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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왕국 룩셈부르크 왕조 초대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 Jan Lucembursk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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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체코어 |
얀 루쳄부르스키 (Jan Lucemburský) |
독일어 |
요한 폰 룩셈부르크 (Johann von Luxemburg) |
|
룩셈부르크어 |
요한 부 룩셈부르크 (Johann vu Lëtzebuerg) |
|
출생 | 1296년 8월 10일 | |
룩셈부르크 백국 룩셈부르크 | ||
사망 | 1346년 8월 26일 (향년 50세) | |
프랑스 왕국 크레시 | ||
재위 |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 |
1310년 8월 31일 ~ 1346년 8월 26일 | ||
룩셈부르크, 아를롱, 뒤르비 백작 | ||
1313년 8월 24일 ~ 1346년 8월 26일 | ||
배우자 | 엘리슈카 프르셰미슬로브나 (1310년 결혼 / 1330년 사망) | |
부르봉의 베아트리스 (1334년 결혼) | ||
아버지 | 하인리히 7세 | |
어머니 | 브라반트의 마르가레타 | |
형제 | 마리, 베아트릭스 | |
자녀 | 마르가레타, 보나, 카를 4세, 오타카르, 요한 하인리히, 안네, 엘리자베트, 벤첼 1세, 니콜라우스( 사생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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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룩셈부르크 왕조의 첫 보헤미아 왕국 국왕.2. 생애
2.1. 초년기
1296년 8월 10일 룩셈부르크에서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7세와 브라반트 공작 장 1세의 딸 마르가레타의 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마리[1], 베아트릭스[2]가 있었다. 어렸을 때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궁정에서 교육받았으며, 1308년 11월 27일 아버지가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린 황제선거에서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1309년, 보헤미아 귀족들은 무능한 행보만 보이는 인드르지흐 코루탄스키에게 반감을 품고 새로운 군주를 물색한 끝에 하인리히 7세의 아들인 요한을 새 국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1309년 8월 14일, 콘라드 즈브라슬라프스키와 페트르 지타프스키가 하일브론에서 하인리히 7세와 논의한 끝에, 하인리히 7세의 아들 요한과 바츨라프 2세의 딸 엘리슈카를 결혼시키고 요한을 보헤미아 국왕으로 옹립하는 대가로 기존의 특권을 인정받고 새로운 특권을 부여받기로 합의했다. 하인리히 7세는 1309년 9월 슈피르에서 제국 의회를 열고, 지난날 루돌프 1세를 앞세워 보헤미아 왕위를 잠시 차지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이 보헤미아 왕위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자신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는 합의를 받아냈다. 그 대신, 그는 은화 50,000 흐리브냐를 합스부르크 가문에 넘겨주며, 모라바도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로 삼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인드르지흐는 곧 있을 룩셈부르크 가문의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엘리슈카가 하인리히 7세의 아들 요한과 결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를 마이센 남작인 베르고보의 오토와 강제로 결혼시키려 했다. 그러나 엘리슈카는 이를 따르지 않기로 결심하고, 1310년 5월 28일 비밀리에 프라하를 탈출해 비셰흐라드로 도주했다. 당시 보헤미아의 정권에 참여했지만 인드르지흐에게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배신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바르텐베르크의 얀이 엘리슈카를 비셰흐라드에서 맞이한 뒤 그녀가 보헤미아를 떠나 하인리히 7세의 궁정에 갈 수 있게 해줬다.
