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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6:29:31

리처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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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1세
Richard I
파일:Richard_Leon.jpg
1255년의 상상화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리처드 1세
(Richard I)
출생 1157년 9월 8일
잉글랜드 왕국 옥스퍼드 보몬트 궁
사망 1199년 4월 6일 (향년 41세)
프랑스 왕국 아키텐 리무쟁 샬뤼
재위기간 아키텐·가스코뉴 공작, 푸아티에 백작
1172년 6월 ~ 1199년 4월 6일
노르망디 공작, 앙주·멘 백작
1189년 7월 ~ 1199년 4월 6일
잉글랜드의 왕
1189년 7월 6일 ~ 1199년 4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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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이름 리처드 1세
(Richard I of England)
별칭 사자심왕
(The Lionheart/Le Cœur de Lion)
신장 196cm[1], O형( Rh-)
배우자 파일:512px-Armoiries_Bérangère_Navarre.svg.png 나바라의 베렝겔라 (1191년 5월 결혼)
자녀 코냑의 필리프 ( 사생아)
아버지 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154-1189).svg.png 헨리 2세
어머니 파일:아키텐 공국 국장.svg 엘레오노르 다키텐
종교 가톨릭 }}}}}}}}}

1. 개요2. 남프랑스인에 가까웠던 정체성3. 생애
3.1. 유년기3.2. 대반란, 1173 ~ 74년3.3. 아키텐 반란 진압3.4. 골육상쟁3.5. 즉위, 숙청3.6. 제3차 십자군 원정: 전천후 군사 천재
3.6.1. 아크레 정복, 1191년
3.6.1.1. 포로 학살, 1191년
3.6.2. 카이사레아 전투3.6.3. 아르수프 전투3.6.4. 팔락 알딘의 대상단 약탈3.6.5. 교착상태3.6.6. 예루살렘? 이집트?3.6.7. 야파 전투
3.6.7.1. 주의점
3.6.8. 평화 협정
3.7. 포로 생활, 의 반란3.8. 필리프 2세와 전쟁3.9. 사망
4. 정치5. 이교도와 외국인에 대한 태도6. 평가7. 사적인 면
7.1. 외모 · 육체적 능력7.2. 성품7.3. 섹슈얼리티7.4. 결혼 생활
8. 이야깃거리9. 대중문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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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Richard I the Lionheart.jpg
19세기 상상화.[2][3]
<colbgcolor=#810000><colcolor=#fadb43> 영어 Richard I (리처드 1세)
Richard Lionheart (리처드 라이언하트)
중세 프랑스어 Richard I (리차르트 1세)
프랑스어 Richard I (리샤르 1세)
라틴어 Ricardus I (리카르두스 1세)
독일어 Richart I (리하르트 1세)
Richard Löwenherz (리하르트 뢰벤헤르츠)
무슬림에 대한 전대미문의 재앙.
아리비아의 역사가 이븐 알아티르(Ibn al-Athir)

앙주 제국(Angevin Empire)의 군주. 생전 그가 가졌던 칭호로는 잉글랜드 국왕, 노르망디 공작, 아키텐 공작, 가스코뉴 공작, 푸아티에 백작, 앙주 백작, 멘 백작, 낭트 백작, 브르타뉴 공국 상위 주군[4], 아일랜드 영주, 키프로스 영주 등이 있다. 대표작위인 잉글랜드 국왕으로 기억되지만 실제로 그는 유아기를 제외하면 생애 대부분을 남프랑스 아키텐에서 살았으며, 성인이 된 후 잉글랜드에서 머물렀던 시간은 모두 합쳐도 6개월 정도에 불과했다.

학살을 포함한 무자비한 잔혹 행위들을 전혀 서슴지 않았으며 병적일 정도로 도덕적으로 무감각했기에 악마의 후손으로 악명을 널리 떨쳤다. 제3차 십자군 원정 당시 다국적 십자군 부대를 통솔하여 살라흐 앗 딘 유수프를 상대로 전승 무패라는 전설적인 전과를 거두고, 이슬람인들에게 공포의 존재로 군림하였다. 카페 왕조의 그 필리프 오귀스트를 수차례 패배시키며 역사상 최초로 신과 나의 권리(Dieu et mon droit)를 선언하였다. 이러한 잔혹함은 10대 시절 아키텐의 군주로서 지역민들이 그의 가혹한 통치를 견디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시작되었다.

십자군 전쟁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토머스 F. 매든 세인트루이스 대학교 중세학 교수는 그를 중세 유럽 최고의 전략가로 평가했다. 제3차 십자군 전쟁 연대기로 유명한 작가이자 수도사 코게스홀의 랄프는 그를 엄청난 범죄 집단의 지도자로 평가했다.

2. 남프랑스인에 가까웠던 정체성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후 8살까지 그곳에서 살긴 했으나, 왕으로 즉위한 후 10년의 재위 동안 실제 잉글랜드에 있었던 건 6개월 정도라고 하며, 아내인 나바라 공주 베렝겔라는 재위 동안 잉글랜드를 방문한 적이 없다. 그는 대부분의 일생을 오늘날의 프랑스 지역에서 보냈으며, 그 가운데 몇 년간은 제3차 십자군 원정 당시에 종군했던 중동 지역에 머물렀다. 그 때문에 당시 잉글랜드의 지배 계층인 앵글로-노르만 귀족들이 그랬듯이 영어[5]가 아닌 프랑스어를 모어로 구사했다.[6][7]

현재 가장 권위 있는 《리처드 평전》을 펴낸 존 길링엄이나 권위 있는 십자군사가인 토마스 오스브릿지, 중세 영문학을 전공하고 몬티 파이튼의 성배를 감독한 테리 존스[8], 영국 왕실 전문 대중 역사가 앨리슨 위어에 이르기까지 현대 영국 역사가들은 리처드를 "본질적으로 남프랑스인", "태생에서나 자란 환경에서나 확실히 잉글랜드인은 아니다."라고 하며, 리처드의 정체성 형성은 서남부 프랑스에서 이루어졌다는 데 동의하는 편이다.[9] 리처드는 자신을 부계인 앙주 가문의 사람으로 여겼으며 원한을 절대 잊지 않고 복수하는 본인의 성격을 검은 공작 풀크와 같은 앙주 가문의 조상들에게서 온 것이라고 자주 말했고 동시대인들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문화적으로 리처드는 아키텐 공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유년기의 대부분을 아키텐에서 보냈고 북부 프랑스어도 썼지만 아키텐 공국에서 쓰이는 남부 프랑스어가 리처드의 모어였으며 잉글랜드의 왕자이기 이전에 일찍이 아키텐의 공작으로도 내정되어 있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아버지에 대한 반란도 헨리가 리처드의 삶과 정치적 기반이었던 아키텐을 리처드에게 분리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리처드의 어머니 엘레오노르 다키텐이 후원하며 형성된 음유시인과 궁정식 연애 문화는 나중에 프랑스에서 아서 왕 전설이 기사도적인 연애 낭만담으로 재창조되는 배경이 되었는데, 리처드 역시 봉신의 아내와 궁정식 사랑의 모범을 따른 연애를 했고 베르트랑 드 보른 등 남프랑스의 음유시인들을 후원했으며 자신도 남부 프랑스어로 시를 쓰고 노래를 지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리처드가 영어를 알았다거나 사용했을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에, 리처드가 등장하는 영미권 사극에서는 그가 강한 프랑스식 억양을 쓰는 연출로 타협하는 추세이다. 동시대인인 뉴버그의 윌리엄은 리처드가 "적당한 값만 지불한다면 런던도 팔 수 있다."라는 말을 농담 삼아 얘기하곤 했다고 기록했는데 잉글랜드에 대한 리처드의 다소 냉담한 태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그가 유일하게 즐겼던 전설은 당시 앙주 가문의 조상으로 유명했던 악마 멜뤼진의 전설이었으며 말년에는 "악마에게서 태어났으니 악마에게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자주 말했다. 다른 조상이었던 바이킹의 신화에는 무관심했으며 아서 왕 전설에도 전혀 흥미가 없었다. 부왕 헨리 2세의 통치 기간 아서 왕 엑스칼리버라고 알려진 검이 글래스톤베리에서 발굴되었는데, 리처드는 시칠리아 탕크레드와 협상할 때, 그 엑스칼리버를 시칠리아의 배 19척에 팔아넘기기도 했다.[10] 리처드의 추종자들 역시 그를 헥토르, 롤랑, 티투스 등에 견주었지만 아서 왕은 논외였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또한 유언으로 머리는 샤루 수도원, 심장은 노르망디의 루앙, 유해는 퐁트브로 수도원으로 분할하여 매장하라고 명했으나 잉글랜드는 포함되지 않았다.

물론 명목상으로 앙주와 아키텐은 프랑스 왕의 봉토인 것에 비해 잉글랜드는 리처드를 프랑스 왕과 대등한 국왕으로 만들어주는 땅이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과는 별개로 의전에서는 잉글랜드에 상당히 신경썼다. 먼 방계 후손[11] 조지 1세가 단순히 잉글랜드에 대해 심리적 거리감이 있는 걸 넘어 신경쓰는 것 자체를 사실상 포기한 것과는 대조적이다.[12]

다만 리처드 1세가 스스로를 프랑스인으로 여겼던 것은 그가 유독 괴짜라서가 아니라 당시 잉글랜드를 지배하던 노르만인, 즉 바이킹계 프랑스인들 대부분이 그랬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는 노르만족 자체가 잉글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 동화가 일어나기 전이었고 피지배 계급인 앵글로색슨인들도 노르만계 왕족, 귀족들을 외부에서 온 지배자로만 보는 시선이 강했다. 인터넷에선 중세 유럽에서 민족적-국가적 정체성이 일절 없었으며 근대에 완전히 창작된 개념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12세기 잉글랜드 역사학자인 맘스베리 윌리엄은 노르만 정복을 가리켜 "잉글랜드는 이방인들의 재산으로 전락했다."라고 서술했으며 수도사들은 노르만 정복을 잉글랜드인의 죄악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 표현했다. 또한 12세기 《국고에 대한 대화》라는 서적에는 "잉글랜드인과 노르만인들이 혼인을 거듭하여 오늘날에는 혈통을 구분할 수 없게 되어있다."라고 씌인 대목이 있는데, 이를 통해 노르만족 앵글로색슨 사이에는 명백히 혈통에 의한 구분이 존재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동화가 진행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웨일즈인들은 잉글랜드인들을 "노르만족에게 정복당해 노예로 전락한 하늘 아래 가장 무가치한 종족"이라 부르면서 통쾌해했는데, 이를 통해 제 3자 역시 당시의 잉글랜드를 이민족에게 지배당한 시기로 봤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무튼 노르만족이 노르망디-프랑스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잉글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재수립하는 건 존 왕 때 대륙영토를 대거 잃은 후의 13세기 초중반부터 본격화된 일이고,[13] 리처드 1세의 시대에는 아직 외부에서 온 정복자라는 포지션에서 벗어나지 못한, 잉글랜드인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기 이전의 시대인지라 리처드 1세가 스스로를 잉글랜드인이 아니라 노르만-프랑스인으로 여긴 건 그가 이상한 성격인 게 아니라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즉,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인보다는 잉글랜드에서 태어났고 잉글랜드 왕위를 가진 프랑스인에 더 가까운 정체성을 가졌다. 잉글랜드에서 태어났고 잉글랜드의 왕위를 가졌으며 아버지 헨리 2세부터 알프레드 대왕의 혈통이 흐르기 시작했으니 잉글랜드인이 아예 아니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국적과는 별개로 그의 민족 정체성은 확고한 프랑스인이라는 것이다.

3. 생애

3.1. 유년기

1157년 9월 8일, 헨리 2세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삼남으로 영국의 옥스퍼드에서 출생했다.

리처드는 8세에 모친과 노르망디를 여행하고 아키텐으로 이주한 뒤에 다양한 학문을 두루 섭렵하기 위해 힘쓰고 라틴어를 읽고 쓰는 법을 배웠으며, 기사 작위를 위한 군사 훈련을 시작했다. 13세에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카스티야 공주인 콩스탕스 왕비의 차녀 아델과 약혼한다. 부왕 헨리 2세가 여전히 아키텐에 권력을 행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172년 6월에 16세의 나이로 보르도 대주교에 의해 푸아티에에서 아키텐 공작으로 정식 서임을 받았다.

3.2. 대반란, 1173 ~ 74년

헨리 2세는 일찍이 차남 청년왕 헨리를 잉글랜드 왕, 노르망디 공작 및 앙주 백작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리처드에게는 아키텐을 상속하며, 사남 제프리에게는 브르타뉴를, 막내 에게는 성직자의 길을 걷게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들들에게 통치권을 양도하는 것을 미루었고 청년왕 헨리의 상속지에 속했던 성 3개를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막내 아들인 존에게 물려주기로 한 결정 또한 청년왕 헨리의 불만을 키웠다. 게다가 정무로 바빴던 헨리 2세는 아들들에게 소홀했기에, 리처드와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애정이 깊지 않았고 점점 업신여기는 태도를 드러냈다.

1173년, 부왕으로부터 하루빨리 독립적인 권한을 얻어내고 싶었던 17세의 리처드와 그의 형 헨리, 동생 제프리는 남편과 깊은 불화를 겪고 있던 모후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주도로 그녀의 전남편인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원조를 받기로 하여 파리에 집결하고 대반란을 모의했다. 이때 리처드는 프랑스 궁정에서 자연스레 형제들과 함께 9살이 된 프랑스의 왕세자 필리프를 만나게 되었고, 눈여겨볼 만한 점은 리처드가 루이 7세로부터 기사 서임을 받았다는 것이다.

리처드와 형제들은 루이 7세의 동의 없이는 부왕 헨리 2세와 평화를 이루지 않겠다 맹세하고, 헨리 2세는 우선 아들들과 협상을 벌여 두둑한 보상으로 달래보려 했으나 루이 7세는 그들이 거절하도록 부추겼다. 이러한 행위의 결과는 전쟁의 규모를 거대하게 확장시켰고 종국에 부자지간에 결코 회복할 수 없는 깊은 감정적 골을 남기게 했다.

1173년 여름, 동맹군은 노르망디를 침공하고 이것이 훗날 사자심왕으로 불리게 된 그의 첫 전투였다. 동맹군에는 스코틀랜드의 사자왕 윌리엄,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불로뉴 백작 마티외를 비롯한 수많은 권력가들이 가세했다. 나중에 아들들과 합류하려던 엘레오노르는 도중에 헨리 2세의 계략에 걸려 체포되어 장장 10년이 넘는 연금 생활에 처하게 되었다. 리처드는 사랑하는 모후의 체포 소식을 듣자 당장 라로셀로 진군했지만 도시의 격렬한 반항에 부딪혀 승전보를 울리지 못한 반면, 헨리 2세는 동맹군을 완전히 압도하여 불로뉴 백작은 전사하고 루이 7세는 패배하여 도주하는 신세에 이르렀다.

1174년 봄, 동맹군의 수익이 지지부진해지고 패색이 짙어진 상황을 판단한 프랑스 왕 루이 7세는 청년왕 헨리와 제프리만 챙겨서 헨리 2세와 협상을 열었고, 리처드는 이러한 배신에 격분하여 마지막까지 분투했지만 철저한 고립에 처했다. 1174년 9월 23일, 궁지에 몰린 리처드는 결국 부왕에게 엎드려 눈물로 용서를 빌었고 형 헨리와 동생 제프리도 그를 뒤따라 눈물로 부왕에게 용서를 비는 것으로써 마침내 대반란은 종결되었다.

3.3. 아키텐 반란 진압

이처럼 '사랑이 없는' 내전은 남프랑스 군벌들 사이에 반심을 야기했고, 아키텐의 공작인 리처드는 그들의 반란을 진압하며 다음 3년간 활발히 활동했다. 이 전쟁은 리처드가 지휘관으로서 나선 이후 처음으로 성공한 것으로, 그의 전투 기술은 여기에서 완성됐다고 전해진다. 1177년, 리처드는 가스코뉴로 진격하여 아키텐 반군을 무자비하게 응징하고 이듬해 1178년, 헨리 2세가 아키텐에서 지내는 동안 리처드는 조언자의 역할에 머물렀지만 아버지가 잉글랜드로 건너간 뒤에 군 통솔권을 완전히 장악, 가스코뉴에 대한 군사 계획을 재개하여 1178년 4월, 타유부르 공성전을 벌인다.

이 성은 동시대에 난공불략으로 널리 믿어졌지만 리처드는 단 2주만에 파괴적이고 잔학무도한 공격으로 수비대를 굴복시키고, 그 여파로 나머지 아키텐 반군의 항복을 유도하였으며 그 자신은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위명을 크게 떨쳤다. 하지만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례 없는 포학한 패악을 부렸고 이 때문에 아키텐 귀족들의 식지 않는 공분을 샀다고 전해진다. 헨리 2세는 이 승리에 대해 큰 기쁨을 표출하며 엄청난 예우를 다해 아들을 맞이했다.

3.4. 골육상쟁

1179년 11월, 랭스에서 열린 13세인 프랑스 왕세자 필리프의 프랑스 왕 대관식에 참석하고 아키텐 공작의 권위에 걸맞은 선물을 하였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때 동생 브르타뉴 공작 제프리 2세와 함께 각각 아키텐 공작령과 브르타뉴 공작령에 대해 필리프 2세에게 개인적으로 충성 서약까지 했다는 것이다. 1181년, 리처드는 형인 청년왕 헨리, 동생 제프리와 힘을 합쳐 썽쎄흐와 플랑드르의 반란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필리프 2세를 구했으나....

이듬해인 1182년 형 헨리와 동생 제프리가 반리처드 아키텐 봉신들과 결탁하여 대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아키텐으로 진격하고, 필리프 2세는 뒤에서 은밀하게 그들에게 용병을 지원하는 것으로써 리처드에게 은혜를 원수로 되갚았다. 부왕의 아들간의 싸움 중재는 실패하고 전쟁이 재발하여 봄 동안 지속되었다. 아키텐 귀족들의 움직임이 우려할 수준을 넘어서게 되자 상황의 위급함을 판단한 부왕이 리처드에게 가세하여 리처드, 헨리 2세 VS 청년왕 헨리, 제프리, 필리프 2세 구도에서 1183년 6월에 청년왕 헨리가 이질로 급사했을 때 비로소 중단되었다.

그 뒤 헨리 2세는 슬하에서 양육했던 리처드의 약혼녀 프랑스 공주 아델과[14] 막내 의 결혼에 대해 상위 주군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서 동의를 받았고, 프랑스의 플랜태저넷령에 대해 충성 서약을 하는 것으로 아들들에게 상속지와 상속 권한을 꽉 쥐고는 상속에 대해 새로운 결정을 공포했다.

(1) 리처드는 아키텐을 포기하고 청년왕 헨리의 몫이었던 노르망디, 앙주, 잉글랜드를 상속받을 것.
(2) 아키텐은 막내 존이 양도 받을 것.

