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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5:25:41

보두앵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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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왕국 앙주 왕조 제 2대 국왕
보두앵 3세
Baudouin III
파일:보두앵 3세_예루살렘 국왕.jpg
이름 보두앵 당주 (Baudouin d'Anjou)
출생 1130년 / 1131년
예루살렘 왕국 예루살렘
사망 1162년 2월 10일
예루살렘 왕국 베이루트 (향년 30~32세)
매장지 예루살렘 왕국 예루살렘 성묘교회
가문 앙주 가문
배우자 테오도라 콤니니 (1158년 결혼)
부모 아버지 풀크 5세 당주
어머니 멜리장드
친형제 아모리 1세
이복형제 조프루아 5세, 엘리아, 마틸드, 시빌
종교 로마 가톨릭
재위기간 1143년 12월 25일 ~ 1162년 2월 10일 (18년 2개월 16일)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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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루살렘 왕국의 제5대 국왕.

2. 생애

보두앵이 13살 때 아버지 풀크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어머니 멜리장드 공동왕이 되었는데 멜리장드는 귀족 중에서 조언자를 구하여 어린 아들을 권력에서 제외했다. 당시 예루살렘 왕국 보두앵 2세 및 풀크 시절과 달리 강력한 군주가 십자군 국가들을 통솔하지 못하여 북쪽의 십자군 가신국들이 독립할 움직임을 보였고 있었다. 이슬람 측에서는 이마드 앗 딘 장기 모술 알레포를 장악하고 다마스쿠스를 넘보고 있었다. 1144년 이마드 앗 딘 장기 에데사 백국을 점령하여 멸망시키자 유럽에서는 제2차 십자군이 발흥하게 되었다. 1147년 이마드 앗 딘 장기가 죽고 그의 뒤를 이은 아들 누르 앗 딘은 계속 다마스쿠스를 노리고 있었다.

1148년 프랑스 루이 7세 신성 로마 제국 콘라트 3세가 이끄는 제2차 십자군 예루살렘으로 왔는데 어리석게도 이들은 다마스쿠스를 공략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원정이 대실패로 끝나자 십자군은 유럽으로 돌아가 버렸고 누르 앗 딘은 안티오키아 공국을 공격했다. 안티오키아의 레몽[1]은 사로잡혀 참수당했다.

1152년 보두앵 3세는 스스로 통치할 나이가 되자 정치에 관여하려 했지만 어머니 멜리장드를 따르는 귀족들의 반대를 받았다. 보두앵은 어머니에게서 독립하여 단독 대관식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왕국의 귀족회의에 왕국 분할을 요구했다. 보두앵은 갈릴레아 등 북쪽의 빈약한 도시를 받았고 멜리장드는 예루살렘 그 자체를 비롯해 사마리아, 나블루스 등 더 부유한 영지를 분할받았다. 보두앵 3세는 이런 결정에 승복하지 못해 남쪽으로 진격하여 내전을 일으켰다. 나블루스가 보두앵 3세의 손에 떨어지자 예루살렘은 보두앵에게 문을 열었고 왕국의 전권을 주었다. 양측이 합의에 도달해 멜리장드는 나블루스에 은거하고 보두앵은 간섭하지 않기로 했으며 1154년 모자는 화해하여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2]

예루살렘 왕국이 모자 간 내전을 벌이는 동안 누르 앗 딘은 다마스쿠스를 복속하여 시리아는 누르 앗 딘의 깃발 아래 통일되었다. 보두앵 3세는 이집트 파티마 왕조가 약해진 틈을 타 남쪽으로 눈을 돌려 가자를 요새화하고 이집트를 압박했다. 1153년 보두앵 3세는 아스칼론의 요새를 점령했고 1156년 누르 앗 딘과 협정을 맺었다. 보두앵 3세는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추구하여 마누엘 1세 콤니노스의 조카 테오도라 콤니니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아 1158년 결혼했다.

멜리장드 1161년 죽었고 보두앵은 1162년 트리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중병에 걸려 베이루트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에는 독살의 의혹이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보두앵 3세는 안티오키아에서 시리아 정교회 의사가 준 약을 먹고 나자 곧바로 이질에 걸렸다고 한다. 보두앵이 죽었을 때 왕비 테오도라는 아직 16살이었고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동생 아모리가 뒤를 이었다.
[1] 보두앵 3세의 이모이자 멜리장드의 동생 알리스의 딸 콩스탕스와 결혼하여 안티오키아 공작이 되었다. 콩스탕스는 보두앵 3세의 사촌이니 레몽은 보두앵 3세의 사촌 매부인 셈이다. [2] 다만 멜리장드는 여왕이 아닌 섭정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