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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다 | 제인 | 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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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 Geoffroy V, Comte d'Anjou |
||
이름 | 조프루아 5세 당주 (Geoffrey V d'anjou) | |
출생 | 1113년 8월 24일 | |
사망 | 1151년 9월 7일 (향년 38세) | |
배우자 | 잉글랜드의 마틸다 (1128년 결혼) | |
자녀 | 헨리 2세, 조프루아[1], 기욤[2] | |
아버지 | 풀크 5세 | |
어머니 | 아렝뷔르가 드 라 플레슈[3] | |
친형제 | 엘리 2세, 마틸드, 시빌 | |
이복형제 | 아모리 1세, 보두앵 3세 | |
보유 작위 | 노르망디 공작, 앙주 백작, 모르탱 백작, 멘 백작 |
[clearfix]
1. 개요
조프루아 5세는 노르망디 공작이자 앙주, 모르탱, 멘의 백작이며,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의 아버지이자 플랜태저넷 왕조의 시조이다. 1129년에 앙주 백작, 모르탱 백작, 멘 백작 작위를 세습했고, 1144년 노르망디 공국을 정복하여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다.헨리 1세의 딸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의 미망인으로 자신보다 11살 연상이었던 잉글랜드의 마틸다와 결혼하여 헨리 2세, 낭트 백작 조프루아, 푸아투 백작 기욤 10세를 낳았다. 미남 백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당대 최고의 미남으로 유명했다.
2. 생애
1113년 8월 24일, 앙주 백작 풀크 5세와 멘의 아렝뷔르가[4]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엘리 2세[5], 마틸드[6], 시빌[7]이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장을 전전했는데, 전장에 나설 때 금작화 가지를 투구에 꽂는 버릇 때문에 플랜태저넷 (Plantagenet)이라는 별칭을 얻었다.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 헨리 1세는 당초 유일한 적장자 윌리엄 애설링을 후계자로 낙점했지만, 1120년 11월 25일 블랑슈네프호 침몰 사고로 윌리엄 애설링이 사망하자 새 후계자를 정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우선 아들을 낳기 위해 하부 로타링기아 공작이자 루뱅, 브뤼셀, 브라반트 백작 고드프리 1세 드 루뱅의 딸인 루뱅의 아델리자와 재혼했지만, 끝내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 후 프랑스 국왕 루이 6세, 앙주 백작 풀크 5세가 기욤 클리토를 내세우며 노르망디 공국을 공략하려 들고, 노르망디 귀족 상당수도 기욤 클리토를 옹립하고자 봉기를 일으키자, 헨리 1세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1125년 조카인 에티엔 드 블루아와 불로뉴 여백작 마틸드의 결혼을 주선하는 등 에티엔을 후계자로 점찍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그러던 중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헨리 1세는 하인리히 5세의 황후였던 딸 마틸다를 소환한 뒤 마틸다를 잉글랜드 왕국과 노르망디 공국의 차기 군주로 내세우기로 마음먹었다. 1126년 크리스마스, 잉글랜드 귀족들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초대되어 마틸다와 그녀의 미래 후계자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여자가 왕위 계승 후보로 나서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궁정 신하 상당수는 여왕의 등극에 반대했고, 루이 6세는 마틸다의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에 단호히 이의를 제기했다. 여기에 헨리 1세의 끈질긴 적수인 기욤 클리토는 루이 6세의 지원으로 플란데런 백작이 된 뒤 군대를 대폭 증강해 노르망디 공국을 공략하려 들었다. 여기에 앙주 백국도 기욤 클리토를 지지해 헨리 1세를 노르망디에서 축출하려 했다. 헨리 1세는 이런 상황에서 앙주 백작의 아들과 자기 딸을 결혼시키면 앙주 백국이 침략할 생각을 접을 테니 양면전선을 피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으며, 강력한 위세를 떨치는 앙주 백국이 지원해주면 딸이 잉글랜드 여왕으로 군림하는 걸 보장받을 수있으리라 여겼다.
