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11-25 21:28:21

알렉산드리아 전쟁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00201, #a00201 20%, #a00201 80%, #800201)"{{{#!wiki style="margin:-10px"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00201><tablebgcolor=#a00201> 파일:카이사르 투명.svg 율리우스 카이사르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생애 · 평가 · 대중매체
가족관계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b0000>가족 아버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 · 고모부 가이우스 마리우스 · 첫째 아내 코르넬리아 킨나 · 둘째 아내 폼페이아 술라 · 셋째 아내 칼푸르니아 · 딸 율리아 · 양아들 옥타비아누스 · 사생아 카이사리온
전투
<colbgcolor=#fff,#1f2023> 일레르다 전투 · 디라키움 공방전 · 파르살루스 전투 · 알렉산드리아 전쟁 · 젤라 전투 · 탑수스 전투 · 문다 전투 · 코르도바 공방전
대외 전쟁 갈리아 전쟁
휘하 군단 3군단 갈리카 · 4군단 마케도니카 · 5군단 알라우다에 · 6군단 페라타 · 7군단 클라우디아 · 8군단 갈리카 · 9군단 히스파나 · 10군단 에퀴스트리스 · 11군단 클라우디아 · 12군단 빅트리스 · 13군단 게미나 · 14군단 게미나
관련 기록 갈리아 전기 · 내전기
기타
정책 삼두정치,( 로마 공화정의 삼두정치),
사건 · 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기타 율리우스력 · 카이사르(칭호),( 차르 · 카이저),
}}}}}}}}} ||
알렉산드리아 전투/알렉산드리아 공성전
영어: battle of alexandria/Siege of Alexandria
시기 기원전 48년 말 ~ 47년 초중반
장소 알렉산드리아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
원인 카이사르의 내전의 일부.
교전국 파일:attachment/mon_256.png 로마 공화국 파일:attachment/mon_256_3.png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지휘관 파일:attachment/mon_256.png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파일:attachment/mon_256.png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파일:attachment/mon_256_3.png 클레오파트라 7세
파일:attachment/mon_256_3.png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파일:attachment/mon_256_3.png 아르시노에 4세
파일:attachment/mon_256_3.png 아킬라스☠
파일:attachment/mon_256_3.png 가니메데스†
결과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승리,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패배.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카이사르군3.2.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군
4. 전쟁 경과5. 전쟁 이후

[clearfix]

1. 개요




기원전 48년 후반기부터 기원전 47년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와 나일강 하류 지역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 클레오파트라 7세 연합군과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추종자들이 맞붙은 전쟁. 카이사르가 악전고투 끝에 승리했고, 클레오파트라 7세는 이 전쟁을 계기로 이집트의 패권을 확고히 했다.

2. 배경

기원전 51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붕어했다. 그는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딸 클레오파트라 7세가 이집트를 공동으로 통치해야 하며, 로마가 이를 보증해달라고 부탁했다. 폼페이우스는 이 유언장을 승인하여 두 사람이 서로 결혼하여 공동 파라오로 집권할 수 있게 해줬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섭정을 맡은 환관 포티노스는 무척 총명한 클레오파트라가 계속 집권한다면 자신의 권력이 제한될 거라 여겼고, 그녀를 축출할 음모를 꾸몄다. 클레오파트라 7세 역시 이복동생을 배제하고 전권을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이리하여 양자는 첨예한 갈등을 벌이다가 기원전 48년부터 내전을 벌였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곧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난 뒤 사막 지대에서 병력을 규합하여 할거했다. 비슷한 시기 아르시노에 4세도 별도로 세력을 끌어모아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집트에 파라오가 3명인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던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참패한 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던 폼페이우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망명 의사를 밝혔다. 폼페이우스는 이전에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딸 베레니케 4세의 반란으로 축출되었을 때 파라오에 복위할 수 있도록 힘써 준 적이 있었다. 그는 이러한 전적이 있으니 이집트가 자신을 도울 거라 믿었다. 그런데 폼페이우스 파견한 사절들이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복위에 기여한 뒤 이집트의 정예병으로 남아있던 옛 폼페이우스파 장병과 장교들을 찾아가 폼페이우스 밑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요청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조언자들은 이 사실을 전해듣고, 폼페이우스의 망명 목적이 이집트를 자신의 손에 넣고 카이사르와 다시 대결을 벌이려는 게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었다. 그들은 폼페이우스를 암살하고 그의 수급을 카이사르에 바쳐서 승리자의 호의를 얻기로 작당하고, 아킬라스와 폼페이우스의 옛 부하인 루키우스 셉티미우스를 파견해 폼페이우스를 반갑게 맞이하는 척하다가 죽이게 했다. 음모는 성공했고, 암살자들은 폼페이우스의 수급을 취하고 몸은 바다 속으로 떨어뜨렸다. 이후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자, 그들은 폼페이우스의 수급을 전달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전직 집정관이며 일찍이 이집트 왕실에 은혜를 베풀었던 폼페이우스를 이런 식으로 죽인 것에 분노하면서, 승리자의 호의를 얻으려던 그들의 계획은 틀어졌다.

