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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평가 | ||
가족 관계 | |||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b0000> 가족 |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 계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 · 어머니 아티아 · 누이 소 옥타비아 | ||
부인 | 첫째 부인 클로디아 풀크라 · 둘째 부인 스크리보니아 · 셋째 부인 리비아 드루실라 | ||
자식 | 딸 대 율리아 · 양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루키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티베리우스 · 양아들 대 드루수스 | ||
전투 | |||
내전기 | 무티나 내전 · 해방자 내전 · 페루시아 내전 · 시칠리아 내전 ·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 ||
전투 | 필리피 전투 · 옥타비아누스의 일리리아 원정 · 악티움 해전 · 칸타브리아 전쟁 · 갈루스의 아라비아 원정 · 쿠시-로마 전쟁 · 게르마니아 전쟁 · 토이토부르크 전투 | ||
반란 | 일리리아 대반란 | ||
기타 | |||
장소 | 아우구스투스 영묘,(), · 판테온 | ||
기타 | 칭호 ·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
Octavia the Younger | 소(小) 옥타비아 | |
|
|
신상 정보 | |
휘 | Octavia Thurina |
옥티비아 투리나 | |
출생 |
기원전 69년 또는
기원전 66년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 | 기원전 11년 (향년 55~58세) |
부모 |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아버지) 아티아(어머니) |
형제자매 | 대 옥타비아(이복 언니), 아우구스투스(남동생) |
배우자 |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기원전 54년 ~ 기원전 40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기원전 40년 ~ 기원전 34년) |
자녀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1],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 대 안토니아, 소 안토니아 율루스 안토니우스(입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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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족.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이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아내로 유명하다. 로마 역사상 고결한 황태자로 추앙받은 게르마니쿠스와 로마 제국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의 외할머니이기도 하다.로마 공화정 말기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에 이름을 날린 로마 여인들이 대체로 지나친 권력욕이나 난행을 일삼은 것으로 악명이 자자하다. 헌데 이 여인은 막내딸 소 안토니아, 외증손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와 더불어 인품과 행적 모두의 측면에서 당대, 후대 모두로부터 그 평가가 좋다. 그녀는 딸 소 안토니아와 함께 전통적인 로마 여성의 미덕의 표본,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어머니, 할머니 상으로 동시대 로마인들에게 큰 존경과 경애를 받았다. 지극히 정치적이었고 본인의 친아들 티베리우스와도 관계가 냉랭했던 리비아 드루실라 대신, 남동생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방대한 황실 대가족 구성원들의 어머니 역할을 자처하여 자신이 낳은 아이는 물론이고 전 남편이 다른 여인과 낳은 아이, 심지어 자길 저버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아이들까지도 친모처럼 자상하게 키웠으며, 정치엔 거의 관여하지 않고 가정에 평생 충실했기 때문이다.
2. 생애
2.1. 부모와 어린 시절
기원전 69년 또는 기원전 66년, 로마 공화국 로마 시에서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와 아티아의 딸로 출생했다.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에퀴테스 신분으로, 본인 대에 원로원에 편입된 신참자( 노부스 호모)다. 옥타비우스는 법무관을 지낸 뒤 마케도니아 총독을 맡았고, 집정관에 입후보하기 전 요절했다. 그럼에도 그는 동시대 프린켑스 세나투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로부터 단호함, 뛰어난 능력, 외교술 등을 높게 인정받았고, 마케도니아 속주에 부임한 이후 선정을 베풀었다고 평판이 자자했다. 그는 두 번 결혼했는데, 평민 출신의 첫 아내 앙카리아와의 사이에서 대 옥타비아를, 노빌레스 출신의 두번째 아내 아티아 사이에서 소 옥타비아와 옥타비아누스를 얻었다.어머니 아티아는 발부스 가문의 일원으로, 소 마르쿠스 아티우스 발부스와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딸이다. 아티우스 발부스는 대 마르쿠스 아티우스 발부스, 폼페이아의 아들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조카이며, 폼페이우스의 고종사촌동생이다. 따라서 소 옥타비아는 어머니를 통해, 폼페이우스의 재종손이 되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혈연상 외종조부[2]가 된다
