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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평가 | ||
가족 관계 | |||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b0000> 가족 |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 계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 · 어머니 아티아 · 누이 소 옥타비아 | ||
부인 | 첫째 부인 클로디아 풀크라 · 둘째 부인 스크리보니아 · 셋째 부인 리비아 드루실라 | ||
자식 | 딸 대 율리아 · 양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루키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티베리우스 · 양아들 대 드루수스 | ||
전투 | |||
내전기 | 무티나 내전 · 해방자 내전 · 페루시아 내전 · 시칠리아 내전 ·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 ||
전투 | 필리피 전투 · 옥타비아누스의 일리리아 원정 · 악티움 해전 · 칸타브리아 전쟁 · 갈루스의 아라비아 원정 · 쿠시-로마 전쟁 · 게르마니아 전쟁 · 토이토부르크 전투 | ||
반란 | 일리리아 대반란 | ||
기타 | |||
장소 | 아우구스투스 영묘,(), · 판테온 | ||
기타 | 칭호 ·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
IVLIA•CAESARIS•FILIA | 율리아 카이사리스 필리아 | |
로마 제국의 황녀 | |
왕조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Julio-Claudian Dynasty) |
신상 정보 | |
휘 | IVLIA•CAESARIS•FILIA |
율리아 카이사리스 필리아 | |
IVLIA•AVGVSTI•FILIA | |
율리아 아우구스티 필리아 | |
통칭 | 대 율리아(Julia the Elder) |
출생 |
기원전 39년 10월 30일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 로마 |
사망 |
서기 14년 로마 제국 본국 이탈리아 레기움 (향년 52세) |
배우자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 |
티베리우스 | |
자녀 |
가이우스 카이사르,
소 율리아,
루키우스 카이사르,
대 아그리피나,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티베릴루스 |
부모 |
아우구스투스(아버지), 스크리보니아(어머니) |
형제자매 | 티베리우스(의붓오빠, 입양오빠, 남편), 가이우스 카이사르(입양동생, 아들), 루키우스 카이사르(입양동생, 아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입양동생, 아들),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의붓동생, 입양동생) |
1. 개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두번째 결혼으로 맞이했던 아내 스크리보니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유일한 친혈육이다. 동시대 로마인들에게는 율리아 카이사리스 필리아("카이사르의 딸 율리아") 혹은 율리아 아우구스티 필리아("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로 불렸다.2대 황제 티베리우스와는 법적 남매이자, 부부 사이였고, 3대 황제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와 로마의 아우구스타 소 아그리피나의 외할머니다. 따라서 5대 황제 네로에게는 혈연상 외증조모가 된다.
통칭이자 별칭인 대 율리아는 그녀의 장녀 소 율리아와 구분하기 위해 후대에 지어진 것이다.
2. 생애
2.1. 유년기
기원전 39년, 옥타비아누스로 불리고 있던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두번째 아내 스크리보니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옥타비아누스와 어머니 스크리보니아가 정략혼으로 맺어진 사이인데다, 부부 사이가 서로 최악이라서 대 율리아가 태어난 10월 30일 친부모는 상호 합의 하에 이혼했다. 이날 옥타비아누스는 원수보다 못한 사이였던 스크리보니아가 출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의 집에 방문해 아이의 성별과 건강 상태를 살펴본 뒤 인지 선언을 하고 손수 율리아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이 이름은 옥타비아누스의 외할머니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누나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것을 그대로 따온 것이라고 한다.젖을 먹고 자라야 했던 시절, 어머니 스크리보니아와 함께 살다가 어머니가 재혼하자 아버지 옥타비아누스와 계모 리비아 드루실라, 의붓남매가 될 대 드루수스가 머문 팔라티노 언덕의 옥타비아누스 사저에서 성장했다. 흔히 옥타비아누스가 딸 율리아에게 무관심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마크로비우스와 같은 동시대 로마인들에 따르면 아버지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유일한 생물학적 자녀인 율리아를 무척 아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는 바쁜 시간 와중에도 율리아와 자주 시간을 보내고, 최고의 가정교사를 구해 딸이 당대 최고의 교양 수업과 함께 로마 여성들의 필수 교육(방직, 직조, 예법 등)을 배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대 율리아는 또래 소녀들처럼 간단한 셈법, 라틴어와 그리스어 읽고 쓰기, 예법 수업 외에도 방직, 직조를 배우고 배우자에게 토가를 입히는 방법 등을 배웠다.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대 율리아의 가정교육은 로마 귀족, 기사계급 가정 특유의 엄격하고 구식의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래서 율리아는 대개의 소녀들처럼 부모의 엄격한 관리 아래에서 하루 일과가 통제됐고, 아버지와 가문 사람 및 가정교사의 사전 조사 후 결정에 따라 외부인과의 면담이 결정됐다.
