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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평가 | ||
가족 관계 | |||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b0000> 가족 |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 계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 · 어머니 아티아 · 누이 소 옥타비아 | ||
부인 | 첫째 부인 클로디아 풀크라 · 둘째 부인 스크리보니아 · 셋째 부인 리비아 드루실라 | ||
자식 | 딸 대 율리아 · 양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루키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티베리우스 · 양아들 대 드루수스 | ||
전투 | |||
내전기 | 무티나 내전 · 해방자 내전 · 페루시아 내전 · 시칠리아 내전 ·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 ||
전투 | 필리피 전투 · 옥타비아누스의 일리리아 원정 · 악티움 해전 · 칸타브리아 전쟁 · 갈루스의 아라비아 원정 · 쿠시-로마 전쟁 · 게르마니아 전쟁 · 토이토부르크 전투 | ||
반란 | 일리리아 대반란 | ||
기타 | |||
장소 | 아우구스투스 영묘,(), · 판테온 | ||
기타 | 칭호 ·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
필리피 전투 영어: Battle of Philippi |
||
시기 | 기원전 42년 10월 | |
장소 | 그리스 필리피 | |
원인 | 카이사르의 복수. | |
교전 세력 |
제2차
삼두정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로마 원로원파 파르티아 |
지휘관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루키우스 데키디우스 삭사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아울루스 알리에누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1]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 세라피온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 ←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
병력 |
총원: 53,000 ~ 108,000명 군단병: 40,000 ~ 95,000명 기병: 13,000기 |
총원: 60,000 ~ 105,000명 군단병: 40,000 ~ 85,000명 기병: 20,000기 |
피해 | 사망: 16,000명 | 사망: 8,000명 |
결과 | 제2차 삼두정파의 승리. |
1. 개요
필리피 전투는 기원전 42년 10월 마케도니아 필리피 근처에서 2번에 걸쳐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로마 공화정 말기 제2차 삼두정치의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의 군대(The Triumvirs)와 카이사르의 암살 주동자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이끄는 군대(The Liberators)와의 전투로 고대 로마사 최대 규모의 내전이었다.2. 발단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뒤 민중의 반발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정치공세에 당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각각 마케도니아와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하는 형식으로 도주했다. 그들은 그리스와 시리아를 아우르는 로마 동부 세력을 결집하였으며, 파르티아를 비롯한 세력들 또한 동맹으로 끌어들였다.한편, 로마를 점거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는 키케로를 비롯한 원로원파의 대부분을 숙청해 버리고[2] 제2차 삼두정을 구성하기에 이르렀으며, 로마를 중심으로 휘하의 모든 세력을 결집하였다. 이들은 곧 브루투스, 카시우스와 일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레피두스가 로마에 남아 수비를 맡는 동안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출격하여 로마 동부의 원로원 세력을 척결하기로 결정하였다. 물론 명분상 이들의 목적은 죽은 카이사르의 복수였다.
삼두정 군은 최정예 28개 군단으로 결성되었으며,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와 루키우스 데키디우스 삭사가 이끄는 8개 군단을 정찰부대로 파견했다. 이 8개 군단은 에그나티아 가도를 따라 이동하며 공화정 군을 찾다가 마케도니아 동부의 필리피를 지나 좁은 산길을 틀어막는 형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 바로 뒤에 안토니우스 군이 따라붙었으나 옥타비아누스 군은 옥타비아누스가 병으로 드러눕는 바람에 디라키움에서 머무르며 시간을 지체하고 있었다.
공화정 군은 비록 삼두정 군의 본대가 상륙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으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130척 규모의 해군이 뒤늦게 합류하여 이탈리아 본토와 삼두정 군의 연락선 및 보급선을 차단하였다. 공화정 군은 그리스를 쥐어짜 군자금을 확보해 두었으며 동맹국들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둔 상태였기 때문에 삼두정 군보다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산길을 틀어막은 노르바누스와 삭사의 8개 군단을 우회할 수 있었다. 공화정 군이 우회하는 것이 확인되자 노르바누스와 삭사는 별 수 없이 필리피 서쪽으로 퇴각하였으며 이제 고지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점거하였다. 공화정 군은 지형을 이용해 자신들의 위치를 요새화하였다. 북쪽은 군세를 움직이기 어려운 산지대가 있었고 남쪽 또한 행군이 불가능한 늪지대였으므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명백한 지리적 이점을 얻었다.