조프루아 5세는 당대 유럽 최고의 미남으로 추앙받았고, 마틸다보다 11살 연하였다. 그러나 마틸다는 조프루아 5세와 결혼하는 것을 껄끄러워 했다. 그녀는 한때 신성 로마 황후였던 자신이 일개 백작의 아내가 되는 걸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투르 대주교 힐데베르트 드 라바르댕이 헨리 1세의 부탁에 따라 마틸다를 설득했고, 결국 그녀는 동의했다. 1127년 5월, 마틸다는 이복 오빠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브라이언 피츠카운트와 함께 루앙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조프루아 5세와 약혼했다.
1128년, 풀크 5세는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이 되기 위해 레반트로 떠나면서, 자신의 영지와 앙주 백작위를 아들 조프루아 5세에게 넘겼다. 헨리 1세는 미래의 사위를 기사로 선임했고, 마틸다와 조프루아는 1128년 6월 17일 르망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마틸다와 조프루아 5세의 결혼은 처음에는 결실을 맺지 못하는 듯했다. 부부는 잘 지내지 못했고, 마틸다는 결혼한 지 얼마 지내지 않아 조프루아 5세를 떠나 노르망디로 돌아갔다. 또한 마틸다가 지참금으로 가져와야 할 노르만 요새들은 좀처럼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틸다와 조프루아 5세는 1131년에 화해했고, 그 해 9월에 열린 국왕 평의회에서 조프루아 5세에게 돌려보내기로 결의했다. 이때 귀족들은 마틸다를 헨리 1세의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기 위한 집단 충성 서약을 했다.
1135년 초, 조프루아 5세와 마틸다 부부는 헨리 1세와 갈등을 벌였다. 마틸다는 아버지에게 노르망디에 있는 왕실 성을 넘겨주고 노르만 귀족들에게 지금 즉시 자신과 조프루아 5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헨리 1세는 이걸 받아들일 경우 조프루아 5세가 노르망디에서 자신의 권위를 영구적으로 확립할 것을 우려해 격렬하게 거부했다. 얼마 후, 노르망디 공국 남부에서 퐁티외 백작 기욤 1세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마틸다와 조프루아 5세 부부가 지원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헨리 1세는 그 해 가을 노르망디에서 자신의 권위를 재확립하기 위해 곧바로 노르망디로 향했다.
그러던 1135년 11월, 헨리 1세는 리용라포레에서 사냥하다가 급병에 걸렸고 11월 1일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조프루아 5세와 마틸다는 앙주에 있었으며, 마틸다는 셋째 아이 기욤을 임신 중이었기에 거동이 불편했다. 또한 두 사람은 노르망디에서 벌어진 반란을 지원했다는 의혹을 받았기에 노르만 귀족들에게 경원시되었다. 더욱이, 헨리 1세의 원정에 동행했던 귀족들은 고인이 된 왕이 매장될 때까지 노르망디에 머물겠다고 맹세했고, 이 때문에 즉시 잉글랜드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일부 노르만 귀족은 블루아 백작 티보 4세를 왕으로 옹립할 지를 논의했다. 이때 헨리 1세의 외조카이자 티보 4세의 동생인 에티엔 드 블루아가 불로뉴에 있다가 헨리 1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군대를 이끌고 영국해협을 항해해 런던에 도착한 뒤 1135년 12월 22일 잉글랜드의 스티븐 왕으로 등극했다.
1136년 초, 조프루아 5세는 아내 마틸다가 잉글랜드 왕위를 되찾도록 돕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노르망디 공국을 침공해 아르장탕 주변의 여러 성을 공략했다. 그러나 앙주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노르만 귀족들의 저항이 심화되자, 그는 더 이상의 공세를 그만두고 앙주로 철수했다. 스티븐 왕은 내란과 스코틀랜드의 침공, 웨일스인들의 봉기에 대처하느라 노르망디로 갈 여유가 없었기에, 심복인 갈레랑 4세 드 묄룬을 노르망디 왕실 보안관으로 선임했다. 갈레랑 4세는 노르망디 공국 방어 조직을 맡았고, 1136년 9월 조프루아 5세의 침공을 격퇴했으며, 마틸다 지지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로저 드 토스니를 체포했다.