외조부 발부스는 아리키아 출신으로 부친 사후 의석을 세습했다. 그는 법무관을 거쳤고, 폼페이우스 휘하 퇴역병들의 퇴직금 문제로 열린 '캄파니아 토지를 평민들에게 분배하는 임무를 수행한 20인 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온건한 편의 원로원파 의원으로, 처남 카이사르에게 협조적이었던 중립적인 인사로 유명했다. 그래서 폼페이우스는 이런 자신의 고종사촌동생을 가리켜 그 성향이 매우 중도적이라고 평했다. 외조모 율리아 카이사리스는 그 유명한 종신독재관 카이사르의 유일한 친누나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스트라보, 아우렐리아의 두 자녀 중 장녀이며 파트리키 계급 출신이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따라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며 유년기를 보내다가, 아버지 옥타비우스가 기원전 59년 이탈리아 귀국 후 로마로 돌아오던 중 객사해 남동생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외가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어머니 아티아가 정략혼과 친정의 여러 사정으로 사별 직후 약혼 후 기원전 58년 초, 전직집정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재혼해, 대개의 공화정기 상류층 가족들처럼 외가에서 자랐다. 이때 그녀와 남동생 아우구스투스를 돌본 사람은 외할머니 율리아 카이사리스였다.
2.2. 계부 필리푸스와 첫 남편 마르켈루스
아티아가 재혼할 당시, 계부 필리푸스는 이미 장성한 세 자녀가 있었다. 이중 필리푸스의 아들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는 아티아의 이름 미상 여동생과 결혼해 옥타비아, 아우구스투스 남매에게는 이모부이기도 했다.계부 필리푸스는 기원전 61년 시리아 속주(후일의 시리아 코일레 속주) 총독까지 오른 거물 정치인으로 소 카토의 장인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결혼 직후, 로마인들의 관습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후처의 두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오지 못 했으나, 시간이 흐른 뒤 적당한 시기를 노려 소 옥타비아와 아우구스투스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는 옥타비우스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 아티아 자녀들을 생각해 정식 입양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내의 두 아이를 친 자녀처럼 생각해, 정을 쏟았고, 두 아이의 예절 교육을 직접 담당해 그들이 훌륭한 품성을 갖고 상류층들을 상대로 정략적,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다양한 체험을 몸에 익히게 했다. 이는 후일 옥타비아 남매가 그들의 양자들에게 정을 쏟고, 로마 사회에서 성공한 비결이 된다.
이 시기 옥타비아는 계부의 가르침 아래, 귀부인으로 살면서 필요한 다양한 기본교육과 인성 훈련을 받아, 결혼 적령기가 될 무렵 로마 사회 안팎에서 타고난 미모와 겸손, 자상함, 가족에 대한 헌신과 부모에 대한 효심을 두루 갖춘 신붓감으로 이름을 날린다. 이런 가운데, 기원전 54년 계부 필리푸스는 아내 아티아의 두 자녀의 미래, 본인 가문의 사회적 명성 향상을 목적으로 소 옥타비아를 나이 차이가 제법 난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결혼시킨다. 이는 계부와 어머니 아티아가 주선한 모양새가 됐는데, 이 결혼을 통해 옥타비아의 친가 옥타비우스 가문은 라티움 일대의 에퀴테스 계급의 평민에서 세습 의석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위치까지 사회적 위상이 오르게 된다.
첫 남편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88년생으로, 소 옥타비아와는 20살 정도 나이 차이가 난 34살의 세습 원로원 의원이었다. 그는 첫 결혼에서 사별한 아내에게 딸 클라우디아를 뒀는데, 아들이 없었다. 그는 전쟁 영웅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직계손으로, 어머니는 유니우스 가문의 유니아였고 키케로가 아낀 젊은 원로원 의원이자 키케로의 친구였다. 더욱이 그는 로마 최고의 명문가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가문 중 평민계급에 속함에도 종가격 지파인 풀케르 가와 함께 클라우디우스 가문 전체를 대표한 마르켈루스 가의 수장 중 한명이었다.[3] 이 결혼을 통해, 소 옥타비아는 신참자의 딸에서 로마 최고의 명문가 귀부인으로 신분이 오르게 된다.
