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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2 22:13:03

제2차 십자군 원정

십자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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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발단3. 2차 십자군의 결성4. 성지로5. 다마스커스 공략6. 후일담7.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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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십자군 원정도

1. 개요

제2차 십자군 원정(1145년 - 1149년)은 기존의 대귀족 수준을 넘어 아예 유럽의 왕들이 참가하기 시작한 첫 번째 십자군으로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지만, 중동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왕들의 고집 때문에 거의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병력과 물자만 낭비한 대실패로 막을 내렸다. 동맹인 다마스쿠스를 공격하여 결국 이슬람권의 반십자군 동맹을 결성시킨 전쟁 혹 떼려다 큰 혹을 덧붙인 일 어부지리로 오히려 비슷한 성전이긴 하지만 전혀 다른 위치에 있었던 레콘키스타 포르투갈이 큰 도움을 받아 리스본을 점령하게 되었다.

2. 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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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십자군 전쟁 직전 레반트 지도

예루살렘 왕국은 보두앵 2세에 이어 멜리장드 여왕과 풀크 왕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보두앵 2세에게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는 물론 안티오키아 공국의 섭정 자리도 물려받았는데 안티오키아는 너무 오랫동안 섭정과 부재자들의 지배를 받았고 따라서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주변의 이슬람 세력이 강해지는 상황에 그건 전혀 좋은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예루살렘 왕국은 안티오키아에 강력한 통치자를 새로 앉혀야 했다. 풀크는 안티오키아의 전 지배자인 보에몽 2세의 9살 된 딸 콩스탕스를 34세의 푸아티에의 레몽과 결혼시켰고 레몽을 안티오키아의 지배자로 삼았다.

그런데 이때에 예루살람과 이웃하고 있던 군벌 이마드 앗 딘 장기의 세력이 날이 갈수로 강대해졌다. 모술과 알레포의 아타베그(총독)였던 장기는 그 시점에선 다마스커스 정복에 매진하고 있었지만 그리스도교에 대한 성전에 대해 공공연하게 언급하고 있었다. 장기가 십자군 국가들의 경계에 닿는 것을 경계한 풀크는 다마스커스와 연합하여 장기의 다마스커스 공략을 분쇄했지만 알레포와 모술을 지배하는 장기의 세력은 여전히 막강했고 남쪽에선 아스칼론의 이집트 군대가 주기적으로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구호 기사단과 여러 십자군 기사들이 성채를 세우고 예루살렘 왕국 남부의 방어를 맡았다. 이때 세워진 요새 중 하나가 유명한 크라크 데 슈발리에다.

1143년에 풀크 왕이 낙마 사고로 죽고 멜리장드가 단독 통치자로서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런데 안티오키아와 에데사의 관계가 날이 갈수록 악화되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예루살렘의 왕위 교체와 십자군 국가들 간의 관계 악화를 장기는 놓치지 않았다. 1144년 11월 말 장기는 에데사 백국을 공격했다. 하필 에데사의 지배자인 조슬랭은 주력 군대와 함께 텔바시르에 있었다. 안티오키아 공작 레몽은 조슬랭의 도움을 거절했고 멜리장드가 급히 보낸 원군은 너무 늦게 도착했을 뿐더러 수가 너무 적었다. 12월 24일에 장기의 군대가 에데사를 점령하고 대학살을 벌였다. 제일 먼저 수립된 십자군 국가 에데사 백작국은 그렇게 사라졌고 안티오키아는 강력한 완충지대와 투르크와 메소포타미아 사이의 방벽을 잃었으며 이슬람 교도들은 십자군 국가를 영원한 이웃이 아니라 언젠가 없애버릴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3. 2차 십자군의 결성

십자군 국가의 멸망에 온 유럽이 충격과 경악에 휩싸였고 이에 편승하여 1145년 12월 1일 교황 에우제니오 3세가 <콴툼 프라이데케소레스>란 교서를 발표했다. 이 교서는 1146년 3월 1일에 수정되어서 다시 발표되었는데, 당연하지만 1차 십자군의 영광을 재현하고 성지를 지키기 위한 십자군의 결성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교황은 재산 보호, 채무 변제 등을 조건으로 내걸며 특히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십자군을 결성할 것을 독려했지만 독일이 십자군을 일으키는 것에는 소극적이었는데 이는 이탈리아 남부의 노르만인들과 교황령의 충돌에서 신성 로마 제국이 교황 측에 협조해야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국왕 루이 7세가 직접 원정대를 꾸리려 했지만 왕의 고문인 생드니 수도원장인 쉬제 등의 만류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십자군을 본격적으로 독려했던 것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였다.

