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fix]
1. 개요
Secessio plebis(평민의 분리)로마 공화국 초기 평민들이 귀족 계급에 대항하여 성산(聖山)[1]에 모여 투쟁한 사건.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총 다섯 차례 발생했다고 기술했지만 이견이 많다.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파업인 기원전 12세기 람세스 3세 시절의 이집트에서 일어난 파업 다음으로 잘 알려진 파업으로 특이하게도 어떤 단체나 기업에 소속된 노동자가 아닌 한 도시에 살던 시민 전체가 들고 일어난 파업이다.
미화와 곡필이 자주 들어가는 로마의 사건답게 모든 평민이 파업에 참가했는지는 불명이다. 후술하겠지만 심지어 참가하거나 선동한 계층이 모두 보통 평민들인지도 의문스럽다. 기본적으로 공화정 초기에 병사로 복무하는 평민은 일정 이상의 직업을 가진 중산층이며, 무산자는 징집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파업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대의 파트로누스-클리엔테스 관계를 생각한다면, 적지 않은 특정 가문 소속의 클리엔테스들이 파트로누스인 파트리키를 거역했을지도 알 수 없다.
해당 사건들 이후 차례로 평민출신 귀족인 노블레스들이 대두하는 것으로 미뤄보면 이 사건들은 모든 로마 장병들보다는 노블레스들과 노블레스를 따르는 클리엔텔라, 중산층 보병들이 주를 이룬 파업으로 보인다.
2. 배경
기원전 509년, 제7대 로마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등 귀족들에 의해 축출되었다. 이후 로마는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전환하였고, 라티움의 주변 도시국가들을 하나씩 공략하며 세력을 확장하였다. 하지만 당시 로마 내부에선 계층간 갈등이 갈수록 심해졌다. 로마의 계급은 귀족, 평민, 노예로 구성되었는데, 오직 귀족만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고, 평민들은 원로원과 집정관의 지시에 무조건 복종해야 했다. 게다가 귀족들은 평민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들이 갚지 못하면 노예로 팔거나 죽이기 일쑤였다. 잦은 전쟁으로 농사에 전념하기 힘들었던 평민들은 막대한 빚에 허덕여야 했던 반면, 전쟁을 통해 얻은 토지는 고스란히 귀족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평민들은 이런 상황에 불만을 품고, 장차 정치 판도를 뒤엎을 때를 노렸다.3. 첫번째 사건(기원전 494년)
기원전 495년 어느 날, 긴 턱수염에 낡은 옷을 입고 온몸에 상처자국이 있는 노인이 포로 로마노에 나타났다. 그가 바닥에 힘없이 누워서 구걸하자 사람들이 그에게 연민을 느끼고 먹을 것을 주었다. 노인은 시민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사비니인들과 전쟁을 치를 때 로마군 장교로서 활약했으나, 전쟁 중에 농장이 불탔고 소들은 적군에 의해 죽었다. 게다가 도저히 지불할 수 없는 세금이 부과되었고, 어떻게든 납부하려고 돈을 빌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결과 조부 대부터 물려받았던 농장을 내줘야 했고, 돈을 갚지 못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 채찍질을 당하고 노예 취급까지 받았다고 한다.평민들은 노인의 하소연에 분노해 원로원 앞으로 행진해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달라며 개혁을 요구했다. 당시 집정관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였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무력으로 폭동을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는 평민들과 타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로원 내부에서는 무력 진압과 협상을 놓고 합의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볼스키족이 로마 시를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집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원로원은 적군에 대항하기 위해 군대를 모으려 했지만, 평민들은 징집령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원로원은 세르빌리우스의 주장을 따르기로 하고, 세르빌리우스는 평민들 앞에 서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어떤 시민도 군복무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지 않는다. 시민이 전투에 참여한다면, 그의 부채 재산은 몰수되거나 팔리지 않을 것이고, 어린이와 손자들은 체포되지 않을 것이다. 감옥에 있는 채무자들은 즉시 석방하겠다."
