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Scipio Aemilianus |
|
생몰년도 | 기원전 185년 ~ 기원전 129년 |
출생지 |
로마 공화정
로마 (現 이탈리아 라치오주 로마현 로마) |
사망지 | 불명 |
국가 | 로마 공화정 |
칭호 | 소(小) 아프리카누스[1] |
가족 |
조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모 파피리아 마소니스 형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 양조부/고모부/양부 대(大) 스키피오 양조모/고모 아이밀리아 파울라 양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부인 셈프로니아 |
참전 |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 피드나 전투(기원전 168) 제3차 포에니 전쟁 ┗네페리스 전투(기원전 147) ┗카르타고 공성전(기원전 149 ~ 146) 누만티아 전쟁 ┗누만티아 전투(기원전 151 ~ 150): 부관으로 참전. ┗누만티아 전투(기원전 134 ~ 133) |
계급 | 로마 공화정 장군 |
별칭 | 소(小) 아프리카누스 |
직업 | 군인, 장군, 정치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47년 |
전임 |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마그누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
동기 |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
후임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루키우스 뭄미우스 아카이쿠스 |
임기 | 기원전 134년 |
전임 |
세르비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퀸투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
동기 |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
후임 |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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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장군이다.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활약한 유명한 장군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처조카인 인연으로 양손자, 즉 그의 장남의 양자로 유서깊은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문에 입양되었다. 제3차 포에니 전쟁 3년째에 집정관으로서 로마군을 지휘하여 맹렬하게 저항하던 카르타고를 최종적으로 멸망시켜 아프리카누스의 칭호를 얻었다. 이에 따라 양할아버지 대(大) 스키피오에 이은 소(小) 스키피오 혹은 소(小) 아프리카누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카르타고에 이어 끈질기게 로마에 저항하던 히스파니아의 도시 누만티아를 멸망시키기도 해 당대 로마 공화국 최고의 지휘관으로 평가받았다.[2]
유능한 군인으로서의 평판과 더불어 유력한 정치인으로, 당대에 휘하 병사들, 그와 함께 공직 활동을 한 동료들에게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본인과 국가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열정을 자발적으로 이끈 로마인으로 찬사를 받았다. 따라서 후대의 장군들은 병사들의 충성을 이끌어내는 점에서 극소수 외에는 전우 이상의 리더로선 애로사항을 많이 겪었다고 알려져 있다.
집정관을 2회, 감찰관을 1회 역임하고, 프린켑스 세나투스를 맡았으며 스키피오 가문의 수장으로서 원로원에서의 영향력이 대단했다. 정치적으로는 양할아버지처럼 친(親) 헬레니즘적인 성향을 가지면서도 기존의 공화정 체제를 옹호하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시도에 반대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암살 이후인 기원전 129년 갑작스럽게 외상없이 사망했으며, 이는 가이우스 그라쿠스나 가이우스의 누이이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아내인 셈프로니아에 의한 암살로 의심받기도 한다.
