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 영어: Antony's Parthian W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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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기원전 36년 | |
장소 | 아르메니아, 파르티아 | |
교전 세력 |
안토니우스 아르탁세스 왕조 폰토스 왕국 카파도키아 왕국 갈라티아 |
파르티아 메디아 아트로파테네 왕국 |
지휘관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피우스 스타티아누스† 플라비우스 갈루스† 아르타바스데스 2세 폴레몬 1세 ◎ |
프라아테스 4세 모나세스 아르타바스데스 1세 |
병력 |
16개 군단 60,000명 10,000명의 이베리아인 및 켈트족 기병 30,000명의 동맹군 |
기병 50,000명 |
피해 | 사상자: 35,000명 | 불명 |
결과 | 파르티아의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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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36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프라아테스 4세 치하의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을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쟁이다.
2. 배경
기원전 53년 6월 9일,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이끄는 보병 30,000명에서 40,000명, 기병 4,000명에 달하는 로마군이 파르티아의 명장 수레나스의 기병 10,000명를 상대로 벌인 카르헤 전투에서 궤멸당하고 여러 군단기를 노획당했다. 그 후 파르티아의 샤한샤 오로데스 2세는 시리아를 수시로 침략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간의 내전( 카이사르의 내전)이 벌어지자 폼페이우스에게 동맹을 제안하면서 그 대가로 시리아를 달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원전 45년 오로데스 2세는 카이사르의 사촌이자 시리아 총독인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킨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바수스를 지원해, 그가 2년 동안 로마에서 보낸 진압군을 상대로 항전할 수 있도록 했다. 카이사르는 이런 파르티아를 응징하고자 대대적인 원정 준비를 했으나,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정을 떠나기 직전에 열린 원로원 회의에 참석했다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에게 암살당했다.그 후 카이사르파와 '해방자'를 자처한 카이사르 암살자파간의 내전( 해방자 내전)이 벌어지자, 파르티아의 샤한샤 오로데스 2세는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를 지원했으며, 파르티아군의 일부 부대는 필리피 전투때 카시우스와 브루투스의 휘하에서 싸웠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에 따르면, 카시우스는 전투 직전에 퀸투스 라비에누스( 티투스 라비에누스의 아들)를 파르티아에 보내 추가 지원을 요청했다고 한다. 해방자파가 필리피 전투에서 패망했지만, 로마령 동방 속주의 혼란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오로데스 2세는 동방을 맡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 7세와 함께 이집트에 있는 동안 해방자파인 퀸투스 라비에누스와 아들 파코로스 1세에게 군대를 맡겨 시리아, 유대, 소아시아를 공략하도록 했다.(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침공 소식을 듣고 페니키아 해안의 티레까지 항해하여 적의 침략을 저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티레에서 접한 소식은 최악이었다. 시리아에 주둔한 로마군 상당수가 퀸투스 라비에누스에게 귀순했고, 안토니우스의 부관이자 시리아 총독이었던 루키우스 데키디우스 삭사는 라비에누스와 파르티아 연합군에게 연전연패하다가 카파도키아에서 살해당했다. 이리하여 시리아를 공략한 뒤, 파르티아인들은 군대를 둘로 나눠서 라비에누스가 이끄는 절반이 소아시아의 킬리키아로 쳐들어갔고, 파코로스 1세가 이끄는 나머지 부대는 티레를 제외한 시리아 해안 도시들을 공략한 뒤 유대 속주로 진격해 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와 연합하여 친 로마 성향이었던 하스몬 왕조의 국왕 요한 히르카노스 2세와 파사엘 및 헤로데의 군대를 격멸한 뒤 안티고노스 2세를 유대 국왕으로 옹립했다.
