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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왕국 국왕 인드르지흐 코루탄스키 Jindřich Korutansk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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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독일어 |
하인리히 폰 케른텐 (Heinrich von Kärnten) |
체코어 |
인드르지흐 코루탄스키 (Jindřich Korutanský) |
|
출생 |
1263년에서
1273년 사이 티롤 |
|
사망 |
1335년
4월 2일 (향년 61~72세) 티롤 티롤 성 |
|
재위 | 티롤 후백국의 후백 | |
1295년 ~ 1335년 | ||
잔 변경백 | ||
1295년 ~ 1308년 | ||
케른텐 공국 공작, 크라인 변경백국 변경백 | ||
1295년 ~ 1335년 | ||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 ||
1306년 1307년 ~ 1310년 |
||
배우자 | 안나 프르셰미슬로브나 (1306년 결혼 / 1313년 사망) | |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의 아델하이트 (1315년 결혼 / 1320년 사망) | ||
사보이아의 베아트리체 (1328년 결혼 / 1331년 사망) | ||
자녀 | 티롤의 마르가레테 | |
아버지 | 마인하르트 2세 | |
어머니 |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 |
형제 | 루트비히, 엘리자베트, 오토, 알브레히트, 아그네스 |
[clearfix]
1. 개요
티롤 후백국의 후백, 잔[1], 케른텐 공국 공작, 크라인 변경백국의 변경백. 1306년과 1307~1310년에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을 역임했다.2. 생애
1263년에서 1273년 사이에 티롤 후백이자 케른텐 공작과 크라인 변경백을 역임한 마인하르트 2세와 바이에른 공작 오토 2세의 딸이며 독일왕 콘라트 4세의 미망인이었던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루트비히, 엘리자베트, 오토, 알브레히트, 아그네스가 있었으며, 콘라트 4세의 외아들 콘라딘이 그의 이부 형제였다. 부친 마인하르트 2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초대 독일왕 루돌프 1세가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오타카르 2세를 패사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로, 그 대가로 루돌프 1세에게 가계가 단절되면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봉토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케른텐 공국과 크라인 변경백국을 하사받았으며 딸 엘리자베트를 루돌프 1세의 맏아들 알브레히트와 결혼시켰다.문헌상에 드러나는 그의 첫번째 행적은 1293년 슈탐 수도원에 단독으로 기부한 것이었다. 1295년 아버지 마인하르트 2세가 사망한 뒤, 두 형제 루트비히, 오토와 함께 티롤, 케른텐, 크라인을 다스렸다. 루트비히는 건강이 좋지 않아 국정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오토는 내치를 맡았으며, 하인리히는 외치를 담당했다.
1298년 괼하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공작이며 누이인 엘리자베트의 남편으로서 자신의 매부인 알브레히트 1세의 편에 서서 알브레히트 1세가 아돌프를 패사시키고 독일왕으로 등극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10월 16일 장크트 파이트 시에서 성대하고 화려한 기사 축제를 열어 오토, 루트비히 형제와 함께 승리를 축하하고 가신들의 충성 서약을 재확인받았다. 1298년 12월 뉘른베르크 제국 의회에서 알브레히트 1세로부터 오토와 함께 프리울리와 이스트리아의 제국 대리인으로 선임되었고, 1299년 5월 19일 슈파이어 제국 의회에서 케른텐, 티롤, 크라인을 봉토로 수여받았다. 1300년, 알브레히트 1세는 아들 루돌프 3세를 케른텐으로 파견해 그곳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있던 그를 돕게 했다.
1304년, 알브레히트 1세는 자기 아들 바츨라프를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는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2세에게 "아들을 헝가리에서 내보내고 전쟁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지만 먹히지 않자 무력으로 응징하기로 마음먹고 동원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바츨라프 2세의 딸 안나와 결혼 협상이 비밀리에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거나 알브레히트 1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브레히트 1세는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는 그를 괘씸하게 여겨 자신의 아내이자 그의 여동생인 에르제베트에게 아직 지급되지 않은 지참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으며, 아들 루돌프 3세에게 그의 영지에 속한 크라인과 빈트 변경백국에서 6,000 흐리브냐를 거둬들이라고 지시했다. 이에 그와 알브레히트 1세간의 갈등은 고조되었다.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초반에 활동한 슈타이어마르크 역사가이자 시인인 오토카르에 따르면, 바츨라프 2세는 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자기 딸 안나를 그와 결혼시키고 두 부부가 낳은 자식이 아들 바츨라프 3세에 이어 보헤미아 왕위 계승권을 가질 것이며, 케른텐과 크라인에 대한 프르셰미슬 왕조의 영유권 주장의 근거를 제공하는 문서를 넘기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가 이 시기에 보헤미아 편으로 돌아선 건 분명하다. 그는 바츨라프 2세의 요청에 따라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르셰미슬 가문간의 화해 협상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 1305년 6월 21일 바츨라프 2세가 사망한 뒤 결혼이 미뤄졌지만, 뒤이어 보헤미아 왕위에 오른 바츨라프 3세가 결혼을 예정대로 진행시켰다. 하인리히와 안나와 결혼식은 1306년 2월 13일에 프라하에서 거행되었다.