남편 마르켈루스는 4년 뒤인, 기원전 50년에 집정관을 역임하는데, 1년 뒤인 서기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자신의 형제, 조카들처럼 폼페이우스를 지지했다. 그럼에도 그는 파르살루스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고, 폼페이우스가 이 전투에서 패배한 뒤 카이사르에게 귀순하여 사면받았다. 기원전 46년 자신의 삼촌이자 전직 집정관인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로마에 복귀할 수 있도록 부탁해 카이사르의 허락을 받아냈다. 그렇게 나름대로 활약하던 그였으나, 기원전 40년 5월에 일찍 죽었다.
소 옥타비아는 첫 남편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의 사이에서 총 8명의 아이를 출산했다. 그런데 8명의 자녀 중 남편 사후에도 생존한 아이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 정도였다.
그녀는 첫 남편과 사이가 대단히 좋았고, 금슬이 대단했다. 허나 옥타비아의 외종조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의 친딸 율리아가 죽은 직후, 본인의 정치, 사회적 위상 약화와 폼페이우스와의 동맹이 흔들리는 것을 우려해, 이 결혼을 파탄내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폰티펙스 막시무스 지위를 이용해, 옥타비아와 마르켈루스를 이혼시키고 폼페이우스의 후처로 옥타비아를 내세우고자 이를 폼페이우스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마르켈루스와 옥타비아 둘 다 이혼하길 원하지 않았고, 그녀의 시댁 클라우디우스 가문 사람들도 이런 방식의 이혼에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폼페이우스 역시 고종사촌동생의 친혈육 소 옥타비아를 아끼고 예뻐했을 뿐, 아내 후보로는 아예 생각하지 않아 제안을 듣자마자 단번에 거절하고 여지를 없애겠다며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 코르넬리아 메텔라와 결혼했다.
2.3. 두번째 남편 안토니우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된다. 이때 카이사르는 자신의 남자혈육 중 살아 있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를 양자이자 후계자로 지목해 제1상속자로 명시한다.[4] 이 당시 소 옥타비아의 동생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는 카이사르의 명령으로 아그리파와 함께 아폴로니아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그는 소식을 듣자마자 어머니 아티아, 계부 필리푸스의 간곡한 만류에도 율리우스 가문의 카이사르 일가를 배경 삼아 권력을 쟁취할 야욕으로 귀국한다.[5] 이후 옥타비아의 동생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는 여러 소동 끝에 카이사르의 정식 양자가 되어, 이름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바꾼다.동생 옥타비아누스는 이후 카이사르파 퇴역병들과 카이사르파 일부의 지지를 배경삼아, 로마 진군을 벌이는 등 본격적인 권력 투쟁에 돌입한다. 이 당시, 옥타비아가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기록이 부족해 확실하지 않으나 한 가지 일화는 전해진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제2차 삼두정치 성립 후 숙청대상에 오른 남자가 아내의 도움으로 궤짝에 몸을 숨겼다. 아내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그가 죽었다는 소문을 퍼트린 뒤 옥타비아에게 도움을 간청했다. 옥타비아는 축제가 한창일 때 옥타비아누스만 혼자 극장에 들어가도록 한 뒤, 남자가 들어있는 궤짝을 보여주면서 그 안에 누가 들어있는지 확인시켰다. 이후 동생에게 부디 자신을 봐서라도 이 사람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누나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 사내를 숙청대상에서 풀어줬다고 한다.
기원전 40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가 옥타비아누스를 제거할 목적으로, 시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카이사르파이나 안토니우스 형제를 지지한 법무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친부)와 함께 카푸아, 나폴리에서 연이어 군을 일으킨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 추방을 위해 벌인 페루시아 내전은 아그리파 등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풀비아는 남편이 있는 동방으로 도주했다가 얼마 안가 사망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상호 간의 오해를 해소하고, 옛 카이사르파의 재건과 아픔을 끝내겠다는 합의 아래 클라우디우스 네로 등 카이사르 옛 부하들을 사면한다. 이때 두 사람은 화해의 목적으로 브룬디시움에서 결혼 동맹을 맺기로 하고, 옥타비아가 안토니우스의 새 아내로 들어가기로 한다.
