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아우구르 라틴어: Quintus Mucius Scaevola Augu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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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88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조부)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아버지) 라일라(아내) 무키아 프리마(장녀) 무키아 세쿤다(차녀)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17년 |
전임 |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 |
동기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디아데마투스 |
후임 |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게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에부르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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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당대 최고의 민법 전문가로 손꼽혔으며, 로마 최고의 웅변가로 거론되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를 가르쳤다.2. 생애
그의 집안은 평민 가문인 무키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215년에 법무관을 역임한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를 시작으로 로마 정계에 잇따라 진출했다. 푸블리우스의 두 아들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와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는 각각 기원전 175년과 174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기원전 174년 집정관 퀸투스의 아들이 바로 이 문서의 주인공이다. 그의 사촌인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무키아누스는 각각 기원전 133년과 기원전 131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그는 젊은 시기에 그리스 문화에 대한 사랑, 민중의 농지법 개혁 요구에 응하여 온건한 개혁을 추진한 " 스키피오 서클"에 가담했다. 기원전 155년 제3차 플라톤 아카데미의 창립자 카르네아데스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그는 다른 귀족들과 함께 강의에 참석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철학에 열중한 것과는 달리 금욕주의를 선호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140년 이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절친한 친구인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의 장녀 라일라와 결혼해 두 딸 무키아 프리마와 무키아 세쿤다를 낳았다.
그는 로마 청년들보다 훨씬 늦게 쿠르수스 호노룸을 시작했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농지 개혁을 주도하다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에게 살해당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일에 깊은 충격을 받고 정치에 뛰어들기를 주저했으리라 추정한다. 기원전 128년이 되어서야 호민관에 선출되었고, 기원전 125년에 보조 조영관을 맡았다. 키케로에 따르면, 기원전 121년 법무관에 선임되어 아시아 속주를 배정받은 그는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수급을 확보한 뒤 당국으로부터 수급의 무게와 동일한 금을 받은 루키우스 셉투물레우스로부터 자신을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로 삼아서 데려가달라고 요청하자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로마를 떠나려 하다니, 당신은 미쳤소!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오? 로마에는 악의적인 시민이 너무 많아서 당신이 그대로 머무르면 몇 년 안에 엄청난 재산을 얻게 될 것이라고 장담하오."
그 후 아시아로 향한 그는 도중에 아테네와 로도스를 방문하여 유명한 연설가인 알라반다의 아폴로니오스와 교류했다. 기원전 119년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그는 속주민 착취 혐의로 에퀴테스 신분인 티투스 알부티우스에게 고발당했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알부티우스가 그리스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거의 그리스인이 된' 점을 들어 재판정에서 조롱조가 담긴 시를 지었다고 한다.
로마인이나 사비니인이 아닌 그리스인 알부티우스,
유명한 백부장 폰티우스와 유명한 기수 트리톤
당신은 이들의 동료보다 명성을 더 좋아하는구려.
그래서 법무관인 나는 아테네 회의에 참석해
당신이 좋아하는 헬라어로 인사하겠소.
"오, 티투스여! 안녕히 가시오!(Хайре, о Тит)!"
이제 내 뒤에는 모든 릭토르, 투르마, 코호트가 있소.
"오, 티투스여! 안녕히 가시오!(Хайре, о Тит)!"
알부티우스여, 이제 당신은 나의 적이오.
유명한 백부장 폰티우스와 유명한 기수 트리톤
당신은 이들의 동료보다 명성을 더 좋아하는구려.
그래서 법무관인 나는 아테네 회의에 참석해
당신이 좋아하는 헬라어로 인사하겠소.
"오, 티투스여! 안녕히 가시오!(Хайре, о Тит)!"
이제 내 뒤에는 모든 릭토르, 투르마, 코호트가 있소.
"오, 티투스여! 안녕히 가시오!(Хайре, о Тит)!"
알부티우스여, 이제 당신은 나의 적이오.
독일의 고대 역사학자 프리드리히 뮌처는 그가 스토아 학파인데 비해 알부티우스는 에피쿠로스 학파였으며, 두 학파간의 경쟁 구도가 두 사람의 갈등에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그는 자신을 성공적으로 변호해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기원전 117년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디아데마투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으나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동료 집정관 메텔루스가 달마티아인들에 대한 전쟁에서 승리한 뒤 개선식을 거행했을 때 경의를 표했다는 것만 전해진다. 그 후 그는 정계에 뚜렷한 행적을 보이지 않았지만 민법에 완전히 통달한 것으로 유명했다. 법정에 거의 출두하지 않았지만, 법적 문제에 관해 조언을 구하는 이들을 기꺼이 도와줘 인망이 드높았으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이들 중에는 당대 로마 최고의 웅변가가 될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원로원 내에서도 그의 권위를 인정하는 이들이 많았다.
기원전 100년 12월 원로원으로부터 원로원 최종결의를 선고받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토벌하기 위해 포로 로마노에 집결한 귀족 무리에 그도 함께 했다. 이후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간의 갈등이 불거졌을 때, 그는 상당히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그는 마리우스의 정적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의 복귀를 찬성하는 등 옵티마테스파와 가까운 사이였지만, 기원전 94년 또는 93년에 수제자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장녀 무키아 프리마의 딸, 즉 그의 외손녀인 리키니아가 마리우스의 아들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결혼하면서 마리우스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 그래서 기원전 88년 마리우스를 축출하고 로마를 무력으로 점거한 술라가 원로원에 마리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라고 요구했을 때, 그는 원로원 의원 중 유일하게 강하게 반대했다.
"나는 로마와 이탈리아 전체를 킴브리인으로부터 구원한 사람을 절대로 적으로 인정하지 않겠소!"
그러나 술라를 두려워한 의원들은 이에 호응하지 않았고, 마리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낙인찍는 법안은 곧 통과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아버지와 함께 국가의 적으로 선언된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그의 영지에서 아프리카로 갈 때 필요한 경비와 물자를 얻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불분명하나, 학자들은 그가 기원전 88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의 장녀 무키아 프리마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결혼해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결혼한 딸 리키니아를 낳았다. 차녀 무키아 세쿤다는 기원전 122년 호민관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의 아내가 되었다. 기원전 54년 호민관으로 활약한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가 그의 손자라는 설이 제기되나 분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