2.2. 첫 번째 결혼
로마 시대의 여느 여성들처럼 출생 직후부터 정혼 상대가 친권자인 부모의 결정에 따라 정해졌다. 당연한 말인데, 대 율리아는 법적으로 파트리키 계급[1]이라서 그녀의 미래는 가문 사이의 동맹까지 고려돼 결정됐다.기원전 37년, 고모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전처 풀비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장남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안틸루스와 정혼했다. 이는 카이사르파 화합과 삼두파 결속을 위한 정략적 결정이었는데, 이때 안틸루스는 10살이었고 율리아는 2살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다시 격돌했고, 애당초 로마귀족 사회에서 정혼이란 약혼이라고 해도 언제라도 파기가 가능해 실제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기원전 25년, 14살 생일이 되자마자 또래 소녀들처럼 배우자를 구해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그녀의 남편으로 선정된 이는 고모 소 옥타비아의 아들인 고종사촌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였다. 아버지 아우구스투스에게 친아들이 없다는 점에서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결속 외에도 가문의 후계자 결정과도 연관된 만큼, 대 율리아는 아버지에게 상속자를 낳아 입양을 통해 가문을 이을 의무가 자연스레 부과됐다.
아우구스투스는 후대의 소문과 달리 딸의 첫 결혼을 진심으로 축원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이 당시, 히스파니아에서 전쟁을 지휘하고 있었고 로마로 귀환하려고 하던 중 병에 걸려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친구로 율리아의 대부 역할을 하고 있던,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결혼식 주례를 보고, 신부 아버지 역할을 한 다음 결혼식 뒷풀이까지 주최했다.
대 율리아와 결혼한 마르켈루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사위가 된 직후, 함께 특권을 받은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형제와 달리 폰티펙스 막시무스인 아우구스투스에게 사제 직을 선사받고 추가 영예를 연이어 선물로 받았다. 이로 인해, 그는 리비아 드루실라의 두 아들과 달리 원로원 귀족들에게 공화정 체제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됐다.
이런 가운데, 마르켈루스는 외삼촌이자 장인인 아우구스투스에게 받은 지위 등을 안정시키고자 세를 모은다. 이후 이를 기반으로 장인의 오랜 친구이자 심복인 아그리파를 인신공격하고 그를 추방하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게 아그리파에 대한 인신공격을 멈추라고 정중히 경고하고, 아그리파를 구하기 위해 그를 그리스로 파견했다.
기원전 23년 9월 23일, 로마를 휩쓴 열병에 걸린 남편 마르켈루스가 어이없게 요절했다. 두 사람은 자녀가 없었다.