분노한 리처드는 부왕에게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고 아키텐으로 돌아가서 전쟁 준비를 하였고 그와 동일하게 부왕의 눈 밖에 난 자식이었던 동생 제프리 2세는 위선적인 정치 공작을 펼쳐 부왕의 호의를 사면서 야심을 실현시키려 했다. 또한 상위 주군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의 우정 및 동맹을 두고 제프리와 경쟁을 벌였고 약혼녀인 프랑스 공주 아델에 대한 결혼을 선언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묵살되었다. 삼형제 사이에 벌어진 맹렬한 신경전은 전쟁으로 변질되었고, 헨리 2세가 제프리를 노르망디 관리로 파견하게 되면서 리처드와 제프리의 불화는 삽시간에 극으로 치달았다.

리처드는 우선 제프리를 선택한 필리프 2세에게 위협조로 조롱하는 노래를 널리 퍼뜨리며 분노를 표출한 뒤
리처드 공께 전해주게나. 리처드 공은 사자요, 필리프 왕은 어린 양으로 보였다오.
베르트랑 드 보른

제프리와 싸우겠다고 대규모 군사를 일으켰으나 브르타뉴 침공을 개시하기 직전 부왕의 개입으로 불발되었고, 모후 엘레오노르 다키텐을 정치적 볼모로 앞세운 부왕의 명령에 굴복하여 아키텐 전체를 반환해야 했던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 이와 반대로 동생 제프리는 승승장구를 거듭했으며 그의 절친이자 플랜태저넷 왕가의 분열을 꾀하던 상위 주군 필리프 2세는 제프리를 헨리 2세의 후계자로 대우하고 리처드의 상황을 외면하였다. 이같이 제프리에게 정치적 열세였던 리처드와 프랑스 공주 아델을 싫어하던 모후 엘레오노르 다키텐은 분노를 삭히며 헨리 2세의 명령을 따르면서도 뒤에서 은밀히 결혼 동맹을 맺을 새로운 신부를 물색했다. 전부터 헨리 2세에게 엘레오노르의 연금을 풀어주도록 청했을 정도로 모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던 나바라 왕 안초 6세 내외가 그들에게 동맹의 손을 내밀자 장녀인 베렝겔라 공주와 비밀리에 약혼 절차를 밟았다고 믿어진다.

1186년 8월 동생 제프리 2세가 파리에서 돌연 급사하자 리처드에게 국면을 뒤집을 기회가 찾아오고 거의 30세가 되어가는 리처드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드디어 동맹을 맺게 되었다. 명운이 다하고 있던 헨리 2세는 가장 총애하는 아들인 막내 존을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아키텐 상속 계획에 박차를 가하며 프랑스 공주 아델과 결혼시키려 했고, 대륙의 플랜태저넷령을 산산조각 내어 정복할 야심을 숨긴 필리프 2세는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을 재촉하면서 부자를 이간질하는 가운데 상냥함으로 위장하여 리처드를 구워삶으려 했다. 아키텐의 지배권을 꽉 쥐고 헨리 2세의 후계자 자리에 서고자 한 리처드는 필리프의 술수에 넘어가면서도 나바라 공주 베렝겔라와의 약혼에 대해선 철저히 비밀로 부치고 안초 6세 내외에게 신뢰를 주며 제각기 동상이몽을 하고 있었다.

1188년 11월 18일, 교황의 노력으로 항구적 평화를 물색하려는 회담이 열렸지만 헨리 2세가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 리처드를 공식 후계자로 인정하기를 주저하자 리처드는 그 자리에서 대륙의 모든 플랜태저넷령에 대해 필리프 2세에게 충성 서약을 했다. 이듬해인 1189년, 리처드는 필리프 2세와 협공하여 부왕과 전쟁을 재개하고 전세가 기울어지자 헨리 2세의 봉신들이 배반하여 그들에게 붙었으며 6월에 헨리 2세가 소수의 지지자인 서자 제프리, 윌리엄 마셜, 르노 다마르탱 등과 연합하여 맞서려 했으나 르망에서 대패하고 시농으로 퇴각하였다. 1189년 7월 3일, 리처드와 필리프는 서 있기조차 힘든 헨리 2세를 회담장에 소환하여 3차 십자군 원정을 마친 즉시 아델과의 결혼, 가장 굴욕적인 조건들을 받아냈다. 3일 후 부왕이 병사하자 리처드는 대륙의 플랜태저넷령을 모조리 독식하고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였다.

3.5. 즉위, 숙청

1189년 9월,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리처드 1세는 헨리 2세에 맞서 자신의 편을 든 사람들을 비열한 아첨꾼에 기생충 같은 인간들이라며 모조리 처벌함으로써 토사구팽해버리는 등 대대적인 숙청을 가했다. 대관식 날에 리처드에게 선물을 바쳐 혹여 발생할 화근을 피하려던 유대인들을 붙잡고 내쫓아 옷을 벗기고 후드려 팬다. 그의 대관식 날에 왕이 유대인을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헛소문이 퍼져 대대적인 유대인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대량 살육이 벌어졌건만 리처드는 폭도들 중에 오로지 3명만 처형했는데 그나마도 살인죄가 아니라 기독교도 집에 불을 지른 방화죄였다.[15] 이후 그는 제3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게 되는데, 전쟁 비용으로 무거운 세율을 매기고 재정적으로 나라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국가를 아주 말아먹을 생각까지는 없었고, 동생인 존 왕의 문제도 있었기에 나름대로 조치를 취해놓았다.

3.6. 제3차 십자군 원정: 전천후 군사 천재

A skilled warrior, gifted leader, and superb tactician.
숙련된 전사이자 타고난 리더, 그리고 뛰어난 전술가.
토머스 F. 매든 교수. 십자군 전쟁의 진짜 역사(The Real History of the Crusades)

십자군 전쟁에서 리처드가 보여준 야전 사령관으로서의 역량은 당대 서방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우선 리처드 본인의 용력과 무예 부터가 십자군 전쟁 당시에 손꼽히는 수준인 것은 물론, 전술과 전략의 대가였고, 공성전의 천재였으며 동시에 병참과 보급의 달인이었다. 적 전술을 눈치채고 재빠르게, 그리고 과감하게 대처할 뿐만 아니라, 맹수와도 같은 예리한 전술 감각도 있어서 승부의 갈림길에서 본능적으로 전세를 뒤집는 결단을 과단성 있게 내리곤 했다. 살라딘의 서기관인 바하 알딘은 '리처드가 항상 격전의 한복판에 있는 동시에 모든 곳에 출몰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몸소 격전을 치르면서도 독수리같이 예리하게 작전 지시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대부분의 문화매체에서 등장하는 리처드 1세는 전장에 직접 뛰어들어 맹렬하게 전세를 이끈 용장으로만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묘사가 틀린 것은 아니긴 하지만 십자군 전쟁 동안 리처드 1세가 보여준 모습은 나폴레옹처럼 전술가로서 공격적이고 차분했으며, 프랑스와 전쟁할 당시에는 불필요하게 싸움터로 달려가기보다는 살육의 현장에서 거리를 유지하고 지휘관으로서 적군의 숨통을 조이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무신보다는 군신이라고 평할 수 있다. 또한 지형의 불리함으로 인한 십자군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히여 예루살렘으로 남하할 때 반드시 속도가 느릴지언정 매우 안정적으로 나아갔으며[16], 적군의 아킬레스 건을 언제 어떻게 공격할지를 알았고 전투가 개시되기 전에 이미 승리할 상황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결코 운에 모든 걸 걸지 않았다.[17] 십자군이 종교적 사명감을 가장한 욕망에 치우쳐 현실적이지 않은 선택을 할 때마다 그들의 이성의 균형추가 되어주었다.
파일:external/paintingandframe.com/richard_the_lionheart_during_the_crusades.jpg 제3차 십자군 당시 리처드 1세를 묘사한 상상화
리처드의 군사적 천재성은 특히 식량 장부까지 꼼꼼하게 챙기는 그의 습관에서 잘 드러난다. 아크레 공성전에서 승리하고 예루살렘으로 남하하기 전에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일은 부대원 2만 명에게 열흘치 식량과 물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각 병사는 보급품 15킬로그램을 짊어졌다. 하루치 식량 1킬로그램과 장작 0.5킬로그램이었다. 이외에도 보병은 투구, 미늘갑옷, 칼과 방패, 식기, 여벌의 옷 등을 챙겨야 했다. 리처드는 사막에는 강이 별로 없을 것이며 우물에는 사라센인이 독을 풀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여 1인당 매일 15리터씩 물을 배급했다. 기사 6천 명에게는 말에게 먹일 건초 7킬로그램과 물 20리터씩을 추가로 배급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말을 세 필씩 데리고 다님을 감안한 것이다. 이렇게 총 20일간 행군하려면 리처드의 군대는 식량 1340톤과 물 300만 리터가 필요했다. 리처드는 사업가 같은 꼼꼼함으로 이 모든 병참 상황을 직접 감독하고 관리해냈다.

이처럼 리처드는 보급과 통신, 병참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배 216척을 이끌고 잉글랜드에서부터 8천 킬로미터를 항해했으며, 동지중해 해안에서 적의 해운을 초토화했다. 리처드가 키프로스 섬을 정복하고 해로를 장악했다는 것은 남쪽으로 행군해가는 그의 부대가 아무 문제 없이 보급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의 병참 의무는 (1) 다국적 십자군 부대가 충분한 식량과 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의 성벽 아래에 도착하게 하고, (2) 부대가 목표물을 향해 다가가는 동안 보급선과 통신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보급품 수송 부대가 본대를 뒤따르게 함으로써 적에게 약점을 보이는 대신, 해군이 화물을 수송하게 함으로써 육군과 해군간의 협력을 이룬 것이다.

또한 자신이 준비되지 않은 것은 다른 병사에게도 시키지 않았으며, 일반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솔선수범해서 일했다. 앙브루아즈가 말하길 "왕이든 귀족이든 기사든 종자든 모두 함께 손으로 돌과 바위를 나르며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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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 아크레 정복, 1191년

1191년 6월,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가 아크레를 포위하고 리처드의 함대를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키프로스에서 황제 참칭자 키프로스의 이사키오스 콤니노스를 붙잡고 군을 정비한 후 아크레로 향하던 리처드 1세는 도중에 갤리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왕은 피터 데 바레스라라는 선원을 불러 저 배의 정체를 알아오라 일렀고, 잠시 후 자신들이 프랑스 왕의 배라고 밝혀왔다.

유유히 지나던 그 배는 리처드가 탄 함선 옆을 지나다가 갑자기 활과 다트를 쏴대며 공격해왔다. 리처드는 즉시 반격을 지시했고 곧 양측이 바다 위에서 활을 주고받는 교전을 펼쳤다. 그러던 중 왕이 대뜸 휴식을 취하겠다며 양손의 무기를 내려놓고 앉아버렸다. 지휘관들이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리처드 1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 제군은 이 배를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고 고이 보내주겠다는 건가! 부끄러운 줄 알라! 그토록 많은 승리를 거두고 이제 와서 게으름뱅이가 되어 겁쟁이처럼 무너지겠다는 건가! 적이 한 명이라도 남아있는 한 휴식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대 제군은 똑똑히 들어라! 이 적들을 도망치게 한다면 모두 교수형을 당하게 될 것이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Itinerary of King Richard)》

이 말을 들은 병사들은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치열하게 싸웠다. 프랑크군이 갤리선에 도선, 갤리선에 탄 병력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나 아군의 피해도 막심해지자 그제서야 리처드 1세는 직접 일어나 칼을 들고 충각 전술을 지시했다. 결국 이 전술은 성공적으로 이뤄졌고 리처드는 십자군 원정의 첫 번째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후 아크레에 도착하자마자 토착 열병에 걸려 드러눕게 되었다. 한동안 거동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결국 7월 14일 십자군이 치열한 접전 끝에 아크레 성을 점령하는 것을 지켜본 후 병이 나았다.

여담으로 공성전에서 열병[18]으로 쓰러져 부대의 사기가 떨어지자 누워있던 침대채로 전선에 이동하여 침대에 앉은 자세 그대로 쇠뇌를 발사해서 성 위의 적병을 죽여 아군의 사기를 올리는 기행을 선보이기도 했다.
3.6.1.1. 포로 학살, 1191년
한편 아크레를 점령함으로써 리처드는 무슬림 병사 2700명을 포로로 잡게 되는데, 이 포로의 처우에 대해 살라딘과 협상을 시작했다. 원래는 성십자가와 포로의 몸값, 그리스도교 포로 1500명을 교환하기로 합의했고 기한은 한 달로 정했다.

그런데 살라딘은 몸값 조달에 어려움을 겪어 기한이 지나도록 저 협의를 지키지 못 했다.[19] 대신 살라딘은 일단 포로들의 몸값의 일부분만 지불하고 차액은 나중에 지불하겠다며 재협상을 했는데, 리처드는 이 조건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기독교 포로들을 풀어준다는 확약을 요구하였고 동시에 중요한 기독교 포로들의 명단을 제출해줄 것을 요청했다. 살라딘이 이 요청을 거절하면서 다시 재협상에 들어가자 그가 일부러 시간을 끈다고 생각한 리처드는 결국 1191년 8월 20일에 포로들을 학살했다.

이 학살은 아크레에서 몇 km 떨어진 언덕에서 일부러 살라딘의 군대가 볼 수 있는 곳에서 진행했다고 한다. 모든 참상을 지켜보던 이슬람 군대는 이곳으로 돌격해왔으나 십자군은 이들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20]

하틴 전투가 끝난 이후 포로로 잡힌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의 기사 230명이 살라딘의 명령으로 학살당했다.[21][22]

3.6.2. 카이사레아 전투

8월 22일부터 25일까지 리처드는 온갖 고생 끝에 부대를 아크레 외곽에 집결시켰고 곧 행군이 시작되었다. 리처드는 병사들을 위해 행군 속도를 낮췄다가 사흘째가 되어서야 18km로 높였다. 왼쪽에서는 사라센 군대가 그들과 나란히 남하하고 있었다. 살라딘은 걸핏하면 경무장을 한 궁수 부대를 보내어 십자군을 괴롭혔다. 그로 인한 압박감을 덜기 위해 리처드는 보병들을 교대로 위험한 왼쪽과 안전한 오른쪽으로 배치했다.

한동안 사라센군은 육박전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화살을 소나기처럼 쏘아대는 것에 만족했다. 화살은 너무 먼 거리에서 날아와 위력은 없었지만, 십자군의 갑옷과 흉갑에 빽빽이 꽂혀 병사들을 마치 고슴도치처럼 보이게 했다. 살라딘의 서기관 바하 알 딘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프랑크족 보병들은 몸에 한 대에서 열 대까지 화살이 꽂혀 있는데도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대열을 이탈하지 않고 행군했다. [중략] 이들의 놀라운 인내심에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안락을 요구하지도, 불만을 토로하지도 않은 채 지독한 피로를 이겨내고 있었다.
《살라딘의 진귀하고 위대한 역사》

한낮의 기온은 무려 40도까지 치솟아 무기를 들고 사슬갑옷을 입은 사람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길에는 가시덤불과 잡풀이 무성하고, 독사와 독거미도 요주의 대상이었다. 군사들은 열기로 여러 번 정신을 잃었다. 운이 좋으면 배로 옮겨져 회복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하면 쓰러진 자리에서 그대로 죽어야 했다. 다들 참을 수 없는 온갖 불쾌감을 호소했다. 말과 인간의 배설물이 뒤섞여 풍기는 악취는 도저히 형언할 길이 없었고, 밤마다 끊이지 않는 소음은 참기 힘들었다. 부상을 입은 자들과 뱀에 물린 자들의 신음뿐만이 아니라 독거미와 해충을 물리치기 위해 흔들어대는 수천 개의 냄비, 솥, 방패, 투구 소리 때문이었다. 후위를 맡은 군인들의 처지가 가장 심각했다.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은 앞의 주력 부대가 뭉개고 지나간 푸석푸석한 모래와 진흙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리처드는 새벽에 출발하여 정오까지만 행군하고, 하루 행군하면 다음 날은 쉬게 하는 식으로 부하들의 고통을 덜어주려 했다.

1191년 8월 30일, 리처드가 이끄는 프랑크군과 살라딘의 정찰대가 맞붙었다. 살라딘이 곳곳에 매복시켜놓은 병력들이 끈질기게 포위해 공격했지만 리처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썰면서 길을 뚫었다. 그런데 카이사레아 근처에서 당시 후위에 있던 부르고뉴 공작의 프랑스군이 살라딘의 투르크군의 매복에 당했다.
후위에 있던 부르고뉴 공작과 그의 프랑스군의 진군 속도는 무척이나 느렸다. 그리고 그들의 느림보 행군 때문에 끔찍한 재앙을 당할 뻔하기도 했다. (중략) 군대가 좁은 길목에 다다랐고 그 길목을 따라 군수품 마차가 지나가야 했다. 그런데 길의 비좁음 때문에 약간의 혼란이 일어났다. 그것을 눈치챈 투르크군은 대번에 짐마차를 덮쳐 부주의한 병사와 군마들을 쓰러뜨리고 짐의 대부분을 약탈한 다음, 저항하는 병사들이 있으면 사정없이 죽여가며 물가로 내몰았다. 양측은 그렇게 목숨까지 던지며 씩씩하게 싸웠다. 이런 와중에 한 투르크군 병사가 에버라드라고 하는 사람-솔즈베리 주교의 부하 중 한 사람의 팔을 베자, 그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왼손으로 칼을 부여잡고는 투르크군과 격투를 벌여 그 모든 적군으로부터 용감하게 자신을 방어했다.

그것을 본 리처드는 당장 구조에 나섰다. 그러고는 벼락 같은 고함을 치며 투르크군에게로 달려들어 좌우에서 그들을 칼로 찔러 죽였다. 투르크군은 우물쭈물할 틈도 없이 옛날 필리스티아 사람들[23] 마카베오[24]의 얼굴을 보고 사방천지로 도망친 것처럼 리처드 왕의 얼굴을 보자 혼비백산, 머리 없는 투르크군의 시체 몇 구를 우리 손에 남겨놓고 산꼭대기까지 줄행랑쳤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리처드가 증오한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기사 기욤 드 바흐는 이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고, 리처드는 그와의 화해를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전날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리처드는 카이사리아까지 남은 5km를 행군하자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3.6.3. 아르수프 전투

카이사레아 전투 직후인 9월 5일,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조약을 맺자고 사신을 보낸다. 하지만 조약 내용이 살라딘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는데 "살라딘이 이끄는 사라센군의 전면 철수와 팔레스타인 전역을 프랑크족에게 반환"이었기 때문이다. 협상이 결렬되자 곧바로 양측은 전투를 준비하게 되었고 장소는 인근의 아르수프 근처의 숲이었다. 제안을 한 리처드도 살라딘이 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은 안 했을 것이다.

