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칼라이쿠스 라틴어: Decimus Iunius Brutus Callaic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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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아버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형제) 클로디아(아내)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아들) 유니아(딸)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38년 |
전임 |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
동기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 |
후임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포르키나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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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노빌레스 씨족인 유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아버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기원전 178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형제로 기원전 140년 법무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있었다. 아피아노스는 기원전 137년 집정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포르키나가 그의 친척이라고 밝혔지만, 정확한 관계는 설명하지 않았다.현대 학자들은 고위 행정관의 재임 간격을 규정한 빌리우스 법에 의거해 기원전 141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으리라 추정한다. 기원전 138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제비뽑기를 통해 먼 히스파니아 속주를 임지로 부여받았고, 히스파니아 속주로 가기 위해 병력 모집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이때 나시카와 함께 징병을 기피한 자들을 체포해 채찍찔하고 노예로 파는 등 가혹한 조치를 실시했다. 호민관 가이우스 쿠리아티우스와 섹스투스 리키니우스가 10명의 장정이 복무하기 곤란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그들을 징집하지 말라고 요청해씾만, 두 집정관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가이우스 쿠리아티우스는 두 집정관이 호민관의 정당한 권리 행사를 방해한다며 일시적으로 구금했다가 풀어줬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이 시기에 살인 혐의로 기소된 실스크 숲의 타르 세입자에 대한 일화를 소개했다. 피고인의 변호를 맡은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는 훌륭하고 우아하며 신중하게 준비된 연설을 두 번 수행해 피고인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지만, 집정관은 이를 묵살하고 조사를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라일리우스는 피고인에게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에게 변호를 부탁하라고 권했다. 갈바는 별다른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전혀 망설이지 않고 변호를 맡았다. 그는 법정에 있는 집정관이 다른 업무를 봐야해서 가봐야 한다는 말을 하는 그 순간까지 연설했다. 이후 집정관이 떠나자 연설을 재차 이어가 "각 부분이 방청객의 박수 소리로 끝날 정도로 강하고 인상적으로" 연설했다. 그날 피고인은 모든 배심원의 동의하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몇몇 학자들은 이때 법정을 이끌었던 집정관이 브루투스였을 거라 추정한다.
병력 모집을 완료한 뒤, 그는 먼 히스파니아 속주로 부임한 뒤 비리아투스가 암살된 후 지리멸렬해진 루시타니족을 새로운 땅에 정착하는 사업을 벌였다. 그는 발렌티아 식민도시와 그 주변 땅을 루시타니족에게 제공했다. 뒤이어 두에로 강을 따라 진군한 끝에 로마인 최초로 대서양 연안에 도착했다. 이때 진군로 주변의 모든 마을을 파괴했고, 지역 주민들은 산으로 피신하거나 맹렬하게 저항했지만 로마군의 강력한 전투력 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브루투스는 이 원정 동안 30개의 도시를 파괴했다고 한다.
기원전 137년, 그는 총독의 권한으로 두에로 강 북쪽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이후 이전에 한번도 로마군과 상대해 본 적이 없던 칼라이키족의 땅을 침공해 크고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칼라이키족 60,000명 중 50,000명이 죽었고, 6,000명이 생포되었다고 한다. 이후 미누스 강에 도착했을 때 산악부족인 브라카르 족이 로마 호송대를 공격하면서 또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브라카르 족은 남성과 여성 모두 단결하여 로마군을 공격했지만, 로마군의 강력한 전투력에 밀려 패퇴했다.
기원전 137년 가을 브루투스가 히스파니아 북서쪽 방면의 원정을 마무리했을 무렵, 누만티아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가 누만티아인들에게 포위되어 전군이 몰살당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굴욕적인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격분한 원로원은 협약을 무효로 처리하고 만키누스를 누만티아에 넘겼다. 이후 기원전 137년 집정관으로서 로마에서 행정을 맡았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포르키나가 가까운 히스파니아 총독으로서 누만티아와의 전쟁을 이어가기로 했고, 브루투스는 2번째로 임기를 연장받고 포르키나를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기원전 136년, 포르키나와 브루투스는 누만티아를 직접 공격했다가 만키누스처럼 될 것을 우려해 누만티아와 손을 잡았을 것으로 의심되는 바케오스족과 새로운 전쟁을 벌이기로 했다. 그들은 바케오스 족의 중심지인 팔란티아를 포위 공격했다. 로마에서 파견된 두 사절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칼부스는 팔란티아 공격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지만, 두 총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팔란티아가 쉽사리 함락되지 않으면서 장기전으로 흘러갔고, 물자가 완전히 바닥나면서 많은 군인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갔다. 결국 브루투스와 포르키나는 퇴각하기로 마음먹고, 야간에 적의 눈을 피해 후퇴했다. 군단병들은 부상자, 병자, 심지어 무기까지 전부 버리고 도주했다. 다음날 이 사실을 알게 된 바케오스 족은 이들을 맹렬히 추격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6천 명의 로마 군인이 전사했다고 한다.
그후 자기 지역으로 돌아온 브루투스는 루시타니아의 여러 부족이 로마에서 독립하려 들자 이를 진압하기 위한 원정을 실시해야 했다. 그는 타라브리가 시의 항복을 받아낸 뒤 주민들을 도시 밖으로 인도한 후 군인들과 함께 둘러쌌다. 그리고는 그들이 여러 번 로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것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주민들은 로마군이 자신들을 몰살시키려 들까 봐 겁을 먹었지만, 브루투스는 주민들을 석방하는 대신 공공 재산을 몰수했다. 이후 기원전 132년 이전에 로마로 귀환한 그는 개선식을 거행했고 '칼라이키족 정복자'라는 의미인 칼라이쿠스(Callaicus)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는 히스파니아에서 한 서약을 이행하기 위해 키르쿠스 프라미니우스 옆에 마르스 신전과 여러 기념물을 건설했다.이때 그리스 건축가이자 조각가 스코파스를 초대해 마르스 신전을 그리스풍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129년, 그는 현직 집정관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의 일리리아 원정에 레가투스로서 참여했다. 처음에는 로마군이 패배했지만, 나중에 그가 용맹을 발휘한 덕분에 승리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아우구르의 일원이 된 그는 기원전 121년 호민관 가이우스 그라쿠스 추종자들과 원로원파 간의 시가전이 벌어졌을 때 원로원파에 가담하여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경사면을 타고 올라가서 언덕 정상에 버티고 있던 그라쿠스 추종자들을 공격하는 분견대를 이끌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는 클로디아라는 여자와 결혼하여 기원전 77년 집정관을 역임한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딸 유니아를 낳았다. 일설에 따르면, 유니아는 기원전 80년 법무관인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아내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의 첫번째 남편이었던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외조부인 셈이다. 코르넬리우스 네포스는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그의 딸과 결혼했다고 주장했지만, 대부분의 고대 작가들은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기원전 131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무티아누스의 딸 리키니아와 결혼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