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0c0ff> 미리오케팔론 전투 영어: Battle of Myriokephalon(Battle of Myriocephalum)[1] 그리스어: Μάχη του Μυριοκέφαλου 튀르키예어: Miryokefalon Savaş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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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서기 1176년 9월 17일 | |
장소 | 현 튀르키예 콘야 도 베이셰히르(Beyşehir) 호수와 콘야시 사이의 도로 | |
원인 | 우트르메르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영항력 재확립 시도 | |
교전국 |
동로마 제국 헝가리 왕국 안티오키아 공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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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마누일 1세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 안드로니코스 바타치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안드로니코스 람파르다스 테오도로스 마브로조미스 콘스탄티노스 마크로두카스 암푸드 보두앵† |
클르츠 아르슬란 2세 |
병력 | 약 2만 5천~5만 | 불명 |
피해 | 사상자 다수 | 불명 |
결과 | 동로마 제국이 주도한 연합군의 패배 | |
영향 | 아나톨리아의 룸 술탄국의 세력권 유지, 동로마 제국의 국제적 위상 실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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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76년 9월 17일, 동로마 제국이 주도한 연합군과 룸 술탄국간에 일어난 전투. 공식적으로는 기독교 제국이 이슬람 왕국을 공격한 '성전(聖戰)'이지만, 동로마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주도권 다툼이 수면 아래에 있었다.
2. 배경
2.1. 양 로마 제국의 패권 경쟁
12세기 중반,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는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로마 황제', 즉 기독교 패권국으로서의 경쟁을 하고 있었다.[2] 이러한 경쟁은 상징적인 영토인 이탈리아에 대한 쌍방의 영향력 확대로 드러났다. 1154년 시칠리아 국왕 루지에로 2세가 죽자 두 황제는 각각 1154년, 1155년 부터 이탈리아로 원정을 개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현지 정치체(북이탈리아에서는 교황이 후원하는 도시동맹, 남이탈리아에서는 시칠리아 왕국)들의 저항과 서로의 견제로 인해 양국의 군사력 투사는 실패했다. 결국 주변에 적이 더 많던 동로마 제국은 시칠리아 왕국과 강화하고, 이탈리아에 군사력 대신 외교력·경제력을 투사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이탈리아를 향한 군사력 투사를 지속했으나,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정치체들을 유무형으로 지원하여 1176년 전까지 번번히 실패한다. 결국 이탈리아에서 양 로마 제국의 힘겨루기는 냉전화하였다.한편, 레반트 지역에서 살라딘이 1174년에 술탄으로 등극한다. 그의 아이유브 왕조가 주변의 이슬람권을 통합하여 그 세력이 강성해지자 십자군 국가들이 안보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기독교권의 최고 웃어른인 두 황제의 경쟁은 '성지'인 예루살렘 왕국의 보호로 옮겨갔다. 당사자인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보두앵 3세와 아모리 1세 형제는 1150년대 중반부터 동로마 제국에 안보를 의존하고 있었는데, 1174년 아모리 1세가 죽고 보두앵 4세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인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는 갑자기 몽페라 후국과의 외교에 주력했다. 몽페라 후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이었으므로 그 관계개선은 곧 신성 로마 제국과 가까워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외교 전략이 급변한 이유를 크게 두가지로 추측할 수 있겠다. 첫째로는 섭정의 사감이다.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는 여동생 멜리장드를 마누일 1세의 후처로 들여보내려 했으나, 이것이 좌절되자 동로마령 키프로스를 노략질한 과거가 있었다. 그 자신이 동로마 제국과 관계가 틀어진 상태에 악감정도 있던 상황이었다. 둘째로는 안보 환경의 악화이다. 과거 장기 왕조는 위협적이었으되 동로마 제국이 안전보장을 해주어 견제가 가능했다. 또한 장성한 군주가 건재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에서, 원정으로 허약해진 파티마 왕조를 공격하여 이집트 공략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자력갱생도 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군사적 능력을 입증하지 못한, 문둥병에 걸려 혼인 동맹도 불가능한 소년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살라딘이 등장해 갑자기 이집트·시리아가 아이유브 왕조로 통합되었다. 동로마 제국과의 동맹이 제공하는 안전보장이나 함대파견, 자금지원으로는 도저히 극복이 불가능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군사원조, 즉 십자군 원정이 필요했다. 섭정 레몽 3세로서는 새로운 십자군을 주도할 인물로 줄곧 남하를 시도하려 했던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적합해 보였을 것이다.
