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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2E2F2F> 두클랴 Дукља Διόκλεια |
||
10세기 ~ 1186년 | ||
<colbgcolor=#EAEAEA> 위치 |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 |
수도 | 바르, 슈코더르 | |
정치체제 | 군주제 | |
국가원수 | 크냐지(Knyaz) → 국왕 → 크냐지 | |
주요 크냐지 및 국왕 |
요반 블라디미르(1000~1016) 스테판 보이슬라프(1019~1043) 미하일로 1세(1046~1081) 콘스탄틴 보딘(1081~1099) 미하일로 3세(1163~1186) |
|
언어 | 고대 세르비아어 | |
종교 | 정교회 | |
종족 | 세르비아인 |
언어별 명칭 | |
세르보크로아트어 | Дукља |
그리스어 | Διόκλεια |
라틴어 | Diocle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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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남슬라브 국가. 서쪽의 코토르 만에서 동쪽의 보야나 강, 북쪽의 제타 강과 모라차 상류까지 현재의 몬테네그로 남동부 일대를 지배한 국가. 10세기에 동로마 제국 기록에서 처음 언급된 이 나라는 초기엔 불가리아 제1제국의 가신이었고, 이후 동로마 제국의 가신이었다가 1040년 스테판 보이슬라프의 지도하에 동로마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었다. 이후 미하일로 1세 치세에 왕국을 칭하고 콘스탄틴 보딘 치세까지 세르비아 전역을 석권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콘스탄틴 보딘 사후 심각한 내란에 휘말려 쇠락하다가 1186년 세르비아 대공 스테판 네마냐에게 병합되었다.2. 어원
일부 역사가들에 따르면, 두클랴의 명칭은 포드고리차에서 닉시치까지의 지역에 거주했던 일리리아 부족 도클레아티(Docleati)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다른 학자들은 오늘날의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코소보를 포괄하는 로마 제국의 속주인 프라이발리타나(Praevalitana)의 행정 수도인 도클레아(Doclea)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가 집필한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는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건설된 디오클레아 시를 차지했기 때문에, 그 나라의 주민들은 디오클레티아노이(Διοκλnetτιανοι)라고 일컬어졌다.
13세기 <살로니타나의 역사(Historia Salonitana)>를 집필한 가톨릭 신부이자 달마티아 연대기 작가인 토마스 아르키디아코누스(Thomas Archidiaconus)는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
현재 세르비아 또는 라쉬카라고 불리는 땅에서, 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물 옆에 도시를 건설했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디오클레아라고 붙였다.
3. 역사
3.1. 초기 역사
11세기 이전 두클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초기 남슬라브인들이 건설한 국가들에 관한 주요 사료는 콘스탄티노스 7세가 집필한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인데, 이 저서에서는 슬라브족이 두클랴 일대에 정착했고, 동로마 황제가 이들의 주권자가 되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았다. 학자들은 10세기 후반 이전에는 두클랴에 독립된 정치 체제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동로마 제국은 디오클레아, 바르, 코토르 등 해안 도시와 그 주변의 내륙 지역을 간접 지배했다.1884년, 프랑스 출신의 <비잔틴 연구회> 소속 화폐학자 귀스타브 슐룸베르거(Gustave Schlumberger, 1844 ~ 1929)는 옛 두클랴 지역에서 납 인장을 발견했다. 이 인장에는 아래의 그리스 문구가 새겨졌다.학자들은 이 인장이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 9세기 후반부터 10세기 후반까지 다양하게 추정했는데, 현재는 문체적 특징에 대한 비교 분석을 통해 10세기에 제작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스카다르 호수 인근의 오블룬(Oblun) 요새에서 페타르의 또 다른 인장을 발견했다. 이 인장은 너비 17mm, 두께 3mm로, 청동으로 제작되었다. 앞면에는 성 게오르기우스의 그림이 새겨졌고, 뒷면에는 아래의 그리스어 문구가 새겨졌다.
Κύριε βοήθει τῷ σῷ δούlamῳ Πέτρ.
주님, 당신의 종 페타르를 구원하소서.
학자들은 이 인장 역시 10세기에 제작되었다고 보면, 두 인장의 주인인
페타르는 동로마 제국에 충성을 바치는 대가로 두클랴에서 자치권을 행사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2세기 후반에 집필된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언급된
요반 블라디미르의 아버지이자 두클랴
크냐지인 페트리슬라프와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제기되나 불확실하다.주님, 당신의 종 페타르를 구원하소서.
