 지휘에도 상당히 간여했으며, 3세기 갈리에누스 개혁 이후에는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진정한 대대장으로 임무가 정착된다. 갈리에누스 개혁 이후에는 참모 장교 역할만 하는 '프라이포시투스' 직위가 신설되어, 대대의 상급 부대 참모와 대대장 사이 어중간했던 트리부누스 밀리툼의 역할은 완전히 대대장으로 정착된다.
군단장과 달리 군제개혁 훨씬 전부터 존재했던 유서깊은 보직으로, 원래는 로마가 꼬꼬마 부족국가였던 시절에 전쟁에 대비해 각 씨족에서 전사들을 차출할 때 그 대표로 군사(militum) 씨족대표(tribunus)을 뽑아서 보냈던 것이 시작이었다. 공화정 초기에 집정관에 의해 지명되었던 것이 이후 민회에서 선출되는 것으로 바뀌었고, 휘하 대대에 대한 지휘권 또한 사라진 뒤 젊은 귀족들의 공직 등용문으로 취급받게 되는 등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위상이나 역할이 크게 변동되어 왔던 보직이기도 하다. 각 군단마다 6명이 배속되었으며, 신분에 따라 보직과 역할이 구분되었다. 보직상 영관급 장교.
공화정 시기 로마군의 집정관 군단 트리부누스 밀리툼들은 전원이 병역 해당자이기도 한 로마 시민의 선거로 선출되었다. 대대장 후보자들은 대개 기껏해야 20대 초반의 명문가 출신 젊은이로 정치 경력을 막 시작하려하는 일종의 정계 유망주들이었다. 공화정 시기에는 아직 로마 시민들에게 전쟁이 매우 일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무능한 지휘관 밑에서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아 당연히 능력있는 지휘관을 원할 수 밖에 없었고,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아야 정치적 출세에도 유리했다. 그래서 대대장 선거 후보자들은 대대장으로 뽑히기 위해 나이는 애송이라도 체력과 지도력을 단련함은 물론 군사학도 피나게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만 귀족 가문도 집에서 빡세게 공부를 시키는데, 아버지도 삼촌도 아빠 친구도 죄 군필자이니 실전 가정교육을 받고왔다.
제정 시기에 들어와서는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수석 백인대장에서 정말로 실적을 인정받아 진급한 평민 병사 출신 대대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공직에 뜻이 있는 원로원 계급의 자제라는 이유로 부과된 병역의무를 수행하는 주홍색 띠를 두른 대대장이었다. 제1대대 제1백인대장이 '원사'이면 평민 출신 대대장은 '준위', 주홍색 띠를 두른 대대장은 '소위', 속된 말로 쏘가리였다. 특히나 이 '쏘가리'들은 상•원사급 베테랑 백인대장들이 득실대는 대대에서 군사적 능력을 검증받아야했는데, 당시 로마 제국에선 공직 생활을 할 사회지도층이라면 그 정도는 해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기원후 3세기 갈리에누스 군제 개혁 때부터는 이들이 정말로 문자 그대로 한국군에서 떠올리는 대대장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게 되었고, 적어도 7세기 이슬람 맹진 시기 이전까지는 그대로 기능했다. 그러나 이슬람 제국으로 제국 영토가 그리스어권으로 대폭 쪼그라든 시기에선 코미스라 불리던 그리스어 은어로 명칭이 아예 대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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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띠 대대장(Tribunus Laticlavius, 트리부누스 라티클라비우스 / broad stripe tribune)
원로원 계급 출신으로, 명칭은 원로원 계급의 특권인 넓은 띠로 자수된 옷을 입었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교육을 마치고 갓 사회에 발을 들인 원로원 계급의 자제 들로 구성되었으며, 당연히 군 경력은 전무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원로원 계급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군단 내에서는 군단 내 지휘서열 2위로 군단 차석 장교였으며 군단장 유고 시 군단장 대리로써 군단을 지휘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절대 다수의 넓은띠 대대장들에게 베테랑 대대장들을 부릴 정도의 무력과 카리스마를 가지는 것은 매우 어려웠고 하술하겠지만 당시에도 군대 식사는 매우 맛이 없었기에 상당한 경우 군생활에 진저리치며 군단 경리참모나 법무참모 내지는 군단장 전속부관 정도의 꿀임무만 짧게 수행한 뒤 전역해 하급 공무원 선거에 출마하던지 변호사를 개업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도 간혹 나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같은 문무겸비에 야전 체질이라면 거의 말뚝을 박고 군공으로 고속진급해서 중앙정계로 가는게 정석이었다.
그래도 군부 입장에서 보면 지휘관 자원을 양성하는 것 외에도 나름 쓸모가 있는 보직이기는 했는데, 일단 군단 기행업무 총괄에 필요한 젊은 고학력 인재는 대부분 원로원 계급에 집중돼있었고[59], 계급관념과 미신이 강했던 고대에 각종 대민접촉이나 의전을 수월하게 치르는 데에도 유서깊은 명문귀족 출신이 나았기 때문. 일반적으로 이 보직은 원로원 계급의 청년이 명예로운 경력(Cursus Honorum, 쿠르수스 호노룸)을 밟아 나가는 과정에서 첫 번째 디딤돌로 간주되었으며, 만기 복무 이후 안찰관(아이딜리스)이나 재무관(콰이스토르)과 같은 공직에 선출되어 명예로운 경력을 이어나가곤 했다. 하지만 제정 시대 이후 이미 티베리우스 황제 때부터 경력을 군대에서 시작하려는 귀족 혹은 기사계급 젊은이가 갈수록 줄어드는 현상이 벌어졌고, 이들은 주로 행정 부분에서 경력을 쌓고 싶어했으며 제국 행정도 군무와 정무가 분리되는 방향으로 발전해나갔다. 때문에 이런 부류의 초임 장교들은 적어도 갈리에누스 ~ 디오클레티아누스 시기에 소멸했을 개연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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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띠 대대장(Tribunus Angusticlavius, 트리부누스 앙구스티클라비우스 / narrow stripe tribune)
명칭은 마찬가지로 기사계급, 즉 에퀴테스가 입는 좁은 띠로 자수된 옷을 입었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넓은 띠 대대장과 달리, 보조병 감독관 등으로 수년간 군 경력을 쌓아 온 기사계급 출신 청년으로 구성되었으며, 간혹 평민 병사 출신 백인대장이 진급하여 맡는 경우도 있었다. 주로 대대 행정 업무를 맡았으며, 군에 뜻을 둔 기사계급 청년에게는 넓은 띠 대대장과 마찬가지로 공직 경력을 이어나가는 데 필요한 세 가지 군사 보직(Tres Militiae, 트레스 밀리티아이)인 보조병 감독관(Praefectus Cohortis, 프라이펙투스 코호르티스), 좁은 띠 대대장, 기병 편대 감독관(Praefectus Alae, 프라이펙투스 알라이, 약 500여 명 규모의 기병대) 중 하나로 인식했다. 티베리우스 황제 때부터 수석 백인대장을 역임한 부류가 이 직책을 맡는 경우가 대폭 증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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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관(Praefectus, 프라이펙투스 / prefect)
라틴어 'praeficere'(프라이피케레)는 '무언가를 관리하고 감독한다'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자체적인 권위가 없이 다른 선출직 관리자에 의해 권위가 부여되는 비선출직 관리자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대표적으로 근위대장(Praefectus Praetorio,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이 있다. 마찬가지로 로마 군단의 프라이펙투스(praefectus)는 선출직 장교가 임명하는 비선출직 지휘관을 가리켰다. 다만 감독관이라는 계급이 명시적으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어서, 보조병 감독관(Praefectus Cohortis, 프라이펙투스 코호르티스)[60]처럼 초짜 장교가 처음으로 맡는 보직과 기지 감독관이나 군단장 대리 감독관(Praefectus legionis vice legati, 프라이펙투스 레기오니스 비케 레가티)과 같은 고급 장교를 같은 프라이펙투스(Praefectus)라 부르는 등, 담당 분야에 따라 위상은 천차만별이었다. -
기지 감독관(Praefectus Castrorum, 프라이펙투스 카스트로룸 / camp prefect)
로마 군단 내 보급, 훈련, 경계 등 기지 내 실무를 총괄하는 보직이었다. 당연히 중요성이 어마어마하며 일반적으로 수석 백인대장(primus pillus, 프리무스 필루스) 출신이 주로 임명되었다. 즉, 이 보직에 임명되는 인사는 말 그대로 최소 25년 이상 군단에 뼈를 묻은 베테랑 중의 베태랑이었다. 덕분에 군단 내 실무를 지휘했으며, 군단장에게 실무 측면에서 조언을 제공하는 일종의 참모장 역할을 맡기도 했다. 군단 내에서는 군단장과 넓은 띠 대대장에 이은 서열 3위였으며, 평민 출신의 경우 수석 백인대장 제대 보상으로써 기사계급으로 계급 상승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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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대장(Centurio, 켄투리오 / centurion)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로. 군단의 각 대대를 구성하는 단위 백인대 최선임으로, 전장에서는 군단장 또는 총사령관의 직접적인 명령을 받으며 실질적인 전투병력의 작전행동을 이끌었다. 오늘날과 달리 일선 소부대에서 기행과 전투의 담당역이 분리되어있던 로마시대에는 사실상 사병들의 왕이었다.
원래 공화정 시절엔 백인대장이 백인대 내에서 투표로 선출되었고, 고대 패싸움에서는 두뇌보다 무력과 성량이 중요했기에 소부대의 행동대장으로서는 운동신경이 좋고 실전경험이 풍부한 백인대원이 주로 선호되었다. 행정경리 업무는 optio(백인대 부장)이 처리하도록 하면 됐기 때문에 머리가 나빠도 패싸움을 잘 이끌면서 인덕이 있으면 백인대장을 할 수있었다. 군단의 백인대장은 병사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 병사들을 최전선에서 지휘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병사들은 백인대장의 역량에 대해 의심이 갈 경우 백인대장 교체를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로마군에서는 어떤 군단이든 제1대대 제1백인대장은 군단 전체의 백인대장들 중에서도 지휘력, 무력, 지식, 실적, 경력, 인품 면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가 보임되는 군단 내 백인대장들 중 최선임인 자리였다. 백인대장 자체가 각 백인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가장 뛰어난 인재가 보임되는 데다 제1대대 제1백인대장 보임에는 나머지 백인대장들의 동의까지 필요했음을 감안한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제1대대 제1백인대장은 짬과 능력에서 웬만한 상류층 출신 대대장보다 윗급이라 굉장히 예우받았고, 군단 사령부의 지휘관 작전회의에 참여할 권한도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사단 주임원사 급으로, 평민 출신 병사의 사실상 진급상한선이었다.[61] 어느 퇴역 로마 군인의 묘비에 1대대 1백인대장까지 진급했으니 내가 원하는 바를 전부 이뤘다고 적혀 있을 정도로, 군대 내에서나 사회에서나 상당히 존경 받는 명예로운 직위였음을 알 수 있다.
백인대장 전사 시 지휘권 공백으로 인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백인대에는 백인대장을 보좌하는 백인대 부장(Optio, 옵티오)도 항상 편제되어 있었다. 구분을 위해 특유한 투구의 장식을 백인대장은 가로, 백인대 부장은 세로로 달았다. 차기 백인대장이라 당연히 대접을 받았지만 직속상관인 백인대장이 너무 유능해서 병사들의 지지를 계속받아 10년 넘게 백인대 부장으로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
다만 백인대장이 오늘날 한국군으로 말하자면 중대장과 행정보급관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때문에 행정보급 방면에서 백인대장을 보좌하는 보직이 있는 병(兵)이 따로 있었다. 제1대대 제1백인대장은 때문에 오늘날 한국군 부대의 주임원사에 가까운 보직이기도 했으며, 행정적 임무과 과업이 갈수록 많아지다보니 그야말로 행정보급관 혹은 주임원사화 되다가 결국 3~4세기 중엔 군 지휘권은 내려놓고, 부대 내 행정보급 업무만 중점적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문자 그대로 주임원사 같은 역할이 되었다고 보면 된다. 이 백인대장 지위는 편제도 하는 일도 거의 변하는 일 없이 무려 11세기 로마군이 디라히온 전투로 거진 편제와 기능이 무너지기 이전까지 지속된다.