동로마 제국 측은 이미 헝가리 왕국, 세르비아 대공국, 룸 술탄국 등을 복속했고, 레반트에서는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키아 공국 등과 혼인 동맹을 맺어 느슨한 세력권을 구축한 상황이었다. 성지를 위한 여러 지원도 지속하여 1169년에는 예루살렘 왕국이 이집트를 도모하자 함대를 파견한 바까지 있었다. 그런데 1170년대 들어 그간의 노력이 무산될 위기에 처한다. 베네치아 공화국과 전쟁이 발발하여 사이가 틀어지고, 신성 로마 제국이 동로마 측의 이탈리아 교두보인 안코나 공화국을 공성하여 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이 붕괴 할 뻔한 것이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예루살렘 왕국에 어린 군주가 들어서더니 그 섭정이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 또한 중시하게 되었다.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로서는 신성 로마 제국이 이탈리아에 골몰하는 사이, 군사적 충돌을 피해 외교적 균형을 유지하고 다른 지역으로 영향권을 확장하는 기존의 대전략에 균열이 생기면서 해결책이 필요해졌다.
2.2. 동방 십자군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이 성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십자군을 선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동로마 제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 확대는 물론 십자군 자체를 경계하여 이를 스스로 대체하고자 하였다. 마침 그러한 동로마 제국에게 신성 로마 제국과 연대하려하는,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한 룸 술탄국이 눈에 걸리게 되었다.이미 동로마 제국의 연이은 압박으로 국력차를 실감한 룸 술탄국은 1161년 불평등한 동맹[3]을 받아들여 사실상 제국의 봉신국이 된 상황이었다. 이후 아나톨리아 전선을 안정시켰다 판단한 동로마 제국은 발칸과 레반트에 힘을 투사하는 등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고, 그 사이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와신상담하며 조용히 힘을 키워갔다. 그리고 1174년, 시리아에 중점을 두고 다니슈멘드 왕조의 안전을 보장하던 장기 왕조의 누레딘이 죽었다. 후계자 살라딘이 그 세력을 이어받았는데, 그는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지역에 중점을 두었다. 결국 룸 술탄은 다니슈멘드를 공격하여 마침내 세력을 재확장해버린다. 다니슈멘드의 요인들은 동로마 제국으로 도주해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마누일 1세는 룸 술탄국이 다니슈멘드 왕조에게서 빼앗은 영토를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룸 술탄이 이를 거부하자 마누일 1세는 세력권에서 이탈하려하는 룸 술탄국에 보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탁월한 외교감각을 가진 마누일 1세는 징벌적 성격을 띈 이 원정을 십자군 여론이 높아진 지중해의 상황과 대상이 무슬림 국가임을 이용하여 원정의 의미를 확대하기로 하였다. '성전' 즉, 십자군을 선포하여 선수를 취하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1세가 남하할 조짐을 보이던 1175년, 마누일 1세는 성전을 선포하였다. 원정을 위한 사전 작업으로 룸 술탄국령인 니오 케사리아(Neo Kaisareia)와 아마시아(Amasya)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새선을 전진시켜 프리기아에 도릴레온, 수블레온(Sublaion)[4]등의 요새를 건설했다. 또 성전을 선포했으니 이에 걸맞게 '성지' 예루살렘 왕국을 지원하기 위한 함대를 소집하여 예루살렘령 아크레로 파견했다. 일련의 움직임은 여러 군사적·역사적·종교적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새로운 십자군을 미연에 방지하는 한편, 십자군 국가 사이에 영향력을 재확립하고자 하는 외교의 연장이었다.