1000년경 두클랴의 크냐지로 군림한 요반 블라디미르는 아드리아 해안가의 바르에 중심을 둔 궁정을 세우고 두클랴를 통치했다. 당시 발칸 반도에서는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 제1제국간의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 황제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 차르 사무일을 무찌르기 위해 다른 발칸 통치자들의 지원을 열심히 구했는데, 그중엔 세르비아 통치자들도 있었다. 대 라브라 수도원이 993년에 헌장에는 992년 세르비아 외교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방문한 사실이 기재되었는데, 이들이 두클랴에서 파견되었을 수도 있다.
1004년 또는 1005년, 바실리오스 2세는 사무일로부터 아드리아 해 연안의 주요 거점이며 두클랴의 남쪽에 있는 디라히온을 탈환했다. 여기에 디라히온의 북쪽과 남쪽의 해안 지역도 통제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은 블라디미르가 이끄는 두클랴와 접촉할 수 있었다. 블라디미르는 동로마 제국의 비호를 받고 옛 세르비아 공국의 영역을 탈환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010년, 불가리아 차르 사무일은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으려 하는 두클랴를 응징하기로 결의했다. 사무일의 불가리아군이 쳐들어오자, 블라디미르는 군대 및 많은 백성을 데리고 스카다르 호수의 남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오블룬 요새에서 농성했다.
사무일의 군대 일부는 오블룬 언덕을 포위했고, 나머지는 디라히온 인근 해안 도시인 울치니를 공격했다. 블라디미르는 초기엔 항복을 거부했지만, 결국 항복했다. 두클랴 연대기는 그의 백성을 기근과 칼로부터 구하기 위해 부득이 항복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두클랴 귀족들이 불가리아군에 연이어 항복하자 저항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 투항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 후 블라디미르는 마케도니아 서부에 있는 사무일의 수도 프레스파의 지하감옥에 수감되었다. 사무일은 동로마 제국 함대의 지원을 받는 울치니 공략에 실패하자, 달마티아로 방향을 돌려 토르를 공략하고, 뒤이어 두브로브니크를 공격해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주변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또한 크로아티아를 침공하여 스플리트, 트로기르, 자다르까지 공략한 뒤 보스니아와 라슈카를 거쳐 불가리아로 돌아갔다.
프레스파의 지하감옥에 수감되었던 블라디미르는 곧 풀려난 뒤 사무일의 딸인 테오도라 코사라와 결혼했다. 두클랴 사제 연대기는 두 사람의 결혼 과정을 낭만적으로 묘사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사무일이 자기 딸과 블라디미르를 결혼시킨 건 전적으로 정치적인 결정일 거라고 추정한다. 즉, 블라디미르가 딸과 결혼하면 자기에게 전적으로 충성하는 가신이 될 것이며, 세르비아 지역에 대한 불가리아의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는 것이다. 사무일은 딸과 결혼한 블라디미르를 두클랴로 돌려보냈다.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사무일은 디라히온 전체를 넘겨줬다고 한다. 디라히온은 동로마 제국의 확고한 영토로 남았으니 이는 과장이겠지만, 사무일이 점거한 세르비아 영역을 돌려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사무일에게 밀려났던 그의 삼촌이자 트라부니야와 자후믈레의 통치자 드라기미르도 사무일에게 충성을 서약한 뒤 빼앗겼던 영지를 돌려받았다.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블라디미르는 아내 코사라와 함께 "모든 거룩함과 순결함 속에서 살았고, 신을 경배하고 밤낮으로 섬겼으며, 정의로운 방식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다스렸다"고 한다. 블라디미르가 사무일의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은 듯하나, 사무일에게 별다른 반항하지 않고 가신으로서 충성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1014년, 사무일이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바실리오스 2세의 동로마군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한 뒤 10월 6일에 참패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망했다. 장남 가브릴 라도미르가 뒤이어 차르가 되었지만, 1015년 사촌인 이반 블라디슬라프가 가브릴 라도미르를 살해하고 차르가 되었다.
그 후 이반 블라디슬라프는 블라디미르에게 사절을 보내 프레스파 궁정에 출석하라고 명령했다. 요반 블라디미르는 이에 응해 프레스파로 갔지만, 1016년 5월 22일 도착하자마자 교회에 들어가서 기도했다가 나오던 중 블라디슬라프가 보낸 병사들에게 참수되었다. 동로마 역사가 요안니스 스킬리치스에 따르면, 불가리아 대주교 다비드가 그에게 블라디슬라프의 맹세를 전했고, 그는 이를 믿고 프레스파로 찾아갔다가 피살되었다고 한다. 살인 동기는 불분명한데, 몇몇 학자들은 동로마 제국과 손잡고 불가리아를 협공할 것을 우려해 살인을 감행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요반 블라디미르는 사망한 지 얼마 안 되어 "병자들이 그의 무덤에서 기도하면 각종 질병이 고쳐졌다"는 근거로 세르비아 정교회로부터 성인이자 순교자로 인정받았고, 5월 22일이 그의 축일로 지정되었다. 세르비아 정교회 신자들은 매년 오순절에 벨지 미쿨리치에 있는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 예배드린 뒤, 요반 블라디미르의 상징인 '성 요반 블라디미르의 십자가'를 짊어진 안드로비치 가문의 일원을 앞세워 1,593m 높이에 달하는 루미자 산 정상에 등반한다. 이때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은 절대로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지 않아야 하며, "나는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노래를 부른다.