1310년 6월 중순, 하인리히 7세의 군대가 보헤미아 국경을 넘어 프라하로 진군했다. 이들은 곧 프라하 성 앞에서 마이센-케른텐 연합군과 격돌해 완승을 거두고 프라하를 장악했다. 인드르지흐는 프라하 성채에 숨어서 저항을 이어갔지만, 하인리히 7세에게 뇌물 공세를 받은 많은 보헤미아 귀족들은 1310년 7월 25일에 열린 프랑크푸르트 제국 의회에 대표단을 파견해 하인리히 7세의 아들 요한이 9월 1일에 엘리슈카와 결혼하고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로 등극하는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맹세했다. 베틴 가문의 마이센 변경백 프리드리히 1세는 이에 맞서 인드르지흐를 돕기 위해 아들 프리드리히 2세가 이끄는 또다른 군대를 파견해 쿠트나 호라를 탈환했고, 리히텐부르크의 올드르지흐 등 일부 보헤미아 귀족들은 인드르지흐를 여전히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1310년 9월 초, 마이센군은 프라하를 포위하고 탈환 작전에 돌입해 9월 14일에 공략했다. 이후 인드르지흐가 프라하 성에 여전히 숨어 있는 동안, 마이센 변경백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사실상 보헤미아 왕국 전체를 장악했다. 10월 18일, 하인리히 7세가 급파한 룩셈부르크 본대가 보헤미아로 진입했고, 프라하 주교 데치체의 얀과 리페의 인드르지흐 등이 이들에게 귀순했다. 11월 19일, 룩셈부르크군은 쿠트나 호라를 포위 공격했지만 케른텐 원수 아우펜슈타인의 하인리히가 결사적으로 항전했기 때문에 공략에 실패했다. 이에 룩셈부르크군은 쿠트나 호라를 내버려두고 프라하로 진군해 11월 28일 그 앞에 진영을 세웠다. 그러나 프라하 공략도 실패했고, 겨울이 닥치면서 룩셈부르크 진영 내부에서 회의론이 강하게 일었다. 그러던 1310년 12월 3일 일부 프라하 시민들이 성문을 몰래 열어주자, 룩셈부르크군이 즉시 프라하 시내로 진입해 "평화, 평화, 평화!"를 외쳤다. 그들은 도시 전체를 장악하고 마이센인과 케른텐인을 쫓아냈다. 이제 더는 가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인드르지흐와 아내 안나는 자신들의 신변을 보장받고 티롤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대가로 항복을 선언하고 12월 9일 프라하를 떠났다.
2.2. 보헤미아 국왕으로서의 통치
1311년 2월 7일 일요일, 프라하성의 성 비타 대성당에서 보헤미아의 새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하인리히 7세는 보헤미아 귀족들이 아들을 왕으로 받드는 대신 보헤미아인만 공직을 맡는 것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얀이 등극한 뒤 보헤미아 출신이 아닌 호헨로헤의 알브레히트, 팔켄슈타인의 필리프, 풀트의 하인리히가 고문에 발탁되었고, 마인츠 대주교인 페터 폰 아스펠트가 왕실 의회의 수장을 맡았다. 비록 리페의 인드르지흐가 보헤미아의 최고 원수 직위를 맡았고, 베르템베르크의 얀이 최고 궁재를 맡았으며, 로쥼베르크의 페트르가 최고 시중을 역임하는 등 보헤미아 귀족들이 주요 요직을 차지했지만, 많은 이가 하인리히 7세와 얀이 약속을 위반했다며 불만을 품었다. 한편, 왕위에 올랐을 당시 14살에 불과했던 얀은 자신보다 4살 많고 프르셰미슬 왕조 출신인 아내 엘리슈카에게 전적으로 의지했고, 엘리슈카는 보헤미아의 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하인리히 7세는 보헤미아 왕위에 아들을 앉힌 뒤 1311년 1월 롬바르디아의 왕위를 차지했고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5세의 도움을 얻어 피에몬테와 롬바르디아의 도시들을 굴복시켰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로마로 진군했지만 나폴리 왕국의 국왕 로베르토를 위시한 구엘프 파벌과의 전쟁에 휘말려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1313년 8월 24일 시에나 공방전을 치르던 중 열병에 걸려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버지가 사망했을 당시 17살이었던 얀은 초기에는 룩셈부르크 가문 추종자들의 후원으로 독일왕으로 선출되기를 원했지만, 하인리히 7세의 이탈리아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룩셈부르크 가문 자체 병력이 약화된 데다 보헤미아 귀족들이 이 때를 틈타 봉기를 일으킬 조짐을 보이면서 독일왕위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비텔스바흐 가문의 일원인 바에이른 공작 루트비히 4세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인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1세[3]가 경쟁하는 것을 한동안 지켜보다가 루트비히 4세의 편에 서기로 하고 황제선거에서 루트비히 4세에게 투표했다.
