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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카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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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체코의 국영방송 체코 텔레비전 방송공사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위대한 체코인 100명을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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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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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 제3대 국왕
오타카르 1세
Otakar I
파일:Po1_postava.jpg
제호 체코어 오타카르 1세
(Otakar I)
출생 1155년
보헤미아 공국 프라하
사망 1230년 12월 15일(향년 75세)
보헤미아 왕국 프라하
재위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1192년 ~ 1198년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복위)
1297년 ~ 1298년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1198년 ~ 1230년
배우자 마이센의 아들레타 (1180년 결혼 / 1198년 결혼 무효)
헝가리의 콘슈탄치어 (1199년 결혼)
자녀 바츨라프 1세 외 12명
아버지 블라디슬라프 2세
어머니 튀링겐의 유디트
형제 베드르지흐, 아네즈카, 스바토플루크, 보이테흐,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 리치사 체스카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보헤미아 공작2.3. 보헤미아 국왕
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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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 3대 국왕.

2. 생애

2.1. 초년기

1155년경 보헤미아 공국 프라하에서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2세[1]와 튀링겐 변경백 루트비히 1세의 딸인 유디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친형제자매로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와 리치사 체스카가 있었고, 이복 형제자매로 베드르지흐, 아네즈카, 스바토플루크, 보이테흐가 있었다.

1172년, 블라디슬라프 2세는 큰아들 베드르지흐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넘겨주고 스트라호프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로서 말년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보헤미아 왕위 계승이 이뤄졌다는 소식에 진노해 베드르지흐에게 소환령을 내렸고, 베드르지흐는 감히 황제에 대적할 엄두를 못내고 이에 응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는 블라디슬라프 2세의 조치를 무효로 처리하고, 전임 보헤미아 공작 소베슬라프 1세의 아들 소베슬라프가 소베슬라프 2세로서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이복형 베드르지흐가 몰락하는 바람에, 오타카르 1세를 비롯한 블라디슬라프 2세의 자식들은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초기엔 어머니의 영지인 튀링겐에서 살았고, 그 다음엔 마이센에서 베틴 가문의 보호를 받았다. 1178년 베드르지흐가 보헤미아 공작위를 탈환하고 소베슬라프 2세를 해외로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웠고, 베드르지흐에 의해 올로모우츠 공작에 선임되었다. 또한 1180년에는 마이센 변경백 오토 2세의 딸인 마이센의 아들레타와 결혼했다.

1182년, 올로모우츠를 제외한 모라비아 전역을 지배하고 있던 콘라드 2세가 모라비아에서 반기를 일으켜 오타카르 1세를 올로모우츠에서 몰아내고 즈노이모, 브르노, 올로모우츠를 통합해 모라비아 전역을 통일시킨 뒤 프라하로 진격했다. 베드르지흐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달려간 뒤 도움을 호소했고, 황제는 베드르지흐가 보헤미아 공작을 계속 맡는 대신 콘라드 2세를 모라비아 변경백에 선임하고 보헤미아 공작으로부터 독립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1185년, 오타카르 1세가 이끄는 베드르지흐의 군대는 모라비아를 보헤미아의 지배하에 되돌리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이후 즈노이모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오타카르 1세와 콘라드 2세 모두 큰 손실을 입었고, 오타카르 1세는 철수해야 했다. 1186년, 양자는 크닌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콘라드 2세는 변경백 칭호를 유지하면서도 보헤미아 공작의 패권을 인정했으며, 베드르지흐의 후계자가 되었다. 1189년 베드르지흐가 사망하고 콘라드 2세가 보헤미아 공작이 된 후 2년간 통치하는 동안 그의 행적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2.2. 보헤미아 공작

1191년 9월 9일, 콘라드 2세가 나폴리를 공략하려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의 군대에 종군하던 중 페스트에 걸려 자식을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이에 소베슬라프 2세의 남동생이었던 바츨라프 2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프라하 주교 인드르지흐 브르제티슬라프는 이에 불복했고, 1192년 1월 하인리히 6세를 찾아가 블라디슬라프 2세의 아들인 오타카르 1세를 보헤미아 공작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하인리히 6세는 6,000 그리브냐 은화를 제공하겠다는 오타카르 1세의 약속에 따라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오타카르 1세를 보헤미아 공작, 오타카르 1세의 형제인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를 모라비아 변경백에 선임하기로 했다.