로마에서 남편과 사별한 여인은 10개월간 전 남편을 추모한 뒤 재혼할 수 있는 법안이 있었고, 당시 옥타비아는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를 임신중이었다. 따라서 정상적인 법 절차상 이 협약은 즉시 실행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원로원은 특별허가로 옥타비아와 안토니우스의 재혼을 허락해 결혼을 명령했다. 이 일에 관해 제정 시대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로마 민중은 오랜 전란이 종식되고 평화가 이뤄질 걸 기대해 결혼이 성사되길 강력히 원했다고 한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결혼이 성사된 직후 서로를 껴안았고, 군인들은 함성을 지르며 두 장군에게 아낌없는 축하를 건넸다고 한다.
옥타비아는 안토니우스를 따라 아테네로 가서 결혼 첫해를 즐겁게 보냈다. 두 사람은 함께 철학자의 강의와 축제에 참석했고,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의 초상화가 그려진 동전을 주조하게 하였다. 그녀는 안토니우스 와의 사이에서 두 딸 대 안토니아와 소 안토니아를 낳았다. 기원전 37년 남편과 남동생간의 사이가 나빠지자, 그녀는 남편의 허락을 받고 로마를 방문했다. 먼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가이우스 킬리니우스 마이케나스의 지지를 확보한 뒤 동생과 개인적으로 만났다. 그녀는 두 사람이 서로 전쟁을 한다면 자신은 이 가혹한 운명을 견딜 수 없다고 밝혔고,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의 저녁 초대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장고 끝에 누나의 설득을 받아들였고, 타렌툼에서 육군을 거느린 채 안토니우스의 함대와 접견했다. 이후 며칠간의 협상 끝에, 삼두 정치를 5년 더 연장하고, 안토니우스의 장남과 옥타비아누스의 어린 딸 율리아를 약혼시키기로 하였다. 안토니우스는 다시 새로운 동전을 주조했는데, 한 면에는 옥타비아누스와 자신의 초상화를 새겼고, 다른 면에 옥타비아를 새겼다.
협정이 체결된 뒤, 그녀는 안토니우스와 함께 동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코르푸에 이르렀을 때, 안토니우스는 그녀와 두 딸을 로마로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클레오파트라 7세와 함께 했다. 그해 겨울,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쌍둥이 남매를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고,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동방 종교 행사에 참석했다. 기원전 35년, 옥타비아누스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와 누나 옥타비아를 상대로 신체적, 언어적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동시에, 그는 두 여성 모두에게 보호자의 허락없이 자신의 일을 관리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으며, 그들을 기리는 동상을 세웠다. 기원전 34년에는 옥타비아 도서관을 설립하기도 했다.
기원전 35년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하기로 마음먹고 대규모 병력을 규합하고 있을 때, 그녀는 남편을 돕기 위해 군대와 군자금을 모아서 동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가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 군대와 군자금을 그대로 받으면서도 그녀더러 로마로 다시 가라고 지시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가 이런 지시를 내린 배경엔 클레오파트라가 있었다고 한다.[6] 이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의 결혼은 정치적일 뿐이며, 그와 자신의 관계는 진정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니, 그녀를 동방에서 볼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옥타비아누스는 누나가 받은 수모에 격노하여 전쟁을 선포하는 걸 진지하게 고려했고, 누나에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집을 떠나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는 앞서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에게 준 '보호자의 허락 없이 행동할 권리'를 사용하기로 마음먹고, 안토니우스의 집을 떠나길 단호히 거부했다. 그녀는 자신과 안토니우스의 자녀 뿐만 아니라 안토니우스의 전 부인 풀비아의 자녀들까지 키웠다. 안토니우스의 손님들을 몸소 접대했으며,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 때문에 안토니우스와 전쟁을 벌이지 말아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했다.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누나의 설득을 받아들여 전쟁을 감행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기원전 34년,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거행하면서 카이사리온을 비롯한 클레오파트라의 자녀들에게 동방의 영토를 분배하겠다고 선포했다.( 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 그리고 기원전 33년 옥타비아에게 이혼을 통보하면서 자신의 집에서 나가달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과 함께 군복무를 하고 있는 장남을 제외한 로마에 있는 자식들을 계속 돌보는 걸 허락했다.