3.2. 스테판 보이슬라프
1016년 요반 블라디미르가 불가리아 차르 이반 블라디슬라프에게 살해되었고, 1017년 이반 블라디슬라프도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 도중 전사했다. 이에 트라부니야와 자후믈례의 통치자이자 요반 블라디미르의 삼촌인 드라기미르가 1018년 상반기에 두클랴를 장악하기 위해 출진했다. 그가 코토르에 이르렀을 때, 이 도시 주민들은 보카 코토르스카(Boka Kotorska) 에 있는 작은 섬에서 잔치를 준비했다. 드라기미르는 자기를 위해 잔치를 베풀어주겠다는 주민들의 말을 믿고 부하 몇 명과 함께 잔치에 참여했다가 코토르인들에게 피살당했다. 이후 아들 스테판 보이슬라프가 그의 직위를 계승했고, 1019년경에 동로마 제국의 가신으로서 두클랴 크냐지에 선임되었다.보이슬라프는 라구사의 스트라테고스인 카타칼론 클라조메니테스와 자주 교류했다. 한번은 카타칼론이 보이슬라프가 자신의 아들 카타칼론의 대부가 되어주길 원해 보이슬라프 일행을 모셔오기도 했다. 보이슬라프는 훗날 자신이 납치당한 거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초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듯 동로마 관리들과 긴밀한 관계를 이어갔지만, 그는 내심 두클랴를 언젠가 독립시키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1025년 명군 바실리오스 2세가 사망한 뒤, 동로마 제국은 정국 혼란으로 점점 쇠약해졌고, 과도한 세금에 분노한 불가리아에서 폭동이 빗발치면서 산골짜기에 위치한 두클랴에 대한 통제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보이슬라프는 이 기회를 틈타 추종자들을 끌어들였고, 1034년 로마노스 3세 황제가 급사하여 제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1035년 또는 1036년 진압군에게 붙들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졌고, 두클랴는 스트라테고스 테오필로스 에로티코스의 관할에 들어갔다. 1037년 말 또는 1038년 초, 보이슬라프는 탈옥에 성공하여 두클랴로 돌아갔다. 이후 반군을 극비리에 끌어모았고, 동로마 제국에 우호적이던 자후믈례와 트라부니야 공국에 대한 유격전을 전개했다. 1040년경, 그의 영역은 북쪽의 스톤에서 남쪽의 스카다르까지 해안지대에 펼쳐졌고, 트레비네, 코토르, 바르에 독자적인 통치기관이 세워졌다.
1039년 동로마 제국의 남이탈리아 속주에서 테살로니키로 운송되던 10켄테나르의 금(7,200 노미스마타)이 배에 실려 운송되던 중 폭풍우를 만나 해안가에 난파되었다. 그는 재빨리 그것을 회수하여 자기 것으로 삼았다. 미하일 4세는 이 소식에 격노하여 게오르기오스 프로바타스 장군에게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동로마군은 협곡에 섣불리 들어갔다가 보이슬라프의 군대에게 섬멸되었다. 그 후 불가리아인들이 1040년 페터르 데얀을 차르로 선포하고 제국에 맞섰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은 이들을 진압하느라 두클랴에 대한 별다른 공세를 벌이지 못했다.
보이슬라프는 공세를 이어가 자후믈례와 트라부니야 공국의 대부분을 공략했다. 이에 콘스탄티노스 9세는 다라키움과 주변 테마에 기반을 둔 동로마군을 파견하여 두클랴를 공격하기로 했다. 1042년 10월, 파리스트리온 테마의 스트라테고스인 미하일 아나스타시오스가 대군[1]을 이끌고 두클랴로 진격했다. 보이슬라프는 이 소식을 접하자 장병 및 주민들과 함께 산악 지대로 피신했고, 동로마군은 텅빈 두클랴로 진입해 약탈을 자행했다.
요안니스 스킬리치스의 <시놉시스 히스토리온>에 묘사된 삽화.
