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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1 01:03:15

슬란스키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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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진행 과정3.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의 명단4. 기타5. 슬란스키 재판의 예고편: 밀라다 호라코바 처형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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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roces se Slánským/Slánský trial

슬란스키 재판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총서기이자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2인자였던 루돌프 슬란스키(Rudolf Slánský, 1901–1952)를 위시한 체코슬로바키아의 고위층 11명이 반역죄 누명을 뒤집어쓰고 사형당한 사법살인 사건이며 정적들에 대한 대규모 사법살인이라는 점에서 ' 공산권 인민혁명당 사건'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는 사건이다.

당시 체포된 14명 중 11명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이 재판은 ' 반유대주의 재판'으로도 평가받는다. 슬란스키는 유대인 상인의 아들이었으며 어머니, 남동생, 삼촌, 이모가 홀로코스트로 살해당했다.

2. 진행 과정

파일:루돌프 슬란스키.png 파일:클레멘트 고트발트.jpg
루돌프 슬란스키 클레멘트 고트발트
1948년 2월 25일에 소련의 지령을 받은 공산당의 쿠데타로 건국된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지속되는 상황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부에서 상상의 적을 찾거나 불러내야 했고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소련의 정책에서 벗어난 모든 공산주의 국가에 경고하기 위한 희생양을 찾고자 했다. 덤으로 당시 소련은 반유대주의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의 세력도 급격히 악화되었다. 소련은 나치마냥 대놓고 반유대주의 정책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러시아나 동유럽 지역에서도 반유대주의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1]

이런 상황 속에서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서열 1위이자 스탈린주의자였던 클레멘트 고트발트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초대 대통령 겸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초대 의장은 자기도 숙청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모스크바 지도부의 지시를 받은 소련 고문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오랜 동지이자 권력의 2인자였던 슬란스키를 숙청하고자 결심했고 이에 따라 고트발트는 1951년 가을에 슬란스키를 위시한 공산당의 고위 관료들 13명을 트로츠키주의, 티토주의자와 시온주의자라는 명목과 '대반역죄, 군사기밀 발부, 전복활동, 경제적 사보타주와 사보타주, 당과 국가 지도자들에 대한 암살 시도 준비'에 대한 혐의로 체포했다. 이와 함께 슬란스키의 아내였던 요제파 슬란스카(Josefa Slánská, 1913–1995)도 24년간 몸담아 온 공산당에서 쫓겨났고 슬란스키의 동생이자 외무부 언론국장을 역임했던 리하르트 슬란스키(Richard Slánský, 1904–1973)도 함께 투옥되어 6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정작 트로츠키주의와 티토주의는 반시온주의로 유명했으며 심지어 피고인들의 대부분은 실제로는 열렬한 반시온주의자였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처형된 오토 피슐 재무부 차관은 유대인 혈통임에도 불구하고 반유대주의자로 유대인들의 불법 은닉 재산 몰수를 '숨은 물건 찾기'처럼 여길 정도로 즐긴 사람이었고 안드레 시모네는 한술 더 떠 마셜 플랜을 거부하고 굴라크를 '트로츠키주의 또는 제국주의 선전의 순수한 발명품'이라고 주장하던 골수 스탈린주의자에 체코로 귀국하기 전에는 무려 NKVD의 스파이로 일했던 사람이었다. 이는 쉽게 말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 중에 실제로는 6.25 전쟁 참전용사에 골수 반공주의자였던 것을 넘어 CIA 출신이었던 사람까지 있었던 꼴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데 실제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당한 사람 중 2명이 6.25 전쟁 참전용사였다.

검찰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피고인들은 1947년 4월부터 미국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대가로 미국을 위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로 스파이 행위와 파괴 행위를 저지르기 위한 이른바 '모겐소 계획'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실제로 체코슬로바키아는 팔레스타인 전쟁 당시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 지원으로 인해 친시온주의 국가로 여겨졌다.

체포된 사람들은 고문과 약물로 억지 자백을 해야 했고 슬란스키는 혹독한 심문을 버티다 못해 옥중에서 자살을 2번이나 시도했다. 당국이 공개한 정보만 알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사람들은 대부분 이들에 대한 처벌을 찬성했고 이들 중 8,500명 이상은 모든 피고인에 대한 사형을 요구하는 청원에 서명했다.