6.2. 부사관
로마군의 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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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군기( 아퀼라), 황제 초상(이마고), 군단기(벡실라리움), 대대기(시그눔), 기병기(드라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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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단기수(Aquilifer, 아퀼리페르) 및 황제 초상 기수(Imagnifer, 이마그니페르)
전자는 흔히 독수리 깃발로 잘 알려진 로마군기를 드는 군단병을, 후자는 황제의 얼굴이 그려진 조각상이나 깃발(이마고)을 드는 군단병을 가리킨다. 특히 황제 초상 깃발은 군단 전체가 황제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상징이었다. 수석 백부장 휘하에 배속되었으며, 군단에 각 1명씩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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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백부장(Optio, 옵티오)
백부장을 보좌하며, 백부장이 사망하는 등의 유고 시 백부장을 대신하여 백인대를 지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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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수(Vexilifer, 벡실리페르)
군단 상징과 군단명을 수놓은 군단기(벡실라리움)를 드는 군단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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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 기수(Signifer, 시그니페르)
개별 대대의 상징물인 대대 깃발(시그눔)을 드는 군단병.
상기한 인원들은 일반 군단병이 받는 봉급 2배를 지급받았다고 하여 '두필리카리우스(Duplicarius)'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사실상 계급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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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직병(Tesserarius, 테세라리우스)
백인대의 야간 경계근무를 조직, 감독하는 군단병. 현대 국군의 당직병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일반 군단병 급여의 1.5배를 지급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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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수(Cornicen, 코르니켄)
나팔을 이용하여 명령을 신호로 전달하며, 부백부장과 함께 백부장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은 군단병. 행군시에 군단 최선두에 서서 일종의 군악대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일반 군단병 급여의 1.5배를 지급받았다.
6.3. 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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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입대 고참병(Evocatii, 에보카티)
정규 복무기간을 마쳤지만 재입대한 고참병. 일반 사역에서 면제되었고 일반병의 2배 급여를 받았다. 백인대장을 맡는 경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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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병(Immunes, 이무니스)
사병 중에서 군단에 필요한 특기를 가진 자들로 구성된 계급. 대장장이, 목수, 기계공, 의무병, 사냥꾼 등이 포함된다. 이들은 일반 군단병 급여에 추가 보너스를 받았으며 사역을 면제받았으나, 특기 보유와 관계없이 전투 시에는 일반 군단병과 같이 진형을 갖추고 싸워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미국의 4등병/5등병(Technician Fourth/Fifth Class)과 유사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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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사병(Miles, 밀레스)
일반 사병. 전형적인 알보병으로, 훈련과 경계, 전투 외에도 건설 등의 사역에 동원되었다. 밑에 디스켄스나 티로는 이들 가운데서 계급을 나누는 개념이다. -
상병(디스켄스)
티로보다 한 계급 높은 병사. 현대 한국군 감각으론 일병~병장이라 볼 수 있다. 큰 사고 안치거나 승진하기 전에 전사만 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이 정도까지는 대부분 승진했다. 그래도 엄연히 티로보다 계급이 높은 이상 당연히 티로보다 보수는 많이 받았다. -
훈련병(Tiro, 티로)
훈련병 혹은 이등병
7. 훈련
로마군의 훈련은 피가 흐르지 않는 전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실전처럼 엄격하게 훈련했다. 훈련병은 실제 무기보다 두 배 무거운 훈련용 무기로 체력단련부터 했다고 한다.문제는 제정기에 이걸 20년 넘게 해야 되었기 때문에, 복무 강도는 현대 국가들과 비교할 수도 없었다. 군단 파업과 반란의 원인도 낮은 봉급과 가혹한 훈련이 절대 다수였다.
8. 로마 군인의 생활
8.1. 로마군의 봉급과 소비
학자들은 공화정 시기부터 로마군에 대한 봉급 지급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국방부 군사찬연구소 배은숙 연구원의 '로마군의 철제 무구 수급 체계의 변화'에 따르면 기원전 406년 베이이 공략 당시 전쟁이 겨울까지 길어지자 차출된 시민들의 생계가 어려워 지자 봉급을 지불한 것을 시작으로 기원전 4세기부터 봉급이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 폴리비우스의 히스토리아 6권의 기록에 따르면 '동맹군의 경우 식량은 주지만 봉급을 따로 지급하지는 않는 반면 로마 시민병에게는 식량, 군복, 무구 구입비를 먼저 주고 이를 봉급에서 공제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무기 제조장을 감독하는 자리에 오른 자들이 이득을 취한 사례도 있었는데 키케로가 카이사르의 장인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비판할 때 '피소의 아버지가 동맹시 전쟁 당시 국가 무기 제조소를 감독하며 엄청난 이득을 취했다'라고 비판하였다. 배은숙 연구원의 '로마군의 봉급 변화'에서는 2차 포에니 전쟁시기 로마군 군단병에게는 120 데나리우스, 백인대장은 240 데나리우스, 기병은 360 데나리우스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카이사르가 휘하 군단병들의 봉급을 225 데나리우스로 대폭 인상하였다. 그외 공화정기 로마군 장수들은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상당히 많은 상여금을 지급하였다. 기원전 62년 소아시아를 정복한 폼페이우스가 브룬디시움에 상륙한 이후 군단을 해산하며 휘하 군단병들에게 상여금으로 무려 인당 1500 데나리우스를 지급하였고 내전기로 접어들면서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했기에 원로원파,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모두 병사들의 수년치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의 상여금을 뿌렸다.제정 시기 로마군은 1년에 3회 봉급을 받았으며, 이 돈으로 무기와 장비를 장만하고 의식주와 취미생활을 했다. 병사의 봉급은 임금 노동자과 비슷했다. 제정을 시작한 아우구스투스는 군단병들의 봉급을 카이사르가 인상한 225데나리우스로 고정하였다.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카이사르 시기에서 아우구스투스 시기 로마시 임금 노동자의 일당이 대략 12아스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는데 아우구스투스가 정한 봉급은 일당 10아스였다.(...) 이후 도미티아누스는 군단병들의 봉급을 300 데나리우스로 인상하였고 이는 콤모두스때까지 유지되었다...[62] 이후 3세기에 들어서서 군단병 연봉은 빠르게 올라갔는데 세베루스와 카라칼라가 각각 인상을 단행하였고 최후의 군단병 봉급 인상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때 이루어졌다. 공화정기에는 최고지휘관이 약탈로 번 돈과 개인 재산을 상여금으로 뿌렸다면 3세기 위기 이전까지는 황제가 군단병들에게 상여금을 뿌리는 형식이었다. 다만 그 횟수는 매우 적었는데 제정기 상여금은 대부분 황제가 사망하면 주어졌다. 심지어 이것도 근위대와 차등이 있었다.
물론 기원전 122년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국고에서 국복을 병사들에게 제공하고 그 비율을 봉급에서 공제하면 안된다'는 군법을 통과시켰고 공화정 말기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후 명목상 무기, 장비, 의복 등은 지급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대부분은 지급되지 않았다. 그나마 징병제 말기에는 워낙 사람이 부족해서 재산이 거의 없는 병사도 전쟁터에 보내야 했으니까 국가가 지급하기도 했지만 모병제 이후에는 병사들이 자기 장비값을 내는 공동구매가 정착되었다. 또 이 병사들이 구매해야 하는 '장비'에는 무기와 갑옷뿐만 아니라 의복, 신발, 텐트, 이불, 식기, 건초 같은 군생활에 필요한 것들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봉급 부족은 티베리우스 즉위 직후의 병사 반란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고, 군 당국도 이걸 잘 알고 있어서 처우 개선 요구로 인한 평시 집단 행동에 대해서는 의외로 처벌이 가벼운 경우가 많았다.[66] 로마가 안정기에 접어든 후에도 박봉 문제는 심각했는데, 병사들이 무기를 비롯한 각종 장비에 대해 공제 받고 나니 돈이 부족하다는 기록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제 1차 유대 전쟁 당시 마사다 요새 공략전에 참전했던 한 로마 기병의 급료 명세서를 보면 급료 50데나리우스로 식비, 의복비, 군장 구입비, 말 사료비 등을 지출하고 나자 한 푼도 남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직후인 81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주둔하던 군단병의 봉급 명세서를 보면 침구, 군화, 식량, 가죽 끈, 군복 심지어 축제 비용까지 공제되었다고 되어 있으며 소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무기 구입 비용으로 103 데나리우스를 공제하였는데 당시 군단병 연봉이 225 데나리우스였다. 제국의 제정이 제일 풍족하였던 153년 안토니누스 시대에 갈리아 기병 소대의 병사가 무기 구매 비용으로 50 데나리우스를 빌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만큼 시오노 나나미의 미화와 달리 로마가 제일 잘 나가던 원수정 시기와 오현재 시기때 조차 각종 지급 및 생활 품목을 공제하고 나면 군단병들이 저축을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던 것으로 보고 있다.
병사가 무기를 구매해야 한다는 것은 문제를 일으켰다. 로마군이 사용한 투창인 필룸은 적의 기병이나 전차가 몰려오는 상황에서 방진을 짜고 기병대를 견제하기 위해 꼭 필요한 무기였다. 그러나 필룸은 상당히 비싼 데다 소모품이었기 때문에 병사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로마 후기에는 결국 다트형 투척 무기 플룸바타 혹은 베르툼[67]으로 교체되었고, 궁수와 기병대로 방진을 지키는 쪽으로 바뀌었다.
로마군도 이게 문제라는 인식이 있어서 일부 금액을 따로 떼어 저축하게 했고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부터)[68] 중도 전역하는 병사들이라도 중대한 군율 위반으로 추방되는 등의 사유가 아니라면 위로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또한 봉급만으로 보면 무척 낮아보이지만, 언급되었다시피 로마군에게는 퇴직금이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고대에 퇴직금 주는 직장은 많지 않았다. 물론 놀고 먹을 비용이라기보다는 재사회화 과정에서의 정착 비용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로마군은 17세부터 입대할 수 있었고 만기 20년을 채운다 해도 37세에 불과했다. 그리고 고대라고 해도 군단에 입대할 정도로 건강했다면[69] 적어도 15~20년은 더 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만기 전역할 정도면 대개 자녀도 여럿 두었기에 재사회화는 불가피했다.
과거 공화정 시기에는 해산된 군단의 병사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지만, 제정 시기가 되면서 만기 전역하는 병사들에게는 퇴직금이 주어졌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부터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절까지는 은퇴하고 땅을 받는 경우가 많았지만[70], 제정 시대인 아우구스투스 시절부터는 돈으로 받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다.[71] 군단병으로 20년을 복무하고 은퇴하면 퇴직금으로 3000 데나리우스를 받았는데 이는 무려 13년치 연봉이었다. 또 카라칼라는 월급만 올려준게 아니라 퇴직금도 5000 데나리우스로 올렸다. 퇴직금을 돈으로 받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때로는 퇴직금에 해당하는 땅을 받고 정착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대 로마 후기에 땅을 받은 병사들은 은퇴한 뒤에 리미타네이가 되어서 파트타임 농부-파트타임 병사로 활동하기도 했다.[72]
제정 시기와 비교하면 과도기였던 내전기는 병사들이 금전적으로 풍족한 시기였다. 특히 상여금이 많았는데, 군사령관들이 병사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더 많은 상여금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이 없었던 카이사르는 부하 장교들에게 돈을 꾸어 상여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카이사르가 빚을 하도 많이 져서 채권자들이 쩔쩔매며 더 많은 돈을 빌려줬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시오노 나나미 때문에 퍼져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빚쟁이들이 멀쩡히 돈을 떼이고 가만히 있는 족속은 아니며, 카이사르가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하기 바로 전에, 카이사르가 원정에서 빚을 갚지 않고 죽을까 걱정한 빚쟁이들에게 붙들려 맞아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 있었다. 카이사르의 최대 채권자이기도 했던 크라수스가 카이사르의 빚 전체를 보증함으로서 카이사르는 갈리아로 부임할 수 있었다. 크라수스가 카이사르의 빚에 대해 한 보증은 어디까지나 미래를 위한 일종의 투자였고, 카이사르는 그 값을 충분히 했다. 봉급으로 소금과 향신료를 주기도 했다. 봉급을 뜻하는 영단어 'Salary'가 소금을 뜻하는 라틴어 'sal, salis'(명사 제3변화)에서 나왔을 정도다.
