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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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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최악의 영국인 10명'을 선정. 다만 현직 정치인은 제외되었다.
1위 2위 3위 4위 5위
잭 더 리퍼 토머스 베켓 에아드릭 스트레오나 존왕 리처드 리치
6위 7위 8위 9위 10위
타이터스 오츠 윌리엄 오거스터스 휴 디스펜서 더 영거 토머스 애런들 오스왈드 모슬리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위대한 영국인 }}}}}}}}}
잉글랜드 왕국 플랜태저넷 왕조 제3대 국왕

John
파일:john the lackland.jpg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John)
출생 1166년 12월 24일
잉글랜드 왕국 옥스퍼드 보몬트궁
사망 1216년 10월 19일 (향년 49세)
잉글랜드 왕국 노팅엄셔 뉴어크성
재위기간 아키텐·가스코뉴 공작
1199년 4월 6일 ~ 1216년
푸아티에 백작
1199년 4월 6일 ~ 1204년
노르망디 공작, 앙주·멘 백작
1199년 4월 6일 ~ 1204년
잉글랜드의 왕
1199년 5월 27일 ~ 1216년 10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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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별칭 결지왕
(John Lackland/Jean sans Terre)
배우자 글로스터 여백작 이사벨라 (1189년 결혼 / 1199년 이혼)
앙굴렘 여백작 이자벨 (1200년 결혼)
자녀 헨리 3세, 리처드, 조앤, 이사벨라, 엘리노어
부왕 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154-1189).svg.png 헨리 2세
모친 파일:아키텐 공국 국장.svg 엘레오노르 다키텐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왕위에 오르기까지3. 실패로 점철된 재위 기간4. 프랑스령 침공5. 사망6. 결지왕 존이 상실한 영토7. 평가8. 가족 관계
8.1. 자녀
9. 사적인 면
9.1. 인기 없는 왕
10. 현대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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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lbgcolor=#810000><colcolor=#fadb43> 파일:external/deremilitari.org/British_-_King_John_-_Google_Art_Project.jpg
근대 상상화
<colbgcolor=#810000> 영어 John (존)
중세 프랑스어 Johan (조앙)
프랑스어 Jean (장)
라틴어 Iohannes (요한네스)

잉글랜드 왕국의 왕으로 헨리 2세의 막내 아들이자 악명높은 유명한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동생. 별명인 래클랜드(Lackland)는 원래 어렸을 때 봉토를 받지 못하여 붙은 것으로 결지왕(缺地王)[1]이라 해야겠지만, 프랑스 쪽의 영토를 대폭 잃은 일이 사람들의 기억에 강렬히 새겨졌기에 실지왕(失地王)이라는 표현으로 많이 쓰인다. 결지왕이라는 별명이 직관적이지 않아서 무영토왕(無領土王)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거지왕

그나마 그가 남긴 유산이라면 귀족들의 협박 마그나 카르타를 받아들였다는 것이 있다.

(John)이란 이름은 기독교계에서 워낙 유명한 요한에게서 비롯된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존 왕의 사후 영국의 수많은 군주들 중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존 왕도 존 1세로 불리지 않는다. 스티븐 왕, 앤 여왕 그리고 빅토리아 여왕도 비슷하게 같은 이름을 가진 국왕이 없기 때문에 1세라고 불리지 않는다.[2] 하지만 존 왕은 영국 정부 행사에서조차 무능한 왕으로 소개되고 있는지라, 앞으로도 존이라는 이름의 왕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사실 스티븐 왕도 사촌에게 돌아갈 왕위를 빼앗으려다 내전으로 번진 과오 때문에 기피되는 이름이 되었다.[3]

