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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04 11:37:28

잔 드 벨빌

파일:잔 드 벨빌.jpg
성명 잔 드 벨빌
Jeanne de Belleville
별명 브르타뉴의 암사자
La Lionne de Bretagne
생몰년도 1300년경 ~ 1359년 12월
출생지 브르타뉴 공국 벨빌
사망지 브르타뉴 공국 엔봉
아버지 모리스 4세 드 벨빌
어머니 레티스 드 파르트네이
남편 조프루아 8세 드 샤토브리앙, 기 7세 드 팡티에브르,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 월터 벤틀리
자녀 조프루아, 루이즈, 이자보, 모리스, 올리비에 5세, 기욤, 잔
직위 몽터규와 벨빌의 영주, 해적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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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르타뉴 공국의 여성 해적. 남편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을 처형한 프랑스 왕국에 복수하기 위해 프랑스 선박들을 상대로 해적질을 한 것으로 유명한 여인이다.

2. 생애

1300년경 브르타뉴 공국 벨빌에서 몽터규와 팔루아우의 귀족인 모리스 4세 드 벨빌과 레티스 드 파르트네이의 딸로 출생했다. 그녀가 속한 '몽터규 가문'은 포도주 양조, 소금 농업, 그리고 이 상품을 멀리 이베리아 반도와 잉글랜드로 전달하는 운송업을 도맡았다. 그녀는 가문의 이같은 가업 때문에 대서양의 지형과 해류를 잘 알았다. 그녀가 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1320년 이복 형제인 모리스 5세가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사망하면서, 그녀는 몽터규 영주권과 벨빌 영주권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1312년 브르타뉴 귀족 조프루아 8세 드 샤토브리앙과 결혼했고, 1326년 조프루아 8세가 사망한 뒤 1328년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2세 드 브르타뉴의 둘째 아들인 기 7세 드 팡티에브르와 재혼했다. 그러나 잔 드 팡티에브르와 결혼한 샤를 드 블루아 및 블루아 가문의 사주를 받은 반과 렌의 주교들이 두 사람의 결혼이 무효라고 주장했고, 교황 요한 22세는 1330년 2월 10일 두 사람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했다. 이후 기 드 팡티에브르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조카이기도 한 마리 드 블루아와 결혼하면서 블루아 파벌과 손잡았지만 1331년 3월 26일에 예기치 않게 사망했고, 잔 드 팡티에브르가 아버지 기 드 팡티에브르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1330년 마르쉐 영주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과 결혼한 뒤 보부아르쉬르메르에서 클리송 남동쪽의 샤토뮈르까지 걸친 남편과 자신의 광할한 영지를 관리하면서 유복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1343년, 불행이 닥쳤다. 이보다 앞선 1342년, 남편 올리비에 4세는 반 공방전을 치르던 중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혔다. 이후 프랑스의 포로가 되었던 초대 스태퍼드 백작 랄프 드 스태퍼드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매우 낮은 몸값을 치르고 풀려났다. 이로 인해 그가 반 수비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잉글랜드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이 프랑스 왕실에서 피어올랐고, 브르타뉴 방면 프랑스군 사령관 샤를 드 블루아는 그가 반역을 꾀하고 있는 게 분명하니 당장 잡아들이라고 요청했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 역시 올리비에 4세를 믿을 수 없는 인간이라 여기고 숙청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파일:Exécution_d'Olivier_IV_de_Clisson_(1343).jpg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의 처형.

얼마 후, 올리비에 4세와 15명의 브르타뉴 영주들은 프랑스 땅에서 열리는 토너먼트에 초대받고 그곳으로 향했다가 도중에 체포된 뒤 파리로 이송되었다. 잔은 어떻게든 남편을 구하기 위해 프랑스 국왕의 하사관에게 뇌물을 건넸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올리비에 4세는 1343년 8월 2일 레 알르(Les Halles)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확실한 물증이 없었던 데다 수급을 낭트의 소베투 성문에 내걸고 나머지 시신을 파리 성문에 내거는 조치가 내려졌기에 브르타뉴 귀족들에게 깊은 충격을 안겼다.

1343년 8월 26일, 잔 드 벨빌은 왕의 하사관에게 뇌물을 주려 한 혐의로 기소되어 추방과 재산 몰수를 선고받았다. 이에 분노한 잔은 어린 두 아들 올리비에와 기욤을 데리고 낭트 성문에 전시된 올리비에 4세의 머리를 보여주며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때까지 투쟁하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그 후 그녀는 남편과 자신의 영지를 모조리 매각해 마련한 자금을 토대로 400명 가량의 병사를 모집한 뒤 르 비뇽 인근의 투푸 성으로 향했다. 그녀는 부하들에게 주변 숲에 숨으라고 지시한 뒤 남자 40명만 데리고 성 입구에 와서 성문을 열라고 요청했다. 아직 올리비에 4세의 처형을 알지 못했던 수비대장이 도개교를 내리고 환영하자, 잔은 성문을 즉시 장악한 뒤 숲에 숨어 있던 병사들을 성내로 투입해 수비대 전체를 학살했다. 다만 한 사람만은 일부러 살려서 프랑스 진영으로 보내,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리게 했다. 이후 낭트에서 남동쪽으로 약 20km 떨어진 테보 성을 습격해 역시 수비대를 학살하고 한 사람만 살려서 적진으로 보냈다.

그 후 상선 2척을 전선으로 개조했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이 상선들은 검은 색으로 칠해졌다고 하며, 그녀가 타고 다니는 기함 이름을 '나의 복수'라고 칭했다고 한다. 그 후 그녀는 두 아들과 함께 대서양을 활보하면서 프랑스 상선들을 꾸준히 습격했다. 그녀는 갑옷과 사슬 목가리개를 입고 손에 검을 들고 앞장서서 싸워서 상선이 싣고 다니던 모든 물자를 빼앗고 선원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러한 그녀의 해적 활동이 9개월간 이어지자, 프랑스 함대가 보다못해 진압에 나섰다. 그 결과 프랑스 함대가 잔의 배를 공략했지만, 그녀는 두 아들과 함께 쪽배를 타고 탈출했다. 이후 닷새간 물과 음식을 먹지 못한 채 표류했고, 잔의 두 아들 중 한 명인 기욤은 열사병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그러다가 표류 6일째 되던 날 장 드 몽포르의 지지자들에게 구조된 뒤 모를레에 이송되었다.

1349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기사 중 한 명인 월터 벤틀리와 네번째로 결혼했다. 벤틀리는 잉글랜드에 협조하던 브르타뉴 영주 라울 드 카우르가 프랑스로부터 탈취한 잔 드 벨빌의 성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이에 분노한 라울이 벤틀리와 전쟁을 벌이려 하자, 에드워드 3세가 중재에 나섰다. 그해 10월, 에드워드 3세는 벤틀리가 이 성을 갖고 라울에게 보상금을 지불하게 했다. 그러나 라울은 이 판결에 불만을 품고 프랑스 편으로 돌아섰다. 이후 그녀는 엔봉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359년 12월 남편 벤틀리와 함께 중세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다. 두 사람은 생전에 자식을 낳지 못했고, 그들의 영지는 잔 드 벨빌이 전 남편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에게 넘어갔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