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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군단 히스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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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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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로마 공화국 말기 시기3. 로마 제국 시기4. 홀연히 사라진 군단5. 대중매체

1. 개요

Legio IX Hispana. 상징은 황소. 갈리아 전쟁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지휘하에 여러 전장에서 활약했으며, 로마 제국이 수립된 후에는 히스파니아에 주둔하다가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침공 이후 브리타니아 속주에 주둔해 부디카의 난 아그리콜라의 칼레도니아 침공을 수행했다. 120년 이후 기록상에서 홀연히 사라진 것으로 유명한 군단이기도 하다.

2. 로마 공화국 말기 시기

기원은 불분명하다. 기원전 90년 동맹시 전쟁 때 9군단이 로마에 반기를 든 아스쿨룸을 포위 공격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나, 이들이 카이사르가 이끈 9군단과 동일한지는 불확실하다. 기원전 65년, 세르토리우스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8군단과 9군단을 창설했다. 기원전 61년 먼 히스파니아 또는 히스파니아 바이티카 총독으로 부임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존의 8, 9 군단과 자신이 창설한 10군단을 이끌고 루시타니아 원정을 단행해 루시타니아인들을 완전히 복속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기원전 58년, 갈리아 키살피나, 갈리아 트란살피나, 일리리아 속주를 통괄하여 관리하는 총독을 맡고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헬베티족이 갈리아로 이주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6개 군단을 소집했다. 이중에는 9군단도 있었다. 이후 9군단은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에 언제나 함께 했다. 사비스 전투에서는 10군단과 함께 아트레바테스족을 몰아낸 뒤 네르비족에 고전하고 있던 7, 12군단을 구원해 승리에 일조했다. 기원전 52년 알레시아 공방전에서는 다른 군단들과 함께 알레시아 성내의 갈리아군과 포위망 외곽의 갈리아 구원대의 협공에 맞서 며칠간 격전을 벌인 끝에 승리에 일조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의 수도인 나르보 근처에 있었고, 카이사르의 소집령에 응해 이탈리아 반도로 남하하여 카이사르가 로마의 정권을 잡는데 일조했다. 이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지휘하에 폼페이우스를 따르는 히스파니아 군단들을 상대하러 가서 카이사르가 도착할 때까지 교두보를 장악하는 데 공헌했고, 뒤이은 일레르다 전투에서 카이사르의 승리에 일조했다.

그러나 히스파니아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9군단은 북부 이탈리아의 플라켄티아에서 빈약한 급여와 전리품 부족에 대한 불만이 폭발해 카이사르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카이사르는 다른 군단병들에게 그들을 포위하게 한 뒤, 그들 앞에 서서 로마의 운명이 걸린 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고 전우들이 고생하고 있는 와중에 반란을 일으킨 것을 호되게 꾸짖었다. 그러면서 10분의 1형을 시행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군단병들은 용서해달라고 간청했고, 카이사르는 반란 주동자들의 명단을 넘기게 한 뒤 그 중 12명을 추첨을 통해 뽑은 후 처형했다.

