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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3 11:09:11

헨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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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1세
Henry 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enry1.jpg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헨리 1세
(Henry I)
출생 1068년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셸비
사망 1135년 12월 1일 (향년 67세)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생드니앵리옹
재위기간 잉글랜드의 왕
1100년 8월 2일 ~ 1135년 12월 1일
노르망디 공작
1106년 ~ 1135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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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이름 고대 노르만어 Henri I (엔리 1세)
영어 Henry I (헨리 1세)
프랑스어 Henry I (앙리 1세)
라틴어 Henricus I (헨리쿠스 1세)
별칭 뛰어난 학자
(The Beauclerc/Le Beauclerc)
배우자 스코틀랜드의 마틸다[1]
(1110년 결혼/1118년 사망)
루뱅의 아델리자
(1121년 결혼)
자녀 마틸다 황후, 윌리엄 외 서자 8명, 서녀 15명
아버지 윌리엄 1세
어머니 파일:800px-Blason_Comte-de-Flandre.svg.png 플랑드르의 마틸다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4. 대중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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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군주. 이름인 헨리는 윌리엄 1세의 은인이었던 프랑스 왕국의 왕 앙리 1세에게서 따온 이름이다. 헨리 1세는 잉글랜드의 행정, 관료체계를 제대로 돌아가게끔 조직한 능력있는 군주였으며 순회법정 제도를 시행하여 국가사회의 틀을 잡아나가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동시에 영국이 관료 국가로 나아가는 데 초석을 다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2. 생애

형 윌리엄 2세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하자 그는 곧바로 윈체스터로 달려갔고 3일 뒤인 8월 5일 급하게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즉위했다. 원래 윌리엄 1세의 사남이었으므로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는 그의 큰형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에게 돌아가야 했으나, 그는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 막 돌아오고 있었으므로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상당수의 귀족이나 군인들은 로베르 2세를 정당한 계승자로 생각했으므로 헨리 1세는 로베르가 돌아오기 이전까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곧 자유 헌장을 선포하였는데 과세를 공평하게 메기고 면세대상이었던 교회의 수입을 금하며 왕실의 권력남용을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였다. 또 애닉 전투 이후 소원해져있던 스코틀랜드와의 관계를 완화시키기 위하여 스코틀랜드 왕 말 콜룸 3세의 딸 마틸다와 결혼함으로써 외교적 안정을 꾀하였다. 그는 또한 형과의 불화로 스스로 캔터베리를 떠난 안셀무스 대주교를 다시 불러들이기도 하였다.

얼마 후 로베르 2세는 예상대로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로 침입하여 자신이야말로 정당한 왕위계승자라고 주장하였는데 헨리의 그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귀족들은 대부분 로베르 2세의 편에 섰다. 하지만 헨리는 수많은 봉건 귀족들과 특히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대주교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확보해 로베르와 대등한 싸움을 벌였으며 결국에는 타협안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이 타협안으로 로베르 2세는 잉글랜드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모두 포기하는 대신 노르망디 지방의 영토와 막대한 연금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로베르 2세의 통치는 노르망디 사람들의 불만을 가져왔고 노르망디 귀족들의 부탁을 받은 헨리 1세는 프랑스의 묵인 아래 1106년 노르망디를 정벌하여 탱슈브레 전투에서 로베르의 군대를 격멸하고 노르망디를 수중에 넣는다. 이후 패배한 로베르는 포로가 되어 잉글랜드로 압송되었고 엄중한 감시 속에 여생을 보내게 된다.

헨리 1세는 안셀무스와 초기에는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얼마 후부터는 불편한 관계를 이어가는데 이유는 역시 성직 임명권 때문이었다. 주교직과 수도원장직이 막대한 부를 가져올 수 있음을 알고 있던 헨리 1세는 수차례에 걸쳐 자신에게 임명권을 부여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당시 교황 파스칼 2세는 그의 요청을 매번 거절하였으며 이후에는 아예 세속 군주가 성직자들에게 봉토를 하사하는 것과 성직자들이 군주들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것을 금지해버렸던 것이다. 안셀무스는 이에 따라 헨리 1세로부터 임명받은 성직자들에 대한 축성을 거부하였으며, 왕에 대한 충성서약 역시 거부하였다. 결국 안셀무스는 2번째로 캔터베리를 떠나 로마로 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마찰은 왕과 교황 그리고 대주교들 사이에 수많은 편지와 회유, 협박이 오간 이후 1107년 탱슈브레 전투 직전에 웨스트민스터 협약으로 타결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왕은 성직 임명권을 포기하였으나 주교와 수도원장들은 축성 전에 왕에 대하여 경의를 표시해야 했다. 이는 후에 있을 보름스 협약에 본보기가 되었다.

여담으로 그의 죽음은 어이없게도 칠성장어 과식으로 인한 소화불량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3. 가족 관계

그의 외아들 윌리엄은 1120년 11월 타고 있던 배가 암초에 부딪혀 침몰한 사고로 익사했다.[2] 사생아 헨리 피츠로이는 있었으나, 적자는 없어서 상속자는 딸 마틸다가 되었다.[3] 112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가 죽자 그의 황후였던 마틸다를 잉글랜드로 불렀고 주요 귀족들 앞에서 그녀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할 것을 서약하게 하였다. 이후 딸의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앙주 백작 풀크 5세의 아들 조프루아와 결혼시키고 마틸다는 헨리 2세를 낳게 된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하여도 여왕의 전례가 없었고 앙주 백작 가문에 대한 귀족들의 반감이 강한 상태에서 그녀에 대한 귀족들의 지지는 형편없었다. 결국 헨리 1세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갈등이 본격화되어 무정부시대라는 내전이 벌어지고 헨리 1세의 조카였던 블루아의 스티븐이 왕위를 찬탈하게 된다.

여색을 밝혔는지 최소 20명이 넘는 사생아들을 남겼다.

4. 대중 매체

HBO의 8부작 드라마 대지의 기둥에서는 원작이나 실제역사와는 달리 교회와 스티븐 왕의 공모하에 독살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1] 알프레드 대왕의 후손이다. [2] 이른바 화이트쉽 사건이라고 한다. 이 배에는 적자 윌리엄만이 아니라 서녀인 마틸다 피츠로이, 서자 링컨의 리처드 등도 타고 있었다. 헨리 1세는 이 사고로 자신의 왕위 계승자를 포함한 자식들을 무더기로 잃은 셈이다. 더욱이 헨리 1세는 자기 서자들을 모두 자기 자식들로 인정하고, 많이 챙겨주었을 정도로 이들을 사랑했다. [3] 사생아는 상당히 많아서 알려진 자식만 스물은 가볍게 넘는다. 워낙 많은 데다 사생아라 이름 관리가 안 되다보니 마틸다라는 이름의 딸만 4명일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