2. 왕위에 오르기까지

원래 부왕 헨리 2세의 아들 중 가장 총애하는 막내아들이었다. 헨리 2세의 다른 세 아들들은 수시로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지만 존은 어렸기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존도 장성한 후 막판에 아버지를 배반했다. 어쨌든 헨리 2세는 자신에게 가장 심하게 반항하던 둘째 아들 리처드의 알짜배기 영지인 아키텐 지방을 존에게 물려주려고 무지 애를 썼지만 이내 글로스터 백작의 상속녀와 결혼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기 직전 형 리처드 1세가 다시 거하게 반란을 일으키자 원래는 아버지 헨리 2세에 붙었다가 전황이 리처드 쪽으로 기울자 아버지를 배신하고 형에게 가담했다. 참고로 이 일로 헨리 2세가 엄청나게 실망해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아버지가 죽자 논란 속에 왕위에 오른 리처드 1세는 즉위하자마자 제3차 십자군 원정에 나가 버렸고, 그동안 존은 국내에서 리처드 1세의 후계자이자, 실질적인 왕조의 지배자임을 내세워 왕이 되려고 이리저리 꼼수를 부렸다. 그 일환으로 필리프 2세에게 붙어 리처드 1세를 배신하고 반역을 시도했지만 실패한다. 여담으로 이때 리처드가 돌아온다는 말을 들은 필리프 2세가 존에게 보낸 편지가 가관인데 그 내용은 "그대의 몸을 돌보시오. 악마가 풀려났소.(Look to yourself. The devil is loose.)"였다. 1194년,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잉글랜드로 돌아온 리처드는 어머니 엘레오노르의 간곡한 설득에 당시 존이 이미 장성한 27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신하에게 휘둘린 어린애였을 뿐"이라면서 존을 용서했다.[4]

1199년 리처드 1세 사후에, 넷째 형인 제프리 2세의 아들이자 브르타뉴 공작이던 아르튀르 1세[5]와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이는 리처드 1세 때부터 이어진 플랜태저넷 가문과 브르타뉴 공국 간의 불화의 연장선상에 있었는데, 1191년 리처드 1세는 즉위 직후 콘스탄스 여공작의 장녀 엘레오노르의 양육권을 자신이 맡고 차기 브르타뉴의 후계자로 삼는 대가로 브르타뉴의 통치권을 인정해 주었다. 한편 얼마 후에 필리프 2세와는 콩스탕스의 아들 아르튀르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다는 조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1196년 콘스탄스가 아르튀르를 브르타뉴 공국 후계자로 선포하고 공동 통치자에 앉히자 이에 격분해 콘스탄스를 바이외로 소환했는데, 헨리 2세 시절 콘스탄스와 강제로 결혼했던 란눌프 드 블론데빌이 그녀를 납치해 자기 영지에 투옥시키고는 리처드 왕이 후계 문제로 그녀를 투옥시켰다며 브르타뉴 백성들을 선동하여 격분한 브르타뉴 귀족들과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1198년 리처드는 콘스탄스를 석방하고 그녀의 조치를 인정해야 했다. 그 후 브르타뉴인들은 잉글랜드에 감정이 좋지 않은 상태였고 필리프 2세와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리처드 1세가 죽고 당초 약속과 달리 아르튀르가 어리다는 이유로 존이 왕위를 채가자 브르타뉴인들의 인내심이 폭발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브르타뉴는 잉글랜드의 영향력 아래에 있을 뿐 잉글랜드 국왕의 영지도 아니고 브르타뉴 공작은 프랑스 왕의 봉신이고, 콘스탄스의 전 남편이자 이전 브르타뉴 공작 제프리[6]는 브르타뉴의 독립을 추구했는데 리처드 1세가 브르타뉴를 통제하기 위해 무리수를 벌이고는 그것도 모자라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약속까지 어기니 화가 안 날 수가 없다. 아르튀르는 발빠르게 이런 기류를 읽고는 자신이 리처드의 정당한 상속자라고 선언하고는 프랑스 왕인 필리프 2세에 지지를 호소했고, 필리프 2세는 처음에는 아르튀르를 지지했지만, 존에게 거액의 뇌물과 벡상, 에브뢰 두 영지 그리고 왕세자 루이의 결혼 상대 카스티야의 블랑슈의 막대한 지참금을 받고, 존 지지로 입장을 바꿔 존이 즉위하게 된다.

3. 실패로 점철된 재위 기간

한편 1200년 첫 번째 부인인 글로스터의 이사벨과 이혼하고, 이미 뤼지냥의 위그 9세와 약혼한 12~15세의 앙굴렘의 이자벨과 재혼한다.[7] 사실 보상만 잘해 줬다면 별문제 없이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이었건만 문제는 존이 그럴 깜냥이 못 되었다. 당연히 이에 뤼지냥 가문 전체가 분노하여 존 왕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하고 주군이던 필리프 2세에게 제소하자 필리프 2세는 존을 프랑스의 법정에 소환했다. 원칙적으로 프랑스의 잉글랜드령은 프랑스 국왕에게서 봉토를 수여받은 형태여서 프랑스령에 한정해서는 필리프가 주군이 되고 존은 봉건 가신의 입장이라 가능한 일이었다.[8] 물론 존은 프랑스의 법정에 갈 마음은 전혀 없었고, 출두 기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애초부터 예상하고 있던 필리프는 이를 기회로 존이 가지고 있던 잉글랜드령을 몰수하고 이 영지를 아르튀르에게 내렸다. 물론 몰수령을 내린다고 존이 호락호락 영토를 내놓을 리는 없으니 이는 어디까지나 명분이었고, 실제로는 필리프의 존에 대한 선전 포고라고 할 수 있다.