여가 시간에 농사를 짓거나, 닭을 기르거나, 그 밖의 잡일로 부업하는 병사도 적지 않았다. 서로 돈을 꿔주고 갚으라고 독촉하는 편지도 남아 있다. 고향의 가족들에게 돈이 필요해서 부쳐달라는 편지도 발견되었다.
전리품은 병사들에게 분배되는 경우가 많았다. 약탈도 때때로 허용되었다. 게르만족 등 가난한 야만족과 싸우는 경우에는 전리품을 기대할 수 없었지만[74], 트라야누스 황제가 펼친 다키아 원정처럼 풍요로운 지역[75]으로 출동하는 경우에는 풍성한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산조 페르시아나 아르사케스조 파르티아는 부유하지만 막강한 적이다 보니 약탈하거나 전리품을 얻는다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었다. 국력도 막강하고[76] 기병 전력이 로마보다 압도적이다보니[77] 당연히 상대하는 게 힘들어 약탈이 쉬울 리가 없었다.
이 때문에 로마군은 약탈보다는 상여금에 관심이 많아져 후기에 가면 상여금을 올려달라는 병사들의 요구가 빗발친다. 하지만 이게 부작용을 가져왔는데, 왜냐면 황제랑 군사령관들이 병사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화폐를 마구 찍어내서 상여금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내전기같은 경우에는 화폐의 귀금속 함유량이 높아서 실제 가치와 명목 가치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황제의 정통성과 권위가 추락하는 3세기의 위기부터는 사실상 은화가 은도금한 동전으로 바뀌는 등 악화가 주조되는 바람에 심각한 물가 상승을 초래했다. 그래서 상여금이 많이 지급되어봤자 물가 상승으로 인해 병사들의 살림살이는 나아진 게 별로 없었다.
8.2. 로마군의 식사
식사는 육체노동의 극한이라고 할 수 있는 전투 수행원이었다는 점에 비해서 매우 단촐했다. 물론 그 당시 군대라면 식사가 대체로 고만고만했고 현대에도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의 군대는 당시 로마군보다도 못한 식사를 하는 경우가 흔하다. 때문에 과거 히스토리 채널에서 소개할 때는 일반 서민들보다 영양가 면에서는 훨씬 더 잘 먹었다고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빵/죽[78]에다 병사 개인이 상비하고 다니는 건포도/무화과 등의 견과류, 양/염소의 젖[79]과 젖으로 만드는 치즈[80], 몇 가지 야채와 올리브유[81]를 이용한 샐러드, 쉰 포도주를 탄 맹물이 전부였다. 수에토니우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트라야누스 아래에서 군생활을 할 때 돼지비계, 치즈, 쉰 포도주(larido, caseo et posca)를 먹었다고 적었으며[82], 황제가 된 후에도 비슷하게 조촐한 식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식사는 분대원들이 모여서 공동으로 조리하였고, 식재료는 주둔지 주변에서 채집하거나 1년에 3번 받는 급여를 쪼개 사비로 구매해야 했다. 물론 급속 행군중일 때는 육포, 건포도/말린 무화과, 말린 치즈, 밀가루 반죽을 바짝 구워서 말린 하드택 같은 보존식에 의지해야 했다. 이런 보존식을 만드는 것은 물론 군단병 본인의 몫이었다.
쉰 포도주의 경우 포스카(Posca)라고 불렀는데 이는 유통기한이 지난 포도주가 과발효해서 생긴 포도 식초로서 식수 소독제에 가까운 용도로 사용됐다. 보급선이 길어지면 포도주는 쉬어서 식초가 되고, 맹물도 미생물이 증식하여 악취와 복통을 일으켰는데, 그냥 마시기 곤란한 두 액체를 섞으면 식초의 아세트산이 악취를 덮고 박테리아와 기생충을 살균하여 그럭저럭 마셔도 괜찮은 수분공급원이 되었다. 여기에 주머니 사정이 되는대로 꿀과 각종 향료, 약초 등을 섞어 어떻게든 맛을 좋게 만들어 보려했고, 소금을 약간 섞어 전해질도 보충했다.
즉 포스카와 포도주는 엄연히 다른 음료였다. 고대 로마에서도 포도주는 술로 취급했었고, 포스카는 에탄올이 분해된 식초가 기반이므로 에탄올이 없어서 술로 취급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포스카는 술 같은 기호식품이 아닌 정수제, 이온음료, 에너지 음료에 가까운 생필품이었다. 육체 노동을 할 필요가 없는 귀족 계층은 굳이 취향에 따라 찾는 것이 아닌 이상[83] 거의 마시지 않았고, 주로 군인들과 육체노동자들이 애용했다.
고대 로마군의 형벌 중에는 포스카를 타지 않은 맹물(석회수)을 마시게하는 것도 있었다. 이 경우 소독되지 않은 물을 마셔야 했으므로 배탈이 날 가능성이 높고 무엇보다도 비린내 나고 쓰고 텁텁한 등 맛이 더럽게 없어서 큰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그 외에 군인에 대한 처벌로서 다른 식사 대신 보리로 쑨 죽을 주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로마인들은 끓인들 잘 익지도 않고 풍미도 밍밍한 보리를 가축과 노예가 먹는 곡물로 천하게 여겼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일종의 명예형에 가까웠다.
기본적인 식사는 그러했지만 여건이 허락한다면 최대한 고기를 구해다 먹었다.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몸을 혹사해야 하고 또 신체조건이 생명과 직결되는 직업군인들에게 단백질 섭취는 사치라기보다 필수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주둔지 근처에 야생동물이 풍족한 곳이 있으면 사냥을 하기도 했다고. 특히 로마군을 포함한 로마인들부터가 주머니 사정만 되면 푸짐한 양의 고기를 양껏 먹는 것을 즐겼으며[84] 고기를 먹을 만한 여건이 안 될 때는 주로 생선과 치즈에서 단백질을 얻었다.
병사들의 식재료를 책임지는 보급망은 동시기의 다른 국가보다 매우 체계적이고 효율적이었다. 무엇보다 로마군은 후방의 보급망을 구축하지 않고 먼저 진격하는 일이 없었다. 새로운 주둔지로 옮겨갈 때마다 주둔지 사이를 잇는 도로를 건설하고, 일정 거리마다 보급소를 두어 경비 병력을 세웠다. 보급로 주변의 외부인은 무력으로 먼저 정복하거나, 평화 협정을 맺거나, 아니면 돈으로 매수하여 보급로에 대한 위협을 최소화했다. 추가로 물자가 필요할 때는 자신들을 따라다니는 상인(Sutlers) 혹은 주변의 외국인들로부터 구매하거나[85], 주변 신민들로부터 징발하기도 했다.
종합하자면 로마군은 동시대 다른 나라의 징집병에 비해서는 훨씬 잘 먹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8.3. 혼인 등 가족 생활
후기 로마군 병사들이 게르만족 출신이거나, 게르만족 여인과 몰래 결혼한 로마 병사가 많아서 게르만족이 침공해올 때 국경이 열려버렸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3~5세기의 로마 제국의 실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헛소문이다.게르만족들의 침투는 훈족들이 오기 300년 전부터 꾸준히 시도되었고, 3세기 아우렐리아누스가 상대해야 했던 게르만족이 오히려 실력에 있어서도 수에 있어서도, 훈족 침략 시기 훈족이나 게르만족보다 무시무시했다. 그런데도 로마군이 적어도 4세기 때까지 족족 야만족을 격퇴한 것은, 로마군에 입대한 게르만족이 민족 정체성보다 국가 정체성을 중시했기 때문이었다.[86]
로마군에 복무하는 게르만족이 응당 국경 너머 게르만족에게 국경을 열어줬을 거란 생각은 부족 정체성과 국가 정체성이 어떻게 다른지 분간을 못해 생긴 착각이다. 당시 로마군에 복무하던 게르만족은 물론 자기가 프랑크족 혹은 고트족 출신이라는 정도의 민족 자각은 있었지만 적으로 싸우게 되는 게르만족은 다른 로마군과 다를바없이 적대시하여 사정없이 쳐죽였고 그건 설령 자신과 족속이 같아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6세기 중엽 쳐들어온 롬바르드족 이전까지 게르만족들도 겉으로는 동로마 황제의 신하를 자처하며 사실상 로마인 행세를 하였다. 서로마가 무너진 건 혼란기에 사회 인프라를 유지하는 것보다 검술을 배우는 게 더 유리한 풍조가 서서히 자리잡고, 고트 전쟁과 뒤이은 롬바르드족의 침략, 이슬람 세력의 침략, 동로마와 노르만 세력의 충돌, 유럽 통일 강국들의 충돌 등으로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지면서 느리지만 확실하게 사회 붕괴까지 이어진 탓이지, 게르만족이 5세기에 로마 제국 사회를 부순것만으로 망한 게 절대 아니다. 오히려 최근의 로마사 연구자들 사이에는 동고트 왕국 시기까지 서로마의 게르만족은 사실상 로마인이나 다름 없었고 오히려 로마화된 게르만인들에 인해 유지되던 로마식 행정망을 결정적으로 붕괴시킨건 사실상 동로마 제국이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이 이에 큰 역할을 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고 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 시기의 군제 개혁 때 병사들의 결혼을 금지시켰는데, 군인들을 민간 사회와 격리해 군대에만 집중하게 하며, 사적인 가족이 없이 군대를 가족으로 여기게 만들기 위한 정책 + 가족이 있다면 다른 지역으로 부대를 이동시킬 때 가족들을 데려가는 문제로 골치가 아파질 게 뻔하니 이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미 결혼한 기혼자도 입대는 가능했지만 가족관계는 법적으로 무효가 되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결혼 금지를 결혼식 금지로 알아들었고, 공공연하게 주둔지 근처에 사는 현지 주민이나 여자 노예와 살림을 차리고 애낳고 가족을 꾸려, 정식 결혼은 못 하지만 사실혼 관계로 살았다. 물론 군단장들은 당연히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애초에 막을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고, 또 군복무를 성실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사실상 묵인했다. 여기에다 제국이 안정된 이후에는 대규모 부대 이동이 거의 사라졌기에 두번째 문제의 발생 가능성도 낮아졌다. 현실적으로 지켜지지 않고 있음에 더해 필요한 이유 중 하나의 감소로 인해,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에는 이 사실혼 관계로 살고 있는 병사들에게도 기혼 남성들과 같은 법적 권리를 보장하게 되었으며, 또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에는 군인들이 사실혼 관계 중 낳은, 법적으로는 사생아인 아이들도 합법적인 적자들과 마찬가지로 상속권 등의 법적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다.[87] 안타깝게도 이런 사실혼 풍습 때문에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선 로마군 3개 군단을 궤멸시키고 군단 주둔지까지 쳐들어온 게르만족이 스스로를 지킬 힘도 없는 군인 가족들을 붙잡아 끔찍하게 살해하는 뜻밖의 참극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많은 부분에서 병사 및 사병 가족들에 대한 제한 조치가 철폐됐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아래에서 병사들의 불만을 산 결혼 금지령이 폐지됐다. 세베루스 아래에서 로마 사병의 자녀가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하게 된 것으로 알려진 조치를 보다 전문적으로 강화됐고, 혼외자들의 재산상속도 인정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아래에서는 아예 황제와 황제 자문회의 차원에서 병사 및 군인 가족들에 대한 법적 권한과 지위가 보장되도록 여러 조치가 취해졌다. 우선적으로 실행된 것은 병사와 가족들이 기지 근처에서 상관 및 그 가족들의 명령에 따라 허드렛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이를 보호받는 법령이 제정된 일이다. 이는 병사들이 군율 위반,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마구잡이로 상관에게 잡업에 시달리는 일을 막고, 사실혼 관계와 다름없는 애인, 배우자 및 자녀들까지 지휘관 밑에 종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 이와 함께 병사들이 징계를 받을 때, 법적 외의 사적, 군단 사정에 따른 내부규정에 따라 모은 재산을 강탈당하는 것도 막고, 이를 병사와 유가족들이 재판을 통해 이를 보호받을 수 있게 하는 법률도 제정됐다. 이를 통해 병사 가족들은 부당한 일을 당하면, 즉시 소송을 걸어 유리한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의 또 다른 변화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래에서 집행된 사실혼 관계로 태어난 아이들에 대한 재산상속권이 강화하고, 인지 통보를 하면 유언장을 통해 혼외자들의 재산상속도 인정된 조치였다. 하지만 이런 조치에도 세베루스 왕조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직계의 단절과 시리아 에메사 여인들의 지나친 간섭으로 병사와 군단기지에 거주하는 군인 가족들에게 지지를 온전히 받지 못했다.