이후 오타카르 1세가 독일에서 용병대를 고용한 뒤 쳐들어오자, 바츨라프 2세는 프라하에서 몇달 동안 항전했지만 보헤미아 귀족들이 전부 오타카르 1세에게 귀순하자 결국 1192년 초 항복하고 자신을 도왔던 스피티네프와 함께 망명했다. 그러나 둘 다 도중에 오타카르 1세의 처남인 마이센 변경백 알브레히트 1세에게 체포되었다. 스피티네프는 감옥을 성공적으로 탈출했지만, 바츨라프 2세는 더 이상의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볼 때 그러지 못하고 옥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오타카르 1세가 약속했던 돈을 지불하길 꺼리면서 황제와 공작간의 갈등이 불거졌다. 여기에 1193년 브라반트 공작 하인리히 1세가 주도하는 반(反) 하인리히 6세 연합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하인리히 6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보헤미아 공작을 교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해 6월, 하인리히 6세는 인드르지흐 브르제티슬라프로부터 은화 6,000 흐리브냐를 받는 대가로 보헤미아 공작을 수여하기로 했다. 그해 8월, 인드르지흐는 독일군을 이끌고 보헤미아로 향했지만 주민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고, 오타카르 1세는 그를 물리치고자 보헤미아 귀족들이 이끄는 사병대를 집결시켜 진군했다.

그러나 즈디체 인근에서 양군이 대치했을 때, 오타카르 1세 휘하에 있던 귀족들이 대거 편을 바꾸는 바람에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오타카르 1세는 프라하로 도피했다. 그는 프라하에서 주민들의 열띤 호응을 받으며 1193년 성탄절까지 항전했지만, 결국 함락되기 직전까지 몰리자 처음엔 처남인 알브레히트가 다스리는 마이센으로 피신했다가 인드르지흐가 마이센을 공격하자 또다른 친척인 보겐 백작 알브레히트 3세에게 망명했다.

1197년 초, 인드르지흐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오타카르 1세는 이 기회에 공작위를 탈환하기로 하고, 5월에 보헤미아를 침공해 프라하까지 진군했지만 스피티흐네프와 보헤미아 귀족들에게 격퇴되어 재차 해외로 망명했다. 그 해 6월 15일 인드르지흐가 사망했고, 오타카르 1세의 친동생인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가 새 공작에 취임했다. 오타카르 1세는 이에 불복해 그해 12월 보헤미아로 쳐들어갔고, 블라디슬라프가 이에 응전하고자 출진하면서, 양자간의 무력 충돌이 임박했다.

하지만 동복형과 차마 피튀기는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 블라디슬라프는 프라하 주교 다니엘과 귀족들의 중재에 따라 오타카르 1세와 협상한 끝에, 1197년 12월 6일 오타카르 1세가 보헤미아 공작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대신 모라비아 변경백에 복위한다는 합의를 맺었다. 이리하여 오타카르 1세는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했다.

2.3.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1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했을 무렵, 호엔슈타우펜 가문 베틴 가문이 각각 필리프 오토 4세를 신성 로마 황제로 내세우며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는 이중 필리프 편에 섰고, 그를 돕기 위해 라인강으로 진군했다. 필리프는 오타카르 1세의 지원을 확실히 받아내기 위해 1198년 9월 또는 10월에 보헤미아 국왕 칭호를 내렸다. 이때 필리프는 보헤미아에서 선출된 사람은 누구나 신성 로마 제국에 소속된 보헤미아 국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며, 보헤미아 왕은 보헤미아에 소속된 주교들을 서임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이로써 오타카르 1세는 1172년 아버지 블라디슬라프 2세가 퇴위한 이래 26년만에 보헤미아 국왕 직위를 부활시키고 대대로 세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오타카르 1세는 필리프를 돕는 한편, 보헤미아 내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모라비아 지방의 브르노 영주로서 자신이 보헤미아 군주가 되는 것을 계속 막았던 스피티흐네프를 체포한 뒤 영지를 몰수하지 않는 대신 실명형에 처해 곧 죽게 만들었다. 스피티흐네프의 형제 스바토플루크는 1200년에 사망했는데,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오타카르 1세에게 암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올로모우츠 공작 브르제티슬라프의 아들인 시프리드는 본래 올로모우츠를 계승할 권리가 있었지만 모라비아 변경백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의 압력을 받고 성직자가 되었고, 나중에 올로모우츠 교구의 학장이 되었다. 이후 올로모우츠는 오타카르 1세가 직접 관리했고, 즈노이모와 브르노는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가 관리했다.

1198년, 오타카르 1세는 아들레타가 4촌 관계라는 이유로 결혼을 무효로 처리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199년 헝가리 국왕 벨러 3세의 딸인 콘슈탄치어와 결혼했다. 아들레타는 자식들을 데리고 베틴 가문의 영지에 망명한 뒤 자신의 아들 브라타슬라프의 계승권을 지켜내기 위해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항소했다. 교황은 프랑스 성직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보헤미아 공작'이 아내를 버리고 음란한 여자를 데려왔다며 비난했다.