3. 1차전
이제 저지에 위치한 안토니우스는 공화정 군을 고지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수차례 싸움을 걸었으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반응하지 않았다. 이에 안토니우스는 우회로를 뚫기로 결정하고 병력 일부를 남쪽 늪지대로 파견했다. 대규모 행군이 불가능한 지역이었으나 안토니우스의 파견대는 로마군 특유의 토목기술로 행군로를 개척하는 데에 성공했다.그러나 이 시도는 곧 카시우스에게 발각되었으며 카시우스는 도로 건설을 위해 튀어나온 안토니우스의 우익을 공격하였다. 이때가 기원전 42년 10월 3일, 카시우스의 생일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이판사판으로 카시우스의 주둔지와 늪지대 사이에 있는 요새화 지대로 병력을 투입하였다. 그 시점에서 브루투스의 부대가 옥타비아누스 부대의 도발에 걸려들어 명령도 받지 않고 돌격을 개시하였으나, 도발에 넘어가면 진다는 통념을 깨고 오히려 옥타비아누스 부대를 궤주 시켰다. 옥타비아누스의 군단기 3개가 노획되는 등 옥타비아누스의 부대는 총체적으로 붕괴되었다.
그러나 에그나티아 가도에서는 정 반대의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쪽은 안토니우스가 우세를 점하여 카시우스의 요새화지대가 무너졌으며 카시우스 측의 목책이 무너지고 참호가 메워졌다. 이 시점에서 카시우스 부대의 일부가 남쪽 늪지대에 내려가 있었으나 결국 본대에 합류하지 못하고 궤멸당했다.
옥타비아누스의 병력손실은 18,000명, 카시우스의 병력손실은 9,000명 정도로 공화정 군이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전투는 종결되었으나 워낙 난전이었고 그로 인한 흙먼지가 자욱했던 탓에 카시우스는 공화정 군이 이기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부대가 무너졌고 브루투스의 군대도 있어야 할 자리에 없자 완전히 졌다고 오판한 카시우스는 부하에게 자신을 죽이도록 명령했다. 사실상의 자살이었다.
브루투스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통곡했다고 하나 부대의 사기를 염려하여 카시우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4. 2차전
1차전이 벌어지던 당일 공화정 해군은 칼비누스 휘하 2개 군단의 상륙 시도를 저지하여 삼두정 군의 보급과 증원을 차단하였다.이미 전장 인근의 도시는 공화정 군이 보급차 싹 쓸어갔으므로 삼두정 군은 추가적인 보급품 획득이 어려웠다. 결국 아카이아까지 보급부대를 파견하기에 이르렀으나 병사들에게 보상금으로 5천 데나리를, 군단에 2만 5천 데나리를 추가적으로 지급하기로 약속하면서 사기는 오히려 더 올랐다.
삼두정 군에서는 안토니우스가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갖추고 묵직하게 중심을 잡고 있었으나 공화정 군은 카시우스가 죽으면서 그 역할을 맡을 사람이 사라져 버렸다. 브루투스는 군사적인 경험도 일천했고 병사들이나 동맹들로부터 그리 신뢰를 얻어내지도 못했다. 삼두정 군이 5천 데나리를 추가 지급하기로 약속한 반면 브루투스는 고작 1천 데나리를 약속했다.
1차전이 끝난 후 3주 동안 안토니우스는 병력을 서서히 진군시켜 브루투스 진영의 남쪽에 포진하는 데 성공했는데, 브루투스는 진열을 남쪽과 동쪽으로 길게 늘어뜨려 에그나티아 가도와 평행하게 포진하고 요새를 여럿 건설하여 대규모 교전을 피하면서 적을 말려 죽인다는 본래의 전략을 계속 이행하고자 했다.