1203년, 아르튀르는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를 사로잡기 위해 공격하지만, 존은 신속히 역공을 가해 오히려 아르튀르를 포로로 잡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과정에서 존이 그의 강력한 동맹이던 앙주 영주를 무시하는 행동을 했고,[9] 거기다 포로로 잡은 귀족들을 가혹하게 취급했는데, 태양빛 한 점 안 들고 침수돼서 썩은 물이 바닥에 흥건한 지하 감옥에 가둬두어 굶기고 학대하여 22명이나 옥사하게 만든다. 3차 십자군 때 활약했던 리처드 1세의 부하들도 이때 포로로 붙잡혀서 아사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아르튀르가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행방이 묘연해지자 잉글랜드와 프랑스에는 존이 아르튀르를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마감(Margam) 수도원에는 "존이 아르튀르를 붙잡고 술에 취해 직접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는 센강에 무거운 돌을 달아 던져버렸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 그냥 음모론이 아니라 현대의 역사학자들도 직접 죽였건 명령을 내렸건 존이 아르튀르를 죽였을 거라는 점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이 때문에 전투에서 이겼음에도 브르타뉴와 앙주의 영주들이 반발하여 전부 프랑스 편으로 돌아서게 된다.

한편 필리프는 노르망디를 착실하게 하나씩 공략했다. 존은 이런 필리프를 상대하기 위해 노르망디의 가야르성을 공성 중인 프랑스군을 공격했는데 수군까지 동원해 필리프를 양면에서 공격하는 입체적인 작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론적으로는 좋아 보이는데 실제 수행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작전이라 실패했고[10] 필리프 2세의 프랑스군은 노르망디 전체를 유린하였다. 그 결과 존은 노르망디마저 상실해 아키텐을 제외한 프랑스령 전체를 잃어버리고 말았다.[11]

1205년에는 캔터베리 대주교 임명 문제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대립해 1207년에는 잉글랜드 전체에 성무 정지, 1209년에는 존에 대해 파문 선언까지 내려왔다. 이에 분노한 존이 1209년부터 1211년까지 성직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의 소득을 국가에 귀속하기도 했는데, 1213년에는 교황이 아예 필리프 2세의 잉글랜드 침공을 지지하고 나서자, 결국 잉글랜드 전체를 교황에게 봉헌하는 형태로 간신히 용서를 받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프랑스령 상실과 파문 소동 등으로 잉글랜드의 귀족과 평민 모두는 존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다.

4. 프랑스령 침공

한편 존 왕은 프랑스령을 빼앗긴 것이 두고두고 억울했던지 1214년 잉글랜드 북부 귀족들의 높은 원성에도 불구하고[12] 대대적으로 세금을 거두고, 신성 로마 제국 오토 4세와 플랑드르 영주 등을 끌여들여 프랑스령을 침공했다.

이론적으로는 존 왕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아키텐에서 프랑스 남부를 공격해 필리프의 발을 묶어 둔 사이, 오토 4세의 신성 로마 제국군이 프랑스를 북부에서 공격하는 완벽한 작전인 듯했다. 그러나 프랑스 왕자 루이가 존왕의 군대를 격퇴하여 아키텐으로 후퇴했고 신성 로마 제국-기타 영주 연합군이 진격이 늦어지자, 필리프 2세가 북쪽 연합군을 요격에 나서 의 외곽 부빈에서 회전이 벌어졌다. 이 회전에서 연합군은 유리한 입장[13]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참패를 당하고 말았다.[14]

비보를 전해들은 존 왕은 얼마나 비통했는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불운하다! 이토록 운이 없는 것은 내가 주님과 화해하고 왕국을 로마 교황청에 갖다 바쳤기 때문이다!"
결국 존은 아무 소득도 없이 전쟁 비용과 동맹을 동원하는 데 지불한 막대한 금액만 고스란히 날려먹고 패하며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빈손으로 잉글랜드에 돌아와야 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_Chronicle_of_England_-_Page_226_-_John_Signs_the_Great_Charter.jpg

가뜩이나 패전과 과세로 인해 민심이 나빴던 상황이라 부빈에서 승리를 거두고 와도 모자랐을 판에, 그 막대한 세금을 낭비하고도 굴욕적으로 패배까지 한 채 아무것도 얻지 못했으니 존의 정치적 생명은 사실상 이때부터 끝장이 난 셈이었다. 존 왕이 잉글랜드로 돌아오자마자 미리 소식을 들었던 귀족들은 더 이상 세금을 못 내겠다며 반기를 들었고, 그 결과가 바로 1215년에 맺은 마그나 카르타였다.