8.4. 의료 복지
본디 전근대의 의료시설은 발전된 서구권 지역이라도 매우 열악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이야기가 유명해진 것도 열악한 군 의료 체제 때문이고, 불과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전장의 군인들이 전문적인 치료나 수술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마련이었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참 끔찍한 일이다. 이는 전장의 나쁜 위생과 지휘관들의 부족한 관심, 의료 인력에 비해 과다할 정도로 많은 부상자로 인해 정밀한 수술을 하기 힘든 상황이 영향을 미쳤다.[88]고대 로마. 나름 '전문화'가 되었다는 마리우스 군제개혁 이후의 로마 공화국군에서조차 군단 내 부상자/병자에 대한 치료는 군단장이 알아서 해결할 문제였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같이 '병사를 아끼는' 사령관들은 사비를 들여 의사들을 고용, 군대와 함께 이동시키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그저 무관심하기 일쑤였다. 즉 군단장이 이런 문제에 무심하거나 재정이 부족하면 병사들은 싸우다 다쳐도 전문적인 의료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이렇다 보니 전투 중에 중상을 입은 병사가 사망하거나 원래라면 현역 복무를 지속할 수 있는 부상을 입었는데 치료를 못 받아서 결국 팔다리를 잘라야 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트라야누스 기둥에 새겨진 다키아 전쟁 중 로마군 부상병을 치료하는 로마군 의무병의 모습 |
아우구스투스는 능력 있는 의사들을 군의관으로 입대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혜택을 제공했다. 입대하는 의사들에게는 자동적으로 에퀴테스 작위(dignitas equestris)를 수여하고 로마 시민권을 보장했으며, 은퇴 후에는 상당량의 연금과 면세 혜택을 지급했다. 이렇게 해서 모인 제국 초기의 군의관들은 대다수가 그리스인들로서 고대 그리스의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의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고 그에 걸맞은 성과를 내었다.
그리스계 군의관들의 높은 전문성과 실증주의적 사고는 제국군 의무대의 특징이 되었다. 로마군은 전문 군의학원을 설립하고 자체적으로 의학 서적들을 출판하는데에 이르렀으며, 진료/수술 방법을 체계화하고 통일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될 때마다 이를 적용하는 뛰어난 유연성을 보여주었다.
제국 의무대의 주 목적은 비전투 손실을 최소화하고, 부상자의 전선 복귀를 최대화하는 것이었다. 이는 치료 뿐만 아니라 군 복무 환경의 전반적인 개선에도 영향을 끼쳤다. 군의관들은 병사들의 건강을 유지, 증진시키기 위해 모든 주둔지의 하수 처리 시설 정비, 깨끗한 물의 지속적 공급, 야채와 고기, 빵과 과일을 골고루 조합한 다양한 식사, 정기적인 건강 검진, 막사에서의 모기장 설치, 사망자의 화장, 그리고 병사 개개인의 청결 유지 등에 관여했다.
또한 이들은 상당한 양의 의료 물자(수술도구, 약초, 알콜 등)를 상비해 두어야 했다. 군 병원이 민간 병원보다 더 낫다는 말이 나온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였다. 이들은 병사들의 위생과 영양도 체계적으로 관리했으며 군단 병원은 병실의 배치, 의료인력의 동선, 병실의 환기 등을 최대한 체계적으로 고려하여 설계했다.
이것이 가능해진 이유는 1세기부터 제국의 모든 의사들이 의무적으로 제국군 군의학원의 군의관 훈련 과정을 수료해야 할 정도로 군의관의 권위가 커졌으며, 1개 군단에서 세번째로 높은 지휘권자 (군단장, 기병대장 다음으로)가 군의관 출신일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89]
의무대의 조직 구성은 다음과 같다. 최대 복무기간인 25년을 만기로 채우는 수석 군의(medicus primus) 밑에 여러 군의들이 복무했고, 이들은 각자 내과, 외과, 약학 등의 방면으로 전문적인 교육을 이구한 이들이었다. 이 중에서도 외과 수술의들이 가장 높은 대우를 받았다. 군의관 밑에는 기초적인 의료 지식을 교육받아 군의관들을 보조하는 의무병(Medici Ordinarii)들이 있었다.
의무대는 각 군단마다 편성되어 있었으며, 군단 휘하 각 코호트(Cohort, 대대)마다 군의와 의무병들이 배속되었다. 소규모 분견대나 보조병과(Auxiliarii)에도 의무병들이 '의무적'으로 배치되었다. 이는 제국 해군 함대(classis imperium)도 마찬가지여서 각 함선들마다 군의 한명과 보조 의료진이 배치되기 마련이었다.
또한, 치열한 전장에서 실시간으로 부상자에게 1차적인 치료를 행한 후 후방으로 후송하는 임무를 맡은 capsarius 분대 ('붕대를 감아주는 사람')들이 편성되어 있었다. 투구와 갑옷 등 무장을 갖춘 이 capsarii[90] 들은 들것을 장비하고 전장에 투입되어 부상자들의 부상 정도에 따라 우선 순위를 나눠 후송시켰으며, 이들 덕분에 부상자들은 신속하게 야전 병원으로 옮겨져 군의관들의 치료를 받았다.
이렇게 야전 병원으로 이송되어 군의관의 치료를 받은 부상자의 생존율은 무려 7할에 달했다. 군의관들은 오늘날의 기준에서도 심각한 중상도 수술로 치료한 사례가 있었다. 플루타르코스는 클레안테스(Cleanthes)라는 한 군의관의 모범적 외과수술 사례를 기록했는데, 가슴과 배를 칼로 너무 깊숙히 베여 내장이 쏟아져 나온 환자였다. 군의관은 이 부상병의 몸에 내장을 제 위치로 도로 집어넣고 각종 도구와 약품으로 출혈을 멈춘 뒤, 상처 부위를 정밀하게 봉합해 완치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런 수술 과정에서는 마취제로 아편과 맨드레이크를 사용했다.
로마인에는 인체 해부에 대한 종교적 · 사회적 금기가 적었다. 그 덕에 로마의 의사들은 사망한 검투사나 처형당한 사형수 등 여러 사람들의 시체들을 해부하고 실습을 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근육과 혈관의 위치 · 구조 등을 더욱 정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인체에 대한 이해는 다양한 수술 도구의 개선과 발명으로 이어졌고 외과 수술의 성공율을 높였다. 당시 사용된 수술 도구들의 예시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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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게
화살촉이나 부러진 칼날 등 이물질들을 몸에서 빼내기 위한 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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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
상처 부위를 소독하거나 감염 부위를 퍼내는 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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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게
피부나 근육 조직을 드러내는 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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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
각각 다른 용도의 칼날을 갈아끼울 수 있었으며 항상 날카롭게 갈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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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혈대
출혈을 막기 위해 혈관을 압박.
이렇게 정밀한 수술 도구들은 중세 유럽과 이슬람 제국에 고스란히 전수되었다.
그리고 수술 도구의 관리와 더불어 로마 군의관들이 신경 썼던 것이 바로 소독과 상처 부위의 감염 방지였다. 군의관들은 경험을 통해 환부의 감염이 미치는 악영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감염 방지를 위해 환자에게 사용한 수술 도구는 소독하기 전에는 절대 다른 환자에게 사용하지 않았고, 모든 도구는 수술 전후에 불에 달구거나 뜨거운 물로 씻어서 소독했다. 군의관 자신의 청결 또한 철저히 유지했다.
상처 부위는 수술 전후에 반드시 식초로 소독했으며 붕대는 주기적으로 갈아 주었다. 항생제가 없었기에 대체제로 벌꿀의 섭취를 권장했는데, 이게 또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현대 연구 결과에 의하면 벌꿀의 성분 중 천연 항생 성분인 프로폴리스가 강력한 살균, 항균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하니 아주 올바른 조치였던 것이다.
현대에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 조치들은 제국이 붕괴한 뒤에도 계속 이어져서 중세의 의사들은 소독과 지혈을 아주 중시하고 상처 감염을 대단히 민감하게 생각했다. 다만, 철 지난 중세 암흑기론을 가지고 와서 로마군의 우수한 의료 체계와 가상의 세계에 존재한 암흑기 유럽의 의학을 비교하며 현실 세계의 중세 · 근대 의사들을 비난하는 행태가 오래도록 이어졌는데, 중세와 근대의 의학 수준을 생각하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야전 수술 뿐만 아니라 각 중요 주둔지마다 설치한 군 병원(castra valetudinarium / 후기에는 그냥 'hospitium')들도 수준이 높았다. 이 병원들은 때때로 민간 병원이나 의사들보다 더 수준 높은 의료 혜택을 제공했다. 군단 병영 사령관 직속의 병원장(optio valectudinari)이 관리하는 이 병원들은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환자들에게 전문적인 의료 혜택을 제공했다. 최대 군단 병력의 약 10% 정도(약 500 ~ 600명)를 수용할 수 있는 이 병원들은 수술실과 병실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부상자가 대량으로 발생했을 때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 덕에 로마 군인들은 험한 환경에서 전투를 수행해 부상을 입는 일이 많았음에도 생명을 구하고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로마군의 의료 체계는 무역을 통해 들어오는 새로운 의학 지식이나 개선된 수술 기술, 새로 발명된 수술 도구 등을 기존 체제에 편입시키고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부상병 치료의 최대화, 비전투 손실의 최소화'라는 목적에 효과적인 방법들은 받아들여졌고 그 목적에 방해가 되는 제한들은 가차없이 버려졌다.
로마 군의관과 의무대의 성공적이고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인 모습과 부상자 치료는 고대 로마 제국의 전반적 의학지식과 의료기술 수준이 당대 세계최고였다는 점에 그 근원을 두고 있지만,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군 내 의무대 편제와 군의관들이 받은 합당한 대우와 존경, 그로 인해 생성된 전문성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것이였다. 다만, 로마군의 의료 체계는 보편적이지 못하고 군단마다 그 수준과 혜택 범위가 달랐기 때문에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큰 장애를 갖게 된 경우도 상당했다.