로마 시민들은 안토니우스의 이같은 행보에 엄청난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공개해, 그가 자신이 죽으면 로마가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에 묻히길 바란다는 걸 폭로했다. 이리하여 내전은 발발했고, 기원전 31년 9월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이 참패한 뒤 기원전 30년 두 사람 모두 자결하면서 내전이 종식되었다. 그 후 로마로 끌려온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자식들은 개선식에 전시된 뒤 옥타비아의 집에 보내졌다.
옥타비아는 클레오파트라와 놀아난 안토니우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끝내 이혼까지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우스 생전부터 풀비아의 아들 율루스 안토니우스를 입양해 친아들로 키우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클레오파트라의 자식들까지 친모처럼 다정하게 대했으며, 그들이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기원전 25년에는 동생 아우구스투스에게 일찍이 카이사르에게 패사한 누미디아 왕 유바 1세의 아들 유바 2세와 클레오파트라의 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의 결혼을 성사시켜달라고 부탁해 허락을 받아냈으며, 두 사람이 마우레타니아 왕국에서 각각 국왕과 왕비로 군림할 수 있도록 해줬다. 또한 자신이 낳은 유일한 아들 마르켈루스가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와 결혼하게 해, 장차 후계자가 될 기반을 마련하게 하였다.
2.4. 리비아 드루실라와의 관계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35년 누나에게 많은 명예와 특권을 부여했다. 옥타비아는 로마 여성 중 최초로 황제의 아내 외 여성 친족 중 황녀가 누리는 신성불가침(sacrosanctitas)을 부여받았고, 베스타 여사제를 제외한 여성들은 소유하지 못한 남성 후견인 없이도 본인의 재산을 마음대로 유언으로 넘겨줄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오직 친누이 소 옥타비아,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에게만 준 권한이었는데, 이런 것 외에도 옥타비아는 리비아와 함께 본인의 동상, 흉상이 공공 장소에 설치되고 초상화를 전시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여러 자녀 중 아들 마르켈루스를 지극히 사랑하고, 아꼈다. 따라서 마르켈루스가 동생 아우구스투스의 사위가 된 뒤 후계자로 낙점됐다가 요절한 기원전 23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아들을 잃은 것을 슬퍼하고 괴로워 했다. 그래서 세네카에 따르면, 그녀는 아들이 죽은 뒤 세상을 등질 때까지 상복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옥타비아는 죽은 아들을 기리고자 마르켈루스 도서관을 개관하였고, 아우구스투스 역시 마르켈루스 극장을 지었다. 마르켈루스에 대한 추모식이 끝난 뒤, 율리아가 아그리파와 재혼하는 것에 찬성하기도 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옥타비아가 올케 리비아와 아우구스투스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정적, 호사가, 후대 작가들의 평과 달리, 옥타비아는 리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배려하고, 예의를 내보였고, 각자의 보수적이고 품위있는 것을 존중했다. 또 옥타비아, 리비아는 자신들의 자녀인 소 안토니아, 대 드루수스를 약혼시키고 결혼시키는데 힘을 합치고, 리비아가 드루수스를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밀었을 때, 동생 아우구스투스에게 자신의 막내사위인 올케의 둘째 아들이자 동생의 양자를 후계자로 적극 밀었다. 그 결과, 대 드루수스는 어머니, 장모의 후원 속에서 요절한 마르켈루스와 마찬가지로 티베리우스를 제치고 차기 황제에 가까워 졌고, 법무관을 굳이 지내지 않고 군 지휘권을 받고, 총독이 될 수 있었다.[7]
2.5. 사망
기원전 11년, 옥타비아는 향년 55~58세로 사망했다. 그녀의 장례식은 공개적으로 치러졌으며, 사위 드루수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율루스 안토니우스, 그리고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그녀가 담긴 관을 아우구스투스 영묘로 이송했다.옥타비아는 생전 유언장을 통해, 자신이 총애한 세 사위 중 막내사위인 동생의 양자, 올케의 둘째아들 드루수스를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대표이자 상주로 지명했다. 따라서 드루수스는 로스트라에 올라 장례 연설을 하였고, 이후 기념식에서 재차 상주 자격으로 참석자에게 감사 연설을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누나와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장례식 직후 그녀에게 가장 높은 사후 영예를 안겨주었다. 그는 그녀를 기념하기 위해 옥타비아 문과 포르티쿠스 옥타비아에를 지었다. 따라서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의 누이 옥타비아를 여신으로 선언하도록 합의했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정중히 원로원에게 고인에 대한 추모를 감사할 뿐 누이가 여신으로 선포되고 얻을 다른 영예를 거부했다. 대신 그는 누이의 얼굴을 최초로 주화에 넣었다.
