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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16:27:38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

성명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
Olivier IV de Clisson
생몰년도 1300년경 ~ 1343년 2월 2일
출생지 브르타뉴 공국 클리송 성
사망지 프랑스 왕국 레 알르
아버지 올리비에 3세 드 클리송
어머니 이자보 드 크라옹
자녀 아모리, 마호트, 고티에, 이자벨
아내 블랑슈 드 부빌, 잔 드 벨빌
자녀 장, 이자보, 모리스, 올리비에 5세, 기욤, 잔
직위 기사, 마르쉐 영주, 브르타뉴 방면 프랑스군 사령관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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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르타뉴 공국 기사. 백년 전쟁 시기 프랑스 왕국의 편에 서서 잉글랜드군에 대적했지만, 반 공방전에서 사로잡힌 후 수년간 옥고를 치른 뒤 풀려났다가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의심을 사는 바람에 처형되었다.

2. 생애

브르타뉴 공국 클리송 성에서 브르타뉴 기사이자 마르쉐 영주인 올리비에 3세 드 클리송과 크라옹 영주 모리스 6세의 딸인 이자보 드 크라옹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블란디나이스 영주인 아모리, 마호트, 고티에, 이자벨이 있었다. 1324년 5월 31일부터 11월 7일까지 가스코뉴를 침공한 프랑스군에 기사 신분으로 가담했으며, 1337년 프랑스 순경 라울 1세 드 브리엔의 지휘 아래 가스코뉴와 랑그독 방면 원정에 참여했다. 1338년 베너렛 기사로 승진했으며, 가스코뉴에서 프랑스 국왕을 대신해 작전을 수행하는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 휘하 기사가 되었다.

1341년 4월 30일 브르타뉴 공작 장 3세 드 브르타뉴가 사망한 뒤 형제 아모리, 고티에와 함께 잔 드 팡티에브르 샤를 드 블루아 부부 편에 서서 장 드 몽포르 및 몽포르 가문을 지원하는 잉글랜드군에 대적했다.1342년 1월, 클리송 성을 샤를 드 블루아를 돕기 위해 파견된 프랑스 국왕의 원수인 로베르 8세 베르트랑 드 브릭퀘벡의 본부로 제공했다. 형제 고티에는 브레스트 해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또다른 형제 아모리는 쥐공레락스를 지키다가 잉글랜드군에 체포된 뒤 잉글랜드군에 귀순한 후 몽포르 세력으로 편을 바꿨다.

1342년 11월, 올리비에 4세는 로베르 3세 다르투아를 앞세운 잉글랜드군 10,000명에 대항해 반 시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결사적으로 항전해, 삼면에서 포위 공격해온 잉글랜드군을 격퇴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계략을 통해 성을 공략하기로 했다. 어느 날 밤, 로베르는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와 함께 반 성문 앞에 불을 피워서 수비대의 시선을 그쪽으로 끌어들였다. 그 동안 월터 매니가 이끄는 소규모 장병들이 수비대가 비워두고 있던 성벽을 기어올라간 뒤 성이 함락당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소란을 피웠다. 이에 수비대는 전의를 급격히 상실해 순식간에 와해되었고, 잉글랜드군은 매니가 열어준 성문을 통해 시내로 들어가 여전히 싸우려 하는 적병들을 압도했다. 플란데런의 잔은 다음날 반에 도착한 뒤 닷새 동안 머물다가 로베르에게 반 성의 권리를 넘기고 월터 매니와 함께 엔봉으로 돌아갔다.

한편, 올리비에 4세는 성이 함락되었을 때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는 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격분해 12,600명의 병력을 모아서 반으로 향했다. 그 해 11월 올리비에 4세가 들이닥쳤을 때, 이전 공성전 때 파괴되었던 성벽은 아직 완전히 수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다른 잉글랜드군은 렌으로 가버렸기에 조기에 구원하러 올 수 없었다. 로베르는 최선을 다해 항전했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했고, 중상을 입은 뒤 런던으로 이송되었으나 얼마 후 사망했다. 반은 철저하게 약탈당한 뒤 올리비에에게 재귀속되었다.

이 무렵 잉글랜드 본군을 이끌고 브레스트에 상륙한 에드워드 3세는 반이 재차 함락되었으며 로베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아르투아 백작의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하고 반으로 진격했다. 1342년 12월 5일 반을 포위한 에드워드 3세는 주변 마을을 모조리 약탈했고 성을 수시로 공격했다. 올리비에 4세는 이에 맞서 종종 출격해 잉글랜드군을 괴롭혔는데, 그 과정에서 그만 생포되었다. 하지만 수비대는 지휘관이 포로가 된 상황에서도 항복을 거부하고 결사적으로 항전했고, 스태퍼드 백작 랄프를 사로잡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 후 프랑스와 잉글랜드간의 휴전 협상이 이어진 끝에, 1343년 1월 19일 레스트로이트 휴전 협약이 체결되면서 3년간 휴전이 성립되었다.

반 수비를 맡다가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혔던 올리비에 4세는 잉글랜드로 끌려갔다가 얼마 안가서 반 수비대가 사로잡았던 스태퍼드 백작 랄프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매우 낮은 몸값을 치르고 풀려났다. 이로 인해 그가 반 수비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잉글랜드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이 프랑스 왕실에서 피어올랐고, 샤를 드 블루아는 그가 반역을 꾀하고 있는 게 분명하니 당장 잡아들이라고 요청했다. 필리프 6세 역시 올리비에 4세를 믿을 수 없는 인간이라 여기고 숙청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파일:Exécution_d'Olivier_IV_de_Clisson_(1343).jpg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의 처형.

얼마 후, 올리비에 4세와 15명의 브르타뉴 영주들은 프랑스 땅에서 열리는 토너먼트에 초대받고 그곳으로 향했다가 도중에 체포된 뒤 파리로 이송되었다. 올리비에 4세의 아내 잔 드 벨빌은 남편을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올리비에 4세는 1343년 8월 2일 레 알르(Les Halles)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확실한 물증이 없었던 데다 수급을 낭트의 소베투 성문에 내걸고 나머지 시신을 파리 성문에 내거는 조치가 내려졌기에 브르타뉴 귀족들에게 깊은 충격을 안겼다.

이후 올리비에 4세의 미망인 잔 드 벨빌은 왕의 하사관에게 뇌물을 주려 한 혐의로 기소되어 추방과 재산 몰수를 선고받았다. 이에 분노한 그녀는 두 아들 올리비에와 기욤을 거느리고 2척의 배에 탑승한 뒤 프랑스 선박을 상대로 해적 행위를 벌이고 전 재산을 털어 군대를 양성하면서 브르타뉴 귀족들에게 프랑스 왕의 폭정에 맞서 싸우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몇 달 후 프랑스 국왕의 일부 군함이 이들의 배를 나포해버렸고, 잔 드 벨빌은 두 아들과 함께 쪽배를 타고 탈출했지만 5일간 표류하면서 아들 기욤을 잃었다. 이후 잔과 남은 아들 올리비에는 몽포르 가문 지지자들에게 구조된 뒤 모를레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올리비에는 훗날 잉글랜드-브르타뉴 군대의 수장을 맡아 백년전쟁에 뛰어들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