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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b0000> 가족 |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 계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 · 어머니 아티아 · 누이 소 옥타비아 | ||
부인 | 첫째 부인 클로디아 풀크라 · 둘째 부인 스크리보니아 · 셋째 부인 리비아 드루실라 | ||
자식 | 딸 대 율리아 · 양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루키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티베리우스 · 양아들 대 드루수스 | ||
전투 | |||
내전기 | 무티나 내전 · 해방자 내전 · 페루시아 내전 · 시칠리아 내전 ·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 ||
전투 | 필리피 전투 · 옥타비아누스의 일리리아 원정 · 악티움 해전 · 칸타브리아 전쟁 · 갈루스의 아라비아 원정 · 쿠시-로마 전쟁 · 게르마니아 전쟁 · 토이토부르크 전투 | ||
반란 | 일리리아 대반란 | ||
기타 | |||
장소 | 아우구스투스 영묘,(), · 판테온 | ||
기타 | 칭호 ·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
일리리아 대반란 영어: Great Illyrian Revolt 라틴어: Bellum Batonianum[1] |
||
시기 | 6년 ~ 9년 | |
장소 | 일리리아 속주 | |
교전국 |
로마 제국 사파이 왕국 |
일리리아 |
지휘관 |
티베리우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메살리누스 아울루스 카이키나 세베루스 게르마니쿠스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로메탈케스 1세 |
바토† 피네스 바토[2] ◎ |
병력 |
10~15개 군단 70개 보조병 코호트 사파이 왕국 기병 이탈리아에서 파견된 퇴역병 및 자원병 |
보병 200,000명, 기병 9,000명[3] |
피해 | 불명 | 불명 |
결과 | 로마 제국의 승리. 토이토부르크 전투의 계기가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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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9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로마 제국에 복속된 일리리아 부족민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면서 벌어진 전쟁.
두 명의 '바토'(Bato)[4]가 주도했다고 하여 바토스 전쟁으로도 불리는 이 전쟁은 참혹한 학살로 한때 로마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으며, 게르마니아에 주둔하고 있었던 로마군이 이 반란 진압을 위해 대거 남하한 틈을 타 게르만족이 봉기하면서 일리리아와 게르마니아를 동시에 제패하려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대전략이 허물어지는 결과가 나왔다.
2. 배경
기원전 3세기, 로마 공화국은 아드리아 해를 종횡무진하며 이탈리아 반도의 해안 도시들을 습격하여 막심한 피해를 입히는 일리리아 해적들에게 시달렸다. 이에 로마는 기원전 219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를 파견해 일리리아 왕국을 제압하고 해적들을 소탕했다. 그후 로마가 발칸 반도에 지속적인 군사 활동을 벌이면서, 일리리아는 자연스럽게 로마의 영향권에 들어갔고, 나중에는 일리리쿰 속주가 되었다. 그러나 일리리아의 여러 부족은 로마의 지배로부터 독립할 때를 노렸고, 틈만 나면 반란을 일으켰다.카이사르의 내전이 벌어졌을 때, 일부 해안 도시에 살던 로마인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지한 반면에 일리리아 토착민들은 폼페이우스를 지지했다. 토착민들은 15개 보병 대대와 3,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이탈리아에서 일리리아까지 행진하고 있었던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를 습격해 큰 손실을 입히기도 했다. 그러다가 내전이 카이사르의 승리로 끝나자 카이사르에게 복종했고, 카이사르는 기원전 45년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를 일리리아 총독으로 임명해 그곳을 안정시키는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일리리아인들은 로마 정계가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켜 로마군을 대거 죽였다. 그후 일리리아는 무법천지가 되었고, 아드리아 해에서 일리리아 해적들이 또다시 준동했다.
기원전 35년, 달마티아 최북단 부족인 이아피데스족이 이탈리아 북동부로 쳐들어가 아퀼레이아를 포위 공격하고 테르게스토스를 약탈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보복 작전에 나서 이아피데스족을 격파한 뒤 판노니아 남부로 진격하여 세게스타를 점령한 후 '시스키아'(Siscia)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일리리아 해안 지대를 모조리 탈환했다. 결국 기원전 33년, 일리리아 부족들은 항복하여 로마의 지배에 복속되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일리리아 원정) 그 후 일리리아는 한동안 조용했지만, 기원전 16년 판노니아인들이 쳐들어와 약탈을 자행하고 마케도니아 속주까지 침입하면서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끝장을 보기로 하고, 기원전 13년 아그리파에게 일리리쿰의 최고 지휘권을 줘서 판노니아인들을 정복하고 도나우(다뉴브) 강 유역까지 로마의 영역을 확장하는 원정을 맡겼다. 그러나 아그리파는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티베리우스가 그를 대신해 지휘권을 맡았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14년부터 기원전 13년까지 판노니아 전쟁을 개시해 판노니아인들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도나우 강 유역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로마는 원정을 통해 복속된 속주민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데 실패했다. 일리리아로 부임한 총독들은 사익을 챙기고자 속주민들을 쥐어짰고, 일리리아인 자녀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파는 걸 서슴지 않았다.
