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르타뉴 공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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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브르타뉴 공작 샤를 드 블루아 Charles de Blois, Duc de Bretag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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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샤를 드 블루아(Charles de Blois) | |
출생 | 1319년 | |
프랑스 왕국 블루아 | ||
사망 | 1364년 9월 29일 (향년 44~45세) | |
브르타뉴 공국 오레 | ||
재위 |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 |
1341년 4월 30일 ~ 1364년 9월 29일 | ||
아버지 | 기 1세 드 샤티옹 | |
어머니 | 발루아의 마르그리트 | |
형제 | 루이 1세, 마리 | |
배우자 | 잔 드 팡티에브르 (1337년 결혼) | |
자녀 | 마르그리트, 마리, 장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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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24년간 아내 잔 드 팡티에브르와 함께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을 치렀지만 오레 전투에서 전사했다. 사후 복자로 시복되었다.2. 생애
1319년경 프랑스 왕국 블루아에서 블루아 백작 기 1세 드 샤티옹과 발루아 백작 샤를의 딸인 발루아의 마르그리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루이 1세, 마리[1]가 있었다. 마르그리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누이였으므로, 그는 필리프 6세의 조카였다. 1337년 6월 4일 파리에서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2세의 아들인 기 드 팡티에브르의 딸이자 브르타뉴 공작 장 3세 드 브르타뉴의 조카인 잔 드 팡티에브르와 결혼했다.장 3세 드 브르타뉴는 이복 형제인 장 드 몽포르가 유산 상속을 놓고 자신과 오랫동안 갈등을 벌인 것에 반감을 품고 있어서, 조카 잔 드 팡티에브르를 일찍부터 공작위 후계자로 점찍고 고급 교육을 시켜줬다. 그러나 1341년 4월 30일, 임종을 눈앞에 둔 장 3세가 후계자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사망했다. 1341년 9월 7일, 필리프 6세는 콩플랑에서 잔 드 팡티에브르를 브르타뉴 여공작으로 인정하고, 샤를 드 블루아를 브르타뉴의 후견인 공작으로 인정해, 브르타뉴 귀족들에게 샤를과 잔 부부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그러나 장 드 몽포르는 프랑스 왕실이 필리프 5세부터 도입한 살리카법에 근거해 여자는 공작위를 계승할 자격이 없다며 자신이 공작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드 몽포르는 잔과 샤를 부부가 필리프 6세를 알현하게 위해 파리로 간 틈을 타 프랑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 귀족 및 평민들의 지지를 토대로 군대를 일으켜 낭트, 렌, 디낭, 브레스트 등 브르타뉴의 가장 중요한 도시 및 성들을 빠르게 공략했다. 이에 샤를 드 블루아는 아내의 권리를 지켜주겠다고 선언하고 그 해 9월까지 5,000명의 프랑스 군인과 2,000명의 제노바 용병을 모집한 뒤 장 드 몽포르가 근거지로 삼은 낭트로 진격했다.
1341년 10월 14일, 샤를 드 블루아의 군대가 샹토소에 도착한 뒤 공성전에 착수했다. 장 드 몽포르는 처음엔 잉글랜드의 지원이 올 때까지 낭트에서 버티려 했다. 그러나 샤를의 뒤에 필리프 6세가 파견한 또다른 프랑스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점점 많은 추종자들이 그를 저버리고 적에게 투항하려 했다. 이에 장은 지금 당장 승부를 보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10월 16일 낭트에서 출진해 샹토소 구원에 착수했다.
당시 샤를 드 블루아는 장성들에게 공성전을 맡기고 자신은 샹토소에서 3마일 떨어진 로모(l'Humeau) 농장에 머물렀다. 몽포르의 부하들은 이곳을 급습해 샤를의 경호원들을 거의 압도했다. 그러나 샤를이 농가의 탑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항전하는 바람에 제때에 잡는 데 실패했고, 그 사이에 프랑스군이 샤를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면서 로모 농장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결국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장은 낭트로 도주했고, 많은 부하들이 프랑스 기병의 추격을 뿌리치지 못하고 죽거나 사로잡혔다.
