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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5년 ~ 1102년 | ||
<colbgcolor=#ff0000><colcolor=white> 위치 | 크로아티아 대부분[2],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대부분 | |
수도 | 닌, 비오그라드, 솔린, 크닌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왕 | |
언어 | 중세 크로아티아어, 슬라브어, 라틴어 | |
종족 | 크로아티아인 등 | |
종교 | 가톨릭 | |
주요 국왕 |
토미슬라브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 드미타르 즈보니미르 페타르 스나치치 |
|
성립 이전 | 크로아티아 공국 | |
멸망 이후 | 크로아티아-헝가리 동군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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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크로아티아 공국은 통치자 토미슬라브 공이 서기 925년 교황 요한 10세로부터 국왕으로 승인받으면서, 크로아티아 왕국으로 거듭났다.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대부분 지역[3]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해당하는 지역을 다스렸으며, 1102년 이후 헝가리 왕국과 동군연합을 이루게 된다.2. 역사
925년, 교황 요한 10세는 크로아티아 공국의 지배자 토미슬라브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때 요한 10세는 "크로아티아의 왕(rex)"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이에 크로아티아의 가톨릭 사제이자 역사가, 정치인인 프라뇨 라치키(Franjo Rački, 1828 ~ 1894)는 토미슬라브가 925년 즈음에 왕을 자처했다고 주장했다. <두클랴 성직자 연대기>는 토미슬라브가 달미 들판에서 동로마 황제게 보내준 왕관을 쓰고 대관식을 거행했다고 기술했다. 크로아티아 역사가, 정치가이자 크로아티아 고고학의 창시자인 이반 쿠쿨예비치 사크친스키(Ivan Kukuljević Sakcinski, 1816 ~ 1889)는 대관식 장소는 'Duvanjsko polje(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남서부의 카르스트 지역 고원 지대)'일 거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교황은 그를 왕으로 인정했지만 동로마 제국은 '임시로' 달마티아 테마를 관리하는 것만 받아들였고, 왕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추정한다.토미슬라브는 923년과 928년 사이에 하부 판노니아와 달마티아를 크로아트 왕국의 영역에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세운 왕국의 지리적 범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달마티아, 판노니아, 북부 및 서부 보스니아 대부분을 포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는 <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De administrando imperio)에서 크로아티아가 기병 60,000명과 보병 100,000명을 배치할 수 있었으며, 각각 최대 40명의 선원이 탑승하는 80척의 대형 선박과 각각 10~ 20명의 선원이 탑승하는 100척의 소형 선박을 보유했다고 기술했다. 학계에서는 이를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하지만, 토미슬라브 치세 당시 마자르족과 불가리아 제1제국을 물리쳤던 걸 볼 때, 크로아티아의 군사력이 동로마 제국 입장에서 절대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건 사실이라고 본다. 또한 콘스탄티노스 7세는 크로아티아에는 닌, 비오그라드, 벨리신, 스크라딘, 흘리예브노, 스텁, 크닌, 코리, 클로북 등 인구가 많은 도시들이 여럿 있으며, 크로아티아 상인들은 네레트바 지역과 달마티아 만의 항구에서 베네치아까지 항해한다고 기술했다.
토미슬라브는 928년 이후 더이상 언급되지 않았고, 트르피미르 2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 그의 기원에 대해 문치미르의 아들이자 토미슬라브의 남동생이라는 설과 토미슬라브의 아들이라는 설이 병립하지만, 기록이 미비해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그는 영토 확장에 주력했던 토미슬라브와는 달리 별다른 군사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토미슬라브 치세 때 불가리아 제1제국이 달마티아 테마를 공략하는 걸 막기 위해 크로아트 왕국이 달마티아의 주권을 행사하는 걸 인정했지만, 트르피미르 2세 치세 때는 불가리아 제1제국이 시메온 1세 사망 후 확장 정책을 중단하면서 달마티아가 위험에서 벗어나자 도로 제국의 관할로 넘겼다. 하지만 달마티아 일대의 실질적인 통치는 여전히 크로아트 왕국에 의해 주도되었다.
