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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4 08:22:31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91년 아시아 총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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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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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아시아 총독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파일: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jpg
{{{#fecd21 출생}}} 기원전 140년경
로마 공화국 로마
{{{#fecd21 사망}}} 기원전 85년(향년 50대 중후반)[1]
로마 공화국 피사
{{{#fecd21 지위}}} 파트리키
{{{#fecd21 국가}}} 로마 공화국
{{{#fecd21 가족}}}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아버지)
마르키아(어머니)
율리아(누이)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형제)
아우렐리아 코타(아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아들)
대 율리아(딸)
소 율리아(딸)
1. 개요2. 행적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귀족, 총독.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버지다.

2. 행적

플라비우스 왕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의 변호사, 역사가로 근대 이후부터 진위가 많이 의심받고 있는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카이사르 스트라보로도 지칭된다. 하지만 사팔뜨기를 뜻한 스트라보로 그가 불린 기록은 수에토니우스 밖에 없고, 수에토니우스가 카이사르 일가 전체를 극도로 혐오해 조작, 위조한 일이 수두룩하기 때문에, 현대 학계에서 이 인물에게 이 별명을 붙여 부르는 일은 매우 드물다.

기원전 140년경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마르키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율리우스 씨족은 비너스 여신의 후예로 전해질 정도로 고대 로마에서 유서깊은 파트리키 집안으로 지파 전체가 파트리키이며, 공화정 초기 당시 숱한 집정관을 배출했다. 그러나 율리우스 씨족은 유력 지파들이 대가 끊기거나 쇠락했다. 카이사르 가문 역시 같았는데, 이들은 기원전 2세기 이래로 집정관은 물론이고 법무관 조차 배출하지 못하면서 쇠락했다. 아버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역시 이름만 전해질 뿐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어머니 마르키아는 기원전 144년 법무관을 지냈던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의 딸이었다. 그의 누이 율리아는 훗날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결혼했다. 기원전 91년 집정관을 역임한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의 형제인데, 그의 손자가 시리아에서 벌어진 소요로 암살당한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참고로 일부 사가들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형제가 아닌 사촌일 수도 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추정일 뿐이며, 통상적으로는 고대 비문 등을 근거로 형제로 보고 있고, 섹스투스가 동생일 확률이 높다고 평가받는다. 추가로 이들의 조부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의 원로원 의원이라고 18~19세기 역사가 빌헬름 드러만이 연구로 밝힌 바 있다.

카이사르는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노빌레스[2]인 아우렐리아 가문의 일원이며 기원전 119년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의 딸인 아우렐리아 코타와 결혼해 적어도 세 자식을 낳았다. 아들은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이고, 두 딸의 이름 모두 율리아인데 후대 역사가들이 구별을 위해 '대 율리아', '소 율리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대 율리아는 피나리우스와 페디우스라는 남자들과 잇따라 결혼했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언장에서 상속인으로 지명된 루키우스 피나리우스 스카르푸스 퀸투스 페디우스의 어머니였다. 또한 소 율리아는 법무관 마르쿠스 아티우스 발부스와 결혼해 옥타비아누스 소 옥타비아의 어머니인 아티아, 기원전 56년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3]의 아들인 루키우스 마르쿠스 필리푸스와 결혼하여 마르키아라는 딸을 낳은 성명 미상의 여인, 그리고 기원전 10년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어머니인 아티아의 아버지로 전해지는 마르쿠스 아티우스 발부스를 낳았다.

카이사르는 포풀라레스의 거두인 매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지원에 힘입어 공직 생활을 성공적으로 시작해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태어난 해인 기원전 100년 전후에 재무관에 취임했다. 또한 기원전 103년과 100년의 호민관이며 마리우스의 협력자인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가 마리우스의 퇴역병들을 위해 마련한 식민지 계획을 감독하는 10명의 감독관 중 한 명이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집정관 당선인을 살해할 정도로 막나가던 사투르니누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죽게 내버려뒀을 때 매부를 지지했으며, 기원전 92년 법무관을 맡은 뒤 기원전 91년에 아시아 총독에 부임했다. 델로스 섬 주민들이 세금 징수원들과의 소송전 때 자신들을 도와준 것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세웠다는 기록을 볼 때, 그는 총독으로서 선정을 베풀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에서 내부 투쟁이 격화되던 기원전 80년대 중반에 율리우스 씨족 일부는 마리우스와의 동맹을 끊었지만, 그는 마리우스파로 남았고 마리우스가 급사한 뒤 민중파를 이끌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를 추종했다. 이후 에퀴테스 신분의 부유한 집안 출신인 코수티아를 아들과 약혼시켰지만, 결혼이 성사되기 직전에 사망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아들이 15살이었을 때 샌들을 고정하기 위해 몸을 구부렸다가 돌연사했다고 한다.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카이사르의 아버지는 피사에서 사망했으며 카이사르는 훗날 조영관에 취임한 뒤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거대한 규모의 검투사 경기를 거행했다고 한다.

사후 재산 대부분을 아들 카이사르에게 상속했지만, 술라가 내전 승리 후 마리우스 일가와 인척의 재산을 강제 몰수할 때 유산 상속이 잠시 중지되고 일시 몰수된 적이 있었다.


[1] 공교롭게도 자신의 아들인 카이사르도 이즈음 죽었다. [2] 평민 출신으로 파트리키와 동등한 위상을 갖춘 집안 [3] 아티아와 재혼하고 옥타비아누스와 소 옥타비아를 보살펴준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