한편 클레오파트라 7세는 상황을 예의주시하다가 카이사르에게 몰래 찾아가서 자신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카이사르는 그녀의 매력에 반했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클레오파트라 7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공동 통치를 로마가 보장해달라는 유언을 한 것도 있기에, 두 사람이 이전처럼 공동 통치를 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여동생 아르시노에 4세는 키프로스에서 통치하도록 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은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제시한다고 여겨 불만을 품었다. 여기에 폼페이우스 살해를 주도한 혐의로 환관 포티노스를 처형하자, 이들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조언자들은 아르시노에 4세와 동맹을 맺고, 카이사르가 이집트에 이끌고 온 병력이 얼마 되지 않은 점을 이용해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7세 모두 죽여버리기로 작정했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을 선동하여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이리하여 알렉산드리아 전쟁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카이사르군

3.2.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군

4. 전쟁 경과

포티노스가 카이사르에게 처형된 직후, 아킬라스는 왕궁을 탈출한 뒤 왕실의 군대를 소집하여 도시로 접근했다. 카이사르는 사절을 보내 이들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했지만, 사절단은 도중에 공격을 받아 한 명이 죽고 나머지는 달아났다. 그는 아킬라스가 자신을 제거하려고 작정했다는 걸 알게 되자 왕궁을 요새화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클레오파트라 7세, 그리고 아르시노에 4세를 억류한 채 수비에 들어갔다. 당시 그에게는 6군단 소속 3,200 보병과 800기병 밖에 없었다. 반면 아킬라스는 이집트에서 복무한 전직 로마 군인을 포함하여 약 20,000 보병과 2,000 기병을 거느렸다.

아킬라스는 일부 병력으로 왕궁을 공격하는 한편, 더 많은 군대를 항구로 파견해 카이사르가 타고 온 전함을 빼앗으려 들었다. 로마 장병들이 바리케이드를 세워 왕궁에 침입한 적군을 무찌르는 사이, 카이사르는 항구로 달려가 수습할 수 있는 함선들을 안전한 장소로 후퇴시키고, 나머지 배는 불태웠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등대가 있는 파로스 섬에 일부 병력을 파견해, 항구의 지배권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파로스 섬 수비대가 섬으로 접근하는 유일한 다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막는 바람에 공략에 실패했다.

카이사르가 지휘하는 로마군은 수적으로 지극히 열세했지만, 오랜 전쟁을 치르면서 탁월한 전투력과 전투 경험을 갖췄고, 좁은 골목길에 바리케이드를 세움으로써 수적으로 우월한 적군을 효과적으로 격퇴했다. 그들은 왕궁 일부와 인근 극장을 요새로 바꿔서 아킬라스가 더 이상 공격할 엄두를 못내게 했고, 항구 역시 효과적으로 장악해 그 지역을 요새화했다. 이리하여 전쟁은 장기전으로 흘러갔고, 양측은 바리케이드를 친 채 대치했다.