그 결과 루트비히 4세는 보헤미아 왕국,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발데마르, 작센-라우엔부르크 공작 요한 2세 등 5개의 표를 확보해, 전 보헤미아 국왕이자 케른텐 공작 하인리히, 쾰른 대주교 하인리히 2세, 라인 궁정백이자 루트비히 4세의 형인 루돌프, 작센-비텐베르크 공작 루돌프 1세 등에게서 4개 표를 확보한 프리드리히 1세를 제치고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루트비히 4세는 아헨에서 대관식을 거행했지만, 프리드리히 1세는 이에 불복하고 쾰른 대주교 하인리히 2세의 주관하에 쾰른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리하여 신성 로마 제국에 두 명의 독일왕이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얀은 루트비히 4세를 지원한 대가로 슐레지엔과 마이센, 에거, 오버팔츠 지역을 수여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314년, 헝가리 대귀족 챠크 마테 3세가 프리드리히 1세와 손을 잡고 얀으로부터 모라비아를 탈취하기 위한 원정을 개시했다. 마테 3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은 브루모프 성을 공략하고 불태우는 등 기세등등했다. 얀은 이에 맞서기 위해 1,500명의 군대를 프라하에 집결시킨 뒤 1315년 5월 21일 모라비아로 행진했다. 보헤미아군은 마테 3세가 통제하고 있던 베셀리 성과 벨루스 성을 탈환한 뒤, 7월에 모라바 강 위의 섬에 설치된 훌리치 성 인근에 이르렀다. 마테 3세는 이에 대응해 7월 12일 성에서 출격해 적진을 급습했다. 보헤미아군은 처음에는 적군의 갑작스러운 급습에 당황해 퇴각했고, 얀 본인도 한 때는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드라지체에서 보헤미아군이 전열을 정비해 헝가리군을 야전에서 격파해 홀리치 성으로 몰아냈다. 그러나 뒤이은 홀리치 성 공방전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얀은 후일을 기약하며 철군했다.
보헤미아로 귀환한 뒤, 얀은 보헤미아에서 발발한 심각한 정쟁에 직면했다. 당시 보헤미아 정계는 얀의 아내 엘리슈카와 전임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2세와 루돌프 1세의 미망인이었던 리체차 엘즈비에타간의 정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엘즈비에타는 리페의 대귀족 인드르지흐와 연인 관계를 맺고 보헤미아의 내정에 깊이 관여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엘리슈카는 남편을 설득해 1315년 10월 리페의 인드르지흐를 체포하게 했다. 그러자 보헤미아 귀족들은 룩셈부르크 가문이 보헤미아 귀족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려 든다며 거세게 반발했고, 얀은 어쩔 수 없이 티르조프 성채에 갇혀 있던 리페의 인드르지흐를 반년 만에 석방시켰다.
얀은 보헤미아의 정세가 매우 불안해져 자신의 생명마저 위협받자 룩셈부르크로 이동한 뒤 군대를 파견해 보헤미아를 안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보헤미아 귀족들은 사병을 동원해 거세게 맞섰고, 룩셈부르크군은 보헤미아를 장악하지 못했다. 얀은 이 상황에 질려 보헤미아 왕위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지만, 주요 지지자인 얀이 이대로 무너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루트비히 4세가 평화 협상을 중재했다. 그 결과 1318년 4월 24일 도마즐리체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보헤미아 귀족들은 얀의 대관식이 거행되었을 때 약속했던 특권을 그대로 인정받았고, 보헤미아 정부 수장은 리페의 인드르지흐가 맡았다. 엘리슈카 왕비는 이 결과에 깊은 불만을 품고, 남편이 몹시 무기력하고 한심한 남자라고 여겼다. 이로 인해 얀과 엘리슈카 왕비간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그러던 1319년, 리페의 인드르지흐가 얀에게 엘리슈카 왕비가 아들 카렐의 후견인을 맡고 있던 발데크의 빌렘 자이츠와 손잡고 남편을 보헤미아 왕위에서 폐위시키고 카렐을 보헤미아의 새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했다. 얀은 이를 믿고 엘리슈카가 있던 로케트 성에 군대를 급파해 카렐을 비롯한 그녀의 세 자녀를 빼앗았다. 이에 분노한 엘리슈카는 발데크의 빌렘 자이츠와 함께 프라하를 점거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얀은 토벌대를 급파했고, 엘리슈카는 크게 패한 뒤 멜니크로 도주했다. 하지만 발데크의 빌렘 자이츠는 프라하에서 성공적으로 농성했고, 얀은 빌렘 자이츠와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자신을 보헤미아 국왕으로 인정하고 엘리슈카와의 관계를 끊는 대가로 그를 사면하기로 했다. 이후 얀은 보헤미아의 통치를 리체차 엘즈비에타와 리페의 인드르지흐에게 일임했으며, 가끔씩 국경지대에서 공물을 받는 것 외에는 보헤미아에 다시는 들리지 않았다. 한편 카를은 어머니 엘리슈카로부터 떨어져 프랑스에서 지냈고, 엘리슈카는 바이에른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보헤미아로 돌아왔지만 남편으로부터 박대당한 여파로 결핵에 걸려 사망했다.
