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 기스카르 전쟁 Robert Guiscard's w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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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057년 ~ 1085년 | |
장소 | 남부 이탈리아, 발칸 반도 | |
원인 | 동로마 제국을 공략해 남이탈리아-시칠리아-발칸 반도를 아우르는 노르만 제국을 세우려는 로베르 기스카르의 야망. | |
교전국 |
동로마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두클랴 왕국→ [[룸 술탄국| ]][[틀:국기| ]][[틀:국기| ]] 신성 로마 제국 |
노르만족 라구사 공화국 교황령 |
지휘관 |
콘스탄티노스 10세 미하일 7세 아르이로스 아불하레 스테파노스 니키포로스 3세 알렉시오스 1세 요르요스 팔레올로고스 그레고리 파쿠리아노스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 도메니코 셀보 콘스탄틴 보딘→ 하인리히 4세 |
로베르 기스카르 루지에로 1세 보에몽 1세 시켈가이타 그레고리오 7세 라이토르 |
결과 | 동로마 제국의 남부 이탈리아 상실, 발칸 반도 사수. | |
영향 | 동로마 제국과 노르만족의 적대 의식 강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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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59~1085년,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군이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었던 남부 이탈리아와 발칸 반도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쟁. 동로마 제국은 이 전쟁에서 남부 이탈리아를 완전히 상실했고 한 때 디라히온, 테살리아 전역, 마케도니아 일부와 카스토리아 일대를 빼앗겼지만 로베르 기스카르가 중도에 병사하면서 노르만군의 기세가 꺾인 틈을 타 발칸 지역의 회복에는 성공했다.2. 배경
568년 랑고바르드족이 동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이탈리아로 진입하여 랑고바르드 왕국을 건국한 이래, 남부 이탈리아는 랑고바르드 왕국을 따르는 베네벤토 공국, 스플레토 공국과 동로마 제국의 통치를 따르는 나폴리, 칼라브리아, 아풀리아, 바리 등 해안 도시 및 지역들간의 세력 다툼이 오랜 세월 이어졌다. 10세기에 동로마 제국의 국력이 신장하면서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되자, 랑고바르드계 귀족들은 막대한 공물을 제국에 바치는 상황에 불만을 품고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를 희망했다.그러던 1015년경, 40명 가량의 노르만족 순례자들이 아풀리아 북부 몬테 가르가노에 있는 대천사 미카엘의 동굴 수도원을 찾았다가 현지 랑고바르드 귀족에 의해 용병으로 고용되었고 이 소식을 접한 노르망디의 노르만족 전사들이 차츰 남이탈리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랑고바르드족과 동로마 제국에 고용되어 전장에서 용맹을 떨쳤으며 1030년에 나폴리 공작 세르기우스가 노르만 용병대장 라눌프 드렝고에게 아베르사 지역을 영지로 내주면서, 노르만족은 본격적으로 남이탈리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1040년, 랑고바르드족 출신의 아두인, 멜피의 토포테리파, 그리고 노르만 용병들은 세금을 가혹하게 뜯어내는 동로마 제국에 반감을 품고 베네벤토 공자인 아테눌프를 지도자로 선출해 반기를 들었다.[1] 1041년 9월 3일, 반란군은 이탈리아 속주 총독 엑사고스토스 보이오안네스를 사로잡고 베네벤토에 수감했다. 여기까진 일이 잘 풀리는가 했는데 1042년 2월, 아테눌프는 동로마 제국이 엑사고스토스의 몸값으로 지불한 돈을 가지고 동로마로 도망쳐 버렸다. 당시 노르만 용병대가 살레르노 공작 과이마르 4세에게 상당한 급료를 지불받아 점차 포섭되고 있었는데, 그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달아났던 것으로 보인다.