그리고 황제 본인은 룸 술탄국을 공격하기 위해 제국의 중앙군은 물론 봉신국, 동맹국 등의 주변 기독교 국가의 군대를 모조리 소집하기 시작했다. 지중해권은 물론 저 멀리 잉글랜드 왕국까지 선전한 이 연합 원정군의 목표는 룸 술탄국의 수도 이코니온이었다.
3. 원정 준비
마누일 황제는
룸 술탄국에 대한 응징 원정을 가하기 전, 교황청,
신성 로마 제국을 비롯한 여러 서유럽 국가들에게 서신을 보내 동방 로마 제국이 나서는 소위 '성전'의 위용에 대해서 자랑하였다. 독일 사신들의 설명에 따르면, 그의 전열은 10마일에 걸쳐 뻗쳐나갔고, 그리스인들은 물론 복속된 헝가리인, 세르비아인, 안티오키아에서까지 병력이 모였다. 이 지원군의 수는 대략 5,000여명정도 되었다. 그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들은 대개 젊고 혈기넘치는 청년들이었는데, 그중에는 안티오키아 공작의 친척인 안티오키아의 보두앵과 헝가리의 왕자, 세르비아의 족장들이 끼어 있었다. 그 숫자는 4만 5천, 외국인 병력까지 과장해서 말하면 10만에 달했다고 그리스 역사가들은 기록했다. (짐 브레드베리, 『 The Routledge companion to medieval warfare』 중에서)
황제의 친정(親征)이니 만큼 엄청난 군비가 갖춰졌다. 제국군만 최소 2만 5천이 소집되었으며, 속국인 헝가리 왕국, 봉신국인 안티오키아 공국 등에서 군대를 보내왔고, 기독교도인 세르비아계, 아르메니아계 군주들도 원정에 참여했다. 교황청, 예루살렘 왕국 등 주변 기독교 국가에 원정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던 마누일 1세는 이 '성전군'의 행렬이 10마일에 달한다고 서신을 통해 자랑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많은 병력이 갖춰졌다.
반대로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에게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와신상담하며 간신히 본래 궤도에 오른 상황이었는데, 졸지에 망국의 위기에 몰렸으니 말이다. 술탄은 황제에게 계속 평화협상을 제안했고 다니슈멘드 왕조의 영토를 반환한다는 등의 유리한 조건까지 내걸어봤으나 우위를 확신하고 있던 황제는 이를 모두 물리쳐 버렸다. 결국 남은 방법은 전투뿐이었고, 이에 술탄은 병력을 소집하였지만 만여명도 안되는 전력일뿐이었다. 적게는 1:3에서 크게는 1:5까지 벌어진 전력차를 극복하기 위해 지형지물을 이용한 매복전술로 시간을 끌고, 동시에 화평을 지속적으로 제안한다는 전략이 수립되었다.
4. 진행
전투 4년 후인 1180년의 상황을 나타내는 지도.
집결지인 미시아의 로파디온(Lopadion)[5] 에서 목적지인 이코니온으로 향하는 길은 험하고 멀었다. 로파디온에서 이코니온까지는 직선거리로도 약 430km나 되는데, 추가로 합류할 병력과 대군의 보급을 고려한 결과 로파디온에서 트라키시온 테마로 남하한 다음 메안드로스 강 유역의 계곡지대에서 라오디키아, 수블레온 등의 거점을 따라 동진하게 되어 더욱 긴 행군이 되었다. 지형을 무시한 로파디온-이코니온 사이의 직선 거리가 약 430km인데, 사서에 기록된 원정군의 예정행군로는 약 700~900km가 된다. 비유하자면 직각삼각형의 빗변이 아닌 인접변들을 따른 행군로가 되겠다. 더군다나 구릉지와 산악지대가 펼쳐진 늦여름의 더운 고원지대는 대군이 기동하기에는 나쁜 환경이었고, 청야전술에 의한 물과 마초의 부족은 원정군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룸 술탄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주변의 환경에서 자신들의 장기인 매복과 히트 앤 런 전술이 효과적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이러한 매복에 제대로 걸려든 것은 안드로니코스 바타치스(Andronikos vatatzes)의 별동대였다. 별동대는 본대와는 달리 숫적인 우위를 가지지도 못했고, 그들이 진군해온 길은 수풀이 우거져서 매복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가진 곳이었다. 옛 아나톨리콘 테마에 들어설 즈음 갈라져서 아마시아를 향해 진군하던 이 불운한 별동대는 괴멸되었고 지휘관인 안드로니코스의 머리는 룸군의 창끝에 걸리게 되었다. 상황이 나쁘게 굴러가기 시작한데다 다시 한번 술탄이 평화협상을 제안했지만, 마누일 1세는 진군을 강행했다. 더위와 질병, 보급부족, 기갈은 물론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매복공격에 시달려 지치고 신경이 곤두선 원정군은 옛 미리오케팔론 요새의 폐허가 있는 치브리체(Tzivritze) 산 부근에 도달했다.