1306년 7월, 바츨라프 3세는 브와디스와프 1세에게 넘어간 폴란드를 탈환하기 위해 원정을 벌이기로 하고, 올로모우츠에서 용병대를 모집했다. 그러는 동안 보헤미아 정부를 처남 하인리히에게 맡겼다. 그런데 1306년 8월 4일, 바츨라프 3세가 올로모우츠에서 보텐슈타인의 콘라트라는 하급 기사에게 피살당했다. 암살의 배후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제기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가 바츨라프 암살을 사주했다고 주장하며, 다른 학자들은 브와디스와프 1세가 암살을 사주했다고 주장했으며, 바츨라프 3세에게 토지세를 강요받은 것에 불만을 품은 보헤미아 및 모라비아의 귀족들이 암살을 주동했다고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하인리히 역시 보헤미아 왕위를 탈취하기 위해 암살을 주동했을 거라는 의심을 받았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이제 막 바츨라프 3세의 누이와 결혼했고 보헤미아의 섭정을 맡은 그가 굳이 그런 짓을 벌일 이유가 없다며 부정한다.
바츨라프 3세가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면서, 프르셰미슬 왕조는 단절되었다. 1306년 8월 말, 보헤미아 귀족들은 프라하로 집결한 뒤 차기 국왕으로 누구를 선출할 지를 논의했다. 여러 귀족들은 지난날 독일왕으로 재위했던 콘월의 리처드[2]가 1265년경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2세에게 보헤미아 왕국을 봉토로 하사했을 때 프르셰미슬 가문 출신의 여성도 보헤미아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며, 바츨라프 2세의 딸이며 바츨라프 3세의 누이인 안나의 남편인 하인리히가 보헤미아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일부 귀족들은 리처드가 그런 특권을 부여한 것이 사실인지를 의심하며, 독일왕이자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 루돌프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1306년 9월 초, 프라하 의회에서 격렬한 논의 끝에 하인리히가 보헤미아 국왕 인드르지흐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알브레히트 1세는 이미 보헤미아 왕위를 아들에게 넘기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당시 마이센의 베틴 가문에 대항하는 원정을 준비하고 있던 그는 바츨라프 3세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원정 준비를 중단하고 뉘른베르크로 달려간 뒤 보헤미아 귀족들에게 자신의 아들 루돌프를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하도록 요청하는 문서를 발행했다. 귀족들이 듣지 않고 하인리히를 왕으로 추대하자, 알브레히트 1세는 제국의 봉토였던 보헤미아 왕국이 부당하게 이탈했으니 도로 회수하겠다고 선언하고, 군대를 이끌고 체브스코를 거쳐 보헤미아로 진격했다. 아들 루돌프 역시 군대를 이끌고 보헤미아 남부로 진격했다. 하인리히는 이에 대응해 니더바이에른 공작 슈테판 1세와 동맹을 맺고, 도마즐리체에서 뷔르템베르크 백작 에버하르트 1세의 사절단에게 에버하르트 1세가 자신에게 병력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10,000 흐리브냐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상황은 하인리히에게 매우 불리해졌다. 루돌프는 1306년 10월 1일 프라하 성 앞에 진을 쳤고, 알브레히트 1세는 로우니 인근에서 진을 쳤다. 보헤미아 대귀족들은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데다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뇌물을 제공받자 두 사람에게 대거 귀순했다. 하인리히는 일이 글렀다는 걸 깨닫고 합스부르크군에게 사로잡힐 것을 우려해 아내 안나와 함께 보헤미아를 빠져나가 슈테판 1세의 영토를 통해 티롤로 피신했다. 이후 루돌프는 10월 16일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선출되었고, 폴란드 국왕 프셰미수 2세의 딸이자 바츨라프 2세의 미망인인 폴란드의 리체차 엘즈비에타와 결혼했다. 하지만 남서부 보헤미아에서는 슈테판 1세의 지원을 받은 발데크의 빌렘 자이츠, 콤베르크의 오지르, 스트라코니체의 바보르 3세가 하인리히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루돌프 1세에 대항했다.