1333년 8월, 얀의 장기간 부재로 인해 왕국의 상태가 엉망이 되었다며 불만을 품고 있던 보헤미아 귀족들은 얀의 장남 카렐을 찾아가 보헤미아로 와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아버지의 대리인으로서 외교 활동을 수행하고 있던 카렐은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보헤미아로 들어가서 프라하에서 통치를 행사했다. 얀은 자신의 허락 없이 보헤미아를 통치하는 아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딱히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렐이 점점 보헤미아에서 권력 기반을 강화하면서 왕권을 굳건히 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일부 보헤미아 귀족들은 부자간의 갈등을 부추겼다. 급기야 1337년 얀의 두번째 아내 베아트리스가 프라하에서 보헤미아 왕비로서 대관식을 거행했을 때 보헤미아인들의 심한 야유를 받고 그곳을 떠나야 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얀은 모욕감을 느끼고 아들에게 강한 압력을 가해 프라하를 떠나 브르노로 가게 했으며 모라바 변경백의 연금이 카렐에게 전달되는 것을 금지했다. 이렇듯 부자간의 갈등이 심화되었지만, 루트비히 4세와 룩셈부르크 가문간의 정쟁이 벌어지자, 부자는 결국 화해했다. 1341년 6월 11일, 얀은 보헤미아 토지 의회의 기념 회의를 소집한 뒤 귀족, 성직자 대표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카렐이 보헤미아 왕위를 물려받을 것임을 공표했다.
2.3. 외교 정책
얀은 룩셈부르크에 기거하면서 외교 정책에 초점을 맞췄다. 1320년 루트비히 4세로부터 상라우지츠를 받아냈고, 1322년 9월 22일 뮐도르프 전투에 참여해 루트비히 4세가 프리드리히 1세를 격파하고 포로로 삼는 데 기여한 뒤 일전에 약속받았던 에거를 수여받았다. 또한, 그는 바츨라프 2세 이래로 보헤미아 역대 국왕들이 내세웠던 폴란드 왕국 왕위에 본격적으로 도전했다. 1318년 6월 20~23일 술레오프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폴란드 성직자 대표 전원이 브와디스와프 1세를 폴란드 국왕으로 옹립하고 아비뇽 교황청에 이를 승인받기 위한 사절단을 파견하자, 그는 폴란드 국왕으로서의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교황 요한 22세는 이 때문에 결정을 미루다가, 브와디스와프가 성 베드로의 날 계산 방법을 교황권에 더 유리하게 변경하겠다는 제안을 하자 1319년 8월 20일에 브와디스와프의 대관식이 얀 루쳄부르스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정하고 대관식을 승인했다. 하지만 얀은 대관식이 전통적인 장소인 그니에즈노가 아닌 크라쿠프에서 거행된 것을 빌미삼아 브와디스와프는 단지 크라쿠프의 왕일 뿐이며, 폴란드 전체의 왕은 바로 자신이라고 주장했다.이후 얀은 브와디스와프 1세에 대적하는 튜튼 기사단과 동맹을 맺었고, 1327년 폴란드와 튜튼 기사단간의 전쟁이 발발한 틈을 타 1327년 2월에 브와디스와프 1세의 공세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지 실롱스크의 공작들을 오파바로 불러들인 뒤 그들을 지켜주는 대가로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1세가 튜튼 기사단을 상대로 국경 지대에서 연이어 전투를 치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얀은 본격적으로 폴란드와의 전쟁에 착수하기로 결심했다. 1329년, 얀은 튜튼 기사단의 지원을 받아 도브쥔을 공략한 뒤 튜튼 기사단에게 넘겨줬다. 여기에 프워츠크 공작 볼레스와프도 그해 3월에 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331년, 얀은 디트리히 폰 알텐부르크가 지휘하는 튜튼 기사단과 함께 폴란드를 협공해 칼리시 성벽 아래에서 합류하기로 합의했다. 그해 중반기에 원정을 개시한 튜튼 기사단은 피즈드리 마을 인근에서 폴란드군을 격파하고 그니에즈노 일대를 약탈했다. 그러나 얀은 당초 합의했던 것과는 달리 시비드니차 공작 볼코 2세의 저항으로 인해 전진하지 못하다가 그워구프 공작 프셰미수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워구프로 방향을 돌려 그해 10월 2일에 함락시켰다. 이 때문에 홀로 폴란드군과 대적하게 된 튜튼 기사단은 일련의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1333년 3월 2일, 브와디스와프 1세의 뒤를 이어 폴란드 왕위에 오른 카지미에시 3세는 튜튼 기사단과 보헤미아 왕국을 상대하는 전쟁을 조속히 끝내고 화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튜튼 기사단과 맺었던 휴전 협약을 최대한 갱신해 시간을 벌면서, 보헤미아 왕국과의 평화 협상에 중점을 두었다. 얀이 1332년 8월 26일 튜튼 기사단에게 "크라쿠프의 왕과 어떠한 협정도 체결하지 않겠다"라고 약속하는 문서를 발행한 바 있었기 때문에,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보헤미아 국왕이 협상에 응하게 만들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차지하고 있던 비텔스바흐 가문과 동맹을 맺기로 했다.