935년 트르피미르 2세가 사망한 뒤, 아들 크레시미르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콘스탄티노스 7세는 <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에서, 크레시미르 1세는 크로아트 왕국의 군사력을 유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945년 크레시미르 1세가 사망한 뒤 장남 미로슬라브가 뒤를 이은 직후 또다른 아들인 미하일로 크레시미르 2세가 프리브나 반의 지지를 받으며 반란을 일으키면서 크로아티아 전역이 내란에 휘말렸다. 이로 인해 군대는 크게 약해졌고, 해군은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며, 변경 지역들은 잇따라 이탈했다. 브라치, 흐바르, 비스 섬은 네레트바 족의 지도하에 독립했고, 달마티아 섬과 해안 도시들은 동로마 제국에 합류했고, 보스니아 동부(현재 사라예보 주변 지역) 및 크로아티아의 일부 공국은 세르비아의 대공이자 동로마 제국의 봉신인 차슬라프에게 넘어갔다.
949년, 미하일로 크레시미르 2세가 프라브나 반의 지원에 힘입어 미로슬라프를 처단하고 크로아트의 새 국왕에 등극했다. 그 후 그는 크로아티아의 권력을 어느정도 회복했다. 내전 당시 떨어졌던 보스니아 동부 지역인 우스코플라예, 루카, 플레바를 파괴해 보스니아 전역을 복종시켰으며, 969년 이탈리아 몬테 가르가노 반도 인근에서, 크로아티아 해군이 사라센 해적과의 해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한편, 미하일로 크레시미르 2세는 옐레나 슬라브나라는 여인과 결혼했는데, 일각에서는 자다르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인 마디예바츠 가문 출신이라고 추정하지만 기록이 희박해서 불확실하다.
969년 미하일로 크레시미르 2세가 사망한 뒤, 아들 스테판 드르지슬라브가 왕위에 올랐지만 나이가 어려서 어머니 옐레나가 섭정을 맡았다. 그녀는 976년 10월 8일에 사망할 때까지 왕국을 통치하면서, 솔린에 성당 두 채를 세웠는데, 하나는 크로아티아 왕들의 무덤 역할을 했던 성 스테파노 성당이고, 다른 하나는 1070년대 초까지 대관식 장소로 쓰인 성모 마리아 성당이었다. 어머니 사후 실권을 잡은 스테판 드르지슬라브는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 사무일이 동로마 제국의 바실리오스 2세와 전쟁을 치르면서 세력을 키우는 상황에 직면했다.
사무일은 보스니아, 스리젬, 세르비아, 세티나 강 남쪽 아드리아 해 연안 전체로 통치를 확장해 두클랴, 트라부니야, 자후믈례, 네레트바 일대를 장악했다. 이후 여세를 몰아 크로아티아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스테판은 이에 맞서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기로 했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바실리오스 2세는 986년에서 990년 사이에 스테판이 자신과 동맹을 맺은 것에 보답하고자 달마티아 총독으로 선임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역사가들은 스테판에게 그런 권한이 내려진 사실은 없다고 본다. 또한 스플리트의 토마스 대주교에 따르면, 스테판은 동로마 황제로부터 인정의 표시로 왕실 휘장과 'reges Dalmatie et Chroatie(달마티아와 크로아티아의 왕)'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996년, 베네치아 총독 피에트로 2세 오르세올로는 1세기 동안 아드리아해 연안에 대한 안전한 통행을 보장받기 위해 크로아트 왕국에 납부했던 세금을 더 이상 내지 않기로 했다. 이에 크로아트 왕국은 네레트비아인과 함께 비스에서 바도라이 브라가딘이 이끈 베네치아 함대와 맞붙었으나 참패했고, 비스 섬 주민들의 대부분이 포로로 전락했다. 일부 학자들은 베네치아가 그 해에 이리 나온 건 스테판이 이미 죽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통상적으로 그의 사망 년도로 알려진 997년이 아니라 996년에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확실한 기록은 없다.