그 후 샤를 드 블루아는 장 드 몽포르가 피신한 낭트를 포위 공격했다. 장 드 몽포르는 1341년 10월 말에 병과 민병대를 이끌고 적진을 급습했지만, 용병들이 전투 도중에 적군에 귀순하는 바람에 민병대가 몰살당하는 와중에 홀로 성안으로 도주했다. 그 후 샤를이 시신의 머리를 베어서 투석기를 통해 성내로 발사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시 의회가 장에게 항복을 강요했다. 결국 장은 더 버티지 못하고 11월 2일 샤를에게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항복했다. 샤를은 그가 성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약속을 파기하고 체포한 뒤 루브르 감옥에 보내버렸다. 그 후 샤를은 1341년 겨울 동안 브르타뉴 동부 전체를 공략하고 1342년 봄에는 렌을 비롯한 브르타뉴 서부 대부분을 공략했다.
하지만 장 드 몽포르의 아내인 잔 드 플란데런은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항전하기로 마음먹고, 1342년 5~6월 샤를 드 블루아의 공세에 맞서 엔봉 공방전을 치렀다. 얼마 후 월터 매니가 이끄는 잉글랜드 구원군이 도착하자, 프랑스군은 엔봉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후 샤를 드 블루아는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으며 잔 드 플란데런과 장 드 몽포르 및 아들 장 4세 드 몽포르를 지원하는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웠다.
1343년 1월 19일,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레스트로이트 휴전 협약을 맺었다. 그들은 3년간 휴전을 준수하기로 했고, 반은 클레멘스 6세의 추기경이 임시로 관리하기로 했다. 또한 루브르 감옥에 갇혀 있던 장 드 몽포르는 프랑스를 떠나거나 브르타뉴로 돌아가지는 못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한편 브르타뉴 공작위는 잔 드 팡티에브르가 물려받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반 주민과 지역 성직자들은 장 드 몽포르에게 충성했기에 이 합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조약이 체결된 지 몇 달 후인 1343년 9월 추기경을 몰아낸 뒤 잉글랜드군을 도시로 불러들였다. 또한 브르타뉴 지배권을 두고 경쟁하던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이 잉글랜드와 내통했다고 필리프 6세에게 모함하여 올리비에 4세를 처형당하게 해 경쟁자를 제거했다. 이에 분노한 올리비에 4세의 부인 잔 드 벨빌과 아들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은 약 9개월간 프랑스를 공격하는 해적질을 했다.
1344년 3월, 샤를 드 블루아는 반 주민들이 추기경을 몰아내고 잉글랜드군을 도시로 불러들인 것을 빌미로 삼아 평화 협약이 깨졌다고 주장하며 공새를 개시해 몽포르 파벌에 가담했던 도시들을 하나둘씩 제압했다. 1344년 3월, 샤를은 캉페르를 포위해 5월 1일에 함락시킨 뒤 1,400 ~ 2,000명 가량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몽포르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가 생포된 잉글랜드 포로들은 몸값을 받기 위해 따로 구금되었지만, 파리로 이송된 뒤 반역죄가 적용되어 처형되었다. 장 드 몽포르는 브르타뉴로 비밀리에 이동해 세력을 일으켜보려 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1345년 3월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이리하여 브르타뉴 내전이 종결되는 듯했지만, 1346년 여름 에드워드 3세가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에게 정예병 수백 명을 맡겨 장 드 몽포르와 함께 브르타뉴로 파견하면서 재개되었다. 잉글랜드군은 브르타뉴 해안지대의 몇 개 마을과 요새를 공략했다. 샤를 드 블루아는 이들을 격퇴하기 위해 병사 1,000여 명을 이끌고 북상했다. 1346년 6월 9일, 생폴드레옹 전투에서 윌리엄 드 보훈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샤를 드 블루아를 격파했다. 이후 샤를은 군대를 재건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 사이에 잉글랜드군은 7월 캉페르 탈환에 착수했다가 샤를에게 격퇴된 뒤 엔봉으로 철수했다.
당시 전황은 샤를 드 블루아에게 매우 유리했다. 장 드 몽포르는 1345년 9월 16일 엔봉에서 병사했고, 엔봉 공방전에서 맹활약했던 잔 드 플란데런은 정신병에 걸려 에드워드 3세에 의해 틱힐 성에 감금되었으며, 두 사람 사이의 아들인 장 4세 드 브르타뉴는 6살 소년에 불과했다. 브르타뉴의 대다수 지역은 대세가 기울었다고 믿고 잔 드 플란데런과 샤를 드 블루아를 섬겼다.