이미 예루살렘에 기독교도 왕국이 세워진지 어언 50년이 흐른 후라서 성지를 되찾자는 주장은 1차 십자군 때와 달리 먹히기 힘들었다. 이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십자군 참가 그 자체가 구원이라는 요지의 주장을 설파했다. 결국 루이 7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베르나르도 앞에서 십자군에 참석할 것을 서약했고, 엄청난 숫자의 프랑스의 영주들이 그 자리에서 참가를 맹세했다.[1] 그렇게 프랑스에서 대규모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어쨌거나 베르나르도는 자신이 은자 피에르의 행보를 답습하지 않을까 걱정했고, 피에르의 민중 십자군이 유대인 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을 의식하여, 십자군 참가 독려와 더불어 유대인을 박해해선 안된다는 것 역시 강조했다. 하지만 시토 수도회의 라둘프 등은 그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십자군을 조직해서 유대인을 학살했다. 베르나르도는 허겁지겁 라인란트로 달려가서 라둘프를 크게 꾸짖어 수도원에 돌려보냈다.

그런데 이 일이 엉뚱한 일로 번졌다. 독일 전역에 대대적인 십자군 열풍이 불어닥친 것이다. 이에 십자군 참가에 회의적이었던 콘라트 3세도 베르나르도의 설교에 무릎을 꿇고 수백명의 독일 귀족들과 함께 십자군 참가를 서약하고 말았다.

그런데 성지를 향한 십자군만 조직된 것이 아니었다. 많은 숫자의 독일인들이 엘베 강 너머의 이교도인 웬드족[2]을 정벌하는 십자군을 결성할 것을 요구했다. 2차 십자군의 목적이 성지 탈환이 아니라 구원에 있었으니 이 요구를 거절한 명분은 없었다. 결국 웬드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한 웬드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또한 스페인의 이슬람 교도들을 몰아내기 위한 레콩키스타를 지원하는 십자군 역시 결성되었다. 스페인과 남프랑스의 영주들은 제노바 사람들과 힘을 합쳐 스페인을 회복하기 위한 십자군을 결성했다.

4. 성지로

각설하고 시칠리아의 왕 루지에로 2세 동로마 제국의 영토도 점령할 겸 프랑스 십자군들을 팔레스타인까지 수송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서유럽에선 동로마 제국에 대한 온갖 악의적인 소문이 돌고 있었고 동로마의 황제를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서유럽인들은 동로마 황제에 대한 온갖 음해를 쏟아냈다. 프랑스 정부는 반 동로마 세력이 강했고 루이 7세에게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권고했지만, 루이 7세는 부용의 고드프루아가 걸었던 육로를 선호했고 루지에로의 제안을 거절했다.

한편 동로마의 황제 마누일 1세는 2차 십자군의 결성이 룸 술탄국과 겨우 맺은 평화 관계를 깨뜨리고 신성 로마 제국 - 교황 - 베네치아를 잇는 대 노르만 동맹을 해칠 것이라 믿어 매우 불만스러워했다. 그리고 십자군이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지 않을 것은 전례를 보아 자명했다. 따라서 마누엘 1세는 투르크족과 정전 협정을 맺어 투르크 쪽 국경을 안정시켰는데 이 때문에 서유럽은 그리스도의 적과 동로마가 거래를 했다고 매우 분노했다.

1147년 5월 19일 플랑드르, 노르만, 잉글랜드에서 결성된 십자군이 다트머스 항구를 떠나 이베리아 반도를 따라 남하했다. 이들은 리스본을 공격하고 있던 포르투갈 국왕 알폰소 1세의 구원 요청을 받았다. 알폰소 1세는 "리스본을 점령하고 약탈할 권리를 주겠다"고 제안했고 이에 십자군 대부분이 찬성하여, 1147년 10월 24일 3개월 간의 공방전 끝에 리스본을 점령했다. 막대한 재물을 얻은 십자군은 1148년 봄에 항해를 재개했다.

한편 콘라트 3세의 독일군은 1147년 5월 레겐스부르크를 떠나 9월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동로마 제국은 독일군의 약탈에 못마땅해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망칠 생각은 없어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콘라트 3세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교외 지역을 계속 약탈했다. 견디다 못한 마누엘 1세는 이들을 소아시아로 보내줬다. 콘라트 3세는 프랑스 십자군을 기다려야 했지만 그러지 않고 1차 십자군의 이동 경로를 따라 안티오키아로 이동했다.