스테판 드르지슬라브는 장남 스베토슬라브 수로냐에게 'dux Hroatorum(흐로트족의 지도자)' 칭호를 내리고 공동 통치자로 세웠다. 여기에 또다른 두 아들 크레시미르 3세와 고이슬라브도 각자 특징 지역의 반(Ban)으로서 통치하도록 했다. 그러나 996년 또는 997년 스테판이 사망한 후, 스베토슬라브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통치를 행사했다. 996년, 베네치아 도제 피에트로 2세 오르세올로는 1세기 동안 아드리아해 연안에 대한 안전한 통행을 보장받기 위해 크로아트 왕국에 납부했던 세금을 더 이상 내지 않기로 했다. 이에 크로아트 왕국은 네레트비아인과 함께 비스에서 바도라이 브라가딘이 이끈 베네치아 함대와 맞붙었으나 참패했고, 비스 섬 섬 주민들의 대부분이 포로로 전락했다. 일부 학자들은 베네치아가 그 해에 이리 나온 건 스테판이 죽었고, 크로아트 왕국이 내전에 휘말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큰형 스베토슬라브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자, 이에 반감을 품은 두 형제는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 사무일과 동맹을 맺고 그를 축출하기로 했다. 사무일은 자신의 최대 적수인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 스베토슬라브를 전복하는 걸 도와주기로 하고, 998년 크로아티아를 침공해 스플리트, 트로기르, 자다르까지 공략한 뒤 보스니아와 라슈카를 거쳐 불가리아로 돌아갔다. 사무일은 자기가 점령한 크로아티아 영역을 두 형제에게 넘겼다.
1000년, 피에트로 2세 오르세올로는 스플리트, 트로기르, 비오그라드 등 해안 도시들과 크르크, 크레스, 라브, 코르출라, 라스토보 섬 주민들의 보호 요청에 따라 그곳을 빠르게 접수했다. 여기에 자다르도 네레트바의 크로아티아인들이 998년 자다르 시민 40명을 생포한 뒤 베네치아의 보호를 받아들였다. 그 후 스베토슬라브 수로냐는 크레시미르 3세와 고이슬라브 형제에게 축출되어 베네치아로 망명했다. 크레시미르 3세와 고이슬라브는 크로아트 왕국의 공동 왕이 되었고,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빼앗긴 달마티아를 탈환하기 위해 몇 차례 무력 원정을 벌여 1018년까지 오소르(Osor), 크르크(Krk) 및 라브(Rab) 등 섬 지역을 제외한 달마티아 일대를 탈환했다.
1018년 불가리아 제1제국이 바실리오스 2세에게 멸망한 뒤, 바실리오스 2세가 양자간의 대립을 중재했다. 불가리아를 정복하면서 발칸 반도의 패권을 확립한 동로마 제국을 감히 거역할 수 없었던 두 형제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고, 동로마 제국의 가신이 되었다. 1020년 고이슬라브가 사망하면서, 크레시미르 3세가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1027년, 베네치아 공화국과 헝가리 왕국은 스베토슬라브 수로냐의 아들인 스테판 스베토슬라비치를 지원해, 그가 크로아티아 동부 일대를 장악하는 걸 도왔다. 그 후 스테판 스베테슬라비치의 후손들은 슬라보니아 공작을 대대로 자처하면서, 크로아티아 국왕을 명목상 주권자로 받들면서도 광범위한 자치를 누렸다.
1030년 크레시미르 3세가 사망한 뒤, 아들 스테판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초기에 크로아티아 해군 재건에 전념했으며, 1032년 사라센 해적과 전쟁을 치르는 동로마 제국 해군을 도왔다. 그는 이 조치를 통해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베네치아 공화국의 달마티아 침탈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방지하기를 희망했다. 1035년, 케른텐 백작 아달베로는 스테판 1세와 동맹을 맺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를 상대로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이 음모는 발각되었고, 1035년 5월 18일 밤베르크 제국의회는 아달베로의 모든 관직과 영지를 몰수했다. 한편, 스테판 1세는 1035년에 동로마 황제 미하일 4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사촌인 도브로냐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그러나 스테판이 동로마 제국의 동맹국인 베네치아 공화국과 전쟁을 벌이자, 동로마 황실은 도브로냐를 투옥했고, 결국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옥사했다.
1042년, 두클랴 대공 스테판 보이슬라프가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반기를 든 이래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면서 세르비아 전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에 동로마 제국은 스테판 보이슬라프가 더 이상 세력 확대하는 걸 저지하기 위해, 크로아티아의 반(Ban)인 스테판 프라스카를 명예 사령관으로 선임해 달마티아 수비를 맡게 했다. 스테판은 명목상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일했고, 나중에 자다르에 정착했지만, 다른 해안 도시들이 스테판 1세의 통치를 받도록 주선했다.