재위 말기에는 억지로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한 것에 앙심을 품고 교황에게 이를 호소해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파문하는 등 반격을 하였다. 이에 반발한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당시 프랑스 왕세자였던 루이 8세와 내통하여 그를 옹립해 잉글랜드 왕위에 앉히려 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15] 존 왕은 말년에 이 반란을 진압한다고 애를 먹었다. 그러나 1216년 존이 급서하고 어린 헨리 3세가 그 뒤를 이어 즉위하여 반란은 흐지부지되었다.

5. 사망

사인은 다름 아닌 과식이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질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복통을 치료한답시고 익힌 고기와 과실주를 많이 먹는 처방을 스스로 내렸다가 급체로 사망했다. 사실 당시에도 이질은 청결한 환경에서 안정을 취하면 충분히 나을 수 있는 병이었지만, 하필 이때 존은 반란 진압을 위해 전쟁터에 있었기에 그럴 형편이 안 되어서 증세가 악화된 것이었다. 노팅엄의 뉴어크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임종이 다가온 시점이었다. 존은 가족들과 신하들을 불러모아 유언을 남기며 5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야사에서는 존이 죽은 뒤 그가 늑대인간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사람들이 무덤을 파헤치고 배를 갈라보는 등의 시체 훼손을 벌였다고 한다. 실제로는 우스터 대성당에 매장되었다. 상식적으로 아무리 등신 취급 받았던 왕이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한 나라의 군주인데, 그 시신을 백성들이 사사로이 파헤쳐 훼손시키도록 냅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6. 결지왕 존이 상실한 영토

파일:external/www.awesomestories.com/134000350a.gif
파란색은 필리프가 직접 지배한 직할지, 녹색은 필리프의 봉신의 영토, 노란색은 교회령, 빨간색이 잉글랜드왕의 프랑스령이다.

파일:external/www.robertsewell.ca/english1200.jpg
이것은 1200년의 지도로 1199년 리처드 1세가 죽은 다음 존에게 물려준 영토를 보여준다. 리처드가 십자군 원정에 가 있던 동안 필리프가 잉글랜드령을 일부 빼앗았지만, 리처드가 돌아오고 나서 필리프를 몰아내어 프랑스 남동부를 제외하면 1180년의 영토와 거의 변함이 없다.

이렇게 존은 저 넓고 생산력 많은 알짜배기 땅을 모조리 잃어버렸다. 당연히 후세의 평가가 좋을 수가 없다.

정식 명칭은 아니지만 1154년부터 존이 프랑스령을 완전히 상실하는 1214년까지 잉글랜드왕이 지배한 지역을 합쳐서 영국에선 앙주 제국(Angevin Empire), 프랑스에선 플랑타주네 제국(Empire Plantagenêt)이라고 부른다. 당시 프랑스령의 생산력이 엄청나서 아키텐에서 나오는 세금만으로 잉글랜드 전체의 세금과 거의 맞먹을 정도였으니, 잉글랜드가 프랑스의 절반을 계속 지배했다면 후대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지 모를 일이다. 때문에 영국인들은 " 리처드 1세가 조금만 더 살았다면..." 하고 아쉬워하며, " 앙주 제국이 계속되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What if the angevin empire survived?) 하고 영미권의 IF 놀이에서 종종 등장하는 소재이다.

7. 평가

존은 최악의 왕을 대표하지만, 엘리자베스 2세는 최고의 군주를 대표한다.
필립 해먼드 영국 외무장관. 2015년 마그나 카르타 선포 800주년 기념 정부 주관 행사 中. #[16]

영국에서의 평가는 두말할 필요 없는 영국사 최악의 암군이지만, 전투 능력은 '무딘 칼 존'이라는 조롱 어린 후세의 평가와는 달리 아주 무능하지는 않았던 걸로 보인다. 존은 직위 초기 내치나 행정 부분에서는 꽤 능력을 발휘했다고 전해진다.[17] 또한 해군의 육성, 리버풀의 건설, 스코틀랜드, 웨일스에서의 지배 확립 등에는 일정 부분 업적이 있다고도 여겨진다.