8.5. 군법과 형벌
로마군의 강점으로 꼽히던 가장 큰 요소는 조직력과 군율이다. 이는 전시 사상자 최소화 및 목표 달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이를 위해 로마군은 상당히 엄격한 훈련 및 처벌을 시행했다. 다만 처벌 수위는 부대가 처한 상황, 행위의 중대성이나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달랐다. 심지어 적전 도주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거나 지휘관과 병사들의 관계가 양호하거나 지휘관이 인간적인 경우는 명예형으로 끝나기도 했고,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처럼 이런 데 신경 안 쓰는 지휘관이 걸리면 그 악명 높은 10분의 1형이 내려지기도 했다.이외에 로마군은 명예형이 굉장히 많았는데, 사형이나 중노동형을 평시에 무작정 남발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병사들을 처벌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 예로 죄인인 장병을 시민들 앞에 세워 놓고 조리돌림을 하는 형벌도 있었다. 이 때 해당 죄인은 허리띠를 푼 채로 있어야 했다. 이러면 옷이 흘러내려서 모습이 추해지는 것도 있지만, 당시 로마군에서 허리띠는 칼을 찬 군인임을 상징하였다. 즉 로마군에게 허리띠가 없다는 건 칼을 찰 자격이 없는, 다시 말해 군인이라 불릴 자격이 없는 자라는 걸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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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형
로마 시민인데도 불구하고, 징집을 거부하고 도망가거나 병역판정검사[91]에서 꼼수를 부리다가 발각되면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하여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물론 꼼수를 부려도 소용 없이 그냥 현역 판정을 받았다면 해당사항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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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배식
밀이 아니라 가축 사료로 쓰는 귀리 같은 날곡식을 배식했다. 이걸로 요리해 먹으면 정말 맛이 없었고 조리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인간 이하의 짐승 취급이라는 심리적 모욕을 주는 게 목적이었다. 현대 군인들한테 처벌 목적으로 개밥[92]을 배식한다고 생각해보자. 일종의 명예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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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금
상대적으로 약한 처벌이지만 안 그래도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돈 들어갈 곳이 많은 로마군에게는 치명타였다. 역시 징병제가 폐지된 뒤 본격화된 형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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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역
현대의 직업훈련 목적의 소일거리식 노역과는 달리 영화에서 흔히 나왔던 채찍 맞아가면서 중노동하는 노예의 노역보다 약간 나은 수준으로 심각한 형벌이었다. 애당초 로마군은 전투가 없거나 적과 직접 대치한 상황이 아니면 국가에 필요한 토목공사에 수시로 동원됐기 때문에 벌로써의 노역을 주려면 그것보다는 강해야 했지만, 명색이 정규군이고 엄연히 제국의 시민 혹은 속주민 출신이라도 제국의 시민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여 병역에 종사하는 것이므로 절대 노예처럼 채찍을 때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미묘한 기준이 성립되었다. 비텔리우스 황제 때는 오토를 지지한 병사들에게 노역의 처벌을 내렸는데, 이 때는 크레모나의 원형경기장 공사에 동원하는 것이었다. 물론 원형경기장도 나름 기반시설이긴 한데 방어 요새나 도로처럼 국가운영에 필요한 시설이 아니라 제국민들의 쾌락과 즐거움을 위한 시설이었므로 모욕이 맞다.[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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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
현대의 영창과는 달리 노역이 추가된 형태가 많았고, 영창 자체가 불결했다. 물론 특정 지역에 가둬놓는 감옥은 그 자체로 불결한 경우가 대부분이긴 했다. 현대 선진국 감옥이 위생적인 건 사회 전반적인 위생상태가 개선되면서 감옥도 그 혜택을 받았기 때문일 뿐이고 후진국 감옥은 지금도 별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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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외(행렬에서의 제외)
징계 처분에 따라 행렬에서 제외된 사람은 무능력자 취급을 받았기에 사료배식만큼 심한 심리적인 모욕이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열외였다. 이것도 명예형의 일종이었다. 잠시 행렬 제외시키고 끝이라 별거 아닐 것 같지만 실은 직접 패거나 강등하는 걸 제외하면 꽤 엄한 처벌이었다. 로마인은 평판을 매우 중시했고[94], 특히 군인은 20년간 같은 군단에서 부대만 가끔 옮겨다니며 지냈기 때문에 동료들 사이에서 평판이 돌고 돌았는데, 그냥 군생활을 좀 못하는 걸로도 여기저기서 무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런 판에 사고 쳐서 행군 중 열외당한 징계기록이 남으면 당연히 대놓고 무시당했다.
미드 ROME의 주인공이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13군단이 로마에서 사열행진 할 일이 있어서 예전 장비들을 가져와 본인도 행렬에 끼워달라고 했지만, 주인공은 이미 전역한 상태였고 현역시절 때도 그렇게 평판이 좋지 않아서 생사를 같이했던 전우들이 행진은 현역들의 몫이라면서 주인공의 심정을 알면서도 제외시켰다. 그래서 주인공은 자신의 집 같았던 13군단에서 버림받아 허탈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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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형
때리는 도구는 주로 채찍이었다. 태형을 받는 죄목은 폭행이나, 싸움, 술주정이었는데 중대하지 않은 명령 불복종의 경우도 역시 태형을 받았다. 드라마 ROME에서 주인공이 받는 형벌이 이것이다. 지휘관의 명령을 어기고 멋대로 대열을 이탈해 돌진하는 바람에 대열을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그를 구출하기 위해 다수의 동료들이 위험에 처하게 하기까지 한 죄로 태형에 처해졌는데, 전 병력이 보는 앞에서 집행함으로써 망신을 준 것은 기본이다. 남들이 약탈을 허가받아 한몫 챙기러 다닐 때 아무것도 못 챙기고 감옥 안에 갇혀 불평만 한 것은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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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천
주로 장교급에 적용되었지만, 일반 병사에게 적용되는 경우도 드물게 있었다. 역시 어지간히 큰 죄를 지어야 가능한 처벌이었다. 보통은 시쳇말로 진급하기 힘들거나 쓸데없이 빡센 부서로 배치했지만, 사안이 중하면 다른 지역에 있는 군단으로 배속해버렸다. 장교는 로마 전역의 군단에서 순환근무에 가까운 형태로 근무하기도 했으므로 그렇게까지 큰 타격은 아니었지만, 일반 병사 같은 경우에는 현지의 군단에 지원해서 해당 군단에서 퇴역할 때까지 자리를 고수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타 지역으로 좌천되면 개무시가 문제가 아니라 생활기반까지 문제가 생겼다. 대부분 견디지 못하고 중간 전역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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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명예 전역
퇴직금 없이 중간에 강제로 추방하는 것이었다. 명예에 금이 가는 것은 물론, 일반 병사의 경우에는 그간 개인장비 구매에 투자한 비용도 못 건지게 되니 금전적으로 엄청난 손해가 났다. 다만 퇴직금은 중간 전역의 경우 모두 지급이 안 되었다.[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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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베기
민간인 강간은 코를 잘랐다. 물론 이 민간인은 로마 시민이나 속주민, 동맹국 혹은 일반적인 비적성국 주민 및 기타 부족민을 말하는 것이었다. 다만 적지의 여인이라고 해도 적용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주로 유력부족이나 파르티아 같은 강대국의 백성들이 해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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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베기
확실하게 사람 1명을 일을 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형벌이었다. 상습 절도범은 손을 자른 다음 추방해 버렸다. 역시 흔한 처벌은 아니었다. 고대에 노동력의 상실은 사실상 사형인지라 어지간한 죄를 저질러서는 절대 시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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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탈영, 전장에서의 명령 불복종[97], 항명, 살인 등 중대한 군율 위반에 한하여 내려지는 처벌이었다. 집행 방식은 교수형 등 당시 쓰는 일반적인 것들과 함께 '푸스투아리움', ' 10분의 1형' 등 군대에서만 쓰는 것이 있었다. 한때는 로마군이 상당히 잔혹하여 주로 공격할 때 옆에 있는 병사가 낙오하는 것을 목격하면 옆에 있는 병사나 지휘관들이 즉시 그 낙오자를 죽이도록 했다. 낙오자를 죽이지 않는 사람도 죽였다고 한다. 만약 낙오자가 낙오자를 죽이려는 사람을 죽이는 데 성공하면 낙오자의 죄는 용서되었다. 로마인들은 이를 통해 우수한 군인들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사형 자체가 중한 형벌이었므로 반항의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항명 행위를 한다던지 하는 확실하고 중대한 사유가 있어야 했으며, 대부분은 탈영으로 처형되는 경우였다. 단 탈영의 경우에도 복무기간, 계급, 탈영 이전의 행동이나 탈영 때의 상황 등을 참작해서 사형보다 가벼운 처벌을 하기도 했다. 복무기간이 짧은 병사들은 참작을 많이 받았으나 많은 훈련을 받고 복무기간도 긴 고참병들은 참작받기 어려웠다고 한다.[98] 이는 후기의 병사 반란에서 고참병들이 반란을 많이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를 만든다. 가뜩이나 원하지도 않은 힘든 군생활을 하는데다 짬밥을 많이 먹어도 여전히 혹독한 처벌을 받으니 누가 좋으랴. 당연히 병사들의 불만이 폭발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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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스투아리움
사형보다 중한 범죄에 적용되는 형벌. 원래는 채찍, 가지 같은 의미. 단어 자체를 의역하면 태형 정도가 되겠지만, 사형보다 중한 범죄라는 말에서 보듯이 그냥 죽이는 형벌이 아니라 때려죽이는 형벌이다. 그것도 군단 내 사형집행인이 전담하는 게 아니라 같이 싸우던 동료들을 시켰기 때문에 그 잔혹성이 배가되었다.
첫 번째는 병사들이 2열로 늘어서고, 처벌 대상자가 그 사이를 지나가면 병사들이 자기 앞에 올 때 몽둥이로 때리는 것이었다. 이건 로마 시대 이후에도 상당히 오래 남아서 러시아에서는 19세기까지, 스웨덴에서는 18세기까지 군대뿐만 아니라 민간인의 형벌로도 쓰였다. 영어로는 '건틀릿'이라고 한다.
두 번째는 군인 신분을 박탈한다는 의미로 군복을 벗긴 후, 다른 병사들이 둘러싸고 몽둥이나 채찍, 돌로 때려 죽이는 것이었다. 1번과의 차이는 1번은 대열을 통과할 때까지 하지만 이건 죽을 때까지 한다는 것이다.
1번은 거의 사형이었고, 2번은 그냥 사형이었다. 1번에서 몽둥이질을 버티고 대열을 통과해 살아남았을 경우 처벌을 끝내고 살려주는지는 특별한 기록을 찾지 못했으나, 당장은 살아남더라도 이후 생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으므로 사실상 사형으로 봐도 된다.
이게 적용되는 대표적인 경우는 1번의 경우에는 경계근무 중 무단이탈 등의 행위를 한 자, 2번의 경우에는 탈영 후 잡혀온 병사 혹은 적전도주자에게 집행되었다. 노예에게는 십자가형이 선고됐지만 로마 시민이나 기타 자유민에게는 십자가형을 집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99] 그 대안으로 십자가형 못지 않게 고통스럽고 잔혹하게 처형하지만, 십자가형에 비해 불명예는 덜하다고 평가되던 푸스투아리움을 집행한 것이다. 그리고 동성간 성교도 이 형벌의 대상이었는데, 합의했다면 둘 다였다. 강간이라면 가해자만 푸스투아리움을 받았다. 로마법에서 남자들 간의 동성애는 삽입하는 건 금지되어 있지 않아도 삽입당하는 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저지른 놈은 로마 남자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죄, 당한 놈은 로마 남자로써 할지언정 당해서는 안 된다는 규율을 어긴 죄였다. 참고로 로마는 그리스와 달리 동성애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동성애 자체를 윤리적으로 죄악시하지는 않았지만 '박을지언정 박혀서는 안 되는' 남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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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의 1형
극형 of 극형으로 꼽을 만한 형벌이었다. 부대 전체가 처벌 대상일 때 쓴다. 부대원들 중 무작위로 차출된 1/10을 나머지 9/10이 직접 때려죽이게 하는 형벌. 라틴어로는 '데키마티오'(decimatio), 영어로는 '데시메이션'(decimation)이라고 한다.
8.6. 군기 (軍旗)
로마군의 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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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퀼라, 이마고, 백실룸, 시그눔, 드라코 |
로마군은 고대의 군대 중에서도 특히 군기를 중요시했고 다양한 군기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군기는 금이나 은으로 도금한 독수리를 장식이 된 장대 꼭대기에 붙인 독수리 군기( 아퀼라)였으며, 이 군기는 로마군 자체를 상징했기 때문에 절대 적에게 뺏겨서는 안되는 군기였다. 독수리 군기를 드는 기수를 아퀼리페르(Aquilifer)라 불렀으며, 아퀼라와 함께 원수정 시대부터는 황제의 초상조각으로 만든 군기인 이마고(Imago)를 드는 기수 이마기페르(Imaginifer), 각 군단의 군단기인 벡실룸(Vexillum)을 드는 기수 벡실라리오(Vexillarius)가 아퀼라 양 옆에 나란히 서서 행군했고, 군단 예하 각 코호르스(대대/천인대)에는 아퀼라 군기에서 독수리를 로마식 경례를 하는 오른손 모양 조각상으로 교체한 대대기인 시그눔(Signum)을 드는 기수 시그니페르(Signifer)가 편제되어 있었다. 기병대에서는 2세기 이후 다키아의 영향으로 길쭉한 용 모양의 군기인 드라코(Draco)를 사용하였고, 드라코를 드는 기수를 드라코나리우스(Draconarius)라고 불렀다. 군기를 드는 기수들은 자부심의 상징으로 사자, 표범, 곰, 늑대 등 맹수 머리가 달린 가죽을 투구 위에 덮어쓰는 장식을 했다. 기병대 기수는 맹수 가죽 대신 얼굴에 은도금한 가면을 썼다.