아주 가까이에서 십자군 기사들을 쏘지 않는 한, 화살은 십자군 기사의 두꺼운 갑주를 관통할 수 없었기에 살라딘은 그들의 말을 쏘는 쪽을 택했다. 이런 전술에 맞서 리처드는 우선 2만 명의 십자군을 동원하여 그중 12개의 기병대를 뽑았고 보병을 5개로 재편성시켰다. 경기병(輕騎兵)이 살라딘의 기마 궁수들을 저지하게 하고, 제 2 방어선에는 방패를 든 보병 부대를 재편성하여 밀집 대형으로 배치한 뒤 적들이 말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물론 방패벽 뒤에는 말들이 대열을 갖춘 채 돌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 전위와 후위에 기병대를 배치하고 보병들은 밀집 대형으로 해변가를 따라 움직였다. 또한 상대적으로 통제하기 쉬운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을 십자군 사이 중간중간 배치하며 갑작스런 기습에 의한 붕괴를 막으려 했다.

이 선택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술이었다. 그리고 전술이 성공하려면 아주 정확한 판단이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순간적인 타이밍 포착 능력과 적의 의도를 간파하고 허를 찌르는 능력도 필요했다. 한 명의 전사가 탁월한 작전 능력과 우수한 병참 능력까지 모두 갖추기는 힘들다. 그러나 리처드는 이 모두를 갖추고 있었다.

오후 3시에 3만여 명의 투르크군이 달려들었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살라딘의 기병들은 원거리에서 화살을 쏘거나 투창 다트를 던지는 식으로 지속적인 공격을 가했으나 리처드 1세의 십자군은 꿈쩍하지 않는데, 일부 병사는 10발이 넘는 화살을 맞았음에도 진형에서 탈출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리처드는 오로지 밀집 대형만 유지한 채 전진하도록 했고 이후 전투 양상은 공격하는 투르크군과 수비하며 조금씩 전진하는 프랑크군의 전투로 전개되었다.

십자군이 피해를 입는 것을 보고 살라딘은 더 많은 병력을 투입했다. 십자군의 기병 부대는 다른 부대와의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말을 뒷걸음질 시키면서 싸웠다. 그 때문에 구호기사단은 엄청난 위기 상황을 맞았고,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단장은 부하들을 내버려둔 채 말을 달려 리처드를 찾았다. "왕이시여, 우리는 엄청난 공격을 받고 있소. 반격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명예는 영원히 회복되지 않을 거요." 리처드는 다시 이 청을 거절했다. "참으시오. 아무도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소."

목격자에 의하면, 극한의 열기와 눈을 어지럽히는 아지랑이 사이로 부상자의 비명소리, 귀를 찢을 듯한 북소리와 징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지독한 혼란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구호기사단은 여려 차례 전령을 보냈지만 리처드는 계속 조금만 더 버티라는 말만 반복했을 뿐이었다.

구호기사단이 거의 붕괴되어갈 때쯤, 기사단의 단장과 불드윈 커루라는 기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성 조지(제오르지오)를 위하여!"를 외치며 달려나갔다.[25]

그러자 그 뒤를 다른 기사들이 따라 나갔는데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리처드는 기병대 전체에게 돌격을 지시했다. 리처드는 사라센군이 공세종말점에 이를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순간적인 전황의 변화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승패를 결정지었다. 지원이 없었다면 섣부른 돌격을 한 구호기사단은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굴복했을 것이다. 이를 본 살라딘의 기록관, 바하 앗 딘(Baha ad-Din ibn Shaddad)은 이렇게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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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들 기사들이 보병 부대 중간으로 모여드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그들이 창을 부여잡고 마치 한 사람이 소리치는 것처럼 전쟁 구호를 복창하자 보병 부대가 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들은 그 사이를 뚫듯이 질주해나와 단번에 사방으로 돌진해가며, 일부는 우익으로 일부는 좌익으로 또 일부는 중앙으로 밀고 들어가 우리군을 초토화시켰다. 나는 중앙군이 공격 받는 것을 보고서 좌익으로 대피하려 했으나 그쪽은 이미 중앙보다 먼저 무너진 뒤였고, 심지어 우익의 상황은 그것보다 더 심각했다.
《살라딘의 진귀하고 위대한 역사》(The Rare and Excellent History of Saladin)[26]

리처드의 지휘 아래 십자군은 좌, 중, 우 3갈래로 완벽하게 나뉘며 살라딘 진형을 향하여 돌격해갔다. 또한 이 타이밍에 리처드는 일부 지원 병력을 구호기사단으로 보내고, 본인은 가장 앞서 칼을 뽑고 나아가 살라딘의 병력을 썰기 시작하고 가까이에 있던 앙주와 푸아투 기마병이 그를 지원했다.

대다수의 사라센 기마 궁수들은 목표물을 좀 더 정확하게 겨냥하기 위해 말에서 내려 바닥에 엎드려 있느라 돌격하는 기사들에 말발굽에 짓밟히고, 그 뒤를 따라온 십자군 보병들의 손에 종말을 맞았다. 이렇게 몇 분도 안 되는 사이에 살라딘이 고대한 승리가 패배로 변해버린 것이다. 공황에 빠진 사라센 병사들은 우왕좌왕하기만 했고 죽지 않으려고 나무에 기어 올라간 자도 있었다.

리처드는 이때 본격적인 무쌍난무를 펼쳤는데 그의 활약은 기록으로만 보아도 인간이 아닌 느낌을 들게 만든다.
아군이 혼란에 빠진 것을 알자 리처드 왕은 말에 박차를 가해 속도 한 번 늦추지 않고 날듯이 구호 기사단까지 도착해 원조 부대로 데리고 간 부하들을 그곳에 풀어놓았다. 그러고는 투르크군을 밀치고 나아가 담력 같은 소리를 지르며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의 앞에서 적들은 양옆으로 픽픽 쓰러져갔다. 그렇게 그는 홀로 맹렬하게 투르크군을 밀어붙이며 적을 쓰러트렸고 그의 칼 끝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쪽을 공격하든 그는 자신을 위한 공간을 널찍이 확보한 가운데 사방으로 칼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그가 마치 낫으로 곡식을 베듯 적병의 머리를 계속 내려치며 가증스런 종족을 분쇄해나가자, 자기 동료들의 죽어가는 모습에 놀란 적병들은 전보다 더 넓은 공간을 그에게 만들어주었다.

(중략)

위풍당당한 키프로스 말 위에 앉아있던 리처드 왕은 자신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언덕으로 올라가 투르크 군을 만나는 족족 요절을 냈다. 적군들이 그의 앞에서 쓰러지면 투구들도 함께 쨍그랑거렸고, 한 번씩 내려칠 때마다 그의 칼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이날 그의 공격이 얼마나 맹렬했던지 투르크 군은 곧 불가항력적인 그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 군에게 무조건 길을 내주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사납고 비범한 왕은 사방에서 아랍인의 머리를 베었다. 아무도 그의 칼을 피할 수 없었다. 그가 돌아서서 칼을 휘두를 때마다 널따란 길이 났다. 그는 연신 검을 휘두르면서 아랍인들을 베어 나갔는데, 그 모습은 마치 낫을 든 농부가 곡식을 베는 것과 같았다.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

이후 3번의 전투가 더 치러졌고 살라딘이 적극적으로 지휘하면서 군을 이끌었으나 전세는 뒤집어지지 않았다. 십자군이 700여 명의 병력 피해를 입은 반면 투르크군은 최대 7000여 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하게 된 것이다. 편력기에는 참패 이후 살라딘이 총공세를 한 번 더 펼쳤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리처드는 단 15명의 부하만을 거느리고 적들을 향해 달려가 적을 그들의 본거지로 밀어붙였다고 한다.
(프랑크군이) 막사 준비에 전념이 없던 틈을 타 투르크 대군이 우리 군의 후위를 덮쳐왔다. 왕은 격투 소리를 듣고 병사들에게 전투 명령을 내리며 그대로 말에 올라 15명의 부하만을 거느리고, " 하느님 성모께서 우리를 보우하사"를 큰 소리로 외치며 투르크 군에게도 돌진해 갔다. 그는 이 구호를 두세 번 연달아 외쳤고 나머지 병사들도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급히 그의 뒤를 따라 적에게로 돌진해 사라센 군을 그들의 본거지인 아르수프 숲까지 밀어붙였다. 그후 왕은 막사로 돌아왔고, 격렬한 전투에 지친 병사들은 밤새 휴식을 취했다. 다음 날 병사들과 그곳에 가보니 32명의 아미르가 죽은 것을 확인했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여기에서 리처드 1세의 전투 기록 중 일기토가 드문 이유를 알 수 있다. 아미르는 유럽으로 따지면 영주 정도 되는 사람들인데, 그러니까 리처드 1세는 일기토 상대로도 나쁘지 않았을 영주들마저 그냥 학살하고 지나간 것이다. 이쯤 되면 일기토를 신청한 사람의 용감함을 칭찬할 게 아니라 어리석음을 비웃어야 할 판. 팔레스티나는 살라딘의 영향권이었으므로 7000명의 일반 병사 피해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32명의 아미르가 더 큰 타격이었다. 이 당시 아미르들은 봉건 영주로서 자신의 병력의 지휘관을 겸했기에 지휘 체계에 큰 타격이 있고, 후계 구도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영주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귀환하겠다고 하는 병력이 있을 수도 있다. 이는 설령 술탄이라 해도 무시하기 힘든 요구이다.

적이 후퇴하자 리처드는 더 이상의 반격이 없도록 세 차례 더 돌격을 지시했다. 그는 여전히 냉철했다. 전투가 벌어진 평원 끝에는 숲이 있었는데, 기병대에게 적을 쫓아 그곳까지 들어가지는 말 것을 지시했다. 그는 사라센이 거짓으로 후퇴하는 작전을 즐겨 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승을 거둔 환희의 순간에도 냉철함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패배로 심하게 낙담한 살라딘은 한동안 먹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의 부관 중 한 사람은 "리처드는 무적"이라 말했고, 사라센들은 그를 "멜렉 리처드(Melek RIchard)"라 부르게 되었다.

전투가 끝나고 하루를 쉰 십자군은 9월 9일 다시 행군을 시작하여 다음 날 정오쯤에는 야파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크레에서 이곳까지의 행군은 대단한 위업이었다. 이 야생마 같은 다국적 부대가 처음으로 한 사람의 지휘자 밑에서 하나로 모여 움직인 것이다. 리처드는 부대를 다독여 하나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서양의 중세 군대에서 보기 드문 중앙 통제를 어느 정도 달성했다.

리처드는 곧 아스칼론으로 남하했다. 이스라엘 판관 삼손이 팔리스티아 사람 서른 명을 때려 죽인 곳으로 당대에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 이 앙주 제국의 지배자는 병사들 사이에서 고된 노동도 마다하지 않으며 아스칼론의 성채 복구에 나섰다.

3.6.4. 팔락 알딘의 대상단 약탈

살라딘은 전쟁의 풍향을 바꾸기 위해 이집트에서 사파딘의 이복동생인 팔락 알딘이 최근에 모집해온 제 2군이 풍부한 교역품을 가지고 지원토록 했다. 그러나 리처드는 대규모 상단이 예루살렘으로 출발하는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신속하게 공격 준비를 했다.

1192년 6월 21일 밤 리처드는 500명의 기사와 1000명의 최정예 보병을 거느리고 출발했다. 살라딘도 대상단을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부대를 파견했다. 23일 리처드의 부대가 알하시에 접근하고 있을 때, 팔락 알딘은 예루살렘까지 최단 코스로 가기로 하고 23킬로미터 떨어진 텔알쿠위알리피아에 진지를 세웠다. 대상단이 공격권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된 리처드는 도저히 이 행운을 믿을 수 없어서 처음에는 함정이 아닌지 의심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대상단이 잠잘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해가 뜨기 직전, 짐을 실은 낙타를 끌고 예루살렘으로 출발하려던 사라센인들은 질풍 같은 공격을 당했다. 이슬람의 호송대와 지원군은 인원이 워낙 많아 세 무리로 나누어 숙영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십자군의 공격이 더 쉬웠다. 하나의 부대는 포위되어 학살되었고, 나머지 부대는 혼란 속에서 사막으로 달아났다.

다시 한번 리처드는 격전의 한복판에서 칼을 휘두르며 적들을 베어 넘겼다. 학살된 사라센의 숫자는 엄청났다. 기습당한 사라센인들은 제대로 싸움도 해보지 못 하고 공황에 빠졌기 때문이다. 사라센의 시체는 약 1300구 가량이었지만 실제 사망 수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사막을 기어가다가 죽은 부상자가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포로는 500명 가량이었다. 리처드는 4700마리의 낙타, 수천 마리의 당나귀와 노새를 비롯하여 거기 실려 있던 금은, 무기, 의약품, 향료, 의복, 텐트, 로프 등을 모조리 가로챘다.

살라딘의 천막에 있던 바하 알딘은 이렇게 전한다. "술탄께서 이처럼 비탄에 빠진 적은 없었다!"

3.6.5. 교착상태

이후 승리의 기세를 몰아 아크레 남쪽 60km 지점, 현재의 팔레스타인이 위치한 지역까지 내려온 기독교 연합군[27]은 이해 11월 말까지 리처드의 지시 아래 야파의 진지 구축 작업과 일부 요새를 복구하는 것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때 윌리엄 드 프레오라는 기사와 단둘이 매 사냥을 떠났다가 사라센 군의 기습에 포로로 잡힐 뻔한 적도 있었다. 프레오가 그를 아랍어로 왕이라는 뜻인 "말리크"라고 칭하는 모습을 본 아랍 병사들이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고 한다.

아르수프 전투의 승리와 야파의 점령으로 십자군의 눈앞에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 이에 기사들과 병사들은 곧 예루살렘을 탈환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기뻐했지만 리처드의 생각은 달랐다.

지도만 봐도 알겠지만 예루살렘은 이슬람 세력에 둘러싸인 섬과 같은 도시였다. 그나마 해안가 도시들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해상을 통한 물자의 보급과 병력의 보충이 가능해서 버텨낼 수 있었지만 내륙 도시인 예루살렘을 이런 방법으로 지켜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한 당시 팔레스티나 지역은 이슬람 세력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의 총 병력은 대략 20만 정도로 추산된다. 때문에 총 병력이 35,000명 정도였던 1차 십자군이 성공한 것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슬람 세력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말이다.

문제는 1차 십자군 때의 이슬람 세력은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시는 셀주크 투르크나 파티마 왕조나 아바스 왕조나 맛이 가서 술탄이고 칼리프고 그저 이름뿐이었고, 동네 마을 하나까지 영주를 자처하며 서로 자기네끼리 땅따먹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게 어느 정도로 심각했냐면 이슬람 영주가 십자군과 동맹 맺고 옆 동네 이슬람 영주를 공격하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었고, 한 번은 이슬람 영주와 동맹 맺은 십자군이 다른 이슬람 영주와 동맹 맺은 십자군과 싸운 일조차 있었다.[28]

때문에 1차 십자군이 안티오키아를 점령할 때도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도, 트리폴리를 점령할 때도 다른 이슬람 영주는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할 뿐이라서 하나하나 십자군에게 각개 격파를 당했다. 만약 모든 이슬람이 일치단결해서 공격했다면 십자군 국가의 수립은커녕 기껏해야 동로마 제국과 가까운 영토 일부를 수복하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막상 안티오키아 공방전만 해도 가장 가까운 알레포의 대영주인 리드완은 안티오크가 공격 받은 것을 보며 박수를 치며 좋아하고 있었고 먼 모술의 대영주인 카르부카가 달려왔을 때는 이미 게임이 끝나가는 상황이었다. 그걸 본 카르부카는 안티오크를 먹어치우려다가 가뜩이나 분열된 아미르들을 더욱 분열시켜 박살이 나고 모술까지 잃어버린다. 각설하고 1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건국된 예루살렘 왕국도 이같은 이슬람 세력의 분열을 이용해 때로는 이슬람 영주들과 동맹 맺고, 때로는 싸우면서 90년의 세월을 버텨낼 수 있었다.

3차 십자군 당시는 1-2차 십자군 때와 사정이 전혀 달랐다. 살라딘이라는 위대한 왕의 등장으로 이슬람 세력은 하나로 통합되었다.[29] 이제 100년 전처럼 이슬람 세력의 분열을 이용해 줄타기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1차 십자군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체스판 너머에 상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설사 리처드가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해도 뒷일이 어찌 될지는 뻔한 일이었다. 리처드와 십자군 병사들이 유럽으로 돌아가고 나면 물밀듯이 몰려올 이슬람군에 예루살렘을 도로 내주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몇 개월쯤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리처드는 생각한 듯하다. 또 다른 이유로는 마찬가지로 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공성전 때는 어느 영주도 십자군의 뒤를 치지 않았지만, 3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인다면 살라딘이 후방을 공격해올 것을 염려했다.

그렇기 때문에 리처드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대신 살라딘과의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되찾는다면 살라딘이 조약을 어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후술할 리처드의 여동생과 살라딘의 동생인 알 아딜과의 혼담도 이때 나온 일이었다. 허나 살라딘 역시 예루살렘을 호락호락 내줄 생각은 없었다.

1191년 11월 마침 살라딘은 당시 영주들의 반발로 일시적으로 휘하 병력을 해산한 상태였다.[30] 이 기회를 틈타 리처드는 일단 예루살렘으로 진격했으나 예루살렘까지 하루 거리를 남겨두고 군대를 되돌린다. 아마도 본격적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할 생각이 아니라 일종의 위력 시위였던 듯하다.

한편, 1192년 봄까지 협상을 했지만 쉽게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내줄 생각이 없다는 걸 알게 된 리처드는 전략을 바꾼다. 먼저 아스칼론, 가자, 다룸을 점령해 살라딘의 영지인 이집트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후방을 정리한 다음 1192년 6월 예루살렘으로 재진격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리처드는 군사력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할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예루살렘으로 전진하는 와중에도 살라딘과 끊임없이 회담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군사력으로 정복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 리처드는 아예 이집트를 공격하기로 생각을 바꾼다. 당시 이슬람 영주들은 살라딘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건 수백 년간의 충성의 결과가 아니라, 살라딘의 그동안 쌓은 군사적 업적과 부유한 이집트의 영주란 사실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약 리처드가 이집트를 공격하는 데 성공한다면 살라딘은 실각할 수밖에 없고 다시 한번 이슬람 세력은 분열할 수 있다. 설사 이렇게 일이 잘 풀리지는 않더라도 이집트를 공격하면 최소한 살라딘을 압박해 협정을 유리하게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3.6.6. 예루살렘? 이집트?

군사 하층부에 속한 리처드 왕의 편력기의 저자에 따르면, 리처드는 예루살렘 공격에 대해 물 공급이 심각한 문제임을 지적했다. 살라딘이 우물에 독을 풀었으므로 십자군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릴레이식으로 운반해온 물을 말에게 먹여야 한다, 게다가 기병대의 반은 물을 공급 받고 있을 때 반만이 근무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리처드는 예루살렘 공성전 대신에 이집트 원정을 제의했다.