1307년 1월, 알브레히트 1세는 장남 루돌프가 사망할 경우 그의 남동생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아들 프리드리히가 보헤미아 왕위를 계승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1307년 6월, 루돌프 1세는 자신에게 대적하는 남부 보헤미아 귀족들을 토벌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스트라코니체의 바보르 3세는 호라즈도비체에서 농성했지만 결국 항복했다. 그러나 흐라즈도비체 공방전을 이끌던 루돌프1세는 돌연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이후 프라하 주교 드라치체의 얀은 베키네의 도베시를 포함한 여러 귀족들을 불러들인 뒤 프리드리히와 바츨라프 2세의 딸 엘리슈카를 결혼시키고 프리드리히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받아들이기로 합의하려 했다. 그런데 리히텐부르크 출신의 히니크 크루시나와 그의 삼촌 올드르지흐 등이 회의장으로 뛰어들어와서 하인리히를 보헤미아 국왕에 다시 불러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양자간 논쟁이 벌어진 끝에, 리히텐부르크 가문 인사들이 도베시를 살해한 뒤 회의장 밖으로 나가서 민중을 선동해 봉기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합스부르크 가문을 지지하던 인사들 대부분이 살해되었고, 보헤미아 왕위는 하인리히에게 재차 넘어갔다.
하인리히는 일련의 상황을 전해들은 뒤 아내 안나를 티롤에 남겨둔 뒤 보헤미아로 달려가서 20일 만에 프라하에 도착했다. 그 후 1307년 8월 15일 대관식을 거행했고, 브레브노프의 대수도원장인 파벨 바보르가 주교관을 그에게 임시로 수여했다. 그는 귀족들의 특권을 인정하겠다고 약속했으며, 향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보헤미아를 침공할 때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은 국경지대 영주들에게 손실을 보상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8월 28일 뷔르템베르크 백작 에버하르트 1세와 동맹을 체결하고 그의 군대를 지원받기로 했으며, 9월 1일에는 니더바이에른 공작 슈테판 1세의 중재하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또 다른 적인 마이센 변경백이자 튀링겐 방백 프리드리히 1세와 동맹을 맺었다.
한편, 알브레히트 1세는 튀링겐 침공을 준비하던 중 아들 루돌프 1세가 사망했고 하인리히가 보헤미아 국왕 인드르지흐로 복위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8월 상반기에 군대를 이끌고 체브스크로 가서 보헤미아 침공을 준비했다. 그는 마인츠 대주교 페터 폰 아스펠트, 오버바이에른 공작이자 라인 궁정백 루돌프 1세로부터 군대를 지원받은 뒤, 1307년 9월 보헤미아를 전격 침공했다. 여기에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역시 모라비아에서 보헤미아 남부를 침공하고 하인리히의 대표적인 추종자인 비트코프 가문의 영지를 약탈했다. 알브레히트 1세는 자테크와 카단을 공략했지만, 보헤미아 영주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자 9월 중순에 보헤미아 중부에서 아들 프리드리히와 합세한 뒤 콜린과 쿠트나 호라를 공격했다. 하지만 두 도시는 이 공세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알브레히트 1세와 프리드리히는 군대를 재정비한 뒤 바츨라프 2세의 미망인 리체차 엘즈비에타가 보유했던 보헤미아 북동부의 도시 공략에 착수해 흐라데츠 크랄로베, 코우르짐, 노비 비조프, 브로우모프, 흐루딤, 야로메르, 폴리치카, 비소케 미토 시를 점거했다. 이후 프리드리히는 브르노로 향했고, 알브레히트는 겨울을 보내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이동하다가 10월 17일에 즈노이모를 포위했지만 공략에 실패하고 철수했다. 인드르지흐는 나중에 즈노이모에 도착한 뒤 자신을 위해 합스부르크군을 격퇴해준 것에 감사를 표하면서, 앞으로 즈노이모 시는 자신들의 행정관을 스스로 선출할 수 있고, 6년간 모든 세금을 면제하고 즈노이모 성에 대한 왕권 행사를 일부 제한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자신이 약속된 특권을 지키지 않을 경우 즈노이모 시민들이 자신에게 불복종할 권리도 인정했다.
