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어: Μάχη της Πύδνας 영어: Battle of Pyd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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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기원전 168년 6월 22일 | |
장소 | 그리스 피에리아 주 피드나 | |
교전국 | 로마 공화국 | 마케도니아 왕국 |
지휘관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 |
페르세우스 |
병력 |
보병: 36,000명 기병: 2,600명 코끼리: 22마리 |
보병: 43,000명 기병: 4,000명 |
피해 | 100명 전사, 부상자 다수 |
사망: 20,000명 포로: 11,000명 |
결과 | 마케도니아 왕국의 패배. | |
영향 |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국의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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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피드나 전투는 기원전 168년 로마 공화국과 마케도니아 왕국의 안티고노스 왕조간에 벌어진 전투로, 그리스 세계에서 로마의 패권 확립과 안티고노스 왕조의 종말을 알린 전투이다. 안티고노스 왕조의 선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까지 거슬러 올라갔다.파울 K. 데이비스는 그의 저서에서 피드나 전투는 알렉산드로스가 세운 제국에 최후를 안긴 전투이며, 로마의 패권이 동쪽으로 뻗어나가는 계기가 된 전투라고 했다.
2. 전조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기원전 171년에 시작되었다.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마케도니아 왕 페르세우스가 로마에 반발하는 움직임을 여러차례 벌였고, 이를 참지 못한 로마가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었다.페르세우스 왕은 필리포스 5세의 장남이었는데 필리포스 5세는 과거 한니발 바르카와 동맹을 맺은 뒤 로마를 공격할 움직임을 보이다가 로마가 아이톨리아 동맹과 연합해 후방을 괴롭히는 바람에 로마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을 하지 못했다. 그후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 바르카가 대패함으로써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마무리되자 로마인들은 필리포스 5세와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로마측이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그후 필리포스 5세는 로마에 굴복하여 더 이상의 위협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필리포스 5세의 과거 전력을 기억하고 있었고, 따라서 필리포스를 의심했으며 마케도니아에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필리포스 5세는 로마인들이 마케도니아를 침략할 것을 우려했는데 그래서 그는 발칸 반도에 그의 영향력을 넓히려고 애썼다. 로마는 이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친 로마적인 성향을 가진 필리포스 5세의 차남인 데메트리오스를 차기 마케도니아 왕으로 삼기 위해 로비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데메트리오스의 형인 페르세우스가 강하게 반발했고, 마침내 필리포스 5세는 데메트리오스를 처형해버렸다. 이후 자신의 아들을 처형한 충격과 로마인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데 대한 걱정 등으로 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차남을 처형한 이듬해인 기원전 179년에 병사하고 말았다.
필리포스 5세가 죽자 페르세우스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는 로마에 대해 그다지 우호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 우선 로마와 적대국이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공주와 결혼한 것을 시작으로 군대도 증강하기 시작했다.[1] 그리고 에페이로스 연맹과 동맹을 맺은 뒤 일리리아와 트라키아 지역의 부족들과도 조약을 체결했다. 이들 중 몇몇은 로마 동맹국과 적대적인 부족들이었다. 그 뒤 그리스 남부 동맹들의 도시국가들과도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과정에서 페르세우스가 공표하길 그리스를 개혁할 것이며, 이로써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과거의 번영과 강력함을 누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로마는 상당히 우려스러운 시선을 보냈는데 그 이유는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에 대한 로마의 영향력을 지운 뒤 과거처럼 다시 그리스 전역을 통치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아나톨리아 서부 페르가몬 왕국의 왕 에우메네스 2세 또한 페르세우스의 움직임을 두려워했는데 이는 페르세우스가 에우메네스 2세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면서 페르가몬을 합병할 생각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에우메네스 2세는 로마 정부에 서신을 보내 페르세우스가 전쟁준비를 하여 적법한 절차를 어기고 있으며, 또한 로마의 동맹국을 공격하여 로마와의 평화를 깨뜨리려 한다고 비난했다. 이 서신이 전달된 뒤 로마 정부는 더는 묵과할 수 없어 마케도니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결의했다.
