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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푸르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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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귀부인
칼푸르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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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cd21 출생}}} 기원전 76년경
로마 공화국 로마
{{{#fecd21 사망}}} 미상
미상
{{{#fecd21 지위}}} 노빌레스
{{{#fecd21 국가}}} 로마 공화국
{{{#fecd21 가족}}}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아버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이복 형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남편)
1. 개요2. 생애
2.1. 출신 가문2.2. 출생과 결혼2.3. 카이사르 암살과 이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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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귀부인.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세번째 아내다.

2. 생애

2.1. 출신 가문

출신 가문 칼푸르니우스 씨족은 로마의 전설적인 두번째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아들 칼푸스를 시조로 둔 평민 귀족( 노빌레스)으로, 사비니계의 오랜 명문가이다. 이 가문은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후손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긴 로마의 4개 씨족 가문 중 하나인데, 다른 가문들과 달리 원로원 입성 전인 전설 시대부터 시조의 아버지인 누마 폼필리우스 두상이 새겨진 동상 등을 소중히 모셨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칼푸르니우스 씨족 가문은 시조 칼푸스 이래 여러 갈래로 찢어졌는데, 여러 분파 중 농업과 관련된 동사 단어로 곡식을 으깨어 가루로 낸다는 뜻을 담은 'pisere'에서 유래한 코그노멘을 사용한 분파가 피소 가문이다.

피소 가문은 칼푸르니우스 가문의 여러 저명한 분파 중 가장 강력했다. 얼마나 강력했는지, 이들의 권세는 군인황제시대의 절정인 발레리아누스 황제 시절까지 대단했다. 칼푸르니아는 이 피소 가문 출신으로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장녀였다.

그녀가 카이사르와 결혼하기 전부터 피소 가문의 위세는 진짜 대단했다. 먼저 이들은 누마 폼필리우스의 후손답게, 재산 규모에 따라 계급만 플레브스였을 뿐, 사회적 위상은 전설 시대로 불린 왕정 후기와 공화정 초기부터 파트리키와 맞먹었다. 따라서 첫 집정관 배출 전부터 명예로운 경력 중 재무관, 안찰관 등도 수두룩하게 배출했다. 또 다른 노빌레스 가문들과 달리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가문처럼 가문 내 첫 집정관 배출 이후 100년도 안 되어 줄줄이 일가 남성과 가문의 사위들이 법무관, 집정관을 두루 지냈다.

기원전 2~3세기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기원전 211년 법무관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이다. 그는 칸나이 전투에서 포로가 됐지만, 조국 로마를 배신하지 않았고, 끝내 에트루리아 지방 장관과 법무관까지 지냈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역시 유명했는데, 그는 칼푸르니아의 직계 조상으로 기원전 148년 집정관을 지냈다.[1] 하지만 칼푸르니아의 직계조상인 그는 3차 포에니 전쟁 당시 전쟁을 부주의하게 이끌다가 패전한 책임으로 불명예스럽게 소환됐고, 그 후임이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였기 때문에 무능력한 귀족 장군으로 낙인 찍혔다.

그러나 이런 그림자와 별개로, 피소 가문은 기원전 2세기 초인 기원전 180년 집정관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배출함과 동시에, 이때부터 수많은 집정관을 배출하고, 전쟁에서 실수를 한 피소 카이소니누스조차도 이런 불명예 외에는 사회적 논란이나 위신이 실추되는 악행은 하지 않았다. 더욱이 피소 가문은 포에니 전쟁 전후를 시작으로 기원전 149년 「'재산 회복과 그 처벌에 관한' 칼푸르니아 법」[2]을 입안해 통과시킨 정의로운 호민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기원전 67년 「아킬리아-칼푸르니아 법」으로 알려진 선거 부패 및 선거 범죄 처벌을 명문화한 법안을 만들어 통과시킨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배출해,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위세가 대단했다. 즉, 노빌레스 명문 중 명문으로 그라쿠스 형제를 배출한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가문 못지 않은 노빌레스 중 노빌레스로 평가됐다.

이런 평가 그대로 피소 가문은 공화정 시대를 넘어, 제정 시대까지 위세가 대단했다. 이중 가장 유명한 피소 가문이 피소 가문에서 다시 갈라진 또 다른 지파로 유명한,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 가문이다. 그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이 가문은 칼푸르니우스 씨족 가문과 리키니우스 씨족 가문의 연합체 형태 귀족 일족인데, 피소 가문 남성들이 외가로 입양돼 노빌레스 명문인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문와 기존의 칼푸르니우스 피소 가문 내의 피소 프루기 가문이 공동운명체가 된 형태였다. 이들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래에서 모든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네로 황제 시절에 가문이 거의 풍비박산이 났다. 하지만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한쪽에서 다시 양자를 보내고, 서로 통혼해 손을 늘려 나갔다. 그래서 공화정 시절의 여러 파트리키, 노빌레스 가문들이 여러 이유로 대가 끊겨 멸문했음에도, 서기 3세기까지 위세를 떨쳤다.