일선에서의 지휘 능력은 상당히 뛰어난 수준이었다는 말도 존재한다. 왕자 시절 어머니가 미라주성[18]에서 프랑스군에 의하여 포위되었을 때 수백 기사들만을 이끌고 이틀 만에 130km를 주파, 기습하여 역으로 포위군의 지휘부를 제압한 일이나,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몽토방[19] 성채를 공성하여 함락시킨 전과가 있다. 따라서 야전 지휘 능력은 아버지와 형을 닮아 최소 평균 이상은 되었으며, 의회에 의해 마그나 카르타가 성립되자 잉글랜드 남부로 피난하여 교황의 지지와 용병의 고용이 완료된 후 런던으로 진격하자 의기양양하던 귀족들 중 아무도 그의 군사를 막기 위해 선뜻 나서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어찌어찌 중요한 길목의 요새 로체스터 성채에서 막기는 했지만.

그러나 최일선 군사 지휘관으로서는 그럭저럭 평균 이상일지도 모르나 노르망디에서의 공격 실패나 1214년의 실패 등으로 미루어 보면 최고 군사 지휘자로서의 전략적 판단에는 분명 적지 않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뭔가 작전을 세울 때는 양면 공격 등 화려하고 멋져 보이는데, 작전이란 건 단순할수록 실행하기 쉽다는 점을 간과한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 단순하지만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작전을 세우며, 전쟁의 화신이던 형 리처드 1세나 전투보다는 모략에 능했던 군주였지만, 군사적 능력도 우수했던[20] 필리프 2세와 다른 점이다.

또한 정치, 외교적으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필리프와 전쟁 초기만 해도 잉글랜드의 프랑스령의 영주들은 존 왕을 따랐지만, 자신을 도와주던 영주를 무시한다든지 포로를 죽게 내버려 둔다든지 해서 얼마든지 제 편으로 삼을 수 있는 봉신들을 모조리 적으로 돌려버렸다. 리처드 1세는 자신을 열받게 하면 사정없이 밟아버리는 인간이었지만[21], 그 못지않게 이성적이라 쓸데없는 적을 만들지 않았다.[22] 그는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는 중 그 상처를 입힌 병사를 용서해 주는 등,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관용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리처드 1세 벌여놓은 일들의 여파로 잉글랜드의 막장스런 내정 사태를 감당할 수 없었다며 옹호하는 의견도 있는데 애초에 필리프가 지배한 영토는 존왕이 지배한 영토의 반도 안 되었고 세금 수입도 그만큼 적었다.[23] 게다가 존왕이 세금을 적게 거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존이 영지를 잃어버린 건 재정이 궁핍해 군대를 유지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프랑스령의 봉신들이 전부 필리프 2세에게 붙었기 때문인데 이것은 존 개인의 인격적인 결함이 문제이지 잉글랜드의 내정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다.

8. 가족 관계

8.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헨리 3세
(Henry III)
1207년 10월 1일 1272년 11월 16일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
슬하 2남 2녀[24]
2남 로마 왕 리하르트
(Richard, King of the Romans)
1209년 1월 5일 1272년 4월 2일 이사벨 마샬
슬하 1남
프로방스의 산치아
슬하 2남
팔켄부르크의 베아트릭스
1녀 스코틀랜드의 왕비 조앤
(Joan, Queen of Scots)
1210년 7월 22일 1238년 3월 4일 알렉산다르 2세
2녀 신성로마 제국의 황후 이자벨라
(Isabella, The Holy Roman Empress)
1214년 1241년 12월 1일 프리드리히 2세
슬하 1녀
3녀 레스터 백작부인 엘레오노르
(Eleanor, Countess of Leicester)
1215년 1275년 4월 13일 펨부로크 백작 기욤 마레샬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
슬하 4남 1녀

9. 사적인 면

9.1. 인기 없는 왕

그의 인기는 형 리처드 1세에 반비례하여 형편없이 낮으며 이미지도 상당히 좋지 않다. 대표적으로 아이반호 로빈 후드 이야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멜 브룩스 못말리는 로빈 훗이라는 코미디 영화에는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리처드 1세가 "이제부터는 잉글랜드의 화장실을 존(john)이라고 불러라"는 포고령을 내린다. 실제로 소문자로 시작하는 존(john)은 화장실이라는 속어다.