노르만 용병대는 기껏 세웠던 지도자가 돈을 갖고 도망쳐버리자 아르이로스를 새 지도자로 선출했다. 1042년 4월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타란토에 상륙한 뒤 바리로 진군하자, 아르이로스는 노르만 용병 7천 명을 파견하였고 이들은 마니아케스를 격파해 타란토로 몰아냈다. 그해 7월, 아르이로스는 노르만군과 함께 지오베나초를 포위하여 사흘간 공성전을 벌인 끝에 함락시켰다. 노르만군은 지오베나초의 로마인들을 대거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했고 이를 보다 못한 아르이로스가 간청하고 나서야, 포로로 잡았던 주민들을 풀어줬다. 그 후 4년간 남이탈리아에서 세력을 굳히던 아르이로스는 콘스탄티노스 9세와 협상한 끝에 1046년 자신의 영향력을 인정받는 대가로 제국에 정식으로 귀순했다.
제국은 아르이로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해 "이탈리아,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파플라고니아의 공작" 칭호를 내리는 등 융숭한 대접을 하는 한편, 새로운 총독을 보내 남이탈리아를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노르만 용병대는 번번이 총독을 살해하는 등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1051년, 제국은 아르이로스를 이탈리아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3월에 바리에 도착한 뒤 제국에 반항을 일삼았던 바리의 귀족 로무알드와 피에트로 형제를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했다. 이렇듯 아르이로스가 완전히 동로마 제국의 지배에 순응하고 자신들을 억압하자, 노르만인들은 오트빌 가문의 탕그레드의 셋째 아들 옹프루아와 넷째 아들 로베르 기스카르를 중심으로 뭉쳤다.
1053년 6월 18일, 옹프루아와 로베르 기스카르는 아풀리아의 치비타테에서 교황 레오 9세가 친히 이끌고 온 교황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었다.( 치비타테 전투) 이후 로베르 기스카르는 1055년 미네르비노, 오트란토, 갈리폴리를 점령해 아풀리아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옹프루아는 로베르 기스카르의 권세가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해 칼라브리아로 보냈다. 로베르 기스카르는 그곳에서도 탁월한 활약을 하여 1056년 살레르노를 공략하고 뒤이어 코센차를 함락했다. 1057년 봄, 옹프루아는 임종이 다가오자 로베르 기스카르를 멜피로 부른 뒤 어린 아들들을 보좌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1057년 8월 옹프루아가 사망한 후, 로베르 기스카르는 조카들을 밀어내고 아풀리아의 백작에 취임했다. 그는 이때부터 동로마 제국의 영역을 향한 본격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3. 전개
3.1. 로베르 기스카르의 남부 이탈리아 장악
1057년, 로베르 기스카르는 칼라브리아의 동로마 제국령인 카리아티 시를 포위 공격해 수 개월만에 함락시켰다. 뒤이어 교황 니콜라오 2세와 밀약을 맺었다. 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압력으로부터 교황령을 지켜주는 대신, 교황은 그를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시칠리아의 공작으로 봉한다는 것이었다.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는 여전히 동로마 제국에 속했고 시칠리아는 무슬림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 이래 시칠리아 토후국 수중에 있었다. 즉, 그는 교황으로부터 이 지역을 자기 것으로 삼을 권리를 인정받은 것이다.1059년, 로베르 기스카르는 로사노와 게라체를 잇따라 공략했다. 이때 풀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로베르 기스카르는 풀리아로 진군했고, 동생 루지에로 1세가 칼라브리아의 남은 영토를 마저 공략했다. 1059~1060년 겨울, 루지에로는 칼리브리아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동로마 제국의 도시인 레지오 시를 공략하기 위해 공성 무기를 대거 활용해 맹공을 펼쳤지만 수비대의 끈질긴 저항으로 조기 함락에 실패했다. 1060년 봄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로베르 기스카르가 동생과 합류해 공세를 펼쳤다. 결국 그해 여름 레지오 수비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자유롭게 돌아갈 수 있는 조건하에 항복했다. 이리하여 칼라브리아는 노르만족의 손에 넘어갔다.