이 가문은 칼푸르니아 조부와 아버지 때부터 리키니우스 씨족 가문 중 하나인 크라수스 가문과 통혼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장남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이름미상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했고, 사이에서 난 아들 크라수스 프루기가 크라수스 가문에 입양돼, 하나의 가문으로 사실상 결합됐다. 이렇게 결합된 가문이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 가문인데, 이 집안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까지 엄청난 위세를 떨쳤고, 이 가문의 당주인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는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 가의 혈통임을 자랑스럽게 여긴 콤모두스 황제와 황실의 추천으로 서기 175년 집정관이 됐다. 이 가문은 서기 3세기 군인황제시대 당시 황제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시대에 다시 이름을 올리는데, 발레리아누스가 반란을 진압하고자 보낸 장군 중 반란 진압 후 테살리아에서 군대에게 황제로 선포됐다가 발렌스에게 살해된 피소 프루기 이후 로마 고위직에서 이름을 감춘다.

하지만 칼푸르니우스 씨족의 이 피소 가문은 트라야누스 조카딸을 며느리로 맞이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황제까지 배출했다. 물론, 이 과정 전 이 가문의 당주인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는 도미티아누스에게 찍히지 않아 가문을 유지했음에도, 개인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네르바가 즉위하면서 누명을 쓰고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네르바는 그를 추방해 죽이려고 여러 차례 법정에 세웠는데, 이중 논란이 된 것은 그가 원로원 동료들의 도움과 보호를 위해 보결집정관으로 서기 87년 1월 ~ 4월까지 짧게 재임한 것이 네르바 즉위를 반대해 반역 음모를 꾸몄다는 네르바의 억지 주장이었다. 따라서 현대 학자 그레인저는 네르바가 도미티아누스 암살 사건 직후부터 암살배후로 의심받은 원인에는 네르바가 일찍부터 정적 내지 그냥 사이 나쁜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를 어거지로 재판에 세워 유죄로 몰락시켜 죽이려고 한 점이, 친위 쿠데타의 또 다른 이유였다고 추정한다.[3]그래서 그는 도미티아누스 암살 사건 이후 군대에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고 군대에서 네르바를 사실상 자택연금시킨 원인에서도 종종 거론된다. 어쨌든 그는 이때를 시작으로 용의주도적인 악인도 아니고, 정치적 음모에서 늘 거리를 뒀음에도, 네르바에게 제대로 찍혀 이러저리 추방지로 돌려가면서 온갖 고생을 다했다. 그러다가 그와 친분 있고 인척 관계였던 트라야누스가 등장하면서 겨우 누명을 벗었다.

하지만 이때의 일로 트라야누스를 지지한 소 플리니우스 등에게 계속 모함을 받았고, 후대의 디오 카시우스는 그를 비열하고 의문스럽다고 온갖 험담을 늘어 놓았다. 그렇지만 이런 악평에도 트라야누스는 그를 의심하면서 견제하는 시늉만 하면서, 그를 보호했다. 그러다가 트라야누스가 서거한 직후, 그는 하드리아누스 명령으로 억울하게 기소돼 추방됐고 추방지로 가던 중 살해됐다. 그 이유는 성격이 까칠했던 하드리아누스에게 별 이유없이 피소 프루기가 찍혔고, 하드리아누스가 의문스러운 상황에서 제위에 오르면서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집안은 그들이 억울하게 중상모략 당하지 않게 보호해준 트라야누스가 서거한 직후, 사실상 절멸한 상태가 된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드리아누스의 결정으로 무너진 피소 가문과 크라수스 가문의 직계후손들은 트라야누스가 황제가 되기 전부터 맺은 인연과 비비아 사비나 황후의 도움으로 하드리아누스 이후 황실의 주인이 된다. 그 이유는 하드리아누스가 추방된 피소의 조카딸로 비비아 사비나 황후의 이부 여동생을 장모로 둔 안토니누스 피우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그 처조카로 피소 가문의 직계손이며 비비아 사비나 황후의 이부 여동생을 할머니로 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제위를 넘겼기 때문이다.[4]

2.2. 출생과 결혼

기원전 76년경 로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원전 58년 집정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인데, 그는 에피쿠로스 주의의 쾌락주의를 배척하나, 그 장점을 수용한 원로원 의원으로 유명하다. 그는 에피쿠로스 학파 철학자인 필로데모스를 후원하면서, 헬라스 문화를 로마에 적합하게 스며들게 하는데 기여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복 남매로는 기원전 15년에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가 있는데, 이복 남매인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는 종종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폰티펙스라고도 불린다. 친척으로는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가 있었는데, 기원전 23년 집정관을 지냈다.