기원전 48년 카이사르의 발칸 원정에 참여했고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폼페이우스군과 대결했지만 패배를 면치 못하고 독수리 깃발을 상실할 뻔하기도 했다. 이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지휘하에 8군단과 함께 좌익 부대에 편성되어 아군이 우익에서부터 적을 무너뜨리는 동안 폼페이우스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모루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후 7군단, 10군단, 12군단과 함께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캄파니아에 주둔한 채 카이사르가 자신들에게 보상을 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망명하려 했다가 살해된 이집트에 들어갔다가 알렉산드리아 전쟁에 휘말리는 바람에 소식이 끊겨버렸고, 세간에서는 카이사르가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베테랑 장병들은 이러다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을 우려한 끝에 반란을 일으켰다. 9군단 장병들은 일전에 카이사르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10분의 1형을 받을 뻔한 일 때문에 반란 가담에 주저했지만, 다른 군단이 압력을 행사하자 결국 가담했다고 전해진다. 일부 고위 장교가 살해되었고, 여러 도시와 마을이 약탈당했다. 카이사르를 대신해 로마를 통치하던 기병장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들을 통제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사태를 관망하기만 했다. 기원전 47년 알렉산드리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뒤이어 소아시아에서 침략 행위를 벌이던 폰토스 왕국 파르나케스 2세 젤라 전투에서 격파한 카이사르는 이탈리아에 돌아온 뒤 반란을 일으킨 군단병들과 협상한 끝에 큰 보상을 해주는 대가로 폼페이우스파가 준동하고 있는 아프리카 원정에 동참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후 9군단은 기원전 46년 아프리카 속주의 패권이 걸린 탑수스 전투에서 8군단과 함께 좌익에 배치되어 카이사르의 대승에 일조했다. 이후 군단은 해산되었고, 퇴역병들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일리리쿰, 캄파니아, 피케눔 등지에 정착했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지자 카이사르의 원수를 갚기 위해 퇴역병들이 재집결하면서 8군단이 재조직되었고, 필리피 전투에서 안토니우스의 지휘를 받았다. 기원전 41년 페루시아 내전이 발발했을 때 옥타비아누스의 편에 섰다. 이후 시칠리아 내전에 참전해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물리치는 데 한 몫한 뒤 발칸 반도에 복무했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와 함께 동방에 있으면서 9군단을 별도로 조직했다. 그 후 악티움 해전에서 두 '9군단'이 서로 맞붙었고, 옥타비아누스가 승리를 거둔 뒤 안토니우스 측 9군단이 옥타비아누스 측 9군단에 병합되었다.

3. 로마 제국 시기

기원전 26년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소집령에 따라 히스파니아로 이동해 칸타브리아 전쟁을 8년간 치렀다. 이때 큰 공적을 세웠기 때문에 '히스파니엔시스(Hispaniensis, 히스파니아 주둔군)"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나중에 히스파나로 축약되었다. 기원전 19년 아퀼레이아로 본부를 이전했고, 서기 8년 일리리아 대반란이 발발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한 원정에 참여한 뒤 43년까지 시사크 등지에 주둔했다.

14년 아우구스투스가 붕어했고 티베리우스가 새 황제로 등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판노니아 사령관 유니우스 블라이수스는 부하들에게 숙영지에서 휴식을 취하게 했다. 당시 장병들은 고된 훈련과 노역에 시달리고 있는데 급여는 매우 적다며 불만이 가득했다. 이때 군단병인 페르켄니우스가 동료 군단병들을 모아놓고 낮은 급여와 군역의 어려움에 대해 논하면서, "새 황제가 등극한 지금이 우리의 처지를 호소할 절호의 기회다"라고 설득해 호응을 얻어냈다. 9군단은 판노니아 전선에 함께 주둔한 8군단 아우구스타, 15군단 아폴로나리스와 함께 봉기를 일으켰다.

티베리우스는 아들 소 드루수스를 파견해 군단병들을 설득하게 했다. 드루수스는 숙영지에 도착한 뒤 반란군의 갖은 협박과 모욕에 시달렸고, 숙영지 내부에 감금되다시피했다. 그러던중 월식이 발생하자, 드루수스는 이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인망 높은 백인대장들을 은밀히 만나 이들을 설득했고,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그는 이들과 면담 직후, 기본적인 질서마저 사라진 군단의 군율부터 재정비하기로 했다. 이후 백인대장들을 월식에 두려워하는 병사들에게 보내 달이 사라진 건 신이 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티베리우스의 가족을 잡아가뒀기 때문이라고 알려주게 했다. 이에 설득된 병사들은 드루수스를 좀더 정중하게 대했고, 드루수스는 그들의 불만 사항을 티베리우스와 원로원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해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 후 페르켄니우스 등 반란을 주동한 자들은 긴급 체포된 뒤 처형되었고, 드루수스는 아직도 반란을 지속하려는 군단병들을 색출해 처단했다.