이에 십자군은 투표를 하자고 했다. 300명의 대배심원이 선정되었고, 그중에서 열 두명이 선발된 후 거기서 다시 세 명이 뽑혔다. 이 세 명의 결정을 최종 결정으로 정하자는 데 다들 동의했다. 세 명 모두 이집트 원정을 선택했다. 프랑스군은 최종 결정에 따르기도 약속해놓고도 즉각 약속을 깨뜨렸다. 예루살렘을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부르고뉴 공은 프랑스인은 아무도 이집트에서 싸우지 않을 것이라고 우회적으로 선언했다. 그러자 리처드는 이집트 원정에 대해 설명했다. 나일강 원정은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포기하게 함으로써 '순례자들'의 목적을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상층부의 설명은 다르다. 잉글랜드 왕실의 성직자는 리처드가 예루살렘을 공격하기를 원했지만 부르고뉴 공이 프랑스 왕을 생각해서 그럴 수 없다며 거부했다고 단언한다. 티레의 기욤의 연속물도 부르고뉴 공을 비난했다. 잉글랜드 왕이 이대로 예루살렘을 정복하면 도중에 귀국한 프랑스 왕의 명예가 실추될 것이기에 공격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13세기에 루이 9세의 최측근도 부르고뉴 공이 리처드가 예루살렘 공성전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고 짤막하게 비난했다. 코제샬의 랄프는 부르고뉴 공, 성전 기사단의 단원들과 프랑스인들이 프랑스 왕을 위해서 리처드가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것을 막았던 것을 비난했지만 결론적으로 리처드에게 책임이 있었음을 암시했고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예루살렘 앞에서 십자군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리처드는 베이트누바에서 해안 지역인 아크레까지 물러났다. 살라딘의 첩자들은 리처드가 아크레로 물러난 뒤 체면을 세우기 위해 베이루트 공성전에 나설지도 모르며, 그 다음에는 잉글랜드로 배를 띄울 것이라고 전했다. 살라딘은 여전히 최대의 숙적을 상대로 머리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어디로 나아갈지를 정했다. 아무도 그의 다음 움직임을 예상하지 못 했다.

3.6.7. 야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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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파 전투
야파에서 아크레까지 엿새 만에 해로로 항해하는 동안 아무런 저항도 만나지 못한 리처드는 사라센인들이 전쟁을 끝낼 준비를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야파에는 수많은 병자 및 부상자와 빈약한 수비대 하나만을 남겨두었다. 그는 알레포와 모슬에서 사라센의 대규모 보충 부대가 도착하여 살라딘이 '긴급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나중까지 알지 못했다.

1192년 7월 27일, 살라딘과 6만 2천여 명의 사라센 군은 야파 요새를 침공한다. 수비대는 리처드가 그곳에 없음을 애통해하면서 리처드에게 전령을 보냈다.
아아, 잉글랜드 왕이시여, 우리 군주이자 수호자여, 그대는 무엇 때문에 아크레로 가셨나요?

수비대는 이 전투에서 고대 로마식의 거북 대형을 짜서 맹렬하게 저항하는데, 그 맹렬한 저항은 무슬림의 역사가들마저 감동시킬 정도였다.

하지만 망고넬에서 발사되는 무거운 돌덩어리가 마침내 그들의 저항을 분쇄했다. 십자군은 모두 성채 안으로 물러나고 그들의 투혼은 '이틀'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번 것이다. 마침내 전황이 불리해졌을 때 십자군들이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이 그리했던 것처럼 자신들도 투항할 수 없겠냐고 하자 살라딘은 그들의 항복을 접수하면서도 그들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한다.[31]
요새로 퇴각하고 도시를 포기하라. 지금 무슬림군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잠시 후 무슬림 군대가 야파 시내로 몰려와 닥치는 대로 약탈을 저지르기 시작했고 수비대 생존자들은 모두 성채에 틀어박혔다. 살라딘은 부대를 수습하여 야파 방위를 위해 성채를 비롯한 주요 거점들을 장악하려 했지만 전리품에 취한 무슬림 군대는 살라딘의 통제를 무시하고 날뛰었다. 결국 살라딘의 우려가 그대로 이루어진 셈이다.

새로 선출된 예루살렘의 대주교가 십자군 편의 협상자가 되어 살라딘에게 다음 날인 8월 1일 오후 3시까지 전투 중단을 제의했다. 그때까지 아크레에서 구조대가 오지 않는다면 항복하고, 정전을 허락한 살라딘에게 큰 보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리처드가 그 시간 안에 올 수 없다고 확신한 살라딘은 이 제안에 동의했다.[32]

한편 아크레에 있던 리처드 1세는 수비대의 필사적인 구원 요청을 7월 28일에 받았다. 목격자에 의하면 "모두의 생사가 오직 그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슬픔에 겨워 자신의 옷까지 쥐어뜯는' 전령들의 통곡에 크게 분노, "하느님이 살아 계심에 그분의 도움으로 내 할 일을 하고야 말리라."라고 외치며 군대를 소집하여 야파로 향했다.

우선 리처드는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 예루살렘 왕 앙리 1세가 이끄는 주력 부대는 템플기사단 및 구호기사단과 함게 내륙을 통해 남쪽으로 갔다. 해로로 출발한 리처드는 상륙 작전을 펼 기습 부대를 선발했다. 하지만 행운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아크레에서 출발한 함대는 카르멜산에서 불어오는 역풍을 맞아 항해 속도가 느려졌고, 작은 돌풍으로 일부 함선은 대열에서 이탈해 버렸다. 그는 8월 1일 새벽까지도 갑판을 초조하게 서성댔고 7척의 배를 이끌고 야파에 도착했다.

살라딘의 병사들은 토요일 아침, 리처드의 갤리선에서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살라딘은 리처드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해안에 군대를 배치하는 한편, 항복한 십자군 수비대에게 성채를 넘겨받아 야파 방어에 쓰려고 했다. 리처드가 도착한 줄 모르던 수비대는 순순히 성채를 넘기려 했다. 그때 살라딘의 부하들 중에서도 인정이 넘치기로 유명한 늙은 영주인 주르디크가 십자군을 지금 보내줬다가 분노한 무슬림 군대가 십자군들을 도륙할 것이니 십자군들을 위해 안전한 퇴로를 마련해주자고 주장함으로 성채를 넘겨받는 일이 늦어졌다.

하지만 무슬림 병사들은 십자군을 위한 퇴로를 마련해주는 일에 매우 불만스러워하며 일을 대충 했고 이 때문에 수비대원 49명과 그네들의 49명, 말 49필만이 성채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수비대원들은 해안가로 접근한 리처드의 범선 35척과 갤리선 15척을 발견했다.

마음이 바뀐 수비 대원들은 다시 성벽에 틀어박히고 바하 앗 딘에게 자신들의 항복을 철회한다는 매우 정중한 문구를 보낸 다음에 무슬림 병사들을 급습해 도시 밖으로 몰아냈다. 열이 뻗칠 대로 뻗친 투르크군과 살라딘은 야파 시내로 몰려가서 수비대를 다시 성채로 몰아넣고 성벽을 맹폭하기 시작했고 곧 성내에 진입까지 성공한다. 성내는 약탈을 시작한 무슬림 병사들과 성내에 위치한 공성 탑에 모여서 죽음을 기다리는 소수의 병사들만이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헌데 간신히 나타났던 리처드의 범선은 이상하게 접근을 안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무슬림의 함성 소리와 휘날리는 살라딘의 깃발 때문에 구조 요청을 듣지 못 했고, 앙리의 주력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토의하고 있었던 것. 기다리던 자들 입장에서는 속이 터지겠지만, 이는 리처드가 매우 신중하고 냉정한 지휘관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절체절명의 순간, 수비대가 다시 항복을 구걸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사제 한 명이 바다에 뛰어들어 리처드의 범선까지 헤엄쳐갔다. 잉글랜드군이 그를 구조하여 갑판에 올리자 그는 리처드에게 부르짖었다.
숭고한 왕이시여. 우리 병사들은 지금 전하의 구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저 도살자들의 칼날에 쓰러져가고 있나이다. 마치 도살을 기다리는 양들처럼 목을 앞으로 길게 빼고 있습니다. 수비대는 전하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이 없는 한 그 자리에서 죽고 말 것입니다.

이에 리처드가 노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당치도 않다!

리처드는 구조 요청을 듣자마자 전속력으로 야파 요새로 돌진한다. 리처드는 배가 정박하기도 전에 아무런 갑주도 차지 않은 채 허벅지까지 잠기는 바다로 뛰어들더니 물을 헤치며 육지로 올라섰다. 보병 부대와 함께 육지로 상륙한 기사는 80명 가량이었다. 그들은 제노바 궁수들의 지원을 받아 기슭에 거점을 확보하고 신속하게 기슭을 올라가 도시로 향했다. 그 다음 리처드는 성으로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살라딘의 서기관 바하 알딘은 다들 혼란에 빠져서 헛것이 보이는 통에 "십자군이 전진하는 동안 붉은색의 소용돌이가 일었다."라고 전한다.

리처드는 석궁과 함께 자신의 유명한 덴마크식 도끼를 휘둘러 약탈에 정신이 팔려있던 무슬림 병사들을 닥치는 대로 베었다.
왕은 마을 밖으로 달아나는 적을 뒤쫓으면서 강풍이 배를 뒤흔들듯이 그들을 후려쳤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함락이 거의 확실시되어 방심하고 있던 무슬림 병사들은 난데없는 기습에 혼비백산하여 순식간에 와해되어 야파 해안을 잉글랜드군에게 내주었다. 그리고 리처드는 수많은 무슬림군 사이를 뚫고 지나가 소수의 수비대가 위치한 성전기사단 건물 내부로 도달하는 데 성공하고 뒤이어 도착한 십자군이 성벽 사수에도 성공하며 “지원군이 도착했다.”라는 신호인 잉글랜드 깃발을 꽂게 된다.
왕은 성전기사단 건물의 계단 위쪽으로 혼자 돌진해 들어갔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성벽 위에는 수비대 구조를 알리는 영국 기가 펄럭였다.
스탠리 레인 풀, `살라딘`
그 꼴을 보고 있던 살라딘은 당연히 분노를 금치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살라딘은 헐떡거렸다.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도대체 그들이 어떤 작전을 세웠길래! 우리의 보병과 기병이 훨씬 우세하지 않은가!"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 418쪽

살라딘이 질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이때 리처드군은 단 3필의 말로 공격을 감행해서 저 말도 안 되는 업적을 완수해냈다.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이는 가톨릭과 이슬람 양쪽의 모든 역사가들에게 똑같이 입증된 사실이다. 무슨 허무맹랑한 전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무용담이 실제로 벌어진 것도 모자라 무용담 속 패배하는 악역이 됐으니 살라딘의 그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심지어 이 당시 살라딘 옆에서 야파 요새가 단 1명의 무력으로 허무하게 빼앗기는 걸 지켜보았던 어느 역사가는 리처드를 두고 "저 자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단정짓기까지 했다. 이전부터 리처드의 적들은 리처드를 '악마'라고 불렀는데, 아마 이때를 기점으로 리처드의 적들이 공통적으로 '무시무시한 악마'라는 두려움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살라딘은 6만 2천이라는 대군을 데리고 와서 요새를 점령할 뻔했지만 지지부진해지던 와중 리처드라는 희대의 괴물의 분전으로 인하여 야파 요새를 다시 빼앗기고 만다.

야파에서의 첫 번째 교전이 끝난 후, 살라딘이 보낸 의전관 아부 바크르에게 리처드는 웃으며 비꼬기까지 했다.
"당신들의 그 전능한 술탄은 어째서 내 모습만 보고 도망치신 거요? 맙소사. 나는 갑옷은 고사하고 싸울 준비도 없이 선박용 슬리퍼만 신고 있었는데 말이오? 도대체 살라딘은 왜 도망을 갔던 것이오?"

이렇게 양편 모두 격전을 치른 뒤 잠시 휴식기를 가져야 했다. 어쩔 수 없이 평화 협성이 재개되었다. 문제는 아스칼론이었다. 살라딘은 그곳을 돌려주지 않으면 화평을 하지 않겠다고 했고, 리처드는 그곳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완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리처드는 앙리 1세의 주력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협상을 질질 끌었다. 앙리가 도착하자 십자군은 이제 2천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적지 않은 숫자였지만 살라딘이 전력을 다해 야파를 공격한다면 안심할 수 없었다. 불리함을 타개하기 위해 리처드는 야파의 성벽을 최대한 빨리 수리하게 했다. 리처드와 앙리 왕도 사흘 밤낮으로 성벽에서 일했다.

하지만 야파에서 제대로 한 방 먹은 살라딘의 첫 움직임은 전면전이 아니었다. 리처드와 그의 부하들이 성 밖에서 숙영하다는 소식을 들은 살라딘은 8월 5일 새벽에 리처드가 점령한 야파를 향해 7천의 병력을 동원, 기습 공격을 시도했다. 이때 야파에서의 십자군의 병력은 기사 54명, 기마 기사 15명, 보병 2천 명에 불과했으며 무너진 성벽을 마저 보수하지 못해서 그곳에 목책을 치고 진을 치며 방어를 할 정도로 열세였다.

그런데 새벽의 제때, 리처드가 잠에서 깨어났다. 판관기 16장 3절에서 가자인들의 기습 직전에 갑자기 삼손이 한밤중에 일어나 성문을 빗장째 뽑았듯이, 리처드는 부하들에게 공격에 대비하라고 지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습 공격이 들통나자 분노한 살라딘은 즉시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전면전을 지시했다. 당연히 잘 자고 있던 십자군의 진영은 난리가 났다. 처음에는 자기 말을 제대로 찾은 기사가 열 명뿐이었다. 하지만 곧 보병대는 대오를 갖추었고, 전투에 앞서 리처드가 연설을 하자 사기는 더욱 올라갔다. 말을 타고 병사들 앞을 왔다갔다하면서 리처드는 소리 높여 외쳤다.
"굳세게 버텨라. 두려움이나 비겁함 따위로 나약해진 종족들에게 용기가 무엇인지 보여라. 진짜 남자라면 용기 있게 영광을 쟁취하거나 영광스럽게 죽어라!"

이에 십자군의 사기가 매우 드높아지자 사라센군은 공격을 망설였다. 바하 알딘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그들은 마치 투견처럼 으르렁거렸다. 기꺼이 죽기까지 싸우겠다는 태도였다. 우리 부대는 그들이 두려웠고, 그들의 무모함에 얼이 빠졌다.

살라딘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이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자 격분했다. 그는 병사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용기를 복돋우려고 했다. 하지만 사라센군이 망설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리처드가 아주 탁월하게 군사를 배치했던 것이다. 맨 앞줄에는 방패로 몸을 가리고 무릎을 꿇은 병사들이 단창 자루를 땅에 세운 채 창날을 위로 치켜세우고 있었다. 이 밀집 대형의 팔랑크스[33] 뒤로는 궁수들이 있었다. 궁수들은 무릎을 꿇은 병사들의 머리 위로 활을 잡고 있었다. 한 쌍으로 조를 이룬 궁수들은, 한 사람이 화살을 먹이고 한 사람이 화살을 쏘는 식으로 끊임없이 화살을 쏘아댈 수 있었다. 십자군은 수적으로는 크게 열세였지만 이 수비진으로 사라센 기병들의 공격을 물리쳤다.

리처드는 적의 공격이 약해질 때마다 보병의 엄호를 받던 기사들을 이끌고 공격에 나섰다.
마침내 리처드는 쇠뇌병들을 앞쪽으로 내보내 사라센 기병대를 향해 일제히 화살을 퍼붓도록 했다. 그러자 창병들은 쇠뇌병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자신들이 앉아 있는 사이로 길을 내주었고, 이어서 공격에 박차를 가한 결과 마침내 전투는 적의 궤멸로 막을 내렸다. 퇴각의 순간 리처드는 15명의 말 탄 기사와 함께 돌격해 그 비할 데 없는 용맹함으로 사라센군을 덮치며 좌우로 칼을 휘둘러 그들의 머리를 쪼개고 사지를 절단냈다.

투르크군이 결국 퇴각을 결정하고 후퇴하자 리처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15명의 기마 기사와 함께 추격, 적을 썰기 시작했다. 게다가 리처드는 사라센군을 향해 자신과 일대일 결투를 할 자는 앞으로 나오라고 외쳤다. 자신의 부하들이 아무도 나서지 못 하자 살라딘은 분노에 차서 몸을 떨었다.

격전을 치르는 중에 리처드가 탄 말이 화살에 맞아 쓰러졌고 리처드는 낙마를 하며 위기의 순간을 맞이했다. 이때 위에서 언급했던 살라딘이 그에게 말 2필을 보내준다.
그렇게 한창 치열하게 전투를 하고 있는 중에 아마 리처드의 말이 쓰러져 죽었던 모양이다. 별안간 투르크 군 한 명이 말 2필을 이끌고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그것은 왕이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 살라딘이 "그토록 용감한 용사가 땅바닥에서 싸워서는 안 될 일"이라며, 날쌘 아랍 말 2필을 보내준 것이었다. 리처드도 똑같은 기백으로 그 말들을 받아들여 싸움을 계속했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말을 선물 받은 리처드는 그 답례로 투르크군을 공격하고, 이런 정신 없는 난전 중에 살라딘의 투르크군은 후미로 침투해 도시를 점령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리처드가 말머리를 돌려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그를 뒤따르던 기사 15명과 함께 적들을 저지했다.

결국 살라딘은 군대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날의 전투로 십자군 측은 단 두 명만이 사망[34]했던 반면에, 살라딘군은 700명 이상이 사망했고 1500+2마리의 말을 잃었다. 참고로 바하 앗 딘은 이날 패배 원인을 살라딘이 너무 관용을 베풀어줘서라고 분석했다.
3.6.7.1. 주의점
다만,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리처드가 아무리 당대에 있어 사탄 소리를 들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고는 하더라도 성을 혼자서 점령할 수는 없다. 유튜브 같은 매체에서 너무 간략하게 소개하다 보니 "단신으로 성을 점령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고 또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믿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 소개되었듯이 전투가 일어나는 중이었고, 80+@명이면 적들은 저게 80명인지 8만 명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리처드가 앞에서 다 썰며 밀고 들어오면 무슬림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가게 되고, 공포는 전염되기 마련이다. 방어가 굳건한 성을 리처드 혼자 돌격해서 점령한 게 결코 아니다.