3. 여담
- 2022년 현재, 아우구스투스 영묘 안장자 중 대중들에게 유일하게 유골항아리가 공개된 황족이다. 이탈리아와 서양 학자들은 중세 시대의 기록을 토대로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매장된 황제, 황후, 황족들의 유골항아리가 하드리아누스 영묘처럼 흔적도 없을 것이라고 확언했다가, 복원 프로젝트 진행 중 소 옥타비아를 비롯한 여러 황족 안장자들의 유골항아리와 비문, 매장공간을 확인하게 된다. 이는 로마인들이 석회를 바르고 쉽게 훼손하지 못하게 보호한 노력 덕분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이탈리아 방송 매체들은 중세 시대 도굴꾼들이 이를 깨기 위해 시도한 곡괭이 자국이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납골항아리와 매장공간에서 확인됐고, 다른 황족들의 매장공간에서도 비슷한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허나 도굴꾼들의 노력에도 석회가 워낙 단단하고 두꺼워 이 시도가 실패했다고 한다.
이런 배경 때문에 소 옥타비아의 유골항아리는 아그리파의 비문과 함께 로마 시대 당시의 모습 그대로 대중들에게 2021년 3월 첫 공개됐다.
- 한번 결정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을 직접 뒤집어 엎을 수 있는 3인방(소 옥타비아, 리비아 드루실라, 아그리파) 중 한명으로 당대, 후대 로마인들에게 회자된 여인이다.
- 양자 율루스 안토니우스의 아들로 소 옥타비아에게는 양손자이자 혈연상 외손자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8]가 후일 아우구스투스 때 연좌제를 요구한 원로원의 공격에도 마르세유로 이주 후 유학생활을 하는 방식으로 살아남는데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다. 이 조치 당시 티베리우스 황제는 "소 옥타비아의 손자이고 황족이므로 로마에서 묻혀야 된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대 율리아와의 불륜 및 반역죄로 자살한 율루스 안토니우스와 그 자녀들의 모든 억압조치를 25년 해제시켰다. 이런 배경 때문에 안토니우스 일가는 키케로의 아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요구로 통과된 조치[9]는 무효화됐고 율루스 안토니우스의 아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마르세유에서 향년 45세의 나이에 병사 후, 소 옥타비아, 아우구스투스의 본가인 옥타비우스 가문 개인묘지에 소 옥타비아의 외손자,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의 아들이라는 명분으로 정식 매장됐다. 이때 티베리우스의 조치로 이 사람의 아들(혹은 손자)은 갈리아 툴루즈 태생임에도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복귀할 수 있었는데, 그중 한명이 네로 ~ 베스파시아누스 시대까지 활약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다.