2.3. 두 번째 결혼
고종사촌 마르켈루스와 사별할 당시 대 율리아는 20살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 아우구스투스는 후계자를 얻고자 딸의 새 남편감을 물색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의 눈에 띤 이가 최고의 친구이자 가장 신뢰하는 측근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였다. 아그리파와 율리아의 혼인은 아우구스투스의 친구 가이우스 킬리니우스 마이케나스의 조언으로 결정됐다고 하는데, 마이케나스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대 율리아의 남편이 될 이는 리비아 드루실라의 큰아들로 율리아의 의붓형제인 티베리우스였을 것이라고 한다.마이케나스가 아그리파를 대 율리아의 재혼 상대로 제시한 명분은 일전에 아우구스투스가 중병에 걸려 죽어갔을 때 아그리파에게 인장 반지를 건네줬다가 마르켈루스파 인사들이 반발하면서, 황실이 분열될 위기에 놓였으니(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방지하고 아우구스투스가 아끼는 아그리파를 그의 유일한 친딸과의 혼인 동맹으로 지켜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면서 마이케나스는 율리아의 또다른 재혼 후보인 티베리우스는 이미 아그리파의 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연인 사이이며 정혼까지 하였으니 이를 깨트리고 율리아와 결혼한다면, 종국적으로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정적이 될 것이며 리비아의 차남으로 아우구스투스가 양자 입적을 강하게 구상해 실행 중인 대 드루수스도 티베리우스와의 골육상쟁을 벌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마이케나스가 리비아 드루실라를 견제하고 자신과 어느 정도 대립 중인 아그리파와 손을 잡는 목적성이 있더라도 이성적으로 볼 때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소 옥타비아, 리비아 드루실라가 장차 대 드루수스를 지지하는 여건을 만듦에도 고민거리가 있었다. 또한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의 큰딸로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인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결혼하여 슬하에 두 딸을 낳으며 잘 살고 있었기에, 이러한 관계는 클라우디아와 이혼한 아그리파와 재혼하게 된 율리아가 자신의 고모이자 전 시어머니[2]이기도 한 소 옥타비아와 필연적으로 대립하게 될 원인이 되었다.[3]
그렇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끝내 마이케나스의 조언이 맞다며 결정을 지었다. 어차피 누나가 자신의 양자로 정식입양될 대 드루수스를 사위로 맞이 할 것이며, 드루수스가 입양 후 후계구도에 오르면, 두 부부를 사돈으로 만들면 된다고 판단한 것이 여러 부분에서 확인되는 만큼, 숙고 끝에 그는 집안 교통 정리를 했다.[4]
아우구스투스는 그 해 율리아를 아그리파와 결혼시켰다. 그 대신,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파의 딸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결혼시켰고, 누나 소 옥타비아의 소원을 들어 누나가 친아들로 생각한 율루스 안토니우스를 아그리파와 이혼한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결혼시켰다.
율리아와 아그리파의 결혼은 전형적인 후계자 양성 목적의 정략혼이었고, 부부의 출산은 당연시 되는 의무로 귀결됐다. 이는 종국적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족들 간의 내분이 유발된 시발점이 됐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의 본래 계획과 달리 티베리우스가 율리아와 결혼하지 못하게 된 점이 컸다. 허나 단기적으로 볼 때, 율리아는 아그리파와의 사이에서 3남 2녀를 얻었고 다섯 아이 모두 성년식 이후까지도 성장해 아우구스투스 일가를 꾸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율리아는 첫 남편 마르켈루스 생전부터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 같은 귀족과 불륜관계를 맺고 있었고, 어릴 적부터 애증관계이면서도 그녀가 짝사랑했던 티베리우스에 대한 열망도 대단해 이는 장차 또 다른 문제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기원전 20년 6월부터 기원전 18년 봄까지 갈리아 일대 정비를 위해 파견된 아그리파를 따라 율리아는 알페스 산맥(오늘날의 알프스 산맥)을 지나 갈리아로 건너갔다. 이후, 그녀는 임신 후 로마로 돌아와 첫 아이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낳았고, 아그리파가 이탈리아로 돌아온 뒤 두 번째 아이인 첫딸 소 율리아를 임신해 얻은 뒤, 세 번째 아이인 루키우스 카이사르까지 출산했다. 이는 그토록 후계자를 원한 아우구스투스를 흡족하게 했고, 율리아 부부의 결혼 전 약속에 따라 율리아의 두 아들 가이우스, 루키우스는 기원전 17년 여름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정식 입양됐다. 이후 율리아는 아그리파와의 사이에서 차녀 대 아그리피나와 삼남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낳았는데, 이 중 막내 포스투무스는 아그리파가 기원전 12년 시골별장에서 급사한 뒤 태어났다.