전근대 시대에 소수의 정예병으로 압도적 다수를 물리친 전투 대부분은 이와 비슷한 진행 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용맹한 정예병이라고 해도 백 명 내외의 병력이 수만 명과 정면으로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하지만 수만 명의 대군 사이로 소수의 정예병이 돌격해 들어오면 당장 그 소수의 정예병과 맞부딪혀 싸우게 되는 인원은 전체 병력 중 극히 일부로 역시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하고, 이 일부 병력이 수백 명~잘해야 천여 명 수준이라면 이 국면에 한해서는 소수의 정예병이 압도적 우세를 보이며 기세를 올리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 때문에 소수 정예병과 충돌한 병력이 붕괴하여 도주하고, 이 모습을 본 주변의 다른 병사들도 함께 패닉에 빠져 도주할 경우 대군 전체의 전열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수십, 수백 배에 이르는 대군이면 패닉에 빠져 도주하지 않고 단순히 자리를 지켜 전열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소수 적군의 공격을 간단히 격퇴하고 역으로 압살할 수 있다. 하지만 전후 맥락이 모두 정리된 자료를 읽어볼 수 있는 후세의 역사책 독자가 아니라 당장 자기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밖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당대 전투에 참가한 병사 입장에서는 이처럼 전략적인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할 만한 정보 자체를 얻을 수가 없으니 주변의 전우들이 우르르 도망치기 시작하면 당연히 '아이고, 이번 전투는 우리가 졌나 보다'하고 따라서 도망칠 수밖에 없는 것.

성 위나 언덕에서 대국 전체를 보고 있는 지휘부라면 그나마 전황 전반을 파악하기 쉽겠지만 전근대 전장에서는 지휘부의 전장 파악 능력 자체도 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부족했고, 설령 전황을 파악한다고 해도 통신 기술의 한계상 부대들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할 수단 역시 극히 제한적이니 전열의 붕괴를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전근대 전장에서 개인의 용맹성이나 용맹한 지휘관이 큰 활약을 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당시 군사 기술의 한계상 지휘부가 전 군에 대한 지휘 통제력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던 점에 기인한 바가 크다.

전근대 군사 제도와 근현대 군사 제도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인 국민개병제의 도입 기반으로 흔히 '총기의 발달과 같은 무기 기술의 진보'를 꼽는 경우가 많지만 '인쇄 기술과 공교육의 도입 등으로 인한 대중의 지식, 교양 수준의 향상' 역시 국민개병제의 성립에 만만찮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전근대 전장에서도 대규모 징집병을 동원하여 병력 우위를 확보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지만, 이런 징집병은 순간적이고 사소한 상황 변화에도 당황하여 패닉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신뢰할 수 없는 병력'이었기에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소수의 정예 병력이 전장의 주역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몇 달만 훈련받으면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도 충분히 상대를 살상할 수 있는 총기를 한 자루씩 쥐어주고, 당장 눈앞에 적이 달려들 때 우르르 도망치다 서로 밟혀 죽는 것보다는 제 자리를 지키고 침착하게 응사하는 쪽이 더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는 것만 가르칠 수 있다면(덤으로 국민국가 개념의 도입으로 스스로 싸워야 할 이유를 부여해주면 더 좋다) 대규모의 징집병 역시 충분히 신뢰 가능하고 강력한 군사적 자원이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수천 년간 전장의 주인공이던 정예 병력의 상징인 기병이 도태되고 대규모 징집군이 전장의 패권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물론 20세기 이후, 총기로 무장한 보병으로는 극복하기 힘든 신개념 무기인 전차가 등장하면서 전장의 주도권 일부가 '다수의 대단위 보병 부대'에서 '기갑 부대 등 소수의 중무장 병력'으로 넘어온 것은 사실이다.

다만 소수 정예군이 잘 싸워 적에게 공포심을 심겨주어 대군을 돈좌시킬 수 있다는 것은 말이 쉬울 뿐이지, 실제로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다수 측의 상당수가 앞의 상황 파악을 못해서 공포감을 가지게 된다면, 소수 측은 상황 파악이 되기에 더욱 정신적인 문제를 겪을 수 있다. 어지간히 훈련된 전문가도 1:2를 꺼리고, 1:3 이상이 되면 배겨내지 못 한다. 하물며 80명으로 수 백은 물론, 수 천도 될 수 있는 적에게 꼬라박으라는데, 정예라 쳐도 80명 쪽에서 모랄빵이 나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결국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지휘관의 능력이고, 이것을 해낸 지휘관은 불세출의 명장, 최소 맹장이 된다.

따라서 리처드 혼자 성을 점령한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리처드가 없었으면 점령할 수 없었을 것 또한 맞는 말이다. 이것은 이순신이 있기에 명량 해전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35]

3.6.8. 평화 협정

살라딘은 야파 전투의 패배로 리처드와 십자군을 쉽게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인정했다. 리처드 입장에서는 필리프 2세의 잉글랜드령 침공으로 인해 한시라도 빨리 유럽에 돌아가고 싶었다. 리처드는 이벨린의 발리앙을 살라딘에게 보내서 "예루살렘을 포기하겠다. 그럼에도 만약 강화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나와 십자군은 여기에 영원히 머무르는 수밖에 없다."라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통첩을 보냈다.

살라딘도 계속 리처드와 십자군이 이곳에 머무는 것이 대단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비록 이슬람 세력을 통합했지만 수백 년간 군웅할거나 다름없던 이슬람 세력은 아직 단단히 통합되었다고는 볼 수 없었고, 이미 54세인 자신이 죽은 뒤 후계자들이 영주들의 병력을 계속 동원해 십자군과 싸우는 것이 새롭게 일으킨 왕조에 크게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살라딘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36]

이로써 리처드는 살라딘과의 강화 회담을 진행하고 1192년 9월 2일 3년 8개월간의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37] 십자군은 아스칼론을 되돌려주고 이슬람 세력의 예루살렘 지배를 인정했다. 대신 살라딘 역시 해안가 기독교 도시들을 침공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으며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기독교도들의 안전을 약속했다. 또한 살라딘은 유럽에서 온 십자군들의 성지 순례를 쾌히 인정했으며, 성묘 교회에서 마지막 미사를 보는 것도 승낙했고, 양쪽 다 무사히 포로들을 반환했다.

리처드는 다른 십자군 병사들이 성지 순례를 하는 도중에도 끝내 성지에 들어가지 않았다.[38] 리처드는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이슬람과의 충돌에 대비해 순례자들을 4무리로 나누고 그 지휘자들에게 어떤 도발 행위에도 대응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 살라딘 또한 기독교 순례자들에 대한 도발 행위를 엄금했으며,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과 그의 부하들이 감시의 눈을 번득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서로 윈윈이라서 조약을 맺었는데 재전을 치른다면 기껏 조약을 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충돌 없이 순례는 끝났다.

이 조약은 실제로 효과가 있어서 26년간이나 지켜지게 된다. 리처드는 10월 9일 아크레에서 배를 타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리처드가 떠나고 5개월 뒤에 살라딘은 병으로 숨을 거둔다.

리처드 지휘하의 십자군은 이슬람 군대에 대해 심각할 정도의 교환비를 보일 뿐만 아니라 2차 십자군을 괴멸시킨 주요 전법인 유인 전술이나 기만 전술이 거의 통하지 않아 살라딘의 고민이 컸고, 심지어 예루살렘으로 진군해오는 리처드를 막기에는 병력이 집결하는 시간이 부족했을 정도로 그의 십자군이 매우 위협적이고 강력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결국 리처드 역시 프랑스군의 영국령 침공이나 존의 반란을 알면서도 무리하게 예루살렘으로 진격 중이었고, 그러다가 영국의 상황이 점점 위험해지니 더 이상 전쟁을 끌고 갈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협상으로 마무리하는 게 양측으로서는 윈윈이었던 셈이다.

리처드는 십자군 원정에서 귀향길에 살라딘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리처드의 부하들이 조금만 더 성지에 머물렀다면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거라고 아쉬워하자, 리처드는 "만약 우리가 계속 남아있었다면 살라딘은 결코 눈을 감지 못 했을 것이다"라고 멋지게 평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리처드는 살라딘을 위대한 왕이라고 말했으며, 의심할 바 없는 이슬람 최고의 지도자라고 말한 적도 있다.

3.7. 포로 생활, 의 반란

3차 십자군 원정 도중 메시나에서 체류했을 때 리처드의 동상이몽의 실체가 밝혀지고 정치적으로 수틀리자 즉시 배신한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음모 또한 드러나게 되자 둘의 우호 관계는 단절되었다. 아크레 함락 직후 귀국한 필리프 2세가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동생 을 사주해 음모를 획책하는 통에 리처드는 살라흐 앗 딘과 결국 결판을 내지 못하고 귀환하게 된다.

지중해에서 난항을 거듭하다 동로마 황제 이사키오스 2세의 제국령에 다다라 순례자로 위장하기도 했다. 아퀼레이아 부근에서 배가 난파하여 매형인 하인리히 사자공의 원조를 받기 위해 극소수의 부하들만 이끌고 비밀리에 유럽 대륙을 횡단했다. 허기와 병에 시달리던 도중, 과거 아크레에서 리처드가 부당하게 모욕을 주었던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의 영지를 지나게 되었고, 빈에서 발각되어 생포되었다. 부하들은 고문을 받았고 리처드는 뒤른슈타인 성으로 이송되어 검을 든 병사들에게 밤낮으로 감시를 받는 신세에 처했다.

1192년 12월, 레오폴드 5세의 상위 주군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 리처드의 신변에 대한 서신을 보냈고 루앙 대주교 쿠탕스의 월터가 프랑스 왕궁에 심어놓은 첩자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교황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만을 파문하였다.

1193년 2월, 리처드는 하인리히 6세에게 호송되어 트리펠스 성에 수감되었다. 호송되는 도중에 리처드는 로버츠브리지의 대수도원장들을 잠시 만날 수 있었고, 주교들은 리처드의 표정이 밝았으며 황제에게 앙갚음을 하기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고 전했다. 리처드는 처음에 하인리히 6세에게 왕의 권위에 걸맞은 예우를 받았지만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사주를 받은 보베 주교의 선동에 의해 얼마 동안 형편없는 대우를 받게 되었으며 말이나 망아지도 옴짝달싹 못 할 무거운 쇳덩이를 몸에 달았다.

3월 23일, 리처드는 슈파이어에서 열린 신성 로마 제국 법정에 기소되었다. 죄목은 시칠리아를 점거하려 한 무력 행위, 키프로스 정복, 코라도 암살 배후였다. 리처드는 "나는 신 바로 아래의 계급에서 태어났다"라고 말하며 하인리히 6세에게 경의를 거부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열렬히 변호하여 법정을 감동시켰고 결투 재판을 제의하였으나 모두가 몸을 사렸다. 그러나 이후 법정에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황제 앞에 무릎을 꿇어 여론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도록 유도하였다. 하인리히 6세는 이탈리아 남부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한 군자금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리처드의 보석금으로 십 오만 마르크를 선고하였고, 이는 잉글랜드 연간 소득의 2-3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이 자리에는 리처드의 오랜 충복이자 십자군 군대를 인도하여 복귀시키는 임무를 맡았던 솔즈베리 주교 허버트 월터가 참석했는데, 리처드는 그의 어눌한 화술에 가려진 유능함과 충성심을 꿰뚫어보고 그가 잉글랜드로 귀환한 즉각 모후의 권한으로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게 하였다.

존은 용병 부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하여 섭정 위원회에게 복종을 요구하였고 여태 퍼뜨렸던 형에 대한 온갖 흉측한 소문들을 다시 일일이 열거하며 설득했다. 심지어 형이 이미 죽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반응이 미온하자 무력 행사를 결정하여 잉글랜드 내전을 벌였다. 그 사이 필리프 2세가[39] 직접 출군하여 노르망디를 침공하고 리처드의 아키텐 봉신들의 충성심을 휩쓸고 있었다.

잉글랜드 대법관 윌리엄 롱챔프가 신성 로마 제국으로 달려가 하인리히 6세와의 협정을 도왔던 덕에 리처드는 독방 감금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트리펠스 성에서 하게나우로 이송되어 이때부터 귀빈에 가까운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 동안 신성 로마 제국의 많은 수뇌부와 친분을 쌓으며 동맹을 다졌고 하인리히 6세의 진짜 목적이 필리프 2세를 복종시키고 동맹을 맺는 것임을 간파하였다. 또 내내 밝은 모습을 보였다.[40] 하지만 보석금을 모으는 시간은 길었고 1193년 겨울에 샹파뉴 백작 부인 마리[41]에게 심정을 표현하는 시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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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포로도 진심을 말하지 않소
능숙히, 슬픔에 빠져 있지 않으면.
하지만 위로를 위해 그는 노래하오.
나는 많은 친우가 있으나 그들의 선물은 적소.
그들에게 불명예가 있으리, 나의 보석금 때문에
두 번의 겨울이 지나도록 포로로 남아 있다면.

나의 부하들과 봉신들은 잘 알고 있소,
잉글랜드, 노르망디, 푸아투와 가스코뉴인들이여,
나는 그리 가난한 동료가 없다는 것을
그들을 나는 돈을 탐내어 감옥에 저버리지 않음을.
질책하려 말하는 것이 아니오만
여전히 나는 포로라네.

확실히 보고 나는 비로소 깨달았소.
망자와 포로는 친우도 가족도 없음을.
그들이 금과 은을 탐내어 나를 저버렸기 때문이오.
내가 오래도록 포로로 남아 죽으면
나의 사람들이 질책받을 것이니,
나를 향한 질책이 많으나 그들을 향한 질책은 더 많으리.

나의 심장이 슬픈 것은 더 이상 놀랍지 않소.
나의 주군이 내 영지를 가혹함에 빠뜨렸기 때문이오.
그가 우리의 맹세를 기억한다면
우리 둘이 함께하였던,
나는 실로 잘 알고 있네 오래도록
포로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을.

앙주인들과 투렌인들은 잘 알고 있소,
부유하고 무사한 이 젊은이들이여,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는 다른 이의 손에서 포로라는 것을.
그들은 나를 많이 사랑했으나,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소.
훌륭한 군대는 더 이상 평야에 존재하지 않소
내가 포로이기 때문이오.

나의 동료들이여, 그들을 나는 사랑했고 사랑하오,
캉의 동료들이여 페르슈의 동료들이여,
나에게 말하게, 노래하게 그들이 믿지 않음을,
그들을 향한 나의 심장이 거짓과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포로로 남아 있을 동안, 그들이 나와 대적한다면,
그들은 몹시 극악무도하오.

백작 부인인 누이여, 그대의 고귀한 영지는
그로부터 보살핌을 받고 보호받을 것이오.
나는 그에게 호소하오.
그리고 그 때문에 나는 포로로 남아 있네.

나는 샤르트르 백작 부인인 누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오.
루이의 모친 말이오.[42]
《어떤 포로도 진심을 말하지 않소 Youtube

결국 리처드는 모후에게 신성 로마 제국으로 와주기를 청했다. 모후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의 아들과 약혼이 결정된 제프리 2세 딸 엘레오노르와 키프로스 군주 이사키오스의 딸을 데리고, 잉글랜드를 쥐어짜 모은 십만 마르크를 가져왔다. 모자는 석방일에 교섭을 하였지만 필리프 2세와 존의 뒷공작 때문에 날짜는 뒤로 미루어졌다. 이에 사자공 하인리히를 비롯해 그간 리처드가 동맹을 다졌던 독일 공작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하인리히 6세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2월 4일, 리처드는 자유를 되찾았다.

필리프 2세는 급히 존에게 서신을 보냈다.
자신의 몸을 돌보도록 하시오. 사탄이 풀려났소.

서신을 받은 즉각 존은 파리로 도주했다.

리처드는 런던으로 입성하여 존의 지지자들을 숙청하고 두 번째 대관식을 치렀다. 그리고 또다시 군자금을 모아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그 틈에 존이 투항했다. 모후가 나서서 달래자 리처드는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사악한 동료들의 꼬임에 넘어간 어린아이일 뿐이다. 너의 조언자는 응당 대가를 치를 것이다."라고 말하며 동생을 공개적으로 용서했다.[43] 존이 에브뢰로 달려가 프랑스 수비대를 죽이고 에브뢰를 형에게 바치자 필리프 2세는 에브뢰를 불바다로 만들어 보복했다.

3.8. 필리프 2세와 전쟁

우리가 아는 리처드라면 여기서 단순히 돌격으로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를 물리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맨앳암즈 석궁병으로 구성된 분견대로 포위망을 돌파해 수비군을 강화시키고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필리프의 보급선을 끊어버려 그를 패퇴시킨다. 단순한 돌격대장이라면 할 수 없는 전략가의 면모였다. 리처드는 여유롭게 베르뇌이에 입성했다.

뒤이어 프레티발에서 필리프 2세의 프랑스 군을 일각에 격파, 필리프 2세가 이끌던 남프랑스 봉신들의 대반란을 압도적으로 제압했다.

후에 런던에서 윌리엄 피츠오스버트의 폭동이 일어나고, 리처드 1세가 섭정으로 임명한 휴버트 월터가 그들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전쟁 중반, 두 왕이 일진일퇴를 반복, 리처드는 결정적인 순간에 발군의 군사적 능력을 증명하여 승기를 휘어잡았다.

필리프 2세의 주요 동맹국이자 대륙의 세력 균형자에 가까운 역할을 한 플랑드르, 툴루즈를 연이어 이탈시키고 신성 로마 제국 황위 계승에도 관여한 리처드의 정치적 행보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 반대로 그의 우수한 정치적 식견과 기민한 외교술을 방증한다. 여기에는 부왕 헨리 2세가 일생을 바쳐 일구어낸 개혁과 축적한 국력이 원동력이 되었고, 리처드가 잉글랜드를 비운 사이 섭정으로 임명한 휴버트 월터의 내정 능력을 십분 발휘하게 했다. 또한, 잉글랜드보다 몇 배의 병력을 동원했던 살라흐 앗 딘도 경악한 리처드의 개인 용력과 별도로 야전 사령관으로서의 역량은 당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수준이었고, 필리프 2세가 권모술수를 동원하여 리처드를 죽음에 이르게 한 상황을 조성하기까지 전면전을 피한 이유는 전력으로도 그리고 국력으로도 열세임을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 후반에 리처드는 압도적인 국력을 바탕으로 한 맞춤형 뇌물 공세를 펼쳐 북프랑스 일부, 플랑드르, 툴루즈에 걸쳐 동맹 연합을 건설하고 필리프 2세가 빼앗은 영지 대부분을 수복하였으며 이 기세에 올라타 선조 바이킹 롤로가 그랬듯 필리프 2세의 본거지인 파리 외곽까지 위협하였다. 궁지에 몰린 필리프 2세가 음모를 총동원해 리처드의 남프랑스 봉신들의 충성심을 휩쓸기 시작했다.

리처드 1세가 패권 다툼에서 정점을 찍은 순간, 리모주 자작 아데마 5세(Adémar V de Limoges)가 필리프 2세의 계략에 걸려들었다.

3.9. 사망

리모주는 아키텐의 북동쪽에 위치한 잉글랜드령과 프랑스간의 중요한 국경 지대로 리처드의 형인 청년왕 헨리 시절부터 툭하면 반란을 일으킨 곳이었다. 당시 리모주 자작이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고 리처드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전략적 요충지기에 리처드가 직접 출군했다.

