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르타뉴 공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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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브르타뉴 공작 코난 2세 Conan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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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코난 2세(Conan II) | |
출생 |
1033년 또는
1034년경 브르타뉴 공국 렌 |
|
사망 |
1066년
12월 11일 노르망디 공국 콩티에 |
|
재위 |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 |
1040년 ~ 1066년 | ||
아버지 | 알란 3세 | |
어머니 | 베르테 드 블루아 | |
형제 | 하와이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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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2. 행적
1033년 또는 1034년경 브르타뉴 공국의 중심지인 렌에서 브르타뉴 공작 알란 3세와 블루아 백작 외드 2세의 딸인 베르테 드 블루아의 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하와이즈가 있었다. 1040년 10월 1일, 아버지 알란 3세가 노르망디 원정에 착수했다가 비무티에에서 중독이 의심되는 증세를 보이며 사망했다. 그 후 어머니 베르테와 삼촌 에우돈이 브르타뉴 공국의 섭정을 맡았고, 에우돈은 개인적으로 코난 2세의 후견인이 되었다. 15세기에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측근으로 알려진 익명의 성직자가 집필한 <생브리외 연대기>(Chronique de Saint-Brieuc)에 따르면, 에우돈은 공작 작위를 찬탈하고 베르테 및 브르타뉴 귀족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코난 2세를 성에 가두고 1047년까지 바깥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근거없는 이야기이며 코난 2세에게 고급 교육을 공평하게 제공했을 거라고 본다. 1045년 베르테가 멘 백작 위그 4세와 재혼하면서, 에우돈은 브르타뉴 공국의 단독 섭정으로 군림했다.1047년, 에우돈은 브르타뉴 공국의 옛 영토였던 베생과 코탕탱의 남작들을 부추겨서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도록 했다. 그는 이를 통해 두 지역을 독립시킨 뒤 자국에 병합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해 8월 10일, 기욤 2세는 발에스듄 전투에서 반란군을 섬멸했다. 프랑스 중세 역사가 노엘 이브 토네레(Noël-Yves Tonnerre, 1946 ~ )에 따르면, 에우돈은 이 실패로 인해 입지가 약해져 섭정에서 물러났고, 코난 2세가 주권을 행사했다고 한다. 반면, 스테판 모랭은 11세기와 12세기 노르망디 수도자이자 역사가 오더릭 바이탈(Orderic Vital, 1075 ~ 1141/1143)의 저서에서 에우돈이 이후에도 계속 집권했다고 밝힌 것과 교황 레오 9세가 1049년에 반포한 교령에서 그를 "브르타뉴의 공(Princes des Bretons)"으로 밝혔으며, 비슷한 시기에 렌 조폐국에서 발행한 금화에서 에우돈을 "브르타뉴 공작(dux Britanniae)"이라고 칭한 것을 근거삼아, 에우돈은 1057년까지 계속 군림했으며 코난 2세는 1047년부터 1057년까지 에우돈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고 추정한다.
1050년 또는 1051년, 낭트 백작 마티아스 1세가 후계자를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코난 2세 또는 에우돈은 낭트를 접수하려고 시도했지만, 코르누아이유 백작 알란 칸히아르의 아내이자 코난 2세의 숙모인 유디트가 낭트를 회수했다. 이후 양자간의 분쟁이 수년간 이어지다가, 1054년 유디트의 아들인 호엘 2세와 코난 2세의 누이 하와이즈가 결혼하고, 호엘 2세와 화이이즈가 낭트를 공동으로 통치하는 것으로 종식되었다.
1052년, 에우돈은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와 앙주 백작과 손잡고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를 대적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1054년 모르테메르 전투에서 기욤 2세에게 패배했다. 이후에도 기욤 2세와의 전쟁을 이어가던 에우돈은 1057년 조카 코난 2세에게 체포되어 샤르트르로 수감되었다. 이후 에우돈의 아들 조프루아 1세 드 팡티에브르가 코난 2세와 맞섰다. 1062년, 코난 2세와 조프루아 1세간의 평화 협약이 체결되면서, 에우돈은 감옥에서 풀려났다.
1064년, 코난 2세는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의 지원을 받은 콩부르 영주인 리왈론 1세 드 돌의 반란에 직면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리왈론 1세를 돌 성채에서 포위했지만, 기욤 2세가 역습을 감행하는 바람에 격퇴된 뒤 렌에 이어 디낭까지 추격당했다. 그러나 기욤 2세는 브르타뉴에 너무 깊숙이 진군했다가 보급로가 끊어지는 바람에 병사들이 기아에 시달리자 결국 노르망디로 철수해야 했다.[1] 그 후 코난 2세는 가신들의 지원을 받아 돌을 점령하고 리왈론을 추방했다. 1065년, 코난 2세는 실베스트르 드 라 게르슈, 지롱 드 샤토지롱, 수하드 다시네 등 브르타뉴 영주 30여 명과 함께 삼촌인 블루아 백작 티보 3세를 방문해 경의를 표했다.
1066년,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는 교황청으로부터 잉글랜드 왕국을 침공해도 좋다는 교령을 접수한 뒤, 브르타뉴를 포함한 주변 지역에 자신이 교황의 깃발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의 영지를 공격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자 코난 2세는 즉시 그에게 노르망디 공국을 침략할 기회를 꼭 잡을 거라고 답했다. 그 후 기욤 2세가 잉글랜드를 침공하자, 코난 2세는 1066년 말에 공세를 개시해 푸앙세를 공략한 후 뒤이어 세그레를 점령했다. 이후 공티에 성을 포위했지만, 1066년 12월 11일 공티에 성 앞에서 돌연 사망했다. 브르타뉴 역사학자 아르튀르 드 라 보더리(Arthur de La Borderie, 1827 ~ 1901)는 기욤 2세가 사주한 반역자들에 의해 독살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코난 2세는 렌의 노트르담앙생멜렌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결혼하지 않아 적합한 후계자를 낳지 못했기에, 그의 누이인 하와이즈가 코르누아이유 백작이자 낭트 백작인 남편 호엘 2세와 함께 브르타뉴 공동 공작에 선임되었다.
[1]
기욤 2세의 잉글랜드 원정을 다룬 '바이외 테피스트리'에서는 코난 2세가 디낭에서 기욤 2세에게 도시의 열쇠를 바치며 항복했다고 묘사되었지만,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브르타뉴 원정 실패를 감추려고 꾸며낸 것으로 간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