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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아우구스투스의 조카)

파일:마르켈루스.jpg
이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Marcus Claudius Marcellus)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Julio-Claudian Dynasty)
신상 정보
출생 기원전 42년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 로마
사망 기원전 23년 (향년 19세)
로마 제국 본국 이탈리아 로마
배우자 대 율리아
부모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아버지)
소 옥타비아(어머니)
형제자매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
대 안토니아, 소 안토니아
율루스 안토니우스(입양형제, 매제)

1. 개요2. 생애
2.1. 가계2.2. 어린 시절2.3. 후계자가 되다2.4. 아그리파와의 갈등2.5. 요절
3. 사후 이야기4. 여담

1. 개요

로마 공화정 말 ~ 원수정 초기의 로마황족이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활약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직계손으로, 동명이인이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개창한 로마제국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로,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이다.

2. 생애

2.1. 가계

기원전 42년, '로마의 칼'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직계손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그의 후처 소 옥타비아 사이에서 태어난 4남 4녀 중 유년기 이후에도 생존한 삼남매 중 둘째였다. 고향은 로마. 성인 이후에도 생존한 동복 삼남매 중 유일한 아들[1]로 위, 아래로는 누나 대(大) 클라우디아 마르켈라, 여동생 소(小) 클라우디아 마르켈라가 있었다. 훗날 어머니 옥타비아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재혼하면서 누나의 남편이 된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그의 의붓형제가 됐다. 어머니 옥타비아는 재혼 후 이복여동생 둘을 낳았는데, 그 여동생들이 네로의 조모 대 안토니아, 대 드루수스의 아내 소 안토니아다. 따라서 이부동생 소 안토니아의 두 아들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1세는 그의 조카뻘이 된다.

어머니 옥타비아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종손녀였고, 외삼촌이 옥타비아누스(훗날 아우구스투스), 외할머니는 폼페이우스 누나의 손녀이자 카이사르의 외조카 아티아였다. 하지만 아버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가계는 그 이상으로 대단했다. 할아버지 마르쿠스[2] 와 아버지 가이우스 모두 원로원 내에서 거물급 중진이었고, 포에니 전쟁의 영웅 마르켈루스의 직계손이었다. 또 조모는 명문귀족 유니우스 가 태생의 유니아인데다 이들의 가계에는 또 다른 포에니 전쟁의 전설 파비우스의 피도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88년생으로 기원전 50년 집정관을 지낸 원로원 내 거물급 인사로, 키케로의 오랜 친구였다. 첫 아내와 사별한 이후, 카이사르 누나 율리아의 외손녀 옥타비아와 재혼했지만, 원칙을 강조한 원로원파인 탓에 카이사르의 두번째 집정관 선거 출마를 반대한 주요 원로원 의원 중 한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전이 벌어진 직후, 자신의 형 마르쿠스와 다른 조카들과 달리 카이사르에게 칼을 직접 겨누지 않았고, 폼페이우스 진영에 가담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기원전 49년 이탈리아를 점령한 카이사르에게 용서를 받았고, 9년 뒤인 기원전 40년 5월 병사했다.

2.2. 어린 시절

기원전 40년, 아버지 가이우스가 사망하고 그해 10월 어머니 옥타비아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재혼해 안토니우스의 의붓아들로 성장했다.

기원전 39년, 외삼촌과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측이 미세눔에서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 당시, 양측의 합의 아래 마르켈루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딸 폼페이아와 약혼하게 되는데,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다.

기원전 36년, 어머니 옥타비아를 따라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 지방으로 건너가 살다가, 이후 로마로 돌아왔다.

기원전 33년 외숙모 리비아 드루실라의 전남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사망하면서, 옥타비아누스의 집에서 혈연상 먼 사촌뻘이 되는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형제가 같이 살게 됐다. 이때 마르켈루스는 그들과 형제처럼 함께 살았다. 이 시기 그는 티베리우스와 함께, 외삼촌의 집에서 유명한 스토아철학자 타르수스의 네스토르를 스승삼아 가르침을 배웠고, 소요학파를 비롯한 다른 그리스 유명 철학자들에게도 각종 교육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와 티베리우스가 어떤 교육을 배웠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2.3. 후계자가 되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면서, 마르켈루스의 외삼촌은 로마 세계의 최고권력자가 됐다. 이후 로마에서 열린 정식 개선식에서 마르켈루스는 티베리우스와 함께 개선장군이 타는 마차에 나란히 탑승했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마차 왼편, 그는 오른편에 올라 정식개선식 퍼레이드에 참석했다.

이후 마르켈루스는 티베리우스와 함께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소년들을 이끌고 트로이 게임에 참여했는데, 두 소년은 또래와 나이 많은 소년들을 이끌고 말을 탔다. 그런데 이때 티베리우스는 왼편의 말을, 마르켈루스는 오른편의 말을 이끌었고 조금 더 주목받고 영예를 얻은 소년은 마르켈루스였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외조카를 자신의 양자보다 더 윗순위로 생각했던 것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줬는데, 실제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켈루스의 이름으로 로마시민권자 자녀들을 위한 돈을 여러 차례 분배했고 로마인들은 이때부터 "아우구스투스가 조카 마르켈루스를 후계자로 생각한다"고 인식했다.

기원전 29년, 칸타브리아 전쟁이 발발하자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켈루스와 티베리우스를 데리고 전쟁에 참전했다. 이때 마르켈루스는 티베리우스와 갈리아, 히스파니아를 방문해 군사경험을 했고,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경계지에서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등의 명장들에게 직접 군사교육을 받았다.

