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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05 20:37:15

요반 블라디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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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0522D><colcolor=#fff> 두클랴 크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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Јован Владимир}}}
파일:요반 블라디미르.jpg
출생 990년
사망 1016년 5월 22일
재위 두클랴 크냐지
1000년경 ~ 1016년
아버지 페트리슬라프
배우자 테오도라 코사라

1. 개요2. 생애3. 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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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클랴 2대 크냐지. 동로마 제국 불가리아 제1제국의 틈바구니에서 주권을 쟁취하려 애썼지만 불가리아 제1제국에서 벌어진 변란에 휘말려 피살되었다. 사후 세르비아 정교회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2. 생애

12세기 후반에 집필된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990년경 두클랴 크냐지 페트리슬라프의 아들로 출생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페트리슬라프가 스카다르 호수 인근의 오블룬(Oblun) 요새에서 발견된 인장에서 언급된 페타르와 동일인물이라고 추정하지만 불확실하다. 1000년경 아버지의 뒤를 이어 두클랴 크냐지가 되었다. 당시 발칸 반도에서는 동로마 제국 불가리아 제1제국간의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 황제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 차르 사무일을 무찌르기 위해 다른 발칸 통치자들의 지원을 열심히 구했는데, 그중엔 세르비아 통치자들도 있었다. 대 라브라 수도원이 993년에 헌장에는 992년 세르비아 외교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방문한 사실이 기재되었는데, 이들이 두클랴에서 파견되었을 수도 있다.

1004년 또는 1005년, 바실리오스 2세는 사무일로부터 아드리아 해 연안의 주요 거점이며 두클랴의 남쪽에 있는 디라히온을 탈환했다. 여기에 디라히온의 북쪽과 남쪽의 해안 지역도 통제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은 블라디미르가 이끄는 두클랴와 접촉할 수 있었다. 블라디미르는 동로마 제국의 비호를 받고 옛 세르비아 공국의 영역을 탈환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010년, 불가리아 차르 사무일은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으려 하는 두클랴를 응징하기로 결의했다. 사무일의 불가리아군이 쳐들어오자, 블라디미르는 군대 및 많은 백성을 데리고 스카다르 호수의 남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오블룬 요새에서 농성했다.[1]

사무일의 군대 일부는 오블룬 언덕을 포위했고, 나머지는 디라히온 인근 해안 도시인 울치니를 공격했다. 블라디미르는 초기엔 항복을 거부했지만, 결국 항복했다. 두클랴 연대기는 그의 백성을 기근과 칼로부터 구하기 위해 부득이 항복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두클랴 귀족들이 불가리아군에 연이어 항복하자 저항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 투항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 후 블라디미르는 마케도니아 서부에 있는 사무일의 수도 프레스파의 지하감옥에 수감되었다. 사무일은 동로마 제국 함대의 지원을 받는 울치니 공략에 실패하자, 달마티아로 방향을 돌려 토르를 공략하고, 뒤이어 두브로브니크를 공격해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주변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또한 크로아티아를 침공하여 스플리트, 트로기르, 자다르까지 공략한 뒤 보스니아와 라슈카를 거쳐 불가리아로 돌아갔다.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블라디미르가 프레스파 감옥에 갇혀 밤낮으로 기도했을 때, 천사가 나타나 그가 곧 풀려나지만 얼마 안가 순교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또한 연대기는 사무일의 딸 테오도라 코사라와 그의 만남을 낭만적으로 묘사했다.
사무일의 딸 코사라는 행복한 영혼에 고무되어 영감을 받았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하인들과 함께 내려가 사슬에 묶인 포로들의 머리와 발을 씻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뒤, 그녀는 감옥으로 내려가 좋은 일을 했다. 그러던 중 블라디미르를 보고, 그녀는 그의 잘생긴 외모, 겸손, 온유함, 그리고 주님에 대한 지혜와 지식으로 가득찬 것에 깊은 호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의 말이 꿀과 벌집보다 더 달콤하다고 느겼다.