하지만 브루투스에게 칼비누스 휘하의 2개 군단이 상륙하지 못했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못했으며, 계속된 지연전술에 불만이 높아져가던 동방에서 고용한 용병들과 모집한 병사들 가운데 일부가 탈영을 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삼두정 군이 계속해서 진열을 동쪽으로 늘릴 경우, 에그나티아 가도를 통해 네아폴리스에서 보급을 받는 공화파의 보급선을 끊고 산맥으로 몰아붙일 위험이 커졌다. 만약 이 상황이 현실화된다면, 브루투스는 굶어 죽던가 아니면 북쪽의 험준한 산길을 타고 후퇴하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브루투스로서는 고지를 점령하고 있음에도 먼저 싸움을 걸 수밖에 없게 되었고, 10월 23일 다시 전투가 개시되었다.
브루투스는 서쪽 끝에서 삼두정 군의 좌익을 거세게 몰아붙였으나 포위를 면하기 위해 늘여두었던 동쪽의 부대가 삼두정 군의 우익에게 밀리면서 전세가 뒤집혔다. 포위를 피하고자 부대를 너무 넓게 퍼트린 것이 화근이 되었다. 브루투스의 중앙 또한 두텁지 못했으므로 중앙에 가해진 삼두정 군의 주공을 저지하지 못했다.
결국 삼두정 군은 브루투스의 중앙을 돌파하여 브루투스가 있는 서쪽 부대의 측면과 후위에 포진했다.
브루투스의 부대는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브루투스가 인근 언덕에서 병력을 추슬렀을 때 휘하 병력은 고작 4개 군단뿐이었다고 한다. 이길 수 없음을 깨달은 브루투스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5. 전투 후
이 필리피 전투가 안토니우스의 최전성기였다. 그는 그대로 동부에 머물렀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귀환하였으나 다수의 베테랑들을 위한 토지 마련에 골치를 썩였다.다수의 로마 귀족들이 이 전투로 목숨을 잃거나, 항복을 거부한 뒤 전투 후 자살했는데 유명한 웅변가였던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의 아들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와 소 카토의 아들이었던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3]가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나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 같은 일부 귀족들은 안토니우스에게 항복하고 그 밑으로 들어가 목숨을 보전했다.[4]
잔존 공화정 군 중 약 1만 4천 명은 삼두정군으로 편입되었다. 나이 많은 고참병들은 이탈리아로 돌아가 제대했으나, 일부는 필리피에 그대로 남아 식민시를 건설했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시칠리아를 점거하고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5]가 공화정 해군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공화정 군의 저항은 필리피 전투로 끝장난 것으로 본다.[6]
6. 대중매체
HBO 드라마 ROME 2시즌에서 등장. 그러나 상기 언급된 온갖 과정이 생략되고 회전 한 번으로 끝난 것처럼 묘사된다. 브루투스도 카시우스가 죽자 곧바로 따라서 자살돌격을 감행한다.
[1]
소 카토의 아들.
[2]
사실 이건 예정된 결과였는데 옥타비아누스는 원래 민중파였으므로 원로원파인 키케로와 궁극적으로 한 패가 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키케로도 평소부터 카이사르파를 제거하겠다며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옥타비아누스를 부추켜 안토니우스와 싸우게 해 공멸시킨다는 작전 자체는 나쁘지 않았고 젊은 옥타비아누스도 키케로의 말에 넘어가는 듯했으나 사실 옥타비아누스는 오히려 키케로를 보기좋게 이용한 것이었고 이제 이용가치가 떨어지자 반대로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고 레피두스까지 끌어들여 제2차 삼두를 결성해 원로원파를 전부 숙청해 버린 것.
[3]
훗날 옥타비아누스의 아내가 되는 리비아의 아버지
[4]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양아버지가 관용을 베풀었다가 정적들에게 암살당한 사건을 직접 봤기에 자신에게 반기를 든 사람에 대해서는 용서 없이 숙청으로 답했다.
[5]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
네로의 증조할아버지이다.
[6]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공화정이라는 이념보다는 그냥 군벌이 다름없어서 때로는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기도 하는 등 행동에 일관성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