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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23:37:20

샤를 드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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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de France
파일:샤를 드 프랑스.jpg
이름 샤를 드 프랑스(Charles de France)
출생 1446년 12월 26일
프랑스 왕국 투르
사망 1472년 5월 24일 (향년 25세)
기옌 공국 보르도
지위 베리 공작
1461년 7월 22일 ~ 1465년 10월 5일
노르망디 공작
1465년 10월 5일 ~ 1469년 9월 18일
기옌 공작
1469년 9월 18일 ~ 1472년 5월 24일
아버지 샤를 7세
어머니 앙주의 마리
형제 루이 11세, 라드공드, 카트린, 욜랑드, 잔, 마들렌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왕자, 베리 공작, 노르망디 공작, 기옌 공작.

2. 생애

1446년 12월 26일 프랑스 왕국 투렌 주의 주도인 투르에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와 앙주의 마리[1]의 네번째 아들이자 막내로 출생했다. 형제로 루이 11세, 라드공드[2], 카트린[3], 욜랑드[4], 잔[5], 마들렌[6]이 있었다.

형 루이 11세는 아버지 샤를 7세와 첨예하게 대립했고 막판엔 부르고뉴 공국으로 망명하기도 했기에, 여러 귀족은 샤를이 왕위 후계자가 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1461년 아버지 샤를 7세가 사망한 뒤 루이 11세가 프랑스 왕위에 올랐으며, 샤를은 14세의 나이에 베리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 후 루이 11세가 중앙집권제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자치권이 제약당하고 막대한 돈을 바쳐야 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대귀족들은 루이 11세를 폐위하고 샤를을 새 국왕으로 옹립하기로 마음먹었다.

1465년 3월 4일, 샤를은 음모에 가담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루이 11세의 체포령을 피해 브르타뉴로 피신한 후 3월 10일 "무질서하고 불행한 정부"를 바로잡기를 원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반포했다. 이에 샤롤레 백작 용담공 샤를,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 로렌 공작 장 2세, 느무르 공작 및 라 마르쉐 백작 자크 다르마냐크느무르, 아르마냐크 백작 장 5세 다르마냐크, 생폴 백작 루이 드 뤽상부르생폴, 뒤누아 백작 장 드 뒤누아, 도매르탱 백작 앙투안 드 샤반, 알브레 백작 샤를 2세 달브레, 피에르 당부아즈, 앙드레 드 라발몽모랑시 등 프랑스 대귀족들이 대거 가담했으며, 클레베 공작 요한 1세와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 등 외부 세력도 가담했다. 루이 11세는 이에 대응해 푸아 백작 가스통 4세 드 푸아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냈고, 밀라노 공국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게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벌어진 내전에서, 용담공 샤를은 브르타뉴군과 함께 몽레리에서 프랑스군과 악전고투를 벌인 끝에 가까스로 승리한 뒤 로렌군과 합세한 후 파리를 포위했다. 그러나 몇 주 후 공익 연맹 측이 식량 부족에 시달린 데다 타 지역의 왕실군이 접근해오는 것에 압박감을 느낀 끝에, 그들은 루이 11세에게 평화 협상을 맺자고 요청했다. 루이 11세 역시 협상을 받아들였고, 양자는 1465년 10월 5일 콩플랑 협약을 체결했다. 공익 연맹 참가자들은 루이 11세를 국왕으로 계속 받들기로 했고, 루이 11세는 그들을 사면하고 여러 영지를 내주기로 했다. 이때 샤를은 노르망디 공작에 선임되었다.

1466년, 샤를은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불화를 빚는 데다 노르망디 귀족들을 복종시키는 데 실패해 통치에 애를 먹었다. 이 상황을 본 루이 11세는 왕실군을 파견해 노르망디를 순식간에 석권했다. 샤를은 브르타뉴 공국으로 도망친 뒤 프랑수아 2세와 화해했다. 1468년 여름, 루이 11세는 투르에서 삼부회를 소집한 뒤 노르망디를 왕실 직할지로 반환하기로 결정했다. 1468년 9월 2일, 루이 11세는 군대를 일으켜 브르타뉴 공국을 침공해 앙센을 포위해 5일간의 공방전 끝에 9월 7일에 함락했다. 그 후 9월 10일에 교황청의 중제하에 프랑수아 2세와 동생 샤를로부터 "왕의 훌륭한 종이 되겠다"는 서명을 받아낸 뒤 두 사람을 사면하기로 한 앙센 협약을 체결했다. 그 후 샤를은 연간 연금 12,000 리브르를 받는 대가로 노르망디의 주권을 정식으로 포기했다.

1468년 10월, 페롱에서 루이 11세와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간의 회담이 열리던 도중, 용담공 샤를이 루이 11세를 억류한 뒤 샤를을 인질로 삼기로 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루이 11세는 동생의 석방을 위해 용담공 샤를이 원하는 대로 조약을 맺기로 하면서, 노르망디에 대한 보상으로 샹파뉴 백국을 동생에게 주기로 했다. 하지만 협상이 마무리된 뒤 루이 11세는 샤를에게 샹파뉴를 주기를 거부했다. 그러다가 1469년 9월 18일에 동생을 기옌 공작으로 선임했다.

1469년,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엔리케 4세는 루이 11세에게 자기 딸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를 샤를과 결혼시킬 것을 제안햇다. 하지만 루이 11세는 후아나가 카스티야 귀족들로부터 엔리 4세의 딸이 아니라 엔리케 4세의 총신인 벨트란 데 라 쿠에바의 딸이라는 비방을 받는 걸 보고 결혼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1471년,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은 프랑스의 샤를이 자기 딸 마리 드 부르고뉴와 결혼하기를 원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루이 11세는 이 결혼이 성사되면 자기 정적인 용담공 샤를의 위세가 너무 강해지고 샤를 역시 위협적인 왕위 경쟁자가 된다고 여겨 반대했고, 교황 바오로 2세 또한 프랑스의 샤를과 마리 드 부르고뉴는 가까운 친족이므로 결혼할 수 없다고 밝혔다.

1472년 5월 24일, 샤를은 보르도에서 결핵 또는 성병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결혼하지 않았고, 적법한 자녀를 남기지 못했다. 다만 정부 콜레트 드 샹브[7]와의 사이에서 잔 드 기옌[8], 안 드 기옌[9]을 낳았다. 샤를의 영지와 작위는 프랑스 왕실에 돌아갔다.


[1] 앙주 공작이자 나폴리 왕국의 명목상 국왕인 루이지 2세 아라곤의 욜란다의 딸.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의 아내 앙주의 마르그리트(남동생 앙주의 르네의 딸)의 고모 [2] 1425/1428 ~ 1445, 오스트리아 대공 지기스문트의 부인 [3] 1428 ~ 1446,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의 부인 [4] 1434 ~ 1478,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9세의 부인 [5] 1435 ~ 1482, 부르봉 공작 장 2세 드 부르봉의 부인 [6] 1443 ~ 1495, 비아나 공 가스통 드 푸아의 부인. 푸아 백작이자 나바라 왕국의 국왕 프란치스코 1세 페부스와 푸아 여백작이자 나바라 여왕 카탈리나 1세의 어머니. [7] 투아르 자작 루이 당부아즈의 아내 [8] 1470 ~ ?, 도미니코회 수녀 [9] 1471 ~ ?, 루페크 남작 프랑수아 드 볼비르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