독일 십자군은 1차 십자군처럼 도릴라이움에서 투르크 군대와 조우했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투르크 군대는 십자군들을 무참하게 살육했고 2만명 중 1만 8천을 잃으며 개발살난 콘라트 3세는 니케아로 간신히 달아나서 프랑스 군대를 기다렸다. (2차 도릴라리움 전투)

루이 7세의 프랑스 군대는 1147년 6월 11일 프랑스를 떠나 10월 4일에 콘스탄티노폴리스 도착했다. 시칠리아의 루지에로의 제안을 이제라도 받아들여 로마 제국을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었지만 루이 7세는 기독교 제국을 공격하는 일을 거부했다. 마누엘 1세는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를 초대하여 극진히 대접했다. 왕과 왕비 모두 제국의 호화로움에 감탄했지만, 그 호화로움을 오래 누릴 틈도 없이 소아시아로 이동했다.

니케아에서 콘라트 3세와 합류한 루이 7세는 독일군이 극소수만 남았다는 것을 알았고, 이번 원정의 성패가 프랑스 군대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콘라트 3세와 루이 7세는 위험한 아나톨리아 중부 대신에 에게 해와 지중해 연안의 동로마 영토를 따라 행군하기로 했다. 십자군은 스미르나를 거려 에페수스까지 진군했지만 에페수스에서 콘라트 3세는 중병에 걸려 눕고 말았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황제의 간호로 병을 회복한 콘라트 3세는 동로마에 대한 감정을 회복하고 배를 타고 팔레스타인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루이 7세의 프랑스 군대는 동로마 내부에서도 투르크 군대의 공격에 시달렸다. 투르크 군대는 십자군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동로마 도시들을 공격했고 십자군도 동로마 도시들을 약탈해서 동로마 군대와 십자군과의 교전이 자주 벌어졌다. 루이 7세는 동로마가 투르크와 연합하여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의심하였고 그런 의심은 십자군 전체로 확산되었다.

십자군은 겨우 아달리아에 이르렀지만 안티오키아까지 갈 일은 멀었다. 결국 루이 7세는 동로마 함대를 고용하여 배를 타고 성지로 이동하기로 했는데 성직자와 귀족들을 태우자 더 이상 배가 없었다. 루이 7세는 자신의 주력에게 안티오키아로 진군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프랑스 군대는 라오디케아에서 투르크 군대에게 패해 전멸당했다. 오로지 극소수만이 안티오키아에서 루이 7세와 합류했다.

5. 다마스커스 공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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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프랑스, 예루살렘의 세 왕이 내린 결정.

한편 십자군 최대의 적이었던 장기는 갑작스런 최후를 맞았다. 평소 그의 거칠고 엄격한 성격에 불만을 품었던 노예가 술에 취해 잠든 장기를 우발적으로 살해하고 만 것이다. 장기의 사망 소식을 듣고 에데사의 조슬랭 2세는 에데사를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지만 실패했다. 장기의 아들 누르 앗 딘(일명 누레딘)은 보복으로 에데사의 기독교도들 중 남자는 죽이고 아녀자는 노예로 팔아 버렸다. 안티오키아의 레몽과 조슬랭의 관계는 여전히 나빴고 다들 십자군이 오기를 학수고대했다. 하지만 성지에 도착한 십자군은 대부분이 아나톨리아에서 죽고 소수에 불과했다. 에데사 탈환은 어림도 없을 판이었다. 그래도 루이 7세는 많은 자금과 기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안티오키아의 레몽은 누레딘이 모술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형제들과 다투는 틈을 타서 알레포를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금욕적인 성향의 루이 7세는 으스대는 미남인 레몽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의 계획에도 시큰둥했다. 레몽은 자신의 조카인 엘레오노르를 대신 설득하려 했는데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히 숙질 관계가 아니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당연하지만 루이 7세는 매우 불쾌해했다. 엘레오노르는 루이 7세에게 알레포를 공격하지 않으면 이혼하겠다고 했고 격노한 루이 7세는 엘레오노르를 연금시켜버린 다음 예루살렘으로 떠나버렸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루이 7세는 프로방스에서 도착한 십자군을 보충받아 다시 대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한편 콘라트 3세도 용병들을 고용하여 다시 군세를 회복한 상태였다. 여기에 예루살렘 왕국 군대가 합세하면 실로 엄청난 숫자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원래 목표인 에데사 탈환은 모두 관심이 없었다. 알레포를 공격해야 한다는 의견은 루이 7세가 이미 거부한 바가 있고, 결국 그들은 엉뚱하게도 예루살렘의 우방인 다마스커스를 쳤다. 누레딘의 딸이 다마스커스의 아타베그와 결혼한 것이 예루살렘을 자극한 것이다. 그리고 새로 온 십자군들은 이교도와의 동맹 따위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1148년 7월 24일에 다마스커스 공략이 시작됐다. 그리고 7월 28일에 공격이 끝났다. 도시를 빨리 점령하기 위해 십자군은 안전한 위치를 포기했고 이슬람 군대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이 다음에 일어난 일이 참 훌륭한 하이개그인데, 물과 그늘이 있는 자리를 버리고 고지로 올라가자, 물과 그늘이 없어 사기가 개판 5분전이 된것을 보고 원래의 주둔지로 다시 이동하기로 했는데, 고지로 주둔지를 옮겼던 그 사이에 누르 앗 딘 군대가 이미 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에도 마속이....[3]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아니 예루살렘의 우방을 적으로 돌리고 십자군은 회군해야 했다.

