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정치제도| 고대 로마의 관직 Cursus Honor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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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의 관직. 로마 시민의 인구조사를 실시하고 공공 도덕을 유지하며 공공 건물을 보수하고 새로운 공공 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필요한 재정을 관리하는 정무관. 집정관, 법무관과 함께 3대 정무관 중 하나로 취급되었다.2. 기원과 발전
로마 왕국 시기, 인구조사는 왕이 주관하는 정책이었다. 마지막 국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축출된 뒤 수립된 로마 공화국 초기에도 국왕의 권력을 대신하기 위해 창설된 집정관이 인구조사를 주도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기원전 443년 플레브스 계급의 거센 요구로 인해 '집정관 권한을 가진 호민관'( 집정 무관)이 설립되어 플레브스들이 고위 행정관에 오를 길이 열리자, 파트리키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인구조사를 실시할 권한을 집정관에서 빼내어 새로 신설한 관직인 감찰관으로 옮기고, 오직 파트리키만이 감찰관이 될 수 있다고 못박았다고 한다.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리비우스의 서술은 신빙성이 거의 없다고 간주하고 있다. 기원전 5세기부터 아우구스투스 통치 시기까지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최고 행정관 목록을 담은 파스티 카피톨리니(Fasti Capitolini)에 기원전 444년부터 기원전 401년까지 43년간 플레브스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이후에도 '집정관과 유사한 권한을 갖춘 호민관'에 뽑혔다는 이들 중 플레브스는 소수였다. 학자들은 집정관 2명이 나라를 다스리는 공화정 체제에 익숙했던 리비우스가 과거 로마에서 어느 순간부터 집정관 대신 무관들이 대거 등장한 이유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서 파트리키와 플레브스의 대립으로 생겨났다는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보며, 집정 무관은 집정관 2명으로는 사방에서 전란이 끊이지 않는 상황을 수습하기 곤란하기에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군대를 통솔할 지휘관의 수를 대폭 늘리기 위해 도입되었다고 추정한다.
많은 학자들은 감찰관이 설립된 것 역시 파트리키와 플레브스의 계급 투쟁의 산물이 아니라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집정관과 집정 무관들이 전쟁을 치르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인구조사를 실시할 겨를이 없고, 병력을 항시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구조사를 반드시 정기적으로 실시해야 했기 때문에 이를 전문적으로 맡을 관직을 별도로 창설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창설된 감찰관은 2명의 귀족이 맡았다. 감찰관을 2명으로 정한 것은 이전에 2명의 집정관이 인구조사를 주관했기에 이를 본뜬 것이다. 감찰관은 초기에는 필요할 때만 신설되는 임시 관직이었지만 나중에는 5년마다 켄투리아회(comitia centuriata: 백인대장 민회)의 투표로 선출되었다. 두 감찰관은 같은 날에 당선되어야 했기에, 한 감찰관의 당선이 확정되더라도 다른 감찰관이 당선되지 않은 채 하루가 가 버리면 다음날 선거를 다시 했다고 한다.
임기는 본래 5년을 꽉 채우는 것이 당연했지만 기원전 434년 독재관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가 18개월 내에 임무를 달성하는 것을 권장하는 법안을 반포하면서, 중도에 직임에서 물러나는 사례가 부쩍 늘어났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본래 두 감찰관 중 한 명이 죽으면 다른 한 명이 임기를 이어가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하필 그런 사례가 기원전 390년 브렌누스의 로마 약탈 직전에 벌어졌기 때문에 "신들이 감찰관 한 명이 홀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관념이 생겼고, 이후에는 감잘관 한 명이 모종의 이유로 죽어버리면 남은 한 명은 무조건 사임해야 했다고 한다.