로마의 선전포고를 받게 된 페르세우스는 병력을 이끌고 로마 총독을 공격했다. 총독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칼리니코스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을 상대했으나 패퇴했다. 의기양양한 페르세우스는 로마에게 강화를 체결하자고 제의했으나 로마인들은 역사상 패배한 뒤 조약을 맺은 전례가 없었으므로 거부했다.
그 뒤, 팔라나 지역에서 페르세우스와 크라수스의 대치는 계속되었으며 기원전 170년은 그렇게 지나갔다. 기원전 169년 집정관에 선출된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는 올림푸스 지역을 통과해 마케도니아에 진입했다. 하지만 이들은 행군 중 식량이 떨어져 템페 지역으로 후퇴했다. 이렇듯 전황이 유리해지자 페르세우스는 일찍이 그를 탄핵한 바 있었던 페르가몬의 왕 에우메네스 2세와 장인인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4세에게 그에게 붙으라고 했으나 이들은 좀 더 전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일리리아 왕인 겐티오스는 페르세우스에게 붙기로 했다.
2년에 걸쳐 페르세우스와 호각인 형세가 지속되자 로마 시민들은 기원전 168년의 집정관으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를 선출했다. 파울루스는 '소 스키피오'로 유명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2]의 아버지였다.그는 곧 병력을 편성한 뒤 그리스에 상륙했다. 이때 페르세우스는 그리스 북부에 있었던 에르페우스 강에 강력한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다.
파울루스는 북쪽에 있었던 페르세우스를 끌어들이기 위해 8,200명의 보병과 120명의 기병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에게 맡겨 해안으로 보냈다. 이 움직임은 페르세우스를 포위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런데 여기서 스키피오는 독단적으로 그의 병력을 서쪽으로 이끌고 가서 산 위로 올라갔다. 그들은 피티움까지 갔다가 북동쪽으로 움직여 마케도니아인들의 배후를 공격하고자 했다.
이때 로마군의 탈주병 몇몇이 마케도니아 진영으로 갔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페르세우스는 밀로에게 12,000명의 병력을 주어 스키피오군의 움직임을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밀로군이 떠난 뒤, 페르세우스는 곧장 자신의 병력을 북상시켜 카테리니라는 곳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피드나 남쪽에 있던 마을이었다. 카테리니에는 평평한 평야가 펼쳐져 있었는데 팔랑크스의 위력을 발휘하는 데는 매우 적합한 장소였다.
페르세우스의 움직임을 알게 된 파울루스는 스키피오를 다시 불러들였다. 북상한 로마군은 페르세우스의 서쪽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페르세우스는 그의 병력을 남쪽을 향해 배치하고 있었다.
(양군의 움직임)
로마군은 곧 마케도니아군이 전투 대형으로 포진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바로 전투를 걸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병력이 행군으로 피로했기 때문이었다. 파울루스는 우선 그들 근처에 있었던 언덕에 진영을 구축하게 한 뒤, 하루밤을 지새기로 했다. 그런데 그날 밤 월식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불길한 징조라고 여긴 마케도니아인들은 공포에 떨었다.[3]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 징조를 보고 마케도니아인들은 그들의 왕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3. 병력
로마군의 병력은 29,000명으로 그 중 24,500명은 보병이고 나머지 4,500명은 기병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15,000명은 로마 군단병이었다.[4] 반대로 마케도니아군의 병력은 대략 44,000명이었고, 이들 중 21,000명은 팔랑크스였다. 기병 전력은 양쪽 모두 대략 4,000명으로 엇비슷했다.이들의 포진은 전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기병은 양 날개에 위치했고, 보병은 중앙에 위치한 것이었다. 마케도니아군은 팔랑크스를 마케도니아군의 중앙에 위치시켰으며, 그들 중 3,000명의 정예 병력은 팔랑크스의 왼쪽에 포진시켰다. 투창병(펠태스트 peltast)과 트라키아 용병들은 팔랑크스 측면에 포진했고 마케도니아 기병은 양분되어 가장 바깥쪽에 위치했다. 마케도니아군에서 가장 정예인 헤타이로이 기병은 페르세우스가 직접 지휘했는데 이들은 우익에 위치했다. 로마군 역시 군단병이 중앙에, 경보병이 바깥쪽에, 기병이 날개에 포진했는데 특이한 것은 22마리의 전투 코끼리가 우익에 포진한 것이었다.
