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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1:52:56

기 드 투아르

파일:브르타뉴 상징 문장.svg
브르타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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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브르타뉴 공작
기 드 투아르
Guy de Thouars
이름 기 드 투아르(Guy de Thouars)
출생 미상
브르타뉴 공국 투아르 자작령
사망 1213년 4월 13일
프랑스 왕국 멘 백작령 슈미유
재위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1199년 ~ 1201년
브르타뉴 보안관
1203년 ~ 1213년
아버지 조프루아 5세 드 투아르
어머니 드니 드 뤼지냥
형제 아이머리 7세, 위그 1세, 조프루아, 레이몽 1세, 마리
배우자 브르타뉴 여공작 콩스탕스
자녀 알릭스, 카트린, 마르그리트

1. 개요2. 생애3. 가족

[clearfix]

1. 개요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2. 생애

투아르 자작 조프루아 5세와 뤼지냥 영주 위그 7세의 딸 드니 드 뤼지냥의 아들이다. 형제로 아이머리 7세[1], 위그 1세[2], 레이몽 1세[3], 마리[4]가 있었다. 1199년 10월 브르타뉴 여공작 콩스탕스와 결혼하고 콩스탕스의 남편 자격으로 브르타뉴 공작 겸 리치먼드 백작이 되었다. 1201년 콩스탕스가 사망한 뒤 물러났고, 의붓아들인 아르튀르 1세가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다.

1203년 아르튀르 1세가 존 왕에게 생포된 후 실종된 뒤, 자디 딸이자 브르타뉴 여공작 알릭스를 대신해 브르타뉴 보안관이자 알릭스의 섭정이 되었다. 1204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가 노르망디 공국을 향한 원정을 감행할 때 가담하여 3월 6일 샤토기야르 요새를 공략하고 6월 24일 루앙을 공략하는 데 일조했다. 이후 무장병 400명을 거느리고 몽생미셸 수도원을 공격했지만, 험준한 지형에 위치한 수도원을 탈환하지 못하고 후퇴하면서 불을 질렀다. 이 불은 순식간에 수도원의 북쪽에 있던 마을을 덮쳐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다. 그 후 아브랑슈 대성당을 약탈했으며, 아브랑챙과 코탕탱 반도를 성공적으로 정복했다. 이리하여 933년 노르망디 공작 기욤 1세가 자기 영역으로 삼은 이래 300년 가까이 노르망디 공국에 속했던 아브랑챙과 코탕댕 반도가 브르타뉴 공국으로 돌아왔다.

1206년, 형제인 투아르 자작 아이머리 7세가 필리프 2세에 대항해 존 왕과 손잡으라고 권유했다. 그가 이를 받아들일 기미가 보이자, 필리프 2세는 그를 보안관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나게 햇다. 얼마 후 존 왕이 브르타뉴에 상륙하는 시도가 실패하자, 필리프 2세는 그를 복직시켰다. 1209년, 파리에서 필리프 2세의 중재 아래 그와 팡티에브르 백작 알란 1세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그의 장녀 알릭스는 알란 1세의 어린 아들 앙리 1세 다보구르와 약혼하기로 했으며, 브르타뉴 귀족들이 앙리 1세 다보구르에게 경의를 표하기로 했다.

하지만 1212년 12월 29일 알란 1세가 사망하자, 필리프 2세는 계획을 바꿨다. 그는 기 드 투아르의 충성심과 권위를 그다지 확신하지 못했고, 기 드 투아르가 존 왕에게 자기 자식의 후견권을 맡길 것을 우려했다. 이에 자신의 충실한 기사인 피에르 드 드뢰를 알릭스와 짝지우기로 했다. 이리하여 알릭스와 앙리 1세 다보구르의 약혼은 파기되었고, 피에르 드 드뢰와 알릭스는 1213년 1월 27일 약혼식을 거행한 뒤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기 드 투아르는 1213년 4월 13일 멘 백작령의 슈마유에서 사망했고, 낭트 남쪽에 위치하며 아내 콩스탕스가 묻혔던 빌뇌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사후 피에르 드 드뢰와 알릭스가 브르타뉴 공동 공작으로 등극했다.

3. 가족



[1] 1152 ~ 1226, 투아르 자작(1173~1226) [2] 1156 ~ 1229/1230, 투아르 자작(1226 ~ 1230) [3] 1160 ~ 1234, 투아르 자작(1230 ~ 1234) [4] 1170 ~ ?, 쇼세로아 영주 피에르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