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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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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이 속주들에는 전직 법무관이 파견됨. 그러나 호칭은 여전히 프로콘술. }}}}}} }}}}}}}}}

파일:그라쿠스 형제.jpg
역사상 가장 유명한 호민관, 그라쿠스 형제

1. 개요2. 역할과 선출3. 역사
3.1. 쇠퇴
4. 미디어5. 기타

1. 개요

호민관(護民官, tribunate)은 로마 제국의 관직 중 하나로, 백성()을 지키고 돕는() 업무를 맡는 평민 대표 직책이다.

로마의 언어인 라틴어로는 Tribunus Plebis인데, 직역하면 '평민(plebis)의 대족장(tribunus)'이다. tribunus는 로마 건국을 주도한 3대 부족의 족장들을 일컫는 낱말이었는데[1], 로마 공화정이 성립되고 해당 족장들이 그대로 원로원 귀족의원으로 들어간 이후로 잘 쓰이지 않아 사어(死語)가 되어가던 표현이었다. 그런데 이 단어가 꼭 3명이 아니더라도 군대, 또는 어떤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공무원을 가리키는 뜻으로 전의되었다. tribunus가 이러한 용례로 쓰인 다른 예시로 로마군 대대급 부대의 지휘관을 일컫는 ' Tribunus Militum(군인들의 트리부누스)'이 있다. 또한 로마의 국고(aerarium)을 관리하는 공무원을 tribunus aerarii(국고의 트리부누스)라고 불렀으니, 이 단어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2. 역할과 선출

호민관은 민중을 보호하기 위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상 독립된 입법권, 사법권을 가지고 있는 데다 집정관에 대한 거부권까지 행사할 수 있었고, 법으로 보장된 신변불가침권까지 갖고 있었다. 따라서 10명의 호민관 중 한 명만 변심하면 나라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법안을 입법하고, 유력 정치가를 고발해서 평민집회에서 열리는 법정에 세울 수 있었으며, 또한 집정관, 혹은 다른 호민관들의 입법을 거부하여 정국을 마비시킬 수 있었다. 단, 호민관은 언제 어떤 사람의 탄원이든 들어줘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집의 대문을 잠글 수 없었고, 민회의 사전 허가없이 로마 성벽 밖으로 벗어나서도 안 되었다.

민회에서 선출되며 평민 계급을 대표한다. 오직 평민만이 선출될 수 있었다. 한 번의 선거에 10명이 선출되었고 신체에 대한 신성불가침권을 가지며, 민회를 통해 법률을 제정할 수 있고, 원로원의 결의에 거부권을 가지는 등 상당히 강력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또 호민관으로 선출되면 다음에 원로원 의원 후보 자격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법무관 선거에 출마할 자격을 얻게 된다.[2] 호민관 바로 위의 법무관 때부터 총독의 직무가 주어졌고 또한 때때로 군사 지휘권까지 행사할 수 있었으므로 호민관의 직위는 상당히 높은 자리였다. 따라서 호민관까지 올라갔다면 입신출세를 어느 정도 이룬 것이나 다름없었다.

호민관이 평민의 대변인이긴 했으나, 임기를 마치고 나면 사실상 자동으로 원로원 의원이 되어 귀족과 동등한 예우를 받았으므로 대부분의 호민관들은 어차피 임기 끝나면 한솥밥 먹을 귀족들을 그렇게 강경하게 공격하지는 않았으며, 출세에 관심이 없던 강경한 호민관들도 소수 있긴 했지만 이런 호민관들은 귀족들이 부리는 정치깡패에게 맞아죽거나 아예 사법살인을 당하는 등 한계가 명확했다.

3. 역사

로마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고 15년 후인 기원전 494년 성산 사건 이후 처음 만들어진 오래된 선출 관직이다. 처음 호민관으로 선출된 사람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3]와 루키우스 알비니우스 파테르쿨루스였고 공화정 초창기에는 2명의 정원으로 운영되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 최종적으로는 10명의 정원이 됐다.

호민관이 생기게 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로마가 아직 도시국가 였던 시절에는 부족제의 전통이 남아있었고 부족장의 후예인 귀족 당주에겐 막강한 권력이 있었으며 부족원 출신 평민들은 귀족들의 비호를 받는 동시에 정치적으로 귀족들을 지지해줬기 때문에 부족원 출신이 아닌 절대 다수의 평민들에게는 당연히 모든 것이 불리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고등교육을 비싼 가정교사가 담당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난한 평민들이 귀족에게 대항해서 정치적으로 뭔가를 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런 평민들은 수가 많은데다 병역의무자들이라 계속 불만이 쌓이게 두면 전쟁터에서 파업을 하거나 폭동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래서 온건파 귀족들이 평민들을 달래기 위해 평민들의 뜻을 하나로 모아 총체적으로 대변해줄 수있는 신변 불가침의 관직을 신설하겠다고 한 결과가 호민관인 것이다. 물론 뭐든지 미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로마 전설에서는 신성후퇴사건을 통해 한꺼번에 이러한 권한을 얻어낸 것으로 나오지만... 즉, 원로원이 알아서 이런 직책을 설치해주는 대인배적인 결정을 했다고 은근히 띄워주었다는 말이다.