(양군의 포진)
4. 전투
다음은 로마 제정 초기의 역사가 리비우스의 전황 묘사이다.그곳엔 작은 강이 흘렀고, 이 강은 적의 막사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이 강물을 로마인과 마케도니아인들이 같이 쓰고 있었는데 물 보급을 보호하기 위해 적 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둘은 모두 조용히 보급하는 데 열중했으며 누구도 도발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한 마리의 노새가 오후 3시경에 이탈하여 상대편 강가로 도망쳤다. 3명의 병사들은 이 노새를 따라 강을 건넜는데 강물은 그들의 무릎까지 닿을 정도의 깊이였다. 2명의 트라키아인들이 (마케도니아군) 노새를 붙잡아 그들의 진영으로 가져갔는데 로마인들은 이들을 쫒아가 그들을 공격하여, 1명을 죽인 뒤 노새를 되찾아 그들의 위치로 되돌아갔다.
이 광경을 800명의 트라키아군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의 동료가 눈앞에서 죽은 것을 보고 격분했다. 드디어 몇몇이 강을 건너 동료를 죽인 병사를 찾아 다녔으며 곧 로마군의 병사들과 만나 싸웠고, 이 교전은 접전으로 번지게 되었다. 그러자 마케도니아 왕 페르세우스는 전투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로마인들은 이미 전투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오후 3시경 이윽고 두 부대의 중앙은 서로 접근했다. 처음에 마케도니아군은 로마군을 향해 서서히 접근했고, 로마군은 그들의 막사 근처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로마군 사령관인 파울루스가 말하길, 팔랑크스의 위세는 그로 하여금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느끼게 했다고 한다. 로마군은 처음에 마케도니아군의 창을 손으로 낚아 채려고 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들의 중앙을 돌파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로마군은 언덕 위를 향해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팔랑크스가 전진하면서 점점 울퉁불퉁한 곳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들의 밀집대형은 점점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파울루스는 군단병에게 그들의 틈을 파고들라고 명령했다.
리비우스는 이후의 전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캐트라티(Caetrati: 경보병)와 팔랑크스 분대 사이에 틈이 벌어졌고, 이곳을 곧 로마 군단병이 메우기 시작했다. 그로써 마케도니아군의 전열이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캐트라티는 후방에 있었으며, 로마 군단병은 팔랑크스와 직접 접촉하게 되었다. 전직 집정관(프로콘술) 루키우스 알비누스는 제2 군단병을 이끌고 중앙에 포진한 팔랑크스를 향해 돌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때 강가에 포진한 로마군의 우익은 전투가 개시되자마자 코끼리 부대를 동원해 적에게 돌격했고, 코끼리의 뒤를 동맹시 군대가 뒤따랐다. 하지만 누구나 새로운 기술을 처음 도입했을 땐 기대를 크게 했다가 실제로 써보면 기대에 못미칠 때가 많은데 코끼리가 바로 그러했다. 그러나 동맹시 군대는 코끼리의 뒤를 따라가 마케도니아군의 좌익을 쫒아내는 데 성공했다. 제2 군단병은 마침내 팔랑크스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우리가 승리한 이유를 든다면 아마도 전투가 전방위에 걸쳐서 벌어진 것이 한 원인일지도 모른다. 이때문에 팔랑크스는 그들의 밀집대형이 흐트러지고, 마침내 무너진 것이었다. 이들이 밀집하고 있었을 때, 그들의 창으로 이루어진 정면은 그야말로 무적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들이 사방에서 공격을 당한다면 이들의 창은 휘두르기에는 지나치게 길고 무겁기 때문에 혼란에 빠져버리고 만다. 그리고 만일 후방이나 측면을 급습한다면 이들은 마치 넘어지는 말처럼 쓰러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 이들은 작은 분대로 나뉜 로마 병사들을 맞아 싸웠으며 때문에 이들은 정면뿐 아니라 사방에서 싸워야 했다. 그리고 팔랑크스의 틈이 보일 때마다 로마군들은 그들의 장교를 따라 과감하게 돌진했다. 만일 팔랑크스가 일렬로 늘어섰을 때 정면을 공격했다면 틀림없이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일찍이 펠리그니아 부대가 시도했는데 이때 그들은 마치 그들의 몸을 창위에 내던지며 무력하게 격퇴당한 바 있었다.[5]