13세기 중엽의 성직자 파리의 마티외에 의하면 교황에게 파문 및 성무 금지령을 당하고,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프랑스군이 침공하는 등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자 존은 이슬람권의 무와히드 왕조에게 도움을 구했다고도 한다. 그는 군사 원조의 대가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잉글랜드를 이슬람 국가로 바꾸어 무와히드 칼리파 휘하에 두겠다고 제안했다고 기록하였다. 다만 칼리파 무함마드 앗 나시르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신앙을 내팽개치는 존의 모습에 역겨워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사실이라면 16세기 말엽 튜더 왕조 사드 왕조 간에 체결된 대스페인 동맹의 시초 격이 되는 것이다. 또한 하마터면 잉글랜드가 자발적으로 이슬람 국가로 바뀔 뻔한 일이기도 했다. 물론 기독교 신앙이 생활의 핵심이던 당대 유럽 사회의 성격 상 실제로 그런 시도를 했을 리는 없고[25], 그냥 그런 소문까지 날 정도로 악평이 자자했다는 얘기로 받아들이는게 옳다.

이미지가 매우 좋지 않아 이후 잉글랜드의 왕은 (John)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게 되었다. 거기다 스코틀랜드 존 발리올(John Balliol)이라는 왕이 잠시나마 잉글랜드의 괴뢰로 옹립된 일이 있어서 왕의 이름으로 존이라는 이름을 싫어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스튜어트 왕조 로버트 3세는 왕자 시절에는 이름이 존이었지만 이걸 꺼려서 로버트로 이름을 바꿨다. 다만 이후의 플랜태저넷 왕조에 존이라는 이름의 왕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리처드 1세 십자군 활동을 위해 잉글랜드에 막대한 세금을 부과했는데 그로 인한 민중의 궁핍까지 전부 존의 책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다만 리처드 1세가 예루살렘으로 가다가 회군해야 했던 이유가 존의 반란 때문이라서 고생하고 성과 없이 돌아오게 만든 원흉인지라 책임이 있는 건 맞으니 틀린 말도 아니다. 거기다 이 사람도 막대한 세금을 거둔 건 마찬가지이며, 추가로 보석 장신구 치장 등의 사치를 크게 부렸다. 게다가 전쟁을 하면 할수록 패배를 거듭해 영토는 계속 줄어드니 이미지가 좋아질래야 좋아질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의 성격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화나면 두렵지만 굉장히 쿨했던 친형 리처드 1세와는 다르게, 매우 쿨하지 못 했으며[26] 무엇보다 패자나 약자를 관용하는 정신이 전무했다. 이는 그의 온갖 무능과 패착이 겹쳐져 후세의 오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형제간에 확 갈리는 평가와는 별개로, 잉글랜드-영국의 왕통이 리처드 1세가 아닌 존의 후손으로 대대로 이어지게 된 점은 재미있는 점이다.

2005년 BBC에서 영국인들 대상으로 여론조사최악의 영국인 4위로 워스트 10위 안에 들어간 유일한 왕이다.[27]