기원전 25년, 티베리우스와 함께 군인들을 위한 축제를 주재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대놓고 마르켈루스를 후계자로 홍보한 이벤트였고, 이 축제 주재 후 마르켈루스는 티베리우스와 로마로 귀환했다. 그리고 그해 봄, 마르켈루스는 외삼촌의 유일한 혈육인 외사촌 율리아와 결혼했다.

2.4. 아그리파와의 갈등

아우구스투스는 노골적이라는 비판을 들으면서도, 조카이자 사위 마르켈루스와 아내의 두 아들 티베리우스, 드루수스 형제에게 기원전 24년 3가지의 특권을 부여했다. 이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 전직 법무관과 같은 지위를 수여한다.
* 다음해(기원전 23년) 안찰관( 조영관) 출마 권리 부여.
* 법정 선출직 입후보 연령보다 10년 앞서 집정관 될 권리 부여.

이는 원로원에서 통과된 특별법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세 후계자로 선포된 마르켈루스, 티베리우스, 드루수스 이후 로마 황족, 황제 사위들의 특권 수여 기본틀이 된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양자들이 공화정 체제에서 이례적인 특권을 하사받자, 원로원 내부에서는 "조카와 두 양자에게 대놓고 특권을 부여한다"며 불평이 쏟아졌다. 이중 아우구스투스의 사위이며 조카인 마르켈루스는 원로원에게 공화정 부활을 깨뜨린 존재로 이미지가 박히게 된다. 그 이유는 마르켈루스가 어떤 직책도 맡지 않다가 형식적으로 프린켑스 세나투스 지위에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이자 사위라는 이유로 모든 특권을 하사받았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건지 몰라도, 마르켈루스와 함께 원로원에 정식 소개되고 그 특권을 받은 티베리우스 역시 원로원에게 10대때부터 온갖 이유로 미움을 받게 된다. 이중 마르켈루스와 시범케이스로 포문을 연 티베리우스의 경우, 마르켈루스와 나란히 욕을 먹다가 마르켈루스가 요절한 뒤 이 사람 특유의 낯을 심하게 가리는 성격과 과묵함, 특유의 차가운 성격과 아부를 극도로 싫어한 까칠함 때문에 원로원 또래 귀족들의 증오를 한몸에 받게 된다.

기원전 24-23년, 원로원 관할 속주 마케도니아의 전 총독 마르쿠스 프리무스가 총독 재임 중 어린 마르켈루스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다고 증언하면서 원로원 전체에서는 큰 파장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일은 상당히 심각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직접 법정에서 증언까지 하면서 마르켈루스에 관한 프리무스의 증언을 부정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가 마르켈루스를 대놓고 후계자로 밀어준다는 여러 증거가 있던 탓에, 원로원 내부에서는 진짜 공화정 복귀가 맞냐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왔다. 그러던 중,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3년 큰 병에 걸려 생사를 오가게 된다. 이때 그는 자신의 남자친족인 마르켈루스와 티베리우스가 너무 어리다며, 18살부터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아그리파에게 만약의 급변사태를 대비해 자신의 개인 인장이 박힌 반지를 맡겼고, 모든 공적 문서와 군지휘권은 동료 집정관인 원로원파 의원 피소에게 전달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이 완쾌하지 못하고 죽으면 아그리파와 피소에게 모든 권력을 넘기겠다고 뜻을 전했을 당시, 마르켈루스는 무척 실망했다. 왜냐하면, 조카이자 사위인 자신이 성년식을 치른 어른이고 멀쩡히 있음에도 외삼촌이 자신이 후계자가 아니라면서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부터 아그리파와 마르켈루스 사이에는 묘한 긴장관계가 형성됐다고 전해지는데, 다행히 아우구스투스가 안토니우스 무사 덕에 완쾌하면서 모든 통치권 이양은 없던 일이 된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계속되는 원로원의 의문제기와 본인의 건강 등을 이유로, 기원전 23년 중 집정관에 물러났고, 이후에도 진짜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집정관 직에 굳이 오르지 않았다.

한편, 이 사건 후,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동방 지방을 관리한다는 이유로 로마를 떠난다. 그렇지만, 아그리파의 동방 파견이 결정될 즈음부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아그리파에 대한 인신공격이 심해지고 공화주의자와 친마르켈루스파 인사들의 아그리파 견제가 시작됐기에 단순한 결정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일에 대해 로마인들과 로마사 학자들은 아우구스투스가 마르켈루스와 아그리파 사이의 묘한 긴장을 해소시키고, 아그리파를 보호하기 위해 동방으로 보냈다고 강하게 확신하고 있다.

2.5. 요절

아그리파가 기원전 23년, 동방으로 떠난 이후 로마에는 고열이 동반된 전염병이 창궐한다. 이때 마르켈루스도 이 병에 걸리게 되는데, 무사는 비슷한 증세가 있었던 아우구스투스를 살린 방법을 이용해 그를 냉탕을 이용한 치료 방법 등을 동원한다. 하지만 마르켈루스의 고열 증세는 아우구스투스와 달리 차도가 없었고 결국 기원전 23년 마르켈루스는 이 병으로 19살의 어린 나이에 사망하게 된다. 이후 그의 시신은 화장돼 아우구스투스 영묘 완공 후 최초로 안치되었다.

3. 사후 이야기

4. 여담


[1] 아버지가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복누이까지 합쳐도 유일하게 성인이 될때까지 생존한 아들이었다. [2] 종종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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