기원전 59년, 17세의 나이에 집정관을 역임하고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결혼했다. 카이사르는 이 결혼을 통해 강력한 위세를 갖춘 피소 가문을 자신의 편으로 삼고자 했고, 피소 카이소니누스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등에 업은 카이사르와 손을 잡아 집정관에 당선되고, 가문의 미래와 아들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자 했다. 이 정략혼으로 칼푸르니아의 아버지 피소 카이소니누스는 기원전 58년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이후 원로원 내 친 카이사르파 인사로서 활동하면서, 카이사르파에 들어간 젊은 로마 청년 귀족들과 두루 친분을 쌓게 됐다. 이는 이복남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역시 비슷해, 그 역시 이를 배경 삼아 기원전 15년 집정관에 오른다.

총 3번 결혼한 카이사르가 맞이한 아내 중 카이사르의 첫 아내 코르넬리아 킨나와 함께 가장 유명하다. 하지만 이런 유명세와 달리, 칼푸르니아는 매우 조용하고 수줍움 많고, 겸손하다고 평가받았다. 카이사르의 정적이면서도 친구였던 키케로는 친우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칼푸르니아를 겸손하고 종종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이는 여성이라고 평했다. 수에토니우스는 칼푸르니아가 고결하고 남편에게 충실한 아내였으며, 카이사르의 바람기를 묵인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카이사르가 세르빌리아와 오랫동안 연인 관계를 이어갔고 세르빌리아의 아들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친아버지가 카이사르라는 설이 공공연히 나돌았으며,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와 관계를 맺고 카이사리온을 낳기도 했지만, 그녀는 이에 대해 카이사르에게 별다른 항의를 하지 않았다.

카이사르와 칼푸르니아는 부단히 2세를 얻고자 했지만, 사이에 자녀를 얻지 못했다.

2.3. 카이사르 암살과 이후 이야기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칼푸르니아는 기원전 44년 3월 14일 밤 집의 벽이 무너지는 꿈 또는 카이사르의 시신을 안고 있는 꿈을 꿨다고 한다. 칼푸르니아는 평소 미신을 믿지 않았지만, 이날만큼은 몹시 불안해져서 카이사르에게 집에 있어달라고 애원했다. 안 그래도 3월 15일 아침에 희생 제물 공양 의식을 몇 차례 반복했지만 매번 징조가 좋지 않자 마음이 불편했던 카이사르는 원로원에 몸이 좋지 않아 참석하지 않겠다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집에 찾아와 원로원에 꼭 참석하라고 설득하자, 카이사르는 마음을 돌려 원로원 참석을 강행했다가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포함한 원로원 의원들에게 암살당했다.

남편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칼푸르니아는 비탄에 잠겨있다가 집에 찾아온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 파벌의 미래를 대표한다고 여기고 남편이 남긴 막대한 재산과 유언장을 그에게 넘겨줬다. 이때 그녀는 가문의 열쇠를 안토니우스에게 잠시 맡기면서, 본인 남편의 외종손이자 시누이의 외손자로 본인 부부의 양자로 명시된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의 안전보장을 약조받았다. 이후 떠돈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도시 전설 같은 전승에 따르면, 정신을 반절 잃어버린 나머지 여러 여성과 노예들과 함께 집을 뛰쳐나가 종적을 감췄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전승은 불분명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카이사르의 유언장에서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선전 활동을 대대적으로 벌였지만, 유독 칼푸르니아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언급을 하지 않아 후대 역사가들의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칼푸르니아의 행적은 그녀가 직접 자유를 준 여성 해방노예 안티스가 남긴 비문으로 해소됐다. 안티스는 비문을 통해 자신에게 자유를 준 칼푸르니아를 이렇게 적어 넣었다.
그녀는 위대한 신격 카이사르의 아내였다.
안티스 비문