한편, 형제 오토는 인드르지흐를 돕기 위해 로마 왕과 전쟁을 벌이는 것에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결국 동생을 돕기로 하고 군대를 지원했다. 이에 대응해 슈타이어마르크 지방 총독 올드르지흐 오브발시가 잘츠부르크 대주교 콘라트와 라반트와 크르크의 주교 콘라트의 지원을 받으며 티롤을 공격해 장크트 바이트, 클라겐푸르트, 푈케르마르크트 등지를 공략했지만 라이바흐 공략엔 실패했다. 알브레히트 1세는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뒤 니더바이에른 공국으로 쳐들어가서 노이부르크 전투에서 슈테판 1세를 격파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1308년 1월, 보헤미아군은 오포치노 전투에서 카스텔의 발터가 이끄는 슈바벤군을 격파했고, 발데크의 빌렘 자이크는 합스부르크군의 손에 있던 자테크를 탈환했다. 그해 3월에는 인드르지흐가 직접 공세를 개시해 쿠르 등지의 지배권을 탈환했다. 하지만 티롤이 합스부르크 가문을 추종하는 세력의 공세로 인해 피폐해지면서 형제 오토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어졌기에, 인드르지흐는 보헤미아 귀족 및 성직자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그들에게 각종 특권을 부여했다. 특히 프라하 주교 드라치체의 얀은 그를 왕으로 인정해주는 대가로 보헤미아의 모든 광산에서 나오는 수입에서 십일조를 거둬들일 권리를 인정받았다.
1308년 5월 1일, 알브레히트 1세는 보헤미아를 향한 또다른 원정을 준비하던 중 조카 요한 파리키다에게 피살당했다. 프리드리히는 아버지가 사촌에게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더 이상 보헤미아 왕위를 얻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기로 하고, 그 해 7월 인드르지흐와 휴전 협약을 맺은 뒤 8월 14일 즈노이모에서 최종 협약을 체결했다. 합스부르크군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등지에서 장악하고 있던 모든 영토는 인드르지흐에게 돌아갔고, 프리드리히는 다시는 보헤미아 왕위를 주장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인드르지흐는 45,000 흐리브냐 상당의 보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프리드리히를 위해 싸웠던 보헤미아 귀족 및 군인들과 바츨라프 2세의 딸로 지난날 프라하에서 비밀리에 빠져나가 프리드리히의 군영에 합류했던 엘리슈카를 사면하기로 했다. 그리고 인드르지흐는 프리드리히가 보헤미아 도시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약속했던 모든 특권을 인정해야 했다.
알브레히트 1세가 살해된 뒤 누구를 새로운 독일왕으로 선출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독일 제후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을 때,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인드르지흐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의 형제인 발루아의 샤를[3]을 독일왕으로 추대하는 데 동의해달라고 요청했다. 인드르지흐가 이에 별다른 응답을 하지 않자, 필리프 4세는 1308년 6월 9일 공개적으로 서신을 보내 샤를의 출마를 지지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역시 무시당했다. 인드르지흐는 새로운 독일왕 선출에 대한 어떠한 협상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룩셈부르크 백작 앙리가 1308년 11월 27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린 제국 선거에서 6표를 얻고 하인리히 7세로 선출되었을 때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가 독일왕 선출에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은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보헤미아 내부 사정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거기에 신경쓰느라 관여할 생각을 안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당시 보헤미아의 정권은 원수로서 보헤미아군의 통솔권을 장악한 리페의 인드르지흐, 수석 시중인 바르텐베르크의 얀, 왕실 총리인 리히텐부르크의 히니크 크루시나 등 소수의 귀족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이에 정권에 소외된 귀족들은 깊은 반감을 품고 이를 뒤엎을 계획을 세웠다. 1309년 2월 15일, 리페의 인드르지흐, 바르텐베르크의 얀 등이 쿠트나 호라 인근의 세들레츠 수도원에서 밤을 보내고 있을 때,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동원한 사병들이 수도원을 습격해 리페의 인드르지흐와 바르텐베르크의 얀을 체포하고 두 사람을 대접하고 있던 쿠트나 호라 시장 로젠탈의 젠슬린을 살해했다. 이와 동시에, 프라하에서도 정변이 일어나 정부 인사들이 모조리 체포되었다. 이후 반군은 포로로 잡힌 영주들에게 앞으로는 다른 귀족들도 정치에 관여할 수 있게 할 것을 요구했고, 이들의 자식들과 자신들의 자식들을 결혼시키라고 강요했다.