여기에 서방에서도 나쁜 소식이 전해졌다. 이탈리아에서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아내 풀비아가 옥타비아누스를 상대로 페루시아 내전을 일으켰다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게 패배해 페루시아에 갇혔다는 것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서쪽과 동쪽 모두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일단 그리스로 이동한 뒤 상황을 지켜봤다. 그러나 동생을 구하려 하지 않았고, 시칠리아 섬을 기반으로 삼아 지중해를 지배하고 있었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동맹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동생이 항복하고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으로 보내진 후인 기원전 40년 5월에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브룬디시움으로 진군하여 옥타비아누스와 대치했다. 양측 병사들이 싸우길 원하지 않았기에 몇 달간 협상한 끝에 그해 10월 브룬디시움 협약을 체결했다. 옥타비아누스의 갈리아 지배는 공인되었고,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가 안토니우스의 새 아내가 되었다. 여기에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등 옥타비아누스에게 맞섰다가 망명한 인사들을 사면하기로 했다.
옥타비아누스 문제를 매듭짓고 그리스로 돌아온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11개 군단, 기병대, 투석병을 집결시켰다. 그렇지만 이 병력이 모이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일단 부관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에게 2개 군단을 맡겨 소아시아를 침략하고 있는 퀸투스 라비에누스를 저지하도록 했다. 하지만 벤티디우스는 단순히 시간을 끄는 것을 넘어 퀸투스 라비에누스와 파코로스 1세를 주살하고 파르티아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모조리 되찾는 대활약을 선보였다. 기원전 38년에 전쟁을 마무리한 벤티디우스는 로마로 돌아가 개선식을 거행했지만, 안토니우스로부터 다시는 기용받지 못했다. 혹자는 이에 대해 부관인 벤티디우스가 안토니우스 자신보다 높은 명성을 얻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그 후 안토니우스는 침략 행위를 자행한 파르티아를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대적인 원정에 착수했다.
3. 전개
카르헤 전투 이래, 로마인들은 파르티아를 두려운 적수로 여기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부관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하려다가 암살당한 일로 많은 로마인들이 안타까워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이 카이사르를 대신해 파르티아 원정을 성공시킨다면 불후의 명성을 얻고 로마 최강의 권력자로 우뚝 서리라고 여겼다. 게다가 당시 파르티아의 내부 사정도 좋지 않았다. 기원전 37년 오로데스 2세가 죽었고, 프라아테스 4세가 샤한샤를 물려받은 뒤 30명에 달하는 모든 친형제 및 이복형제를 처형했다. 파르티아의 귀족 모나세스(Monaeses)는 잔혹한 숙청을 피해 시리아로 망명하여 안토니우스 휘하에 들어갔고, 안토니우스는 모나세스에게 라리사, 히에라폴리스, 아레투스 등 3개의 도시를 통치할 권리를 맡기고 파르티아 왕위에 앉혀주겠다고 약속했다. 모나세스는 로마군이 파르티아의 모든 지역을 손쉽게 정복할 수 있다며 장담했고, 안토니우스는 이에 고무되어 전쟁을 준비했다.안토니우스는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확보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옥타비아누스의 지원을 받아야겠다고 여겼다. 기원전 37년 봄, 그는 옥타비아누스와 만나 새로운 타렌툼 협약을 체결했다. 제2차 삼두정의 임기를 5년 연장하기로 했으며, 안토니우스는 시칠리아 내전을 벌이고 있는 옥타비아누스를 돕기 위해 130척의 함선을 즉시 보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대가로 시칠리아 내전을 마무리하는 즉시 군단병 20,000명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안토니우스는 뒤이어 이집트로 가서 클레오파트라 7세와 만나 파르티아 원정에 필요한 막대한 군자금을 지원받았다.
그리하여 기원전 36년 초, 시리아에 자리잡은 안토니우스의 기지에 16개 군단 60,000명, 10,000명의 이베리아인 및 켈트족 기병, 30,000명의 동맹군이 집결했다. 여기에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7,000명의 보병과 6,000명의 기병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약속한 군단병 20,000명은 시칠리아 내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지 않았지만, 안토니우스는 이 정도 규모만으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여겨 옥타비아누스의 지원 여부에 개의치 않았다.