그러던 중 아르시노에 4세가 고문 가니메데스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 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가신 아킬라스와 접촉했다. 그 후 그녀는 파라오로 공식 인정받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공동 파라오로 추대되었다. 이후 알렉산드리아 공방전을 지켜보다가 아킬라스가 무능하다고 판단하고, 가니메데스에게 아킬라스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권력은 약해졌고, 그녀가 주도권을 잡았다. 그녀는 군대의 통제권을 가니메데스에게 넘겼다.

가니메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거리를 봉쇄하고 벽을 쌓아서 로마군을 도시의 한 구역에 가두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로마군이 먹는 식수에 바닷물을 붓게 했다. 로마군은 우물을 파는 것으로 맞섰지만, 이 정도로는 임시방편에 불과했기에, 카이사르는 신선한 물을 구하기 위해 함대를 이끌고 해상 봉쇄를 뚫으려 했다. 그러던 중 폼페이우스의 베테랑 장병들 중 일부를 결성한 제37군단이 알렉산드리아 근처 해안가에 닻을 내리고 카이사르에게 전령을 보내 자신들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카이사르는 이들과 만나기 위해 작은 함대를 이끌고 바다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 시내에서 아군이 장악한 지역의 방어를 약화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병사들을 그대로 두고 선원들만 데리고 가기로 했다. 그렇게 함대가 출격하여 체르소네소스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가 너무 멀리 가다가 프톨레마이오스 해군에게 사로잡혔다. 가니메데스는 카이사르가 소함대와 함께 있으며 그를 지키는 병사가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카이사르가 도시로 돌아오는 길에 가로막기로 했다. 카이사르는 적 함대가 다가오자 해안가로 피하려 했지만, 도중에 따라잡혀서 적에게 생포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부하들이 제때 도우러 와준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또한 제37군단이 합세하면서, 카이사르의 군대는 8,000 보병, 800 기병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인들은 카이사르를 완전히 봉쇄하기 위해 새로운 함대를 갖추기로 했다. 그들은 나일 강 어귀에 정박해 있는 모든 배와 왕의 무기고에 있는 오래된 전함을 모아 22척의 갤리선과 5척의 군함과 함께 많은 수의 소형 선박을 확보했다. 이에 맞서는 카이사르의 함선은 19척이었다. 카이사르는 재무관 당시부터 자신을 따르며 능력을 선보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 해군 지휘권을 내려 자신의 뒤를 받치게 했다.

두 함대는 알렉산드리아 시의 서쪽의 얕은 수역에서 맞붙었다. 카이사르는 로도스 갤리선을 우측에, 포티아 캘리선을 좌측에 배치했으며, 두 함대 사이에 틈을 남겨두고 나머지 함선을 후방에 예비로 배치했다. 알렉산드리아인들은 22척의 갤리선을 앞줄에 배치하고 나머지 함대를 후방에 배치했다. 하지만 양측은 얕은 수역에서 섣불리 싸웠다가 암초에 걸리고 싶지 않았기에 상대방이 먼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로도스 함대 지휘관 에우프라노르가 카이사르에게 자신이 얕은 곳으로 이동하여 적을 막을 테니, 그 틈에 전장을 우회하여 적의 측면과 후방을 요격하라고 제안했다. 카이사르는 그 말에 따랐고, 로도스 함대는 적의 전면을 향해 돌격했다. 알렉산드리아 함대 일부는 로도스 함대와 맞붙었지만 나머지는 여전히 전투에 참여하길 주저했고, 결국 카이사르 함대가 흩어진 적을 각개 격파하여 2척을 포획하고 3척을 침몰시켰다. 이에 남은 알렉산드리아 함대는 급히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다.