10. 현대 매체에서


[1] 단순히 봉토를 못 받을 뿐만 아니라, 받을 봉토조차 남아 있지 않았기에 붙여진 별명이다. 보통 왕자로 태어나면 그래도 왕으로부터 왕의 영지 가운데 일부를 받는데, 그렇게 주어질 수 있는 영지조차 없었기에 붙여진 별명이다. 막내아들 존이 선왕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음을 볼 때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선왕 헨리 2세 말기에 아들들이 2회에 걸쳐 반란을 일으키는데, 그 가운데 첫 반란은 헨리 2세가 셋째 아들 제프리의 영지를 빼앗아 존에게 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존에게 줄 영토가 남아 있지를 않았다. [2] 사실 앤과 빅토리아는 여자 이름인 만큼 왕호로서는 겹칠 가능성이 더 적다. 여왕은 모녀계승이 일반적인 군주국이 아닌 이상 그 자체가 원래부터 드물기 때문이다. 영국은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 빅토리아 여왕이 전성기를 이끈 데다가 재위 기간도 46년과 64년으로 매우 길고 엘리자베스 2세는 아예 70년이라는 최장 기간 동안 재위한지라, 여왕의 나라라는 인식이 있는데 다른 나라랑 비교했을 때 많이 나온 편일 뿐(특히 살리카법의 적용을 받아 여왕이 없는 프랑스와 독일) 영국도 역사적으로 보면 여성 군주보다 남성 군주가 압도적으로 많다. 현재 아들/딸 상관없이 절대적 맏이계승제로 바뀌었으나 현 찰스 3세는 아들만 둘이고 찰스의 장남 윌리엄도 첫째인 조지가 아들이라 현재로서는 여왕이 다시 나올 가능성이 대단히 멀다. 거기다 사족으로 찰스 3세 역시 맏이이고 찰스 3세의 차남 해리 왕자 역시 맏이인 아치가 아들이다. [3] 왕위에 오르지 않은 영국의 왕자나 공주의 경우에는 존과 빅토리아라는 이름을 쓴 사람들이 여럿 있다. 영국에서 빅토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공주는 2명 있는데 한 명은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인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프로이센 왕국의 왕비이자 독일 제국의 황후가 됐다. 다른 한 명은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이자 에드워드 7세의 2녀인 빅토리아 공주로 이미 왕위 계승자인 오빠가 2명이나 있어서 평생 독신으로 살다 1935년에 사망했다. 존이란 이름을 가진 왕자는 에드워드 7세의 막내아들인 알렉산더 존, 조지 5세의 막내아들인 존 찰스 프랜시스가 있는데 두 명 다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이후론 존이라는 이름은 장남 같은 왕위계승자는 물론이고 다른 왕자들에게도 쓰이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 [4] 존은 필리프 2세보다 한 살 적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후대에 쓰여진 소설이 바로 월터 스콧의 대표작 《아이반호》다. [5] 형이었던 제프리(브르타뉴의 공작 조프루아 2세)가 브르타뉴 여공작 콩스탕스와 결혼해서 낳은 외아들이다. 콩스탕스는 아르튀르를 파리로 보냈고, 필리프 2세는 아르튀르를 왕세자 루이와 같이 키웠다. 제프리 사후 유복자인 아르튀르가 브르타뉴 공작위를 이었으나, 리처드 1세 사후 잉글랜드 왕위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숙부인 존과 전쟁을 벌였고 심지어 할머니 엘레오노르를 공격하기도 했다. 결국 존에게 사로잡힌 후 행방불명됐는데, 존이 아르튀르를 죽인 것으로 보인다. 아르튀르의 큰누나 엘레오노르는(할머니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이름이 같다.) 존이 잉글랜드와 브르타뉴의 상속권을 박탈하기 위해 평생 결혼시키지 않고 연금한 결과 1241년 60살의 나이로 사망했고, 작은누나 마틸다 또한 4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결국 영국이 잠시나마 차지했던 브르타뉴 공작위는 제프리가 27살의 나이로 요절한 후 브르타뉴 여공작 콘스탄스와 재혼한 남편 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알릭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6] 리처드 1세의 동생이자 존의 형. 형제들보다 먼저 죽었다. [7] 앙굴렘의 이자벨(1186/1188~1246). 이 결합이 결국은 노르망디 공작령의 상실의 단초가 되었기에 Thomas. B를 비롯한 현대 역사가들에 의하면 이자벨은 중세의 헬레네로 불린다. 존 왕의 이미지가 하도 개판이라 당대에도 존왕에게 강제로 납치당해 결혼했다는 헛소문까지 퍼졌으나 현대 역사가들은 이를 부정한다. 존 왕 사후에 이자벨은 위그 9세의 아들인 뤼지냥의 위그 10세와 재혼한다. 딸이랑 맺어주려고 인사차 만났는데 반해서 대신 결혼하였다. [8] 물론 그렇다고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의 봉신이라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잉글랜드 왕의 프랑스령에 한해서만 중세법적으로 그렇다는 것뿐. 