1333년 7월 31일, 카지미에시 3세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자 루트비히 4세의 맏아들인 루트비히 5세와 약탈을 일삼는 무법자들에 맞서 국경지대에서 양군이 2년간 긴밀한 협력을 하자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1335년 4월 케른텐 공작 하인리히 6세가 사망하자, 그의 영지를 놓고 보헤미아 왕국을 거머쥐고 있던 룩셈부르크 가문, 오스트리아 공국과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거머쥐고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 그리고 비텔스바흐 가문간의 경쟁이 벌어졌다. 카지미에시 3세는 이 기회를 틈타 비텔스바흐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에 사절단을 꾸준히 보내서 룩셈부르크 가문을 고립시키고자 했다. 1335년 5월 16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대폴란드 귀족으로 구성된 폴란드 대표단이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루트비히 5세와 예비 동맹을 체결했다. 여기에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도 폴란드와 손잡는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얀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인지하고 카지미에시 3세와 협상을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카렐을 폴란드로 파견했다. 카지미에시 3세는 산도미에시에서 카렐과 만나 협상한 끝에 1335년 5월 28일에 1336년 7월 24일까지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면서 양자가 휴전을 위반할 경우 칼리시와 브로츠와프에 특별히 설립된 법원에 의해 처벌받기로 했다. 튜튼 기사단은 이 협상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보헤미아 왕국과 튜튼 기사단간의 협력 관계에 금이 갔다.
이렇게 룩셈부르크 가문과 휴전 합의를 맺은 후, 카지미에시 3세는 포즈난 총독 미코와이, 포즈난 영주 이브노 야로스와프, 대폴란드 재상 오토 등을 호이나로 보내 비텔스바흐 대표단과 협상하게 했다. 그 결과 1335년 6월 20일에 카지미에시 3세의 딸인 쿠네군다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루트비히 5세를 결혼시키고 양자가 상호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이 협약 비준 및 문서 교환 날짜와 장소는 9월 8일 비엘렌 또는 도비에그니에보로 정해졌다. 하지만 카지미에시 3세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비텔스바흐 가문과의 협약 비준 날짜를 계속 미뤘고, 확실한 약속을 하는 것도 피했다. 당시 비텔스바흐 가문은 폴란드 왕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교황청과 심각한 갈등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협약을 체결했다가 교황청이 폴란드를 적대시하게 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얀에게 계속 압력을 가하는 용도로 활용할 뿐이었다.