인드르지흐는 이 사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잠자코 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프라하에서 재정을 메꾸기 위해 과중한 세금을 서민들에게 부과한 것이 심한 반발을 사는 바람에 폭동이 일어나자, 그는 프라하에서 도망쳤다. 이후 니더바이에른 공작 오토 3세의 지원 덕분에 프라하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이후에도 사태 추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1309년, 리파의 인드르지흐가 추종자들과 함께 석방된 후 사병대를 동원해 프라하로 진격해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모조리 해외로 쫓아내고 프라하와 쿠트나 호라의 통제권을 되찾았다. 이리하여 정권이 또다시 리파의 인드르지흐를 비롯한 소규모 귀족들에게 농단되고, 인드르지흐 왕은 이에 대해 수수방관하기만 하자, 다수의 귀족들은 그의 무능함에 반감을 품고 새로운 군주를 물색한 끝에 로마 왕 하인리히 7세의 아들인 요한을 새 국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1309년 8월 14일, 콘라드 즈브라슬라프스키와 페트르 지타프스키가 하일브론에서 하인리히 7세와 논의한 끝에, 하인리히 7세의 아들 요한과 바츨라프 2세의 딸 엘리슈카를 결혼시키고 요한을 보헤미아 국왕으로 옹립하는 대가로 기존의 특권을 인정받고 새로운 특권을 부여받기로 합의했다. 하인리히 7세는 1309년 9월 슈피르에서 제국 의회를 열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보헤미아 왕위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자신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는 합의를 받아냈다. 그 대신, 그는 은화 50,000 흐리브냐를 합스부르크 가문에 넘겨주며, 모라비아도 합스부르크의 영지로 삼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인드르지흐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케른텐 원수 아우펜슈타인의 콘라트와 콘라트의 형제 하인리히가 이끄는 80명의 기사를 보헤미아로 초대해 쿠트나 호라와 프라하 성 수비를 맡겼다. 그러나 이 조치는 보헤미아 귀족들이 케른텐 인사들이 보헤미아를 사유화하려 든다는 의심을 품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인드르지흐는 다가오는 전쟁에 대비하고자 1310년 2월 프라하에서 마이센 변경백 겸 튀링겐 방백 프리드리히 1세와 상호방위 협약을 체결하고, 그 대가로 리토메르지체, 모스트, 로우니, 멜니크를 줌으로써 북부 보헤미아 대부분에 대한 마이센 변경백의 통치를 보장했으며, 자신이 한동안 왕국을 떠날 때 프리드리히 1세가 섭정을 맡으며, 자신이 자식 없이 죽으면 프리드리히 1세가 안나와 결혼하고 보헤미아 왕위를 물려받기로 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는 마이센군을 보헤미아로 파견해 그를 도왔다. 인드르지흐는 여기에 더해 엘리슈카가 하인리히 7세의 아들 요한과 결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를 마이센 남작인 베르고보의 오토와 강제로 결혼시키려 했다. 그러나 엘리슈카는 이를 따르지 않기로 결심하고, 1310년 5월 28일 비밀리에 프라하를 탈출해 비셰흐라드로 도주했다. 당시 보헤미아의 정권에 참여했지만 인드르지흐에게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배신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바르텐베르크의 얀이 엘리슈카를 비셰흐라드에서 맞이한 뒤 그녀가 보헤미아를 떠나 하인리히 7세의 궁정에 갈 수 있게 해줬다.
1310년 6월 중순, 하인리히 7세의 군대가 보헤미아 국경을 넘어 프라하로 진군했다. 이들은 곧 프라하 성 앞에서 마이센-케른텐 연합군과 격돌해 완승을 거두고 프라하를 장악했다. 그는 프라하 성채에 숨어서 저항을 이어갔지만, 하인리히 7세에게 뇌물 공세를 받은 많은 보헤미아 귀족들은 1310년 7월 25일에 열린 프랑크푸르트 제국 의회에 대표단을 파견해 하인리히 7세의 아들 요한이 9월 1일에 엘리슈카와 결혼하고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로 등극하는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맹세했다. 또한 제국 의회는 인드르지흐가 보헤미아 영토를 불법적으로 통치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마이센 변경백 프리드리히 1세는 이에 맞서 인드르지흐를 돕기 위해 아들 프리드리히 2세가 이끄는 또다른 군대를 파견해 쿠트나 호라를 탈환했고, 리히텐부르크의 올드르지흐 등 일부 보헤미아 귀족들은 인드르지흐를 여전히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1310년 9월 초, 마이센군은 프라하를 포위하고 탈환 작전에 돌입해 9월 14일에 공략했다. 이후 인드르지흐가 프라하 성에 여전히 숨어 있는 동안, 마이센 변경백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사실상 보헤미아 왕국 전체를 장악했다. 10월 18일, 하인리히 7세가 급파한 룩셈부르크 본대가 보헤미아로 진입했고, 프라하 주교 데치체의 얀과 리파의 인드르지흐 등이 이들에게 귀순했다. 11월 19일, 룩셈부르크군은 쿠트나 호라를 포위 공격했지만 케른텐 원수 아우펜슈타인의 하인리히가 결사적으로 항전했기 때문에 공략에 실패했다. 이에 룩셈부르크군은 쿠트나 호라를 내버려두고 프라하로 진군해 11월 28일 그 앞에 진영을 세웠다. 그러나 프라하 공략도 실패했고, 겨울이 닥치면서 룩셈부르크 진영 내부에서 회의론이 강하게 일었다.