군중은 이에 만족하여 해산하였고, 로마군이 곧 집결하여 볼스키족과 맞붙어 승리했다. 이후 평민들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인 결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외세의 위협이 사라졌으니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이유가 없다고 여겼고, 강경파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빚을 강제로 받아내고 갚지 못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투옥했다. 세르빌리우스는 이를 막으려 애썼지만 귀족들은 묵살했다. 평민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귀족들에게 원한을 품었다.기원전 494년 초, 아울루스 베리기니우스와 티투스 베투리우스가 새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들은 불스키, 사비니 등의 침입에 맞서야 했다. 그러자면 평민들을 동원해야 했지만, 그들이 응해주지 않자 원로원에 당초 맺었던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원로원이 따라주지 않으면서, 상황은 교착 상태가 되었다. 이에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독재관으로 선출되어 위기를 타파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평민들에게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약속을 지키도록 노력할 테니, 나라를 위해 부디 힘써달라"고 호소했고, 발레리우스 가문이 평민에게 무척 우호적이라는 걸 잘 알았던 평민들은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성공적으로 군대를 모집한 그는 볼스키-사비니 연합군을 물리치고 볼스키의 도시 벨리트라에를 공략하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뒤 귀환한 발레리우스는 원로원에 채무자들이 빚을 갚지 못하더라도 신체에 해를 입히고 노예로 삼는 걸 금지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발레리우스는 독재관 직임을 사임했다. 원로원은 평민들이 또 문제를 일으킬 걸 우려해, 아이퀴족이 다시 적대행위를 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그들을 그쪽으로 내보내려 했다. 그러나 평민 병사들은 루키우스 시시니우스 벨루투스의 인도하에 로마를 집단으로 떠나기로 결의하고, 아니오 강 뒤편에 있는 성산에 집결했다. 그들은 산 꼭대기에 요새를 세우고 도랑을 파, 로마와는 별도의 도시를 세우려 했다.
이로 인해 로마가 망할 지경에 몰리자, 원로원은 그제야 귀족만으로 도시를 운영할 수 없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집정관 메네니우스 라나투스 아그리파가 성산으로 가서 평민 대표들과 접견했다. 그는 로마를 신체에 비유하며, 평민과 귀족 중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죽는다며,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테니 로마로 귀환해달라고 호소했다. 평민들은 자신들이 지배층만큼 중요하다는 걸 암시하는 이 비유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양측은 곧 합의에 이르렀다. 평민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호민관이 공식적으로 창설되었고, 호민관에게 해를 입히는 자는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또한 로마 시민은 빚을 갚지 못했다는 등의 이유로 노예로 전락할 수 없었고, 채찍형을 가하는 것도 금지되었고, 전쟁터에 간 시민의 재산을 몰수하는 행위도 금지되었다.
4. 두번째 사건(기원전 449년)
로마는 건국 이래 기원전 5세기 중반까지 이렇다할 성문법이 없었다. 시민의 권리는 종교적, 전통적 관례에 따라 구두로 보장되었는데, 그 해석은 귀족으로 구성된 법원에 위임되었다. 평민들은 이러한 상황이 귀족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불리한 요소라고 여겼다. 기원전 462년, 호민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는 "테렌티우스 법"이라 불리는 법안을 원로원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5명의 시민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구성하여 성문법을 제정하게 하는 것이었다. 원로원은 처음에는 단호히 거부했지만, 평민들의 요구가 갈수록 거세지자 기원전 452년 10인 위원회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10인의 위원 전원은 귀족이었고, 법안 제정에 관한 전권을 지녔으며, 그들이 내린 모든 결정은 항소 대상이 아니었다. 대신 임기는 1년으로 제한되었다.기원전 451년 최초의 10인 위원회가 결성했다. 그들은 10개의 표로 작성된 초안을 고안하였고, 평민들은 그럭저럭 만족했다. 하지만 작업이 아직 완전히 완료되지 않았으므로, 기원전 450년에 두번째 10인 위원회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두번째 10인 위원회는 2개의 새로운 법을 넣기로 하였지만, 평민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에게 썩 유리하지 않았다. 게다가 기원전 449년 5월 말 연간 임기가 끝날 시기가 찾아왔지만, 10인 위원회는 좀처럼 사임하지 않았다. 사비니족과 에퀴니 족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문제로 이 문제는 잠시 미뤄졌지만, 전쟁이 끝난 직후에 벌어진 두 사건이 사달을 일으키고 말았다. 첫번째 사건은 10인 위원회를 비판한 전직 호민관 루키우스 시키우스가 암살당한 사건이었다. 평민들은 10인 위원회를 강하게 의심했지만, 그들은 "우린 모르는 일이다"라며 부인했다.