한편, 로마는 정복전쟁을 연이어 벌이는 과정에서 병력 자원이 절실히 필요해졌고, 속주민들로 구성된 보조병 부대를 대거 징집했다. 그 결과 대다수 일리리아인들은 로마군의 규율과 전술에 익숙해졌으며, 많은 이가 라틴어를 잘 알고, 글을 읽으며 쓸 수 있게 되었다. 억압은 억압대로 하면서도 전투력을 키워주는 이러한 모순적인 행보로 인해, 일리리아인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조건이 저절로 조성되었다. 결국 서기 6년, 그동안 누적된 불만이 폭발하면서, 일리리아 대반란이 발발했다.
3. 경과
서기 6년,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마르코만니족의 왕 마로보두스를 공격하기 위한 대규모 원정군을 조성했다. 이때 일리리쿰과 판노니아의 총독이었던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메살리누스는 티베리우스에게 보내기 위해 속주민들을 징발해 대규모 보조병 부대를 창설한 후 라인 강 전선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도중에 데시타이트족 출신의 바토와 브레우키족 출신의 바토를 지도자로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에 따르면, 이 반란에 가담한 부족민의 숫자는 800,000명에 달했으며, 병력은 보병 200,000명과 기병 9,000명이었다고 한다. 반란군은 일리리아 전역으로 진군해 수비대로서 그 지역에 남겨진 제7군단, 제9군단, 제10군단의 잔여 부대를 섬멸시키고, 모든 로마 시민을 대학살했다.이후 반란군은 세 부대로 나뉘었다. 한 부대는 일리리아를 지켰고, 한 부대는 마케도니아로 쳐들어갔으며, 나머지 한 부대는 이탈리아 반도로 쳐들어가려고 했다. 데시타이트인 바토는 살로나를 포위했지만 잘 요새화된 도시를 점령하지 못하자 인근을 파괴하고, 달마티아 해안을 약탈한 뒤 마케도니아로 쳐들어가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으며, 아폴로니아에도 부대를 파견해 파괴를 자행하도록 했다. 또한 반란군은 아드리아 해를 건너 이탈리아 본토를 직접 공격해 여러 해안 도시와 마을을 약탈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엄청난 소식에 경악했다. 그는 원로원을 소집한 뒤 즉각적인 조치를 내리지 않는다면 반란군이 로마 시 앞에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이후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로 매우 불안해했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라인 강 전선의 티베리우스, 트라키아 전선의 아울루스 카이키나 세베루스, 그리고 트라키아 사파이 왕국의 로메탈케스 1세에게 일리리아 반란군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트라키아 전선 방면군 사령관 아울루스 카이키나 세베루스는 반란군이 시르미움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로메탈케스 1세로부터 트라키아 기병대를 받아낸 뒤 빠르게 진격하여 드라부스 강 인근에서 브레우키인 바토의 군대와 격돌했다. 그 결과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다키아인과 사르마티아인이 도나우 강을 건너 트라키아로 침입하자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티베리우스는 마르코만니 왕 마로보두스와 평화협약을 맺은 뒤 신속하게 판노니아로 진군했다. 그는 먼저 일부 병력을 이탈리아로 보내 반란군이 이탈리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길목을 차단하게 한 뒤, 일리리아 경계로 진군하면서 발레리우스 메살리누스의 제20군단을 앞서 보냈다. 이 군단은 일리리아 반란군과 맞서 싸우느라 전력 소모가 커서 정원의 절반인 2,500명밖에 없었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에 따르면, 메살리누스는 도중에 20,000명 가량의 반란군에게 둘러싸여 섬멸될 위기에 몰렸지만, 부하들을 잘 통솔해 포위망을 돌파한 뒤 후퇴하다가 추격해오는 적을 매복 공격해 크게 격파했다고 한다. 이후 제20군단은 '발레리아 빅트릭스'[5]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들의 맹활약으로 길이 열리면서, 티베리우스는 시스키아(세게스타)를 탈환하여 반란이 판노니아 서부로 퍼지는 것을 저지했다. 하지만 그는 더 깊숙이 진격했다간 적의 유격전술에 시달릴 걸 우려해 진군을 멈추고 보급로를 탄탄히 다지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후 로마군이 겨울 숙영에 들어가자, 반란군은 다시 마케도니아를 침공했지만 트라키아 왕 로메탈케스 1세에게 격파당했다. 다만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이 이에 어찌 대처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이듬해인 서기 7년, 아우구스투스는 퇴역병과 자원병들을 대거 모아 티베리우스의 조카인 게르마니쿠스에게 맡겨 일리리아로 파견했다. 그는 티베리우스와 합류한 후 공세를 준비했다.