1952년 11월 20일부터 7일간의 재판 과정에서 모든 피고들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죽음을 요구했다고 한다. 체코슬로바키아 당국은 이에 대해 '압도적인 증거와 수치심과 죄책감 때문에' 자신의 범죄를 자백했다는 거짓말을 했다. 11월 27일에 법원은 슬란스키를 포함한 11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나머지 3명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슬란스키는 사면 요청을 했으나 고트발트는 이를 거절했다.

재판 과정도 불공정하기 짝이 없었는데 피고인들의 변호사들은 피고들에게 항소하지 말 것을 권유했고 재판에 주 검사로 출석한 요제프 우르발레크(Josef Urválek, 1910–1979)은 피고인들을 반대 심문할 때 자주 끼어들면서 피고들을 대놓고 벌레와 배설물에 비유했으며 마지막 재판에서는 "나는 모든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을 요구합니다. 정의가 조금도 동정하지 않고 철의 주먹처럼 부수게 하십시오. 이 적의 둥지를 불태울 불이 되게 하십시오."라는 막말을 남겼다. 거기다가 상술한 것처럼 오토 피슐이 유대인들의 은닉 재산을 몰수한 것에 대해서는 '부유한 유대인 이민자들과의 사보타주 활동을 은폐하기 위한 속임수'라는 억지 논리까지 동원했다. 덤으로 이 재판에서 피슐은 '민족주의 유대인'으로 포장되었다. 심지어 이 재판에 회부된 모든 피고인들은 준비된 진술을 외웠고 재판에서 외운 진술을 낭독해야 했다.

그리고 사형을 선고받은 11명은 모두 사형 확정으로부터 겨우 6일밖에 지나지 않은 1952년 12월 3일에 교수형에 처해진 후 시신이 화장되었는데 이때 이렇게 화장된 11명의 재를 담은 감자 자루를 실은 밴이 지나가던 프라하의 도로가 눈으로 막혀서 탑승자들이 밴을 가볍게 하기 위해 도로 가장자리에 재를 뿌렸다고 한다. 유죄 판결을 받은 피고들의 아내와 자녀는 연좌제가 적용되어 고향에서 강제로 추방된 것은 물론 좋은 직업과 고등 교육을 향유하는 것이 금지당하는 등 경제적, 사회적으로 피해를 입었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3명은 1955년에 모두 석방되었고 사형당한 11명은 1963년에 당과 법원에 의해 복권되었으며 프라하의 봄 무렵인 1968년에야 이 사실이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에게 공개되었고 같은 해에 처형된 사람 중 9명은 훈장을 추서받았다.

한편 고트발트는 스탈린의 장례식에 참여한지 고작 5일밖에 지나지 않은 1953년 3월 14일에 매독과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동맥 파열로 사망했는데 이는 슬란스키의 처형으로부터 고작 3개월 후였다. 반면 우르발레크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53년에 대법원장에 올랐고 이후에도 수십 건의 사법살인에 직접적으로 가담하다가 1963년에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했다. 1968년에는 한 인터뷰에서 국가안보부와 고트발트를 비난하면서 불법 행위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1979년 11월 29일에 자살했다고 한다.

3.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의 명단

이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4. 기타

5. 슬란스키 재판의 예고편: 밀라다 호라코바 처형 사건

파일:밀라다 호라코바.jpg
밀라다 호라코바(Milada Horáková, 1901–1950)
슬란스키 재판의 최고 책임자인 클레멘트 고트발트는 이전인 1950년에도 악명높은 사법살인 사건을 일으킨 바가 있는데 사실 이쪽이 진정한 '공산권판 인혁당 사건'이라고 봐도 무방한 사건이다.

고트발트는 1950년 5월 31일~6월 8일에 반독재 인사에 대한 재판을 열어 독립운동가 출신의 전직 정치인이던 여성 밀라다 호라코바를 포함한 4명에게 고문으로 얻은 자백을 바탕으로 '서방의 지시를 받아 간첩 행위를 하고 공산주의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세웠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워 사형시키고 4명에게는 종신형, 5명에게는 15~28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밀라다 호라코바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한 나치에 대한 저항 운동을 벌이다가 게슈타포에 의해 테레진 수용소에 구금되고 사형까지 구형되는 등 다사다난한 활동을 해 왔고, 1945~1948년에는 체코 국민사회당 의원을 지내기도 했으나 1948년에 공산주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의원직에서 사임한 반공주의자였다. 고트발트는 소련의 사주를 받고 쿠데타를 일으켜 체코슬로바키아를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시킨 매국노였으니, 한마디로 매국노가 독립운동가를 죽인 셈이다.