이윽고 충분한 전리품과 포로를 모았다고 여긴 미하일은 달마티아로 이동했다. 그러다가 동로마군이 바르 협곡에 이르러 그곳에 야영했을 때, 보이슬라프가 새벽녁에 진영 주변 고지에서 진영을 향해 화살과 돌을 쏟아부어 깊은 잠에 빠졌던 적군을 대거 사살했고, 병사들에게 큰 소리를 지르고 나팔을 요란하게 불도록 했다. 이에 동로마군은 실제보다 훨씬 많은 적병이 쳐들어왔다고 여기고 동요한 나머지 가져가던 모든 전리품과 포로를 내팽개치고 도주했다. 보이슬라프는 패주하는 적병을 추격해 대거 사살했다. 그렇게 바르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 물러난 동로마군은 더 이상 두클랴를 향한 대규모 원정을 벌이지 못했다.
1042년, 라쉬카의 주판이자 자후믈례의 크네츠인 류도비드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막대한 금과 은을 받고, 두클랴의 보이슬라프를 타도하라는 의뢰를 수락했다. 류도비드는 1043년 군대를 일으켜 두클랴를 침공했지만, 코나블리의 클로불크 언덕에서 매복을 당해 참패했다. 보이슬라프는 곧바로 반격을 가해 자후믈례, 트라부니야, 그리고 디라히온 테마 일부 지역을 석권했다. 이렇듯 동로마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하던 보이슬라프는 1043년경 사망했고, 궁전 인근에 있는 성모 마리아 교회에 묻혔다.
3.3. 두클랴 왕국
보이슬라프는 생전에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 사무일의 조카로 알려진 네다와 결혼해 다섯 아들 고지슬라프, 미하일로 1세, 사가네크, 라도슬라프, 프레디미르를 낳았다. 두클랴 연대기에 따르면, 보이슬라프가 사망한 뒤 고지슬라프와 프레디미르는 트라부니야와 그르발지 교구를 상속받았고, 미하일로 1세는 오블리크, 프라프라트나, 크름니카 교구를 상속받았으며, 사가네크는 고르스카, 쿠펠니크, 발레크를 받았고, 라도슬라프는 루카, 포들루지예, 쿠체포 등지를 상속받았다. 또한 아내 네다가 여성 크냐지가 되었고, 그녀의 아들들은 가신이 되었다고 한다. 네다는 1043년부터 1046년까지 통치했고, 그녀가 사망한 뒤 미하일로 1세가 뒤를 이어 두클랴 크냐지가 되었다.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미하일로 1세의 형제 고지슬라프는 프레디미르의 침대에서 자던 중 스크로비메지지(Skrobimezi)라는 사람들에게 피살되었다. 그 후 그들은 도마네크(Domanek)라는 인물을 트라부니야의 통치자로 옹립했다. 미하일로 1세와 형제들은 이 사실을 알고 즉시 트라부니야로 쳐들어가 도마네크를 몰아냈지만, 그들이 돌아가자 도마네크가 다시 트라부니야로 돌아와 통치했다. 이에 미하일로 1세는 형제 라도슬라프에게 권고했다.
"네가 트라부니야로 단독으로 가서 도메네크를 끝장낸다면, 너의 상속인이 제타 지역을 상속하게 해주겠다."
이에 라도슬라프는 도마네크를 공격해 처단하고 자후믈례 일대를 정복했다. 그러나 미하일로 1세는 라도슬라프와 했던 맹세를 이행하지 않고 제타를 아들 블라디미르에게 넘겼다. 1051년 또는 1052년, 미하일로 1세는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토대로 형제들을 복종시키고 두클랴 전역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1052년에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프로토스파타리우스(Protospatarius: 테마 제도에 종속된 테마의 총사령관) 칭호를 받았다. 이후 1060년에서 1065년 사이, 블라디미르와 그의 형제들은 라쉬카를 정복했고, 페트리슬라프가 라쉬카를 통치했다. 동로마 제국 측 기록에 따르면, 미하일로 1세는 코토르 역시 아내로 삼은 동로마 귀족 여성의 지참금으로 받았다고 한다.
이후 수십년간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데, 현대 학자들은 그가 그 기간 동안 동로마 제국 지도층과 긴밀하게 교류하며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받고, 내정을 다지고 각지를 통제하는 데 힘을 기울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러던 1072년, 포모라블제와 포바르다르제에서 불가리아 총독 니키포로스 카란테노스의 심한 수탈을 견디다 못한 불가리아인들이 게오르기 보이테흐를 지도자로 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미하일로에게 자신들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다. 미하일로는 아들 콘스탄틴 보딘을 불가리아의 차르로 추대하라고 요구했고, 보이테흐는 흔쾌히 수락했다.