또한 리모주의 영지에서 로마 제국 시절의 황금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는데, 리모주 자작이 이것을 리처드에게 넘겨주기를 거부하여 리처드가 공격했다는 말이 널리 알려져 있다. 보물을 언급한 출처는 호버든의 연대기, 코제샬의 랄프의 연대기, 마르간의 연대기, 프랑스 궁정의 연대기들이 있고 특히 마르간의 연대기를 제외한 것들은 12세기 후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문헌이다. 다음은 코제샬의 랄프가 라틴어로 쓴 잉글랜드 연대기인데, 보물이 나왔다는 말을 기록한다. 연대기에는 하단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리모주 자작은 필리프와 동맹을 맺고 반기를 들었는데, 리처드는 사순절 기간 필리프와 평화 조약을 맺은 기회를 이용해 군대를 이끌고 가서 공격했다. 게다가 몇몇 사람이 말하기를 막대한 양의 보물이 리모주 자작의 땅에서 발견되어, 이 보물을 넘기라고 했는데 자작이 거절해 더욱 화가 났다는 말도 있다. 마치 사순절 기간에는 무기를 놓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인 양 리처드는 자작의 땅을 불과 칼로 황폐화시켰다.
존 길링엄(런던 정치 경제 대학 역사학 명예 교수), Richard I, 323

리모주는 로마 제국 시절에도 별로 큰 도시도, 중요한 도시도 아니여서 왕이 군대를 끌고 갈 만큼 막대한 보물이 나왔다는 것을 반신반의하는 의견이 있다. 또한 막대한 보물의 존재를 액면 그대로 듣지 않고 리모주 수도사 베흐나의 기록 "잉글랜드 왕의 목적은 리모주 백작의 성과 마을의 파괴였다."에서 보물 언급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리모주가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목적과 필리프가 개입한 권위 문제가 얽힌 전투로 파악하는 의견이 있다.

지도를 참고하면 당시 리모주 자작령은 중요한 곳이다.[44] 당시 프랑스는 크게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북쪽 영토와 남쪽의 툴루즈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그 사이를 잉글랜드령이 반으로 나누고 있었다. 이렇게 프랑스령을 반으로 쪼개는 잉글랜드령이 바로 리모주 자작령과 오베르뉴 백작령, 라 마르셰 백작령[45]이었다.

리모주 자작이 농성한 샬루-샤브롤 성을 공격한 리처드는 1199년 3월 25일 평상복 차림으로 성벽 가까이 거닐며 전선을 살피다가 성에서 날아온 석궁 화살에 목에서 가까운 왼쪽 어깨 부위를 맞았다. 이는 큰 실책이었는데, 전쟁 중의 성벽에는 저격수가 배치되는 터라 가까이 가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게다가 리처드 1세는 갑옷을 입지도 않고 평상복 차림으로 갔으니 자살 행위인 것이다.

아픈 어깨를 감싸고 막사로 돌아온 리처드는 나무 화살을 부러뜨렸다. 그러나 화살촉은 이미 그의 어깨에 깊이 박힌 상태였다. 군의관은 수술을 하여 왕의 피부를 칼로 가르고 상처를 벌린 뒤 쇠붙이를 꺼냈지만 상처가 심하게 곪아 들어갔다.

리처드의 병사들은 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고 모든 수비병들을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수비병 중 왕을 쏜 소년병 구르동(Gourdon)이 리처드의 앞에 끌려가게 되었다. 리처드가 구르동을 보고 "내가 네게 무슨 짓을 했기에 죽이려 하였느냐?"라고 묻자 구르동이 소리쳤다. "당신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나 묻는 겁니까? 당신이 내 아버지와 형제 둘을 죽였습니다. 이제 내 목도 매달겠죠. 그것도 실컷 고문한 다음에 말입니다. 뜻대로 하시오! 하지만 나를 아무리 고문해도 당신 역시 죽을 거요. 내 손으로 당신의 목숨을 끝장낸 것이오!" 리처드는 구르동의 당돌한 모습에 "젊은이, 자네를 용서하겠다. 몸 성히 가거라."라고 말한 뒤 족쇄를 풀고 100실링을 하사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구르동은 리처드의 부하 장군에게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진 다음에 교수형을 당하여 죽었다. 유력자라 해도 죽은 자는 말이 없으므로 유언이 임의로 어겨지는 경우는 흔했고, 충성이란 단순한 복종이 아니라 정치적 이해의 합치이므로 권력자를 죽인 것은 그 부하들에게 충분히 개인적인 원한을 사게 만든다. 또 그 장군은 주군이 구르동의 화살에 맞았을 때 자신이 직접 환부를 헤집으며 화살을 꺼내려 했을 정도로 리처드에게 충성심이 강했다고 한다. 물론 위생적 관점으로 보면 그것이 화가 된 것이기도 하지만.

어깨에 화살을 맞은 부위가 악화되어 화살에 맞은지 열흘만인 1199년 4월 6일에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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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트브로 수도원 무덤 조상
짐은 야심을 성전 기사단에게, 탐욕을 수도자들에게, 그리고 쾌락을 고위 성직자에게 맡기노라.
리처드 1세의 유언

사망 후에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분리되어 각기 다른 곳에 묻혔다. 머리는 샤루 수도원, 심장은 노르망디의 루앙, 유해는 퐁트브로 수도원. 각 지방이 인기 좋았던 왕의 유해를 모시길 원했고, 왕 사후에도 지배권이 있음을 보이려는 퍼포먼스 성격이었다.

4. 정치

리처드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경이로운 군사적인 재능에 비하여 정치력이 전무한 암군에 가까운 인물로 평가되어 왔다. 실제로 그간 한국에 출간된 조금 오래된 영국사 개론서들을 보더라도 리처드 1세에 대한 평가는 싸움만 잘하는 전쟁광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들은 그가 단순히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능력뿐만이 아니라 왕으로서의 능력, 대전략안, 용인술 역시 상당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리처드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잉글랜드에서 관리를 선택하는 능력, 특히 휴버트 월터(Hubert Walter)의 선택이었다. 재판관으로서, 캔터베리의 대주교로서 그리고 교황의 사절로서, 휴버트 월터는 왕과 교회 사이의 균형을 유지시킨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앙주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잉글랜드에서도 리처드의 오랜 부재 기간 중 윌터의 감독하에 중앙 정부의 효율적인 통치 기구가 발달하였다. 신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더 많은 세금을 의미하였지만, 전쟁의 재정적 부담 때문에 앙주 제국이 경제적으로 붕괴 직전에 놓여 있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옥스퍼드 영국사(The Oxford History of Britain)』 中

유능한 기사로 알려진 윌리엄 마셜을 기용하거나 캔터베리 대주교 휴버트 월터를 대법원장을 기용하고 잉글랜드의 재정을 알아서도 돌아가게 할 정도로 인사 배치는 무질서한 매관매직이 아니었다.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리처드 1세는 대단한 인텔리였고, 냉정한 비즈니스맨 같은 면모도 가지고 있는 인물로 재평가를 받고 있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의 포로 시절, 신세를 한탄하지만 않고 인맥을 다지기도 했다. 또한 리처드가 조직한 잉글랜드 정부는 리처드가 런던 입성 후 몇 개월 뒤 프랑스와의 전쟁 선포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그간 일반에 알려졌던 영 형편없는 수준이 아니었다. 여기에 그가 십자군 전쟁을 나가있는 동안 그의 어머니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아키텐의 군주이자 잉글랜드 왕의 대리인으로서 내정 부분을 상당수 처리해줬다는 것과 종군 후에 휴버트 월터라는 걸출한 신하를 기용한 것도 플러스 요인.

5. 이교도와 외국인에 대한 태도

리처드는 애초에 이슬람 교도에 대해 증오심을 갖던 인물은 아니었다. 심지어 리처드는 여동생인 조안나[47]을 화평 사절로 온 살라딘의 동생인 알 아딜 1세[48]과 결혼시켜 예루살렘의 공동 통치자로 삼으려고 했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분쟁이 사라지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허나 이 계획은 당연하게도 가톨릭 성직자들의 반대와 더불어 "날 이슬람 교도에게 시집 보낼 생각이냐?"라고 열받은 여동생 조안나의 반대에 직면하게 되자 리처드는 알 아딜에게 상황이 이러니 당신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당연히 살라딘의 동생도 개종할 리는 없으니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종교적 신념을 그리 중시하지는 않은 듯하다.

또한 리처드는 평화 협상에 따라온 알 아딜의 아들인 알 카밀[49]을 기사로 임명하기도 했다.[출처][51] 여동생을 이슬람 교도에 시집 보내려던 계획이나, 적의 조카를 기사로 임명하는 등 이러한 행동들은 리처드가 이슬람 교도에 대해 맹목적인 증오심을 갖고 있던 인물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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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국회 의사당 앞에 세워진 리처드의 기마상

전쟁에 관해서는 명실상부한 당대의 최강자였다. 무인으로서의 능력이 대단했다. 그러한 용력이 발휘될 때마다 적군과 아군 전체를 압도시키는 거대한 카리스마가 내뿜어졌다고 전해진다. 중국 역사에도 초인적인 영웅담을 자랑하는 전투가 많이 전해져 내려오지만 실제로는 중국 특유의 과장이 많이 섞인 영웅담에 가깝고 정사와 연의를 구분하지 못한 일반인들의 착각이 많은 데에 반해 리처드는 유럽 측의 기록과 중동 측의 기록이 교차검증된, 적군들도 인정한 괴물 같은 전투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흔히 그의 라이벌이자 호적수로 손꼽히는 살라딘 또한 이슬람 세력을 통합하고 하틴 전투에서 기독교군을 궤멸시켜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키는 등 매우 비범한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으나, 그런 살라딘도 전략적으로 월등히 유리한 상황에서조차 리처드를 상대로는 단 한 번도 이기지 못 했다. 비단 십자군 전쟁만이 아니라 잉글랜드에서의 권력 투쟁, 메시나 전투, 키프로스 전투 등은 물론이고, 나중에 프랑스의 왕 필리프와의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52]

또한 리처드 1세의 무용담을 보면 단순한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전술적 판단과 일신의 무용뿐만 아니라 전략적인 소양 역시 매우 뛰어난 인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일단 당시 누구보다도 보급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53] 덕분에 그의 군대는 언제나 충분한 보급을 받을 수 있었으며, 부상병을 무리하게 참전시키지 않고 회향시켜 전비를 아끼고 사기를 유지하고자 했다. 아르수프 전투와 그 전후의 진격 당시에도 리처드 1세는 온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태에서 무모한 내륙 진격을 시도하지 않고 한쪽 측면은 십자군에 참여한 도시 국가들의 해군으로 보호받게끔 해안선을 따라 진격하였으며, 해군의 함선에 보급품을 싣고 측면 엄호를 받아가면서 움직였다. 이처럼 리처드는 일신의 무예와 용맹도 대단했지만, 그뿐 아니라 전략·전술적인 안목에 있어서도 당대에는 따를 이가 없었던 천재적인 군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학자 토머스 매든은 리처드 1세를 중세 유럽의 군주들 중에서 최고의 전략가로 평하였다. 그러면서도 그 알렉산드로스 3세와 비교되는 친정, 선봉, 무패를 기록했으니 얼마나 비범한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다. 살라딘이 전술적 승리가 아닌 전략적 승리를 한 것도 재미있게 비교해볼 수 있다.

특히, 당대 인물들이 흔히 성지라는 명성에 눈이 어두워 예루살렘 공략에만 집중했으나, 리처드는 사실상 항구가 없는 예루살렘을 기독교 세력이 지배한다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 때문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먼저 살라딘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다른 십자군 지휘관들의 반대[54] 및 프랑스 왕의 영국령 침범으로 인해 이집트 공략은 시행할 수 없었으나, 리처드의 계획이 전략적으로 올바른 판단이라는 것이 후세의 사가들의 공통된 의견이기도 하다. 리처드는 이집트 공략이 무산되자 과감하게도 예루살렘 점령을 포기하고 살라딘과 협정을 맺는 등의 결단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필리프 2세에게 잃어버린 영지들을 수복하면서 샤토 가야르라는 성을 쌓았는데 워낙에 위치가 절묘해서[55][56] 공성전의 대가인 그 필리프 2세도 리처드 1세 사후 6천의 병력으로 6개월간의 공성전으로 이 성을 함락시키기 전에는 노르망디 지역에 손을 뻗을 수 없었다.[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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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토 가야르(Château Gaillard)

당시에도 리처드와 3차 십자군의 무용담은 유럽에 널리 퍼졌고, 특히 잉글랜드에서는 대단히 인기가 높았다. 나중에 독일의 하인리히 6세에 사로잡힌 리처드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서 엄청난 세금이 거두어졌음에도 오히려 잉글랜드에서는 영웅적인 왕으로서 평가가 더 높아졌다. 그러나 이 인기는 1198년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해서 새로운 세금을 거두자 낮아지게 된다.

이로 인한 당시의 기록은 인기가 얼마나 낮아졌는지 말해준다.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의 행로를 밟은 자들이 얼마나 끊임없이 헨리 왕의 사악함에 대해 떠들었고, 그에 대해 좋은 소리가 나오는 것을 참지 못했던가. 그 이후로도 하루하루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던 이들은 이해심이 넓어졌다. 사실 우리가 겪고 있는 불행들은 헨리 왕의 훌륭한 치적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비록 살아 있는 동안 많은 이들의 미움을 받았으나 지금은 온 사방에서 뛰어나고 유익한 통치자로 인정받고 있다.
뉴버그의 윌리엄

7. 사적인 면

7.1. 외모 · 육체적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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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앙 대성당 무덤 조상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을 무렵인 1189년에 32세의 리처드에 대하여 리처드 왕의 편력기의 작가와 뉴버그의 윌리엄의 기록이 판이한데 존 길링엄 교수에 따르면 뉴버그의 윌리엄 기록에 신빙성이 부여된다. (1) 리처드 왕의 편력기는 리처드 1세가 사망하고 18년이 지난 1217-18년에 전설화를 거쳐서 쓰였기에 회의적이며. (2) 잉글랜드의 성직자로서 뉴버그의 윌리엄의 기록은 리처드의 생전에 쓰였으며 코제샬의 랄프의 기록과 교차 검증이 된다는 점이 근거가 된다.[58]
웨일스의 제럴드는 리처드가 "평균보다 키가 꽤 크다"라고 했는데 2m에 가까운 엄청난 장신으로 형인 청년왕 헨리와 키가 닮았으며 부왕 헨리 2세는 키가 중간이었던 반면 엘레오노르 다키텐은 키가 비범했기 때문에 형제는 모친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당시 증언을 종합해보면 '머리색이 아주 훌륭한 붉은색이었던' 부왕 헨리 2세가 '안색이 붉고 거무스름한 데에다 주근깨투성이었고 회색 눈'의 소유자였기에 리처드도 이런 요소를 물려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59] 그러나 형제들인 청년왕 헨리, 제프리 2세뿐만 아니라 존 왕 또한 미남이라는 동시대의 증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처드는 그와 같은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음유시인들도 그의 외모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당대의 이상적 남성상은 전통적인 남성상과 더불어 궁정 연애의 유행에 따라 새롭게 등장한 미덕이 강조되었고, 예법에 능숙하거나 외모가 잘생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리처드는 후자의 칭송의 수혜자는 되지 못 했다.

대중역사서의 경우에는 리처드의 외모에 대해서 리처드 왕의 편력기의 저자, 뉴버그의 윌리엄, 코제샬의 랄프의 기록들과 보충적으로 부친인 헨리 2세의 외모에 대한 증언들이 짜깁기된다. 가령 이런 식이다. "Richard was said to be very attractive; his hair was between red and blond, and he was light-eyed with a pale complexion.(리처드는 아주 매력적이었다고 전해지는데, 머리색은 붉은색과 금색의 중간이었고 눈은 회색이고, 안색은 창백했다고 한다.)"

역사학자도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나 가문이 있기 마련이지만 대중역사가들은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국내에서 리처드 1세와 관련하여 주로 인용되는 앨리슨 위어의 저서《아키텐의 엘레오노르》에서 앨리슨은 " 존 왕이 유사시에는 부왕이나 리처드 형만큼 정력적이고 강인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전쟁도 싫어했고, 마상창시합에 나간 경험도 없었던 것에 비하면, 군 지휘관으로서도 제법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필리프 2세는 앙주 가문 사람들 같은 매력이 없고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럽고 소심했으며 위생 관념마저 엉망이고 작은 키에 평범한 사람이었고 군사 기술이 뛰어나지 못했다"라고 인물과 가문에 대한 주관적인 편파를 드러냈다. 이런 대중역사가들은 역사적 사실의 객관적 전달을 표방하여 이런 서술을 조작하고 믿으며 독자들에게 확산시키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연구 중심의 사학자들이 개인적 면모야 둘째로 치고 군사적 평가에 대해 이렇게 쓰면 스스로 전문성을 훼손하는 것이라 인용률이 날아가고 적들의 먹잇감이 된다.

'힘으로 당해낼 자 없던 천하장사'였다고 한다. 그와 유사하게 모친의 외숙부 중에 안티오키아 공작 레몽은 괴력의 소유자로 생전 헤라클레스로 불렸고 맨손으로 철봉을 구부리고 타고 있는 전투마를 허벅지 힘만으로도 다스릴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리처드 1세의 신체적 소질에 대해 중세 전문가라고 하는 제임스 브런디지의 평가는 이러하다.
리처드는 말년에 접어들어 신체 활동을 줄였던 것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혈기왕성한 힘과 근육계를 평생 유지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극도로 뚱뚱해졌다. 생의 대부분에 걸쳐 과격한 신체 활동으로 향상된 타고난 육체적 힘과 결합하여, 그는 일련의 잘 연마된 반사신경 또한 소유했다. 이 재능이 젊은 시절에 그가 굴지의 전사로 등극하고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바탕이 되었다.
J.A. Brundage, Richard Lion Heart (New York, 1974), p. 250

역사가들은 리처드의 건강 상태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만 보인 것은 아니었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의 저자는 증상에 대해 적지 않았지만 활동에 차질을 빚을 정도로 병을 앓기도 했다고 회고한다. 뉴버그의 윌리엄은 리처드가 비만이 심했고 종종 오한이 있었으며 몸에 백 개가 넘는 궤양들이 더덕더덕 자라 있었다고 적었다.[60]

하지만 생존력은 좋았다. 왜냐면 당시 십자군의 건강을 위협했던 것은 (1) 영양 결핍으로 인한 피로감, 괴혈병, 면역력 저하 (2) 과밀집과 비위생 (3) 시신에 오염된 식수 (4) 습한 날씨, 홍수, 잦고 급격한 온도 변화 (5) 열, 전신의 오한, 식은땀과 살갖이 벗겨지고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이 빠지는 증상을 동반한 말라리아가 창궐하고 있었다. 리처드 1세는 이 악조건 속에서도 생존하여 십자군 지휘를 강행하여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 또한 전염병으로 머리카락을 잃기도 했지만 호버든의 로저는 "머리카락을 잃었으나 … 곧 회복되었다."(capillos suos deposuerunt … uterque regum convaluit.)라고 증언했다.