이 재판도 요제프 우르발레크가 주 검사로 참석했고 소련 고문이 재판장에 참석한 데다가 공개 재판에 피고인이 따르도록 강요된 '대본'이 있었으며 전체 재판 과정은 필름에 녹화되는 동시에 라디오로도 녹음되었다. 당시 저녁 라디오에 송출된 재판 녹음은 당국의 검열을 받은 뒤에 송출되었다고 한다. 공산당은 이들의 사형을 요구하는 공개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조직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체코 법원은 '사악한 놈', '악랄한 범죄자', '배신자', 심지어 '피에 굶주린 개' 등의 원색적인 표현으로 가득 찬 피고들에 대한 사형을 요구하는 6,300통의 편지를 접수했으며 심지어 마을마다 설치된 확성기에도 이들에 대한 증오 섞인 발언이 울려퍼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재판에서 품위 있고 당당하게 자신을 변호했다.

그녀의 사형 선고는 뱅상 오리올, 윈스턴 처칠, 엘리너 루스벨트, 알베르 카뮈, 시몬 드 보부아르, 장폴 사르트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버트런드 러셀처럼 오늘날에도 익숙한 이름의 국제적 저명 인사들이 항의할 정도로 국제적 반향이 컸으나 고트발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그녀의 사형 선고에 공식적으로 서명했고 결국 그녀는 1950년 6월 27일에 사형 선고를 선고받은 다른 3명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녀는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정치적 이유로 처형된 234명 중 유일한 여성이었으며 처형 후 호라코바의 유골은 강제로 불태워져 가족들에게 전달되지도 않은 채 행방불명 상태가 되었다. 참고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정권은 반정부 인사에 대한 장례식이 반정부 시위로 번질 것을 염려하여 수백 명의 정권 반대자들의 시신을 의도적으로 숨겼고 일부 반대자들의 유골은 이후 비밀리에 파괴되기도 했다.

이 재판은 공산주의 치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정치적 재판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 재판 후에도 전국적으로 35건의 후속 재판이 이어지면서 재판에 회부된 피고인의 수만 무려 639명에 달했고 상술한 호라코바의 재판을 제외해도 사형 10명, 무기징역 48명, 피고들에게 선고된 형량 총합 7,830년이라는 어마어마한 형량이 선고되었다.

물론 호라코바의 판결은 '프라하의 봄' 기간에 무효로 선고되었고 1990년에 프라하 성에서 홀레쇼비체 지구까지 이어지는 프라하의 주요 도로 중 하나에는 호라코바의 이름이 붙게 되었으며 1991년에 바츨라프 하벨은 그녀에게 체코 최고 훈장 중 하나를 수여했고 2004년에 그녀가 처형된 6월 27일은 체코에서 '공산 정권 희생자 추모의 날'로 선포되었다. 2008년 9월 11일에는 이 사건의 가해자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검사 루드밀라 브로조바폴레드노바(Ludmila Brožová-Polednová, 1921–2015)에게 사법살인을 방조한 혐의로 징역 6년을 선고했다. 구금 당시 그녀는 만 86세의 고령이라 2010년 12월에 사면되었고 2015년 1월 15일에 향년 9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리고 그녀는 1950년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정권이 실시한 정치적 숙청 및 탄압과 관련하여 형을 선고받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2020년 1월에 밀라다 호라코바는 주자나 차푸토바 슬로바키아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훈장인 백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2005년에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호라코바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나라의 그 누구도 신념 때문에 사형을 당하거나 투옥되어서는 안 된다."


[1] 스탈린은 유대인 고위층 인사나 유대인을 대표할 수 있을 정도의 고위급 인사를 사고로 위장해 암살하였지만 이는 정확히 말해 반유대주의라기보다는 단순히 스탈린 특유의 의심과 독재에 말려든 사례에 더 가깝다. [2]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기관지 [3] 178명이 처형되었다는 설도 있다. [4] 이들 중 1960년까지 처형된 사람의 총합만 234명에 달한다고 하며 이 중 1명은 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