5. 전투 전개
원정군은 곧 이코니온으로 향하는 계곡 사이로 놓인 관문도로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누가 봐도 매복하기 최적의 장소인 미리오케팔론의 도로는 위험해보였다. 여러 장교들이 도로를 통과하지 말고 북쪽의 필로밀리온으로 우회하여 대군의 우위를 살리자는 의견을 내었다. 그러나 고된 행군으로 군대의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고, 다양한 국가가 참여한 연합군이다 보니 다른 나라 군주의 의견도 신경써야 하는 상태였다. 결국 정치인으로서 빠른 원정 수행을 위해 황제는 강행돌파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일단 매복이 우려되는 위험지대를 강행돌파하기로 한 원정군은 사전에 도로 양측의 산악지대를 정찰하고 룸군의 유격대를 쫓아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기동력이 뛰어난 룸군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려 별다른 피해 없이 물러났고, 원정군은 어쩔수 없이 오후가 지나 진입을 시작하였다. 예상대로 선발대와 동로마군의 주력 중앙군이 통과중에 공격을 받았으나 어렵지 않게 격퇴해내었고, 이는 별다른 문제 없이 협곡을 지날 것이란 생각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동맹군인 좌우익 부대와 근위대, 공성대, 보급부대들이 진입하기 시작하자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좁은 지역에 수레나 우마 등 비전투 물자가 가득 들어찬 상태에서 전투를 강요받은 연합원정군은 주력 부대와 떨어진 상태로 지쳐있던 데다 매복이었던 까닭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사서에 의하면, 최고 지휘관인 마누일 1세는 넋이 나간 것처럼 이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최악의 시공간에 최악의 형태로 기습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고, 친정이 오랜만이었던 늙은 황제가 젊었을 적의 전투력과 판단력을 잃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피해는 점점 커져서 처남인 안티오키아의 보두앵과 동로마군의 주요 지휘관인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등이 전사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주변의 질타로 뒤늦게 정신을 차린 황제는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하였고 곧 반격이 개시되었다. 반격에 적잖은 피해를 입은 룸군은 해가 완전히 지고난 저녁이 되어서야 물러났고, 그제서야 협곡을 통과한 황제는 진지구축 중이던 선도부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가 지휘하던 후위대는 이미 전투가 거의 마무리 되었기에 별다른 피해 없이 본대와 합류했고, 재정비를 마친 이들은 밤중에 이어진 룸군의 공격 또한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그렇게 양측은 대치했다.
6. 결과
원정군은 곧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 것을 알아차렸다. 야전을 위한 주력은 온전했고 전력 또한 여전히 압도적이었으나, 공성전을 위한 장비와 물자를 망실했기 때문이었다. 원정의 목적인 이코니온을 공략하기 위해선 이러한 것들이 필요했는데, 그것들이 없으니 원정을 지속하는 것이 어려웠다.결국 마누일 1세는 안전한 퇴각을 보장받는 대신 국경지대의 로마측 전진 요새인 도릴레온, 수블레온의 두 요새를 철거하는 것으로 평화 협상에 동의했다. 공세 실패와 평화 협상은 곧 룸 술탄국이 획득한 다니슈멘드의 아나톨리아 영토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쟁의 발단중 하나였던 다니슈멘드 왕조는 결국 1178년 말라티야가 함락되고 주변의 세력들이 룸 술탄에게 복속되면서 멸망하였다.