1046년, 전 베네치아 도제 오토 오르세올로의 아들이자 스테판 1세의 조카인 피에트로 믈레차닌이 헝가리 국왕이었던 오르세올로 페테르 밑에서 일하다가, 오르세올로 페테르가 언드라시 1세의 반란군에 의해 폐위되자 크로아티아로 망명했다. 스테판 1세는 이때를 틈타 헝가리를 급습해 드리나 강 연안 까지 세력을 동쪽으로 확장했다. 그러나 1050년, 베네치아 도제 도미니코 콘타리니가 크로아트군이 헝가리 왕국 쪽으로 쏠린 틈을 타 달마티아 해안을 급습해 자다르를 공략했다. 한편, 스테판 1세는 라구사 공화국과 무역 협약을 맺고, 그들에게 해안가 영토 일부를 선물했다. 이에 따라 라구사는 라구사 시에서 16km 떨어진 자톤까지 확장되었고, 그 덕분에 식수 공급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스테판 1세는 오늘날 두브로브니크 시의 상업 항구인 그루즈 항구도 제공했다.
1058년, 스테판 1세가 사망했다. 당시 그에게는 장남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와 차남 고이슬라브가 있었는데, 두 사람이 공동으로 물려받기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고이슬라브는 얼마 안가 사망했는데, 이에 대해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가 형제를 살해했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코르출라 코덱스(Korčula Codex)>에 따르면, 교황 알렉산데르 2세는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가 형제를 살해한 것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마이나르드(Majnard)를 교황 특사로 파견했다.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12명의 장관과 함께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맹세했고, 교황청은 이를 받아들여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가 크로아트 국왕으로 군림하는 걸 받아들였다고 한다.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1054년 동서 대분열 이후 발칸 반도에서 가톨릭 전례를 추종하는 세력을 포섭하길 원하는 교황청과 협력했다. 1061년 마이나르드가 스플리트의 사보르 교회를 찾아왔을 때, 그는 고위 귀족들과 함께 맞이한 뒤 교황청의 입장을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교황청은 크로아티아 성직자들이 긴 수염과 머리 스타일, 결혼하는 것에 반대했고, 교회 예배에서 글라골 문자를 쓰지 말고 라틴어만 쓰라고 요구했다. 그는 이에 따랐고, 이에 반발한 크르크 체데다의 주교와 부크라는 사제를 탄압했다.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비오그라드 , 닌 , 시베니크, 카린 , 스크라딘 등 달마티아 해안 도시 및 섬들에 자신을 주권자로 인정하고 항구 수입의 1/3에 달하는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광범위한 특권을 부여해, 이들 도시의 발전을 도모했다. 그는 이들 도시가 벌어들이는 무역 수입 일부를 세금으로 받아내 권력 강화에 힘썼다. 또한 비오그라드에 성 요한 수도원(1060년)과 베네딕토회의 성 토마스 수도원(1066년)을 잇따라 설립하는 등 여러 수도원을 견설했고, 교회에 많은 땅을 기부했다. 또한 자다르에 있는 성모 마리아 수녀원에 헌장을 내렸는데, 이 수녀원의 창립자이자 초대 수녀원장은 그의 사촌인 치카였다.
