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데키디우스 삭사 라틴어: Lucius Decidius Sax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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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0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히스파니아 속주 켈티베리아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속주민 → 플레브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데키디우스 삭사(형제) |
직업 | 로마 공화정 호민관, 시리아 총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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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호민관, 시리아 총독.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심복이었다.2. 생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필리피카이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그를 따르는 무리를 비난할 때 언급한 바에 따르면, 그는 히스파니아의 부족민들 중 하나인 켈티베리아 깊은 곳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로마 시민권이 없었지만 카이사르의 내전 때 카이사르의 기원전 49년과 기원전 45년 히스파니아 원정에 참여해 공적을 세운 뒤 카이사르로부터 로마 시민권을 수여받고 로마로 향했다. 기원전 44년 호민관에 선출되었으며, 기원전 44년 여름 캄파니아 일대의 토지를 카이사르를 따랐던 퇴역병들에게 할당하는 문제를 관할하는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키케로는 그가 이 위원회를 통해 막대한 부를 창출했다고 비판했다.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후, 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추종했다. 무티나 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위해 활동하면서 키케로의 비난을 반복적으로 받았다. 기원전 42년 해방자 내전에서도 안토니우스의 부관으로서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와 함께 8개 군단을 이끌고 발칸 반도에 상륙해 헬레스폰트 해협을 막 건넌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군대의 진로를 가로막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트라키아 부족의 왕 한 명이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게 우회로를 알려줬고, 그들은 즉시 그 길을 통해 적의 배후로 이동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노르바누스와 삭사는 별 수 없이 필리피 서쪽으로 퇴각했다. 이후 본군을 이끌고 뒤따라 발칸 반도에 상륙한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필리피 전투를 벌일 때 참여해 승리에 일조했다.
기원전 41년 안토니우스에 의해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이 벌어지자 이를 막으려 했으나 안티오키아와 아파메이아 인근의 평원에서 패배한 뒤 킬리키아로 도주했지만 도중에 파르티아군과 함께 하던 퀸투스 라비에누스에게 따라잡혔다. 플로루스에 따르면, 그는 포로로 잡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살했다고 한다. 반면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와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그는 적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형제 데키디무스 삭사는 기원전 40년에 재무관을 역임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