코사라는 아버지에게 블라디미르를 풀어주고 자기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사무일은 이를 수락했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사무일이 자기 딸과 블라디미르를 결혼시킨 건 전적으로 정치적인 결정일 거라고 추정한다. 즉, 블라디미르가 딸과 결혼하면 자기에게 전적으로 충성하는 가신이 될 것이며, 세르비아 지역에 대한 불가리아의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는 것이다. 사무일은 딸과 결혼한 블라디미르를 두클랴로 돌려보냈다.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사무일은 디라히온 전체를 넘겨줬다고 한다. 디라히온은 동로마 제국의 확고한 영토로 남았으니 이는 과장이겠지만, 사무일이 점거한 세르비아 영역을 돌려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사무일에게 밀려났던 그의 삼촌이자 트라부니야와 자후믈레의 통치자 드라기미르도 사무일에게 충성을 서약한 뒤 빼앗겼던 영지를 돌려받았다.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블라디미르는 아내 코사라와 함께 "모든 거룩함과 순결함 속에서 살았고, 신을 경배하고 밤낮으로 섬겼으며, 정의로운 방식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다스렸다"고 한다. 블라디미르가 사무일의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은 듯하나, 사무일에게 별다른 반항하지 않고 가신으로서 충성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1014년, 사무일이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바실리오스 2세의 동로마군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한 뒤 10월 6일에 참패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망했다. 장남 가브릴 라도미르가 뒤이어 차르가 되었지만, 1015년 사촌인 이반 블라디슬라프가 가브릴 라도미르를 살해하고 차르가 되었다.

이후 이반 블라디슬라프는 블라디미르에게 사절을 보내 프레스파 궁정에 출석하라고 명령했다. 코사라는 남편에게 가지 말라고 조언한 뒤 대신 프레스파로 향했다. 블라디슬라프는 그녀를 정중히 맞이하고 블라디미르에게도 오라고 재촉하면서, 안전한 통행을 보장하겠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황금 십자가를 보냈다. 두클랴 사제 연대기는 이에 대한 블라디미르의 답변을 아래와 같이 전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꼐서 황금 십자가가 아니라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믿음과 말씀이 모두 진실하다면, 성직자들의 손에 나무 십자가를 들려 보내십시오. 그러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확신에 따라, 나는 생명을 주는 십자가와 거룩한 나무에 대한 믿음을 가질 것이며,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그 후 주교 2명과 은둔자 한 명이 블라디미르에게 와서 나무 십자가를 주고 차르가 신앙을 걸고 맹세했다고 밝히자, 블라디미르는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가슴에 꼭 움켜쥔 뒤 추종자 몇 명과 함께 프레스파로 들어갔다. 그러나 1016년 5월 22일 도착하자마자 교회에 들어가서 기도했다가 나오던 중 블라디슬라프가 보낸 병사들에게 참수되었다. 동로마 역사가 요안니스 스킬리치스에 따르면, 불가리아 대주교 다비드가 그에게 블라디슬라프의 맹세를 전했고, 그는 이를 믿고 프레스파로 찾아갔다가 피살되었다고 한다. 살인 동기는 불분명한데, 몇몇 학자들은 동로마 제국과 손잡고 불가리아를 협공할 것을 우려해 살인을 감행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블라디미르의 유해는 프레스파에 묻혔다가, 2~3년 후 미망인 코사라가 두클랴로 옮겨서 스카다르스카 크라이나의 테오토코스 수도원에 안장했다. 코사라는 재혼하지 않았고, 사후에 남편의 곁에 묻혔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3. 시성

파일:성 요반 블라디미르의 십자가.jpg
성 요반 블라디미르의 십자가.

요반 블라디미르는 사망한 지 얼마 안 되어 "병자들이 그의 무덤에서 기도하면 각종 질병이 고쳐졌다"는 근거로 세르비아 정교회로부터 성인이자 순교자로 인정받았고, 5월 22일이 그의 축일로 지정되었다. 당시에는 특별한 시성식 없이 성인이 세워졌다. 그는 세르비아의 통치자로서 성인이 된 첫번째 인물이었다. 상징은 '성 요반 블라디미르의 십자가'로, 길이는 45cm, 너비는 38cm, 두께는 2.5cm이며, 하단에는 십자가를 착용할 때 막대가 삽입되는 황 동구가 끼워져 있다. 본래 스카다르스카 크라이나의 테오토코스 수도원 교회에 있다가 18세기에 크라지나의 이슬람화 과정에서 교회가 해체되자 정교회 신자인 안드로비치 가문에 맡겨졌다.

세르비아 정교회 신자들은 매년 오순절에 벨지 미쿨리치에 있는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 예배드린 뒤, 성 요반 블라디미르의 십자가를 짊어진 안드로비치 가문의 일원을 앞세워 1,593m 높이에 달하는 루미자 산 정상에 등반한다. 이때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은 절대로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지 않아야 하며, "나는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노래를 부른다.


[1]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오블룬 언덕을 오르던 중 독사에게 물렸지만 주님에게 기도를 드리자 독사에게 물린 상처가 사라졌다고 한다.