그러나 1346년 8월 26일 크레시 전투에서 필리프 6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완패하자. 민심은 또다시 요동쳤고, 브르타뉴의 많은 귀족들이 잉글랜드군과 은밀히 접촉했다. 1347년 5월, 중장병 1,800명, 궁수 600명, 석궁병 2,000명, 다수의 농민병을 모은 샤를은 브르타뉴의 민심을 수습하고 잉글랜드군을 브르타뉴에서 몰아내기 위해 공세를 재개하기로 했다. 그의 첫번째 목표는 라 로슈데리앙이었다. 그는 이곳을 포위 공격하면서 잉글랜드 구원군이 근처에 이르면 즉시 요격해 궤멸시키기로 했다. 5월 20일 라 로슈데리앙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마을을 에워싸고 북쪽, 동쪽, 남쪽에 3개의 요새화된 숙영지를 건설한 뒤 다양한 크기의 투석기 9개로 포격을 가했다. 가장 큰 투석기는 무게가 300파운드에 달하는 돌을 던졌고, 이로 인해 마을 주지사의 집이 부분적으로 파괴되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라 로슈 데리앙의 잉글랜드 주지사 리처드 토스햄은 그의 아내를 포함한 수많은 인사들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항복을 거부했다.
라 로슈데리앙 마을이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한 토머스 다그워스는 라 로슈데리앙에서 남서쪽으로 50마일 떨어진 카하익스에서 기마병 300명, 궁수 400명을 모은 뒤 라 로슈데리앙을 향해 행진했고, 6월 중순에 마을에서 9마일 떨어진 베강의 대수도원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후 야밤에 조우디(Jaudi) 강 동쪽 기슭을 따라 라 로슈데리앙을 향해 접근하기로 하고, 일부 부대는 조우디 강 서쪽 기슭의 도로를 따라 행군하며 소음을 일으켜서 적군의 시선을 그쪽으로 잡아끌게 했다.
6월 20일 새벽에 도로변에서 소음이 일자, 샤를은 적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전군에 가만히 서서 적의 공격을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다그워스의 잉글랜드군은 라 로슈데리앙에 도착한 뒤 마을 동쪽에 있는 숙영지를 공격했다. 그러나 사전에 대기하고 있던 프랑스군은 곧바로 반격했고, 잉글랜드군은 침착하게 대응하는 적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심지어 지휘관 다그워스는 부상을 입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대로 가면 프랑스군이 승리했을 테지만, 날이 밝을 무렵 아군이 적진을 기습 공격했다는 것을 알게 된 리처드 토스햄은 성벽을 지키는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나머지를 이끌고 마을 밖으로 출격해 샤를의 프랑스군 후방을 공격했다. 프랑스군은 이를 예상치 못했고, 많은 병사가 겁에 질러 달아났다. 진영을 떠나지 않은 다른 두 진영의 브르타뉴-프랑스군은 차례로 잉글랜드군의 공세에 시달리다가 결국 무너졌다. 다그워스는 구출되었고, 샤를은 치열한 격투를 벌이다가 17개의 부상을 입은 채 생포되었다.
라 로슈데리앙 전투에서 프랑스군이의 사상자는 600명에 달했다. 잉글랜드군의 사상자는 알려진 바 없었지만, 상당한 숫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브르타뉴 방면 프랑스군 사령관을 맡고 있었던 샤를 드 블루아는 생포된 후 치료를 받은 뒤 잉글랜드로 이송되어 수년 동안 투옥되었다. 이렇듯 몽포르 파벌과 블루아 파벌 모두 지휘관이 사라지면서 지리멸렬해졌고, 프랑스와 잉글랜드 모두 노르망디-플란데런-가스코뉴 등 다른 전선에 전념했지만 이곳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브르타뉴 내전은 소규모 군벌들과 도적단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1356년 8월 10일, 샤를 드 블루아는 700,000 골드 플로린의 몸값을 지불하기로 약속한 후 런던 탑에서 9년만에 풀려나 본국으로 귀환했다. 그는 브르타뉴의 성인인 케르마르틴의 이보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겨울에 라 로슈데리앙에서 트레귀에 대성당까지 맨발로 여행하기로 했다. 백성들은 그의 계획을 전해듣고 거리에 짚과 담요를 깔아서 샤를이 발을 상하지 않도록 해주려 했지만, 샤를은 즉시 다른 길을 택했다. 그 결과 샤를은 트레귀에 대성당에 도착했지만, 발이 너무 아파서 15주 동안 걷지 못했다. 그 후 샤를은 몽포르 가문과의 전쟁을 재개했지만, 잉글랜드와 프랑스 모두 브르타뉴 전선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데다 몽포르 가문과 샤를 모두 병력을 동원할 여력이 없어서 승부를 가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공세를 벌이지 못했다.