7.2. 성품

그의 생전 별칭은 라이언하트(The Lionheart)가 아니라 남프랑스 음유시인인 베르트랑 드 보른이 지어준 오크 에 노(Oc e no), 곧 예, 아니오 였다. 이는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말투가 간단명료하다는 것, 표리부동하고 믿을 수 없는 위인이라는 뜻이었다.

반란을 제압할 때 유별나게 잔인한 면모가 돋보였다. 앙주 가문의 기질을 강하게 물려받아 무언가에 집착할 때에는 건강을 해칠 정도로 빠져들었으며 성미가 급하고 유전적인 사디스트에 표독하고 난폭한 성정으로 당시 악명을 떨쳤다. 형제들과 대조적으로 인기가 없기까지 하여 아키텐의 귀족들은 공작 자리에 청년왕 헨리가 앉기를 소원했다고 전해진다. 웨일스의 제럴드에 의하면 "잔학성 때문에 대체로 지독하게 미움받았다"라고 하며 틸버리의 저베이스는 "형 헨리는 모두에게 친절하고 얼굴이 잘생기고 겸손하고 상냥했다. 그에 비해 동생 리처드는 영 딴판이라 거의 모두가 몹시 미워했다."라고 적었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했고 "모욕을 당하면 절대 못 참고 기어이 달려가 명예를 회복하고 왔다"라고 한다. 성격적인 측면에서 어두운 부분을 다룰 때 동시대인인 호버든의 로저는 "모두에게 악질이었다. 친구에게는 더 악질이었고, 그 자신에게는 가장 악질이었다."라고 했으며, 하물며 코제샬의 랄프는 "죄인들의 거대한 집단 중 하나"라고 적었다. 사제 뇌이의 풀크는 리처드가 오만, 탐욕, 욕정이라는 추잡한 세 딸을 세상에 내놓은 아비라며 손가락질을 한 적도 있었다. 이 말에 리처드는 냉소적으로 응수했다고 한다. "나의 딸 오만은 템플기사단에, 딸 탐욕은 시토회에, 딸 욕정은 수녀원에 보내겠다."

감언이설 아첨에 약했다고 한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의 작가도 이런 면모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사냥을 즐겼고 형 헨리와는 달리 마상창시합보다 실제 전쟁에 나가 경험을 쌓는 편을 더 선호했다.[61] 디케토의 랄프는 리처드를 '전쟁의 신 마르스의 일에 헌신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왜 우리가 이처럼 위대한 사람을 칭송하기 위해 노력을 들일 필요가 있는가? 그는 군더더기 찬양이 필요없는 사람이다. 감히 누구도 넘보지 못 할 군계일학이다."

여러 방면의 재능의 소유자였다. 또한 부왕 헨리 2세처럼 능글맞고 유머 감각이 탁월했는데 '그는 모든 걸 농담거리로 삼았고 듣는 사람들이 걷잡을 수 없이 웃어댈 지경이었다.'
음악을 비롯한 예술에 관심이 깊었다. 남프랑스에서 트루바두르로서 명성을 누렸고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성가대를 직접 지휘하고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모후를 닮아 심미안이 매우 높았다. 사치품과 화려한 옷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고 항상 최고급으로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으로 부를 과시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3차 십자군 원정 중에는 규율을 어기면서까지 순례자이기보다 기사와 세속 군주로서 옷가게에서 옷들을 쓸어담는 행동으로 취향에 걸맞은 사치품에 대한 욕망을 서슴없이 분출하였고 특히나 키프로스에서는 지나치게 꾸미고 다녔다고 한다.
왕이 위풍당당한 차림새로 나중에 나타났다. 신발 뒤축에 황금 박차가 달렸고 금실을 섞어서 짠 장밋빛 비단의 튜닉을 입고 그 위에 망토를 걸쳤다. 망토에는 작은 반달 모양이 늘어서 있고, 순은으로 하얗게 빛나고, 태양처럼 빛나는 구체가 빽빽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이렇게 치장하고 왕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비단결 같은 크로스벨트에 금빛 칼자루의 용맹한 검을 차고 있었다. 그는 머리에 다양한 새와 짐승의 모양을 금실로 훌륭하게 수놓은 진홍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손에는 지휘봉을 들고 그것을 사용하는 모든 행동들을 통해서 자신이 뛰어난 기사임을 보여주었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Itinerary of King Richard)》

7.3. 섹슈얼리티

젊은 시절부터 색정광 명성으로 견줄 자가 없었다. 현대 사학자들은 리처드가 헤도니스트, 변덕스러운 색골, 성충동 괴물이라고 말한다.
양성애자 의혹이 있었다. 상위 주군이자 절세 미남이었던 프랑스 왕 필리프 2세[62] 동성 연인이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이 의혹은 학계에서 결코 다수의 지지를 받지 않는다.
리처드 1세에 대해 가장 권위 있는 평전을 집필한 존 길링엄은 상단의 근거로 리처드와 필리프 2세가 동성 연인이었을 것이란 주장에 회의적이며 리처드를 이성애자로 본다. 중세사 교수 진 플로리는 리처드를 양성애자로 판단하지만 필리프 2세와 동성 연인까진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반면 필리프 2세에 대해 가장 권위 있는 평전을 집필한 존 볼드윈은 필리프 2세의 생애 동안 성관계 상대가 최소 몇 명인지에 주목하여 두 번째 상대를 1189~90년 리처드 1세로 제시했다.[64]

그렇다고 형제들 중에서 처음부터 필리프 2세와 가장 절친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들이 본격적으로 우정을 형성한 건 청년왕 헨리와 제프리 2세가 죽고 나서야 리처드만이 아니라 필리프 2세 입장에서도 정치적 이해가 다분히 발생할 때였다. 다만 리처드가 메시나에서 체류했을 때 그 성정에 재력과 권위에도 불구하고 필리프 2세의 무리한 요구를 따르고 상위 주군 대접을 꼬박꼬박 해준 걸 생각하면 리처드는 우정을 진심으로 여기는 걸 넘어 심취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상대가 신의를 지키는 건 그 자신에게 이로울 때뿐이었다.

하지만 십자군에서 사이가 나빠진 뒤에 리처드는 신임하던 여론 관리자인 베르트랑 드 보른을 이용하여 필리프 2세를 추악한 언사로 공격했다. 심지어 trop mols(very soft)라고 짓궂게 놀리기도 했다.[65]

십자군에서 귀환했던 뒤로는 성행위를 할 때 악마에 씌인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당시대의 잉글랜드 사가는 리처드 1세의 측근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돌았던 소문을 거론했다. "악마가 리처드 왕과 동행하여 성지에서 귀환했다. 악마가 왕의 직속 수행원이 되었다. 그리고 악마가 종종 왕의 침실에 존재한다."[66]

참고로 리처드는 십자군에서 귀환했던 뒤로 성체성사를 받지 않았던 기이한 행동에 대해 고해하기도 했다. "그동안 성체를 거부한 이유는 내 심장이 프랑스 왕을 용서할 수 없어서였다."(He confessed that he refused the sacraments for seven years because his heart could not forgive king of France.)

미소년을 탐하느라 궁정을 동성애 소굴로 만들었단 지탄을 받았던 윌리엄 롱챔프와 오랜 절친이었으며 잉글랜드 내 나쁜 평판에도 굴하지 않고 대법관으로 임명하여 섭정위원회의 중추를 맡겼던 것을 보면 최소 친분이나 인사 검증에 있어서 미소년과의 관계를 터부시하지는 않은 듯 하다.[67]

슬하에 서자 한 명뿐이다. 1180년대 초에 미상의 여인에게 얻게 되어 이름을 필리프로 지었다.[68] 누나 마틸다와 하인리히 사자공의 차남인 조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가 리처드를 빼닮았기에 친아들처럼 대하고 아키텐 공작으로 서임하기도 했다.

7.4. 결혼 생활

1192년 5월 12일, 리처드는 3차 십자군 원정길에 키프로스에서 나바라 왕 안초 6세의 장녀인 나바라의 베렝겔라와 정략 결혼했다. 이는 원정 기간 남프랑스를 비울 동안 전쟁이 다발할 가능성이 농후한 툴루즈 백작령과 근접한 국경에서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나바라 왕국의 역할이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견지에서 기존의 우호를 발전시켜 전략적인 책임 분담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또한 원정 도중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정치적 문제로 인해 34살이 되도록 결혼이 지연된 탓에 없었던 적자의 생산은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체결했던 1191년 3월 메시나 협약의 조항 '리처드가 아내에게서 적자를 얻으면 분쟁 지역인 지조르와 벡쌍도 얻는 것'과 결부된 중대 사안이었다. 하지만 1190년 10월에 필리프 2세, 탕크레드와의 협상 결과로서 자신의 후계자를 동생 제프리 2세 아들 아르튀르 1세로 지명했던 것과 분명 어긋난 것이었다.

베렝겔라는 무척 아름답고 용감하고 교양 있고 학식이 뛰어난 여인으로 모든 면에서 리처드와 어울렸으며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여겨진다. 반면 리처드는 아내에게 일절 무관심하였고 1192년 9월에 팔레스타인에서 헤어지고 포로에서 풀려나 귀국한 뒤에도 아내를 찾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리처드 1세가 포로에서 풀려나는 대가로 하인리히 6세는 리처드의 조카 오토 등을 비롯한 많은 볼모를 요구했고 베렝겔라의 형제도 포함되었다. 리처드는 풀려난 모든 볼모들에게 보답했지만 베렝겔라의 형제에게는 어떠한 사례도 하지 않았다.

1195년 4월에 재회하여 화해하고 르망 근처에서 동거할 집도 짓기 시작했지만 1195년 크리스마스 연회를 마지막으로 남프랑스에서 지내던 아내와 결코 만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리처드는 이미 1180년 초에 사생아 필리프를 얻었기에 현대에 베렝겔라의 불임설이 제기되었으나 그럼에도 리처드가 이혼 시도를 했다는 정황이 밝혀지지 않아 연유가 뭐든 적자 생산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믿어진다.

대외적으로는 처남인 나바라 왕 안초 7세의 앙주 제국에 대한 적대 정책 전환으로 말미암아, 안초 6세의 정책이었던 군사적 협력의 기대는 불발된 지 오래였다. 1196년 봄에 안초 7세는 리처드 1세와 전쟁을 벌이게 될 시 지원을 받기로 남프랑스 자작들에게 서약을 받아내기도 했다.

참고로 리처드와 안초가 왕자 신분으로 1177년에 팜플로나에서 마상창시합에 참여하여 친분을 맺었다는 이야기의 출처는《History of the Counts of Poitier》이며 실제 기록에 근거한 것이 아닌 당시 유행한 낭만주의적 역사 서술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69] 무엇보다도 리처드가 안초 7세와 친분을 맺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바라 왕국과 근접한 국경 지대에서 군사적 긴장을 완화할 조치로 리처드는 조카인 샹파뉴 백작 티보 3세와 베렝겔라의 여동생 블랑카의 혼담을 적극 추진했고 동시에 티보 3세가 프랑스 왕국을 대항하는 동맹에 동참하는 것을 압박하는 효과를 끌어냈다.

리처드는 여전히 아내에게 무관심했지만 아내의 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콘월의 수익을 베렝겔라에게 주었다는 것도 불확실했던 것도 모자라 외교적 고립에 처한 안초 7세에게 재차 외교적 압력을 가하여 아내의 유일한 수입원인 지참금의 수익마저 통째로 빼앗았다. 남편 생애 내내 아내는 시어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에게 반강제로 배우자로서의 모든 수입을 양보하며 지냈고 남편의 임종에도 소환되지 않았으며 장례식에도 초대를 받지 못했다.

목격자는 베렝겔라가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크게 애도한 뒤 "놀라운 방법으로 슬픔을 털어냈다"라고 회고한다. 아내는 남편 생전에 남편에게 배우자로서 어떤 수입도 요구하지 못했으나 사후에 즉각 존 왕을 찾아가 과부산을 요구하였다. 존 왕은 지급을 미루었고 헨리 3세에 이르어 지급되었다.

과부가 된 베렝겔라는 여동생인 샹파뉴 백작 부인 블랑카에게 의탁했다. 그러나 샹파뉴 백작 티보 3세가 요절하여 블랑카도 과부가 되었다. 필리프 2세의 지지 없이는 블랑카가 샹파뉴 섭정 자리를 유지할 수 없었던 정세에서 필리프 2세는 두 과부를 보호하고 이들에게 가해지는 위협을 엄중히 응징했다고 한다.

한편 이후 흥미롭게도 '아름답고 매우 지적인' 나바라의 블랑카가 필리프 2세와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이 돌았다.[70] 안초 7세와 필리프 2세가 친분을 맺었다는 기록은 없었으나 블랑카는 가족 구성원을 묘사할 때 프랑스 왕국과 나바라 왕국의 지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두 왕을 함께 옆에 두어 묘사하길 좋아했으며, 정치적 문제 외에서도 카페 가문과의 연결을 자랑했다고 한다.

8. 이야깃거리

리처드 왕은 노새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며 로빈에게 말했다. "정말, 그대는 주위에 훌륭한 젊은이들을 많이 두었군, 로빈. 내 생각에는 리처드 왕조차도 이런 근위대는 몹시 마음에 들어할 것이네." 그러자 로빈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이 사람들이 내 부하들 전부는 아니오. 지금 50여 명 정도는 내 오른팔 리틀 존과 함께 다른 볼일을 보러 나가 있고. 하지만, 리처드 왕에 대해서는, 내 말해 두는데, 그분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피를 마치 물처럼 하나도 아깝지 않게 쏟아 붓지 않을 사람이 우리 중에는 단 한 사람도 없소. 당신들 성직자들은 우리의 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소. 하지만 우리 용사들은 우리의 행동과 꼭 닮은 그분의 용감한 위업 때문에 그분을 충심으로 좋아한다오."
『로빈 후드의 모험』
* 현재의 영국에서는 여러 가지 무훈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대단히 인기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로빈 후드 민담에서는 로빈 후드의 든든한 조력자로 항상 등장한다. 나라의 국정을 잘 돌보지 않았던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에까지 이렇게 사랑받는 인물도 많지 않다. 무엇보다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리처드의 무용담은 아직도 자국민들의 자랑거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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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대중문화에서

이 시대를 다룬 이야기들을 보면 리처드의 인생이 워낙 드라마틱하고 기사의 로망을 그대로 구현한 인물이라서인지 '간사한 국왕 필리프 2세[75]에 맞서는 고결한 기사 리처드 1세'의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물론 국왕으로서의 역량으로 둘을 비교하면 명군이라 할 수 있는 필리프에 비해 리처드가 많이 부족하다. 뭔가 현대물에서 각색된 삼총사에서의 리슐리외 버킹엄 공작과 비슷한 구도라고 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프랑스와 영국 인물의 관계라는 점도 비슷하다.