1335년 8월, 카지미에시 3세는 대표단에게 양보의 한계를 설정하는 서면 위임장을 주고 트렌첸으로 파견했다. 얀은 카렐을 대표로 내세우고 협상에 진지하게 응했다. 며칠간의 협상 끝에, 8월 24일에 얀과 카렐은 폴란드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할 준비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문서가 발행되었다. 카지미에시 3세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 이런 선언을 이끌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9세기 역사가들은 카지미에시 3세가 실롱스크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완전히 포기했다고 추정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실롱스크와 마조프셰에 대한 보헤미아 왕국의 소유권을 침해하지 않겠으며, 해당 지역 공작들에게 폴란드의 종주권을 인정하라고 강요하지 않기로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1335년 11월 19일 비셰그라드에서 열린 회의에서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 보헤미아 국왕 얀,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가 참석한 가운데 폴란드와 보헤미아 왕국간의 종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이때 카지미에시 3세는 트렌첸에서 설정된 조건은 지나치다며, 자신의 대리인이 권한을 초과했다고 밝혔다. 이에 카로이 로베르트는 새로운 협상을 중재했고, 카지미에시 3세는 트렌첸 협약 때보다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을 얻어냈다. 그는 20,000 프라하 그로셴을 지불하고 폴란드 왕관에 대한 얀의 권리를 구입했고, 볼레스와비에츠 성채를 비롯한 루다 일대의 일부 영토를 되찾았다. 게다가 이 협약에는 실롱스크에 대한 카지미에시 3세의 의무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룩셈부르크 가문과 피아스트 가문간의 결혼 동맹을 맺기로 약속했다. 이렇게 폴란드 왕위를 포기하는 대신, 그는 카지미에세 3세의 양해 아래 상부 우지차, 브로츠와프 일대를 장악함으로써 실롱스크 대부분을 차지했다. 단지 시비드니차-야보르스카 공국 만이 실롱스크에서 유일하게 얀에게 귀속되지 않았다.
한편, 얀은 아버지가 뜻을 이루지 못한 이탈리아에도 관심을 가졌다. 1330년, 그는 4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인스브루크에서 트렌토로 이동했다. 그는 한때 아버지가 다스렸던 도시들을 들러 후원을 약속하고 자신을 주권자로 인정하게 했다. 베로나의 영주 마스티노 2세 델라 스칼라는 성문을 닫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다른 도시들은 자신들에게 큰 돈을 기부하고 온건한 태도를 보이는 그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결과 이탈리아의 북부 도시인 베르가모, 보비아, 브레시아, 크레모나, 밀라노, 노바라, 파비아가 그를 주권자로 인정했으며, 루카 역시 그의 영지에 들어갔다. 그러나 얀의 롬바르디아 석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오랜 정적 관계였던 구엘프와 기벨린 파벌은 동맹을 맺고 페라라에 본부를 세운 뒤 얀 루쳄부르스키를 상대로 공세를 퍼부었다. 결국 더 버티지 못한 얀 루쳄부르스키는 1333년에 보헤미아로 귀국했다.
얀은 이외에도 베틴 가문에 압박을 가해 보헤미아와 작센 국경에 있는 영토 일부를 확보했고, 1332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와 동맹을 맺고 전쟁 발생 시 서로를 돕기로 했다. 그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좀더 굳건히 하기 위해 1334년 부르봉 공작 루이 1세의 딸 베아트리스와 결혼했다.
얀은 케른텐 공작 하인리히의 딸인 마르가레테와 자신의 아들 요한 하인리히를 결혼시켜서 케른텐 공국과 크라인 변경백국을 손에 넣으려 했다. 그러나 정작 1335년 하인리히가 사망한 뒤, 케른텐과 크라인은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와 형제 오토[4]에게 넘어갔고, 마르가레테와 요한 하인리히 부부는 지역 귀족들의 지원 덕분에 티롤만 겨우 상속받았다. 한편, 그는 튜튼 기사단의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향한 십자군에 2차례 참여해 아들 카를과 함께 제마이티야(Žemaitija)로 출전하기도 했다.
1341년, 티롤의 마르가레테가 요한 하인리히와 정쟁을 벌인 끝에 남편을 추방하고 티롤을 확고하게 장악했다. 루트비히 4세는 이 때를 틈타 1342년 마르가레테와 요한 하인리히의 결혼 무효를 선포하고 자신의 아들인 루트비히 5세를 마르가레테와 결혼시키고 티롤을 비텔스바흐 가문의 소유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교황 클레멘스 6세는 이를 무효로 처리하고 루트비히 5세에게 파문을 선고했다. 이후 얀은 교황청과 손을 잡고 루트비히 4세를 타도하기 위한 연합 구성에 몰두했다.