8.7. 훈장, 기념
9. 로마군 거품론과 반박
로마 찬양론자(예를 들자면, 리비우스)들이 로마가 패배한 전투들을 기록에서 대량으로 삭제한 것으로 보이는 의혹들이 꽤 있는데, 패전한 전투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꽤나 밝혀지면서 로마군의 전투력에 대해 재평가가 일어나기도 한다. 심지어 당시 로마인들이 아닌 에드워드 기번 같은 권위자들도 두들겨 맞는 중이다.대표적으로 인구 유출로 막장이 된 마케도니아와 전성기 공화정 시절에 맞붙은 피드나 전투 같은 회전들에서 사실상 너무 괴이한 교환비인 1:250을 찍거나 적들은 몇만 명이 거의 다 죽었는데 불사(?)의 로마인들은 몇백 명만 죽고 거의 죽지 않는 기적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많고, 상성이 있다 쳐도 약한 군인 후보들은 죽여서 강한 군인들만 남긴 스파르타조차 가볍게 능가하는 인간 병기 수준으로 로마군이 강했는지는 의문스러운 점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 부분은 간단하게 반박이 가능하다. 전투는 개개인의 무력보단 전술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간병기 수준이라는 스파르타군도 그리스 세계에서 전술이 발달하기 시작하자, 매우 빠르게 도태되었다. 그러므로 유능한 지휘관이 많았던 로마군의 교환비가(조금은 과장이 있더라도) 구시대적 전술만을 고집했던 스파르타군보다 우월한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신뢰할 만한 기록들만 검토해 보더라도 의외로 졸전했던 모습들이 나오기도 한다. 추정 인구 평균 50만, 많아야 100만에 무장도 로마군에 비하면 형편없었던 다키아 같은 소국이나 일부 부족들에게 기량이 좋은 지휘관과 정예병이 포함된 대군을 동원하고도 고전한 적도 있다. 때문에 큰 영토를 정복한 것도 사실 운빨로 정복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수많은 문화권의 수많은 군대를 굴복시켜 남서유럽과 지중해를 정복한 로마군의 업적은 절대 운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로마는 1천 년, 동로마 제국까지 치면 2천 년을 존속한 국가이며 그동안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곳에서[100] 어마어마하게 많은 전투를 치렀으니, 당연히 패전도 많을 수밖에 없다. 이건 역사상 그 어떤 강대국, 군사 강국도 다 마찬가지다.
강대국의 군대가 숫자 적고 무장 수준이 낮은 군대에게 지거나 고전한 사례가 있는 건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며, 그만큼 전쟁에서의 승패는 병가지상사라는 뜻이다. 중국의 통일 제국들만 봐도 국력으로 따지면 수나라와 당나라에게 고구려가 아무 저항도 못하고 멸망했어야 하나 고구려와의 전쟁은 무려 70년을 잡아먹었고 수나라는 끝내 고구려 원정 실패의 후유증으로 무너졌다. 신라의 경우 아예 멸망시키는데 실패했으며, 중국사 내내 한족 왕조 인구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극소수 유목민족에게 몇 번이고 나라가 넘어갔다. 소련의 겨울전쟁이나 아프간 침공, 미국의 베트남전 등과 같은 현대의 사례들만 봐도 인구, 경제, 장비 등등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어도 고전하거나 패배한 케이스는 많다.
그래서 로마는 생각했던 것처럼 전투력이 무적인 군대는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인류 역사상 무적인 군대는 존재한 적 자체가 없으며, 그 외 요소들인 전략, 병참(보급) 등에서는 당대의 그 어떤 국가들보다 뛰어난 면모를 뽐내며 지중해 세계를 재패했다.
10. 여담
- 군단병들이 가진 권한이 막강하여, 속주민에게 갈취나 강제노동 시키는 등 행패를 부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속주민들이 군단병들을 무서워할 정도였다. # 물론 로마법에는 속주민들이 정당하게 항의할 권리가 있었지만 그 민원을 처리하는 행정관들이 대개는 해당 지역 군단의 상관이어서 엄중경고로 넘어가는 일도 대다수였던것. 물론 양심적인 병사들은 동료의 행패를 그냥 넘어가지 않고 이의를 제기해서 주민들을 보호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속주민 상대로나 이랬지 같은 군단병끼리나 로마 시민에게 이런 횡포는 얄쨜없이 처벌에 금지였다. 사도 파울로스가 로마 시민이라는 지위 덕분에 로마군들이 쩔쩔매는 터라 전도에 이래저래 도움이 되었던건 성경에서도 자주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다.
- 민간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으면 장교들로 구성된 군사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당연한 얘기로 상대가 어지간치 지위가 높거나 로마 시민이 아닌 다음에야 판결은 늘 군단병들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났다고 한다. 그나마 재판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 고대 전쟁에서 전투 후 약탈과 살육은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로마군은 이 약탈에서 극도로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존 키건의 저서에 따르면 로마군이 점령한 도시에서 약탈을 벌이면 마주치는 남자는 죄다 노예로 만들거나 아니면 목과 팔다리를 잘라 잔인하게 죽이고 심지어 마주치는 모든 동물들조차 죽여서 사지를 토막내고, 대개 약탈은 지휘관이 정해준 기간이 지나거나 아니면 시내에 살아있는 사람이 아무도 안 남을 때까지 진행했다고 하니 그 악명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잔혹한 일에 대해서 다르게 대처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 바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할 때 부하 병사들에게 그런 약탈을 아주 철저하게 엄금시켰다. 이미 도시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성벽을 오르는 자에게 황금 월계관을 씌워주겠다는 등 갖은 보상을 약속할 때에도 약탈만은 철저하게 금지시켰고, 자신은 이 도시에 잡힌 모든 이베리아 부족 인질을 확보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하기도 했다.
- 징크스가 하나 있었다. 뱀이나 전갈 같은 동물들을 아주 재수없게 여겼다. 때문에 뱀이나 전갈이 군영에 나타나면 전투에서 패한다고 굳게 믿었는데 그래서 그것 때문에 멀쩡한 병력을 철수하는 대대장들도 있을 정도였다. 이는 현재에도 깊이 남아있는 유서 깊은 징크스이다. 히딩크호/이탈리아전 문서로.
- 인터넷 커뮤니티의 밈이나 이 문서 - 혹은 몇몇 로마 역사서만 보면 로마군이 상당히 현대적이고 괜찮은 군생활을 누렸던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고대치고 선진적인 부분이 많았다 뿐이지, 로마군 역시 제정 초기와 고대 말기는 물론, 전성기 때에도 복무는 쉽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 사후 티베리우스 즉위와 동시에 발생한 판노니아와 게르마니아 군단 반란에서 군단병들은 고된 노역과 훈련에 시달리며[103] 이러한 노역과 훈련을 피하기 위해 백인대장들에게 뇌물을 가져다 바쳐야 했다고 항의했던 것을 통해 얼마나 로마군의 복무가 고달펐는지 엿볼수 있다. 그 영향으로 부상과 후유증에 시달리는 경우도 적지 않아, 팔다리나 척추 등에 장애가 생긴 유골들이 발견되고는 한다.[104] 급료 역시 매우 짰고,[105] 정해진 25년 복무 기간 뒤에도 추가 복무하는 경우가 흔했다. 퇴직금을 받아도 그것이 편안한 노후를 보장하는가는 개인에 달린 문제였으며, 안전장치는 없었다. 상술한 근위대와의 차별(봉급, 훈련, etc...)도 큰 문제여서, 군단의 반란 중에는 근위대와 비슷한 대우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106] 또 관료조직이 부족한 로마의 특성상 행정업무에도 잦은 파견을 나가는 바람에 부대에 가용한 병사의 수가 크게 모자란 경우도 흔했다. 이건 심지어 고대 후기가 아니라 전성기인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시절에도 문제가 된 일이다.[107]
- 아무래도 현대 한국의 군필자들은 병역의무를 수행하는 도중 군대의 문제점과 부당함을 많이 느끼기 때문에 로마군과 비교하며 대한민국 국군을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로마군이 아무리 당대 최강, 최고의 군대였다 하더라도 결국 고대 국가의 군사조직이었기 때문에 보급이나 복지, 심지어 인원관리 면에서도 당연히 현대 한국군과 비할 바가 못 된다. 로마군의 복무가 정녕 현대 선진국들의 군대마냥 합리적이었다면 제정 내내 군단병의 반란이 잦거나 상여금이 그렇게 필요하지도, 수많은 황제들이 군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치 일부 해방노예들 사례만 가지고 로마의 모든 노예들이 대우받으며 편히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108]
[1]
마리우스 개혁과 달리 폴리비우스가 수행한 것이 아니고 역사가 폴리비우스의 저작에서 서술된 로마군 및 해당 군제 개혁을 말한다.
[2]
이때문에 로마인들은 귀족은 아니지만 재산이 많은 평민들을 에퀴테스 즉 기사계급이라고 분류했다.
[3]
한참 후인 제정 로마 시기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 황제가 친정했던
다키아 원정 때 20만이 동원된 것과 비교하자. 단 이 20만은 원정군 병력만 계산한 것이고 제국 각지의 주둔 군단은 뺀 거긴 하다.
[4]
사실 로마에게 이러한 야만족 용병들의 비중이 높아질 시에 겪을 수 있는 위험은 이미 한니발과 사투를 벌이던 2차 포에니 전쟁시기에 그 표본이 제공되어 있었다. 로마 시민병들보다 더 수가 많은 이베리아 용병들에게 의존하다가 그들이 적군의 회유에 넘어가는 바람에 지휘관을 포함한 다수의 로마군이 죽거나 포로가 되어 참패했던
베티스 고지의 전투가 바로 그것.
[5]
한국과 일본의 대중서에서는 흔히 '대대(大隊)'라 번역됨. 라틴어로는 '코호르스'(cohors), 복수형으로는 '코호르테스'(cohortes), 영어로는 '코호트'(Cohort)라고 쓰고 읽는다. 이 문서에서는 코호르스로 통일하자.
[6]
동맹시 전쟁이 발발하자 스카우루스는 동맹시들을 선동했다며 고발당했지만 무죄판결을 받았다.
[7]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로만 킴브리 전쟁을 접한 사람들은 로마군의 이러한 대패들에 대해 잘 모른다. 시오노 나나미가 의도적으로 킴브리전쟁에서 로마군이 패배한 전투를 자세히 기술하지 않는 것으로 은밀히 역사왜곡을 했기 때문.
[8]
웃긴건 아라우시오 전투 당시 로마군의 수적 우세에 쫄은 게르만족이 알아서 강화를 요청했고 협상에 들어갔지만 전직 집정관이라는 양반이 신참자 집정관이 영광을 차지 하는 꼴이 보기 싫다고 선제공격을 했다가 역관광 당하면서 로마군이 각개격파 당해 전멸한 것이다.
[9]
물론 현대 학계에서는 몸젠이 주장한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과장되어 있다고 보고있다.
[10]
임금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지급하고 있었다. 마리우스의 개혁은 우리가 교양서에서 나타나는 만큼 극적인 변화가 아니고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던 로마군의 완성이 그의 대에 기본적으로 끝났다는 거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무산 계급에게도 군복무의 길을 열었고, 잡다한 병종을 없애고 레기오나리, 즉 중장보병만으로 구성한 간단한 군사 조직을 만들었으며 나머지는 동맹국 병사들에게 의존하게 했다.
[11]
사실 앞선 전투에서 로마군의 전투력도 전투력이지만 지휘관들의 능력과 행태는 정말로 저질이었다. 즉, 지휘관이 제대로된 사람이 오니 비로소 싸워볼만 해진 것이다.
[12]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 당시 그들 휘하의 군단병들은 사병화된 것과 달리 카이사르의 내전 이전까지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많은 지휘관들은 병사들을 해산시켰다. 물론 폼페이우스가 자신의 퇴역 군단병들을 민회에 동원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사용하였지만 어쨌거나 이들은 공식적으론 퇴역병이었다.
[13]
술라의 경우에는 술라가 대놓고 독재관에 취임해 퇴역병 토지 분배를 처리했다. 하지만 의외로 퇴역병들 중엔 분배받은 토지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았고 땅을 뺏긴 동맹시나 속주 역시 불만이 컸다.
[14]
사실 카이사르 못지않게 초창기 폼페이우스 역시 불법적으로 군사 커리어를 시작했다. 후대의 일로 공화정파라는 이미지가 붙긴 했지만, 야심이 별로 없었다는 점만 빼면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옥타비아누스나 초기 행보는 별반 다를 바가 없다.