1060년, 콘스탄티노스 10세는 로베르 기스카르가 칼라브리아 정복을 완료하는 사이에 이탈리아에 아불하레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했다. 아불하레는 전임 총독 아르이로스와 힘을 합쳐 아풀리아 일대 대부분을 장악한 뒤 로베르 기스카르의 본거지인 멜피를 포위했다. 기스카르와 루지에로는 급히 멜피로 달려와서 1061년 동로마군을 격퇴해 멜피를 구했고, 여세를 이어가 브린디시와 오리아를 탈환했다. 그러나 1064년부터 1068년까지 옹프루아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들을 지지하는 가신들의 반란에 직면했고, 동로마군은 이들과 연합해 브린디시, 오리아, 타란토를 다시 공략했다.
그러던 1068년, 로마노스 4세가 셀주크 제국의 아나톨리아 침략에 대응하고자 남이탈리아에서 병력을 대거 차출했다. 로베르 기스카르는 이 때를 틈타 공세를 감행해 동로마군과 반란군의 손아귀에 있던 모든 도시를 쉽게 공략했다. 1068년 6월, 그는 아르시나에 갇혀 있던 마지막 반란군 요새를 함락시켰고, 동로마군을 바리에 몰아붙였다. 1068년 8월 5일, 로베르 기스카르는 바리를 육상과 해상에서 모두 봉쇄하고 포위 공격을 가했다. 아르이로스는 공방전이 한창일 때 병사했고, 아불하레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공방전이 막 시작할 때 바리에서 탈출했다.
1069년 초, 스테파노스가 지휘하는 동로마 함대가 노르만 함대의 해상 봉쇄를 돌파하려 했다가 대부분의 함선을 잃었다. 그럼에도 스테파노스는 기어이 봉쇄를 뚫고 바리로 입성하여 음식과 무기를 지원한 뒤 바리 수비를 이끌었다. 1071년 초, 스테파노스는 바리에서 빠져나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려가서 로마노스 4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로마노스 4세가 파견한 함대는 바리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노르만 함대에게 섬멸되었다. 눈앞에서 이 참상을 지켜본 바리 주민들은 전의를 잃고 성문을 열었다. 이리하여 1071년 4월 16일, 로베르 기스카르는 동생 루지에로와 함께 바리에 입성했다. 이로써 동로마 제국은 남부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3.2. 로베르 기스카르의 야망
바리를 함락시킨 뒤, 기스카르는 남이탈리아에서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랑고바르드 계열 국가인 살레르노 공국과 아랍인의 지배를 받는 시칠리아 공략에 착수했다. 1072년 시칠리아에 남은 아랍인의 마지막 거점인 팔레르모가 공략되었고, 1077년 살레르노 역시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넘어갔다. 로베르 기스카르는 남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전역을 지배하게 된 아풀리아 공국의 새로운 수도를 살레르노로 정했다.1073년, 로베르 기스카르는 미하일 7세에게서 군사 동맹을 맺는 대가로 자신의 동생과 로베르 기스카르의 딸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딸을 결혼시키자는 제안을 받았다. 로베르 기스카르가 별다른 답신을 보내지 않자, 미하일 7세는 자신과 알라니아의 마리아 황후의 갓난 아들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그의 딸과 결혼시키고, 동로마 제국의 훈장 44개를 로베르 기스카르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나누어주겠으며, 매년 금 200파운드를 줄 테니 군사 동맹을 맺자고 청했다. 로베르 기스카르는 차기 황제의 황후에 자기 딸 헬레나를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하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1078년, 미하일 7세가 니키포로스 3세에 의해 폐위되면서, 로베르 기스카르의 딸 헬레나가 차기 황후가 될 길은 사라지고 말았다. 로베르 기스카르는 이를 빌미삼아 발칸 원정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2년간 지배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토벌하는 데 시간을 보낸 뒤, 1080년 롬바르디아와 아풀리아 전역에서 많은 장정을 징집하고 선박을 대대적으로 건조하는 등 원정 준비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살레르노에 라이토르라는 수도자가 찾아왔다. 이 사람은 자신이 사실은 폐위되었던 미하일 7세라면서, 니키포로스 3세에게 황위를 찬탈당한 뒤 수도원에 갇혔다가 가까스로 탈출했으니 복위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이 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여러 설이 제기되었지만 정설은 없다. 다만 미하일 7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주교로 지내고 있었으니, 이 자가 가짜인 것만은 분명하다. 로베르 기스카르 역시 그가 가짜라는 걸 눈치챘지만, 이 인물을 동로마 황제로 복귀시키겠다는 명분을 내걸기로 하고 라이토르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줬다.