해전에서 승리한 뒤, 카이사르는 파로스 섬을 공략하여 항구를 장악하기로 했다. 그는 경보병과 켈트 기병의 지원을 받는 10개 코호트를 이끌고, 작은 배를 타고 파로스 섬에 기습 상륙하게 했다. 한편 다른 함대는 다른 곳에서 섬을 공격해 적의 주의를 끌게 했다. 작전은 성공하는 듯했고, 카이사르는 섬에 있는 두 개의 요새 중 하나를 공략했다. 이후 다리에 수비대를 배치한 뒤 또다른 요새를 마저 공략하려 했지만, 알렉산드리아에서 출격한 적 함대가 다리에 주둔한 로마군에 화살을 퍼붓자 수비대가 견디지 못하고 패퇴했고, 뒤이어 적이 다리를 건너 섬으로 몰려오면서 위기에 직면했다.

카이사르는 어쩔 수 없이 갤리선들에 병사들을 싣고 빠져나가려 했지만, 적 함대가 추격해오면서 붙잡힐 위기에 처했다. 이에 그는 갑옷과 보라색 망토를 벗고 바다에 몸을 던져서 근처의 로마 함선으로 헤엄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알렉산드리아인들은 파로스 섬을 장악하고 항구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카이사르를 굴복시키지 못하자, 이집트의 주요 장교들은 가니메데스에게 등을 돌리고 카이사르에게 아르시노에 4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교환하겠다고 제안했다.

카이사르는 상황을 호전시킬 기회라고 여기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반란군을 찾아가서 잘 타일러서 반란을 멈추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카이사르 곁을 떠나고 싶지 않다며 울음을 터트렸지만, 카이사르가 거듭 부탁하자 그 말대로 하겠다고 맹세하며 떠났다. 그러나 정작 반란군에 가담한 뒤에는 태도를 싹 바꾸고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7세를 향한 공세를 강화했다. 그러나 왕궁을 향한 일련의 공세는 모조리 격퇴되었다. 또한 카이사르에 도달하고 있는 수송선단을 차단하고자 나일강의 카노픽 하구를 막으려 했으나, 카이사르가 파견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재빨리 카이사르 해군을 이동. 이집트 해군을 격퇴해 승기를 굳힌다. 다만 이 해전에서 로도스 제독 에우프라노르가 전사했다.

기원전 47년 초, 카이사르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가 파견한 구원군이 미트리다테스의 인솔하에 알렉산드리아 인근에 도착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나 격퇴되자, 일단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전 병력을 동원해 맞붙기로 했다. 카이사르는 자신을 포위하던 적군이 물러나자 클레오파트라 7세와 함께 도시를 빠져나와 구원군과 합세했다. 이후 양측은 기원전 47년 2월 나일 강변에서 대치했다. 카이사르의 병력은 20,000 보병, 1,000 기병이었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군대는 27,000 보병, 2,000 기병이었다.

양군 사이에는 작은 강이 흘렀는데,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기병대와 경보병대를 파견하여 적이 강을 건너는 걸 막게 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겔트족과 게르만족 기병대를 몰래 보내 적이 눈치를 채기 전에 강을 몰래 건너 매복하게 했다. 이후 카이사르군이 강을 가로지르는 임시 다리를 건설하고 진군하자, 이집트군이 즉시 저지하려 했다. 이때 켈트족, 게르만족 기병대가 뛰쳐나와 적의 측면과 후방을 요격했다. 이로 인해 전의를 급격히 상실한 이집트군은 붕괴되었고, 가니메데스는 전사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달아나던 중 나일 강에 빠져 익사했다. 이리하여 알렉산드리아 전쟁은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전쟁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를 평정한 뒤 클레오파트라 7세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공동 파라오로 선임했고, 아르시노에 4세를 로마로 보냈으며 훗날 개선식을 벌일 때 '전리품'으로 썼다. 이후 그는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나일강 유람선을 타는 등 푹 쉬었다.

그러다가 폰토스 왕국의 파르나케스 2세가 아나톨리아를 침략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이집트를 떠나 아나톨리아 반도로 향했고, 젤라 전투에서 파르나케스 2세를 상대로 완승을 거뒀다. 한편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을 낳고 카이사리온이라는 이름을 지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