프라아테스 4세는 무려 100,000명에 달하는 로마군이 쳐들어올 거라는 정보를 접수하고 두려워했다. 그는 사절을 안토니우스에게 보내 카르헤 전투때 노획한 로마군 깃발을 반환하고 생존한 로마군 포로들을 돌려보낼 테니 평화협정을 맺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콧방귀를 뀌며 거부했다. 한편 그와 함께 싸울 예정이었던 모나세스는 프라아테스 4세의 설득에 넘어가 파르티아로 도로 넘어갔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그것이 전황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거라 여기며 대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했다.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는 1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아르메니아 산맥을 거쳐 파르티아로 진격했다. 병사들은 시리아에서 아르메니아의 험준한 산맥을 돌파하기까지 길고 험난한 행진을 해야 했지만,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군의 허를 찌르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진격하고 싶어서 휴식을 취할 시간을 거의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행군이 늦어진다는 이유로 수송부대가 훨씬 뒤쳐지는 걸 용인했다. 수송부대는 300대의 마차, 80피트 길이의 `숫양'[1], 대량의 식량과 여분의 무기를 갖추고 있었으며, 안토니우스의 부관 오피우스 스타티아누스와 폰토스 왕국의 군주인 폴레몬 1세가 이들을 지휘했다. 여기에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가 파견한 기병대가 이들을 호위했다.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 산맥을 넘은 뒤 파르티아의 속국인 메디아 아트로파테네 왕국의 영역에 들어섰다. 이후 자신을 가로막는 파르티아-메디아 연합군을 연이어 격파한 뒤, 메디아의 주요 요새도시인 프라아스파를 포위했다. 그는 메디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1세가 파르티아에게 과도한 공물을 바치는 것에 불만스러워한다는 정보를 입수했기에, 그가 자신과 손을 잡길 기대했다. 그러나 아르타바스데스 1세는 자신의 나라를 침략한 로마군 역시 곱게 보지 않았기에 가담을 거부했다. 한편, 프라아테스 4세는 50,000명 가량의 기병대를 이끌고 메디아에 도착하여 상황을 살폈다. 그는 곧 로마군의 약점을 알아냈다. 보급부대가 한참 뒤쳐져서 따라가느라 본대의 지원을 받기 힘들었던 것이다. 아마도 파르티아에 도로 귀순한 모나세스로부터 이 정보를 전달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라아테스 4세는 로마군이 프라아스파 요새를 공격하는 데 정신이 팔리도록 내버려두고, 친히 기병대를 인솔하여 아직도 아르메니아 산맥을 넘어가고 있는 로마군 수송부대를 습격했다. 수송부대를 호위하고 있었던 아르메니아 기병대는 안전한 곳으로 도피했고, 수송부대 지휘관이었던 오피우스 스타티아누스는 처절하게 맞섰지만 부하들과 함께 전사했다. 파르티아군은 로마군에게 매우 중요한 공성무기와 보급마차들을 모조리 파괴했고, 폰토스 왕 폴레몬 1세를 생포했다. 참패의 소식이 로마 본군에 전해지자,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여기며 아르메니아로 도피했다.
안토니우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프라아스파 공성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는 도시 성벽의 밑부분에 흙으로 된 경사로를 쌓게 했다. 그러나 적군이 경사로를 쌓는 노동자들을 향해 온갖 종류의 원거리 무기를 퍼부면서 공사가 지연되었고, 그 사이에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면서 날씨가 추워졌으며, 보급품이 궁핍해지고 통신로도 끊겼다. 여기에 파르티아군 기병대가 수시로 로마군 진영을 돌며 치고 빠지는 유격전을 벌였다. 안토니우스는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파르티아군을 향해 돌격하여 6마일이나 쫓아갔지만, 100명도 안 되는 적을 죽였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안토니우스는 프라아테스 4세에게 사절을 보내 카르헤 전투때 노획한 깃발을 돌려주고 포로들을 귀환시킨다면 철수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묵살당했다. 급기야 초겨울에 접어들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전군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안토니우스는 처음엔 아시리아를 통과하는 평평하고 짧은 길을 택하려고 했지만, 파르티아 기병대가 몰아칠 걸 우려해 아르메니아 산맥을 통해 이동하기로 했다. 프라아테스 4세는 로마군이 왔던 길과 같은 길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상하며 그 주변에 군대를 매복시켰지만, 안토니우스는 그 길을 택하지 않고 파르티아 기병이 활동하기 힘든 언덕을 따라 이동했다.