1137년, 노르망디로 이동한 스티븐 왕은 프랑스 국왕 루이 6세, 블루아 백작 티보 4세와 만났다. 루이 6세는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가로 스티븐 왕의 아들 외스타슈 4세가 차기 노르망디 공작이 되는 걸 인정했고, 위세를 떨치는 앙주 백국을 견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스티븐은 1135년 말부터 조프루아 5세가 지배하는 노르망디와 앙주 국경 요충지인 아르장탕을 공략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그가 최근에 고용한 플란데런 용병대장인 기욤 디프르와 현지 노르만 남작들이 지휘하는 플란데런 용병들 사이에 마찰이 벌어졌고, 급기야 자기들끼리 전투가 벌어지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이대로는 원정을 벌여봐야 소용이 없다고 판단한 스티븐 왕은 조프루아 5세와 협의한 끝에 평화를 유지하는 대가로 연간 2,000 마르크를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1139년, 마틸다는 남편이 지원한 약간의 병력에 추종자들의 후원을 받고 잉글랜드에 상륙해 스티븐 왕과 본격적으로 내전을 벌였다. 그 사이 노르망디를 향한 공세를 이어간 조프루아 5세는 1141년 캉, 바이외, 리지외, 팔레즈 등 여러 도시를 공략하고 센 간 남쪽과 리슬강 동쪽의 하부 노르망디 일대를 석권했다. 이에 노르망디에 영지가 있는 귀족들은 조프루아 5세에게 모든 걸 잃을 것을 우려해 스티븐 세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스티븐 왕의 친구이자 고문이며, 노르망디 보안관이었던 갈레랑 4세 드 묄룬은 1141년 중반에 마틸다에게 귀순한 뒤 노르망디로 넘어가서 조프루아 5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가로 자기 영지의 주권을 확인받았다. 갈레랑 4세 드 묄룬의 쌍둥이 형제인 로베르 드 보몽도 비슷한 시기에 전장에서 물러났다.
1142년 6월 24일, 마틸다는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좀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글로스터의 로버트를 남편에게 보내 대규모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게 했다. 그러나 조프루아 5세는 노르망디 공국 정복에 열을 올렸을 뿐, 아내를 돕는 데엔 큰 괌심이 없었다. 결국 로버트는 300~400명의 기병만 확보할 수 있었고, 조프루아 5세와 마틸다의 장남인 헨리 플랜태저넷과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143년, 노르망디 공국의 주요 항구도시인 아브랑슈가 조프루아 5세의 손에 넘어갔다. 1144년 1월 14일, 조프루아 5세는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인 루앙에 입성했다. 그 해 여름, 그는 프랑스 국왕 루이 6세로부터 노르망디 공작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하지만 상부 노르망디의 여러 도시들, 특히 영국해협과 인접한 항구도시들은 여전히 그에게 굴복하기를 거부했다.
조프루아가 아버지로부터 작위를 물려받은 이후 1129년, 1135년, 1145년 ~ 1151년에 총 3번의 반란이 영지 내 남작들에 의해 발생했으나 모두 진압하였다. 1145년, 멘 백작이자 그의 친동생인 엘리 2세가 자기 영지에 간섭하는 형에게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조프루아 5세는 이를 물리치고 엘리 2세를 생포한 뒤 1151년 1월 15일까지 사망할 때까지 투르 요새에 감금했다. 1146년 노르망디 공국의 아르케라바타이유를 공략했지만, 몽트뢰유벨레이 공략은 1148년부터 1151년까지 3년이나 지체되었다. 이렇듯 앙주에서의 반란이 종종 벌어지고 노르망디 완전 제패도 지체되면서, 마틸다에 대한 지원이 미비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마틸다는 1148년 노르망디로 돌아와야 했다. 한편, 그는 바이외와 루앙의 주조장을 폐쇄하고, 앙주 데나르가 노르망디 공국 전역에 유통되도록 했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그가 노르망디를 앙주의 속국으로 간주했다고 추정한다.