1080년 12월, 로베르 기스카르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퐁투아즈 백작 라둘프를 사절을 보내 니키포로스 3세에게 헬레나를 만족스럽게 대우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노르만인들을 회유하고 당시 내무대신이었던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의 지지를 확보하게 했다. 라둘프는 알렉시오스 콤니노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니키포로스 3세를 몰아내고 알렉시오스 1세로 즉위한 것을 확인했다.
그 후 알렉시오스 1세와 친분을 다진 라둘프는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돌아가서 "전 황제 미하일이 수도원에 있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미하일 황제라 자처하는 자는 가짜고, 헬레나 역시 잘 대우받고 있다. 알렉시오스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와 우호를 제안하고 헬레나를 귀국시키거나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와 결혼시키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이참에 동로마 제국을 자신의 발 아래 완전히 굴복시키기를 희망했기에 라둘프의 제안을 뿌리치고 원정을 단행했다.
3.3. 발칸 전쟁
1081년 5월, 로베르 기스카르는 1,300명의 노르만 기사를 포함한 16,000명의 병력과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살레르노에서 아드리아 해로 출항했다. 그들은 아블로나에서 일찍이 노르만족과 동맹을 맺었던 라구사 공화국 소속 함선들과 합세했다. 함대는 해안을 따라 천천히 항해해 코르푸에 닿았고, 코르푸의 제국 수비대는 즉각 항복했다. 로베르 기스카르는 코르푸를 전진 기지로 삼은 뒤 일리리아의 주요 항구인 디라히온을 공략하기로 했다. 그런데 코르푸에서 북쪽으로 가서 아크로케라우니아 곶을 도는 순간, 함대는 갑작스러운 폭풍을 만나 일부 함대가 침몰되었다. 로베르 기스카르는 함대를 가까스로 수습해 디라히온 연해의 정박지에 상륙시켰다.얼마 후,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도메니코 셀보가 이끄는 베네치아 함대가 노르만 함대를 야습했다. 그들은 지중해에서 아드리아 해로 들어가는 오트란토 해협을 노르만족이 장악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이참에 제국으로부터 점수를 따서 상업적 특혜를 얻고 싶었기에, 알렉시오스 1세의 구원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베네치아 함대는 보트에 활대의 양쪽 끝까지 병사들을 싣고 밧줄로 들어올려 아래의 적들에게 화살 세례를 퍼부었고, 동로마 측으로부터 사용 방법을 숙지한 그리스의 불을 퍼부었다. 결국 노르만 함대는 궤멸되었고, 로베르 기스카르의 육군은 상륙지에서 고립되었다.
하지만 로베르 기스카르는 포기하지 않고 디라히온을 포위한 뒤, 디라히온 수비대 지휘관 요르요스 팔레올로고스에게 미하일 황제를 복위시키려 하니 당장 따르라고 요구했다. 요르요스는 자신이 미하일 황제를 잘 알고 있으니, 그를 눈앞에서 확인한 뒤 성문을 열고 도시를 넘겨주겠다고 밝혔다. 이에 라이토르는 즉시 군인과 귀족들의 호위를 받으며 성곽 앞에 행진했고, 악대는 음악을 연주했다. 그러나 수비대는 그를 보고 "넌 미하일 황제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일이 풀리지 않자, 로베르는 도시를 맹공격했다. 하지만 디카리움 수비대는 여름 내내 버텼고, 간간히 돌격대를 내보내 노르만군에게 타격을 입혔다.