1201년, 인노첸시오 3세는 브라운슈바이크의 오토를 유일한 로마 왕으로 선포하고, 오타카르 1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가 보헤미아 국왕이 되는 것을 공인하겠다고 약속했댜. 이에 오타카르 1세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에 등을 돌리고 오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에 필리프는 1203년 4월 동부 보헤미아 영주 디에폴트 3세에게 보헤미아를 봉토로 부여하는 등 오타카르 1세와 적대했다. 그해 5월, 오타카르 1세는 튀링겐에서 필리프의 군대를 직접 격파했다.

1203년 8월 24일, 그는 교황 특사인 프라이네스테의 귀도의 주관하에 치러진 대관식을 통해 보헤미아 국왕으로 등극했으며, 이전에 부여된 모든 왕실 특권을 확인받았다. 그는 이 참에 프라하 주교구를 대주교구로 승격시키려 했지만, 인노첸시오 3세는 이것만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사자바 수도원의 창시자 프로코프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1204년 후반기에 필리프가 반격을 개시해 벨프 가문이 쇠락해지자, 그는 입장을 바꿔 필리프를 지지했다. 또한 교황청과 화해할 길을 모색하던 필리프의 요구를 받아들여 아들레타를 잠시 받아들였다. 그러나 1205년 콘슈탄치어가 아들 바츨라프를 낳자, 그는 아들레타를 다시 추방했다. 1206년, 인노첸시오 3세는 부적합한 결혼에 대한 재판을 통해 오타카르 1세를 정죄했다.

1207년 12월 오타카르 1세의 2살된 아들 바츨라프와 필리프의 딸 쿠니군데가 약혼했다. 이리하여 보헤미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된 필리프는 신성 로마 황제로서 입지를 굳히는 듯했다. 그러나 1208년 6월 21일, 바이에른 궁정백인 비텔스바흐의 오토가 필리프를 암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리하여 보헤미아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 황실과의 인연이 끊어져버렸다. 1209년 10월, 베틴 가문이 내세웠던 오토 4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등극했다. 오토 4세는 오타카르 1세를 매우 냉담하게 바라봤고, 언젠가 그를 징벌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오토 4세의 정책에 발끈한 인노첸시오 3세가 1210년 11월 18일에 파문을 선고하고 선제후들에게 새로운 황제 선거를 열라고 요구하고 이에 호응한 독일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오토 4세는 보헤미아에 더는 신경쓸 수 없게 되었다.

1211년 봄, 오타카르 1세는 마인츠 대주교 시기프리드, 튀링겐 변경백 헤르만,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6세,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1세와 함께 반(反) 오토 4세 연합을 결성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오타카르 1세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로 하고, 때마침 아들레타가 사망하자 오타카르 1세와 콘슈탄치어의 부부 관계를 합법화하고 그가 두 결혼에서 낳은 모든 자녀 역시 합법적인 자식으로 규정했다. 9월 초, 반 오토 4세 연합은 뉘른베르크로 가서 시칠리아 국왕 프리드리히 2세를 로마 왕으로 추대했다. 1212년 초 독일에 도착한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을 옹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그에게 큰 보상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1212년 9월 26일, 프리드리히 2세는 오타카르 1세와 모라비아 변경백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에게 시칠리아 왕의 황금 인장으로 봉인된 3개의 문서를 보냈다. 일명 <시칠리아의 황금 황소>로 명명된 이 문서는 신성 로마 제국 내 보헤미아 국왕와 보헤미아 왕국의 지위를 정했다. 오타카르 1세는 이 문서를 통해 자신과 후계자들이 왕위를 세습하는 것을 인정받았고, 보헤미아 귀족들이 왕을 자율적으로 추대하는 것이 인정되었으며, 프라하와 올로모우츠 주교를 서임할 수 있었고, 보헤미아 영토를 침범받지 않을 권리도 인정받았다.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는 오타카르 1세를 주군으로 받드는 것을 인정받았고, 모라비아 변경백국 전체에 대한 통치 역시 인정받았다.

이리하여 보헤미아 왕국의 입지를 굳힌 뒤, 오타카르 1세는 내치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독일인들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독일인들이 정착한 곳에 '독일법'을 도입했으며, 특별 판사를 두는 걸 허용했다. 또한 모라비아에서 브룬탈, 유니초프, 오파바, 글루브치체 등 여러 도시가 세워졌고, 보헤미아에서도 즈노이모, 젬니체, 흐라데츠 크랄로베 시가 건설되었다. 이들 도시들은 대체로 독일에서 이주한 이들로 구성되었고, 마그데부르크 법이 그대로 도입되었다.