- 젊을 적부터 앞머리를 모두 넘겨, 이마를 드러내면서, 가운데 앞머리 볼륨을 살려 띄우고, 뒷 머리는 전부 정갈하게 묶어 뒤로 틀어 올린 일명 "노두스(nodus)" 헤어 스타일 중 변형 형태를 유지했다. 이 스타일은 공화정 시대부터 유행한 귀부인들의 머리였는데, 옥타비아는 올케 리비아 드루실라와 함께 유행을 끌던 가채 없이 자신의 풍성한 머리를 세 갈래로 나누어 머리 옆쪽의 머리카락을 뒤쪽으로 정갈하게 묶어 둥글게 하고, 중간 부분을 고리 모양으로 묶는 것을 고수했다. 이 모양은 현대 남성의 리젠트 스타일이나, 근대의 퐁파두르 부인 스타일의 머리와 비슷했는데, 비싼 가발 없이도 정갈하고 위엄이 있어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가 된 뒤, 옥타비아, 리비아가 주목을 받으면서 아우구스투스 시대와 티베리우스 시대를 대표한 귀부인 머리 스타일로 크게 유행했다. 참고로 옥타비아, 리비아 드루실라 풍의 이 머리 스타일은 매우 화려해진 네로 시대의 포파이아 사비나 스타일과 달리, 꾸준히 변형 형태로 귀부인에게 사랑을 받았다. 귀부인들이 자신의 머리를 둘로 나누고 뒤를 묶어 틀어 올리기 용이했고, 로마인 특유의 검소함과 품격을 나타내는데 좋았기 때문이다.
[1]
양자
율루스 안토니우스의 아내.
[2]
외외종조부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나,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외외종조부라는 표현은 부적합한 표현이다.
[3]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코르넬리우스, 파비우스 가문과 함께 기원전 2세기 이후 공화정 시대의 로마 3대 명문가였다. 마르켈루스 가문의 경우, 중시조 이래 계급은
플레브스(평민)였던 클라우디우스 씨족 지파였지만 포에니 전쟁 영웅 마르켈루스 장군 이래 파비우스 막시무스와의 통혼을 비롯하여, 같은 클라우디우스 씨족 내 파트리키 지파인 네로 가문 등과 사돈관계 등을 맺으며 그 영향력은 시조 아피우스의 직계들로 종가격 지파인 풀케르 가문 못지 않는 공화정 후기의 권세가가 됐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활약할 당시, 마르켈루스 가문은 같은 클라우디우스 가문 중 '클라우디우스 그 자체'로 자타가 인정한 풀케르 가문과 함께 클라우디우스 씨족 전체를 상징한 양대 지파였고, 사회적 영향력과 명성이 대단했다. 이런 까닭에 현역 고위 선출직과 삼두정치 3인방조차 함부로 건들거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면 안 되는 대귀족 일가였다.
[4]
카이사르에게 혈연상 가장 가까운 남자혈육은 사실 오촌조카뻘인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카이사르가 내전 승리 후 종신독재관에 올라 유언장을 작성할 당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5]
다만 계부 필리푸스와 어머니 아티아가 간곡하게 만류했던 것을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옥타비우스의 귀국은 단순히 권력욕만으로 시도할 정도로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이 때는 아직 카이사르를 암살한 자들도 멀쩡히 살아있던 시기였기 때문. 거기다 카이사르파의 2인자 안토니우스같은 쟁쟁한 이들이 과연 옥타비우스같은 애송이를 카이사르의 적장자이자 후계자로 인정해줄 지도 의문이었다. 당연하지만 옥타비우스가 나중에 황제가 된 것은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배경도 있었지만 그 자신의 능력도 매우 크게 작용했다.
[6]
다만 다른 이유도 있었는데, 그녀의 동생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로부터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치기 위해 그의 함대를 빌렸는데 이를 일부만 돌려보냈고 또, 보내기로 약속한 병력도 원래 2만이었으나 그 일부인 2천만 보냈다. 옥타비아는 이 병력과 함께 왔는데 사실 이 정도면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화낼 만은 했다. 그렇긴 해도 그와 별개로 옥타비아는 엄연히 안토니우스의 정처였으므로 그녀의 귀환에 클레오파트라의 입김이 없었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7]
사실 대 드루수스는 거의 옥타비아누스와 리비아의 친자로 여겨졌고(공식적으로는 리비아 드루실라의 전남편의 아들이긴 하다.) 또, 티베리우스는 내성적인 성격이라 그다지 황제가 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고 동생과 사이도 매우 좋았기 때문에 동생인 드루수스는 처음부터 황제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오래 살았다면 말이다.
[8]
딸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의 아들이기도 하기 때문.
[9]
안토니우스 가문 출신 남성은 마르쿠스라는 개인 이름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금지법령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