17년 타파리나스가 누미디아인과 마우리타니아인들을 선동해 아프리카 속주를 침략했다. 현지에 주둔한 3군단 아우구스타로는 이들을 감당할 수 없는 게 분명해지자, 티베리우스는 20년 9군단을 그 쪽으로 파견했다. 9군단은 총독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우스의 지휘하에 3군단과 힘을 합쳐 반란군과 교전한 끝에 24년에 토벌을 달성했다. 그 후 판노니아로 돌아가서 도나우 강 수비에 전념하다가 43년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침공에 동원된 것을 계기로 브리타니아로 이동했다. 그들은 린두눔 콜로니아라는 이름의 요새를 건설하고 그곳에 주둔했는데, 이곳은 훗날 잉글랜드 링컨셔 주의 주도인 링컨 시가 되었다.

52년에서 57년 사이에 브리간테스 족의 왕 베누티우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61년 부디카의 난이 발발하자 군단장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의 지휘하에 반란군이 점거한 카물로두눔(현재 콜체스터)을 탈환하기 위해 진군했다가 매복에 걸려 보병 전체가 궤멸되고 기병대만이 가까스로 살아남는 참패를 당했다. 이후 게르마니아에서 차출된 군단병들이 9군단에 새로 보강되었다. 71년 브리타니아 총독에 선임된 전 군단장 루푸스의 지휘하에 다른 2개 군단과 함께 칼레도니아인들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에보라쿰(오늘날 요크)에 새로운 요새를 건설했다.

82~83년 아그리콜라의 칼레도니아 침공에 참전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9군단은 칼레도니아인들이 밤에 요새를 기습 공격했을 때 궤멸될 위기에 몰렸지만, 간신히 버티는 사이에 아그리콜라가 기병대를 파견해준 덕분에 격퇴할 수 있었다. 이후 9군단은 몬스 그라우피우스 전투에서 칼레도니아군 30,000명을 격파하는 데 공헌했다. 108년 에보리쿰의 군단 요새를 돌로 재건하는 공사를 수행한 사실이 요크에서 출토된 비문에서 확인되었으며, 120년 노비오마구스 바타보룸( Noviomagus Batavorum, 현재 네덜란드 네이메겐)의 요새 보강 공사에 9군단 분견대가 투입되었다는 것 역시 고고학자들의 유물 발굴로 밝혀졌다.

4. 홀연히 사라진 군단

갈리아 전쟁, 카이사르의 내전, 일리리아 대반란,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침공, 부디카의 난, 아그리콜라의 칼레도니아 침공 등 숱한 전쟁에서 활약하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수행하는 등 로마의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던 9군단은 2세기 무렵에 홀연히 사라졌다. 3세기 초의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33개의 군단 목록을 제공했지만 9군단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197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비문(CIL VI 3492)에서 로마 군단들을 열거할 때도 9군단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하드리아누스는 122년 6군단 빅트리스를 에보리쿰으로 이전시켜서 브리타니아 북부 경계 수비를 맡겼는데, 많은 학자들은 이 조치를 9군단을 대체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한다.

학자들은 9군단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이유에 대해 여러 추측을 제기했다. 1866년 영국 햄프셔 주 실체스터에서 로마 시대 독수리 조각상이 발견되었다. # 당시 학자들은 이것이 로마군의 아퀼라 군기이며 9군단이 궤멸될 때 땅에 묻혔다고 추정했다. 19세기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은 9군단이 칼레도니아인들을 정벌하기 위해 북상했다가 완전히 궤멸되었다고 주장했다. 몸젠 생전에는 노비오마구스 바타보룸에서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몸젠은 108년 직후에 9군단이 궤멸되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유물이 발견되자, 몸젠의 주장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120년 에서 122년 사이에 9군단이 칼레도니아인들에게 궤멸된 것으로 수정했다.