또한 감찰관은 오직 파트리키만 맡았지만, 기원전 352년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가 평민 최초로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많은 귀족이 이에 반발했지만, 루틸루스가 이전에 독재관을 맡아 로마 코앞까지 침투한 에트루리아인들을 물리쳤고 집정관을 4번이나 역임할 정도의 거물이었기 때문에 이를 무마할 수 있었다. 이후 기원전 339년 집정관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가 제정한 <렉스 푸블리아 필로니스(Lex Publilia Philonis)>에 의해 감찰관 1명은 플레브스가 반드시 맡아야 한다는 규정이 신설되었다.
감찰관은 본래 인구조사를 실시하는 것 외엔 이렇다할 권한이 없었기에 권위가 떨어졌지만, 기원전 312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가 감찰관에 선임된 후 상황이 바뀌었다. 아피우스는 로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파트리키 가문으로 손꼽히는 클라우디우스 씨족을 등에 업고 역대 감찰관 중 로마를 획기적으로 바꾼 인물로 손꼽힐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로마 최초의 포장도로인 아피아 가도, 수도교인 아피아 수도교 건설 및 관리, 감독 그리고 제2차 삼니움 전쟁 수행 과정에서 건의한, 라티움과 캄파니아 전역에 삼니움인과 에트루리아에 대한 공세를 막기 위해 요새화된 로마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또한 로마 시민권을 확대하고 외국인의 귀화조건의 유연화, 평민 투표권 보장, 재판 변호권 보장, 고문 금지, 평민과 해방노예 후손들의 관직 진출 장려 등 계급간의 갈등을 축소하고 로마 사회를 진보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아피우스는 이 광범위한 개혁을 수행하기 위해 5년 동안 직위를 유지했다. 그 후 감찰관은 인구조사 외에도 여러 정책을 독자적으로 수행하게 되었고, 로마 공화국에서 강력한 권위를 누렸다.
3. 역할
감찰관의 임페리움은 군대를 임지에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군단을 지휘할 권한이 인정되지 않았고, 수석 조영관, 법무관, 집정관, 독재관 등 다른 고위 행정관들에 비해 릭토르(Lictor)를 한 명도 대동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성기엔 집정관을 능가하는 권위를 누렸다. 그들은 "신성한 행정관"(sanctus magistratus)으로 일컬어지며 다른 원로원 의원들보다 상위의 대접을 받았고, 집정관, 법무관과 더불어 셀라 큐루일스(sella curulis: 두 쌍의 청동 다리가 받치는 접이식 의자)에 앉을 수 있었고, 보라색 줄무니가 있는 토가인 '토가 프라이텍타(Toga Praetexta)'를 착용할 수 있었다. 감찰관을 지낸 인물의 장례식은 다른 정무관을 지낸 이들보다 훨씬 화려하게 치러졌기에, "감찰관의 장례식"(funus censorium)이란 용어가 생겼다.감찰관의 기본 임무는 단연 인구조사였다. 그들은 로마와 지방 도시에 있는 모든 로마 시민의 명단을 갱신하기 위해 마르티우스 광장에 세워진 '빌라 푸블리카(Villa publica)' 회랑에서 로마 장정들을 소집했다. 감찰관들은 초기엔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인구조사를 실시했지만, 나중에는 그동안 쌓인 판례를 집대성한 <인구조사법(leges censui censendo)>을 따랐다. 이 법은 인구조사 대상이 되는 여러 종류의 재산과 그 가치를 추정하는 방법에 대해 언급한 특정 규칙을 정했다.
각 시민은 자신이 속한 부족과 전체 이름, 아버지, 후원자 또는 피후원자, 아내, 자녀 등 가족의 신상명세, 토지, 목초지, 포도원, 노예, 가축 등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재산을 일일이 밝혀야 했다. 인구조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자는 시민의 자격이 없는 자로 간주되었다. 최악의 경우엔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국가에 의해 노예로 팔릴 수 있었다. 인구조사에 불응한다는 것은 병역 의무를 준수하지 않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여겨졌기에, 전쟁을 일상처럼 치러야 했던 로마 정부로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인구 조사가 완료되었을 때 감찰관 중 추첨으로 선택된 한 명이 마르티우스 광장에서 희생양을 제단에 바치고 불로 정화하면서 신들에게 기원하는, 루스타티오(lustratio)로 알려진 종교 의식을 거행했다.