1081년 10월 15일, 알렉시오스 1세가 20,000~2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디라히온 인근에 도착했다. 황제의 군대에는 타그마 8,800명, 프랑크 용병 1,000명, 바랑인 친위대 1,000명, 룸 술탄국이 보내준 궁기병대 9,000명,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봉신인 두클랴 왕국의 국왕 콘스탄틴 보딘이 이끄는 부대가 포함되었다. 로베르 기스카르는 디라히온 북쪽으로 이동한 뒤 10월 18일 황제의 군대와 대적했다. 중앙 대열은 자신이 맡았고, 좌익이나 측면에 해당하는 내륙 쪽엔 아들 보에몽 1세가 맡았으며, 우익은 랑고바르드족 공주이자 자신의 아내인 시켈가이타가 맡았다.
이후 벌어진 디라히온 공방전에서, 노르만군은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한 뒤 바랑인 친위대에 고용된 앵글로색슨족 장병들의 복수심에 가득찬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우익이 붕괴되면서 꼼짝없이 패할 위기에 직면했다. 이때 시켈가이타가 병사들을 독려했다. 안나 콤니니는 알렉시아스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병사들이 달아나는 것을 본 로베르의 아내 시켈가이타(남편 곁에서 말을 달리는 그녀는
아테나까지는 아니더라도
팔라스처럼 늠름해 보였다.)[2]는 맹렬히 그들을 쫓아가서 우렁찬 목소리로 마치
호메로스의 시를 읽는 것처럼 이렇게 외쳤다.
"너희는 어디까지 달아나려느냐? 어서 일어나서 사나이답게 행동하라!"
그래도 병사들이 계속 달아나자, 그녀는 장창을 움켜쥐고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 도망자들을 쫓았다. 그제야 병사들은 정신을 차리고 전장으로 돌아왔다.
"너희는 어디까지 달아나려느냐? 어서 일어나서 사나이답게 행동하라!"
그래도 병사들이 계속 달아나자, 그녀는 장창을 움켜쥐고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 도망자들을 쫓았다. 그제야 병사들은 정신을 차리고 전장으로 돌아왔다.
이때 보에몽이 좌익의 궁수 부대를 이끌고 아군 전열 깊숙이 침투한 바랑인 친위대를 향해 화살을 퍼붓자, 바랑인 친위대는 기세를 잃었다. 그들은 아군 본대보다 너무 앞서 나왔기 때문에 퇴로마저 차단되었고, 결국 대부분 사살되었다. 한편 알렉시오스 1세는 중앙에서 최선을 다해 맞섰지만 노르만 군대의 압도적인 전투력을 버티지 못한 병사들이 패주하면서 위기에 직면했다. 급기야 룸 술탄국 궁기병대와 콘스탄틴 보딘의 부대가 전장을 이탈해버리자, 알렉시오스 1세는 홀로 말을 몰아 전장을 가까스로 빠져나와 오흐리드의 산악 지대로 피신한 뒤 잔여 병력을 수습했다.
