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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18:54:23

잔 드 팡티에브르

파일:브르타뉴 상징 문장.svg
브르타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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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브르타뉴 공작위 주장자
잔 드 팡티에브르
Jeanne de Penthièvre, duchesse de Bretagne
파일:잔 드 팡티에브르.jpg
이름 잔 드 팡티에브르(Jeanne de Penthièvre)
출생 1324년
브르타뉴 공국
사망 1384년 9월 10일 (향년 59~60세)
브르타뉴 공국 갱강
재위 브르타뉴 공국의 여공작
1341년 4월 30일 ~ 1365년 4월 12일
배우자 샤를 드 블루아 (1337년 결혼/1364년 사망)
자녀 마르그리트, 마리, 장 1세
아버지 기 7세 드 리모주
어머니 아보구르의 잔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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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르타뉴 공국의 여공작. 24년간 남편 샤를 드 블루아와 함께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을 치렀지만 오레 전투에서 남편이 패사한 뒤 브르타뉴 공작위를 포기했다.

2. 생애

1324년경 리모주 자작 기 7세 드 리모주와 아보구르 영주 앙리 4세 다보구르의 딸인 잔의 외동딸로 출생했다. 삼촌이자 브르타뉴 공작인 장 3세 드 브르타뉴는 세번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그는 이복 형제인 장 드 몽포르가 유산 상속을 놓고 자신과 오랫동안 갈등을 벌인 것에 반감을 품고 있어서, 그녀를 일찍부터 공작위 후계자로 점찍고 고급 교육을 시켜줬으며,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친척인 샤를 드 블루아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1341년 4월 30일 임종을 눈앞에 둔 장 3세가 후계자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사망했다.

장 드 몽포르는 잔과 샤를 부부가 필리프 6세를 알현하기 위해 파리로 간 틈을 타 봉기를 일으킨 뒤 프랑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 귀족 및 평민들의 지지를 토대로 낭트, 렌, 디낭, 브레스트 등 브르타뉴의 가장 중요한 도시 및 성들을 빠르게 공략했다. 이에 샤를 드 블루아는 아내의 권리를 지켜주겠다고 선언하고 그 해 9월까지 5,000명의 프랑스 군인과 2,000명의 제노바 용병을 모집한 뒤 장 드 몽포르가 근거지로 삼은 낭트로 진격했다.

1341년 10월 14 ~ 10월 16일, 샤를 드 블루아는 샹토소 전투에서 장 드 몽포르를 격파했다. 이후 장 드 몽포르는 낭트로 피신했지만, 뒤이은 낭트 공방전에서 시민들이 더 이상 그를 위해 싸우기를 거부하고 항복을 강요하자 11월 2일 샤를 드 블루아에게 항복했다. 샤를은 그가 성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약속을 파기하고 체포한 뒤 루브르 감옥에 보내버렸다. 그 후 샤를은 1341년 겨울 동안 브르타뉴 동부 전체를 공략하고 1342년 봄에는 렌을 비롯한 브르타뉴 서부 대부분을 공략했다. 그러나 장 드 몽포르의 아내인 플란데런의 잔 엔봉 공방전에서 샤를을 막아내고 잉글랜드군이 플란데런의 잔의 편을 들어 전쟁에 개입했다.

이후 프랑스의 후원을 받는 잔 드 팡티에브르 및 샤를 드 블루아 부부와 잉글랜드의 후원을 받는 장 드 몽포르와 아들 장 4세 드 브르타뉴간의 내전이 장장 24년간 이어졌다. 1347년 라 로슈데리앙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의 포로가 된 뒤 런던으로 보내진 샤를 드 블루아는 9년 후에야 50만 에퀴의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그는 오래도록 지속된 내전을 지긋지긋하게 여겨 장 4세 드 브르타뉴와 브르타뉴를 분할하는 것으로 종식하기를 희망했지만, 아내 잔은 남편의 의중을 받아들이지 않고 온전한 브르타뉴 여공작이 될 때까지 전쟁을 끝까지 이어가려 했다.

1364년 9월 29일, 장 4세 드 브르타뉴가 이끄는 몽포르 가문-잉글랜드 연합군이 샤를 드 블루아가 이끄는 블루아 가문-프랑스 동맹군을 상대로 오레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샤를 드 블루아는 전사했다. 전투 다음날, 장 4세 드 브르타뉴는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게 서신을 보내 프랑스에 충성을 바치겠으니 자신을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샤를 5세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잔 드 팡티에브르에게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려는 뜻을 접으라고 설득했다. 잔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장 4세는 1365년 4월 12일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 되고 잔에게 1372년까지 보상금을 지급하며, 잔이 팡티에브르와 아보구르 등지의 영주로서 장 4세 드 몽포르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아도 되며, 장 4세에게 남성 후손이 없으면 잔 드 팡티에브르의 남성 상속인이 공작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의 제1차 게랑드 조약이 체결되었다. 다만 여자는 브르타뉴 공국을 상속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1379년 장 4세가 프랑스군의 공세에 밀려 잉글랜드로 추방된 뒤,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브르타뉴를 왕실 직할지로 삼고 앙주 공작이자 자신의 동생인 루이 1세를 브르타뉴 총독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잔은 이 조치로 인해 자신과 아들의 권리가 침해된 것에 분노해, 자치권 유지를 희망한 대다수 브르타뉴 영주들과 함께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1379년 4월 25일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장 4세를 브르타뉴에 복귀시키기 위해 프랑스 왕국에 대적하기로 결의했다. 임시 정부는 4명의 원수와 4명의 민정 수장으로 구성되었으며, 공국을 방어할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가구당 1프랑의 세금을 거둬서 군자금을 모으기로 했다. 장 4세는 이들의 호응에 힘입어 1379년 8월 3일 셍쎄흐벙에 상륙해 브르타뉴 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샤를 5세는 브르타뉴 민심이 지극히 적대적인 상황에서 무력을 앞세워 그곳을 평정한들 장기적인 지배를 할 수 없다는 걸 인식하고, 장 4세와 협상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협상이 마무리되기 전에 사망했다. 1381년 5월 2일, 잔 드 팡티에브르는 제1차 게랑드 조약의 내용을 재확인하는 내용의 제2차 게랑드 조약을 프랑스 왕실과 체결하는 데 기여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384년 9월 10일에 갱강에서 사망했고, 갱강의 코르들리에 교회에 안장되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