1214년 다니엘 주교가 사망한 후, 프라하 교장 온드르제이가 오타카르 1세에 의해 프라하 주교로 서임되었다. 그는 초기에는 오타카르 1세에게 복종했지만, 1215년 11월 22일에 열린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 참석한 뒤 교회를 세속 권력으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는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고 보헤미아에 실천하려 했다. 오타카르 1세가 주교구의 재산에 간섭하는 걸 그만두라는 요청을 거부하자, 온드르제이는 1216년 말 로마로 떠난 뒤 프라하 교구에 대한 성무 금지령을 선포하고, 오타카르 1세와 보헤미아 귀족들이 교회의 권리와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보헤미아에서 십일조의 징수가 불충분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평신도가 주교의 승인 없이 사제에 임명되고 있고, 세속 법원이 성직자를 처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촉발된 분쟁은 수년간 질질 끌다가 1222년 초 사크라 호라에서 오타카르 1세, 주교들, 교황 특사 그레고리 드 크레센시오 및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많은 성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 타협안이 마련되면서 마무리되었다. 1222년 3월 10일 오타카르 1세가 프라하에서 발표한 '보헤미아 교회의 대특권'에 따르면,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왕이나 법원 판사의 심판을 받고, 사형이 아닌 범죄의 경우 총리의 심판을 받아야 했다. 단, 세속 영주들은 교회 영지에서 숙련된 신민을 받을 수 없었으며, 군대와 귀족은 수도원의 동의가 있어야만 수도원 영지를 이용할 수 있었고, 수도원은 더 이상 전투에 나가는 왕실군을 재정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수도자들은 성, 해자 건설 등의 노동 의무를 수행하지 않아도 되었고, 왕은 수도원장과 다른 교회 고위 인사들의 조언을 귀담아들어야 했다. 오타카르 1세와 교황 호노리오 3세 모두 이 협약에 만족을 표했지만, 온드르제이는 생명이 위협받을 것을 우려해 프라하로 돌아가지 않고 로마에 계속 머물렀다.

오타카르 1세는 온드르제이 주교와 논쟁을 벌이는 것과 동시에 후계자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아들레타와의 사이에서 낳은 큰아들 브라티슬라프가 마이센 친척들의 지원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콘슈탄치어와의 사이에서 낳은 바츨라프 왕자의 계승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문제가 생기기 전에 후계 구도를 확실히 하기로 마음 먹었다. 1216년 6월 8일, 프라하에서 열린 왕실 의회에서, 오타카르 1세는 바츨라프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와 보헤미아 귀족 대표자들이 왕의 선택을 받아들였고, 프리드리히 2세 역시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1216년 7월 26일 바츨라프가 보헤미아를 세습받는 것을 받아들였다.

1222년 8월 12일 동생이자 모라비아 변경백이었던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가 사망했다. 이후 오타카르 1세의 아들 블라디슬라프가 모라비아 변경백에 지명되었다. 그는 황실과의 유대를 강화시키기 위해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하인리히 7세와 자신의 딸 아네슈카 체스카를 결혼시키려 했다. 두 사람간의 약혼이 성립되었고 막대한 지참금이 보헤미아에서 지급되었지만, 하인리히 7세는 보헤미아가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것을 경계한 아버지의 지령에 따라 돌연 약혼을 깨고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6세의 딸 마르가레테와 결혼했다.

오타카르 1세는 레오폴드 6세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렸기 때문에 결혼이 성사되지 못한 거라 여기고 1226년 오스트리아를 침공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2세가 개입해 화해를 종용했고,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 후 아네슈카는 평생 결혼하지 못하고 수녀가 되었고, 프린치스코회 수도원을 프라하에 세우고 빈민 구제 활동을 몸소 이끌었다.

1227년 모라비아 변경백을 맡던 아들 블라디슬라프가 사망하자, 오타카르 1세는 또다른 아들 프르셰미슬을 모라비아 변경백에 선임했다. 1230년 12월 15일에 사망했고, 프라하의 성 베드로 성당에 안장되었다가 나중에 성 비타 대성당으로 이정되었다. 사후 바츨라프 1세가 보헤미아의 새 국왕으로 등극했다.

3. 가족



[1] 1158년부터 1172년까지 보헤미아 국왕을 칭했다. [2] 훗날 성 아네슈카 수도원으로 개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