디라히온은 알렉시오스 1세가 패주한 뒤에도 4개월을 더 버텼지만, 1082년 2월 한 베네치아 주민이 성문을 열어주는 바람에 함락되었다. 그 후 로베르 기스카르는 일리리아 전역을 수 주일만에 휩쓸고 카스토리아를 뒤이어 함락시켰다. 이제 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는 것은 시간문제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해 4월, 로베르 기스카르는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캄파니아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는 알렉시오스 1세의 공작이었다. 이보다 앞서, 로베르 기스카르에 의해 아풀리아 공작 직위에서 밀려난 옹프루아의 아들 아벨라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피신해 있었다. 아벨라르는 알렉시오스 1세의 설득을 받아들여 비밀리에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황제가 내준 막대한 자금과 형제인 에르망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위협을 받고 있으니 서둘러 귀국해서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 역시 알렉시오스 1세의 공작이었다. 그는 하인리히 4세에게 동맹을 제안하면서, 그 대가로 금괴 36만 개, 고위 궁정 관리 스무 명의 급료, 진주가 박힌 황금 가슴장식, 크리스탈 술잔, 붉은 줄마노로 만든 컵, 그리고 '성인들의 유품이 작은 꼬리표로 분류되어 담긴 금갑성물함' 등 귀중한 보물들을 선물했다. 하인리히 4세는 동로마 제국이 로베르 기스카르를 묶어두는 사이 성직자 서임 문제로 갈등을 벌이는 교황을 폐위시키기로 작정하고 로마로 쳐들어갔다. 상황이 이처럼 꼬이자, 로베르 기스카르는 할 수 없이 아들 보에몽에게 원정군 지휘를 맡긴 뒤 아드리아 해를 건너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3.4. 이후의 전쟁
알렉시오스 1세는 교회의 재산을 몰수해가며 국방비를 대거 충당해 병력을 다시 끌어모은 후 로베르 기스카르가 떠난 틈을 타 노르만군을 물리치려 했다. 그러나 보에몽은 야니나와 아르타에서 동로마군을 상대로 잇따라 승리를 거두고 마케도니아 전역과 테살리아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러던 1083년 봄, 양군은 라리사에서 대치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전투가 임박할 때 주력군을 매부인 요르요스 멜리세노스와 바실리오스 쿠르티키오스에게 맡기고, 이들에게 적을 향해 진군하되 맞붙는 순간 방향을 돌려 후퇴하라고 명했다. 그 사이 알렉시오스는 사전에 선발한 병력을 이끌고 우회로를 통해 노르만 진영의 배후로 돌아갔다.이후의 전투에서 노르만군이 후퇴하는 적을 맹추격하는 동안, 알렉시오스 1세는 적의 진지를 습격해 남아 있는 적군을 사살하고 보급품을 모조리 약탈했다. 뒤늦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보에몽은 카스토리아로 퇴각했다. 그 후 보에몽의 노르만군은 제국군과의 여러 전투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급료를 지급받지 못해 전의를 잃었다. 여기에 알렉시오스가 탈영병에게 큰 보수를 지불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병사들은 더욱 싸울 의욕을 잃었다. 보에몽이 자금을 얻어오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나자, 노르만군은 대거 알렉시오스 1세에게 투항했다. 베네치아 함대는 이 틈을 타서 코르푸와 디라히온을 수복한 뒤 동로마 제국에 넘겼다. 1083년 말에 이르자, 발칸 반도에서 노르만군이 점령한 지역은 아드리아 해 연안의 몇 개 섬과 해안 지대 뿐이었다.