이 비문에는 그 외에도 칼푸르니아의 남편 카이사르 신격화 당시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로 불리면서 가문 사람들과 이를 기렸다는 고대 기록을 재확인해주고 있어, 칼푸르니아의 이후 행적은 의문이 해소 중이다. 따라서 현대 학자와 학계는 칼푸르니아가 최소 기원전 42년까지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고 확언 중이다. 여기에는 옥타비아누스가 '아버지' 카이사르가 다섯 번째 집정관 재임시 발행한, 히스파니아를 정복한 여신으로 묘사된 칼푸르니아 얼굴을 토대로 한 여신 도안을 유지하고 홍보한 점을 비추어, 칼푸르니아와 옥타비아누스가 "양모-양자" 관계를 칼푸르니아 사망 전까지 유지했다는 사실도 확인되고 있다. 이 외에도, 피소 가문이 카이사르 사후 옥타비아누스를 후원한 점 등도 칼푸르니아가 그 영향을 미쳤던 근거로 거론된다. 실제 칼푸르니아의 이복남매인 기원전 15년 집정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는 아우구스투스의 오랜 후원자였고, 아우구스투스 일가에게 조언자 이상의 가족 대우를 받은 로마 귀족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칼푸르니아는 현재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 아티아가 사망한 기원전 43년보다 뒤인 기원전 42년까지 최소 생존했던 것으로 추정 중이다.


[1] 일부 학자들은 그를 종종 카이소니우스 씨족 가문에서 입양된 피소 가문 사람으로 간혹 추정 중이다. 그러나 그의 코그노멘 뒤에 붙은 카이소니누스는 입양된 사람에게 붙여진 사람들이 쓴 '-anus' 형태의 '카이소니아누스'가 아니다. 따라서 이 주장은 소수에게만 인정받고 있다. 게다가 피소 가문 일원들은 이 사람처럼 외가 성씨 뒤에 이렇게 변환해 대대로 물려받아 쓰거나, 다른 이유로 이렇게 이것을 물려받아 피소 가문 내에서 다시 지파를 구분한 특징이 있었다. [2] 속주 총독과 파견 행정관이 속주민을 쥐어 짜내거나, 그들을 고문하고 재산을 강탈할 경우, 별도의 형사 재판소를 상설해, 부패와 폭정에 대한 처벌을 하도록 한 법률이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정적들에게 어거지로 기소돼 불명예스럽게 정계은퇴를 하게 되게 된 처벌 근거가 된 것도 바로 이 법이다. 이 법에 기소된 혐의는 '반역','강탈','살인','범죄조직 구성', '뇌물수수', ' 미약 복용' 등이 있었는데, 실라누스 재판 때부터 정적을 대상으로 엿가락 늘리기 식으로 당사자인 총독이나 장군이 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더라도 가문원이나 직계 일족이나 인척이 부임지에서 이 문제로 고발되면, 당사자도 기소된 점에서 여러 논란을 낳았다. 더욱이 그라쿠스 형제 중 동생인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가 이를 명분삼아, 본인을 지지한 세력과 에퀴테스들을 위해 배심원 제도를 개혁하면서, 이를 악용해 큰 혼란을 초래했다. 따라서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 당시 술라는 이를 개혁하겠다는 명분 아래, 이 법을 이용해 형사 재판소 배심원 중 반대파를 이 법으로 모조리 숙청하면서, 가이우스 그라쿠스 이전으로 법안을 되돌리는 시도를 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59년 카이사르가 집정관을 지내면서 이 법안 중 문제 조항을 고친 수정안을 「'재산 회복과 그 처벌에 관한'에 대한 수정된 율리우스 법」(일명 「 수정된 율리우스 법」)으로 통과시켰다. 이 법은 「 수정된 율리우스 법」으로, 반역법으로 알려진 「율리우스 법」과 달리, 철저히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수정하기 전의 형태로 만들어졌고, 로마 공화정 말부터 반역법과는 별개로 활용될 때, 계서제 유지와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 측면에서 감찰 후 처벌 조항으로 용이한 성문법이었다. 그래서 로마 제국 후기를 넘어 중세까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보통은 속주 총독과 그 가족들의 모든 범죄를 이 법률에 기반해 대역죄 형태로 처벌하는데 유용했기 때문에, 이 법령은 로마 제국이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부터 황제가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활용한 무기로 사용됐다. [3] 20세기 이후 현대 학자들의 대체적인 분석들도 거의 비슷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원로원 추대로 즉위한 네르바가 자신과 내부 경쟁했던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를 몰락시켜 반란의 싹을 없애려고 했다는 얘기인데, 이는 네르바 즉위와 트라야누스 즉위 사이의 일련 과정을 볼 때, 현재 거의 정설로 평가받고 있다. [4]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할머니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장모이자 대 파우스티나(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고모, 장모 ;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아내)의 어머니인 루필리아 파우스티나가 피소 가문 혈통으로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문에 입양된 크라수스 푸르기의 직계손이다. 따라서 피소 가문의 피를 이은 점은 대 파우스티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스스로를 로마귀족의 오랜 후예라는 자부심을 준 원천이 됐다고 자부한 근거가 됐고, 이는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의 두 아들이 남긴 가문 자랑 비문에도 소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