1072년 가을, 미하일로는 보딘에게 300명의 군대를 맡기고 프리즈렌으로 보냈다. 이후 그곳에서 게오르기 보이테흐를 비롯한 반란 주동자들을 만났다. 보이테흐 등은 보딘을 불가리아의 차르로 선포하고 '페터르'로 개명시켰다. 보딘은 자기 할머니 네다가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 사무일의 조카인 걸 근거로 삼아,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몸으로서 불가리아인을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선전했다. 니키포로스 카란테노스는 군대를 이끌고 프리즈렌을 향해 진격했지만 전투를 벌이기 전에 교체되었다.
이후 반란군은 두 부대로 나뉘었다. 한 부대는 페터르 3세 보딘이 직접 통솔하여 니시로 진격했고, 두 번째 부대는 보이보다 페트릴로의 지휘하에 오흐리드를 거쳐 카스토리아로 진격했다. 페트릴로는 오흐리드와 데볼을 전투 없이 점령했지만, 카스토리아에서 슬라브 출신의 동로마 장군 보리스 다비트에게 패퇴했다. 한편 페터르 3세 보딘은 니시로 진군하면서 진군로 주변의 모든 것을 약탈했고, 니시에 도착하자마자 복종하지 않은 자들을 죽이거나 고문했다. 또한 로마에 사절을 보내 정교회가 아닌 가톨릭을 따르겠다고 선언하여 교황의 지지를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미하일 사란테스 휘하의 동로마군이 스코페를 포위했고, 보이테흐는 항전을 포기하고 도시를 내주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고 페터르 3세 보딘에게 속히 스코페로 와달라고 청했다. 보딘은 곧장 그곳에 가다가 타오니오스에서 동로마군의 기습으로 붙잡혔다. 그 후 페터르 3세 보딘은 쇠사슬에 묶인 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고, 성 세르지오 수도원에 감금되었다가 안티오키아로 추방되었다. 보이테흐 역시 모든 게 발각되면서 체포 후 가혹한 고문을 받은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되던 중 사망했다. 미하일로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동로마 장군이며 자신의 딸과 결혼한 랑고바르도풀로스에게 사람을 보내 아들을 중도에서 납치하여 자신에게 데려와달라고 요청했다. 랑고바르도풀로스는 그 요청에 따랐지만, 동로마군에게 패퇴했다.
1077년, 미하일로는 두클랴 국왕을 칭했다. 이후 1078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부터 "슬라브인의 왕(Michaeli Slavorum regi)"으로 인정하겠다는 서신을 받았다, 한편, 1078년 미하일로에게 포섭된 베네치아 선원들이 안티오키아로 추방되었던 콘스탄틴 보딘을 구출해 미하일로에게 보냈다. 1081년 미하일로 1세가 사망한 뒤, 콘스탄틴 보딘이 두클랴의 제2대 국왕이 되었다. 그 해 봄, 아풀리아 일대 노르만족 지도자 중 한 명인 바리의 아르카리스의 딸 자퀸타 바리스카와 결혼했다.
1081년 10월, 로베르 기스카르가 아드리아 해를 건너와 디라히온을 포위했다. 보딘은 동로마 제국과의 합의에 따라 동로마 제국에 지원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기에 군대를 이끌고 디라히온 인근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전투를 관망하기만 하다가 동로마군이 패배하자 즉시 자국으로 돌아갔다. 안나 콤니니는 그를 " 달마티아의 군주"라고 칭하면서, 알렉시오스 1세와 동맹을 맺고 로베르 기스카르의 노르만군을 저지했지만 이후 노르만인들이 동로마 영토 깊숙이 진군하는 걸 방치하는 등 불안정한 동맹자였다고 서술했다.
1082년, 트라부니야와 자후믈례를 통치하던 그의 숙부인 라도슬라프와 갈등을 벌였지만 바르 주교 페타르의 중재로 화해했다. 1083년 또는 1084년에 동로마 제국이 노르만족과 전쟁을 벌이느라 정신 없는 틈을 타 라쉬카를 정복했고, 뒤이어 보스니아를 공략했다. 이후 이복형제 페트리슬라프의 두 아들이자 자기 조카인 부칸 1세와 마르코를 라쉬카의 주판(župan)으로 선임했고, 친척인 스테판을 보스니아의 크냐지로 선임했다. 여기에 더해 알바니아 남부를 지속적으로 공략했고, 1085년 로베르 기스카르가 사망한 뒤 남부 이탈리아로 철수하는 노르만인들로부터 디라히온을 넘겨받았다.