1150년 장남 헨리를 노르망디 공작으로 내세우면서, 주권자인 프랑스 국왕과의 협의를 생략했다. 이에 분개한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1151년 스티븐 왕의 장남인 외스타슈 4세가 노르망디 공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전쟁을 개시하자, 조프루아 5세는 앙주와 노르망디에서 자기에 대항하는 반란이 종종 터지는 와중에 프랑스 왕국과 대적하는 건 곤란하다고 여기고 루이 7세와 화해하기로 했다. 1151년 9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의 중재 아래 조프루아 5세와 루이 7세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조프루아 5세는 벡생을 루이 7세에게 양도하기로 했고, 루이 7세는 조프루아 5세와 헨리 부자가 파리로 와서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가로 헨리가 노르망디 공작에 선임되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1151년 9월 7일, 조프루아 5세가 프랑스 궁정에서 귀환하던 중 루아르 강에서 수영한 후 감기에 걸려 골골하다가 멘 백국의 샤토뒤루아르에서 급사했다. 투르의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조프루아 5세는 장남 헨리가 잉글랜드 왕이 되면 둘째 아들 조프루아가 앙주와 멘의 백작이 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측근들에게 헨리가 이에 동의할 때까지 자신을 매장하지 말라고 못박았다. 헨리는 동생에게 앙주와 멘을 넘기길 거부했고, 조프루아 5세의 시신을 한동안 방치했다. 그러다가 측근들이 설득해 앙주에서 아버지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지만, 동생 조프루아에게 끝내 앙주와 멘을 넘기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 이야기가 투르의 일부 연대기 외에는 교차검증할 만한 사료가 없다며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본다.
조프루아 5세의 시신은 르망 대성당 내에 지어진 영묘에 안장되었다. 르망 주교 기욤 드 파시방의 의뢰로 1160년 이전에 조각된, 현재 르망의 멘 고고학 및 역사 박물관에 보관된 구리 및 샹르베 에나벨 무덤 명판에는 아래의 문구가 기재되었다.
"왕이시여, 당신의 칼로 약탈자들의 무리를 물리치시고, 지배하는 평화 덕분에 교회에 평온이 보장됩니다."
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헨리 2세 (Henry II, King of England) |
1133년 3월 5일 | 1189년 7월 6일 |
엘레오노르 다키텐 슬하 4남 3녀[8] |
2남 |
낭트 백작 조프루아 (Geoffrey, Count of Nantes) |
1134년 6월 1일 | 1158년 7월 27일 | |
3남 |
디에프 자작 기욤 (William, Viscount of Dieppe) |
1136년 7월 22일 | 1164년 1월 30일 |
4. 당대의 평가
마르무티에의 존이 서술한 기록에 따르면, 조프루아는 아름다운 외모에 붉은 머리카락을 가졌으며 쾌활하고 위대한 전사였다고 묘사한다. 그러면서도 그의 매력들이 차갑고 천박하며 이기적인 본성을 숨기려 했다는 평[9]도 남아있다.
[1]
낭트 백작이다.
[2]
디에프 자작이자 푸아투 백작으로 기욤 10세라고도 한다.
[3]
멘의 아렝뷔르가(Eremburga del Maine)라고도 한다. 멘 백작령의 상속녀였다.
[4]
멘 백작 엘리 1세 드 라 플레슈와 샤토뒤루아르의 여성 영주인 마틸드의 딸.
[5]
1115 ~ 1151, 멘 백작
[6]
1110 ~ 1155,
헨리 1세의 유일한 적장자
윌리엄 애설링의 아내. 윌리엄 애설링이 1120년 11월 25일
블랑슈네프호 침몰 사고로 사망한 뒤
수녀가 되었고, 1149년부터 1154년까지 노르트람 드 퐁트브로 수도원의 수녀원장을 역임했다.
[7]
? ~ 1165,
기욤 클리토와 초혼, 1124년 결혼이 취소된 뒤 1134년 플란데런 백작 티에리 드 알자스와 재혼.
[8]
청년왕 헨리,
리처드 1세,
조프루아 2세,
존 왕 등
[9]
디케토의 랄프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