니콜라우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율리아는 아그리파와 결혼 생활 중 남편 아그리파를 만나기 위해 제국의 여러 곳을 여행다녔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리움(옛 도시명 트로이)에서 갑작스러운 홍수로 거의 익사할 뻔한 일도 경험했는데, 아내가 죽을 뻔하자 아그리파는 조사 후 인재에 따른 문제임을 파악 후 도시 정부와 주민들에게 10만 드라크마라는 거액의 벌금을 부과했다고 한다.[5]
2.4. 세 번째 결혼
아그리파가 캄파니아 시골 집에서 급사한 뒤, 율리아는 막내아들을 낳았다. 이날, 율리아는 손수 막내아들을 인지하고, 남편의 개인이름 마르쿠스를 지어줬다. 그런데 이날, 아버지 아우구스투스는 딸 율리아의 몸상태와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곧바로 그녀의 세 번째 결혼을 진행시켰다.이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기사계급 사내를 구해 대 율리아를 곧바로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친아들일 수도 있다는 소문까지 난 조카사위인 아내의 둘째아들 대 드루수스에게 뒤를 맡길 결정을 은연중 알린 아우구스투스에게,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의 어머니인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가 개입하면서 뒤바뀌게 된다. 여기에는 디오 카시우스 등 고대 기록에서 언급하듯이, 대 율리아가 아그리파 생전부터 잘생기고 결혼 직전까지 갈 뻔 했던 티베리우스에게 여러 번 추파를 던졌던 일 속에서, 율리아의 감정을 고려한 것도 이 결혼의 이유가 됐다고 전해진다. 실제 티베리우스는 장인 아그리파 생전부터 법적 장모이자 의붓남매 사이인 대 율리아의 노골적인 관심을 경멸하면서, 일부러 자리를 피할 정도로 거리를 유지 중이었다.
하지만 아그리파가 갑자기 사망하고, 조카사위이며 양자인 대 드루수스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굳어지는 상황 속에서, 대 율리아의 재혼과 새 남편 문제는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과 성격이 비슷한 아내의 장남 티베리우스를 어떻게든 합법적으로 승진시키려고 고민 중이었다. 이는 그가 친아들이라고 믿었다고 해도 좋을, 대 드루수스를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와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가 적극 후원하는 속에서 그 고민을 키웠다. 또 율리아는 이때 30살도 되지 않았고, 여러 번의 출산을 통해 불임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준 까닭에, 출산 경험 있는 젊은 신부를 선호한 로마 귀족 사회에서 황제의 외동딸 율리아는 여전히 귀족 가문들이 말하는 1등 신붓감이었다. 따라서 아내 리비아가 남편 아우구스투스에게 티베리우스와 율리아 모두를 위해 티베리우스가 사위가 되어야 함을 설파하고, 은연 중 누나 옥타비아가 자신의 막내사위인 드루수스의 미래를 고려하고자 움직였을 때,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생각을 바꾼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마르켈루스 요절 직후 티베리우스를 율리아의 새남편으로 염두에 뒀다는 점과 티베리우스가 정식 입양만 되지 않았을 뿐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들과 같았던 점, 아그리파 급사 이후 대 드루수스가 차기 황제 내지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 전까지의 보호자 겸 후계자로 올라서는 상황 속에서, 율리아와 티베리우스 결혼은 정치적 문제상 당연히 해야 될 정략혼으로 아우구스투스가 결정지은 이유가 됐다.