전황을 말한다면, 마케도니아군은 전장의 전역에서 살육당하고 있었다. 그들 중 오직 무기를 내던진 이들만이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마케도니아 기병은 온전했는데 이들은 이 광경을 보자마자 바로 달아났기 때문이었다. 왕인 페르세우스는 가장 먼저 도망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미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펠라를 향해 도망가고 있었다. 그리고 트라키아 왕인 코티스도 그와 함께 있었다. 다른 마케도니아 기병들 역시 그들의 전력을 유지한 채 달아났는데 그 이유는 그들과 로마군 사이에서 마케도니아 보병들이 서서 살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로마군은 마케도니아 보병들을 살육하는 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기병들을 추격하는 것을 잊고 있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에 걸친 살육은 팔랑크스의 정면과 양익과 후방에서 지속되었다. 마침내 마케도니아인들은 그들의 무기를 내던지고 강가로 달아났다. 어떤 이들은 물 속으로 뛰어든 뒤 배 위의 로마인들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몇 몇 이들은 로마인들이 탄 보트에 접근했고 포로가 되고자 했는데 배 위의 로마인들은 그들을 생포하는 대신 살해했다. 이를 본 마케도니아인들은 다시 강가로 갔으나 그곳엔 코끼리가 기다리고 있다가 이들을 밟아죽였다.
한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인이 로마인에게 이토록 많이 살해당한 적이 없음을 온 세상이 인정하고 있다. 그 날 하루만에 20,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이들 중 6,000명은 달아나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5,000명은 도망치다가 포로로 잡혔다. 승리한 우리는 고작 100명만 죽었을 뿐이며 이들 대부분은 그나마 펠리그니아 부대였다. 단 부상자의 수는 상당했다. 만일 전투가 일찍 시작되어 승리자에게 추격할만한 충분한 햇볕이 있었다면 마케도니아의 전 군대가 소멸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밤이 가까워지자 로마인들은 추격하다가 모르는 지역으로 진입하는 것을 꺼려 추격을 중단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5. 전투 이후
페르세우스는 나중에 파울루스에게 항복했다. 그리고 그는 파울루스에게 개선식에 자신을 동행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으나 파울루스는 그렇다면 자결할 수 있는 선택을 주겠다고 대답했다. 결국 페르세우스는 쇠사슬에 묶인 상태로 개선식에 전시되는 신세가 되었으며, 알바 푸첸스라는 도시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페르세우스는 감옥에서 모욕감에 시달리며 2년만에 죽었지만, 아들인 알렉산드로스는 나름 적응을 잘하여 도자기를 구워 팔기도 하고, 라틴어를 배운 뒤 공증인의 직업을 갖게 되었다.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국은 로마에게 멸망하여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포로가 되어 노예로 팔렸다. 상당수의 국유지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로마 시민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옛 영토는 4개의 공화국으로 나뉘어 통치되게 되었다. 그러나 안드리스코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는 반란을 제압한 후,(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공화국들을 해체시키고 아예 마케도니아를 로마의 속주로 삼아버렸다. 마케도니아를 멸망시킨 후 로마는 여세를 몰아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와 코린토스의 문을 닫았다.( 제3차 포에니 전쟁, 아카이아 전쟁)
이 피드나 전투는 로마 군단병이 팔랑크스보다 우세하다는 예로 자주 등장한다. 즉, 로마 군단병의 유연함이 팔랑크스의 경직성보다 우수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패배의 원인이 로마 군단병의 유연함보다는 마케도나아군 지휘관의 잘못된 판단력 때문이라고 주장하는데 즉, 정예인 헤타이로이 기병대의 배치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피드나 전투에서 헤타이로이 기병대는 그들의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했다. 여하튼, 피드나 전투는 로마의 마니풀루스 진형이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를 정면으로 조우하여 승리한 유일한 전투임은 분명했다.