사실 정확하게는, 잉글랜드 왕의 프랑스령은 어디까지나 잉글랜드 왕 개인이 사사로이 보유하는 것이지, 잉글랜드 왕국의 일부가 아니다. 실질적(de facto)으로 같은 인물이 다스리기에 정책적으로 같은 움직임을 보일 뿐, 프랑스 내 영지는 엄연히 법률상(de jure) 프랑스 왕국의 영토로, 프랑스 왕국의 공공 법률이 적용되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군주나 제후의 국적을 초월한 다중 신분과 그에 따른 군주·제후 개인하 영역 공동체의 존재는 중세 유럽사를 통틀어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9] 이 사람은 존이 아르튀르를 공격하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 이 문제로 반감을 품어 1214년 부빈 전투 때는 오히려 필리프에게 붙어 존 왕 측을 공격한다. [10] 육지와 강에서 동시에 적을 공격하면 큰 혼란을 줄 수도 있겠지만 무전기는커녕 시계도 없던 중세에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잘될 리가 없다. 게다가 조수 계산조차 실패해 프랑스군의 보급로도 못 끊었다. [11] 전부터 노르망디에 대한 통제권이 희미해진 상태였는데 이 지역의 귀족들이 앞다투어 프랑스 왕을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나섰다고 한다. [12] 잉글랜드 왕의 프랑스령은 국가 차원의 영토가 아닌, 왕실이 동군연합으로서 프랑스에 가진 땅, 즉 왕령지이자 사유 재산이었다. 귀족들 입장에서는 잉글랜드에서 거둔 세금을 왕 개인의 땅을 늘리는 전쟁에 소모하는 셈이니 달가울 리가 없다. [13] 프랑스군 15,000명 vs 연합군 25,000~30,000명 추정. [14] 프랑스군 사망 1,000명, 연합군 사망 1,000명+포로 약 9,000명 [15] 이를 1차 바론 전쟁이라 부른다. 자세한 사항은 헨리 3세 문서에서 확인. [16]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한 발언은 당시 재위하고 있던 군주인 만큼 어느 정도 립서비스 발언이라고 치더라도 고위 공직자가 공식 석상에서 저렇게 말할 정도니 영국인들이 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17] 하지만 이것도 약간 애매한 게 학설에 따라서는 단지 존의 치세 때 작성된 행정 관련 문서가 어쩌다 보니 이전 시대에 비해 잘 보존되었을 뿐 과연 존이 이전 왕들에 비해 더 내정을 잘 가꾼 것이 많은지는 불확실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냥 '기본은 했다' 정도. 최근에 존의 재위 기간 잉글랜드의 GDP 연구가 있는데 숫자 놀음 취급 당할 뿐이다.옆 동네 필리프 2세랑 비교당해서 [18] 프랑스 아키텐 소재 [19] 프랑스 미디피레네 소재 [20] 다만 리처드에게는 털린 걸 볼 때 리처드에 미치지는 못했다. 사실 당대에 리처드 1세보다 뛰어난 지휘관을 찾아보긴 어렵기 때문에 이걸 가지고 필리프 2세가 군사적 능력이 떨어지니 마니 하는 건 의미가 없다. [21] 괜히 악마라 불린 건 아니다. [22] 살라딘에게 먼저 협상을 제의해 혼담을 제의한 것이 리처드다. 서로 조약을 맺자 무조건으로 포로를 돌려주었으며, 살라딘의 조카에게 기사 작위를 선물하기도 했다. [23] 현대 사학자들은 존의 수입이나 부가 필리프에게 밀리지 않거나, 심지어 필리프보다 경제적으로는 우위에 있었다고 본다. 즉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패한 건 아니다. [24] 에드워드 1세, 스코틀랜드의 왕비 마거릿, 브로타뉴 공작부인 베아트리스, 랭커스터 백작 에드먼드 [25] 아무리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해서라고 한들, 국가의 정체성을 버리겠다고 공언하면서까지 외국의 도움을 받으려했다가는, 백성들로부터 매국노로 낙인이 찍혀서 당장의 권력 유지도 어렵게 된다. 먼 훗날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군주였던 요가일라 북방 십자군의 침공을 받아서 나라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자, 국교인 발트 신화를 포기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라는 조건을 받아들이면서까지 이웃한 강대국인 폴란드 왕국과 결혼동맹을 체결하고자 한 바는 있다. 하지만, 이건 당시 리투아니아인들이 숱한 외적의 침략에 지친 나머지, 알음알음으로 발트 신화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는 상황이니 가능했던 얘기다. 그리고 그나마도 결국은 발트 신화를 포기한 것에 분노한 귀족들의 반란에 숱하게 시달린 통에, 요가일라 본인이 직접 이들을 어르고 달래거나 몸소 토벌하는 피곤한 상황을 겪어야했다. 발트 신화는 유럽 사회에서 소수종교에 불과했는데도 이랬는데, 당시 절대다수가 믿었던 가톨릭 신앙을 군주가 제발로 버린다고 하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6] 인간의 용력이 전쟁의 주요 요인이었던 소위 냉병기 시대에, 초인적인 용력과 역사적인 군략을 겸비했던 리처드 1세는 그 강함만으로도 존경 내지 최소한 반란 억제책은 되었다. [27] 출처는 이 문서 상단의 틀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