1069년,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셀주크 제국을 상대로 사투를 벌이던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달마티아 테마의 최고 통치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이를 기회로 삼아 총독이나 에파크 등 제국의 호칭을 피하고, 자신의 영토를 '달마티아와 크로아티아 왕국(Regnum Dalmatiae et Chroatia)'이라고 칭했다. 동로마 제국은 이를 인정한 바 없었지만, 그는 이를 근거로 삼아 크로아티아 전역의 통일된 정치 및 행정권을 구사했다. 한편, 그의 친족이자 슬라보니아의 반(Ban)인 드미타르 즈보니미르는 1067년 크로아티아 왕국 북부를 침공해 크바르네르 일부와 이스트리아 반도 동부 해안을 점령하고 '달마티아 변경백'을 칭한 카르니올라 변경백 올리크 1세를 헝가리 국왕 게저 1세와 셜러몬의 지원하에 몰아냈다. 이에 페타르 크레시미르는 1070년에 자다르에서 발행한 3개의 헌장에서 드미타르를 "크로아티아의 반"이라고 칭하는 등 후계자로 공인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이 셀주크 제국에게 완패하면서 위상이 추락하자,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불가리아인과 두클랴 공국은 크로아트 왕국과 연계해 독립을 꾀했다. 동로마 제국은 두클랴 공자 콘스탄틴 보딘을 앞세워 반란을 일으킨 불가리아인의 반란을 간신히 진압한 뒤, 이 반란에 크로아트 왕국도 관여했다는 걸 알게 되자 이들을 견제하기로 했다. 동로마 제국의 지지자인 노르만 지도자이자 조비나초 백작 아미코는 동로마 제국의 의뢰에 따라 1074년 3월 19일 달마티아 해안을 침공해 스플리트, 트로기르, 비오그랃, 나모루, 자다르를 장악했다. 뒤이어 라브 섬을 4월 14일부터 5월 초까지 포위 공격했지만 공략하지 못했고, 5월 9일 크레스 섬을 공략했다.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아미코의 침략과 맞서던 중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생포되었다. 아미코는 1년 만에 베네치아 공화국이 파견한 함대에 축출되었지만,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그 전에 이미 사망했다. 자세한 경위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노르만족의 포로로 지내던 중 사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크로아트 귀족들의 추대를 받고 왕위에 오른 드미타르 즈보니미르는 아미코를 축출한 뒤 달마티아 해안을 장악한 베네치아 공화국에 대항하려면 교황령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주교 서임권 분쟁을 벌이고 있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이에 교황은 1075년 또는 1076년 9월, 특사 게비존과 풀콘 주교를 크로아티아에 파견했다.
드미타르는 두 주교에게 교황에 충실하겠으며, 교황이 왕관을 분배하고 영토 소유권을 승인할 권리가 있다는 그레고리오 7세의 주장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이에 게비존은 1075년 또는 1076년 10월 8일 일요일에 솔린의 성 스테파노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그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왕홀과 검, 그리고 교황 깃발을 건넸다. 그는 대관식 이전에는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 공작(Croatiae Dalmatiaeque dux)'으로 칭해졌지만, 대관식 후에는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의 국왕(Croatiae Dalmatiaeque rex)'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 후 드미타르는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 정책을 도울 것이며, 교황에게 매년 십일조를 바치겠으며, 인신매매를 막고 빈민과 과부, 고아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브라나에 있는 성 그레고리오 수도원을 교황 특사를 위한 호스피스로 제공했다.
그리하여 교황청의 인정을 받은 뒤, 드미타르는 크닌에서 집권하며 경제와 문화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크닌 인근의 비스쿠피야에 대성당을 세웠고, 크르크 섬의 바슈카에 있는 성 루치아 수도원에 영지를 제공했다. 1079년 하인리히 4세의 가신인 이스트리아 귀족 베셀린과 소규모 접전을 치렀고, 로베르 기스카르가 발칸 반도에 상륙해 동로마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연합과 맞붙었을 때 로베르 기스카르를 지원했다. 1083년, 로베르 기스카르는 크로아티아인의 지원에 힘입어 동로마-베네치아 함대를 격파하고 두라스 시를 점령했으며, 1084년에는 코르푸 섬 인근에서 베네치아 함대를 크게 격파했다.
드미타르 즈보니미르는 헝가리 왕 게저 1세의 누이인 옐레나 리예파와 결혼해 아들 라도반과 딸 클라우디아(Klaudija)[4]를 두었다. 그러나 외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였던 라도반이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했다. 1089년경 드미타르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로 사망했다. 전승에 따르면, 드미타르는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로부터 예루살렘을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해방하는 원정에 가담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크닌 인근의 비스쿠피야에서 의회를 소집했다가 귀족들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16세기 이후의 문헌에서나 등장하기에 신빙성이 없고, 학자들은 1089년 9월 8일 스테판 2세 국왕 헌장과 13세기 연대기 작가인 토마스 대주교의 <히스토리아 살로니타나(Historia Salonitana)>의 기록 대로 자연사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드미트라 즈보니미르 사후,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의 남동생 고이슬라브의 아들로, 오랜 세월 스플리트의 성 스테판 수도원에 수도사로 활동하던 스테판 2세가 귀족들에 의해 수도원에서 꺼내진 뒤 크로아트 국왕에 옹립되었다. 그 후 2년간 잠자코 지내다가 1091년경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채 사망했다. 스테판 2세 사후, 귀족들간의 왕위 분쟁이 벌어졌다. 이에 드미트라 즈보니미르의 미망인이자 헝가리 국왕 라슬로 1세의 누이인 엘레나 리예파가 오빠에게 크로아트 왕위를 이어받으라고 권고했고, 라슬로 1세는 이에 호응해 크로아트 왕국으로 진군해 사바강 북쪽에 위치한 슬라보니아를 점령하고 크로아트의 왕을 칭했으며, 자기 조카인 알모스 왕자에게 크로아트 영토의 관리를 맡겼다.