감찰관은 인구조사 과정에서 도덕 기준에 어긋나는 행위를 일삼거나,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거나, 빚이 많아서 현재 계급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이들의 사회적 위치를 강등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강등된 이들은 '아에라리우스(aerarius)'로서 로마 시민 중 최하위 계급으로 낙인찍혔고 다른 시민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내야 했다. 이 낙인은 종종 정치적 보복으로 사용되었다. 가령 감찰관의 임기를 18개월로 사실상 축소시킨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는 독재관에서 물러난 직후 감찰관에 의해 아에라리우스로 강등되었다. 기원전 204년 공동 감찰관이었던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는 서로를 부도덕한 자라고 비난하며 아에라리우스로 강등시키려 했지만 원로원의 만류로 실패했다.
감찰관은 원로원의 명단을 갱신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위배되는 행위를 저질렀거나 사치를 심하게 부려서 빚을 많이 졌거나, 파당을 결성해서 사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등 원로원 의원으로서의 자격에 미달한다고 간주되는 자들을 의원직에서 배제할 수 있었다. 이 결정은 절대적인 것이었기에 누구도 번복할 수 없었고, 다른 감찰관이 명단에 다시 넣어주기를 기원해야 했다. 이 권한 때문에, 감찰관과 호민관은 공화정 내내 빈번하게 충돌했다. 보수적인 귀족들이 주로 맡았던 감찰관은 개혁안을 종종 도출하는 호민관을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무리'로 간주했고, 호민관 역시 자신이 임기를 마친 뒤 원로원 의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좌지우지하는 감찰관을 곱게 보지 않았다. 이로 인해 감찰관이 전직 호민관을 의원직에서 제명해버리고 호민관은 전직 감찰관을 탄핵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또한, 감찰관은 에퀴테스 중 누가 국가 소유의 말을 소유했는지를 조사하고, 그들이 부적합하다고 여겨질 경우 말을 압수하고 참정권을 박탈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국가의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광산, 숲, 강을 포함한 공공 재산을 임대하고, 도로, 도서관, 목욕탕 등 공공 사업을 감독하며, 지방 및 항만세( portoria ) 및 공공 재산( vectigal ) 으로부터의 수익을 징수한 공공 계약자( publicani )와의 계약을 갱신했다. 감찰관이 최고 입찰자에게 계약을 맡길 수 있었고, 때로는 세금 징수권을 경매에 부치기까지 했기 때문에, 감찰관이 이권을 챙기기 위해 부당한 결정을 내리거나 뇌물을 받아먹고, 감찰관 간의 이권 경쟁이 벌어지는 등 여러 부작용이 있었다.
감찰관이 맡은 임무 중 가장 숭고한 임무로 취급된 것은 단연 공공 도덕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법규를 지키지 않는 것 외에도 도덕에 어긋나거나 미풍양속에 해를 미치는 자들을 처벌할 권한을 보유했다. 기원전 184년 감찰관을 맡은 대 카토는 '사치'와 '타락'이라는 이름의 히드라의 머리를 베겠다고 선언하고, 로마 시민에게 부과되는 소비세를 대폭 인상해 사치품과 가정 노예에 대한 지출을 제한하게 했다. 그는 사람들이 농지를 위해서보다 남성 매춘부를 위해, 농장 노동자들을 위해서보다 식탁의 진기한 요리를 위해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는 현실에 개탄하면서, 자신은 이 잘못된 풍조를 바로잡기 위해 이 법을 제정했다고 밝혔다. 그 결과 1500 데나리온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의류, 마차, 여성 장신구, 가정용품에 대해 매겨지는 세금이 10배나 폭증했으며, 유사한 세금 부과 방식이 1200데나리온 이상에 구입한 모든 노예에 적용되었다. 이외에도 여러 감찰관이 사치 풍조를 뿌리뽑겠다고 선언하고 사치 금지 정책을 실시했지만, 포에니 전쟁 이후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로마 사회에 만연해진 사치 풍조는 개선되지 않았다.