결국,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로마로 소환해, 대 드루수스와 함께 추진 중인 게르마니아 전쟁 중 티베리우스가 담당한 판노니아 일대 정복 전, 율리아와 결혼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단호하게 티베리우스에게 아버지로서 가부장권을 사용하고, 황제로서 명령까지 내려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즉시 이혼하라고 지시했다. 이날, 티베리우스는 판노니아 정복과 일리리쿰 부족들의 로마화 문제에 관해 보고하려고 하다가 이 명령을 받았다. 아우구스투스가 양아버지이자 황제로서 이를 지시하자, 애처가인 티베리우스는 명령을 받은 직후, 간곡히 이 명령을 거둬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매우 단호했다. 이렇게 되자 티베리우스는 어머니 리비아에게 무릎을 꿇고, 이혼만은 안 된다고 간곡히 호소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이상으로, 리비아의 태도는 완고했다. 그가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아내와 어린 아들 소 드루수스 역시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는 은연 중 협박이 있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는 절망했다. 로마 안에서 이 결혼 결정은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 부부에게도 큰 도움이 됐기 때문에, 티베리우스를 도울 사람은 황실에서 아무도 없었다. 결국 티베리우스는 강제이혼을 당한 뒤, 대 율리아와 약혼 후 곧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율리아가 티베리우스와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다르다고 경멸하면서 오랫동안 불륜관계인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 자신을 결혼시켜달라고 편지를 보내고 티베리우스를 비난했다고 한다. 허나 호사가 수에토니우스는 반대로 티베리우스가 훌륭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부도덕하고 거만한 율리아와의 재혼을 경멸해 이 결혼을 불편해했다고 한다. 누구의 주장이 맞는지 몰라도, 율리아는 세 번째 남편 티베리우스와 성격문제로 늘 냉랭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그 사이에서 아들 티베릴루스를 낳았다.
티베릴루스가 태어나자, 아버지 아우구스투스, 계모 리비아, 남편 티베리우스 모두 기뻐했다. 그러나 어린 아들은 어머니 율리아와 함께 로마로 거처를 옮긴 뒤 유아기의 나이에 죽었고, 율리아는 티베리우스와의 사이에서 두번째 아이를 임신 중 화려하고 밤낮 바꾼 생활 속에서 유산했다. 이는 자연스레 율리아의 남성편력과 불륜 문제로 불거졌는데, 율리아와 티베리우스의 결혼생활은 이때부터 악화됐다. 그렇지만 이보다 심각한 문제는 티베릴루스 요절과 율리아의 유산 과정을 똑똑히 지켜본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가 율리아의 행실을 지적하면서 벌어진 가정 불화였다. 율리아는 남편 티베리우스가 문제를 지적하지 않음에도 이 부분을 걸고 넘어진다고 생각했고, 가정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황제 부부는 율리아가 본인 행실을 회피한다며 맞대응했다. 그러니 율리아의 세번째 결혼 생활은 부부 관계, 고부 관계를 넘어 부녀 관계까지 악화되면서 최악이 됐다.
다행히, 티베리우스는 겉으로는 아우구스투스에게 호민관 특권을 받고 중책을 받은 뒤 일에 몰두하면서 어떻게든 율리아와의 결혼생활을 유지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기원전 9년 겨울, 철군 후 도강 작전 중 대 드루수스가 29세의 젊은 나이에 낙마 후유증에 따른 합병증으로 요절하면서 티베리우스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이 시기, 율리아는 남편 티베리우스가 아버지 아우구스투스에게 여러 권력과 지위를 받음을 이용해, 서서히 정치적 활동을 사적으로 벌인 터라, 티베리우스는 이 문제로도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것을 호소했다. 설상가상 티베리우스가 율리아가 벌인 잡음을 뒷처리하고, 과중한 업무를 떠맡으면서 최선을 다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율리아는 남편이 집에 없는 시간을 이용해 여러 명의 남성들을 애인으로 만들고, 두 아들(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측근을 만들겠다며 사촌언니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의 두 번째 남편 율루스 안토니우스에게 후원자 개념의 애인 자리를 제안해 섭정으로 스카우트하는 시도까지 했다. 그러면서 율리아는 파벌을 꾸려 티베리우스와 아버지 아우구스투스에 맞설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아내 율리아의 정치적 파벌 조성 등을 알게 된 티베리우스는 여러 중압감에 못 이긴 끝에 기원전 6년, 모든 것을 내던지고 스스로 자연인이 되겠다는 편지 한 통을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부부에게 남긴 뒤 로도스 섬으로 야반도주했다.