두번째 사건은 첫번째 10인 위원회와 두번째 10인 위원회에 모두 선출된 유일한 위원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저질렀다. 그는 호민관 루키우스 비르길리우스의 딸인 비르길리아를 사랑하였고, 비르길리우스에게 딸과 약혼하고 싶다고 밝혔다. 비르길리우스가 거부하자, 그는 비르길리아를 얻기 위해 자신의 클리엔테스와 짜고 음모를 꾸몄다. 이로 인해 비르길리아의 정절을 의심하는 온갖 악성 소문이 퍼지고, 아피우스가 힘으로 딸을 빼앗으려 들자, 비르길리우스는 손수 딸을 죽인 뒤 이 죽음을 초래한 아피우스를 공개적으로 저주했다. 시민들은 이 사건에 분노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도시 외곽의 아벤티누스 언덕을 장악하여 농성하였다.
한편, 로마 시에서는 10인 위원 중 한 명이 소집한 원로원이 해결책을 논의했다. 3명의 전직 집정관이 아벤티누스 언덕으로 찾아가 요구사항이 무엇인지 물어봤지만, 평민들은 원로원 대표자들에게만 전달하겠다며 거부했다. 원로원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10인 위원회에게 사임하라고 압박했지만, 그들은 거부했다. 사태가 좀처럼 해소되지 않자, 평민들은 성산으로 이동하여 두번째 도시를 세우기로 결의했다. 이 소식을 접한 원로원 의원들은 위원들이 이 중대한 상황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며 당장 사임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특히 이러한 압박을 적극적으로 한 인물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와 마르쿠스 호라티우스였다. 결국 10인 위원회는 군중의 분노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사임하기로 하였다. 이후 원로원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와 마르쿠스 오라길리우스를 성산으로 보내 요구사항을 들어줄 테니 로마로 귀환해달라고 하였다.
양측의 협상 결과 호민관의 권한과 항소권을 인정하기로 합의하였고,평민들은 로마로 돌아가서 비르길리아의 아버지, 약혼자, 외삼촌을 포함한 호민관들을 선출했고, 루키우스 발레리우스와 마르쿠스 오라길리우스가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이 제정되면서, 사건은 막을 내렸다.
고대 로마의 초기 역사는 항상 섹스 스캔들에 수반되어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 역시 섹스 스캔들을 통한 전개와 결말이 타르퀴니우스를 내쫓을 때와 매우 흡사하단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이쪽 파업은 신화에 가까우며 모두 진실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5. 세번째 사건(기원전 445년)과 네번째 사건(기원전 342년)
12표법은 두번째 성산 사건을 종결시켰지만 세번째 사건을 야기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2표법의 규정 중에 귀족과 평민간의 결혼이 금지되어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445년, 호민관 가이우스 카눌레이우스는 이 법을 폐지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낮은 출신이었던 로마인들의 많은 공헌을 상기시키면서, 평민들도 집정관이 될 수 있도록 법을 바꿔야 한다고 제안했다. 귀족들은 이에 격렬히 반대했는데, 그중 한 집정관이 "혼혈인 자녀들은 신들의 불쾌감을 살 수 있다"라고 발언했다. 이에 분노한 평민들은 마침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도시를 방어하는 걸 거부하고, 성산으로 가서 농성했다. 결국 집정관들은 압박에 굴복하였고, 귀족과 평민 사이의 혼인에 대한 금지는 폐지되었다. 역사가 리비우스에 따르면, 평민들이 집정관에 입후보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안은 표결에 부쳐지지 않았다. 그 대신 집정관으로 선출될 권한이 주어지는 집정 무관은 귀족과 평민 모두 선출될 수 있다는 타협안이 받아들여졌다.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리비우스의 설명이 신빙성이 별로 없다고 본다. 기원전 5세기부터 아우구스투스 통치 시기까지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최고 행정관 목록을 담은 파스티 카피톨리니(Fasti Capitolini)에 기원전 444년부터 기원전 401년까지 43년간 플레브스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이후에도 '집정관과 유사한 권한을 갖춘 호민관'에 뽑혔다는 이들 중 플레브스는 소수였다. 학자들은 집정관 2명이 나라를 다스리는 공화정 체제에 익숙했던 리비우스가 과거 로마에서 어느 순간부터 집정관 대신 무관들이 대거 등장한 이유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서 파트리키와 플레브스의 대립으로 생겨났다는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본다.