2.4. 백년전쟁 참여와 최후
얀은 1336년 리투아니아 십자군에 나선 이후부터 결막염에 시달렸고, 1339년 무렵에는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그러던 중 백년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시력을 완전히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편에 서서 잉글랜드군과 맞서기로 했다. 1338년 봄, 프랑스 무관장 라울 1세 드 브리엔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가스코뉴를 침공했다. 그러나 라울 1세는 병력을 여러 분대로 분할해 각 요새들을 공략하게 했다가 끊임없는 공방전으로 인해 병력이 대거 소모되는 실책을 범했고, 가스코뉴 원정은 수렁에 빠졌다. 이에 필리프 6세는 얀에게 의존하기로 했다. 얀은 민병대와 기사 및 용병대로 구성된 12,000명을 이끌고 필리프 6세로부터 45,000 에퀴를 매달 제공받으며 가스코뉴로 진군했다.얀은 라울 1세 드 브리엔과는 달리 독일 공병과 광부들을 고용해 요새 하나하나의 성벽을 허무는 전략을 구사했고, 그 결과 펜다제네, 카스텔가이야르, 푸이길헴, 블라예, 브롱이 공략되었다. 게다가 프랑스 함대가 영국해협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영국과 보르도 사이의 해상 보급을 수행하고자 식량을 수송하던 영국 선박들을 나포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면서, 보르도를 중심으로 한 가스코뉴 주민들의 프랑스에 대한 저항 의지는 갈수록 약해졌다. 1339년 7월, 프랑스군은 가스코뉴의 중심지인 보르도를 포위했고, 거센 공성전 끝에 성문을 점령했다. 그러나 수비대와 주민들이 결사적으로 반격해 성문을 도로 내주고 퇴각해야 했다. 이후 물자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곤경을 겪던 프랑스군은 7월 19일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이후 1338년 11월 30일부터 1341년 11월까지 랑그독 총독을 역임했다.
1346년 8월 26일, 얀은 아들 카를과 함께 크레시 전투에 참여했다. 장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기사들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오늘 여러분은 모두 나의 친구이자 전우요. 나는 눈이 멀었으므로 그대들에게 부탁하오. 칼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적이 위치할 정도로 나를 전투의 소란 속으로 이끌어주시오."
이후 그는 다른 기사들과 몸을 쇠사슬로 연결하고 적진으로 돌격해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끝내 패배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다. 프라하 베네시우스 크라비체 드 웨이트마일 교회 연대기에 따르면, 얀은 어서 피해서 목숨을 구하라는 부관의 진언을 듣고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보헤미아 왕은 도망치지 않는다. 그 대신, 전쟁의 소음이 가장 큰 곳으로 나를 데려가라.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라. 두려워할 것이 없느니라. 내 아들을 잘 보살펴라."
전승에 따르면, 당시 16세였던 흑태자 에드워드는 그의 유해를 확인한 뒤 "여기 기사도의 왕이 누워있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라며 동맹을 위해 목숨을 바쳐가며 헌신한 그에게 감탄했으며, 그의 투구 보석을 챙겨 간직했다고 한다. 잉글랜드군은 더럼 주교가 이끄는 추도식에서 얀을 특별히 추모했다. 이후 그의 유해는 룩셈부르크의 알트뮌스터 수도원에 묻혔다가 룩셈부르크의 노이뮌스터 수도원에 이장되었다. 그러다가 프랑스 혁명 시기에 프랑스 혁명군의 공세를 회피하기 위해 메틀라흐 안 데르 자르로 이송되었고, 1833년 프로이센 왕세자 프리드리히 빌헬름(훗날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이 그의 유해를 인수한 뒤 건축가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에게 그를 위한 묘지 예배당을 건설하도록 했다. 1835년 자르 강 계곡 위 클라우스 카스텔 암자에 카스텔 슈타트 예배당이 세워졌고, 얀의 유해는 그곳에 안장되었다.
3. 가족 관계
- 엘리슈카 프르셰미슬로브나(1292 ~ 1330)
- 마르가레테(1313 ~ 1341): 하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의 부인.
- 보나(1315 ~ 1349):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왕비.
- 카를 4세(1316 ~ 1378): 보헤미아 국왕, 로마 왕.
- 오타카르(1318 ~ 1320): 요절
- 요한 하인리히(1322 ~ 1375): 모라비아 변경백, 티롤 공작.
- 안나(1323 ~ 1338): 오스트리아, 케른텐, 크라인 공작 오토의 아내.
- 엘리자베트(1323 ~ 1330년 이전): 요절
- 부르봉의 베아트리스(1318 ~ 1383): 부르봉 공작 루이 1세 드 부르봉의 딸.
- 벤첼 1세(1337 ~ 1383): 룩셈부르크, 브라반트, 림부르크 공작.
- 사생아
- 니콜라우스(1322 ~ 1358): 아퀼레이아 총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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