1089년 1월 8일, 보딘은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로부터 두클랴 국왕으로 인정하겠다는 서신을 받았으며, 두클랴의 주요 성직자인 바르 주교 페타르가 대주교로 승격되는 교서 역시 수령했다. 그러나 얼마 후, 동로마 제국이 두클랴를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처남인 요안니스 두카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은 디라히온으로 진군해 그곳을 탈환한 뒤 디라히온의 스트라테고스로 선임되었다. 1090년, 요안니스 두카스는 보딘과 맞붙어 대승을 거두었고, 보딘은 일시적으로 체포된 뒤 디라히온 테마의 모든 영토를 동로마 제국으로 반환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 그의 입지는 급격히 위축되어 두클랴 및 아드리아 해 연안만 직접 통제할 수 있었다. 반면, 그에 의해 라쉬카 주판에 선임되었던 조카 부칸 1세는 그로부터 독립한 뒤 동로마 제국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면서 입지를 다진 끝에 세르비아 내륙 지역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보딘이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은 직후, 아내 자퀸타는 아들 미하일로 2세의 계승을 방해할 수 있는 모든 친척을 죽이기로 했다. 삼촌 라도슬라프의 아들인 브라니슬라프, 고지슬라프, 프레디흐나가 슈코더르에 있던 그를 알현했을 때, 보딘은 자퀸타의 선동에 따라 그들을 체포해 감옥에 가뒀다. 라도슬라프의 다른 아들들은 이 소식을 전해듣고 400명의 무장병과 함께 라구사 공화국으로 망명했다. 이에 보딘은 라구사를 공격하기로 했다.
보딘의 군대는 라구사를 포위했지만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자기가 총애하는 신하가 전사한 것에 격분한 자퀸타는 남편을 설득해 브라니슬라프, 고지슬라프, 프레디흐나를 성벽 앞에서 참수하도록 했다. 그러자 라구사 성벽 내부에서 동요가 일어났고, 일부 수비대는 항복하는 걸 진지하게 고려했다. 라구사에 망명했던 보딘의 친척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스플리트로 망명했다가 다시 아퀼레리아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배를 갈아타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동했다.
보딘은 곧 라구사에 입성하고 도시 근처에 요새를 건설한 후 슈코더르로 귀환했다. 12세기 라구사 시를 묘사한 한 그림에는 도시 성벽 바로 맞은편 해안에 위치한 보디노 요새(Rocca di Bodino)가 표시되어 있다. 이 요새는 라구사 사람들이 스르지 산기슭 방향으로 발칸 반도 본토로 향하는 통로를 폐쇄했으며, 요새와 도시 성벽 사이에는 다리가 있었다. 익명의 라구사 연대기 작가는 이 요새 건설은 보스니아 크냐지 스테판의 공이라고 기술했는데, 이로 볼 때 스테판도 보딘의 부름을 받고 라구사 공방전에 참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096년, 제1차 십자군 원정을 떠나던 십자군이 달마티아를 통과하던 중 두클랴를 지나갔다. 이때 십자군 지도자들은 보딘과 접견해, 십자군이 보딘의 병력에 의해 방해받지 않으며 식량과 기타 필수품을 제공받는다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다. 이때 툴루즈 백작인 생질의 레몽 4세는 그와 개인적으로 친분을 맺고 풍부한 선물을 제공했다고 전해진다.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보딘은 26년 5개월간 통치하다 슈코더르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한때는 이 기록이 그가 두클랴 국왕이 된 1081년부터의 햇수라고 여겨져 1107년에 사망했다는 설이 우세했지만, 현재는 그가 1072년 9월 또는 10월 불가리아 차르로 추대되었을 때부터 추산해 1099년 초에 사망했을 거라는 설이 우세하다. 이후 두클랴 왕국은 심각한 내란에 휩쓸리며 쇠락의 길에 들어섰다.