로마 공화국은 기원전 5세기에 라티움 일대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며 주변의 부족 및 도시 국가들을 하나둘씩 제압했지만, 주변국들의 저항이 갈수록 거세지면서 집정관 2명만으로는 전쟁을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일례로 기원전 458년 로마 동쪽 지역에 거주하는 아이퀴족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출진한 루키우스 미누키우스 에스퀼리우스 아우구리누스가 알반 언덕에서 아이퀴족에게 포위당했을 때, 또다른 집정관인 가이우스 네우티우스 루틸루스는 아이퀴족이 탈환을 시도할 것으로 예상된 투스쿨룸에 보내졌기 때문에 동료 집정관을 제때에 구할 수 없었다. 원로원은 급히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킨킨나투스를 독재관으로 선출했고, 킨킨나투스는 로마에 남아있던 장정들을 대거 징집한 뒤 알반 언덕으로 달려가 적을 물리쳤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런 임시방편으로 일관할 수는 없었고,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군대를 통솔할 지휘관의 수를 대폭 늘려야 했다. 집정 무관은 이런 상황에서 자연히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가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342년 평민 병사들이 성산에 모여들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전혀 밝히지 않았고, 다른 역사가들 역시 이 사건을 전혀 언급하지 않아서, 실제로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사실 귀족과의 통혼을 원한 건 다수의 일반 평민보다는 부유한 소수의 평민층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로서는 그것이 부유한 평민에게 있어 신분 상승이 가능한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12표법으로 새삼스럽게 그것이 금지되었다는 것 자체가 그전부터 귀족들과 유능하거나 부유한 소수 평민 사이의 통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방증이 된다. 때문에 반란을 선동한 계층은 파트리키들의 사다리 걷어차기에 분노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무장한 중장 보병을 다수 동원한 보면 이미 상당수의 클리엔텔라들을 거느렸을 것이니, 반란 지도층은 평민보다는 신흥 귀족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역사를 구전한 문화 계층 - 파트리키 입장에서야 신흥 귀족 역시 평민과 다를것이 없었을 터이다.
6. 다섯번째 사건(기원전 287년)
기원전 290년, 집정관 마니우스 쿠리우스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사비니족을 물리치고 리에티 평원과 아미테르눔 평원을 정복했다. 그러나 이 평원은 귀족들에게만 분배되었고, 평민 농부들은 빚을 갚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평민들은 항의의 표시로 파업을 선언했지만, 이번에는 성산으로 가지는 않고 야니쿨룸 언덕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호민관 출신의 퀸투스 호르텐시우스가 독재관으로 선출되어 평민들을 설득해 로마로 귀환하도록 하였다. 그 후 그는 호르텐시우스 법을 공포했다. 이 법에 따르면, 민회에 의해 결정된 법률을 원로원이 거부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평민의 지위는 강화되었고, 장차 거대한 재산과 영향력을 구축하여 기존의 귀족과 맞먹는 위세를 떨치게 될 노빌레스가 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1]
현재 이탈리아 로마 몬테 사크로(Monte Sac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