[15]
카이사르의 토지개혁법은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안에 비하면 기존의 체제에 비교적 덜 공격적이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실패 (물론 그 내용에 현대 학계에서는 가이우스의 사실을 과장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지만)를 겪었던 민중파의 입장에서 원로원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올 토지 개혁법을 처음부터 강하게 나오기 어려웠다. 따라서 카이사르의 토지 개혁법에서는 폼페이우스 군단에서 5년 이상 복무한 자, 그리고 자녀 3명 이상을 둔 무산자로 국유지 임차인 자격을 제한하는 등 원로원을 덜 자극하려 하였다. 물론 원로원은 쌍수를 들고 반대했고 결국 카이사르는 약점을 잡고 있던 의원들에게는 '니가 얼마나 부패한지 공개할까?'라는 협박을 하는 한편 민회에 법안을 회부하여 반대 연설을 하려는 원로원 의원들을 무력으로 제지, 통과시켰다.
[16]
이건 명군 취급을 받는 아우구스투스 때도 생긴 일이다. 티베리우스 즉위 직후 군단병의 반란 명분도 쓸모없는 토지 분배와 노역이었다.
[17]
단, 술라의 진군은 소위 말하는 킨나의 민중파가 오히려 술라의 군권을 관습을 어기면서 박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군권을 박탈했던 것이 불법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킨나가 무조건 술라의 군권을 뺏은 것은 아니고 엄연히 민회를 통한 적법절차를 통해 마리우스에게 가져온 것이기 때문. 하지만 술라에게 군권이 있고 이는 전쟁 도중에 함부로 뺏지 않는다는 관습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 건 사실이다. 물론 설령 그렇다고 해도 냅다 로마에 꼴아박은 술라의 불법에 미치지는 못 하겠지만. 거기에 술라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들은 재판없이 죽이지 않는다는 법과 호르텐시우스 법, 이탈리아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기로 한 루키우스 카이사르법을 모조리 무력화하는 공포정치를 자신의 사병과 노예들을 동원해 펼쳤다.
[18]
다만 이를 사병화에 따른 쿠데타 시도라고 보기엔 어렵다. 카탈리나의 반란 모의를 제외하면 레피두스, 세르토리우스의 반란과 마르쿠스 레피두스의 반란을 비롯한 대부분 술라의 공포 정치와 그를 따르는 술라파의 전횡에 반발한 민중파의 반란이었다.
[19]
이 비생산적 집단을 지나치게 많이 유지할 경우 벌어지는 일을 알고 싶으면
북한에서
선군정치라는 미명하에 사회 전체의 기반을 군대에 집중했다가 그 군대까지도 망가진 걸 생각해 보면 된다.
[20]
영어 단어에 여전히 남아 있다. 예)
Auxiliary Verb
[21]
이때 아우구스투스가 군단병 퇴직금 지급을 위해 상속세를 도입한 과정으로 원수정의 정의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력을 엿볼 수 있다. 우선 원로원에 상속세에 대한 법안을 제출-> 원로원 의원들의 강력한 반대 하지만 뾰족한 대안을 내지 못하고 갑론을박만 계속-> 솔선수범으로 거액을 기부하여 군단병 퇴직금 재원으로 사용토록함-> 아우구스투스의 솔선수범으로 할말이 없어진 원로원은 결국 법안을 통과 -> 황제의 재산에서 퇴직금을 나누어주는 관례를 만듬으로써 군대의 충성심을 확보. 이러한 프로세스로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을 존중하고 자신이 선언한 공화정 복귀를 지키는 듯하면서 국가의 중대사를 모두 프린캡스의 권한으로 처리하도록 하였다.
[22]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자신의 최정예 군단 10군단이 북아프리카 원정을 앞두고 임금 인상 및 전역을 요구하며 파업을 하자 평소 부르던 전우 여러분인 '콤밀리테스'라고 부르지않고 시민여러분이라고 부르며 즉각 제대시켜주겠다고 하자 이에 충격받은 10군단 병사들이 제풀에 꺾여 파업을 관두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23]
도입시기에 대해서는 Bishop, MC(2002)에서는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 이후에서 서기 21년 플로루스-사크로비로 반란 사이로 제시하였다. 유물적으로는 서기 9년 로마군이 참패한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유적지에서 세그멘타타가 발견되며 도입시기가 공화정 말기에서 제국 초창기로 추정되고 있다.
[24]
물론 바루스가 게르미니아 속주화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었던 것도 컸다.
[25]
물론 트라야누스 황제 말기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를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속주로 삼았었지만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즉위한 직후 유대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원정군을 돌리면서 소리 소문없이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 속주는 없어지게 된다.
[26]
이를 로마 패망의 시작점으로 보고 디오 카시우스를 비롯하여 많은 역사학자들은 비난하고 있지만 몇몇 학자들은 이미 마르코만니 전쟁을 기점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로마의 제정 위기와 콤모두스가 자신의 집권을 안정화시키기 위해서는 로마로 하루 빨리 귀국하여 승인받는게 우선이었다고 분석하고 있다.문제는 저러고 네로를 뛰어넘는 학정을 펼쳐 제국의 제정과 군사력을 모조리 쇠퇴시켜버렸다는거지만
[27]
디오 카시우스는 5만의 사상자를 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5만은 과장되었다고 보고 있다.
[28]
이건 상당히 결과론적인 시각이다. 파르티아는 이미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았고
카라칼라의 원정이 아니었어도 시기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결국 무너질 나라였다. 파르티아는 철저하게 왕족이 아니면 누구도 부왕은 시켜주지 않았기에, 언제까지나 그 지방 세력의 도전을 막긴 힘들었고 게다가 옛 페르시아의 영광을 기억하는 페르시아 유민들이 언제까지나 파르티아인들의 지배를 참을 순 없었다.
[29]
카이사르의 내정 개혁으로 로마에서는 교사나 의사 등 지적 전문직들도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으나 이들의 시민권은 세습이 불가능해 당대에서 끝났다. 상당히 개방적이라 평해지던 고대 로마 제국에서도 세습 가능한 시민권을 얻는 방법은 굉장히 제한적이었는데, 그런 와중에 세습 시민권에 재산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가장 손쉽게 접근해볼 수 있는 경로 중 하나가 보조병 만기전역이었다. 물론 소모율이 높은데다 25년이나 복무해야하는 보조병 특성 상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로마 시민권이 제공하는 막대한 혜택을 교육이나 재산 수준에 관계없이 취득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된다는 것은 속주민들에게 있어 상당히 군침이 도는 일이었고 덕분에 보조병 인력 충원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30]
저 당시 로마군이 쓰고 다니는 모자는
판노니아 모자로
사두정치 당시 로마 황제들을 묘사한 조각상에도 나오고, 꼭 황제뿐 아니라 다양한 계층을 묘사한 모자이크와 입상에 나온다.
[31]
후기 로마군의 기병대는 코미타텐세스로 편제되어 야전 기동대 성격을 가졌다.
[32]
약탈을 하고 돌아가면 전리품이나 포로들도 추가로 데려가야하기 때문에 기동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 즉, 약탈하러 들어올때보다 잡기가 쉬어진다.
[33]
이러면 활줄을 당길 수 없으니 병역에서 제외된다.
[34]
165년의 안토니우스 역병, 250년의 키프리아누스 역병
[35]
한 예로, 3~4세기의 로마군 기병화의 비율이나 성과가 과대평가되었으며, 반대로 2세기 이전의 로마군이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 더 높은 기병 비율을 가졌다는 연구가 나오기도 했다. 오현제 시대와 군인 황제 시대 사이의 패러다임 전환 자체가 과대포장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36]
율리아누스의 부제 시절 승전으로 알려진 스트라스부르 전투에서도 로마군 기병은 여전히 야만족 기병에 비해 추태를 보였고, 이를 만회하여 전투를 승리를 이끈 것은 결국 보병이었다.
[37]
그래도 이 창의 길이는 디아도코이나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은 고사하고, 그전 그리스 도시국가 팔랑크스보다도 짧았다.
[38]
이 랜스는 특히 사르마티아 유목민 출신의 기병들이 잘 다루었고 이들은 다키아 전쟁 이후 로마군에 고용되어 기병의 중핵을 이루었다.
[39]
보통 집정관 1명이 2개 군단을 지휘했다.
[40]
조동사에서 '조'를 의미하는 'Auxiliary'가 이 Auxilia에서 나왔다.
[41]
말부터가 일단 비싼 몸이며 관리하기도 쉽지 않고, 기병은 보병보다 훈련하는 데 시간이 많이 들어간다.
[42]
이런 전통(?)은 동로마 때까지 갔다. 훈족, 롬바르드, 아바르, 페체네그, 쿠만, 튀르크멘 등등.
[43]
물론 아르미니우스의 활약도 있지만 바루스의 속주화 방식은 정말 무능했다. 금이 나지 않는 게르만족에게 금으로 세금을 내라고 하지 않나 로마 문명 우월 주의를 내세워 게르만 토착문화를 억압하지 않나 불과 8년만에 정복하고 속주화 마친 카이사르가 전혀 하지 않은 온갖 짓을 골고루 다 했다.
[44]
378년의
아드리아노플 전투가 중요한 이유는 황제가 전사했다는 점도 있지만, 고트족이 그 승리로 로마와의 파워게임에서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되어 이 기존의 로마 정책을 깨고 부족 단위로 & 원래 근거지에서 가까운 바로 다뉴브 강 건너에 정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45]
콤모두스는 근위대에서 평판이 좋았고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근위대에서 평판 좋은 황제가 암살당하고 새 황제가 즉위하자 이전 황제를 좋아했을 근위대장 입장에선 불안해질 수 밖에 없는데 마땅한 보상도 없는데다 페르티낙스는 무관용에 엄격한 사람으로 유명했기에 불안감은 더 커졌을 것이다.
[46]
비단 이집트뿐만은 아니다. 다른 속주도 마음만 먹으면 다 가능했다. 현대에도 그런 경우가 종종 보이는데 행정력이 현대 수준에서 형편 없는 고대 로마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다만 황제의 사유지였던 이집트가 재산 모으기는 더 쉬웠다.
[47]
클라우디우스는 한때 해방노예 출신들로 비서실을 채웠으나, 도미티아누스는 황궁을 신축하면서 비서실을 부활시키고
기사계급들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
[48]
정치군인의 이미지가 있지만 본질은 군인이었고, 하급 병사들은 전쟁터에서 이전 시기보다 더 많이 싸우고 활약했다. 3세기의 위기 때 군단병들의 급료도 수시로 체불되기 일쑤였던 반면, 근위병들은 어쨌건 안정적인 봉급과 처우를 보장받았기 때문에 지원자의 질적 수준이 유지됐다.
[49]
정확히 말한다면 아예 버림 받은 건 아니고 근위대란 껍데기만 로마에 남은 것이지 주병력은 황제들이 차출해서 따로 편성을 했다.
[50]
현대 한국군 체계로는
군단장에 대응할 수 있다.
[51]
현대 한국군 체계로는
야전군사령관에 대응할 수 있다.
[52]
영어로는 Praetorian Prefect.
[53]
영어 위키백과의
Praetorian prefect를 보면 'the office was much reduced in power and transformed into a purely civilian administrative post(순수한 문민 행정 직위), while under his successors, territorially-defined praetorian prefectures emerged as the highest-level administrative division of the Empire. The prefects again functioned as the chief ministers of the state, with many laws addressed to them by name.'와 'Under Constantine I, the institution of the magister militum deprived the praetorian prefecture altogether of its military character but left it the highest civil office of the empire.'등의 내용이 나온다.
[54]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젖먹이는 건국설화의 늑대이다.
[55]
트라야누스 황제 말기 이 부대는 브리타니아 원주민들의 연이은 침략에 대응하여 원정에 투입되었으나 매복에 걸려 부대원들 전원이 몰살 당하고 군단기까지 빼앗겼으며 다시 편성되지 않았다는 가설이 있다. 영화
센츄리온,
이글, 소설
독수리 군기를 찾아의 배경이 바로 이 가설이다. 하지만 트라야누스 시대 이후로 네덜란드로 재배치되었다는 증거도 있어 확실한 결론을 낼 수는 없다.
[56]
바르 코크바 본인은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결국 베탈 요새가 로마군에게 함락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나 뱀에게 물려 죽었다고 한다. 바르 코크바의 머리는 잘려져 하드리아누스 황제한테 바쳐졌다고 알려졌다.
[57]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로마군 궁수들은 사실 로마인이 아니라 시리아인 궁수들이다. 특히 로마군의 궁수들은 중동 출신이 절반을 차지했을 정도로 많았다.
[58]
바타비족은 현대까지도 네덜란드인들의 시조로 인정받으며,
바타비아 공화국도 여기서 그 이름을 따왔다.
[59]
동방에서 민사작전이라도 하려면 그리스어는 필수였다.