4. 쇠락
일설에 따르면, 기원전 82년 술라의 내전에서 승리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감찰관을 폐지했다고 한다. 신뢰할 만한 고대 사료나 공문서 등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없어서 신빙성이 부족하지만, 술라의 집권 이래 감찰관이 오랫동안 세워지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부 학자들은 술라와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도덕을 엄격하게 준수할 것을 강조하고 원로원 의원직을 좌지우지하는 감찰관을 불편하게 여겼기에 일부러 감찰관을 세우지 않았으리라 추정한다.기원전 70년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와 루키우스 겔리우스가 10여년만에 감찰관에 선출된 뒤 전체 의원의 1/8인 64명을 원로원에서 제명했다. 이는 역대 감찰관 중 가장 많은 수치였다. 테오도르 몸젠은 이에 대해 두 사람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구축한 체제를 해체하고 자신들의 이권을 관철시킬 새 체제를 구성하길 희망했던 당해 집정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의중에 따랐을 것이라 추정했다. 또한 두 감찰관은 동맹시 전쟁 중에 공식적으로 로마 시민권을 받은 이탈리아인들을 처음으로 포함시킨 시민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91만 명에 달하는 시민이 확인되었다.
기원전 58년 호민관에 선임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는 감찰관의 권한을 규제하는 법안을 제정했다. 그는 앞으로는 감찰관의 결정이 원로원의 검토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최근에 원로원에 입성했으나 감찰관에게 추방될 위험이 있는 상당수 사람들의 지지를 확보하고자 했다. 이 법은 기원전 52년 집정관 폼페이우스와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시기에 폐지되었지만, 감찰관은 이후로 이전의 권력과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뒤이은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에 감찰관은 선출되지 않았고, 정적들을 물리치고 영구 독재관이 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의 권력을 제약할 수 있는 감찰관을 두지 않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후인 기원전 42년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와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가 감찰관에 선임되었으나 자리만 차지했을 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후 20여년 간 세워지지 않던 감찰관은 기원전 28년 로마 내전의 최종 승자인 아우구스투스와 심복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게 돌아갔고, 기원전 23년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와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감찰관에 선임되었으나 역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 이래 역대 황제들은 프라이펙투라 모룸( Praefectura Morum: 도덕 장관)을 신설해 미풍양속을 해치는 악습을 단속하게 하고, 인구조사를 자신이 실시하는 등 감찰관의 권한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이리하여 껍데기만 남은 감찰관은 일종의 명예직이 되어 드문드문 세워지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군인 황제 시대의 황제 데키우스는 249년 10월 필리푸스 아라부스를 무너뜨리고 로마에 입성하여 황제에 오른 뒤 감찰관을 부활시키겠다고 선언했다. 감찰관을 부활시켜야만 공공의 용기, 고대의 원칙과 풍습, 추상같은 법률의 권위를 회복시킬 수 있다며 원로원 의원들에게 감찰관을 부활시킬 것을 건의했다. 그는 원로원에게 감찰관 선출을 맡겼고,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발레리아누스를 선출했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는 황제의 크나큰 신임에 감사를 표시하면서도 자신이 무능해 시대의 부패상을 고칠 수 없으며, 감찰관은 황제의 위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신하의 신분으로 그런 엄청난 직무와 권한을 맡을 수 없다며 거부의 뜻을 밝혔다. 데키우스는 2년 후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전사했고, 이후 감찰관은 두 번 다시 거론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