2.5. 율리아 스캔들
티베리우스가 로도스 섬으로 가버리자, 아우구스투스는 처음에는 양자이자 사위인 그가 책임감없이 아내와 자녀들을 노쇠한 자신과 리비아에게 떠맡기고 갔다며 격노했다. 그러나 리비아가 아우구스투스를 설득하고, 조사를 통해 티베리우스가 더 일찍 파탄날 뻔한 결혼생활을 책임감 하나로 끌고 가면서 유지했음을 알고 아우구스투스는 생각을 바꾼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가 얼른 로마로 복귀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로도스 섬에 가 있는 티베리우스에게 대리인 자격을 하사하고 홀로 남겨진 소 드루수스를 손수 양육했다.이런 상황에서 대 율리아는 공개된 신전에서 여러 남성들과 성관계를 맺고, 화려한 남성편력을 공공연하게 벌인다. 이는 대 드루수스와 사별 후, 홀로 세 아이를 키우면서 어떤 남성과도 소문 하나 없던 사촌동생 소 안토니아와 대비됐고, 이런 비교는 여러 부분에서 참고 또 참는 아우구스투스가 폭발한 이유가 됐다.
결국 기원전 2년,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게 정식으로 가부장권을 내세워 대 율리아에 대한 처벌을 요청하고, 자신의 양자 티베리우스의 명예회복을 위해서 율리아와 티베리우스의 결혼이 무효라는 것을 통과시켜 달라고 상정했다. 이날, 아우구스투스는 아버지로서의 권한을 내세워, 부재 중인 티베리우스 이름으로 결혼무효를 대리하면서 자신이 만든 '율리우스 간통법'에 의거해 딸 율리아와 그녀의 남자친구로 지목된 이들을 모조리 간통죄로 고발했다.
이렇게 되자 로마 사회는 떠들썩해졌고, 대 율리아 재판은 화제가 됐다. 그러나 이런 부끄러움 속에서도 아우구스투스는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친혈육을 벌주겠다고 이를 갈았다. 그 결과, 율리아의 연인들로 지목된 이들은 추방되거나 반역죄로 추가 기소돼 자살해야만 했다. 여기에는 아우구스투스와 그 일가에게 잠재적 정적으로 인식된 오래된 명문귀족들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처벌받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같이 억울하게 자살을 강요당해 목숨을 잃고 그 자녀들이 몰락귀족으로 전락해 평민 수준으로 집안 전체가 쑥대밭이 된 사례까지 벌어졌다.
이 사건에서 가장 화제가 된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유죄판결을 받고 추방됐다. 마르켈루스 생전부터 오랫동안 불륜 관계였던 것을 생각하면, 반역죄 혐의 중 하나인 불경죄로 목숨을 잃어도 할 말이 없던 그였다. 그렇지만 그는 변명을 하지 않고 율리아와 나눈 편지들을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치며, 율리아와 티베리우스 이혼에 자신이 개입됐더라도 궁중음모와 무관함을 공개했다. 그래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는데, 훗날 그는 이를 마음에 두고 있던 티베리우스가 복귀한 뒤 결국 제거됐다.
이 사건에서 또 다른 핵심 피고가 된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와도 연관된 터라, 그라쿠스처럼 율리아와 매우 깊은 관계가 아님에도 반역죄로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았다.[6] 그래서 그는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 어린 아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시집가서 잘 살고 있던 딸 율라 안토니아를 지키기 위해 자택에서 자살했다.