3.4. 쇠락
1099년경 콘스탄틴 보딘이 사망한 뒤, 보딘의 장남 미하일로 2세가 어머니 자퀸타 바리스카에 의해 두클랴 제3대 국왕에 옹립되었다. 그러나 남편 보딘의 친족들을 자기 자식의 승계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모조리 죽이거나 해외로 추방한 자퀸타에게 반감을 품은 무리가 얼마 안가 보딘의 이복형제인 도브로슬라프를 앞세워 반란을 일으켜 미하일로 2세를 타도했다. 이후 두클랴 제4대 국왕이 된 도브로슬라프는 3년간 통치를 행사했지만, 1102년 라쉬카에 군림하며 세르비아 대공을 칭하던 부칸 1세의 지원을 받은 또다른 왕위 주장자 코차파르와 맞붙었다가 모라차 전투에서 참패하고 생포된 뒤 라쉬카로 이송되었다.그 후 부칸 1세는 코차파르를 두클랴의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코차파르는 부칸 1세의 간섭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통치하려 했고, 이로 인해 둘의 동맹은 끊어졌다. 1103년, 부칸 1세는 재차 군대를 파견해 코차파르를 몰아내고 코차파르의 친족인 블라디미르를 두클랴의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블라디미르는 부칸 1세의 딸과 결혼해 입지를 강화했으며, 1106년 부칸 1세가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 지원군을 보냈다. 그러나 1113년 콘스탄틴 보딘의 미망인인 자퀸타 바린스카가 차남 도르제 보디노비치를 왕위에 올리기로 마음먹고 그를 독살했다. 자퀸타는 지난날 장남 미하일로 2세를 폐위한 전력이 있었으며, 도르제 보디노비치가 왕위에 오르는 데 방해가 될 잠재적 경쟁자인 도브로슬라프 마저 체포해 감옥에 집어넣고 거세하고 실명형에 처한 뒤 슈코더르의 성 페타르 수도원으로 보냈다.
어머니 자퀸타 덕분에 왕위에 오른 도르제 보디노비치는 잠재적인 왕위 경쟁자들을 모조리 제거하기 위해 친척들을 모조리 제거하려 했다. 이에 그루베샤, 드라기냐, 드라길로는 아드리아해 연안의 해안도시이자 동로마 제국의 요충지인 디라히온으로 피신해 그곳에서 망명 생활하던 삼촌 고지슬라프의 집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루베샤는 도중에 체포되어 스칸다르에 감금되었다. 1118년,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2세는 칼로얀 쿠만에게 군대를 맡겨 고지슬라프와 함께 두클랴를 침공하게 했다. 도르제는 이들과 맞서싸웠으나 패배하여 대다수 병력을 잃고 일부 측근만 데리고 라쉬카로 탈출했다. 그 후 동로마군은 스칸다르에 수감되었던 그루베샤를 풀어준 뒤 두클랴의 왕으로 세웠다. 한편, 도르제의 어머니 자퀸타는 동로마군에 체포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된 후 그곳에서 사망했다.
동로마 제국의 지원으로 왕위에 오른 그루베샤는 7년간 통치했지만, 1125년 세르비아 대공 우로시 1세의 지원을 받으로 두클랴로 쳐들어온 도르제 보디노비치를 상대하다가 바르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리하여 복위한 도르제 보디노비치는 그루베샤의 두 형제 드라기나, 드라길로와 화해했고, 제타 일부 지역을 영지로 수여했다. 그러나 그루베샤의 또다른 형제인 그라디냐는 그에게 복종하지 않고 라쉬카로 피신했다. 얼마 후, 도르제는 우로시 1세가 친척들에 의해 지하 감옥에 보내지자,드라길로의 조언에 따라 자신을 복위하는 데 크게 기여한 우로시 1세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라쉬카로 진군해 우로시 1세를 성공적으로 구출하고 복위했다. 그라디냐는 자후믈례로 탈출한 뒤 디라히온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도르제는 친척들이 자기를 또다시 몰아내려고 음모를 꾸민다고 의심했고, 그들을 어떻게든 배제하고 싶어했다. 그는 전 왕 블라디미르의 아들 미하일로와 드라길로를 체포해 감옥에 보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드라기나는 세 아들 프로보시, 그루베시, 네마냐와와 함께 디라히온으로 피신했다. 그라디냐는 디라히온으로 피신한 친족들과 함께 힘을 합치고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아 두클랴를 침입해 브란지나 및 바르 일대를 공략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군 수장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되면서, 모든 작전은 중단되었다.
그 후 그라디냐가 오블리크 요새에 머물자, 도르제는 요새를 즉시 포위해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디라히온의 새 스트라테고스로 부임한 알렉시오스 콘토스테파노스가 구원군을 이끌고 급습하자 크름니카로 피신했다. 이후 알렉시오스는 바르로 귀환하면서 그라디냐와 일부 병력을 오블리크 요새에 남겨줬다. 1131년 코토르에서 반란이 일어나 두클랴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혼란이 심해지자, 그라디냐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공세를 벌였다. 도르제는 오볼론 요새에 숨었고, 그라디냐는 이 요새를 제외한 전역을 정복했다. 그 후 알렉시오스의 동로마군 마저 가세해 오볼론 요새를 압박하자, 도르제는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한 뒤 디라히온 감옥에 이송되었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된 후 그곳의 지하감옥에서 옥사했다.