2. 생애
이름은 아주 길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 누만티누스( 라틴어: Publius Cornelius Scipio Aemilianus Africanus Numantinus)라고 하며, '대' 아프리카누스의 맏아들의 양자로서 당대 로마 공화국 최고의 명문가인 스키피오 가문에 입양된 것이었다. 본래 가문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였으며, 입양 이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되었지만 아이밀리우스 가문 출신임을 나타내는 '아이밀리아누스'가 뒤에 붙었다. '아프리카누스'는 양할아버지에게 물려받아 칭할 수 있는 별칭이기도 하지만, 카르타고를 완전히 함락시키면서 스스로 얻은 칭호이기도 하다. '누만티누스'는 누만티아의 정복을 확립하여 얻은 칭호이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처남이자 역시 당대 로마 최고의 유력 정치인이자 장군이었던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의 차남이었다. 혈연으로는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와도 친척이다. 그 이유는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아버지인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부친인, 대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조부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아버지 마케도니쿠스의 남자형제로 아이밀리우스 가문에서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로 입양됐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어머니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고모 중 한명이었다.[3]
아버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는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타고난 파트리키 임에도 매우 인간적이고 가장 자상한 로마 귀족으로, "로마에서 가장 자상한 아버지"으로 불린 사람이다. 그는 타고난 인격자였고, 매우 정직하고, 청렴했다. 기원전 171년 속주 총독들이 히스파니아 주민들을 쥐어 짜다시피 압제를 펼치자 항의하면서 소송함을 변호할 만큼 교양 있고 정직한 로마인으로 명성이 대단했다. 물론, 이런 그의 히스파니아 속주민 변호는 결국 집정관 재선에서 낙선한 빌미가 됐다. 하지만 그는 이를 후회하지 않았고, 전화위복으로 삼아 복점관 직에 집중하면서 자녀들에게 끔찍한 부성애를 보일 정도로 자녀들 사랑이 대단함을 보여, 더 큰 존경을 받았다. 동시에 그는 일반적인 로마귀족과 달리 집정관 선거에서 낙선한 상황에서도, 인격자답게 그는 어떤 야심 없이 맡겨진 것에 사심 없이 최선을 다했다. 따라서 그는 낙선한 다음 해에 필리포스 5세의 아들인 페르세우스를 피드나 전투에서 무찌르고 안티고노스 왕조를 멸망시킨 것으로 '마케도니쿠스'의 칭호를 얻었다.
이때 당시 17살이었던 아이밀리아누스는 아버지의 군대에 종군했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어린 나이부터 리더십을 드러내 인망이 높았으며, 피드나에서 실종되어 아버지와 많은 병사들이 동요했으나 알고 보니 한참 전부터 마케도니아군을 추격하는 중이었다고 한다. 또 그는 대 카토의 아들인 카토가 치열하게 싸우던 와중에 칼을 잃어버리자, 목숨을 걸고 전장 한 가운데로 파고 들어 칼을 되찾아 친구의 명예를 드높인 일도 있었다.
마케도니쿠스는 두 번 결혼해서 4명의 아들을 보았는데,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3남과 4남을 자신의 후계자로 정하고 맏아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는 파비우스 막시무스 가문으로, 둘째 아들인 아이밀리아누스는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문으로 입양을 보냈다. 파비우스 가문과 스키피오 가문은 모두 당대 로마 최고의 명문인데, 후계자가 없었기에 마케도니쿠스의 아들들이 대신 가문을 이어받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마케도니쿠스의 3남과 4남은 마케도니쿠스가 한참 개선식으로 개인의 명예를 드높일 때 일주일 간격으로 모두 요절하여 아이밀리아누스의 본가인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문이 단절되어 버렸다.
기원전 151년에는 처음으로 히스파니아의 누만티아로 파견되어 집정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의 휘하 장교로 복무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누만티아에서의 패배로 시민들이 겁먹고 패배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상황에서 스키피오가 직접 누만티아 파견을 요청, 모범을 보여 지원병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고 한다.
기원전 149년에 시작된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도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 종군했으며, 몇 차례 로마군을 위기에서 구하고 능력을 인정받았다. 로마군이 카르타고 시민들의 악착같은 저항에 고전하자 기원전 147년 연령 미달에도 불구하고 집정관으로 당선되어 전쟁을 이끌게 되었다. 146년 초 카르타고를 마침내 함락시킨 이후에는 원로원의 지령에 따라 카르타고를 완전히 파괴하고 잿더미로 만들었다. 살아남아있던 50,000명의 카르타고 시민들은 노예로 팔렸다. 《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카르타고를 정복한 후, 파괴한 참혹한 현장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카르타고인들이 3년 동안 버틴 것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여 노예로 만들거나 전리품으로 끌고 가지 않고, 아프리카의 외딴 곳으로 보냈다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이때 처남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중용하여 공을 세우도록 배려했고, 카르타고 성벽을 가장 먼저 올라간 이들 중 티베리우스도 있었다고 한다.