이들의 주장은 오랫동안 학계에서 정설로 간주되었지만, 120년 이후 9군단에 속한 장군들의 경력을 담은 비문 3개가 발견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로마 출신의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카루스는 120년대 중반에 9군단의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 복무한 뒤 로마로 돌아와서 경력을 쌓아 법무관에 이르렀고, 이후 30 군단 울피아 빅트리스의 레가투스 레기오니스에 선임되어 다키아 속주의 방비를 맡았다. 이후 142년부터 143년까지 아라비아 페트레이아 속주의 총독을 역임했고, 뒤이어 갈리아 루그두넨시스와 카파도키아 총독을 역임했다.

루키우스 노비우스 크리스피누스는 120년대 중반에 카루스의 뒤를 이어 9군단의 트리부누스 밀리툼에 선임되었다. 이후 재무관에 선임되어 마케도니아 지방의 행정을 보조하였고, 뒤이어 법무관을 역임한 뒤 136년부터 138년까지 아스투리아와 갈래키아에서 법관으로 일했으며, 146년에서 150년까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총독을 맡았고, 3군단 아우구스타를 지휘했다. 그 후 150년 또는 151년에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퀸투스 카무리우스 누미시우스 주니오르는 크리스피누스 이후 모종의 시기에[1] 9군단 히스파나의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역임했고, 뒤이어 로마에서 재무관을 맡은 뒤 사제단의 일원을 맡았다. 이후 150년경 법무관을 수행한 뒤 2개 군단의 레가투스 레기오니스에 선임되었다. 그가 첫번째로 맡은 군단의 이름은 비문에서 마모되었기 때문에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두 번째로 맡은 군단은 6군단 빅트리스임이 확인되었다. 이후 161년 집정관에 선임되어 로마 정계에서 활약했다.

이렇듯 하드리아누스가 6군단 빅트리스를 에보리쿰으로 이전시킨 뒤에도 9군단에서 고위 장교로 활약했던 이들이 3명 이상 존재했음이 드러났고, 9군단이 칼레도니아인들에게 궤멸되었음을 입증하는 고고학적 증거도 없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또한 실체스터에서 발견된 독수리 조각상도 군기가 아니라 바실리카를 장식하던 장식 조각품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 성벽 공사에 동원된 부대에 9군단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기에, 많은 학자들은 9군단이 모종의 이유로 브리타니아를 떠났을 거라고 추정한다.

일부 학자들은 132년에 발발한 제3차 유대-로마 전쟁에 투입되었다가 궤멸되었거나 161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 때 궤멸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하지만 이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는다. 제3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22 군단 데이오타리아나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예루살렘)으로 진군하다가 매복을 당해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지만, 9군단이 유대 반란군에 궤멸되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두 군단 모두 궤멸되었다면, 이는 3개 군단이 궤멸된 토이토부르크 전투 이래 최악의 재앙으로서 로마 역사가들의 주목을 반드시 끌었을 것이다.

161년 파르티아가 시리아를 침공했을 당시, 카파도키아 총독 마르쿠스 세다티우스 세베리아누스는 1개 군단을 이끌고 이에 맞서 싸웠다가 완패를 면치 못하고 군단이 전멸한것에 책임을 느끼고 자살했다. 세베리아누스가 이끌고 간 군단의 명칭은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는데, 9군단 히스파나 또는 22군단 데오타리아나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22군단 데오타리아나가 동방에 근무하고 있었다는 게 분명한 것과는 달리 9군단 하스파나가 동방으로 옮겨졌음을 입증하는 문헌 기록이나 유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다른 학자들은 9군단은 다른 지역으로 단순히 재배치되었거나 해산되었으며 단지 기록이 전해지지 않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이론은 9군단처럼 오랫동안 군사적 위업을 쌓고 존경받는 부대가 별다른 이유없이 해체되거나 재배치될 가능성이 낮다는 반박을 받고 있다. 이렇듯 9군단의 운명은 여전히 학계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결론은 현재까지 확정되지 않고 있다.

5. 대중매체

기록에서 사라진 원인이 불명이다 보니, 칼레도니아 원주민들에게 궤멸당했다거나 심지어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다는 식으로도 나온다.


[1] 잉글랜드의 역사가 에릭 비얼리(Eric Birley, 1906 ~ 1995)는 140년대로 추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