그러다가 3일째 행군했을 때 둑이 허물어져 도로가 침수된 곳에 이르자,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군이 이런 짓을 했으리라 판단하고 부하들에게 전투 대형을 결성하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파르티아 기병대가 습격했지만, 로마군의 맹렬한 반격으로 패퇴했다. 그러나 파르티아 기병대는 끈질기게 추격하여 습격을 가했고, 안토니우스의 유능한 부하들 중 한 명인 플라비우스 갈루스 등이 전사했다. 그래도 안토니우스의 통솔력이 상당했기에, 로마군은 갈증과 허기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파르티아군의 모든 습격을 격퇴할 수 있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로마군은 철수하면서 총 18번에 걸친 전투를 치렀다고 한다.
로마군은 프라아스파에서 철수를 개시한 지 27일 만에 메디아와 아르메니아의 국경지대인 아락스 강에 도착했다. 파르티아군은 로마군이 강을 건너자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는 이 파르티아 원정에서 약 35,000명의 로마군 및 동맹군을 잃었는데, 그 중 절반은 질병으로 사망했다. 안토니우스가 생존자들을 안티오키아에 집결시켰을 때, 아내인 소 옥타비아가 병사들에게 줄 돈, 보급품, 옷을 가지고 왔다. 그녀는 또한 2,000명의 완전무장한 군대를 추가로 데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옥타비아누스가 약속한 20,000명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으며, 또 너무 늦었다. 여기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시칠리아 내전을 치르는 그를 돕기 위해 파견한 120척 중 85척만 돌려보냈다.
안토니우스는 이에 분노했고, 소 옥타비아가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
"가지고 온 건 그대로 보내되 당신은 로마로 돌아가라"
고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누나가 받은 모욕에 복수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벌이려고 했지만, 소 옥타비아가 자신 때문에 안토니우스와 전쟁을 벌이지 말아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하자 결국 취소했다.4. 이후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지내며 기원전 35년/34년 겨울을 보냈고, 기원전 34년 봄, 원정 도중에 배신한 아르메니아를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아르메니아를 전격 침공해 15일만에 제압하고 아르타바스데스 2세를 체포해 알렉산드리아로 압송시켰다. 그 후 메디아로 진군하여 파르티아에 반기를 든 메디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1세의 딸과 클레오파트라 7세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를 약혼시켰다.그렇게 일을 마무리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귀환한 뒤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로마의 신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전통인 개선식을 남의 나라 수도 한복판에서 거행한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로마인들에게 불쾌감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카이사리온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진정한 후계자이며, 클레오파트라 7세와 자신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에게 동방 영토를 분배하겠다는, 일명 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을 발표했다. 로마인들은 이 소식에 엄청난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고,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을 설득해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규탄했다. 이리하여 제2차 삼두정치는 무너졌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양자는 기원전 31년 9월 악티움 해전을 치렀다.
한편, 파르티아 제국의 샤한샤 프라아테스 4세는 100,000명에 달하는 로마의 대군을 막아낸 성과에 기세등등하여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테트라드라크마를 특별 주화에 실었다. 그러나 그는 자만한 나머지 백성과 귀족들에게 잔혹하게 굴다가 민심을 잃었고, 티리다테스 1세의 반란으로 수도에서 축출되었다. 그 후 파르티아는 프라아테스 4세와 티리다테스 1세간의 내전으로 혼란에 빠져, 이전만큼의 위세를 떨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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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에스(aries). 숫양의 모습을 조각한 금속 주물 따위를 단 공성망치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