역사가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카르타고 함락 이후 스키피오는 침통한 표정을 짓다못해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트로이와 아시리아, 메디아, 페르시아, 그리고 가장 최근의 마케도니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멸망의 운명을 맞이함을 생각한 것이다.
"언젠가는 트로이도 프리아모스 왕과 그를 따르는 모든 전사들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
라는
호메로스의 《
일리아스》 글귀를 읊었는데, 폴리비오스가 자신의 제자이기도 했던 스키피오에게 그 이유를 묻자 스키피오는 자신의 조국인 로마도 그러한 인간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결국 스키피오의 예언대로
로마 제국의 최후 또한 카르타고의 최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록 스키피오의 시대 이후로 1,500여 년이라는 장구한 기간 동안 로마는 존속했지만 결국 멸망을 피할 수는 없었다.[4]기원전 137년, 집정관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히스파니아의 누만티아에서 크게 패배하고 현지인 군대에게 포위되었다.( 누만티아 전쟁 항목 참조.) 만키누스는 화평을 구걸했으나 이미 로마에게 거하게 통수를 맞은 적이 있었던 누만티아군은 이를 거부했고, 그때 만키누스의 재무관이었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협상 대표로 나섰다. 그의 아버지 대 그라쿠스가 히스파니아 총독 시절 공정한 통치를 했던 것을 기억한 누만티아군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는 협상에 동의하여, 로마군이 모든 물자를 누만티아군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무사히 철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로마 원로원의 입장에서는 이는 매우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행위였으며, 원로원에서는 이 협정을 무효로 선언하고 패장 만키누스는 결박하여 누만티아군에게 넘겼으나 누만티아군이 이를 함정으로 의심하고 만키누스를 석방하여 돌아왔다. 한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자신과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맺은 협정이 원로원에 의해 무효화된 것, 그리고 매형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누만티아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한 것에 대해 심한 배신감과 모욕감을 느끼고 분노했으며, 이후 급진적인 행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기원전 134년 스키피오는 집정관에 다시 당선되어 복수를 위해 누만티아로 재차 파견되었는데, 이는 누만티아의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스키피오뿐이었다고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스키피오는 기대에 부응하여 누만티아를 포위하고 도시를 굶어죽을 위기에 몰아넣는 데 성공하며, 카르타고와 마찬가지로 누만티아도 파괴하고 항복한 주민들을 노예로 팔았다. 누만티아를 정복하여 로마의 지배를 확립한 공으로 '누만티누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히스파니아 원주민들의 도시인 누만티아의 정복은 카르타고만큼의 부를 가져다주지 못했고, 스키피오가 부재중인 동안 로마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살해로 아수라장이 된 상황이었다. 스키피오의 누만티아 승전 개선식은 그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못 미치는 결과로 끝났다고 한다.
그라쿠스 형제와는 친가 쪽으로는 5촌, 양가 쪽으로는 4촌 형제였으며,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그라쿠스 형제의 누이인 셈프로니아와 혼인했기 때문에 처남 매부 사이로 아주 가까운 사이였으나,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에는 반대했다. 아내인 셈프로니아와의 사이는 당대부터 최악이라고 널리 알려져, 스키피오는 자기 아내가 못생기고 후계자도 낳아주지 못했다며 아주 싫어했다.그라쿠스 형제 쪽에서도 누이의 일 외에 위에서 언급한대로 스키피오가 티베리우스를 모욕했다고 하여 스키피오를 아주 싫어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암살 이후인 기원전 129년, 농지 개혁을 단행하려는 그라쿠스파의 연설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기 하루 전에 의문사를 당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죽음을 방조한 것에 분노한 아내 셈프로니아 혹은 형제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가 그를 독살한 것이라고 하나 증거는 없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이전에 그라쿠스의 개혁안과 비슷한 것을 친구이자 자신이 후원하던 집정관인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를 통해 내게 했다가 반대에 부딪혀 철회한 적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라쿠스를 지지했는지는 당시 사람들도 궁금했는지, 훗날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스키피오는
"만일 그의 목적이 공화정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면, 그는 정당하게 살해된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5] 사실 그라쿠스가 죽은 이유는 농지법보다는 호민관 연임이었고, 이는
참주가 되려는 시도처럼 비쳐졌기에 개혁 자체는 찬성했어도 그를 반대한 이들이 많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티베리우스가 죽었을 때, 스키피오는 "그와 같은 일을 도모하는 자는 그렇게 망하리라."