그러던 1310년 12월 3일 일부 프라하 시민들이 성문을 몰래 열어주자, 룩셈부르크군이 즉시 프라하 시내로 진입해 "평화, 평화, 평화!"를 외쳤다. 그들은 도시 전체를 장악하고 마이센인과 케른텐인을 쫓아냈다. 이제 더는 가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인드르지흐와 아내 안나는 자신들의 신변을 보장받고 티롤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대가로 항복을 선언하고 12월 9일 프라하를 떠났다. 하지만 그와 안나는 보헤미아 왕과 보헤미아 왕비라는 칭호를 포기하지 않았고, 보헤미아를 되찾으려는 기회를 노렸다.
그는 자신의 누이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가주인 프리드리히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를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과 화해하기를 원했다. 1311년 팟소 회의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45,000흐리브냐에 달하는 빚을 탕감해주기로 했고, 그는 이에 대한 대가로 크라인과 빈트 변경백국을 양도하기로 했다. 1312년 그동안 치른 전쟁으로 인한 재정 위기가 심각해지자 티롤 정부를 10명의 지방 관리들에게 넘기고 케른텐으로 갔다. 1313년 9월 3일 안나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깊은 충격을 받았고,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의 모든 교회에 매년 그녀의 기일에 그녀를 기념하는 미사를 지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1315년 티롤로 돌아가면서, 아우펜슈타인의 하인리히에게 케른텐을 통치하게 했다.
1313년 8월 24일, 하인리히 7세가 이탈리아 원정 도중에 열병에 걸려 사망한 뒤 열린 제국의회에서, 그는 룩셈부르크 가문 편에 섰던 오버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4세를 적대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를 독일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1314년에 열린 황제선거 결과, 오버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4세가 독일왕 루트비히 4세로 선출되었다. 루트비히 4세는 1321년에 그와 화해하기로 하고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의 여동생 마리아와 그를 결혼시키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얀 루쳄부르스키의 아내이며 자신을 미천한 귀족과 강제로 결혼시키려 들었던 그에게 적의를 품고 있던 엘리슈카의 강력한 반대로 실패했다.
그는 안나가 사망한 뒤 어떻게든 아들을 낳아서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 2차례 결혼했다. 1313년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 공작 하인리히 1세의 딸 아델하이트와 재혼해 두 딸 아들레타[4]와 마르가레테를 낳았다. 1320년 아들레타가 사망한 뒤, 그는 1328년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5세의 딸 베아트리체와 세번째로 결혼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1331년 10월 19일 자녀를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1330년, 자신의 딸 마르가레테와 얀 루쳄부르스키의 아들 요한 하인리히와 결혼시킴으로서, 룩셈부르크 가문과의 오랜 갈등을 종식했다. 이때 루트비히 4세는 그가 사망하면 마르가레테가 영지를 물려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과 비밀리에 협약을 맺고 그가 사망할 경우 티롤을 합스부르크 가문에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이후에도 결혼을 모색했지만 잘 되지 않다가 1335년 4월 2일에 뇌졸중에 걸려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가 죽은 직후,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와 형제 오토가 케른텐과 크라인을 장악했고, 마르가레테는 지역 귀족들의 지원 덕분에 티롤을 겨우 상속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363년 강한 압력에 시달린 끝에 알브레히트 2세의 맏아들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4세에게 티롤을 양도했다. 이리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은 케른텐, 크라인, 티롤을 손아귀에 넣음으로서 중부 유럽의 대표적인 대귀족 가문으로 부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