그렇지만 피드나 전투는 두 라이벌, 즉 그리스와 로마의 마지막 전투가 아니었다. 그래도 마케도니아 왕국의 종말을 고하는 전투임은 분명했다. 전투의 패배로 인한 정치적 결과는 상당했는데 원로원은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가와 귀족들의 모든 영지를 몰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왕국은 4개의 공화국으로 분할된 뒤 그 공화국들은 서로 교역을 거의 못하게 묶이게 되었다. 그리고 반 로마 성향을 가진 마케도니아인들은 그들의 고향에서 추방되었는데 그들의 수는 무려 300,000명에 이르렀다. 피드나 전투가 일어난 지 1년 뒤인 기원전 167년 파울루스는 에페이로스 연맹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또다시 승리하여 15,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에페이로스 연맹에 대한 공격은 에페이로스가 마케도니아와 로마 사이에서 중립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전쟁이었다. 이를 본다면 피드나 전투는 마케도니아인들이 독립적으로 살 수 없게 된 결과를 초래했음을 알 수 있다.
마케도니아 왕국 시절을 자신들의 영광스러운 전성기로 여기는 오늘날의 그리스와 북마케도니아 모두 피드나 전투를 조상들의 불행의 시작으로 여긴다. 그리스의 입장에서는 로마와 무관한 그리스만의 역사가 사실상 끝나게 만든 전투이며[6], 북마케도니아의 입장에서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해체되기 이전까지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가 오랫동안 건국되지 못하게 만든 전투이기 때문이다. 마케도니아 명칭 분쟁이라는 악연 때문에 서로 갈등하는 그리스인들과 북마케도니아인들이 피드나 전투와 관련해서는 합심해서 로마를 침략자라고 까는 경우가 많다. 마치 중화제국과 몽골계 유목 제국의 충돌 때문에 서로 갈등하는 중국의 한족 민족주의자들과 외몽골의 몽골인 민족주의자들이 만주족의 청나라에 대한 언급만 나오면 합심해서 청나라를 까는 것처럼 말이다.
[1]
로마측에는 북방 켈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변명은 해두었다.
[2]
제3차 포에니 전쟁과
누만티아 전쟁을 마무리지은 명장이다.
[3]
다음날 마케도니아인들이 대부분 도륙당한 것을 보면 불길하긴 불길했다. 단 월식은 당시 로마인들에게도 불길한 징조였는데, 가령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붕어한 뒤 티베리우스가 제2대 황제로 등극하자 군대가 파업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런데 파업을 한 날 월식이 일어났고, 이에 병사들이 불길해서 동요한 것이 사료에 등장한다.
[4]
당시 로마 군단병은 마리우스 개혁 이전의 병사들로 중산층 자영농들이었다. 로마 시민권은 로마시와 그 인근에 사는 사람들에게 한정되어 있었으며, 징병을 위한 제비뽑기 자체가 로마 시내의 집회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이들은 진짜 로마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5]
병사들이 돌격할 생각을 않자 펠리그니아 부대의 지휘관인 살리우스가 부대기를 빼앗아 마케도니아군에게 던져버렸는데, 당시 부대기를 잃는다는 것은 최대의 모욕이었기에 꼼짝 않던 로마군이 전열도 갖추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들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6]
동로마 제국은 언어 및 문화와 별개로 어쨌든 정식 국명이 '로마 제국'이었으므로 그리스계 국가로서의 정체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한 나라였으며,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후 지금의 그리스 땅을 지배한
오스만 제국 또한
메흐메트 2세 및 그 후의 역대 파드샤들이 명목상 로마 제국 황제의 칭호를 겸했다. 훗날 그리스가
그리스 왕국으로 독립할 때까지 그리스인들은 명목상 계속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셈이다. 사실 현대 그리스인들도 동로마 제국 시절을 마케도니아 왕국 시절과 더불어 자신들의 영광스러운 전성기로 여기고 있으니 현대 그리스조차 로마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는 아닌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