상술했듯 몇가지 제약이 있긴 했지만 집정관과 맞먹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그라쿠스 형제 이전까지는 호민관들의 권한 사용은 그다지 과감하지 않았다. 호민관 임기가 끝나면 원로원 의원이 되는 심사를 받는데 미래의 식구이자 대선배인 원로원과 대립각을 세우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호민관들은 기득권 세력에게 반기를 들 생각을 하지 않았고 사실상 공화정 인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려는 용도로 원로원의 나팔수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라쿠스 형제는 호민관을 보는 시각이 좀 달랐다. 이들은 호민관을 '원로원 의원 후보군'이 아닌 '평민으로부터 선발된 독립된 정치 주체'라는 발상의 전환을 하며 로마 공화정의 정치 메타를 180도 바꿔버린다. 선배 호민관들이 약속된 원로원 자리에 안주했던 것을 답습하지 않고, 체제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호민관의 권한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또한 호민관의 태생적 약점은 1년에 불과한 짧은 임기 때문에 아무리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어도 한 해가 지나면 도로아미타불이 된다는 것이었는데, "아니, 이렇게 좋은 자리인데 왜 더 안 함? 임기 끝나면 연임하면 되는 거 아님?"(...)라는 심플한 방법으로 이 약점 역시 돌파해버린다.[4]

그라쿠스 형제가 호민관의 권한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자 호민관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실로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호민관 개개인은 법률상으로 로마 공화정의 최고통치자인 집정관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로마 공화정 정계는 해마다 10명이나 되는 집정관급 권력을 가진 호민관들의 난입이라는 기이한 양상이 되었으며, 결국 공화정 말기의 불안정한 정국의 원인이 되었다.

그라쿠스 형제 이후로 호민관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파가 등장하였고, 민중파들은 호민관의 권한을 사용하여 원로원과 대결하는 일을 자주 벌여 정국을 소용돌이에 빠뜨리게 된다. 기본적으로 호민관은 갓 정치를 시작한 풋내기가 역임하는 자리이며 이런 이들끼리만 10명이 모여있기에 의욕만 앞섰고 커다란 그림을 그린다거나 원로원 및 집정관 등 선배 정치인들과 긴밀한 교섭을 통한 합리적인 민생 개혁 따위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호민관들은 평민들에게 인기는 있을지언정 대부분이 공화정 전체를 조율할 만한 정치적 역량이 떨어지는 젊은이들인지라 공화정의 혼란과 몰락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럼에도 어울리지 않게 막강한 권력이 주어졌으니, 호민관 제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부작용을 야기하는 것은 당연했다.

3.1. 쇠퇴

훗날 독재관 술라자신에게 폭탄을 떠넘긴 선조들을 욕하며총대를 메고 민중파를 때려잡고 호민관의 권한을 축소하는데 성공했으나, 이는 술라가 세상을 떠난 뒤 모두 원래대로 복구되어버린다. 그 이후에 등장한 유력 정치가들인 폼페이우스, 카이사르들은 술라처럼 호민관들을 견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매수하거나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 원로원과 대결하는 수단으로 삼았을 뿐이었다. 대표적으로 카이사르의 수족이 되었던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등이 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정권을 잡자 호민관은 명목은 남아 있었지만 집정관 이상으로 눈에 띄지 않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호민관의 신체 불가침권과 법률 제정권[5], 원로원 결의 거부권 등의 권한을 호민관 특권(tribunicia potestas)이라는 이름으로 가져가버렸기 때문이다.

호민관의 권리란 결국 원로원의 결의에 대한 거부권+평민 집회를 통한 입법권+신체 불가침권으로 구성되는데... 원로원 결의에 대한 거부권이란 로마의 최고 입법 기구이자 정책 의결 기구로써 현대로 치면 의회+내각 정도에 해당하는 원로원의 결정을 임의로 뒤집어버릴 수 있는 권리인 셈이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백성들이 제국 전역에 퍼져 있던 제국 시대에 평민집회를 통한 입법권이란 체계적인 투개표를 통한 여론 수렴이 아니라, 일정 수의 지지자를 모아 "옳소! 재청합니다!"라고 외치는 집회를 열어 자신이 원하는 법이나 정책을 '명령'할 수 있는 권리나 다름이 없었다. 황제가 그 정도의 사람을 끌어모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마지막으로 호민관에 대한 공격을 반역으로 취급하는 신체 불가침 특권은 왕의 주권면제나 다름없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어떠한 짓을 해도 처벌받지 않고, 자신을 해치려는 시도를 반역과 마찬가지로 처벌할 수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정책이나 법을 사실상 제한 없이 실행할 수 있고, 자신이 원치 않는 정책이나 법은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이다. 이 정도의 권한이면 왕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로마 황제가 가진 권력 자체가 이런 왕이나 다름없는 호민관의 권한에 이 권한을 밀어붙이기 위한 추진력으로 최고사령관 권한[6]을 더한 것 뿐이다.