는
고인드립성 독백을 남겼다고 한다. 당연히 민중들에게 욕을 엄청 먹었고, 전쟁 영웅으로서의 인기를 거의 다 까먹었다.3. 기타
시작하겠습니다.
공화국(re publica)은 국민의 것(res populi)입니다.[6] 국민이란
대중의 아무 연합이나 일컫는 것이 아니고 법의 이름으로 정의된 것(法正義)에 대한 동의와 이익의 공유에 의해 결속된 연합입니다. 한편 인간이 결속하는 첫 번째 이유는 인간들의 연약함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어떤 것, 마치
군집성(congregatio) 같은 것입니다. 사실상 인간은 홀로 떠도는 종류가 아니라, 모든 것의 풍부함을 부여받았어도 사회 속에서 사는 것이 자연에 의해서 강제되도록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잔인함에 의해서 전체가 억압받고, 또 하나의 법적인 유대나 합의나 계약된 결속, 즉 국민이 존재하지 않을 때 누가 그것을 국민의 것, 즉 공화국이라 하겠습니까?
왕정에서는 나머지 사람들이 공통의 법과 계획에 거의 참여하지 않게 됩니다. 최선량들의 지배에서는 모두에게 공동의 계획과 능력이 없으므로 다수는 자유에 대한 참여자가 거의 될 수 없습니다. (중략) 따라서 페르시아의 키루스가 매우 정의롭고 현명한 왕이었지만, 한 사람의 명령과 양식에 의해서 통치되었을 때 국민의 것은 — 사실 이것이 앞서 말했듯이 공화국의 본질인데 — 별로 기대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우리의 피호민인 마실리아 사람들이 선발된 자들과 제1 시민에 의해서 가장 정의롭게 통치되었는데도 그 국민의 상태는 어떤 노예제와 유사한 것이 있었습니다.
국민의 권력이 최상인 곳을 제외하고는 어떤 다른 나라에도 자유가 머물 수 있는 곳은 전혀 없습니다. 사실 이보다 더욱 달콤한 것은 확실히 있을 수 없지요. 그래도 이 자유가 동등하게 향유되지 않는다면, 사실상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국민이 노예상태가 되는 것이 사실상 불분명하지도 않고 의심의 여지도 없는 왕정에 관해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 이 말들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국가론》(De Re Publica)에 쓰여진 것이다.[7]
그러므로 한 사람의 잔인함에 의해서 전체가 억압받고, 또 하나의 법적인 유대나 합의나 계약된 결속, 즉 국민이 존재하지 않을 때 누가 그것을 국민의 것, 즉 공화국이라 하겠습니까?
왕정에서는 나머지 사람들이 공통의 법과 계획에 거의 참여하지 않게 됩니다. 최선량들의 지배에서는 모두에게 공동의 계획과 능력이 없으므로 다수는 자유에 대한 참여자가 거의 될 수 없습니다. (중략) 따라서 페르시아의 키루스가 매우 정의롭고 현명한 왕이었지만, 한 사람의 명령과 양식에 의해서 통치되었을 때 국민의 것은 — 사실 이것이 앞서 말했듯이 공화국의 본질인데 — 별로 기대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우리의 피호민인 마실리아 사람들이 선발된 자들과 제1 시민에 의해서 가장 정의롭게 통치되었는데도 그 국민의 상태는 어떤 노예제와 유사한 것이 있었습니다.