[1] 역대 잉글랜드 왕국 국왕들 중 가장 최장신이다. [2] Merry-Joseph Blondel, <Richard the Lionheart, King of England>, 170*114cm, 1841 [3] 미술사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중세 당대의 그림체가 아니라 르네상스 이후의 그림체임을 알 수 있다. 중세 당대의 초상화는 이것, #2 생전에 그려진 초상화는 아니지만 중세 당대의 화풍이다. [4] 브르타뉴의 공작은 아니었으나 브르타뉴 공작의 주군이기는 했는데, 브르타뉴 여공작 콩스탕스가 아직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브르타뉴가 플랜태저넷 가문에게 완전히 들어온 것은 그가 죽은 이후이다. 근데 또 웃기게도 브르타뉴 공작령은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국에 속했다(…) [5] 정확히는 앵글로색슨족이 사용하던 중세 영어이다. [6] 유년 시절 브리튼 섬 노르망디에 머무르며 앵글로-노르만 프랑스어를 배웠을 것이고, 청년기에 아키텐으로 넘어가서 꽤 머물렀으니 남부 프랑스어도 사용했을 것이다. [7] 게다가 당시 잉글랜드의 지배 계급의 언어 자체가 프랑스어였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바이킹계 프랑스인인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지배 계급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8] 역사가이기도 하다. [9] 오히려 프랑스 중세사학자들은 리처드를 프랑스인으로 명명하길 꺼리는 편이다. 다만 이것은 중세 프랑스가 일드프랑스 중심의 왕실 직할령이라는 성격이 강하며 일드프랑스를 중심으로 재편된 근대 프랑스와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지, 리처드의 잉글랜드적 정체성이 앙주와 아키텐보다 크다는 것은 아니다. [10] 이를 보면 흥미가 없던 것뿐이지, 아서 왕 전설에 관해서는 장사 해먹을 수 있을 만큼 어느 정도는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설 속의 성검일지도 모르는 유물을 비싼 값에 팔아 치웠으니. [11] 정확하게는 리처드의 동생인 의 후손이다. [12] 조지 1세의 경우 54세라는 늘그막에 국왕에 올랐기에 영국이라는 나라에 적응하고 신경쓰는 게 힘들기도 했다. [13] 흔히 백년전쟁을 계기로 잉글랜드인의 정체성이 깨어났다고 알려져 있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혈통이든 문화든 언어든 다방면에서 서서히 노르만족이 아닌 잉글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수립해나가고 있었다. 물론 리처드 1세의 시대까진 노르만족의 정체성이 강했다. 노르망디 본토의 노르만족이 잉글랜드의 노르만족 지배층에 대해 동족 의식이 희석되고 본격적으로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시기부터 시작된 일이다. [14] 필리프 2세의 이복누나.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인 카스티야 공주 콩스탕스 사이에서 태어난 차녀이다. 예비 시아버지인 헨리 2세와 간음을 하고 아들까지 낳았다는 의혹이 짙고 헨리 2세가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이혼하려 했을 때 아델을 사랑하여 새살림을 차리려 했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흥미롭게도 헨리 2세의 증손자인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가장 사랑했던 왕비인 카스티야 공주 엘레오노르는 아델의 직계 후손이다. [15] 이 사이트에서 서술된 바에 의하면 리처드 본인은 엄중히 처벌하려고 했으나 십자군 원정을 떠난 직후 내부에서 적당히 무마했다는 뉘앙스다. [16] 이를 간과하면 이렇게 된다. [17] 운에 올인하면 기의 하틴 전투가 된다. [18] 일사병이나 열사병이라는 설도 있다. [19] 병력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지키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20]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면 빼도박도 못하는 포로 학살이 맞지만, 이유 없는 학살조차 일상다반사로 일어나던 중세의 전쟁에서 합의가 지켜지지 않아 처형했다는 것은 당시의 전쟁 양상으로 보았을 때 특별히 잔인한 행동이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다. 때문에 이 사건을 두고 살라딘도 리처드를 비난하거나 경멸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슬람 쪽도 포로 학살을 흔하게 행했으니까. [21] 성전 기사단의 기사단장인 제라르 드 리드포드만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처형을 면하고 풀려났다가 아크레 공성전에서 죽는다. [22] 보병의 수는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는지 기록이 없는데, 병력 구성상 말을 탄 기사가 230명이나 포로로 잡혔으면 말 없는 보병은 그 10배 이상 잡혔다고 봐야 한다. 이들 중 기독교로 개종한 투르크 용병은 모두 죽였고 나머지 병사들은 다 노예로 팔렸으니 리처드가 학살한 3천 명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기독교 측에서 이를 두고 조금도 비난하지 않은 이유는, 이교도 포로를 학살하는 것은 당시 관점에서 전혀 잔인한 행동이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23] 옛날 팔레스타인 서남부에 살며 이스라엘 민족과 끊임없이 충돌했던 민족. 성경 골리앗이 필리스티아 사람이다. [24] 기원전 167년,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종교적 박해에 대항해 일어난 마카베오 전쟁의 지도자. 본명은 "유다"이고, 쇠망치라는 뜻의 마카베오는 그의 별명이다. [25] 성 조지는 잉글랜드의 수호성인이었다. 원래 중세 유럽 국가의 군대는 전투 직전에 자기 나라를 지켜주는 수호성인의 이름을 외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잉글랜드 군대는 자기 나라의 수호성인인 성 조지의 이름을 전투 직전에 구호로 외쳤고 그래서 백년전쟁을 다룬 영화인 더 킹: 헨리 5세를 보면 잉글랜드 군대가 프랑스 군대와의 전투를 앞두고 "성 조지와 국왕 폐하를 위하여!"라는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비슷한 사례로 프랑스 군대는 프랑스의 수호성인인 성 드니의 이름이 들어간 "몽주아 생드니!"를 전투 직전에 구호로 외쳤고, 스페인 군대는 스페인의 수호성인인 성 야곱의 이름이 들어간 "산티아고!"를 전투 직전에 구호로 외쳤다. [26] 바하 앗딘이 쓴 살라딘의 일대기. 원 제목은 "al-Nawādir al-Sultaniyya wa'l-Maḥāsin al-Yūsufiyya"로 직역하면 "술탄의 일화와 유수프의 공덕(Sultany Anecdotes and Josephly Virtues)". [27] 십자군 원정을 온 병력들 + 기존에 예루살렘 지역 일대에 위치한 기독교 병력들. [28] 후에 이 일을 들은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인 보두앵 2세는 이들을 불러서 혼내고 이후는 적어도 십자군끼리 싸우는 일은 없었다. 1108년 10월의 일로 알레포 영주 라드완, 안티오크의 탄크레디와 모술 영주 자왈리, 에데사의 조슬랭 간의 전투였다. 전투 자체는 라드완과 탄크레디 연합이 승리했지만, 가뜩이나 1차 십자군 대다수가 유럽에 귀환해서 고질적인 병력 부족에 시달리던 보두앵 2세는 십자군끼리 전투를 벌였다는 소식에 격노했다. 어쨌든 보두앵 2세의 중재로 탄크레디와 조슬랭은 화해했다. 이렇듯 이 시절 이슬람 세력은 일치단결해 십자군과 맞서는 건 고사하고 자기들끼리 영토 싸움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29] 엄밀히 말하면 살라딘도 누르 앗 딘이 어느 정도 통합해놓은 걸 물려받은 점도 있었지만, 이를 유지하고 아이유브 왕조가 끝내 십자군을 몰아낼 수 있었던 건 누가 뭐라 해도 살라딘의 카리스마 덕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30] 이슬람도 봉건 시대였으므로 술탄인 살라딘의 명령에 영주들이 병력을 끌고 와 참전하는 식이었는데, 살라딘이 너무 오랜 기간 소집하자 병력의 유지비를 부담했던 영주들은 해산을 요구한 것이었다. [31] 애초에 군대가 저런 짓들을 하면 상층부 입장에서는 병사들의 통제가 안 되고 군기가 흐트러지기 때문에 그리 좋은 일은 아닌데, 설령 살라딘이 명한다고 하더라도 증오범죄를 막을 수 없으리라 여긴 것으로 보인다. [32] 인명 손실 없이 성채를 점령하게 될 것이라서 동의한 듯하다. [33] 고대 그리스의 방진. [34] 다만 부상자는 다수 발생했다. [35] 전투 초반을 이순신의 대장선 단 1척이 틀어막고 있었고, 다른 배는 겁에 질려 멀찌감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순신이 없었으면 전투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36] 실제로 살라딘은 다섯 아들들에게 영지를 각각 나누어주었고 실질적인 후계자는 알 아지프로 삼아 영주들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게 했지만, 살라딘 사후에 아들들간에 권력 투쟁으로 전투까지 벌어져 알 아지스가 알 아지프를 추방하고 후계자가 되었다. 이 혼란은 살라딘의 동생인 알 아딜이 1198년 알 아지스의 사후(병사)에 술탄이 되면서 마무리되었다. 만약 이때 십자군까지 팔레스티나에 남아 있었다면 대단히 골치 아팠을 것이다. [37] 이때 리처드는 "3년 조약이 끝나면 와서 예루살렘을 되찾겠소."라는 편지를 보냈고 살라딘은 이에 대한 답변으로 "기왕 빼앗긴다면 다른 사람이 아닌 리처드 그대에게 기꺼이 잃겠노라."라고 답장을 보냈다는 것은 유명하다. [38] 언젠가 자기 손으로 예루살렘을 되찾고 싶었던 모양이다. [39] 팔레스타인을 떠난 뒤부터 리처드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극심한 신경증에 시달려 1년 넘게 루브르 성에만 틀어박혀 이따금 유대인에게 죄를 물어 처형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었다. [40] 존의 반란 소식에 대해서 "내 아우는 손톱만큼의 저항이라도 있는 곳이라면 절대 정복하려 들지 않을 놈"이라고 얕보듯이 말하며 사냥을 즐기기도 했고 감시인들과 레슬링 시합을 하거나 저속한 농담을 주고받거나 함께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41] 루이 7세 엘레오노르 다키텐 사이의 장녀인 마리 드 프랑스. 리처드의 이부누나이자 필리프 2세의 이복누나로, 둘 모두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42] 마지막 연 8연. '샤르트르 백작 부인 = 루이의 모친'은 루이 7세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의 차녀 알릭스 드 프랑스로 샹파뉴 백작 부인 마리의 친여동생이다. 이복/이부 형제들과 매우 친밀했던 언니와 달리, 알릭스는 형제들과 서로 무관심하게 지냈다. [43] 존과 필리프 2세는 한 살 차이다. [44] 잉글랜드의 프랑스령 [45] 현재의 크뢰즈주 [46] 전근대에는 항생제가 없다 보니 수술하고 나서 부작용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흔했다. [47] 시칠리아의 군주인 굴리엘모 2세와 결혼했으나 굴리엘모 2세가 1189년에 사망했고 왕위는 그의 사촌인 탄크레디가 계승했다. 그런데 탄크레디는 굴리엘모 2세가 조안에게 지참금으로 준 토지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고 포로로 잡아두자, 이에 빡친 리처드는 3차 십자군을 나서는 길에 먼저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상륙해 탄크레디부터 박살내고 여동생의 상속분을 돌려주었다. [48] 살라딘 사후에 술탄이 된다. [49] 알 아딜의 뒤를 이어 술탄이 되었으며 비교적 기독교도에 호의적인 인물이었다. 나중에 6차 십자군 당시 프리드리히 2세와 평화 협정을 맺는다. [출처] War and chivalry the conduct and perception of war in england and normandy p26 저자 Matthew Strickland 출판 :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국 [51] 이에 대한 1차 사료는 1200년경에 라틴어로 쓰여진 Itinerarium Regis Ricardi(리처드 왕의 여행기)이다. 이 책에 의하면 리처드는 아버지인 알 아딜을 따라 리처드를 방문한 11살의 알 카밀에게 기사 작위와 함께 작위 수여에 쓰인 기사 검을 선물로 주었고, 알 카밀은 무척 기뻐했다고 나온다. 이 기록을 공식적인 기록으로 보기에는 좀 무리라면 또 다른 사료로 6차 십자군 당시 프리드리히 2세와 알 카밀간의 회담을 다룬 공식 문서상에 '기사 작위를 받은 사라센의 왕 알 카밀'이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정황상 살라딘의 조카이자 이집트 대영주인 알 아딜의 아들인 알 카밀에게 작위를 줄 만한 인물은 리처드 1세밖에 없었을 것이다. [52] 그러나 이렇게 리처드가 회복한 프랑스령은 실지왕 존이 모조리 까먹고 만다(...). [53] 참고로 십자군 전쟁에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3차 십자군이 결성하게 된 계기가 된 하틴 전투의 패배는 바로 보급을 등한시한 결과였다. 사막을 행군하는데 물이 부족했던 것. 사실 정확히는 살라딘이 티베리아스를 공격해 예루살렘 군을 일부러 물이 부족한 곳으로 유인한 것이다. 그래서 티베리아스의 영주인 레몽 3세는 이를 눈치채고 자기 영지와 가족을 잃는 한이 있어도 공격을 반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기 드 뤼지냥과 르노 드 샤티옹은 오히려 레몽 3세를 겁쟁이라고 비웃으면서 무모하게 공격에 나섰다가 말 그대로 말라죽었다. [54] 당시 대부분의 십자군 지휘관들은 눈앞의 예루살렘을 버려두고 먼 길을 돌아 이집트를 쳐야 한다는 리처드 1세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며 반대하였다. [55] 특히, 샤토 가야르에 물자와 식량, 식수를 가득 쌓아놓아 장기전을 대비할 수 있었다. 당시, 샤토 가야르에는 수비 병력이 고작 400명~500명밖에 없었는데 무려 8개월을 버틴 것이다. [56] 하지만 이 물자들은 어디까지나 성의 병력이 버틸 물자였기에 성 주변의 주민들이 성에 들어올 경우, 물자가 고갈될까 봐 샤토 가야르의 성주는 성으로 피신 온 성 주변의 주민 1,400명을 성에서 내쫓아버렸다. 그래서 주민들은 프랑스군에 항복했으나 프랑스군은 받아줄 여유가 되지 않은 터라 프랑스군에도 쫓겨난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전장에 숨어 지냈으나 절반이 추위와 기아로 사망한다. 나중에 필리프 2세가 군영에 도착했을 때, 숨어있던 주민들을 보고는 그들의 항복을 받아주고 구제해준다. [57] 이 성을 함락시키는 과정이 참으로 극적인데, 원래 이 성은 리처드 1세가 심혈을 기울여 설계해 사실상 난공불락의 성이었으나… 존 왕 시절에 성을 개수해 화장실을 고치는 과정에서 그동안 숨겨져 있던 하수구가 드러났고 침투 방지용 쇠창살을 하수구에 설치하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덕분에 필리프 2세가 이 성을 공격할 당시에 8개월 동안 갖은 수를 써서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하여 도저히 공략 방법이 보이지 않아 고민하던 와중에 존 왕 시절에 개수된 하수구를 보고는, 병사들로 하여금 그곳을 기어 올라가게 했고, 분뇨로 범벅이 된 프랑스 병사들이 화장실을 통해 성 안의 예배당으로 출현해 영국군이 혼비백산한 사이, 침투한 프랑스군이 성문을 열어 리처드 1세가 아꼈던 샤토 가야르가 함락당했다. 이후, 필리프 2세는 치를 떨게 만든 이 샤토 가야르를 일부만 남기고 파괴하도록 지시해 그 이후로는 요새의 기능은 물론 도시의 기능도 완전히 상실했다. 근본적으로 리처드 1세가 설계한 상태에서는 어떠한 약점도 없었지만 존이 손을 대면서 한순간에 함락되었기 때문에 존의 무능력을 상징하는 또다른 사례로도 언급된다. [58] J. Gillingham, Richard the Lionheart (London, 1999), p. 266 [59] 동생인 존 왕은 어두운 붉은 머리(dark red hair)라서 모후 엘레오노르가 어두운 계열의 머리색으로 추정되곤 한다. [60] 말년의 헨리 2세는 피가 흐르는 궤양들이 증식해서 전신을 뒤덮었다고 전해진다. [61] 실제로도 마상창시합보다 실전 경험을 쌓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62] 일설에 따르면 그 헨리 2세가 왕세자 시절의 필리프 2세를 보고는 충격에 휩싸여 "애절하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서둘러 가버려 구경꾼들을 대단히 놀라게 했다"라고 한다. 참고로 필리프 2세의 친여동생 아녜스도 절세미녀였는데 동로마에서 서유럽 최고의 아름다움 중 하나로 불렸다. [63] 우정 및 동맹. [64] John Baldwin, ‘The Many Loves of Philip Augustus’, in The Medieval Marriage Scene: Prudence, Passion, Policy, eds Sherry Roush and Cristelle L. Baskins (2005), 68-72. 첫 상대는 1180년 첫 왕비 이사벨 드 에노, 두 번째 상대는 리처드 1세, 뒤이어 세 번째 상대는 1193년 아미앵에서 첫날밤을 나눈 잉에보어로 제시하고, 필리프 2세의 잉에보어와의 첫날밤 반응을 원인을 알 수 없는 급성 섹슈얼 트라우마 발현으로 해석했다. [65] mols를 라틴어로 옮기면 mollis이며 당대 서유럽에서 가장 열광적으로 읽혀진 아우렐리우스 프루덴티우스 클레멘스의 고서에서 헤라클레스가 동성 애인으로 삼은 힐라스의 별명이 mollis puer였다. "mollis puer에 대한 사랑으로 악명 높은 헤라클라스의 열정은 심지어 아르고 호가 바다에서 항해를 하고 있을 때에도 격렬하게 화를 냈고, 그가 사라졌을 때, 마치 아내를 잃어버린 것처럼, 얼굴이 시뻘개져서 네메아의 사자 가죽으로 사악함을 숨기지 않고 그를 찾아다녔다." 특히 헨리 2세의 치세 말과 리처드의 치세에 잉글랜드 암흑가에서 동성 성관계에서 수동적 역할, 즉 삽입당하는 역할을 맡는 미청년의 외모를 칭찬할 때도 쓰였다. Pietrini, Spettacolo e immaginario teatrale nel Medioevo(Roma: Bulzoni, 2001) [66] Problemi attuali di scienza e di cultura. Accad. Naz. dei Lincei Quaderni N. 251: 4. [67] 여담으로 그의 동생 스티븐 롱챔프도 리처드의 절친이었는데 3차 십자군 군사 사령관으로 활약하였으며 그의 생전에는 의리를 지켰으나 죽은 뒤에 잉글랜드 상속지를 포기하고 부빈 전투 중 낙마하여 죽을 위기에 처한 필리프 2세를 지켜주다가 대신 전사했다. 또 다른 절친으로 모계 쪽 사촌 앤드류 쇼비니는 리처드의 용맹에 버금갔던 아르스푸 전투에서 대활약한 군사 사령관이었는데 그도 생전에는 의리를 지켰지만 죽고 몇 달 뒤 필리프 2세의 곁에서 목격되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68] 영국의 대중 역사가로서 중세 영국과 프랑스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데스몬드 시워드는 리처드가 필리프 2세의 이름을 따서 서자의 이름을 지었다고 주장한다.(출처: Eleanor of Aquitaine, 저자 Desmond Seward) 이때 필리프 2세는 왕위에 막 오른 14-15세에 불과했고 리처드는 그보다 8살 연상이었다. 게다가 필리프 2세는 리처드와 그의 형제들의 도움으로 재위 초기의 절제절명의 위기를 타개했음에도 리처드만은 언짢아하고 멀리하던 때였다. [69] 1177년에 리처드가 나바라 국경과 인접한 아키텐 남부 지역에서 영주들의 반란을 제압했다는 호버든의 로저의 기록과 1191년에 메시나에서 만나기 전에 리처드가 푸아투 백작 신분이었을 때부터 베렝겔라를 원했다는 리처드 왕의 편력기의 기록을 합쳐 로맨틱한 상상의 영역에서 다룬 서술이다. 이 로맨틱한 상상은 19세기에 영국의 역사 작가 아그네스 스트릭랜드(Agnes Strickland)의 서적에서도 인용되었다. 존 길링엄 교수는 리처드 왕의 편력기의 기록은 리처드의 군사에게 최소 둘이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로 보였음을 시사한다고 해석한다. [70] 그 이전에 필리프 2세가 나바라의 블랑카를 사랑하여 블랑카와 애인 관계였던 브리엔의 장을 질투하여 떼어놓을 요량으로 예루살렘 국왕으로 선출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블랑카는 필리프 2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이든 무릅썼다고 하며 둘의 사랑은 각자의 직계 후손인 필리프 4세 호아나 1세에 부부로 이루어졌다고 여겨진다. [71] Dyggve, Trouvères et protecteurs de trouvères dans les cours seigneuriales de France (Helsinki:Société de Littérature Finnoise, 1942) [72] 생몰년도 : 1155 ~ 1202 [73] 생몰년도 : ? ~ 1241 [74] 필리프 2세 여기를 참고. [75] 실제로 중세를 배경으로 한 여러 무훈담에서 필리프 2세는 악역을 자주 맡는다. 본인부터가 정략과 권모술수의 대가였기 때문인데 이런 무훈담에서는 비열한 인물로 많이 묘사되는 편. [76] 로빈 후드가 자진해서 맞으려 하자 리처드 1세가 벌을 주겠다고 주장하는 판본도 있다. [77] "나야말로 리처드 더 라이온하트! 너의 불운을 원망해라!"원망할 만하다라거나, "싸움이야말로 내 삶의 보람! 피가 끓는다!" [78] 위에 언급된 행정관 휴버트 월터. 정치가 90이다. [79] 킹스에서만 가능하고 정복자 이후부터는 불가능하다. 영웅 유닛은 전향이 안 되기 때문. [80] 둘이 전혀 관련이 없지는 않아서 리처드의 누나인 마틸다가 하인리히의 두 번째 부인이라 하인리히와 리처드는 인척 관계다. [81] 이후 결정판에서 컨커러의 역사적 전투와 합쳐져 '역사적인 전투'라는 한 항목이 된다. [82] 이때에 어머니인 엘레오노르 앞에서만 보여준다는 애교 모드까지 발동시켰다. [83] 발리앙은 자신의 정체를 숨겼지만 리처드는 이미 그의 정체를 눈치챈듯 자신이 대장장이라고 주장하는 그에게 굳이 발리앙을 찾고 있다고 말하며 합세하라는 권유를 은근히 내비쳤다. [84] 당연히 실제 역사와는 조금 다른 부분이다. 발리앙은 이후 도시 국가였던 티레에 머물렀으며, 3차 십자군 전쟁에 합류하라는 리처드의 요청을 씹어버려서 십자군 사이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처드의 요청에 훗날 살라딘과의 중재를 담당하기도 했다. 자신의 요청을 무시한 사람을 기용한 리처드나, 욕을 먹었지만 결국 양측의 의사를 전달하는 중간자 노릇을 한 발리앙이나 여러모로 비범한 인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