[60]
이름과 달리 보조병 보병만을 담당했다. 이는 보조병 편제가 대대 규모까지는 로마 군단병과 동일한 편제를 따랐던 것이 그 이유로, 로마 군단병 대대는 별도의 지휘관이 없이 해당 대대의 선임 백인대장이 대대 지휘를 겸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프라이펙투스 코호르티스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적어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기부터는 있었다. 이 프라이펙투스 코호르티스들은 트리부누스 밀리툼들과 임무가 겹치다가, 갈리에누스 군제 개혁 때 트리부누스 밀리툼들이 완전한 대대장화가 되면서 사라진다.
[61]
대대장부터는 상류층의 특능인 기마술과 고등 교양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로마군에서 페르티낙스 같이 평민 병 입대자가 대대장 진급한 사례야 꽤 되지만, 대대장으로 진급하는 순간 이미 평민계급이 아니다.
[62]
더 대단한 것은 도미티아누스는 제정의 건정성을 확보하면서 군단병들의 봉급을 인상한 것이다! 도미티아누스 치세동안 로마가 수익이 많이 나는 정복 전쟁을 벌인 것도 아니고 동부속주와 서부 속주의 격차가 심각해지고 있던 시기인 것을 고려하면 가히 대단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63]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티베리우스 황제 즉위 판노니아의 도나우 군단 반란을 주도한 페르켄니우스의 '군복과 장비를 우리 봉급으로 사야한다!'라는 말에 대해 국가에서 공급해주었으니 엉터리 선동이라고 평했지만 오히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 정부가 군단병들에게 무상으로 장비를 지급해주었다는 근거없는 거짓말로 로마군을 미화한 것이다. 당연하지만 직접 군복과 장비를 공제받는 군단병들이 실제로 무상으로 보급받았다면 페르켄니우스의 선동에 넘어갔겠는가?
[64]
실제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가 이미 사용 기한이 지난 무기를 병사들이 사용하는 형편이라고 원로원에 서한을 보낸 바 있었는데, 병사의 봉급으로 무기를 교체하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3세기 중엽부터 봉급 체불이 자주 이루어져 무기 교체도 어려워지는 형편이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65]
심지어 티베리우스 황제 시기 라인강과 판노니아 군단의 파업 요구 사항 중 전역 기간을 지난 병사들에 대한 즉각적인 퇴직금 및 전역 조치가 있었음을 고려하면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손질받은 초기 로마군단의 운영 실체가 시오노 나나미의 상상처럼 이상적이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66]
물론 전장에서의 명령 불복종은 사형 내지는 그에 상응하는 최고 수위 처벌이었다.
[67]
단 이런 세부명칭에 당대인들은 그다지 집착하지 않고 그저 필룸으로 흔히 불렀다.
[68]
도미티아누스는 군단병 급여를 2배 인상해줬는데, 이 인상분의 상당수는 의무적으로 저축한 뒤 퇴직금과 함께 지급하는 방식으로 인상해줬다. 의외로 군단병들에게도 평가가 나쁘지 않았던게, 현대에도 씀씀이가 헤퍼서 저축을 잘 못하고 허송하는 타입이 꽤나 많은것을 고려해보면 국가가 반강제로라도 씀씀이를 제한해 노후 자금을 준비하게끔 해주는 체제 자체는 전혀 문제될게 없다고 생각한 듯 하다.
[69]
당시 로마 인구의 90% 정도가 문맹이었으므로 로마군은 교육 수준은 크게 문제삼지 않았지만(다만 당시 공용어인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알아야 했고 기본적인 사칙연산도 요구하였다), 체력 테스트는 철저했다. 체력이 모자라면 전투 중에 쉽게 지쳤다가 적군의 공격에 죽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입대 이후에도 수시로 체크를 했다. 모자라면 그냥
조기 퇴출.
[70]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집정관으로 오르고 나서 입안한 법안 중 폼페이우스가 제출한 동방 속주 재편안과 폼페이우스 퇴직병들을 위한 토지 분배안이 있었다.
[71]
사실 이쯤부터는 로마가 팽창정책에서 수비 정책으로 바뀌면서 퇴직금으로 나누어줄 토지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72]
69년 4황제 혼란 당시 베스파시아누스가 기존의 동방 군단에 퇴직 병사들을 재모집하여 로마로 진군한 사실은 매우 유명하다.
[73]
다만 병사가 진짜 돈을 아낀다면 30% 정도 저축은 불가능하지 않았다. 근위병은 도시 근처에 주둔하긴 했으나 평소에도 외출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혹독한 통제가 이루어졌으며, 군단병은 분위기는 좀 더 자유로웠으나 기지가 대부분 도시와 떨어진 전방에 있었다.
[74]
게르만족이 로마를 약탈하는 중요한 원인이 로마인들이 자기들보다 잘 살기 때문이었던 이상, 자기들도 잘 못사는 땅에서 더 잘사는 나라 군대가
약탈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은 없다. 그나마 포로들을 잡아 노예로 파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75]
다키아는 풍성한 금광과 은광을 자랑했다.
[76]
그러나 로마에 비하면 인구에서 압도적으로 열세였기에 로마와 맞먹는 수준은 아니었다.
[77]
하지만 그렇다고 로마가 기병 전력에서 밀린 것은 절대 아니다. 로마의 기병부대도 막강한 데다 로마군도 대기병 전술을 개발하여 맞섰기에 파르티아와 페르시아도 기병전으로 나가다가 참패한 적이 많았다.
[78]
풀스(Puls), 폴렌타(Polenta). 밀을 빻아 반죽해 구워서 빵으로 만들 시간이 없을 때 그냥 물에 밀을 넣고 끓였다. 대략 오트밀과 비슷한 형태이다. 폴렌타는 옥수수가 전래된 이후에는 옥수수 가루로 만드는 아침식사를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
[79]
신선한 우유는 그 당시 귀족이나 부자들만이 먹을 수 있는 고급 음식이었다.
[80]
군단병은 대부분 농민 출신이었으므로
치즈를 만들 줄 알았다. 치즈를 굳히는 데 필요한 레닛(Rennet) 효소는 무화과 나무 줄기에서 짜낸 즙으로부터 얻었다.
[81]
당시의 올리브유는 상당히 귀한 식자재였다. 중세 이후 남유럽에서 올리브를 대량재배하면서부터 가격이 싸졌지만 그나마도 남유럽 바깥 지역에서는 여전히 귀했다.
[82]
SHA, Hadrian X, 2
[83]
하드리아누스 황제,
大카토처럼 상류층 중에서도 건강식품 용도를 겸해서 챙겨먹는 경우가 간혹 가다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귀족이나 황제라고 해도 군생활을 하는 귀족들이거나 군대와 함께 출정 중이라면 결국 먹을 수밖에 없었다.
[84]
축제 때 고기를 먹기 위해 로마 군인들이 각자 돈을 각출하여 가축을 샀다는 기록도 있다.
[85]
유능한 군사 지휘관이었던
베르킨게토릭스는 이 사실을 이용해서 카이사르에게 물자를 공급하던 갈리아 부족들을 포섭하고 주둔지 주변의 도시를 초토화하여 카이사르에게 후퇴를 강요한 일이 있었다.
[86]
애초에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 이후로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면서 출신 민족에 관계없이 로마인 대우를 받을 수 있었고, 이후 상당수의 게르만족이 로마 시민으로서 로마군에 복무했다. 그 이전에도 하사받거나 로마 시민의 양자로 들어가 취득하는 등 여러 경로로 로마 시민권을 얻어 로마군에서 병사와 장교로 근무한 게르만족이 한둘이 아니었다.
[87]
하지만 적법한 자식, 부계 친척이 먼저 권리가 있었다.
[88]
몸 안에 박힌 납을 빼내지 못해 오염으로 죽는다거나, 더러운 수술 도구로 봉합한 부위가 썩어들어간다거나 하는 등 병사 1인에게 제공할 수 있는 의료 혜택과 시간이 부족하고 소독도 못하고 수술 도구를 써야 할 정도로 부상자의 숫자가 많았다.
[89]
그 직위를 군단 병영 사령관(praefectus castrorum) 이라고 한다.
[90]
capsarius의 복수형
[91]
당연히 이 시기에도 있었다. 한번 징집하고 끝이 아니라 많게는 17~45세 기간 1년 징집을 4~5회씩 경험하기도 했다.
[92]
물론 성분은 사람 먹을 영양소지만.
[93]
물론 당대에도 이건 지나친 처사라는 평가가 중론이라 다시 실시된 예는 없는 듯하다. 대신 전투력 유지에 필요한 위생관리 등을 제외한 개인정비를 일부 박탈하거나 노역기간을 남들은 10일 하는데 벌받는 병사들은 15일 이런 식으로 줬을 가능성이 더 높다.
[94]
이는 로마인 뿐만 아니라 전세계 만국공통이고, 인간의 본성 중 하나다. 인간은 야생에 홀로 버려질 경우, 생존력이 뛰어난 인간이라 할지라도 인간 '집단'에 비하면 생존하기가 매우 어렵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인간의 뇌에는 고립에 대한 공포가 매우 깊게 각인되어 있다. 인간이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고통받거나, 조직 내
따돌림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끼게 되는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여기에 물리적, 정신적 폭력과 학대까지 당하는 환경이라면 복구하기 어려운 정신적 외상과 후유증을 남기기도 한다.
[95]
병사는 봉급 차가 그리 많이 나진 않았지만 백인대장급만 되면 퇴직금이 반토막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피해가 컸다.
[96]
단 이 경우는 안전장치가 있어서 별도의 위로금과 적립금을 주도록 되어 있었다. 아무리 로마군이라지만 과사실 추방자와 그냥
복무 부적격자는 구분했다.
[97]
로마군도 사람 사는 곳이니 평시, 혹은 비전투 중인 전시상황에서 백인대장 지시를 불이행한다고 사형시키는 짓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장에서 전투 중에 그렇게 했다가는 부대가 붕괴되기 때문에 이때만큼은 사형이 원칙이었다.
[98]
단 자진복귀할 경우, 다른 중범죄가 없으면
사형만은 시키지 않는 게 관행으로 되어 있었다.
[99]
법적으로 제한이 없는 속주민이라 해도 십자가형의 집행은 반역의 주동자 혹은 연쇄살인마 정도나 되어야 생각해볼 만한 처형으로 인식되었다. 노예라고 해도 주인을 살해하거나 살해하려 한 당사자에게나 적용되었다.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십자가형을 마구 집행한
네로가 괜히 폭군 소리 듣는 게 아니다.
[100]
숙적으로 여겨지는 게르만족은 물론, 동방의 대제국 사산조 페르시아부터 나일강 상류의 고대 흑인왕국에 심지어 우크라이나 초원지대까지 진격해서 유목민들을 박살낸 적이 있는 게 로마다. 그 당시 존재했던 거의 모든 유형의 군대하고 다 싸워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1]
고려의 패전인
여몽전쟁도 정작 전투의 승패 비율만 놓고 보면 고려 쪽의 승리가 훨씬 많다.
[102]
일례로,
상대가 작정하고 삽질만 했던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과 일본군의 전술적 성공률 차이는 130%를 넘기지 못한다.
나치 독일과 맞섰던 서부전선에서는 미군의 전술적 성공률이 나치에 비해 70%에 지나지 않으며, 그 뒤로 이어진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군이 압도적으로 털어버렸다고 인식하는
걸프전쟁에서도 전술적 성공률 격차는 180%밖에 되지 않는다.
[103]
전술했듯이 로마군의 훈련 강도는 실전 못지 않았다.
[104]
때문에 고대 로마 제국 후기에는 군단병을 기피하고 속주병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속주병이 훈련이 덜 가혹하고 노역에도 면제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105]
전술했듯이 로마군은 봉급에서 무구, 침구, 병사들 사기 진작을 위한 부대 축제 비용등을 모조리 봉급에서 공제했다.
[106]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티베리우스 즉위 직후 발생한 게르마니아 판노니아 군단의 파업이다.
[107]
이로 미뤄보아 고대 로마의 경제와 인력 수급은 이미 축소한 규모인 군단들조차 유지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군축 정책은 결국 경제의 한계 때문에 벌어진 미봉책에 불과했던 것.
[108]
오늘날 한국군의 부조리나 인권침해가 정당화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서구 선진국 군대의 병영생활도 마냥 이상적이고 건전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