국민의 권력이 최상인 곳을 제외하고는 어떤 다른 나라에도 자유가 머물 수 있는 곳은 전혀 없습니다. 사실 이보다 더욱 달콤한 것은 확실히 있을 수 없지요. 그래도 이 자유가 동등하게 향유되지 않는다면, 사실상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국민이 노예상태가 되는 것이 사실상 불분명하지도 않고 의심의 여지도 없는 왕정에 관해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 이 말들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국가론》(De Re Publica)에 쓰여진 것이다.[7]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가이우스 마리우스 이전까지는 로마군의 가장 뛰어난 장군이기도 했으며, 키케로의 《국가론》에서 고대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세련된 논리로 공화정을 옹호했다. 법적으로는 조카뻘에 해당되는 그라쿠스 형제에게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는 등, 다분히 귀족적인 인물이라 착각하기 쉽지만, 당시 로마에서는 그라쿠스 형제의 의도에는 공감을 보이면서도 그들이 참주가 될까봐 경계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리스인 역사가 폴리비오스 등 여러 헬레니즘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을 모아 후원했다고 한다. 다만 현대 학계에서는 하나의 일관적인 집단으로서의 스키피오닉 서클의 존재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위의 키케로로부터의 인용처럼 키케로는 플라톤의 <대화>편에서의 소크라테스처럼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자신의 글에 등장시키기도 했다. 키케로는 공화정의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스키피오의 정치적 입장에 동의하고, 자신의 주장을 스키피오라는 인물을 통해 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키피오의 친구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의 사위인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아우구르가 키케로의 스승이기도 했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성격이 조용하고, 절제적이고, 금욕적이고, 온화했다. 그는 청결을 중요시했고, 수염을 기르기보다는 매일 면도했다. 따라서 매일 면도한 최초의 로마인으로도 유명한데, 로마에 면도가 보편화하는 것에도 큰 기여했다.
대 아프리카누스의 아들들이 후손을 두지 못해 아프리카누스의 후계자로 입양된 것이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이지만, 그 또한 아내 셈프로니아로부터 후계자를 얻지 못해 아프리카누스의 가문은 단절되었다. 이후 스키피오 가문의 주도권은 아프리카누스의 사촌의 후손인 강경 보수파 스키피오 나시카 가문으로 넘어갔다.
4. 가계
- 할아버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 고모: 아이밀리아 파울라[8] = 고모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 양아버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고모부의 장남
- 아버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 장모: 코르넬리아 스키피오니스 아프리카나(고종사촌) = 장인: 대 그라쿠스
[1]
아프리카를
정복한 자라는 뜻이다.
[2]
단순한 최고의 장군이 아니라, 당대 휘하 병사, 동료 장군들의 휘하 장교들에게까지 그 자신과 국가에 절대적 충성과 사명감을 자발적으로 이끌어낸 사람이었다. 이 정도로 내보인 영향력은 과장 없이 말하더라도, 로마의 긴 역사에서 많지 않아, 당대 최고라는 평도 따라 다닌다.
[3]
이런 배경은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두 아들 중 장남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를 차남 대신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한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에 일찍이 입양보낸 이유가 됐다.
[4]
인터넷에서 '스키피오의 눈물'이라는 제목으로 스키피오가 적이 없어지자 내부 붕괴로 로마가 멸망했음을 예언했다는 글이 퍼져 있는데 제대로 된 자료 출처도 없으며 목사, 교단 등 특정 조직을 위주로 글이 퍼져나간 결과일 뿐 신빙성은 낮다.
[5]
아래의 인용문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그리고 로마의 공화정 지지자들은) 1명의 권력이 폭주하여
참주정이 되는 것을 싫어했다.
[6]
populi, populus 등은 영어 people에 대응하는 말로 흔히 '인민'이라 번역된다. 다만 이 문구에서 populus(people)는 법에 대한 동의를 전제한, '결속된 연합'이기에, 적극적인 소속를 벗어난 자연인의 집단인 한국어
인민과는 그 뜻이 맞지 않아 일단 국민으로 옮긴다. 자세한건
인민 항목 참조.
[7]
이 발언은
플라톤의 <대화>편에서의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실제 역사적 인물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발언이라기보다는 키케로의 주장을 돌려서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8]
또는 아이밀리아 테르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