동로마 제국의 지원 덕분에 도르제 보디노비치를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그라디냐는 동로마 제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왕위를 10여 년간 이어갔다. 하지만 라쉬카와 보스니아 지도자들은 그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라쉬카 대공 우로시 1세는 1130년 자기 딸 옐레나를 헝가리 왕위 계승자 벨러 2세와 결혼시킴으로써 헝가리 궁정과의 관계를 강화했고, 보스니아는 벨러 2세와 엘레나의 아들인 게저 2세의 통치를 받았다. 1143년 그라디냐가 사망한 뒤, 아들 라도슬라프 그라디슈니치가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의 승인을 받고 집권했지만, 왕이 아니라 크냐지로서 계승했으며, 두 형제 로바르, 블라디미르와 함께 영토를 분할했다. 그러나 그가 보유한 영역은 두클랴와 교외 지역 뿐이었고, 세르비아 대부분은 라쉬카 대공 우로시 1세가 통치하다가 두 아들 우로시 2세, 데사로 분할되었다.
데사는 1143년에서 1149년 사이에 동로마 제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두클랴 귀족들의 지지를 받으며 라도슬라프와 그의 형제들을 밀어내고 두클랴 시를 점거했고, 라도슬라프와 두 형제는 코토르 주변으로 이동한 뒤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명맥을 유지했다. 1149~1150년,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가 세르비아를 향한 2차례 원정을 단행해 우로시 2세를 복종시켰다. 뒤이어 데사를 압박해 두클랴를 떠나게 한 후 라도슬라프를 다시 두클랴의 크냐지에 앉혔다. 이후 세르비아 전역이 우로시 2세와 데사 간의 패권 다툼에 휘말리는 동안, 라도슬라프는 두클랴에서 조용히 지냈다.
1163년경 라도슬라프 그라디슈니치가 사망한 뒤 아들 미하일로 3세가 뒤이어 크냐지에 선임되었다. 그의 영역은 두클랴와 인근 지역에 국한되었고, 동로마 제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명맥을 이어갔다. 1180년경 두클랴 교회의 수장인 바르 대주교 그르구르 바르스키가 스플리트 대교구의 정경에 보낸 보고서에서 라쉬카 대공 스테판 네마냐가 바르 주변 들판이 황폐화되었음에도 800명에 달하는 인부를 보내달라고 요구한다고 불평했으며, 미하일로 3세가 두클랴 교회를 지켜주지도 못하고, 추가 지원을 제공할 능력도 없다고 밝혔다.
그러던 1180년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가 붕어한 뒤 제국이 내란에 휘말리면서, 동로마 제국이 그를 도울 가망은 사라졌다. 1186년, 동로마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세르비아의 통합과 독립을 꾀한 스테판 네마냐는 두클랴를 무력으로 공략했다. 미하일로 3세는 아내 데시슬라바와 함께 라구사 공화국으로 망명했고, 스테판 네마냐는 장남 부칸을 두클랴 일대의 지배자인 제타 공작에 선임했다. 이리하여 두클랴는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4. 역대 통치자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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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슬라블예비치 왕조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
페타르 | 요반 블라디미르 | 스테판 보이슬라프 | 네다 | 미하일로 1세 | |
제6대 | 제7대 | 제8대 | 제9대 | 제10대 | |
콘스탄틴 보딘 | 미하일로 2세 | 도브로슬라프 | 코차파르 | 블라디미르 | |
제11대 |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
도르제 보디노비치 | 그루베샤 | 그라디냐 | 라도슬라프 그라디슈니치 | 미하일로 3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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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타르(10세기)
- 요반 블라디미르(1000 ~ 1016)
- 스테판 보이슬라프(1019 ~ 1043)
- 네다(1043 ~ 1046)
- 미하일로 1세(1046 ~ 1081): 1077년부터 슬라브족의 왕을 칭했다.
- 콘스탄틴 보딘(1081 ~ 1099)
- 미하일로 2세(1099)
- 도브로슬라프(1099 ~ 1102)
- 코차파르(1102 ~ 1103)
- 블라디미르(1103 ~ 1113)
- 도르제 보디노비치(1113 ~ 1118)
- 그루베샤(1118 ~ 1125)
- 도르제 보디노비치(1125 ~ 1131)
- 그라디냐(1131 ~ 1143)
- 라도슬라프 그라디슈니치(1143 ~ 1163): 크냐지 칭호로 돌아갔다.
- 미하일로 3세(1163 ~ 1186)
[1]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40,000 ~ 6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는 이를 과장된 수치로 간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