한편, 로베르 기스카르는 반란을 평정한 뒤 산탄젤로 성에서 외롭게 농성하고 있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구출했다. 이후 1084년 봄 새롭게 병력을 소집한 뒤 로마로 진군하여 하인리히 4세와 일전을 벌이려 했다. 하인리히 4세는 사전에 로마를 떠나 롬바르디아로 철수했고, 1084년 5월 27일 로마에 입성한 로베르 기스카르는 로마를 사흘 동안 대대적으로 약탈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이 봉기했고, 로베르 기스카르는 민병대의 기습을 받아 죽을 뻔했다가 아들 루지에로 보르사가 구원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노르만군은 민병대를 꺾고자 로마 곳곳에 불을 질렀고, 카피톨리누스와 팔라티누스 언덕을 포함한 수많은 지역에서 성당과 궁전, 고대의 신전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기록에 따르면, 콜로세움과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사이의 건물들 가운데 불타지 않은 건물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후 로베르 기스카르는 신변 보호를 명분삼아 그레고리오 7세를 본거지인 살레르노로 이송시킨 뒤 1084년 가을 보에몽과 다른 두 아들 루지에로와 기, 그리고 150척의 새 함대를 이끌고 발칸 반도로 건너갔다. 그러나 부트린토에서 폭풍으로 인해 2달 동안 항해가 중단되었고, 코르푸 해협을 가까스로 건넜을 때 베네치아 함대의 공격을 받아 3일 동안 2차례나 참패했다. 하지만 로베르 기스카르는 잔여 함대를 끌어모은 뒤, 적이 승리에 취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기습 공격을 감행해 3번째 해전에서 승리했다. 안나 콤니니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13,000명의 베네치아 병사가 죽고 2,500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고 한다. 이 포로들은 이후 신체 훼손형에 처해졌고, 도메니코 셀보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도제 직에서 물러났다.
코르푸를 장악한 노르만군은 육지에 상륙한 뒤 원정을 이어가려 했으나, 1084년 겨울에서 1085년 봄까지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노르만 기사 500명이 죽고 상당수 병력이 몸져 누웠다. 여기에 로베르 기스카르의 장남 보에몽도 병에 걸려 바리로 후송되었다. 로베르는 병력을 재정비한 뒤 1085년 초여름 원정을 재개하여 케팔로니아로 행진했다. 그러나 도중에 자신 역시 전염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아테르 곶에 상륙한 뒤 피스카르도 만으로 들어가서 요양 생활을 하다가 1085년 7월 17일 아내 시켈가이타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그 후 노르만군이 발칸 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전쟁은 막을 내렸다.
4. 이후
로베르 기스카르가 사망한 후, 아풀리아 공국은 시켈가이타의 아들인 루지에로 보르사에게 상속되었다. 이에 반감을 품은 다른 아들들과 조카들이 대거 반기를 들면서, 로베르 기스카르가 생전에 구축한 영역은 산산조각났다. 그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보에몽 1세는 훗날 제1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새로운 활로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 결과 안티오키아 공국의 공작이 되었으나, 알렉시오스 1세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이 위세를 회복하여 안티오키아에 위협을 가해오자, 전세를 뒤집기 위해 시칠리아로 잠입했다.1106년 초, 보에몽은 생 레오나르데 노블라트 성당에서 군중을 소집한 뒤 알렉시오스 1세를 다음과 같이 규탄했다.
"그는 사악한 배반으로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을 억압했다. 어떤 이들은 난파선에 갇혔고, 많은 이들은 독살당했으며, 더 많은 이들은 망명했으며 무수한 이가 이교도들에게 넘겨졌다. 이 황제는 기독교가 아니라 미친 이단자이며, 배교자
율리아누스, 또다른
유대인이며, 평화를 가장하면서도 전쟁을 선동하고, 형제들의 목을 베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항하는 피비린내 나는
헤롯이다!"
그 후 보에몽은 34,000명의 노르만 병사들을 끌어모은 뒤 1107년 디라히온에 상륙했다. 그러나 타티키오스와 요안니스 콤니노스 두카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그들을 효과적으로 격퇴하고 해안가에 봉쇄했다. 결국 보에몽은 1108년 봄 알렉시오스 1세에게 무릎을 꿇고 데볼 조약을 체결했다. 안티오키아는 명목상 동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에 전쟁 시 병력을 보내야 하고 공물을 매년 납부해야 하며, 종교적으로는 정교회 관할에 들어갔다. 보에몽 역시 형식적으로나마 제국의 관리로 임명되었다. 보에몽은 조카 탕그레드에게 안티오키아를 맡긴 뒤 실의에 빠진 채 아풀리아의 카노사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111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