1363년 7월, 샤를 드 블루아는 베서렐에서 장 4세 드 브르타뉴와 대치하던 중 합의를 이루었다. 이에 따르면, 블루아는 낭트 시를 포함한 북동부를 가지고, 몽포르는 남부와 서부를 가질 예정이었다. 공작 칭호를 사용할 권리에 대해서는 프랑스 국왕 장 2세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중재를 요청하기로 했다. 그러나 잔 드 팡티에브르가 자신은 온전한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어야 한다며 합의를 거부해, 협정은 무효로 돌아갔다. 이 일은 전쟁에 지친 브르타뉴의 많은 귀족들이 블루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1364년 2월 2일, 샤를 드 블루아와 장 4세 드 브르타뉴는 아키텐 공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브르타뉴 내전에 대한 중재를 요청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1364년 7월, 잉글랜드에서 용병대를 모집한 장 4세 드 브르타뉴가 브르타뉴 서부 해안의 항구 도시들 중 블루아 가문을 지지하는 몇 안 되는 도시인 오레를 포위했다. 샤를 드 블루아는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함께 진군했다.
1364년 9월 29일 오레 외곽 북동쪽에 샤를 드 블루아의 군대가 도착하자,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포위군은 마을 북쪽에 있는 호수를 옆에 낀 채 전투 대형을 편성했다. 존 챈더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우익을 맡았고, 장 4세는 중앙 부대를 이끌었으며, 로버트 놀스의 또다른 잉글랜드군은 좌익을 맡았다. 그리고 휴 칼블리는 예비대를 이끌었다. 이에 맞서는 샤를 드 블루아의 군대 역시 3개 대열을 결성했다. 샤를 본인은 우익을 지휘했고, 게클랭은 중앙을 이끌었으며, 오세르 백작 장 3세는 좌익을 이끌었다. 누가 프랑스군 예비대를 이끌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장 4세와 샤를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사절을 보내 협상을 시도했다. 두 사람은 오랜 내전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고, 브르타뉴를 나눠 가지는 선에서 전쟁을 끝내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장군들은 그렇게 어중간하게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샤를이 추가 제안을 하려 한다면 그가 보낸 사절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특히 잉글랜드 군과 동맹한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은 아버지의 원수인 샤를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게클랭을 비롯한 블루아 지지자들 역시 비타협적으로 나왔고,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다. 협상이 잘 돼서 평화롭게 끝나기를 바랐던 양측의 많은 브르타뉴인들은 이에 실망해 탈영했다.
그 후 양측은 서로를 향해 진군했고, 잉글랜드 장궁병과 프랑스 석궁병간의 사격전이 펼쳐졌다. 이후 양측 맨앳암즈들과 창병들이 정면 충돌했다. 양자 모두 길고 잔혹한 전쟁을 이번 전투에서 끝내고 싶었기에 매우 필사적이었다. 그렇게 반나절간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진 끝에, 존 챈더스의 잉글랜드 우익 부대가 오세르 백작의 좌익 부대를 압도했다. 오세르 백작은 눈 하나를 잃고 포로가 되었고, 그의 부하들은 게클랭이 이끄는 중앙 부대로 도주했다. 이로 인해 중앙 부대의 대열이 흐트러지자, 챈더스는 이 호기를 놓치지 않고 적 중앙 부대 측면을 요격했다.
아군이 위급한 것을 본 샤를 휘하 우익 부대 상당수가 도주했고, 후방에 있던 예비대 역시 패주했다. 장 4세와 로버트 놀스는 존 챈더스와 함께 중앙의 게클랭 부대를 포위 공격했고, 예비대를 이끌던 휴 칼블리도 전장에 뛰어들었다. 결국 전의를 상실한 블루아군은 패주했고, 샤를 드 블루아는 전사했다. 게클랭은 필사적으로 항전했지만 완전히 포위되자 항복했다. 이날 전투에서 블루아 가문의 브르타뉴-프랑스 동맹군은 800명이 죽고 1,200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몽포르 가문의 브르타뉴-잉글랜드 연합군의 피해는 알려진 바 없지만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다.
