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 라틴어: Quintus Fulvius Nobili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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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아버지)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형제)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53년 |
전임 |
퀸투스 오피미우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
동기 | 티투스 안니우스 루스쿠스 |
후임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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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2. 생애
4세기 중반에 투스쿨룸에서 로마로 이주한 뒤 기원전 322년에 처음으로 집정관에 오른 후 여러 집정관을 배출한 노빌레스 가문인 풀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증조부인 세르비우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는 기원전 255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아버지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는 기원전 189년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안티오코스 3세와 연합하여 로마에 대항한 아이톨리아 동맹을 응징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기원전 179년 감찰관을 역임했다. 형제로 기원전 159년 집정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가 있었다.기원전 184년 루카니아의 식민도시인 포텐티아와 피케네의 피사우룸에 로마인들을 이주시키는 임무를 맡은 위원회의 일원이었으며, 기원전 160년경 조영관을 맡았고 기원전 156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다. 기원전 153년 티투스 안니우스 루스쿠스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다. 1년 전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현지 로마군이 켈티베리아인들에게 참패하자, 원로원은 집정관 중 한 명을 이베리아 반도에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그는 제비뽑기를 통해 히스파니아 전선을 맡게 되었고, 원로원은 그가 가능한 한 빨리 현장에 갈 수 있도록 집정관 임기 시작일을 3월 1일에서 1월 1일로 앞당겼다.
노빌리오르는 히스파니아 보조병을 포함한 3만 병력을 이끌고 타라코나에 상륙했다. 이후 로마에 대항하던 켈티베리아족의 수도 세게다를 공격해 약탈을 자행하고 누만티아에 사절을 보내 그쪽으로 도망간 자들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아레바키 족은 벨리 족과 연합하여 로마군에 대항하기로 결의했다. 아레바키-켈티베리아 연합군 사령관 세게다의 카루스는 불카날리아(vulcanalia: 로마인들이 불과 도구, 대장간의 신 불카누스를 기리기 위해 벌인 축제)를 치르느라 정신없던 로마군 진영을 습격했다. 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로마 보병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로마 시민 6,000명이 사망했다. 그나마 기병이 얼마 안가 도착하자 적군이 물러나면서 전군이 궤멸되는 것만큼은 모면할 수 있었다.
그는 전열을 재정비한 뒤 누만티아로 후퇴한 켈티베리아인을 추격해 누만티아에 도착한 뒤 포위 공격했다. 이때 로마의 동맹국인 누미디아의 군주 마시니사가 그에게 전투 코끼리 10마리를 포함한 지원군을 보냈다. 누만티아 수비대는 코끼리의 맹공에 당황했고, 곧 성이 함락될 듯 했다. 그러다 큰 돌 하나에 맞아 부상을 입은 코끼리가 미쳐 날뛰면서 로마군이 혼란에 휩싸이자, 수비대는 즉시 반격을 개시해 4,000명에 달하는 로마인을 죽였다. 이로 인해 사기가 떨어진 데다 식량이 떨어지자, 노빌리오르는 더 이상의 공세를 포기하고 겨울 숙영지로 철수했다. 이듬해 봄 신임 집정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에게 지휘권을 넘긴 뒤 로마로 귀환했다.
기원전 150년, 먼 히스파니아 총독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는 루시타니아 전쟁을 치르던 중 루시타니아인들에게 정착할 땅을 나눠줄 테니 귀순하라고 권했다. 루시타니아인들은 갈바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짐을 수레에 싣고 가족과 가축을 대동한 채 로마에 귀순했다. 로마 병사들이 족장들에게 루시타니아인들을 세 그룹으로 나뉘게 한 뒤 서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인도했다. 갈바는 루시타니아인들에게 무기를 반납하도록 한 뒤 병사들을 시켜 그들 주변에 참호를 파게 한 후 싸울 수 있는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어린이, 여자, 노인은 노예로 삼게 했다. 이후 거의 모든 전리품을 자기 것으로 삼고 병사들에겐 적은 양만 주었다. 그는 로마로 돌아간 뒤 개선식을 거행했지만, 기원전 149년 그가 지난해 속주에서 벌인 만행을 놓고 법적 공방이 시작되었다.
호민관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는 노예로 팔린 루시타니아인들에게 자유를 주고 갈바의 활동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자고 제안하는 법안을 제출했고, 대 카토는 갈바의 잔인한 조치는 로마의 명예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으며, 갈바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단순히 탐욕을 충족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라고 성토했다. 그는 이에 맞서 갈바 편을 들었고, 대 카토 등이 갈바를 증오하기 때문에 비난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여론은 명망높은 카토의 주장에 감화되어 반 갈바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하지만 갈바가 탄탄한 집안 배경과 부, 그리고 유권자들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기법 등을 동원해 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노빌리오르는 기원전 136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고 풀케르를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선정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는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