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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04 21:32:22

폼페이아 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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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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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귀부인
폼페이아 술라
Pompeia Sulla
파일:폼페이아 술라.jpg
{{{#fecd21 출생}}} 미상
로마 공화국 로마
{{{#fecd21 사망}}} 미상
로마 공화국 로마
{{{#fecd21 지위}}} 파트리키
{{{#fecd21 국가}}} 로마 공화국
{{{#fecd21 가족}}}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아버지)
코르넬리아 술라(어머니)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남편)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남편?)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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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귀부인.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두번째 아내다.

2. 행적

기원전 88년 집정관을 역임한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의 아들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딸인 코르넬리아 술라의 장녀이다. 일찍이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의 조카인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와 결혼했지만, 남편이 3년만에 사망하면서 과부가 되었다. 기원전 67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재혼했다. 카이사르가 젊은 시절에 술라의 탄압을 받았고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후계자로서 민중파를 이끌 것임을 선언했던 점을 고려했을 때, 이 결혼은 다소 의외의 결정이었다. 후대 학자들은 카이사르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그의 친척인 폼페이아와 결혼하기로 했으리라 추정한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녀가 중간 키에 몸매가 좋고 뼈가 가늘었으며, 얼굴은 규칙적인 타원형이고 짙은 붉은색 머리에 밝은 녹색 눈을 갖춘 미인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돈을 쓰는 것을 좋아하고 게으르고 어리석었다고 비판했다. 카이사르는 그런 그녀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는지 6년간 자식을 낳지 않으며 여러 정부들을 사귀었다. 그녀 또한 카이사르를 별로 사랑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폼페이아는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와 밀통하고 있었지만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가 폼페이아를 예의주시했기 때문에 쉽사리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기원전 62년 12월 4일에서 5일 사이의 밤,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책을 역임하고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집에서 보나 데아(Bona Dea: 출산의 여신) 여신을 기리는 행사가 열렸다. 남자는 이 행사에 절대로 참여할 수 없었고, 오로지 여자만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런데 클로디우스는 행사 준비가 진행될 때 여자로 변장한 채 카이사르의 집에 몰래 들어갔다. 폼페이아와 밀회하려고 그랬다고 한다. 그러나 하녀 하나가 그의 존재를 눈치채고 비명을 질렀고, 다른 여인들이 곧바로 그 쪽으로 달려들었다. 이때 일이 커질 걸 우려한 아우렐리아가 여인들을 진정시킨 뒤 클로디우스를 쫓아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아와 이혼한 뒤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마찰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사건을 덮으려 했지만, 소문이 점차 퍼지면서 사건이 세간에 알려졌다.

기원전 61년 1월 1일, 그는 신성모독을 저지른 혐의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 등에게 고발당했다. 원로원이 법무관이 배심원을 구성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을 집행하려 하자, 호민관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가 반대했다. 이 법이 통과된다면 클로디우스에게 적대적인 법무관들이 유죄 판결을 이끌어내려고 배심원들을 임의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동방에서 귀환한 폼페이우스에게 이 법안을 지지하는지 물었지만, 폼페이우스는 별다른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현직 집정관 마르쿠스 푸피우스 피소 프루기 칼푸르니아누스 역시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마찰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이번만큼은 민회가 배심원을 구성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원로원은 이를 거부했지만, 클로디우스의 친구 쿠리오가 이끄는 클로디우스 추종자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어쩔 수 없이 피소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민회가 배심원단을 선출했고, 재판은 4월 중순에 열렸다.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카이사르는 클로디우스가 침입했는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재판관 한 명이 "그렇다면 어째서 아내 폼페이아와 이혼했는가?"라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지고한 공화국 로마의 최고 제사장에게는 처와 관련된 어떠한 추문도 용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와 행사에 참여한 다른 여인들은 클로디우스를 만난 적이 없다고 주장했고, 폼페이아는 증언을 거부했다. 그 후 재판은 무죄로 결론났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 없지만, 기원전 47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카이사르의 부관이었던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가 '폼페이아'라는 여인을 두번째 아내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이 폼페이아가 카이사르의 두번째 아내 폼페이아와 동일인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