2.6. 추방과 죽음
떠들썩한 스캔들 직후, 아우구스투스는 딸 율리아에 대한 실망감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면서 그녀가 자신과 티베리우스, 가문 모두에게 끔찍한 불명예를 주고 기본적인 가치까지 도전했다고 연설했다. 따라서 율리아 역시 재판 결과가 나올 즈음, 반역죄로 처형될 것으로 예견됐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아를 차마 죽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어떤 로마 아버지보다 잔혹하게 딸 율리아를 추방시킨 뒤 그녀의 남은 삶을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율리아 몸 중 어느 곳에 상처가 있는지, 아우구스투스에게 허락을 받았는지 등을 매뉴얼로 꾸린 질문 이후, 프라이토리아니는 면담자 신상정보를 철저히 조사했다. 이후 그들은 아우구스투스에게 보고를 했고, 아우구스투스는 면담자와 율리아가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해 결정했다. 만일 모두 통과된다면, 면담자는 율리아와 접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때도 그녀는 본인 외의 타인과 말 한마디, 한마디를 아우구스투스가 보낸 여성 노예들에게 감시받았고 남성과의 면담은 일체 거부됐다.율리아가 추방된 직후, 아우구스투스는 어떤 남성과도 만날 수 없게 조치를 명령하고 물에 포도주조차 희석할 수 없도록 했으며, 유언장과 생전 명령을 통해 율리아의 모든 가문 지위 등을 박탈했다. 그녀는 처형되지는 않았지만, 험한 판다테리아 섬으로 종신유배형에 처해졌다. 그 섬 근처까지 어떤 방문자도 아우구스투스 허락없이 들를 수 없게 됐다. 이는 사회 분위기도 비슷해, 어떤 로마인도 율리아를 동정하지 않고 탄원서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율리아의 어머니 스크리보니아가 자발적으로 딸의 부도덕함을 참회한다며 그 고생길에 함께했다. 그래서 율리아는 어머니 스크리보니아, 자신을 가까이에서 모신 여자노예와 함께 판다테리아 섬에 마련된 자그마한 집에서 살게 됐다.
이렇게 추방된 지 5년이 지난 뒤인 서기 4년 초, 율리아는 본토인 이탈리아의 레기움으로 강제로 거처를 옮겨 지내게 됐다. 이 해부터 율리아에게 아버지 아우구스투스는 약간의 연금을 지급하고 마을 산책 정도는 허락했다. 그러나 그녀는 본인이 원하는 대로 유배지와 가까운 대도시도, 로마에도 복귀하지 못했다. 도리어 남은 상속권이 모조리 박탈되고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묻힐 권리까지 아버지 명령으로 모두 빼앗겼다.
이런 가운데, 율리아의 장남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본인의 계부 티베리우스의 로마 복귀를 허락했다. 이에 관해, 디오 카시우스와 수에토니우스 등은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어머니 일로 티베리우스에게 적대감과 실망감을 공개적으로 드러냈을 때, 마르쿠스 롤리우스가 이를 부추기며 티베리우스를 경멸하고, 이번 기회에 티베리우스를 죽이라고 조언할 때부터,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롤리우스 사이는 벌어졌고, 이를 시작으로 티베리우스의 복귀는 사실상 끝이 났다고 한다. 또 디오의 기록 등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가 이를 인지 중인 상황 아래에서 티베리우스의 편지를 받은 뒤 적당한 때에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마지막으로 결정권을 주면서 티베리우스의 명예로운 귀국과 복귀 무대 모두를 성사시켰다고 한다. 아르메니아로 떠나기 전 롤리우스가 자살하고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아르메니아로 출발하기 전에 티베리우스가 로마로 귀국했는데, 이렇게 되자 세람들은 율리아가 남편 티베리우스가 복귀하는 것처럼 조용히 복귀해 티베리우스와 재결합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아를 용서하지 않았고, 율리아의 장남 가이우스 카이사르 역시 티베리우스를 복귀시키는 것을 동의한 대가로 할아버지에게 어머니 율리아의 명예회복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율리아가 본토로 돌아오기 2년 전, 그녀의 의붓오빠였고 남편이었던 티베리우스가 정식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편입됐다. 이 입양 직전, 율리아의 장남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요절했다. 