황제는 임페리움(최고통수권), 호민관 특권을 세습하였다. 로마 황제의 정식 명칭 기록법에는 이름 뒤에 "호민관 특권 몇 회 갱신"이라는 항목이 들어간다. 황제에게 호민관이 흡수된 것이다. 호민관은 유명무실해졌지만, 공화정이 지속되는 것처럼 보이기 원했던 아우구스투스는 호민관 직을 존치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 때 이마저도 폐지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4. 미디어

로마 시대를 다룬 헐리우드 고전 영화[7]에 보면 젊은 남주인공이 호민관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이 항목에서 설명한 큰 권력을 가진 호민관이 아니라, 트리부누스 밀리툼(tribunus militum)의 오역이다. 이들은 군단의 하위부대인 코호르스(cohors)의 지휘관이라 하여,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대대장으로, 신약성경에는 천인대장(천부장)으로 번역되었다.[8]

Tribunus plebis와 tribunus militum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단어 tribunus는 본래 지휘관, 부족장 등의 의미를 갖는 라틴어다. [9] 로마 공화정 초기에 집정관을 일시 대체했던 관직 집정 무관의 원어가 tribunus militum consulari potestate이다. 따라서 tribunus plebis는 '평민의 장'이라는 의미에서 호민관이 되는 것이고, tribunus militum은 '호민'과 전혀 상관없는 '병사들의 지휘관'이라는 의미밖에 없다. 즉, 호민관이라는 번역어에서 '호민'에 해당하는 의미는 plebis에 들어가는건데, 그것과 관계가 없는 tribunus militum이 '군사 호민관'이라는 엉뚱한 단어로 번역되고 있는 것이다.

이 중급 장교가 아니라 진짜 호민관이 나오는 대중 매체는 다큐멘터리를 제외하면 찾아보기 어렵다. 몇 안되는 예외는 HBO의 ROME으로 극 초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호민관으로 취임한다. 여기서는 People's Tribune이라고 제대로 된 영어 번역을 사용한다.

5. 기타


[1] tribunus란 단어는 tribus+nus의 조합인데, 여기서 tribus가 초기 로마의 3대 부족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nus는 '~과 관련 있는 것'이란 뜻을 부여하는 접미사. 그러니까 어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tribunus는 '3대 부족과 관련 있는 무언가'라는 뜻이 된다. 이를 세 부족의 족장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했던 것이다. [2] 즉, 귀족이 되어버린다는 얘기. 실제로 로마의 귀족은 역사 초기부터 귀족이었던 자들과 이런 루트로 평민에서 귀족으로 올라간 자들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원로원 의원이 발언 전에 했던 인사말인 아버지들이여 그리고 신참자들이여(요새 표현으로 "존경하는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신참자'를 뜻하는 라틴어 Nobilis에서 영어의 '귀족'을 뜻하는 Noble이 온 것이다. [3]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집안인, 공화정 중기 이후 로마 공화정기를 대표한 노빌레스 중 하나인 리키니우스 가문 사람이다. 리키니우스 가문은 에트루리아계 로마 귀족가문으로, 가문의 역사를 에트루리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어떤 귀족 가문보다도 오래됐던 명문가 중 하나였지만 로마 편입 후 평민에 속했다. [4] 이전까지는 전부 호민관을 하다 장래가 탄탄히 보장된 원로원의 의원(정식귀족)이 되는 길을 택해서 굳이 연임금지 조항도 두지 않았다. 그라쿠스 형제가 이 빈틈을 노린 것. [5] 즉, 입법권 [6] 로마군에 대한 통수권 [7] 벤허, 쿠오 바디스, 성의 등등... [8] 사실 대대장이나 천인대장도 흔히 대대/천인대로 번역되곤 하는 코호르스의 지휘관이라는 데 포커싱을 맞춘 것이라 올바른 번역이 아니다. 애초에, 엄밀히 따지면 트리부누스 밀리툼은 코호르스의 지휘관도 아니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코호르스는 군단당 10개인데 트리부누스 밀리툼은 6명이라 숫자상으로만 봐도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트리부누스 밀리툼은 실제로 3세기 군제개혁 이전까지는 군단장의 참모장교 역할을 맡았으며, 코호르스의 지휘는 해당 코호르스 내의 최선임 백인대장이 맡았다. 단 신약성경의 천인대장은 라틴어가 아니라 그리스어 χιλίαρχος를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만 보면 오역은 아니다. [9] 스타크래프트 프로토스의 최종테크 건물 격인 아비터 트리뷰널의 '트리뷰널(Tribunal)'도 이 뜻이다. [10] 근대 이전만 해도 선거에 있어 당연시되는 원칙들이 전혀 없었다. 즉, 이 시대에는 선거에서 돈 안 뿌리는 놈이 바보였으며 사실 금품을 뿌릴 재력이 없다면 출마란 시간낭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