벨레이우스 파테르클루스에 따르면, 카이키나 세베루스와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는 모이시아와 아시아 속주에서 가져온 5개 군단과 보조병 부대, 트라키아 기병대를 이끌고 클라우디아 산맥으로 진군했다가 반란군의 매복 공격에 직면했다. 트라키아 기병대는 패퇴했고 보조병 부대는 뿔뿔이 흩어졌으며, 군단병 역시 많은 손실을 봤지만, 두 사람은 군단병들을 재집결시킨 뒤 반격을 가해 승리를 거뒀다고 한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카이키나 세베루스[6]는 볼케아 습지 근처에 진을 치고 있을 때 반란군의 습격을 받았지만 많은 손실을 본 끝에 격퇴했다고 한다.
그후 로마군은 가능한 한 많은 지역을 한꺼번에 점령하고자 여러 분견대로 나뉘었다. 그러나 게르마니쿠스가 달마티아 부족인 마자에이족을 무찌른 것 외에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반란군은 산성에서 농성하다가 틈만 나면 기습을 가해 로마군에게 상당한 손실을 입혔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반란군을 상대로 무리하게 공세하는 대신 주변 지역을 초토화시키는 전술을 꿋꿋이 밀어붙였다. 이로 인해 기근과 질병에 시달린 일리리아인들은 평화를 갈망하게 되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브레우키인 바토는 브레우키 족장 피네스가 자신을 배신할 걸 의심해 그를 몰아냈다. 그러자 데시타이트인 바토가 브레우키인 바토를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한 요새에 가둔 뒤, 요새 수비대에 의해 넘겨진 그를 처형했다고 한다.
이러한 내부 분열로 반란군의 위세가 약화되자, 티베리우스의 부관이었던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가 출전하여 브레우키족을 정복하고 다른 부족들을 별다른 전투없이 복속시켰다. 이에 데시타이트인 바토는 판노니아에서 철수하여 달마티아로 이어지는 길목을 차단한 후 그 너머의 땅을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이후 찾아온 혹독한 겨울에 시달린 데다가 뒤이은 기근으로 수많은 이가 죽어가자, 일리리아인들은 더 이상 싸우지 않기로 했다. 서기 9년 여름, 그들은 바티누스 강변에서 로마군에게 귀순했다. 데시타이트인 바토는 체포된 뒤 로마군에 넘겨졌고, 브레우키족의 왕 피네스는 항복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를 묻자, 데시타이트인 바토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유혈 사태는 로마인에게 책임이 있다. 당신들이 양떼같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목자와 개를 보내지 않고, 늑대를 보냈기 때문이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끝까지 항전하던 피루스타에족과 다이시아타이족에 대한 원정을 단행해 농지를 황페화시키고 집을 불태우는 전술을 구사했으며, 이에 두 부족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서 로마 제국에 귀순했다. 또한 게르마니쿠스는 잔여 반란군이 숨은 마지막 요새인 아르두바를 포위했다. 요새 내에서 전투를 계속하려는 반란군과 평화를 원하는 주민들간의 유혈사태가 벌어졌고, 주민들이 수적인 우위를 앞세워 반란군을 제압했다. 여인들은 노예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았기에 반란군 편을 들었지만, 끝내 반란군이 패배하자 아이들을 데리고 불 속으로 뛰어들거나 강물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이리하여 일리리아 대반란은 3년만에 종결되었다.4. 이후
로마군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일리리아인들에 맞서 전군의 3분의 1에 달하는 병력을 집중시키고, 초토화 전술과 대량 학살을 벌인 끝에 겨우 진압했다. 로마는 이러한 반란이 벌어질 수 있었던 건 국경 방어에만 신경쓰다보니 배후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약했기 때문임을 인식하고, 제15 아폴로스 군단을 에모나에, 제4 히스파니아 군단을 시스키아(세게스타)에, 제8 아우구스티 군단을 페토비아에 주둔시켜서 일리리아 전역을 통제하도록 했다.일리리아 대반란 진압에 투입된 8개 군단의 병력은 게르마니아에 주둔했던 병력을 대거 차출한 것이었고, 게르마니아에 남은 나머지 병력은 고작 3개 군단뿐이었다. 자연히 게르만족에 대한 통제력이 현저히 약해졌다. 게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게르마니아가 안정되었다고 오판하여, 동방에서 행정 능력이 우수하고, 반란을 강경 진압해 현지인들이 로마 제국의 지배에 순응하게 만드는 능력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은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를 게르마니아 현지 총독으로 부임시켰다. 바루스가 현지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실책을 연이어 저지르자, 보조군 기병대 지휘관으로 복무하면서 로마군의 실태를 거진 파악하고 있었던 체루스키족의 아르미니우스는 이때를 틈타 반란을 꾀했다. 결국 아르미니우스가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바루스와 로마군 3개 군단을 궤멸시키면서, 오래도록 추진했던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정복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