이날, 율리아의 차녀 대 아그리피나의 남편 게르마니쿠스와 율리아의 막내아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역시 아우구스투스의 손자와 아들로 나란히 정식 입적됐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아우구스투스는 친딸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는 딸을 끝까지 용서하지 않았고, 로마 모든 계층의 남녀노소는 대 율리아가 받은 처벌이 지나치지 않고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 결과, 율리아는 살아도 죽은 것보다 못한 처지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대 율리아의 장녀 소 율리아, 막내아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연이어 아우구스투스와 갈등을 일으키고 간통죄 및 반역죄, 폭행죄 및 반역죄 혐의로 줄줄이 추방됐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들이 서기 8년, 서기 6년에 각각 처벌받기 전부터 대 율리아를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율리아 자녀들의 불행한 말로는 종국적으로 아우구스투스 생전 모든 상속권 박탈로 이어졌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했다. 죽음 직전까지도 아우구스투스는 친딸을 용서하지 않았고 어떤 조치도 해제시켜주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측근들에게 "내가 만일 그때 결혼해 그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이라는 말까지 남겼다. 그래서 프린켑스 직을 물려받은 티베리우스는 한때 아내인 율리아의 처지를 딱하게 여겼다. 그렇지만 티베리우스의 동정은 여기까지였다. 여기에는 율리아의 막내아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이용해 반란을 꾸민 루키우스 아우다시우스, 아시니우스 에피카두스의 음모가 깊이 연루된 것이 컸다. 두 사람은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대 율리아 모자를 앞세워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를 모두 제거하려고 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 티베리우스에게 포스투무스를 교살하라고 조언했고 대 율리아를 풀어주지 말라고 했다. 이런 배경으로, 대 율리아는 아버지가 사망한 직후에도 풀려나지 못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아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도 죽은 뒤 대 율리아 역시 사망했다. 죽음 원인은 불분명하나,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그 원인은 전남편 티베리우스가 율리아가 쇠약해져 굶주림 속에 죽을 때까지 방치한 것이 컸다고 한다. 반면 타키투스에 따르면 대 율리아가 죽은 것은 아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아버지, 전남편의 지시로 교살된 것을 듣고 절망해 홧병으로 건강이 나빠져 죽었다고 한다. 어떻게 죽었던 간에, 대 율리아는 사후 아버지의 유언장과 아우구스투스 생전의 지시에 따라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묻히지 못하고, 사후에도 모든 탄원서 접수가 거부돼 명예회복조차 집행되지 않았다.
3. 사후 이야기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해, 아프리카 북부 해안에서 14년 동안 추방생활을 한 율리아의 오랜 연인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가 티베리우스의 지시 혹은 아프리카 총독인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의 명령으로 처형됐다. 이후 15년 뒤인, 서기 29년 장녀 소 율리아 역시 유배지에서 쓸쓸히 죽었다.
[1]
파트리키(라틴어: patrícĭi)는 고대 로마를 다스리던
귀족 계급이다.
플레브스와 함께 로마 시민을 구성했다. 파트리키(Patricii)의 어원은 ‘아버지’를 의미하는 ‘파테르’(Pater)이며, 고대 로마 사회에서는 ‘상류층 재산의 상속자로 선정된 자’, 그리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책임을 진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그 의미대로 고대 로마에서는 엘리트로 간주되었고, 로마 공화정 초기 중기에서는 원로원을 구성하는 인재를 제공해 왔다. ‘파트리키’라는 말은 대부분 ‘플레브스’(라틴어: plebs 평민)라는 하층 계급과 대비해서 사용되어 왔다.
[2]
사별한 전남편 마르켈루스의 어머니이기도 하기 때문.
[3]
소 옥타비아와 율리아 사이의 대립은 옥타비아가 사망한 후에도 멈추지 않고
리비아 드루실라가 그대로 이어받았으며 아그리파의 사후 반강제로 율리아와 재혼한 티베리우스가 로도스 섬으로 도망치듯 가출한 원인 중 하나가 된다.
[4]
아우구스투스는 가이우스 카이사르, 리빌라를 아주 어릴 때 약혼시키고 이들의 결혼을 진행시켰다. 동시에 게르마니쿠스와 대 아그리피나를 결혼시키고,
소 율리아의 딸 아이밀리아 레피다를 클라우디우스와 약혼시켰다.(이중 클라우디우스의 결혼은 소 율리아 부부 숙청 후 무효화된다.)
[5]
거액의 벌금은 주민들이 여러 번 탄원했음에도, 아그리파의 결정이라서 아우구스투스가 탕감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는 유대 왕국의 왕 헤롯이 아그리파에게 정중히 사면을 청하면서 면제됐다.
[6]
더 웃긴 건 율루스의 아내는 율리아의 고종사촌언니인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고모
소 옥타비아의 딸)였다. 율리아는 자신의 사촌형부와 불륜을 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