6. 후일담

9월 8일 콘라트 3세는 살로니카를 거쳐 콘스탄티노플로 떠나 황제의 환대를 받았다. 마누일 대제와 가까워진 그는 루지에로 2세가 통치하는 시칠리아의 노르만 왕조를 공격할 계획을 짰다.

한편 루이 7세는 1149년 부활절까지 성지에서 머물렀다. 혹시라도 성지에 도움이 될 일이 없을까 찾은 것이다. 거기에 엘레오노르는 이혼하겠다고 외치고 있었고 루이 7세는 그녀의 마음을 돌리느라 고생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원정도 실패하고 아내까지 잃은 루이 7세는 "이게 다 동로마 때문이다."를 외치면서 동로마에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이를 갈았다.[4]

한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십자군의 대실패에 굉장한 충격을 받고 고뇌에 들어갔다. 그는 그리스도교 세계가 죄를 지어서 하느님이 유럽에 승리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란 결론을 내리고, 유럽의 죄를 씻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7. 평가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 했다. 괜히 우방인 다마스커스는 적으로 돌리고 인력과 물자만 낭비했다. 다마스쿠스는 전투 직후 시점에는 어느 쪽에도 점령되지 않은 독립 상태를 유지했으나, 2차 십자군의 공격으로 이미 반(反) 십자군 정서가 팽배하게 되어 영주인 무인 앗 딘 우누르가 죽은 뒤 별다른 저항 없이 장기 왕조에 포섭되었다. 이로써 장기 왕조가 시리아-자지라 전체의 패권을 쥐게 되었으며, 이는 장차 아이유브 왕조의 성립으로 십자군 세력이 파멸하는 단초가 된다.

거기에 엿을 제대로 먹은 루이 7세는 노르만 왕조들과 연합하여 동로마를 칠 십자군을 결성하자고 난리를 치는 통에 십자군의 지원 세력이 되어야 할 동로마만 혼란스러워져 기독교도들 간의 분열이 가속됐고 십자군 국가들의 안보 공백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나마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가 거둔 성과라면, 십자군의 일파가 포르투갈에 중도하차하여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던 리스본을 함락시킨 것 정도가 있다. 사실, 이 리스본 함락이 이베리아 반도 레콘키스타에 중요한 변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원래 목표인 우트르메르는 제대로 엿만 먹었다.(...)


[1] 십자군 참가 서약을 위한 유포가 부족해져서 베르나르도는 자신의 옷을 찢어야 했다. [2] 슬라브인 [3] 적어도 원정군은 지리를 몰라서 그랬다고 쳐도지리 파악 하지 못한것도 훌륭한 개그감인건 넘어가고 마속이 십자군보다 더 등신같은 점은 왕평이 고지대로 올라가지 말라고 심하게 말렸다. [4] 하지만 후에 막내딸 아녜스를 동로마에 시집보냈다. 문제는 아녜스와 결혼한 어린 황제 알렉시오스 2세는 얼마안가 5촌 아저씨 안드로니코스 콤네노스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했는데다가, 이 아저씨가 후임 황제로 즉위하면서 아녜스까지 강제로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안드로니코스는 젊었을 적 유부녀, 근친을 가리지 않는 희대의 난봉꾼이었는데, 뭐 그건 나름대로 매력이 있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이때는 이미 60대 중반의 할아버지였다. 그런데 남편의 살해자이자 새신랑인 할아버지 황제(...) 역시 얼마안가 쿠데타로 처참하게 처형당하고 일족이 몰락했으나, 아녜스는 무사히 살아남아 후에 로마인 귀족과 세번째 결혼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