7. 전투의 영향
만지케르트 전투와 종종 비교되고 마누일 1세도 로마노스 4세의 처지에 자신을 비유했지만 큰 피해는 아니었다. 수블레온의 전진요새를 허물고 요새선을 후퇴시켰으나 작은 영토상실이었다. 황제가 포로로 잡힌 것도 아니었다. 동로마군도 건재해서 조약의 쌍방 불이행으로 인해 일어난 1177년의 히엘리온-리모키르 전투에서도 동로마군이 승리하는 등 여전히 동로마 제국의 압도적인 우세였다.그러나 어정쩡한 전투 결과와는 별개로 영향은 엄청났다. 일단 원정에 참여했던 타국의 지원군이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큰 사상자를 내면서 당사자들과의 외교관계가 악화되었다. 또한 황제가 친정하고 사방에 선전했던 '성전'이 실패함에 따라 기독교 국가들 사이에서의 동로마 제국의 권위가 크게 떨어졌다. 큰돈을 펑펑 쓰며 뽐내던 황제가 대군을 소집해 성전이랍시고 큰소리치며 친정하더니 볼품없게 패배하고 오다니, 얼마나 모양새가 없어보였겠는가. 더불어 전투를 주시하고 있던 교황이 프리드리히 1세의 신성 로마 제국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주변의 국가들이 동로마 제국의 실력에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는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과 잠재적 적국에 대한 견제를 통해 외교적인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던 마누일 1세의 대전략을 깨트리는 것이었다.
이후 마누일 1세는 뒷수습을 위해 남은 시간을 분주히 보냈고, 치세 마지막 해에 이르러 주변 정세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은 시간이 더 없었다. 결국 뒤를 이은 알렉시오스 2세 정권이 찬탈자 안드로니코스 1세에 의해 붕괴되고 제국에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면서,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수복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한편 미리오케팔론 전투는 튀르키예 역사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기존에 약탈에만 치중하던 튀르크멘들이 승전을 계기로 하여 자신감을 갖고 아나톨리아에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당시의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1186년 11명의 아들들에게 봉토를 나눠주어 아나톨리아 중부 외의 로마 국경 지역들에도 튀르크화를 유도하였다. 이는 약 반세기 후 동로마 제국의 쇠퇴 및 몽골 제국의 침공을 피해 2차로 유입된 오우즈 튀르크멘들의 정착과 함께 아나톨리아의 튀르크화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더 나아가 오늘날 튀르키예 정체성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1]
영어로 옮기면 myriad heads. 지명만으로 험한 지세를 알 수 있는데, 무수한 머리라는 의미로 여기서 머리는 산봉우리이다. 이 지역은
카파도키아로 유명한 중앙 아나톨리아 고원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서부 해안지대에서 부터 이어지던 완만한 경사가 갑자기(콘야의 해발고도가 1080m이다.)가 상승하기 시작하는 지역이다.
[2]
누가 진짜 로마인가? 라는 로마 적통 논쟁이 아닌, 유럽 세계를 주도하는 패권국으로서 제국이 누구인가? 라는 경쟁이었다. 당대의 유럽인들이 인정하듯 적통은 동로마 제국이었기에 비교적 큰 논쟁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과거에 유럽 대부분을 지배한 단일정치체는 고대의 로마 제국 뿐이었기 때문에 유럽의 패권국은 곧 로마였다.
[3]
술탄이 적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향한 것은 물론이요, 강화조약의 대가로 1. 제국의 요청시 군사지원을 할것, 2. 제3국과의 조약시 제국을 통할 것, 3.제국에 조공할것 등을 강요받았다. 그야말로 봉신국이나 속국 취급이었다.
[4]
현대의 튀르키예 Keçiborlu
[5]
현 튀르키예 부르사 도 Uluab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