전투 다음날, 장 4세 드 브르타뉴는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게 서신을 보내 프랑스에 충성을 바치겠으니 자신을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샤를 5세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잔 드 팡티에브르에게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려는 뜻을 접으라고 설득했다. 잔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장 4세는 1365년 4월 12일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 되고 잔에게 상당량의 보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받는다는 내용의 게랑드 조약을 체결했다. 이리하여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이 종식되었다.
3. 복자가 되다
샤를 드 블루아가 사망한 뒤, 브르타뉴 주민들은 갱강에 묻힌 그의 무덤을 자주 방문했고, 그를 추종했던 브르타뉴 주교들은 그를 순교자로 홍보하면서, 그의 무덤에 기도하러 오는 순례자들에게 샤를의 모습이 담긴 납 조각상을 배포했다. 1368년 2월 1일, 장 4세 드 브르타뉴가 파견한 부하들이 디낭에 있는 코르들리에 교회 예배당에 걸려 있던, 샤를 드 블루아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있는 그림을 파괴했다. 그런데 2월 3일, 그 예배당에 찾아온 신자 수백명은 그림의 잔해에서 가슴과 목 주위로 두 줄기의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목격하고, 이 잔해물을 유물로 수집했다. 생 말로의 주교 기욤 폴라는 예배당의 수호자에게 그림을 복원하라고 명령했다.1368년 9월 15일, 교황 우르바노 5세는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브르타뉴 주교들에게 서신을 보내 교황의 승인 없이 샤를을 순교자로 지명한 것에 대해 비난하고 이를 금지했으며, 그의 무덤을 순례하는 자들을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순례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찾아갔는데, 루랑 타이야르라는 일꾼은 샤를의 무덤에 찾아갔다가 통풍이 치료되었다고 주장했다. 1371년 1월 15일, 새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샤를 드 블루아의 시성 조사를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장 4세 드 브르타뉴는 교황에게 시성 조사를 중단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지만 묵살당했다.
시성 조사 과정에서, 페리괴의 프란치스코회 수도회는 <상급자의 허락을 받아(Cum permissu Superioris)>에서 샤를이 예배당을 헌정했으며, 11명이 샤를의 무덤을 순례했다가 은총을 입었다고 보고했다. 이때 3명의 잉글랜드인을 포함해 5명 이상의 몽포르 지지자들도 은총을 받았다고 한다.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집사인 앙투안 훌즈는 편마통을 치료받았으며, 잉글랜드인 코미톤은 다리가 치료되었다고 한다. 장 프랑수아는 샤를 드 블루아를 비방했다가 중병에 걸려 벙어리가 되었다가 샤를에게 사죄한 뒤 완전히 치유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보고를 종합한 그레고리오 11세는 샤를 드 블루아를 성인으로 시성하는 절차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시성 절차는 교황청의 로마 이전과 뒤이은 서방교회 대분열로 인해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끝내 집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샤를 드 블루아를 사실상 성인으로 여겼고, 교황청의 승인 없이 19세기까지 그의 축일을 기렸다. 그러던 1894년 시복 절차가 재개되었고, 1904년 12월 14일, 샤를 드 블루아는 ' 복자 블루아의 샤를(Blessed Charles of Blois)'로 시복되었다. 축일은 9월 30일이다.
4. 가족
- 잔 드 팡티에브르(1324 ~ 1384): 브르타뉴 여공작(1341 ~ 1365).
- 장 1세 드 샤티옹(1340 ~ 1404): 팡티에브르 백작, 리모주 자작, 아보구르 남작, 아베네스 영주.
- 마리 드 블루아(1345 ~ 1404): 기즈 여백작, 마옌 여남작. 앙주 공작 루이 1세의 부인.
- 마르그리트 드 블루아(? ~ 1354년 이후): 앙굴렘 백작 샤를 드 라 세르다의 부인.
[1]
1323 ~ 1363, 로렌 공작 라울과 초혼, 리누자 백작 프레데리크와 재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