하지만 네레트바의 통치자 슬라비츠는 이에 반발해 지르노브니차 강 동쪽 지역을 장악하고 1095년 사망할 때까지 크로아트 국왕을 자처했고, 여러 크로아티아 귀족들은 라슬로 1세가 쿠만인들의 헝가리 침공에 맞서 군대를 물린 틈을 타 1093년 페타르 스나치치를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페타르 스나치치는 크닌을 통치했으며, 달마티아 해안 도시와 사바와 드라바 강 사이의 영역을 다스렸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알모스 왕자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추정하지만, 이를 입증할 근거는 없다. 크로아트 국왕이 쓰는 왕관인 '즈보니미르의 왕관'은 스플린드 대주교 로브라가 손에 쥐고 있었고, 그에게 넘기길 거부했기에 취하지 못했다.
1095년 라슬로 1세가 사망한 후 왕위에 오른 헝가리 국왕 칼만은 크로아트 왕위를 쟁취하기로 마음먹고, 1097년 크로아트 왕국으로 진군했다. 그 해 4월 말 또는 5월 초, 칼만의 헝가리군과 페타르 스나치치의 군대가 그보즈드 산 북쪽 기슭에서 맞붙었고, 페타르 스나치치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훗날 크로아티아인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그보즈드 산을 '페트로바 고라'로 개명했다. 그 후 칼만은 헝가리군을 이끌고 아드리아해에 도달해 비오그라드를 공략했다. 헝가리군의 위협을 받은 트로기르, 스플리트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할 테니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베네치아 도제 비탈레 2세 미켈레가 이끄는 해군이 함대를 이끌고 달마티아에 접근했다. 베네치아의 원군이 당도하자 함대가 따로 없었던 칼만은 도제에게 협상을 요청했고 협상 결과, 헝가리가 크로아티아 해안 지역을 가지는 대신 달마티아 섬들은 베네치아가 갖기로 했다.
이후 칼만은 드넓은 헝가리 왕국을 경영하느라 바빠서 크로아트 귀족들을 무력으로 일일이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1102년 비오그라드 나 모루에서 크로아티아 12개 부족 대표자들을 팍타 수도원에서 접견한 뒤, 그들이 거의 독립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특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크로아트 국왕을 겸임하는 걸 승인받았다. 칼만은 1102년 비오그라드에서 크로아트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고, 이때부터 크로아티아와 헝가리의 동군연합이 확립되었다.
3.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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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트 국왕 · 크로아티아 국왕 | }}}}}}}}}}}}}}} |
- 토미슬라브(925 ~ 928): 910년부터 925년까지 크로아티아 공국의 반(Ban). 925년 교황 요한 10세로부터 크로아트 국왕으로 인정됨.
- 트르피미르 2세(928 ~ 935)
- 크레시미르 1세(935 ~ 945)
- 미로슬라브(945 ~ 949)
- 미하일로 크레시미르 2세(949 ~ 969)
- 스테판 드르지슬라브(969 ~ 997)
- 스베토슬라브 수로냐(997 ~ 1000)
- 크레시미르 3세(1000 ~ 1030), 고이슬라브(1000 ~ 1020): 공동 국왕.
- 스테판 1세(1030 ~ 1058)
-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1058 ~ 1074)
- 드미타르 즈보니미르(1074 ~ 1089)
- 스테판 2세(1089 ~ 1091)
- 헝가리 국왕 라슬로 1세(1091 ~ 1095)
- 페타르 스나치치(1093 ~ 1097)
1097년 페타르 스나치치가 헝가리 국왕 칼만과 그보즈드 산 전투에서 맞붙었다가 패사한 뒤 1102년 칼만이 크로아트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하면서 헝가리 왕국과 1918년까지 동군연합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